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인간은 여전히 싸울거다, 15만년 흘러도…

동아일보 입력 2011-08-27 03:00수정 2011-08-27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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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궤도 1, 2/배명훈 지음/각권 328쪽·각권 1만2000원·문학동네
첫 장편 ‘신의 궤도’를 낸 소설가 배명훈 씨. 15만 년 뒤 휴양행성 ‘나니예’를 배경으로 한 이작품은 그의 무한 상상력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문학동네 제공
‘아빠는 부자였다. 인공위성 재벌이었다. 지구와 달과 화성에 천칠백 개가 넘는 인공위성이 있었고, 그중 열일곱 개는 우주정거장이었다.’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도입부부터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이 소설을 재밌게 즐기기 위해서는 기존 독법을 버려야 한다. 낯선 인물과 설정, 그리도 장대한 가상 세계가 지하철 옆 자리에 스윽 앉듯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허무맹랑한 SF나 판타지 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가족과 친구, 연인과의 갈등부터 전쟁, 종교, 과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소재까지. 무려 15만2300여 년 뒤 얘기지만 인간들의 인생은 여전히 드라마틱하다.

작가는 장르와 주류 문학을 넘나들고, 무한한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압도하는 재주로 일찌감치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2005년 ‘과학기술창작문예’로 등단한 뒤 장르문학 전문잡지와 웹진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소설집 ‘타워’ ‘안녕, 인공존재!’를 냈다. 2008년 한 해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콜롬비아 사고조사보고서’였다는 그는 첫 장편의 무대를 역시 그답게, 별나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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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경은 인공위성 재벌인 아빠를 미워한다. 사실 아빠는 자신의 외도가 들통 나자 은경과 엄마를 버렸다. 은경은 아빠를 멀리하기 위해 러시아 비행학교에 들어가고, 코스모마피아 조직원이자 동료 학생인 바클라바를 만나 친해진다. 코스모마피아는 우주공간이나 천체 사유화에 반대해 인공위성 부자들을 적으로 삼는 집단. 바클라바는 은경의 아빠를 공격하려 하지만, 되레 반격을 받고 죽는다. 은경은 바클라바의 공격을 도왔다는 모함에 빠지게 되고, 결국 냉동인간이 돼 15만 년 뒤 휴양행성 나니예에서 깨어난 것.

작품의 남다른 재미는 작가가 창조한 전혀 다른 미지의 공간인 나니예를 탐험하듯 알아가는 데 있다. 나니예는 훼손되지 않은 청정 자연이 있는 곳. 도로가 거의 나 있지 않아 사람들은 전기로 충전하는 구식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 언뜻 보기엔 평화롭지만 다른 행성과 격리된 이곳에도 독재자와 같은 관리소장이 있고, 종교지도자들은 권력투쟁에 나서며, 정부에 반대하는 혁명군까지 들고 일어선다. 은경은 이런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서 점차 나니예 행성 프로젝트와 관련된 비밀에 다가가게 된다.

전쟁과 암투 등이 그려지지만 작품은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다. 빨간색 복엽기, 파란 하늘로 상징되는 작품 속 나니예 상공을 날다보면 두근두근 가슴 설렐 정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소년 코난’과 ‘천공의 성 라퓨타’를 섞은 듯한 유쾌한 모험기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들어갔으니 적어도 나에게만은 도저히 재미없을 수 없는 이야기가 돼버렸다.” 첫 장편을 낸 작가의 자부심이다. 그럴 만하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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