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구시가지(Old Town)는 사실 구시가지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바르샤바의 시민군과 유대인의 잇따른 봉기에 격분한 아돌프 히틀러는 바르샤바 파괴를 명령했다. 나치는 바르샤바의 모든 건물에 폭약을 설치해 터뜨렸다. 로마군이 완전히 파괴해 사라졌던 카르타고처럼 바르샤바는 지도상의 이름만 남았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당시의 참상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의 바르샤바 구시가지는 전후 폴란드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옛 모습을 재현한 신시가지다.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였던 독일과 폴란드가 1일 유럽연합(EU)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났다. 같은 날 EU에 가입한 체코도 300년간 자국을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와 한 식구가 됐다. 1000년간 지배-피지배 관계였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도 나란히 EU에 가입했다. 돌아보면 EU 기존 회원국과 중동유럽 신규 가입국은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 진영으로 나뉘어 총을 맞댔던 적국이었다. 영국 BBC방송이 EU 확대로 비로소 냉전종식의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달 5일 프랑스 노르망디에서는 또 다른 화해가 이루어진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행사에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총리가 참석한다. 2차대전을 연합군 승리로 이끈 상륙작전 기념행사에 독일 정부수반이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다. 유럽에서 연달아 이루어지는 화해의 밑바탕에는 가해국의 진솔한 사과가 깔려 있다. 1970년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비를 찾은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는 빗물이 흥건한 땅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나치의 만행을 사죄했다.
유럽과 달리 한반도 주변은 아직 불화()의 먹구름이 뒤덮여 있다. 독도다, 동해 표기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한국 국민은 가해자였던 일본 지도자의 눈물의 속죄 대신 기습 신사참배에 익숙해져 있다. 그렇다고 일본 탓만 하고 있을 형편도 못 된다. 남과 북의 화해, 무엇보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선 남-남의 화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유럽에 부는 화해의 훈풍이 유라시아 대륙을 지나 한반도까지 불어올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