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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한국외교의 현주소

Posted October. 26, 2005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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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 김치에서 납과 기생충이 나왔다는 보도가 있자 중국 정부는 한국에 대한 무역보복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한국 측의 일방적 발표와 매도에 격분했다는 것이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 일본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닷새 만에 번복했다. 한국외교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는 삽화들이다. 어느 한 국가도 만만한 나라가 없고, 이들과의 크고 작은 관계가 우리 국익()의 목 줄기를 쥐고 있는 상황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주 한 인터넷 신문과의 회견에서 참여정부 2년 동안 외교문제는 기대를 초과 달성한 것 같다고 했다. 대통령은 근거로 자주국가로서의 위상 찾기에 성과가 있었음을 들었다. 국민의 체감과 큰 차이가 있다. 외교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뭔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의 급변속에서 안보와 번영의 축인 한미동맹을 더욱 견실히 유지, 발전시켜나가고 그 기초 위에서 변화에 대처해 나가라는 것이다. 이 정권이 과연 이를 충족시켜주었는가. 아니라고 본다.

역대 어느 정권 아래서도 이처럼 한미동맹을 걱정한 적이 없고, 일본과 얼굴을 붉혀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중국과의 관계가 좋아진 것도 아니다. 동맹과 선린()의 기초가 흔들리면서 그 자리를, 국익에 도움도 안 되고 위험하기까지 한 자주외교와 민족공조에 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외교의 초과 달성이라면 정체성() 시비가 일지 않는 게 이상하다.

자주에는 비용이 따른다. 전시작전통제권을 돌려받을 경우 한미연합사령부(CFC) 해체에 따른 대북() 억지력의 약화를 각오해야 한다. 국방부는 이를 막기 위해 2020년까지 628조원이 투입되는 국방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이로써 자주국방이 완결될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둬야 한다는 국익 실현의 보편적 원칙에 대해 과연 얼마나 고민했는지 묻고 싶다. 일본과의 관계도 호전될 기미가 없다. 고이즈미 총리의 책임도 크지만 일본으로 하여금 한일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오해를 낳게 한 이 정권의 아마추어 식 일본 다루기가 갈등의 기저에 깔려있는 것도 사실이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다음달 부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에 앞서 북한을 방문한다. 북한과의 경협을 강화해 한미동맹을 견제하고, 유사시 한반도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자명하다. 중국은 이미 지난해 8월 한중 외교부 간 동북공정에 관한 합의를 무시하고 옌볜() 조선족의 한글판 중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 고구려사를 통째로 빼버렸다. 그런 중국이지만 후진타오 주석은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해서는 한중관계의 중요성을 북-중관계 못지않게 강조함으로써 남북 등거리 외교의 전형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이 강대국의 참 모습이다.

노 대통령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창하고,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상호신뢰와 선의에 기초한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체제를 우리 외교가 나아가야 할 길로 제시하고 있다. 취지는 좋을지 모르나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다. 주변 4강이 우리 의사대로 움직여주지 않거나, 우리가 그들을 강제할 힘이 없는 한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현상유지(status quo)체제를 급격히 깨트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실사구시()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백번 옳다. 자존망대는 외교에 가장 치명적인 적()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