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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서울 중화동 인질 살인사건 그 후… 어설픈 경찰 대응에 두 번 운 피해자 가족

입력 2010-08-18 03:00업데이트 2010-08-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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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거짓말만 듣고 ‘엄마 잡아먹은 딸’ 만들어 “저 ×이 제 엄마 죽인 ×이야.” 지난달 24일 오전 7시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한 장례식장. 검은 상복을 입은 김모 씨(26·여)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죽음을 넘나드는 10시간의 악몽을 헤쳐 나온 그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몇몇 친척의 싸늘한 눈빛이었다. ‘엄마, 제발 일어나.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말 좀 해줘.’ 김 씨는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교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흉기로 베어 숨지게 한 ‘서울 중화동 인질극’ 사건은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경찰의 초동 대처가 미흡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동아일보는 법무부가 설립한 범죄피해자복지센터(스마일센터)의 보호를 받고 있는 김 씨와 그 가족을 13일 만나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 “참극 막을 수도 있었는데…”

김 씨가 박모 씨(25)를 만난 것은 지난해 9월. 친구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박 씨가 자상하고 배려심이 많아 보여 12월부터 교제를 시작했지만 이후 박 씨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말다툼을 할 때면 물건을 집어던졌고, 김 씨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일일이 들춰보는 등 ‘편집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 초 김 씨가 이별 통보를 하자 박 씨는 김 씨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김 씨 가족을 괴롭혔다. 2월엔 집 담장을 넘어 들어와 유리창을 깨뜨렸다. 김 씨 가족은 “당시 출동한 경찰관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보호해 주면 근무는 누가 하느냐’며 묵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찰은 “김 씨 가족이 정식으로 신변보호 요청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박 씨는 검찰에서 약식 기소돼 50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하지만 박 씨가 이전에도 상해 등 혐의로 4차례 벌금형을 받고 협박이나 폭력 혐의로 수차례 조사를 받은 전력이 있어 박 씨를 정식 재판에 넘겨 처벌했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후 박 씨의 괴롭힘은 더 심해졌다. 6월 말 김 씨는 박 씨를 피해 회사를 그만뒀다. 가족과 함께 중랑구 중화동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주소를 알아낸 박 씨는 7월부터 아파트 앞을 서성거렸다. 참극이 벌어진 지난달 23일은 박 씨를 상대로 경찰에 고소장을 낸 김 씨와 김 씨 어머니 송모 씨가 오후 7시 고소인 조사를 받으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 경찰 몇 시에 철수했나

김 씨 가족은 “사건 당일 경찰이 현관문 앞에서 철수하면 어머니를 내보내겠다는 박 씨의 말을 경찰이 듣지 않아 송 씨가 숨졌다”고 주장했다. 송 씨가 팔을 흉기에 베인 것은 오후 4시경. 20여 분 뒤 출동한 경찰 10여 명은 40∼50분간 15층 현관문 앞에 지키고 서서 김 씨 가족의 철수 요청에도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씨는 “아버지가 경찰들과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는 시각에도 인터폰 화면을 통해 경찰이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고 밝혔다. 김 씨에 따르면 송 씨는 집 안에서 1시간 넘게 생존해 있었다. 경찰의 철수 결정이 조금만 빨랐어도 송 씨를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었다는 것. 경찰 관계자는 “박 씨 요청으로 경찰 병력이 모두 1층으로 철수했다”면서도 정확한 철수 시점을 밝히지는 않았다.

경찰은 가해자인 박 씨와 피해자 김 씨를 같은 차에 태워 호송했고, 어머니를 잃은 김 씨는 경찰서에서도 3시간 넘게 아무 조사도 받지 않은 채 혼자 방치돼 있었다.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울면서 사정했지만 경찰들은 다른 조사실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고 김 씨는 전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피해자가 최대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해명했다.

○ 가해자 진술에만 의존한 브리핑

‘결혼을 반대해서 죽였다’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겠다고 설득했다’ ‘함께 죽겠다며 자살 시도를 말렸다’ 등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알려진 내용들은 경찰이 박 씨 진술만 듣고 브리핑한 것이었다. 김 씨는 “결혼을 전제로 사귄 것이 아니었고, 남아있던 밥을 차려줬을 뿐”이라며 “차라리 내가 죽겠다며 엄마를 내보내 달라고 했지, 박 씨가 자살하면 나도 따라 죽겠다고 말한 적은 결코 없다”고 밝혔다. 결국 김 씨가 사건의 원인 제공자처럼 알려지면서 김 씨는 심각한 2차 피해를 당한 셈이다.

김 씨와 그의 아버지는 지난달 30일 전국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가 운영하는 스마일센터에 함께 입소해 보호를 받고 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엄마를 죽였다’는 죄의식으로 입을 굳게 닫았던 김 씨는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의 집중적인 심리치료를 받으며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동영상=프로파일러가 밝히는 강호순 검거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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