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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 대장, 에베레스트 남서벽 4전5기 도전

박영석 대장, 에베레스트 남서벽 4전5기 도전

Posted March. 26, 200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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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문득 생각이 나지요. 같이 살던 집에서 먼저 간 동료들의 속옷이나 등산 장비가 지금도 불쑥불쑥 나와요. 맨 정신으로 집에 들어가면 오전 4, 5시까지 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아요. 솔직히 괴롭습니다.

산악인 박영석 대장(46골드윈코리아 이사사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친형제처럼 지내다 2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고() 오희준, 이현조 대원 얘기를 할 때였다. 초점 없는 그의 눈동자는 저 멀리 히말라야의 설산() 어딘가를 오르는 듯했다.

두 대원을 가슴속에 묻다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2007년 5월 16일 오후 에베레스트 남서벽 6500m 지점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캠프4(7700m)에 올랐다 연락이 끊긴 지 13시간 만이었다. 당시 오 대원은 37세, 이 대원은 35세.

이들은 깎아지른 절벽에 설치한 캠프에서 잠시 쉬다가 눈사태를 맞았다. 1200m를 낙석과 함께 떨어진 시신들은 심하게 손상됐다. 한쪽 발에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텐트를 탈출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처럼 보였다.

처참한 광경에 박 대장은 말을 잃었다. 이들은 박 대장의 서울 월곡동 전세아파트에서 숙식을 함께했던 가족 같은 사이. 10년 넘게 서로를 의지하며 숱한 죽음의 문턱을 함께 넘었다. 마누라보다도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던 녀석들이었는데.

누구를 탓할 수는 없었다. 난생 처음 가는 생소한 루트, 위기는 항상 산재돼 있었다. 하지만 박 대장은 여전히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대원들의 사고는 모두 대장이었던 제 책임입니다. 패한 장수는 말이 없습니다.

탐험가를 꿈꿨던 아이

서울 남산 근처에서 나고 자란 박 대장이 산에 처음 오른 것은 네 살 때.

산을 좋아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오른 북한산 백운대가 첫 완등이었다. 자라면서 틈만 나면 산에 올랐다. 집에서 유일하게 칭찬받았던 게 산이나 나무를 잘 탄다는 얘기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김찬삼의 세계여행이라는 전집(10권)을 사줬어요. 에스키모의 개 썰매를 타고, 밀림 속을 헤매는 내용에 푹 빠졌지요. 고등학교 때까지 책이 해지도록 읽었어요.

유년 시절 박 대장의 우상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 고상돈 대원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만화 캐릭터에 열광할 무렵 박 대장의 책받침과 책표지에는 고 대원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저의 영웅이었죠. 눈부시게 하얀 산 위에서 우주복 같은 것을 입고 찍은 사진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지요(웃음).

1980년 우연히 서울시청 앞에서 본 카퍼레이드도 당시 고교 2년생이던 박 대장의 마음을 흔들었다.

삼엄한 시절이었는데 웬 사람들이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었어요. 보는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더라고요. 아, 저거다. 나도 동국대를 가야겠다고 다짐했죠.

반 석차로 치면 앞에서 세는 것보다 뒤에서 세는 게 빨랐다는 박 대장은 동국대에 입학해 산을 타겠다는 일념으로 머리를 싸맸다. 결국 재수 끝에 1983년 동국대 체육교육과에 합격했고 꿈에 그리던 산악부에 들어갔다.

박 대장은 2005년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도달)을 달성했다. 이름 석자를 알리며 유명세도 탔다.

지금도 그랜드슬램을 정말 제가 이뤘나 싶어요. 8000m 이상은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녀요. 숱한 동료들이 제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럭키 가이(행운아)일 뿐이에요.

박 대장은 쉰 살까지 현역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현역이란 정상 도전을 의미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후로는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원정대장(그는 현재 등반대장이다)으로 남고 싶다고. 그는 교수직 제의도 여럿 받았지만 나와 맞는 옷이 아니다라며 고사를 했다.

6070세에도 산은 올라야죠. 하지만 머리가 백발이 돼서까지 산 정상에 서고 싶지는 않아요. 베이스캠프를 지키며 후배들이 산을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의무

박 대장은 26일 다시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길에 나선다. 2년 전 사고에서 동료 둘을 잃은 바로 그 길이다.

마음만 먹는다고 갈 수 있는 에베레스트가 아니다. 원정을 위해서는 수억 원이 필요하다. 선발대는 19일 먼저 떠났지만 원정 경비는 아직 다 마련하지 못했다. 최근의 경제 위기로 기업들이 씀씀이를 줄인 게 박 대장의 원정길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그는 살고 있는 1억6000만 원짜리 전세아파트까지 내놓은 상황이다.

비용이 부족하다고 계획한 원정을 접을 수는 없어요. 빚을 내든 아파트를 내놓든 어떻게 해서라도 경비는 마련되겠지요. 정 안 되면 네팔에 있는 지인들에게라도 부탁을 해봐야죠.

박 대장은 입버릇처럼 1%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한다고 말한다. 이날도 낙석, 눈사태, 크레바스는 이미 예상하고 있는 어려움이다. 영하 4050도의 추위에도 이골이 나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두려운 상대는 바로 자신이다.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 때가 가장 극복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어쩌면 이번 원정은 히말라야의 깎아지른 절벽보다 원정비 마련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하지만 박 대장은 먼저 간 희준이와 현조를 생각하면 그만둘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 도전은 그들에게 바치는 헌정 원정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두 대원의 사진을 품에 넣고 정상 도전에 나선다. 함께 오르는 것이라고도 박 대장은 말했다. 후배들이 못다 이룬 꿈을 그렇게라도 이뤄주고 싶은 선배의 절절한 마음이었다.

박 대장은 2000년 뉴질랜드로 건너가 생활하고 있는 동갑내기 아내 홍성희 씨(46)와 아들 성민 군(14)을 생각해서도 도전을 멈출 수는 없다고 했다.

도전하며 살아왔고 이게 제 인생이에요. 도전을 멈추면 인간 박영석은 죽은 겁니다. 대원들에게 그리고 제 아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그는 숱한 산을 넘어 왔지만 아직 그의 앞에는 많은 산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표현대로 그게 인생이었다.



황인찬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