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방치됐던 유진상가 하천길에 예술이 흐른다

방치됐던 유진상가 하천길에 예술이 흐른다

Posted July. 02, 2020 07:38,   

Updated July. 02, 2020 07:38

ENGLISH

 한강의 가장 긴 지류인 홍제천과 내부순환로가 만나는 곳엔 옛 글씨체로 ‘유진맨숀’이라고 적힌 낡은 5층 건물이 있다. 지금은 ‘유진상가’로 불린다. 때 묻은 외벽 때문에 언뜻 보면 철거를 앞둔 콘크리트 구조물 같아 보인다. 하지만 1970년까지만 해도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당시에는 북한의 남침을 대비하는 ‘최후의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구파발을 넘어 청와대와 서울 시가지로 침투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대전차 방호기지’로 활용한 것이다. 1991년 건물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가 놓이면서 주민들 중 일부를 떠나보냈던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유진상가가 다시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다. 서울시는 유진상가 아래 하천길 250m 구간을 ‘공공 미술관’으로 만들어 1일 처음 공개했다. 길의 이름은 ‘홍제유연(弘濟流緣)’. 물과 사람의 인연이 흘러 예술로 치유하고 화합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홍제천 산책로를 거니는 시민들에게 예술적인 경험을 선사하기 위한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중 하나다. 박재은 서울시 문화본부 주무관은 “한국의 현대사를 안고 있는 유진상가를 보존하고 기억함과 동시에 빗물의 통로로만 쓰였던 하부 공간을 시민들에게 예술 공간으로 돌려주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유진상가를 지나는 홍제천 산책로가 복원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3월 서대문구가 산책로 단절 구간이었던 유진상가 하부의 약 500m 구간을 복원했다. 서울시가 공모를 통해 이곳을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 대상 지역으로 정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한국 근현대의 많은 개발과 변화의 역사를 품은 공간이라는 평가를 높게 샀다”고 했다.

 지난해 6월 조성 사업을 시작해 6개월 만에 작품 설치를 완료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개장이 수개월 연기되기도 했다. 유연식 서울시 문화본부장은 “‘홍제유연’은 닫힌 실내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주목받는 예술 분야 중 하나”라고 했다. 서대문구는 조만간 내부순환로와 홍제유연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 시민들이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만들 예정이다.

 홍제유연을 장식한 작품들은 빛, 소리, 색 등 이른바 ‘비(非)물질’로 구성된다. 작품 대부분이 공간을 차지하는 ‘고체’가 아니어서 하천 길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게 됐다. 100여 개의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설치미술, 조명예술, 미디어아트, 사운드아트 등 8개 작품이 전시된다. 전업 작가의 작품 말고도 시민 1000여 명이 직접 참여한 ‘메시지 영상 벽화’도 전시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의 공산을 채울 예술작품을 고르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고 전했다.

 유진상가 아래 하천길 ‘홍제유연’은 이날 오후 2시 점등을 시작으로 매일 오전 10시부터 12시간 동안 시민들에게 개방된다.


이지훈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