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획]미국인은 왜 태권도에 열광하나

동아일보 입력 2014-05-24 03:00수정 2014-05-2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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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손자 함께하는 가족스포츠”… 태권도장 2만5000개
지난달 14일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홍진섭 사범의 태권도장에서 전직 대학교수 루이스 알폰소 씨(왼쪽)가 보호대를 들고 있는 치의학 박사 퍼렐 모턴 씨를 상대로 정권 지르기 연습을 하고 있다. 79세 동갑인 두 노인은 각각 전립샘암과 심근경색을 앓았지만 수술을 마친 뒤 지속적인 태권도 수련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로드아일랜드 버지니아=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지난달 14일(현지 시간) 오후 6시 반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노스킹스타운의 ‘매스터 홍스 태권도장’. 노년기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닮은 미국 노인이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로 인사했다. 79세의 치의학 박사 퍼렐 몰턴 씨였다. 그는 벌써 18년째 이 도장을 다니고 있다. 국기원이 인정한 4단 유단자인 그는 태권도를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몰턴 박사의 안내로 도장 정문을 들어서자 이번에는 카운터에 서 있던 루이스 알폰소 씨(79)가 인사를 했다. 대학에서 철학과 교육학을 가르치고 은퇴한 교수인 그는 이 도장에 다니는 최장기 수강생이다. 22년 전 아들을 따라 태권도를 배운 뒤 국기원 공인 5단 유단자가 됐다. 이들의 태권도 선생인 홍진섭 사범(60)은 “처음엔 이들을 사범과 수련생으로 만났지만 지금은 친구처럼 늙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몰턴 씨는 심근경색으로 한 차례 수술을 받은 뒤 심박동기를 몸에 차고 도장을 찾아왔다고 한다. 알폰소 박사 역시 전립샘암을 조기에 발견해 수술을 받은 상태였다.

태권도를 배우는 동안 몰턴 씨의 심장은 놀라보게 강해졌다. 얼마 전에는 심박동기를 떼어낼 정도로 호전됐다. 알폰소 씨도 암을 극복하고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젊은 시절 만난 태권도 친구와 함께 건강하게 노후를 즐기며 늙어가는 모습은 어린이 일색인 한국 태권도장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한국의 태권도가 사회체육의 메카인 미국에서 평생 스포츠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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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의 저녁 운동

이날 오후 6시 반부터 ‘가족반’ 수업이 시작됐다. 두 노인을 포함해 총 20명이 참가했다. 73세 노인에서 5세 유아까지 연령과 성별, 인종이 너무 다양해 마치 미국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노인 남성 3명, 성인 8명(남성 6명, 여성 2명), 청년 4명(남성 3명, 여성 1명), 어린이 유아 5명(남성 2명, 여성 3명) 등.

사범의 구령에 맞춰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시작된 운동은 발차기와 표적차기, 겨루기 등으로 강도를 높여 나갔다. 맨 앞에 선 몰턴 씨와 알폰소 씨는 젊은이들보다 절반 정도만 다리를 들었고 동작도 다소 느렸지만 뒤처짐이 없이 수업을 따라갔다. 곳곳에서 ‘헉, 헉…’ 빠른 숨이 나오면서 도장 온도가 조금씩 올라갔다.

시작한 지 30분쯤 지나자 운동 강도는 호신술과 품새(공격과 방어 등을 위해 규정된 동작) 등으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내려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변호사 가이 세티패인 씨(54)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아빠는 아들 가이 주니어(8)와, 엄마 린다 씨(49)는 딸 미아(6)와 대련에 열중했다.

세티패인 씨는 인근 제임스타운 시장을 두 번이나 지낸 이 지역 유지. 1년 전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온 가족과 도장을 찾아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다. 이 도장 수련생 250여 명 중에 가족 수련생은 절반을 넘는다. 아빠와 엄마가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미국의 문화적 토양 위에 태권도는 온 가족의 저녁운동으로 뿌리 내린 것이다.

교육 기능과 접목된 태권도

운동이 끝나고 수련생들을 만났다. 상기된 얼굴의 몰턴 씨는 “태권도가 나를 살려줬다. 도장에 오면 세상만사를 잊고 운동에만 집중하게 된다”며 태권도를 찬양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좀 피곤해 수련을 하루 건너뛸 기색을 보이면 “운동 전과 후의 당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며 등을 떠민다고 했다.

알폰소 씨는 아들과 함께한 22년의 경험을 토대로 태권도의 교육적 기능을 역설했다. 그는 “아이들은 태권도를 통해 건강과 함께 자신감을 얻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아버지와 함께 똑같은 품새를 배우고 대련을 하는 동안 모두가 동등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깨닫게 된다”고 설명했다.

세티패인 씨도 “도장에서 온 가족이 하나로 연결된다”며 “아이들은 부모와 스킨십을 하면서 부모를 가르쳐주는 새로운 경험을 얻어 간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 가이 주니어도 “아빠 엄마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운다”며 웃었다.

특히 자녀들에게 절도 있게 인사하기 등 예의를 갖추는 법을 가르치고 어린 시절부터 규율을 몸에 익히도록 해 미국 교육이 소홀한 인성교육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미국 부모들이 자녀의 방과후 프로그램 등으로 도장을 찾고 있다.

12일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에 있는 ‘운해무예원’에서 만난 미국 외교관 크리스 듀딩 씨(40)는 “아들이 집에 있으면 인터넷 게임 등에 빠져 있을 텐데 여기선 스스로 훈련하고 내면에 집중하는 것이 보인다”고 기뻐했다. 아들 잭(7)은 이날 오후 두 시간 동안 또래 아이들 7명과 함께 도장에서 구르고 뛰며 즐겁게 땀을 흘렸다.

미국 태권도장들은 부모들의 이런 교육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운해무예원 관장인 박천재 조지메이슨대 교수(54)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태권도에 접목시켜 인기를 끌고 있다. 무도로서의 태권도를 미국식 교육 시스템과 접목시키는 노력은 미국 태권도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심신을 수련하는 당당한 스포츠센터

시장을 두 번이나 지낸 가이 세티패인 변호사(왼쪽)는 1주일에 세 번씩 온 가족과 함께 태권도장을 찾는다. 그의 옆으로 딸 미아, 아들 가이 주니어, 부인 린다 씨.
10일 이 도장에서 열린 승급 심사 대회를 앞두고 박 교수는 어린이 수련생들에게 격파용 송판 하나씩을 미리 나눠주면서 ‘태권도의 역사와 정신’에서 상상할 수 있는 스토리를 상징하는 그림을 그려 오라고 주문했다. 대회에서 어린이들은 이 송판을 들고 부모와 친구들 앞에서 2분 정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련생 슈리아(8)는 ‘우물에 빠진 당나귀’라는 주제를 그림과 함께 발표해 1등상을 받았다. 한 농부가 늙어서 힘이 빠진 당나귀를 우물에 빠뜨리고 흙을 부었다. 당나귀는 ‘이젠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살아날 방도를 찾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흙에 몸이 잠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우물 안에서 차오르는 흙을 계속 밟고 올라가 우물 밖으로 나왔다. 농부는 당나귀의 지기를 높이 사 늙어 죽을 때까지 친구 삼아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박 교수는 “태권도 겨루기 중 상대방에게 불의의 공격을 당해 위기에 빠졌을 때 당황하지 말고 정신을 집중하면 막아낼 수 있다는 가르침을 어린이의 시각으로 설명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태권도가 몸을 수련하는 데서 나아가 상상력과 창의력, 발표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미국 학부모들이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청소년 수련생의 승단 심사 때도 태권도와 관련한 에세이를 내도록 하고 있다. 이런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수련생들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써서 태권도를 익히도록 한다.

태권도가 신체단련과 더불어 정신을 맑고 강인하게 해주는 생활 속의 무예로 자리 잡아 나가면서 현재 미국 전역에서 2만5000여 곳으로 추산되는 태권도장이 성업 중이다. 규모가 큰 타운 중심부에 있는 쇼핑센터에는 태권도장이 하나 정도는 있다. 태권도장이 당당한 스포츠센터로 대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위기에도 살아남는 태권도장

매스터 홍스 태권도장은 1∼3년 단위 계약 형식으로 등록을 받는다. 계약 기간에는 다니기 싫어도 매달 수강료를 내야 한다. 태권도장은 이런 계약을 통해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한다. 수강생들은 그만큼 열심히 도장에 나오게 된다. 사범들도 안정적인 경영 환경에서 도장을 운영할 수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국에서도 청년 취업난이 심각하지만 도장에는 태권도 사범을 꿈꾸는 젊은 고단자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태권도 5단으로 운해무예원에서 일하는 한성수 씨(29)는 지난해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이 됐다. 그는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돈도 벌고 미국인 친구들을 만나 영어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보조 사범으로 일하고 있는 앤디 나하리슨 씨(19)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 출신이다. 아프리카 식량지원 관련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와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그는 정보기술(IT)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 계속 살면서 훌륭한 사범이 돼 한국의 무도 태권도를 전파하는 것이 꿈”이라며 빙그레 웃었다.   

▼ “종주국 한국서 ‘글로벌 맞춤 교육’ 제공해주길”


美에 태권도 전파하는 한인 관장들


박천재 교수
“새로 문을 연 무주 태권도원이 전 세계 무도(武道) 태권도의 메카로 큰 역할을 하길 바랍니다.”

이번 취재에서 만난 홍진섭 사범과 박천재 교수는 지난달 문을 연 한국의 무주 태권도원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다. 세계 태권도 수련인구 8000만 명 시대를 맞아 3년여 공사 끝에 탄생한 무주 태권도원은 앞으로 세계 태권도 네트워크의 허브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홍 사범은 “미국의 태권도가 사회체육을 통한 심신 수련을 강조하는 무도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한국 태권도의 역할도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홍진섭 사범
박 교수는 “미국의 태권도 도장들은 한국의 문화와 국력을 전파하는 국제 대리점”이라며 “한국 국기원은 전 세계 수련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신상품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미국 전역에는 2만5000개의 도장이 있지만 국기원 단증을 받는 곳은 지난해 추산으로 3359곳에 불과하다. 홍 사범은 “모든 도장이 국기원이 발급하는 단증을 받는다면 수수료 수입을 올릴 수 있고 세계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사범과 도장들이 국기원을 찾고 의지할 뭔가를 먼저 보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미국의 사회체육 시스템에 맞는 ‘맞춤형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홍 사범도 “무주 태권도원을 중심으로 세계 태권도인들이 종주국 한국을 찾아 감동할 소재들을 많이 준비해 줬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로드아일랜드 버지니아=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태권도#나하리슨#몰턴 박사#무주 태권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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