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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이 아니라, 색깔이 없다

Posted November. 15, 2019 07:53,   

Updated November. 15, 2019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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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야구가 프리미어12에서 ‘변방’ 대만 야구에 패한 순간, 무수한 탄식이 쏟아졌다. 0-7의 완패라 더 참담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위, 2015년 프리미어12 우승 등 숱한 명승부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몇 년 안 된 일들이다. 아직도 여운이 있는데, 우리 야구는 왜 급속히 퇴보했을까.

 실력(기량)이 떨어졌다고들 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선수들의 기량은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메이저리그를 경험했거나 진출하려는 일부 선수들과, 그들에 준하는 국내파 선수들로 대표팀이 구성됐다. 게다가 당시에도 우리 팀 기량은 상대보다 월등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상급 팀들과는 격차가 있었다. 실력만 놓고 얘기하면 국제대회 우승은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실력이 퇴보의 본질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색깔이다. 당시 우리 야구는 변방에 위치했지만 우리만의 장르로 도전장을 던졌다. 바로 ‘크로스오버’(장르의 교차)였다. 선 굵은 미국의 빅볼(Bigball)과 세밀한 일본의 스몰볼(Smallball)을 섞었다. 여기에 근성과 팀워크 등 한국적 정서를 가미해 독특한 색깔을 뽑아냈다. 때론 상식을 거부하고, 파격도 서슴지 않는 도전 의식까지. 서구 문화를 우리의 감성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트렌드로 끌어낸 한류와 여러모로 닮았다.

 장르의 힘은 변방 한국 야구를 용으로 만들었다. 미국같이 힘 좋고 단선적인 팀에는, 힘으로 버틴 뒤 정교함으로 제압했다. 일본처럼 정교한 플레이를 하는 팀에는, 정교함으로 방어한 뒤 한순간 힘으로 승부를 냈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 힘과 기술이 현란하게 교차했다. 근성과 팀워크도 대단해 상대가 혀를 내둘렀다. WBC 당시 미국 주류 언론은 “한국은 모든 걸 보여줬다. 미국 고교 야구팀이 배워야 한다”고 했다.

 지금 해외 고교생들은 케이팝에 환호하고 있지만 해외 고교 야구 선수들의 안중에는 한국 야구가 없다. 한류는 외연을 확장하고 완성도를 높여 갔지만 야구는 가진 색깔조차 잃어버렸다. 지난해 아시아경기도 그렇고, 최근 대표팀 경기를 보면 그저 지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힘과 기술을 쓰는 데 맥락이 없고, 파격도 없고, 근성도 없다. 무색무취로 승부했다. 한국 야구는 무엇인지, 답을 할 수 없었다.

 야구인들은 4, 5년 전 프로에서부터 색깔을 잃어갔다고 지적한다. 팀이 늘어나고, 연봉이 큰 폭으로 오르면서 장르 고도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메이저리그에 경도돼 미국식 자율 훈련 프로그램을 무비판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라고도 분석한다. 유소년 선수들이 투수 쪽으로만 쏠리는 불균형으로, 장르를 구축하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요인은 복합적이겠지만 장르를 고민하지 않는 게 가장 커 보인다.

 우리나라 야구 흥행은 국제대회 성적과 밀접하게 연동한다. 800만 명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던 것은 WBC, 올림픽, 프리미어12 등의 선전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 약효가 다 떨어지는 시점인 지난해 아시아경기 때 병역 논란까지 겹쳤다. 올해 800만 관중이 붕괴했다. 추락이 가파르다.

 프리미어12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제라도 다시 고민해 보자. 우리는 무슨 색깔로 승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이번 대회 성적과, 내년 도쿄 올림픽 출전과, 우리 프로야구의 미래가 달려 있다. 배트를 잠시 내려놓더라도, 고민해보자.


touc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