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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얘기를 동교동 출입금지 통보로 받아들인 김상현은

권노갑 얘기를 동교동 출입금지 통보로 받아들인 김상현은

Posted June. 14, 2014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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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DJ(김대중)의 국립묘지 참배 문제로 후농(김상현의 아호)을 찾아갔다는 권노갑의 아픈 기억에 대해서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후농의 기억. 노갑이 형님이 찾아와 앞으로 동교동 출입을 자제하라고 하기에 내가 그게 대중이 형님 뜻이오, 아니면 형님 뜻이오?라고 물었다. 노갑이 형님은 아니라고 했지만 DJ의 뜻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설날 세배만 빼고 동교동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권노갑은 소나기만 잠깐 피하자고 했지만 후농은 국립묘지 참배 문제는 핑계일 뿐 DJ가 사실상 결별 통보를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후농은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때 주머니를 뒤져보니 20만 원이 있었다. 그 돈을 집사람에게 건네주며 대중이 형님이 보내신 건데, 돈이 없으신 모양이라 너스레를 떨었다. 불안해하던 집사람은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슬퍼도 웃어야 하는 희극배우처럼 후농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실 후농과 DJ 사이의 골은 이미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 때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는 DJ가 미국에 망명 중이던 때라 동교동계에서 민추협을 주도한 건 후농이었다. DJ는 소극적이었다. 민추협은 이듬해 212 총선 참여를 결정하고 신당 창당을 서둘렀지만 DJ는 그것마저도 부정적이었다.

권노갑은 목포 공천까지 확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DJ는 장남 김홍일을 통해 출마하지 말라는 지침을 보낸다(이 때문에 권노갑의 국회 진출은 1988년 13대 총선으로 미뤄진다).

그러나 212 총선은 신당 돌풍을 불러왔다. 선거 나흘 전 미국에서 전격 귀국한 DJ가 일으킨 바람의 영향도 컸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당시 DJ의 정세판단엔 오류가 많았다.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DJ를 대신해 민추협과 동교동계를 이끌고 있던 후농이 동교동계 몫인 신당의 사무총장으로 이택돈(2012년 작고)을 앉힌 것이다. 이택돈은 DJ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1971년 8대 국회 때부터 야당 정치를 시작한 판사 출신이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도 함께 투옥된 동지였다. 그런데 법정에서 DJ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바람에 그는 동교동계 눈 밖에 나 있던 인물이었다.

귀국 직후 수안보 온천에 머물고 있던 DJ는 후농을 다그쳤다. 이택돈은 안 된다!

후농의 회고. 이택돈 씨가 법정에서 어떤 진술을 했는지는 나도 옆에서 다 들었다. 하지만 나는 DJ가 그런 사람까지도 끌어안는 포용력 있는 지도자가 되길 바랐다. 아니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 꿈이었다. 불행하게도 후농의 진정성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DJ는 그런 후농을 보며 내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굳혔다.

후농이 다시 DJ 옆으로 돌아온 건 꼬마민주당과 합당 때였다. 권노갑은 후농에게 공천(14대 총선)을 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후농과 가까운 조승형 비서실장도 적극 거들었다.

그럼 자네하고 조 실장이 책임지게! DJ의 불신은 여전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