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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

Posted December. 27, 2012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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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성탄을 기원하며 조그마한 선물을 문 앞에 두었습니다.

성탄절을 앞둔 23일 밤 서울 관악구 중앙동의 한 원룸 건물 입주민들의 휴대전화에 이런 문자가 일제히 도착했다. 현관문을 연 입주민 20명의 눈에는 문 앞마다 놓인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샴페인, 그리고 자신처럼 놀란 표정의 이웃이 보였다. 선물을 보낸 이는 원룸 주인 권기영 씨(47).

권 씨가 쓴 이벤트 비용은 케이크와 샴페인 20개씩 모두 40만 원. 원룸에 사는 한 입주민이 권 씨의 성탄절 이벤트와 그간의 배려를 2030세대가 많이 찾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자 훈훈한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우와 믿을 수 없다. 이런 분이 있다니. 아직 세상은 살 만하고 아름답다 감동을 넘어 감격 다른 곳으로 퍼가도 될까요.

권 씨의 사연이 알려지자 방을 구하고 싶다는 문의가 줄을 이었다. 격려 문자도 왔다. 권 씨의 작은 배려에 2030세대가 이처럼 커다란 울림으로 반응하는 것은 젊은층이 주거 문제로 받는 고통이 그만큼 큼을 보여준다.

내 원룸은 비 새는 상태로 2주를 고생해야 고쳐준다 계약할 때 도시가스라더니 막상 LPG로 보일러를 때는 탓에 난방비로 죽을 지경 등 2030세대의 하소연 댓글도 줄을 이었다.

직장인 장남수 씨(27)는 한겨울에 언 수도관 탓에 방 안으로 물이 스며들어 전기장판에 불꽃이 튀는데도 주인은 수리를 해주지 않았다며 도저히 살 수 없어 계약기간 내에 방을 빼자 복비까지 받아 챙겼다고 토로했다. 청년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단체인 민달팽이 유니온 이한솔 대표는 권 씨와 같은 착한 집주인을 만나는 건 복권 당첨 같은 행운이라며 개학 철마다 자취생들은 방 구하기 전쟁을 벌이는데 이 문제가 해결돼야 나쁜 집주인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이런 반응에 권 씨는 대학시절 하숙집 주인아저씨는 항상 하숙생이 배고프지 않을까 걱정하며 외식도 자주 시켜줬다며 그 배려를 다시 젊은 세대에게 돌려준 것인데 칭찬을 받으니 쑥스럽다고 말했다. IT업체 대표인 권 씨는 지난해 건물을 인수하고 임대업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 임대업을 시작할 때부터 입주자가 들어오면 꼭 식사부터 대접하겠다고 다짐했다며 사는 곳과 원룸이 멀지만 일부러 퇴근길이나 토요일 점심 때 찾아가 젊은이들 입맛에 맞는 곳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고 말했다. 권 씨는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리자 각 층 복도에 폐쇄회로(CC)TV와 밝은 조명을 달고 각 방에는 전문 경비업체의 경보장치를 설치해줬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고장이 나면 즉시 고쳐준다.

입주자 권오남 씨(27)는 전 주인은 얼굴도 몰랐고 관리도 엉망이었다며 예전엔 혼자 집에 오면 허전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 평일 저녁에 아저씨와 다른 방 사람과 함께 식사하니 정말 더불어 사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소영 씨(30여)는 식사부터 안전까지 챙겨주는 아저씨가 있어 든든하다며 잔소리 없는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칭찬했다. 집주인의 작은 배려에 이처럼 감격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정치권과 기성세대가 2030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지혜를 권 씨에게서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박훈상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