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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문 질식사전한 신문...평생 머릿속에”

“물고문 질식사전한 신문...평생 머릿속에”

Posted July. 01, 2020 08:21,   

Updated July. 01, 2020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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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가 마지막에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답했더니 그대로 신문에 실리더군요.”

 1987년 박종철 열사를 검안하고 경찰의 물고문 흔적을 동아일보에 증언해 6월 민주화운동의 한 계기를 만든 오연상 오연상내과 원장(63)은 그해 1월 15일 근무하던 병원 진료실에 찾아온 윤 기자를 이렇게 기억했다. 오 원장은 “윤 기자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이 느껴져서 나중에 다시 만나보고 싶었는데 일찍 돌아가셔서 너무나 안타까웠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소중한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동감_백년 인연’의 일환으로 오 원장과의 만남을 30일 가졌다. 임채청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 겸 발행인은 오 원장과 오찬을 같이하고 함께 1987년 당시 언론 보도 등이 전시된 서울 종로구 신문박물관을 둘러봤다.

 박 열사의 시신을 검안한 뒤 오 원장은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수포음(水泡音)이 들렸다”고 증언했다. 오 원장은 이날 “의학적으로는 수포음이 물고문과 직접 관계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인에게는 물고문을 연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했던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본보가 오 원장을 1987년 12월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던 지면과 오 원장의 과거 사진이 담긴 액자, 창간 100주년 기념 오브제 ‘동아백년 파랑새’ 등을 증정했다.

 오 원장이 고교 3학년 시절 유신정권의 언론 탄압을 겪던 동아일보에 낸 격려광고도 액자에 담았다. ‘둔마(鈍馬)의 채찍은 국민이!’라는 문구의 격려광고 명의는 ‘중앙고 광고 낸 반’. 오 원장은 “‘중앙고 3학년 7반’이라고 내려다가 혹여 담임 선생님이 고초를 겪을까 걱정돼 익명으로 했다”고 회고했다. 본보는 당시 격려광고를 냈던 시민들에게 제공한 기념 메달을 복원해 오 원장에게 선물했다.

 유심히 신문박물관의 여러 전시물을 관람하던 오 원장의 발걸음이 1987년 1월 19일 동아일보 지면 앞에서 멈췄다. 1면 톱 제목은 ‘물고문 도중 질식사’. 동아일보가 6개 면을 고문 관련 고발 기사로 가득 채운 날이었다. 오 원장은 “저 날의 신문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고 했다. 이후 본보는 대대적인 고문 추방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사건의 축소 은폐 조작을 고발했다.

 “내가 박종철 열사를 살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게 (죄책감이) 커요. 그 일에 관해서는 의사로서 실패한 것이고 돌이켜 생각하는 게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해 6월 29일까지 사태는 거의 기적처럼 진행됐고, 그분의 죽음은 우리나라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의 순수한 의지가 모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오 원장)


조종엽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