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11월 12일 16시 50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하트 군. 스펜서 대 주정부 판례에 대해 말해 보세요.”
약간 대머리에 조끼까지 갖춘 검은색 계통의 양복을 입은 킹스필드 교수가 반원형의 계단식 강의실에 천천히 들어와 교단에 서서 출석부를 내려다보면 학생들은 숨을 죽인다. 자신이 호명되면 그 악명 높은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의 고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20여년 전 한 방송사가 일요일 오전에 방영했던 미국 드라마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은 당시 어머니들이 초중고교생 자녀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보게 했던 TV드라마였다. 그 유명한 하버드대에다 선망하던 법대생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학생들이지만.
하버드 로스쿨은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에서 머리 좋기로는 따를 사람이 없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다. 대학의 최우등 졸업자들이 대부분이고 이곳에 오기까지 패배라는 것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콧대 높고, 경쟁에서 언제나 환희를 맛보던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의 학생들이 하버드 로스쿨에서 첫 한 해 동안 겪는 불안과 좌절, 고통, 그리고 광기를 그린 논픽션이다.
하버드 로스쿨에는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부터 의사, 자영업자, 공무원 그리고 대학 영문학 강사(저자)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누구보다 자신만만한 사람들이 모인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루 5시간에 불과한 잠과 매주 읽고 외우고 암기해야 할 수백 쪽의 판례집과 법령집, ‘제2외국어’와 같은 법률용어다. 주말은 물론 없다.
여기에 교수가 학생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퍼붓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 기다리고 있다. 과제로 주어진 판례를 읽고 그것의 논점이 무엇이며 거기에 적용되는 법규는 어떤 것인지, 이 법규를 어떻게 적용해서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하는지를 예습해 준비하지 않으면 거명된 학생은 수업시간 내내 수치와 모멸감을 맛보게 된다.
시험은 또 어떤가. 과목마다 4시간 또는 8시간에 걸쳐 보는 시험을 위해 2개월 전부터 수천 쪽에 이르는 판례와 개요를 정리하고 암기해야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술로도 시험 전날의 불안을 다스리지 못한다. 낙제할 것이라는, 답안을 제대로 써 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소리를 지르거나 통곡하기도 한다.
이들이 로스쿨 첫해에 이런 고난을 겪는 이유는 졸업 후의 일자리가 모두 1학년 때의 성적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특히 하버드 로스쿨에서는 최고의 졸업생만이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사의 서기나, 실제 판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학내 전문지 ‘하버드 법학 평론’ 편집인 자리도 모두 1학년 성적에 달려 있다.
저자는 첫해 마지막 시험에서 자신의 스터디 그룹이 준비한 민사소송법 요약 노트를 다른 학생들이 보지 못하게 막는 자신의 모습에서 성공의 함정에 빠진 하버드 로스쿨 학생의 전형을 발견하고는 괴로워한다. 질투심과 자신보다 뛰어난 학생을 부정하려는 자기 속 ‘적’의 실체를 경험한다.
이 책은 1976년의 하버드 로스쿨을 그리고 있지만 책에서 다룬 로스쿨 학생들의 생활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1987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의혹(Presumed Innocent·무죄추정)’을 쓰기도 한 저자는 현재 시카고의 한 로펌에서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원제인 ‘One L’(1977년)은 로스쿨 1학년생을 부르는 말이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