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한류를 이끄는 학자들]<1> 셈 베르메르슈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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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교가 불교? 전공에 갇힌 한국학자들 거시적으로 못봐”

《 1991년 중국 중부 안후이(安徽) 성의 주화산(九華山). 중국의 5대 불교 성산(聖山) 중 하나로 꼽히는 이곳의 한 절에서는 멀리 벨기에에서 온 청년이 서성이고 있었다. 벨기에 겐트대에서 중국학을 전공한 인연으로 중국어를 배우러 온 청년은 이 절에서 모시는 지장보살에 끌렸다. 주화산을 불교 성지로 만든 지장보살 불상은 신라 성덕왕의 아들로 출가한 김교각 스님(697∼794)의 법구(法軀·시신)를 등신불로 만든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한국 불교에 관심이 생긴 순간이었다. 》
셈 베르메르슈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서울대 규장각의 전시물 ‘대동여지도’ 앞에 섰다. 한글과 한국 불교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인생을 먼 나라로 이끌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셈 베르메르슈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서울대 규장각의 전시물 ‘대동여지도’ 앞에 섰다. 한글과 한국 불교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인생을 먼 나라로 이끌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얼마 뒤 현지 한국인의 집에 초대받아 갔다가 한글 서예 작품을 처음 보게 됐다. 로마자나 한자와 달리 단순하면서도 고유의 스타일을 지닌 한글이 마냥 신기했다. 한글을 읽고 이해하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국비 장학프로그램을 찾아 이듬해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셈 베르메르슈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겸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부소장(44)은 그렇게 한국학과 인연을 맺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규장각의 연구실에서 만난 베르메르슈 교수는 유창한 한국어로 “20년 전 서울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울 때만 해도 제가 이곳에서 교수를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정도로 외국인 학자들의 연구 환경이 척박했다”고 회상했다. “20년 동안 외국인들의 한국학 연구가 얼마나 확대됐는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바로 저랍니다.”

이후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학(SOAS)에서 고려불교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저서 ‘부처의 권력: 고려왕조시대 불교의 정치’(2008년)를 영문으로 출판하고 조선시대 서원에 관한 이상해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의 책 ‘서원’을 영어로 번역(2005년)했다.

베르메르슈 교수는 “해외 한국학자들은 연구 분야를 거시적으로 보는 편인데 한국인 학자들은 세부전공 안에 갇혀 역사적 사건을 미시적으로 볼 뿐 큰 흐름은 아우르지 못하는 편”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한국 불교 전체를 다룬 사례는 전문연구서가 아닌 대중서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 그는 고려불교사 연구를 위해 태조 왕건부터 34대 공양왕에 이르는 고려사의 큰 흐름을 살펴봄으로써 ‘고려시대 국교=불교’라는 단순한 공식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뿐 아니라 유교, 민간신앙 등 다양한 사상이 공존했고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도 토착신앙이 반영돼 있어요. 고려의 국교가 불교라는 것은 너무 단순한 개념이죠.”

그는 12세기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의 견문록인 40권 분량의 ‘고려도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다.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번역하려면 10년은 필요하지만 프로젝트 계약상 3년 안에 끝내야 하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고려도경의 한글 번역본이 있긴 하지만 주요 용어들은 한자 음 그대로 번역돼 있기 때문에 이를 적절한 영어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해외에는 한국학을 하는 학생이라도 한글과 한문 둘 다 잘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장기적으로 한국학 서적 번역의 질을 높이려면 인재 양성이 급선무입니다.”

그는 “해외에 한국학을 널리 알리려면 전문서와 대중서의 번역이 두루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영국 소설가 마거릿 드래블이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인 ‘한중록’을 모티프로 삼아 쓴 장편소설 ‘붉은 왕세자빈’을 예로 들었다. “드래블이 읽은 ‘한중록’은 고 김자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영문으로 번역한 책이었습니다. 이처럼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쉽게 다가가려면 다양한 수준의 번역서가 필요하죠.”

불교의 매력을 물으니 “한국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유교지만 유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느낌”이라며 “좀 더 개방적이고 친근한 느낌의 불교에 끌렸다”고 말했다. 그는 불화, 고려청자 등 예술작품에도 관심이 많다.

자신의 전공인 고려불교사 안에만 갇혀 있지 않으려는 베르메르슈 교수는 앞으로 조선시대 불교와 고려시대 매장문화를 연구할 계획이다. “한국 불교라고 하면 주로 원효의 화쟁사상만 떠올리는데 사실 한국 불교의 특징을 제대로 알려면 매장문화 등 다양한 문화 양상을 살펴봐야 합니다.”

런던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 만난 한국인 유학생과 결혼한 그는 4년간 대구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처가살이의 유일한 어려움은 장인의 대구 사투리였다고. 그는 “한국은 유럽보다 살기 편리하고 빠르게 발전해서 좋다”며 “서울대에서 정년이 보장된다면 한국인으로 귀화하는 것도 깊이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 셈 베르메르슈(Sem Vermeersch) 교수는 ::


△1968년 벨기에에서 출생
△벨기에 겐트대 학사(중국학)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학(SOAS) 석·박사(고려불교사)
△2002∼2003년 하버드대 박사후과정
△2005∼2007년 계명대 초빙교수
△2008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겸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부소장
△2010년 미국아시아학회(AAS) 제1회 제임스 팔레 저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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