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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르크시즘의 이단자

Posted August. 05, 2005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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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마르크시즘을 갖고 고민했던, 그리고 거기서 벗어난 사람들이 인간의 깊이가 있고 인생의 멋이 있는 것 같다. 4선 의원을 지낸 남재희(전 노동부장관)씨가 저서 언론 정치 풍속사에 적은 말이다. 김산 김단야 김철수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게도 훈장을 추서한다고 해서 떠오르는 구절이다. 이들은 스스로 마르크시즘에서 제 발로 벗어난 것이라기보다, 밀려나거나 학살당한 비극의 주인공들이지만.

영국이나 미국에 김산처럼 철학적 객관성을 갖고 혹독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님 웨일스는 그렇게 김산 청년의 고뇌와 용기에 반해 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한국 역사도 실패의 되풀이였다. 나는 단 하나, 나 자신에 대해 승리했을 뿐이다라고 외친 항일 청년 김산. 그러나 일제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33세 나이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김철수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과 직접 이어진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수차에 걸쳐 체포되는 투사였으나 광복 후 내부 투쟁에 실망을 느끼고 결별하고 만다. 만년에는 그는 내 고향집에 인촌 김성수 선생이 말을 타고 와서, 영리하다고 소문난 나를 가르치고 키우겠다며 일본에 데려다 주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런 은인 덕에 와세다대까지 다닐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비문을 빈 채로 두라고 유언도 했다. 마르크시스트였다고 믿기 어려운 로맨티시스트의 일면이다.

김단야도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 서클 화요회의 멤버였으나, 1937년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당해 처형당하는 운명이 되고 만다. 혁명은 악마와 같아 제 자식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식민지 청년의 울분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나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적이지 못해서일 것이다. 젊어서 왼쪽에 서 보지 않은 자도, 그리고 나중에 오른쪽으로 돌아서지 않는 자도 다 바보다. 세월이 흐를수록 새겨보게 되는 말이다.

김 충 식 논설위원 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