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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어느 '친미주의자'의 실망

Posted February. 18, 200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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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호주 방문 길에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 대륙을 탐험해 영국영토로 선언한 제임스 쿡 선장보다 400년이나 앞선 1300년대에 이미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이 대륙에 상륙했었고 18세기에는 중국인들이 거주했던 흔적까지 남아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와 바로 이웃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먼 옛날 호주를 찾아 나설 엄두를 냈었을까. 쇄국정책으로 나라 문을 잠그고 안으로 당쟁에만 몰두했던 우리네 과거와 비교할 때 국경을 넘어 신세계를 찾아 나선 그들의 개방적 정신에 경탄할 뿐이다.

수세기가 지난 지금도 개방은 역시 미래를 향한 출구임에 변함없다. 특히 경제부문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그걸 강조하다 보니 각종 모임에서 국수주의 성향의 주장들과 논쟁을 하게 되고 그래서 간혹 필자는 친미주의자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걸 나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몇 년의 미국생활을 통해 그들의 인도주의와 균형감 있는 합리주의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 정부와 의회가 산업은행의 현대전자 회사채 신속인수 문제에 대해 위협을 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에 대한 인상은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미국측 주장은 한마디로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옳다면 당신들은 왜 그런 짓을 저지르면서 외국정부에는 못하게 하는지 묻고 싶다.

1979년 크라이슬러의 도산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가 사기업에 12억달러의 빚보증을 해줬던 것은 경제사에서 대규모 정부 지원의 효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대부조합(우리의 신용금고)의 연쇄 도산으로 미국이 심각한 금융위기를 맞았을 때 정부가 수백억달러를 지원해서 살린 기록이 있고 90년대 씨티은행이 남미에서 큰돈을 물려 도산 직전에 갔을 때 정부가 엄청난 지원을 퍼부었던 사실은 잘 알려진 역사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바로 작년에는 헤지펀드의 원조인 롱 텀 캐피털 매니지먼트가 망했을 때 이 회사를 바로 세우려고 미국 정부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세계적으로 증인들이 무수히 많다. 더 나아가 미국의 주 정부 단위로 볼 때 기업에 행해진 정부의 지원 사례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지 않은가.

영국 웨일스정부가 외국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수천만달러씩 돈을 대주는 문제는 또 왜 시비를 걸지 못하며 미국 자본에 넘어간 제일은행에 대해 우리 정부가 국민의 비난을 무릅쓰고 퍼부은 현금지원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이번에 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한 의원들은 주로 현대전자와 경합관계에 있는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회사의 공장들이 위치한 아이다호와 유타주 출신이다. 그리고 그들이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로부터 수만달러씩 정치헌금을 받았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지역구내 기업을 보호하려는 것이야 나무랄 수 없지만 그들의 주장이 합리성을 잃을 때는 설득력을 상실한다.

특히 현대전자 관련 의회 제안문에 등장하는 불법적이라는 단어는 재판도 없이 어떻게 법을 어겼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말이며 또 어느 나라 법을 어겼다는 말인지 혼란스럽다. 현대전자를 도산 기업이라고 칭한 부분도 그렇다. 반도체 가격이 1달러만 올라도 매출액이 6억달러나 추가되는 회사를 놓고 유동성이 부족한 어느 한 특정시점에서 도산을 단정한다면 세계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그들의 주장은 우리가 외환위기 시절 국제통화기금(IMF)측과 맺었던 부실기업은 망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위반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IMF가 이번 한국 정부의 조치는 정당하다고 정리해준 사실은 왜 애써 외면하는지 궁금하다. 미국은 필요에 따라 국제기구의 결정을 얼마든지 무시하고 조롱할 권리를 가진 나라인가.

동료 의원이 발의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 의회가 결의안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는 비합리적 주장을 근거로 비합리적 결정이 내려질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으로 미국이 한국에서 잃을 것이 많은지 얻는 것이 많은지를 우리는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다. 많은 친미주의자들이 이번 일로 고개를 돌린다면 미국은 자국업체가 외국 경쟁기업을 쓰러뜨려 반도체 몇 개 더 팔아 챙긴 이익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을 안게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규민(논설위원)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