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미군 병사가 주운 돌, 세계 고고학계 발칵 뒤집어

김상운 기자 입력 2016-05-12 03:00수정 2016-05-1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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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8회>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굴 배기동 교수
배기동 한양대 교수가 4일 경기 연천군 전곡선사박물관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등 출토 유물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서 1978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돼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연천=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4일 경기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곳곳에 화려한 전시물과 행사용 텐트가 들어서 보통의 유적지와는 색다른 분위기였다. 다음 날 열릴 연천군의 ‘전곡리 구석기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올해로 24년째를 맞는 이 축제는 발굴로 불편을 겪는 전곡리 주민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64)가 처음 만들었다. 올해는 나흘 동안 관람객 60만 명이 행사장을 찾았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날 행사장을 둘러보던 배기동은 “한때 개발제한 때문에 주민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만 구석기 축제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잠시 뒤 그는 나무로 둘러싸인 외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한국 고고학의 대부 삼불 김원룡 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1922∼1993)의 추모비가 있다. 내년 정년퇴임을 앞둔 반백의 노(老) 교수는 비석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입을 뗐다. “삼불 선생님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삼국시대 마구(馬具)를 전공하려고 한 그에게 삼불은 구석기 연구를 권했다. 이를 계기로 배기동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을 25년에 걸쳐 발굴하게 됐다.

1980년대 경기 연천군 전곡리 유적 발굴 당시 모습(위 사진). 여기서 출토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아래 사진)는 양쪽 면을 갈아 두 손을 모은 듯한 모양이다. 배기동 교수 제공
1981년 11월 1일 오전 10시 전곡리 발굴현장. 한탄강변의 질퍽한 모래흙을 2m가량 파내려갔을 때 서울대 화학과 학부생 한 명이 “무언가 나온 것 같다”며 배기동을 찾았다. 타원형의 돌이 흙 사이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꽃삽과 붓으로 조심스레 돌을 노출시키던 배기동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간 흔적이 뚜렷한 옆면이 나타난 것. “처음에는 자연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파보니 전형적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였어요. 그때까지 발견된 주먹도끼들 가운데 가장 얇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양쪽 면을 갈아 타원형 모양인 전기 구석기의 대표적인 석기다. 프랑스의 생아슐 지방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약 14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생겨나 10만 년 전까지 사용됐다. 고고학계가 아슐리안 주먹도끼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찍개 등에 비해 복잡한 가공작업을 거쳐야 해 고(古)인류의 진화 과정을 풀 열쇠로 보기 때문이다. 학계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쓰임새가 많다는 이유로 ‘구석기의 맥가이버 칼’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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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존재할 뿐 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모비우스의 학설’이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에 의해 발견됐다. 모비우스의 학설이 무너지고 고고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보웬이 삼불에게 주먹도끼를 보여준 이듬해부터 시작된 전곡리 발굴에 참여할 당시 배기동은 27세 청년이었다.

그때 발굴단에서 함께 땀을 흘린 후배들은 현재 고고학계 중진이 됐다. 최성락(목포대 교수) 임영진(전남대 교수) 이영훈(국립중앙박물관장) 박순발(충남대 교수) 김승옥(전북대 교수) 등은 주말마다 현장을 찾아와 작업을 거들었다. 당시 배기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금일봉으로 현장에 지은 유물전시관에서 아내와 기거하며 발굴을 이어갔다. 그는 “버스를 타고 오지까지 와서 주말을 희생한 후배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발굴 뒷이야기를 묻자 그는 1983년에 서울 용산의 우물업자들을 찾아간 이야기를 꺼냈다. 토층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면 2m 높이의 흙을 한꺼번에 퍼내야 했는데, 당시엔 마땅한 기술이 없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우물 파는 기술을 응용해 긴 관으로 토층 샘플을 담는 데 겨우 성공했다. 1986년 발굴 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굴착기로 땅을 파면서 6·25전쟁 때 매설된 지뢰들이 드러난 것. 만약 삽으로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고고학계는 전곡리 유적의 연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지만 전곡리가 한국 선사고고학의 개척지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지질학 등 자연과학자들이 발굴에 참여한 첫 사례로 학제 간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의미도 있다. 그는 “4만∼5만 년 전과 30만∼40만 년 전으로 엇갈린 연대 논란을 끝낼 수 있는 연구방법을 지금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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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아슐리안형 주먹도끼#모비우스의 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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