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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서 일본 아소처럼 망언하면 정치생명 바로 끝날 것

독일서 일본 아소처럼 망언하면 정치생명 바로 끝날 것

Posted August. 24, 2013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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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 한복판의 희생자 추모시설

17일 오후 베를린 한복판 브란덴부르크문과 독일연방의회 의사당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광장에는 물결치는 파도처럼 2700개의 콘크리트 돌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이곳은 2005년 종전 60주년을 맞아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이 설계한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다.

돌무덤을 찾은 수많은 관광객은 숙연한 표정으로 묘비 사이를 걸으며 명상에 잠겼다. 걷다보면 돌덩이가 어느새 사람 키보다도 커져 유대인 게토(집단거주 지역)나 강제수용소에 갇힌 듯한 음울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나치 희생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었다. 게르만 민족의 피를 더럽히는 불순한 자들로 규정된 동성애자들은 가슴에 핑크색 역삼각형(Rosa Winkel)을 붙이고 강제수용소에 감금됐고, 집시들도 50만 명이나 희생됐다. 브란덴부르크문 주변에 있는 티어가르텐 숲 속에는 2008년 동성애자 학살 희생자 추모시설이 들어섰고, 2012년에는 집시 희생자 기념관이 세워졌다. 2014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아 홀 부근에 나치에 의해 살해당한 장애인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이렇게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끊임없이 세워지는 추모시설은 독일 연방국회의장이 회장으로 있는 나치학살 희생자추모기념사업회가 관리한다. 16일 오전 추모사업회의 우베 노이베르커 이사장을 만났다. 그에게 통일 후 베를린에 추모 시설을 대규모로 세운 배경을 물었다.

1990년대 초반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옛 소련이 해체되고, 유고연방이 해체되는 등 모두가 쪼개지고 갈라졌다. 그런데 독일만 통일되면서 인구와 면적이 크게 늘어났다. 강력해진 독일이 과거 나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세계인들의 우려가 나왔다. 통일 후 국회에서 가장 먼저 결정된 것이 나치 희생자 추모시설 건립이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등 외국에는 추모 시설이 많은데 정작 독일에는 없다는 반성도 일었다.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장벽이 철거되면서 장벽 주변의 거대한 땅이 베를린시 소유가 되었다. 브란덴부르크문과 독일연방의회 의사당이 있는 중심가를 상업지구로 개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랬다면 베를린시가 천문학적인 개발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그 자리에 추모시설을 짓기로 결정했다.

중심가에 세워진 기념비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독일연방의회 의사당 앞 공화국 광장에 설치돼 있는, 나치에게 살해당한 의원들의 추모비였다. 기념비에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던 의원 96명의 이름과 소속정당, 사망 연도 등이 적혀 있다. 이 기념비는 일본의 아소 다로() 부총리가 비밀리에 헌법을 바꿨던 나치로부터 배우자고 했던 그 나치의 수법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과정을 숨기고 있었는지를 웅변하고 있었다.

노이베르커 이사장은 만약 독일 내에서 정치인이 아소 부총리와 같이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망언을 했다면 그날로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났을 것이라며 정상적인 국가에선 상상할 수 없는 사고라고 비판했다.

베를린 시내에는 이밖에도 폴란드 희생자 기념관, 레지스탕스 박물관, 안락사 희생자 추모관, 죽음의 열차 기념물 등 나치 과거사 관련 시설이 40여 개에 이른다.

독일에서는 일본의 야스쿠니신사처럼 전범을 추모하는 시설은 찾아볼 수 없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 1급 나치 전범 루돌프 헤스의 묘가 극우청년들의 성지 순례지가 됐다는 이유로 묘지 전체를 철거해버렸다. 오스트리아 북부 레온딩에 있는 한 교회묘지에서도 신나치주의자들이 히틀러의 부모 알로이스와 클라라의 묘소를 자주 찾아오자 그 묘소를 없애버렸다.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불과 수백 m 떨어진, 히틀러가 자살한 최후의 벙커도 자랑스러운 유적지가 아니었다. 이 지하벙커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됐으나, 인근 지역이 주택가로 재개발된 이후 수십 년 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독일 정부는 신나치주의자들의 성지로 추앙될까 우려해 아무런 표지도 세워놓지 않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자그마한 표지판이 설치된 이곳에는 18일에도 전문 가이드들이 이끌고 온 소수의 관광객만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풍경들을 독일에서는 모두 일상에서 볼 수 있었다. 만일 일본이 이렇게 진심 어린 반성과 사죄를 한다면 유럽연합을 이끄는 독일처럼 아시아에서 중심 국가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매우 비현실적인 상상이 꼬리를 무는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