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던 지난 20세기의 세월을 한꺼번에 떨쳐버리려는 듯 21세기 초엽에 우리는 월드컵 잔치를 통해 우리 자신을 확인하고 스스로 놀라면서 공동체의 실상을 경험했다.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드높였으며 높은 질서의식을 칭찬하고, 경제 4강을 말하고 문화 4강을 말하면서,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이 변하고 있다. 강요와 억압의 문화에서 자발성에 근거한 즐김의 문화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지방선거가 반쪽짜리로 치러졌고 각종 게이트에 대한 수사가 관심사에서 뒷전으로 밀린 듯하며 약자와 소수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논의의 진전 없이 정치권은 그저 월드컵축제에서 나타난 온 국민의 열기를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활용할 수 있을지에만 골몰하고 있다. 특히 대통령 친인척들의 비리에 관한 근본적인 방지책을 모색하지 않고 대통령중임제니 의원내각제니 하는 개헌논의만 불쑥불쑥 던져놓고 있다. 대통령중임제가 되면, 혹은 의원내각제만 되면 레임덕이 없어지고 그러면 권력의 비리도 없어진다는 것인가. 아니면 레임덕을 없애 각종 비리가 덮어질 수 있게 하자는 말인가.
중요한 것은 정부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운용의 문제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제도 운용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지 제도 자체를 뜯어고치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 특유의 대통령단임제는 이미 우리나라에서 강한 역사성을 띠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대통령제의 성격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에서 적절히 표현되고 있지만 대통령 자체가 선출된 제왕인 점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제왕적으로 행사될 가능성은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제를 처음 채택했던 미국에서 대통령제가 성공하고 다른 나라에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대한 정치적법적 제한장치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의 핵심적 내용은 인사와 재정의 두 영역이다. 권력분립의 실질도 바로 이 인사와 재정의 분리 및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권한은 어떠한가. 적어도 대통령의 인사권에 관한 한 미국의 대통령보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권한이 훨씬 강력하다. 왜냐하면 우리 헌법 제78조에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원을 임면한다고 하여 인사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은 헌법상 규정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소불위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임명 가능한 직위가 수천개를 헤아릴 정도이니 가히 전제군주와 다르지 않다. 정부 부처의 장은 말할 것도 없고 공기업의 장까지도 관련 법률에 따라 대통령이 임의로 임면할 수 있다. 이것이 낙하산인사가 횡행하는 이유다. 미국의 경우 각 주의 정부에서 공무원의 임명이 따로 행해지고 연방정부도 주요 공무원과 하급공무원으로 나누어 연방의회의 제한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또 연방대법원의 판례를 통해 전문적인 독립규제위원회를 인정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한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각종 비리는 모두 대통령의 인사권에서 비롯된다. 물론 대통령이 가진 인사권은 대통령 자신의 정책결정 및 그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대통령의 인사권이 남용될 가능성이다. 인사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권을 대통령이 장악하고 있고 여기에 대통령을 둘러싼 비공식 권력집단이 각 영역의 최종적인 정책결정자인 국가기관의 장에게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빌미로 하여 비리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고위직 공직자에게 그의 목숨을 틀어쥐고 있는 대통령과 그 주변의 권력집단에 과감하게 맞서 저항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 개인의 힘으로 비리를 방지하지 못한다면 제도적 장치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인사권을 포함해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직접 헌법을 개정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헌법 규정으로도 충분히 논의가 가능하다. 헌법 규정에 저촉되지 않고도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정치권은 그저 대통령선거에만 매달려 어떻게 하면 집권할 것인가에 골몰하지 말고 무소불위인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구현하는 정치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월드컵을 통해 나타난 국민의 수준에 맞게 정치권도 변해야 할 때다. (이헌환, 경원대 교수, 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