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편지쓰기의 날

미국에서 12월 7일은 편지쓰기의 날(Letter Writing Day)이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마르쿠스 키케로(BC106BC43)가 사망한 날을 기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당대에 국부()로 존경받았지만 실력자 카이사르와의 갈등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키케로는 로마를 떠나 그리스에 머물며 숱한 편지를 썼다. 미국의 초등학교 교사들은 북극의 산타클로즈가 제때 편지를 받으려면 이날에는 편지를 발송해야 한다며 동심을 다독인다. e메일 등에 밀려 종이편지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다.

편지는 종종 수업교재도 된다. 작곡가 베토벤이 1806년 불멸의 연인에게 보낸 편지는 러브레터의 전형이다. 당신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고, 내가 그대의 모든 것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바꿔줄 수 없나요라는 절규 속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쉬움이 담겨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에 참전한 아들 5명을 잃은 어머니에게 보낸 서한은 미국인들이 가장 아끼는 편지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달래보려는 내 언어가 얼마나 얄팍한지 알고 있지만 국가를 지키기 위한 장엄한 뜻에 고개를 숙인다는 편지 내용에서 링컨의 진심이 묻어난다.

영남 안동의 대학자 퇴계 이황과 호남 광주의 신진학자 기대승이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며 7년간 나눈 편지는 서신의 예의와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퇴계가 한 편지에서 지난번 잘못을 깨우쳐 주는 편지를 받고서 저의 앞선 편지에서 말이 거칠고 어긋난 곳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은 것은 그의 인품을 느끼게 한다. 컴퓨터 클릭 한번에 전달되는 e메일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로서는 생각을 곱씹어 글로 옮긴 뒤 인편으로 몇 달 씩 걸려 오가는 상황을 생각만 해도 답답하게 느낄 것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편지쓰기의 날을 맞아 골수동교동계 김옥두 전 국회의원이 한때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친구를 잃어버린 안타까움을 가장했지만 진짜 의도는 DJ 배신자란 낙인찍기였던 것 같다. 편지형식을 빌렸지만 기자들에게 e메일로 돌렸고 정작 한화갑은 수신자도 아니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편지라 하기도 민망하다. 차라리 140자 트위터로 노골적으로 한 대표를 힐난하는 편이 더 솔직했을 것 같다. 품격 있는 정치인의 글쓰기를 보는 날은 언제일까.

하 태 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