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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 금지법

Posted June. 06, 2012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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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이란 정상적인 학교교육 과정보다 앞서 진도를 나가는 사교육 프로그램을 말한다. 선행학습은 스스로 공부하는 예습과는 다르다. 한 학기 선행은 기본이고 대체로 1년, 심한 경우 3년씩 진도를 앞서 나간다. 선행이 너무 심하다 보니 중학생이 중학과정을 공부하려면 초등학생 학원으로 가야 할 정도다. 일부 특목고 교장들은 입시설명회에서 우리 학교로 오려면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오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며 선행학습을 부채질한다.

선행학습이 제일 심한 과목이 수학이다. 지난해 7월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초등학교 4학년 이상에서 고등학생까지 학생과 학부모 4715명을 대상으로 수학 사교육 실태를 조사했더니 한 학기 이상 선행하는 비율이 초등학생은 64.2%, 중학생은 56.3%, 고등학생은 62.9%였다. 3년 이상 선행한다는 응답도 초등학생 3.47%, 중학생 2.09%나 됐다. 실제로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는 머리통이 자그마한 초등학생들이 중학생도 힘겨워하는 도형의 합동, 삼각함수, 등비수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선행학습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최영석 송파청산수학원 원장은 최근 열린 한 세미나에서 선행학습을 한 학생의 7080%는 배운 게 배운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배운 걸 소화하지 못한 채 진도만 나간 학생들은 누적적으로 학습이 결손돼 착실하게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따라간 학생보다도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얘기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상위 5% 안팎의 학생들은 선행학습 덕을 본다. 하지만 대다수는 기초를 충분히 다지지도 못한 채 선행학습에 시간, 돈, 체력을 낭비하고 있다.

교육당국이 교육과정을 설계할 때는 발달단계에 따른 뇌 구조와 학습역량을 감안해 만든다. 그런데도 내 자식만 손해 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학부모들은 자녀를 선행학습 학원으로 내몰고 있다. 학원들도 맹렬한 마케팅을 하고 있다. 영화관에서 맨 앞줄의 관객이 일어나서 영화를 보면 뒷줄 관객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영화를 관람해야 한다. 모두가 불편하게 영화를 보는 패자()가 되고 만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시민단체가 선행학습 금지법 제정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학습을 법으로 금지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론이 나오지만 오죽하면 이런 법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올까.

정 성 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