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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녹둔도 패전

Posted April. 14, 2020 08:26,   

Updated April. 14, 202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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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만강 하류에 녹둔도라는 섬이 있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조선 정부가 제재했다. 여진족의 습격에 노출되어 있고 홍수 위험도 높다는 이유였다. 이게 정부의 책임감과 보호 본능일까, 과도한 통제일까? 세종 때의 4군 6진 설치 이후 이곳의 긴장은 더 높아졌다. 주민과 정부의 타협안은 농사철에 주민이 거주하면서 경작을 하고, 추수 후에는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섬에 상주하기를 원했지만 모래섬이라 튼튼한 성을 지을 수 없다고 정부가 거절했다. 그러면 들락거리는 삶이 불편하다고, 또 위험하기도 했으니 주민들이 도망쳐 버린다. 주민이 줄면 방어도 허술해지니 또 철수한다. 본토에 인구가 늘고 토지가 부족해지면 들어가 농사를 짓는 일이 반복되었다.

 1587년 추수철인 9월, 주민들은 농토로 나가고 병력 다수가 농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동했다. 목책 안에는 소수의 병력만이 주둔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진족이 습격했다. 이때 지휘관이 이순신이었다. 소수의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싸워 간신히 목책을 지켜냈지만 160명의 주민이 속수무책으로 납치되었다. 진 밖에 있던 오형과 임경번이란 무관 등 11명의 병사가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여진족에게 뛰어들어 싸우다가 전사했다. 북병사였던 이일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이들의 장렬한 행동을 조정에 보고했다. 그런데 제승방략이란 책에 따르면 이날 오형은 도망치다가 등에 화살을 맞고 죽었고, 임경번은 장렬하게 싸운 것이 맞다고 했다. 이일은 녹둔도 패전의 충격을 무마하기 위해 도망병까지도 영웅으로 둔갑시켰던 것일까? 아니면 극도로 혼란한 와중에 목격자들이 착오를 일으킨 것일까?

 현장의 목격자들도 같은 행동이 다르게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 심한 경우가 지금 우리 사회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맹목적이다. 많은 이들이 포퓰리즘의 맹위를 우려한다. 아니, 더 위험한 현상이 편향과 맹목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교육이 조장하고 지성이 편승하고, 속임수 정치는 날개를 달았다.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