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슈]국과수의 숨가빴던 사인규명 재구성-2008년 ‘고속도 의문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새 혈액분석법 개발, 두 달만에 ‘복어毒 성분 사인’ 밝혀

국과수 사람들은 사건 의뢰가 들어오면 신경이 곤두선다. 미지의 사건을 해결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심정으로 증거물을 마주한다. 사진은 지난해 초 종영한 드라마 ‘싸인’(SBS)에서 천재 법의학자 윤지훈(박신양 분)이 시신을 부검하는 모습. 동아일보DB
국과수 사람들은 사건 의뢰가 들어오면 신경이 곤두선다. 미지의 사건을 해결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심정으로 증거물을 마주한다. 사진은 지난해 초 종영한 드라마 ‘싸인’(SBS)에서 천재 법의학자 윤지훈(박신양 분)이 시신을 부검하는 모습. 동아일보DB
5일 전남 함평에서 정모 씨(72·여)가 비빔밥 등으로 저녁 식사를 하다 복통을 호소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틀 뒤 사망했습니다. 8일에는 전북 고창의 한 신축공사 현장에서 이모 씨(64)가 간식으로 컵라면을 먹은 뒤 숨졌습니다.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의뢰한 결과 정 씨는 고추 농사에 주로 쓰이는 고독성 농약인 메소밀을 음식과 함께 먹은 이유로, 이 씨는 부동액을 넣어둔 물로 라면을 끓여 먹다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먹을거리 사고는 국민 생활과 밀접한 사안인 데다 피해자의 외상이 거의 없고 증거 역시 오래 보존되지 않아 그만큼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국과수에 의뢰됐던 사건 가운데 사인(死因)을 밝히기 가장 힘들었던 식품 사고는 무엇일까요. 국과수 관계자들은 2008년의 이른바 ‘고속도로 의문사’ 사건을 첫손에 꼽았습니다. ‘O₂’가 그 치열했던 추적 과정을 관계자들의 진술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해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 “숨을 쉬기 힘들다”

2008년 4월 27일 오전 6시 반경. 박모 씨(당시 48세·골프의류 판매업체 대표)가 119에 다급한 목소리로 구조 요청을 해왔다. “숨을 쉬기 힘들다.”

‘고속도로 의문사’ 사건 발생 당일 휴게소 화장실에서 발견된 증거물과 동일한 종류의 백색 플라스틱 용기(위)와 주사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제공
‘고속도로 의문사’ 사건 발생 당일 휴게소 화장실에서 발견된 증거물과 동일한 종류의 백색 플라스틱 용기(위)와 주사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제공
경찰은 오전 7시 40분경 경기 광주시 지월리 부근 제2중부고속도로 하행선 갓길에 주차된 승용차 한 대를 발견했다. 발견 당시 운전석에는 박 씨가 창문을 연 채 숨져 있었고, 조수석엔 김모 씨(당시 50세·의사)가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잠자듯 사망한 상태였다. 이들 몸에 외상은 없었다. 유서나 메모 등 특별한 증거물도 없었다. 단지 운전석 바닥엔 구토물이 있었고, 박 씨의 입가에서도 구토 흔적이 발견됐다. 또 마시다 남은 캔 커피 2개가 차 안에서, 다수의 의약품이 트렁크에서 발견됐다.

사건을 접수한 경찰이 행적 조사를 하니 두 사람이 사망 추정 1시간 15분쯤 전 한 휴게소에 들렀고, 김 씨가 비닐봉투를 들고 화장실에 간 사실이 폐쇄회로(CC)TV를 통해 확인됐다. 그래서 화장실을 살폈더니 쓰레기통에서 마신 지 얼마 안 된 홍삼 음료 2개가 담긴 비닐봉투가 발견됐다. 또 그 바로 아래에선 백색 플라스틱 소형 용기 1개와 주사기, 주삿바늘 등이 발견됐다.

○ 시신은 있는데 사인(死因)은 없어

시신과 모든 현장 증거물은 이날 오후 긴급감정 의뢰서와 함께 국과수로 보내졌다. 국과수에선 일단 구토물과 변사자들이 마신 걸로 추정되는 홍삼 음료의 내용물을 조사했다. 내용물에선 청산염, 농약 등 일반적인 약독물이 확인되지 않았다. 트렁크에서 발견된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고혈압치료제 등 의약품에서도 특이점은 없었다.

화장실에서 발견된 플라스틱 용기 안에는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소량의 백색 가루가 있었는데 ‘적외선 분광광도법’(적외선 스펙트럼 데이터를 확인해 화합물을 분석하는 방법), 질량분석 등 일반적인 방법으론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혈액, 소변, 위(胃) 내용물 등 생체 시료를 채취해 약독물 감정을 해도 역시 사인으로 판단할 만한 물질은 검출되지 않았다. 김 씨의 이비인후과 병원과 집 등을 조사해도 특이한 약품은 없었다. 최근 사용되지 않았지만 과거에 보고된 500여 종류의 특이 약독물 목록까지 검토해도 현장 채취 물질의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 천연독이 아닐까

결국 사건 발생 2주가 훌쩍 지났지만 단서조차 잡지 못한 상황. 언론에선 누군가의 독극물 테러가 아니냐는 의문까지 제기됐다. 피해자를 위해서라도 원인 파악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사건 이후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한 국과수 법과학부 약독물과 팀원들은 마라톤 회의 끝에 초점을 백색 가루에 다시 맞췄다. 주사기는 김 씨가 운영하는 병원 간호사로부터 그가 사건 며칠 전 직접 받아갔다는 진술을 받은 상황. 그렇다면 출처가 불분명한 데다 일반인들이 구하기 힘든 실험용 용기에 담긴 백색 가루가 핵심 단서일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때 이 가루가 천연독이 아닐까 하는 가설이 처음으로 제기됐다. 천연독은 당시 실험실이 보유한 기기로는 분석이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실험용 쥐를 이용해 독성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가루를 소량 투여했음에도 쥐가 3분 안에 사망했다. 10배 희석한 시료를 투여해도 10분 안에 죽었다. 현장 증거물 가운데 주사기 속 물질, 박 씨의 구토물과 위 내용물, 박 씨의 유전자가 확인된 홍삼음료 내용물 등을 일부 희석해서 투여해도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쥐가 사망했다.

쥐에게 투여한 물질은 열을 가해도 독성을 잃지 않았다. 천연독 가운데서도 열에 강한 비단백질성, 그것도 맹독으로 추정됐다. 국과수는 보유하고 있던 비단백질성 천연독과 외부에서 구한 모든 비단백질성 천연독을 화학 처리한 뒤 하나하나 검토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물질의 성분을 규명했다. 정답은 바로 테트로도톡신. 복어 독에서 추출되는 맹독성 물질이다. 사망자가 복어를 섭취했다는 정황이 없는 가운데 순도가 매우 높은 테트로도톡신이 직접 사용된 사건은 세계적으로도 드물었다. 복어에서 높은 순도의 테트로도톡신을 분리하는 과정 자체가 매우 복잡한 데다 순수한 테트로도톡신은 실험 등 매우 제한된 용도로만 취급됐기 때문이다.

○ 결국 밝혀내다

이때가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째. 충격을 뒤로 하고 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팀원들이 다시 머리를 맞댔다. 문제는 김 씨였다. 김 씨가 마신 것으로 추정되는 홍삼음료 내용물과 김 씨의 위 내용물 등에선 테트로도톡신이 검출되지 않았다.

박 씨와 비슷한 시간에 사망한 걸로 봐선 동일한 약독물이 사인인 게 거의 확실한 상황. 그래서 김 씨의 혈액 중 테트로도톡신 확인 시험이 필요했지만 또 난관에 봉착했다. 혈액은 그 자체가 매우 다양한 물질로 구성돼 있는 데다 테트로도톡신이 있더라도 극소량만 있을 것이기에 미량의 약물 분석에 유용한 ‘LC-MS/MS’란 고가의 장비가 꼭 필요했다.

당시 국과수엔 이 장비가 없었기에 수소문 끝에 충북대에서 힘들게 장비 사용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장비에 물질만 넣는다고 끝나는 건 아니었다. 테트로도톡신은 매우 특이한 화학적 특성을 가졌기에 혈액 시료 분석에 적합한 분석법 개발 역시 필요했다. 결국 국과수 감정관 1명이 충북대로 가서 2주 동안 밤낮으로 연구한 끝에 분석법을 개발했고, 검증 작업까지 마친 뒤 김 씨의 혈액을 검사했다.

사건 발생 두 달째. 마침내 혈액 안에서 테트로도톡신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사인은 테트로도톡신에 의한 중독사로 결론이 났다.

○ 그러나…

사건의 핵심이었던 사인은 밝혀냈지만 의문점이 모두 해소된 건 아니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기 광주경찰서는 김 씨가 사망하기 3일 전 500만 원을 입금하고 재중동포인 박모 씨(46)로부터 중국의 한 약품회사가 만든 약물을 구입한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경찰 조사와 국과수 수사 결과를 종합하면 테트로도톡신을 구입한 김 씨가 박 씨에겐 테트로도톡신이 든 홍삼 음료를 주고, 본인은 주사기로 테트로도톡신을 투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경찰 조사 결과 고교 선후배 관계인 이들 사이에는 금전 문제 등 원한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 씨가 자살할 만한 동기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 당일 내기 골프를 약속했던 점 등에 비춰 보면 단순 사고사였을 가능성도 있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관계자도 “골프를 앞두고 테트로도톡신을 각성제나 피로해소 성분제 등으로 잘못 알고 가져간 뒤 실수로 사용한 듯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움말=이상기 국과수 법과학부 약독물과 과장, 인상환 마약분석과 향정약물연구실장(사건 당시 약독물과 약품연구실장으로 사건 담당자), 정진일 약독물과 식품연구실장, 오인묵 경기 광주경찰서 형사2팀장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