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사과 요구 좋지만 기록 내미는게 더 중요

Posted December. 09, 2013 03:16,   

日本語

90년 전인 1923년 9월 1일 정오 직전에 리히터 규모 7.9의 큰 지진이 일본 간토() 지방에서 발생하였다.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과 경찰은 재일 한국인(약 666명, 독립신문 보도)과 중국인(약 474명), 일본인 노동운동가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사건을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에 중국인 학살사건의 정황은 1970년대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초지일관 정부의 개입 사실을 부정하고 국가 책임을 회피해 왔다. 2003년 재일동포들의 요청으로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조사보고서와 함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학살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할 것, 국가가 학살사건을 조사하여 원인을 규명할 것을 권고했지만 아직까지도 응답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발견된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 기록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문서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인 1952년 한일회담 결렬 후 이듬해 1953년 한일회담을 다시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 전체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자료는 아니지만 당시 희생자 290명의 명단은 정부의 최초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하는 점이다.

이번 일을 기점으로 역사기록 발굴을 위해 정부가 힘을 더 쏟아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일본 보수 우익세력은 난징()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와 같이 근대 일본의 침략전쟁과 가해자로서의 책임 문제를 부각시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교과서 기술에 대해 삭제 및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통계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문제점으로 부각시키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자신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확산시키려 한다. 간토대지진 당시 일어난 학살사건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번 자료는 희생자 명부와 함께 학살 방식, 장소까지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본 내의 역사왜곡 움직임을 반박하는 훌륭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자료 발굴과 정리는 동북아 지역의 화해와 번영은 물론이고 역사왜곡과 책임회피에 대한 반박 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도 하다. 가해자로서의 공식적인 사실 인정과 사죄, 보상을 이끌어 내는 증거로써 역사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또 당시 희생자가 속한 중국 등 동북아 지역 국가들과 협력하여 역사 대화와 연구를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간토대지진 당시 중국인 학살사건도 아직까지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동북아 공동 역사교과서 발간을 제안했다. 6월 중국 방문 때에는 한중 인문교류공동위원회 설치를 합의했는데 여기서 역사 자료 공유와 연구 협력이 이뤄진다면 공동 역사교과서 발간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내 재일동포 역사가들에게도 주목해야 한다. 일본에서 광복 이전까지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사건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사실 규명조차 제대로 시도되지 못했다. 그러나 재일동포 역사가들의 노력 덕분에 일본 내 자료들이 발굴된 적이 많고 학살사건 관련 자료를 1950년대부터 발굴하고 연구한 이들의 공로가 작지 않다. 아직까지도 간토대지진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추도비와 위령비조차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다. 우리 정부는 재일동포 네트워크와 공조해 나가면서 일본 정부에 자료 제출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또 학살 주체가 일본의 국가권력과 자경단이었음을 추도비에 명기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