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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장을 버리다

Posted February. 03, 2021 07:35,   

Updated February. 03, 2021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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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은 엄하고 차가운 게 속성이지만 따뜻한 옷을 입을 때가 있다. 조선의 문호 연암 박지원이 입은 옷이 그러했다. 그의 아들 박종채가 지은 ‘과정록(過庭錄)’을 보면 그는 관리로서 곤장 형을 내리는 일을 몹시 괴로워했다. 어쩔 수 없이 곤장을 쳐야 하는 경우에는 나중에 “반드시 사람을 보내 맞은 곳을 주물러 멍을 풀어주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그 또한 공자의 말이 절대적 진실이라고 믿는 시대의 독선과 완고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생각이 탄압과 탄핵의 대상이었다. 시대의 한계였고 시대에 순응한 그의 한계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도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

 그가 1797∼1800년 충청도 면천 군수로 있을 때였다. 그곳에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고 만인을 평등하게 생각하는 천주교인들이 아비와 임금도 몰라보는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섬기는 임금 정조와 주류 지식인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는 그들을 중죄인으로 다스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가 당시에 관찰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들을 때리고 윽박지르고 협박하는 것은 “형벌을 남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관(官)과 민(民)이 서로 다투는 일”이었다.

 그는 곤장을 버렸다. 그리고 매일 밤 업무가 끝나면 교인들을 불러 상담을 했다. 그들이 어렵게 말문을 열면 ‘그 말의 실마리를 좇아 묻고 타이르고 이끌고 설명하기를 반복’했다. 모진 형벌에도 꿈쩍 않던 그들이 그가 조곤조곤 타이르는 말에 마음을 열고 울기까지 했다. 신유박해, 즉 1801년의 천주교도 박해 때 면천군에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은 것은 그러한 노력 덕이었다. 비록 그는 가부장적인 성리학과는 세계관 자체가 다른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