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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미혼모로 산다는 건 (일)

Posted May. 19, 2010 03:01,   

日本語

엄마, 아빠 있는 게 중요한 거야?

로로(9)는 초등학교 3학년 여자아이다. 만화 캐릭터 뽀로로를 닮았다고 해 로로라는 별명이 붙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친구가 물었다.

너는 아빠 없어?

응, 없어. 근데 아빠 있는 게 중요한 거야?

중요하지!

난 하나도 안 중요해.

그날 로로는 집에 와서 엄마에게 물었다. 아빠 있는 게 중요한 거야?

어떤 애들한테는 중요할 수 있지만 다 그런 건 아냐. 근데 아빠란 존재는 중요하지.

엄마, 미혼모가 뭐야?

로로는 언젠가 책을 읽다가 미혼모라는 단어를 봤다. 책에 소개된 가족관계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껴 그날 엄마에게 물었다.

미혼모가 뭐야?

결혼 안 하고 아이 낳아서 기르는 사람.

엄마랑 이모들(미혼모 생활시설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결혼 안 하고 아이 기르는데, 죄다 미혼모야?

응.

어쩐지!

로로는 이제 자신에게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도 엄마 최유선(가명34) 씨는 혹시 로로가 밖에서 이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생길까 봐 이런 말을 한다. 엄마가 죄 지은 건 아니지만 친구들에게 그 얘긴 안 했으면 좋겠어. 엄마 아픈 얘기거든.

그래서 로로는 가끔 거짓말을 한다. 친구 엄마가 아빠는 어디 있니?라고 물어보면 아빠는 일해요라고 대답한다.

집-학교-집-병원 영그는 간호사의 꿈

유선 씨를 만난 것은 이달 8일 금요일 오후 5시 서울의 한 주택가에서였다. 분홍색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은 그는 키가 179cm로 훌쩍 크고 마른 체형이었다. 배낭을 멘 채 자전거를 타고 골목에 나타난 그는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3년제 간호전문대에 다닌다. 디자이너가 꿈이었지만 접었다. 과로로 쓰러지고 나서 의사가 무거운 것을 들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 들어간 집은 작은 방 세 개가 전부였다. 집안에선 커다란 풍선과 강아지 인형이 굴러다녔고, 냉장고에는 알록달록한 종이접기가 붙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로로가 친구와 함께 책을 보면서 놀고 있었다. 엄마를 본 로로는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 했지만 유선 씨는 아이와 같이 있을 시간이 없다. 인근 병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 간식을 챙겨 주고는 다시 가방을 걸쳐 멨다.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병원에서 입원 접수 등의 일을 한다. 집에 오면 오후 10시 반. 학교 공부를 마치고 오전 2, 3시가 돼서야 잠을 잔다. 학교 수업은 다음 날 9시에 시작한다. 학교를 다니면서 그의 일상은 몇 년째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딸 낳던 날 들은 건 축하 대신 한숨

로로 아빠가 됐어야 하는 유선 씨의 남자친구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여리게 자란 동갑내기였다. 대입에 낙방하고 재수할 때 만나 3년 동안 사귀었다. 임신 사실을 처음 알렸을 때 그의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공포 그 자체였다. 유선 씨는 애 아빠가 되어야 할 남자가 남편 자격, 아빠 자격이 없는 남자란 사실을 임신 후에야 알았다고 했다. 남자친구와는 연락을 끊었다. 그러면 찾아올 거라고 혹시나 기대했지만 역시나 오지 않았다.

주변 사람이 제시한 방안은 헤어지고 낙태한다 헤어지고 출산한다 출산하고 결혼한다 등 세 가지였다. 어느 것도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안을 선택했다.

그의 부모는 아이를 지우라며 펄쩍 뛰었다. 출산을 고집하자, 부모는 동네 사람들이 알까 봐 이사까지 했다. 불같은 성격의 어머니는 지금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현재 부모와는 사실상 의절한 상태다.

유선 씨는 25세가 되던 2001년 서울 서대문구 소재 애란원(미혼모 생활시설)에 혼자 들어가 아이를 낳았다. 출산 당일 축하 인사가 아닌 한숨 소리와 위로의 말이 들렸다.

아이를 혼자 기르기로 결심한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처음엔 창피해서 2주 동안 애란원 건물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갔다.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애란원에서 7개월을 보내고 2000만 원짜리 전세를 얻어 지냈다. 아기와 단둘뿐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아둔 돈을 조금씩 썼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나이가 되자 전문대에 입학해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디자이너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학교 갔다 와서 아이를 재우면 오후 9시였다. 그때부터 오전 1시까지 공부했다. 다시 오전 1시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옷감을 바느질해 장식을 다는 아르바이트였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오전 3시. 3, 4시간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곤 했다. 방학 때는 청소일도 하고 책방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2년 동안 그렇게 살면서도 등록금이 아까워 공부를 악착같이 했다. 1등은 늘 그의 몫이었다.

미혼모 밝히는 순간 합격은 취소되고

하지만 미혼모 신분에 취직이 쉽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2005년 겨울, 디자인 관련 중소기업에서 면접을 봤다. 연봉 이야기도 거의 다 끝날 무렵 주저하다 말을 꺼냈다.

말씀드려야 할 게 있는데요. 제가 아이를 혼자 키워요. 미혼모예요.

순간 50대 남자 사장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런 건 처음에 이야기했어야지. 괜히 내 시간만 뺏었잖아.

소리 지르는 사장을 두고 그냥 뒤돌아 나왔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최종 면접까지 갔어도 미혼모임을 밝히면 전화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아홉 번의 면접을 치렀다. 결국 미혼모란 사실을 속이고서야 중소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 연봉 1800만 원. 괜찮은 조건이었다.

6개월 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월요일 아침.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려고 몸을 숙이다 뒤로 주저앉았다.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졌다. 119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 차창 밖 풍경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내가 마시는 공기조차 아까워 하는 것 같았다

깨어나 보니 중환자실이었다. 며칠의 시간이 흘러가 있었다. 대동맥 박리(심장과 연결된 대동맥 내부가 찢어지며 분리되는 것)였다. 의사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죽고 싶었는데, 세상이 너무 버거워서 매일 죽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었는데. 얼마나 더 이 험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하나. 아무도 그 눈물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는 병실 침대에서 생각의 여행을 떠났다. 아픈 이름 미혼모를 다시 떠올렸다. 그는 미혼모가 된 뒤 마치 지구의 공기조차 자신이 마시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도 되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뭐든지 열심히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내가 스스로를 죄인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거짓, 당당함, 노력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는 생각에 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때 그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항상 네 옆에 있다.

이 사건을 겪고 나서 그는 많이 달라졌다. 바쁘고 고된 삶은 바뀌지 않았지만 우선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전에는 딸이 아빠 없으니까 저렇지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아이를 많이 혼냈었다. 혹은 딸이 애어른 같다 의젓하다란 말을 들으면 괜히 미혼모의 딸이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조바심이 나곤 했다.

그렇지만 크게 아프고 나서 그는 딸에게 관대해졌다.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내야지라는 생각에 쉬는 날이면 아이와 공영 도서관에 가 하루 종일 지냈다. 도서관에선 3000원에 돈가스가 점심으로 나오고 만화영화도 공짜로 보여 준다. 모녀에게 큰 행복을 주는 곳이다.

엄마, 저를 낳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딸아이는 밝게 자라 줬다. 5월 8일 어버이날, 로로가 엄마에게 뭔가 내밀었다.

엄마, 내가 선물 줄 거 있어.

뭔데?

학교에서 만든 거야. 어버이날 카드다.

아, 그래. 잘 만들었네. 고마워.

파란색 줄을 정성스럽게 친 편지지에 로로는 이렇게 썼다.

엄마께. 안녕하세요? 저 예요. 저를 낳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게요.

카드를 들여다보던 유선 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얘는, 만날 낳아줘서 고맙다네. 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