[내가 만난 名문장]아파도 사랑하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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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범 음악평론가·KBS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 MC
장일범 음악평론가·KBS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 MC
《어느 나이에도 사랑에는 당할 자 없지만 젊고 순결한 가슴에 사랑의 충동은 은혜로운 것, 봄날의 폭우가 들판에 양분을 주듯, 열정의 비를 맞으며 청춘은 힘을 얻고 되살아나고 여물어 간다. 그리고 왕성한 생명력은 화려한 꽃과 달콤한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나 늙고 무력해져 우리 인생의 전기를 맞으면 죽어버린 정열의 흔적이 서글프다. 스산한 가을 폭풍이 초원을 수렁으로 바꾸고 사방의 숲을 벌거벗기듯이.

―알렉산드르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중·번역 석영중》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던 1999년, 러시아 TV에서는 방송사 마이크를 들이대면 보통 사람들 누구나가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한 구절을 읊고, 소설 속 문장들을 외우는 장면이 매일같이 방송됐다. 바로 그해가 1799년에 태어난 푸시킨 탄생 200주년을 맞은 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문호가 있고 문학 교육이 잘된 러시아가 매우 부러웠다. 위의 구절은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 제7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청년 시절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녀들과 최고의 쾌락을 다 즐겼고, 이제는 노는 것조차 지겨워 인생에 허무함을 느끼는 귀족 청년 예브게니 오네긴이 삼촌의 시골 영지에 갔다가 친구 렌스키를 결투로 죽이게 된다. 이후 3년간 세상을 떠돌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계로 돌아온 오네긴. 돌아와 보니 그의 이름 앞으로 무도회 초청장이 와 있는 게 아닌가. 친척 그레민 공작의 무도회다.

오래간만에 무도회에 가서도 무료해하던 오네긴은 아름다운 그레민 공작 부인이 나타나자 깜짝 놀란다. 예전에 자신이 시골 영지에서 사랑을 거절했던 타티야나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오네긴이 타티야나에게 불현듯 사랑에 빠져 버리고, 타티야나가 그랬던 것처럼 절절한 사랑 고백의 편지를 쓰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로 이루어진 이 아름다운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다섯 번째 오페라로 선택했다. 그중 제3막에서는 바로 이 장면, 즉 소설 속에서는 화자가 하는 말을 오페라 속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돌아온 퇴역 장성인 그레민 공작이 등장해서 “오네긴, 내가 이 늙은 나이에 이렇게 타티야나에게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은 몰랐네. 사랑은 그 어떤 나이도 굴복시키네”라면서 베이스의 저음으로 부드럽게 노래하게 만들었다. 그레민 공작은 오페라 속에서 단 한 번 등장하지만 그는 인생의 깨달음을 알려준다. 결국 인생은 사랑이라는 것. 그렇다. 청년 시절엔 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힘든 인생을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사랑은 어떤 나이에도 찾아오므로.

장일범 음악평론가·KBS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 MC
#알렉산드르 푸시킨#예브게니 오네긴#차이콥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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