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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혹은 시간의 담론-
‘봄날은 간다’
  - 이재현


4 or 3'

일상은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고, 좀 더 큰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시작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中)



〈봄날은 간다〉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일상에 던져진 사랑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사랑의 일상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이란 매우 낯익은 개념이다. 언제부턴가 일상에 특권적인 의미가 부여되면서, '일상성'의 문제는 모든 담론에 있어 기본 어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봄날은 간다〉도 역시 이 일상성에 묶여 있다. 그렇다면 일상성이란 무엇인가? 일상성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상은 삶에 있어서 곧 지속을 의미한다. 부분들로 나뉘어질 수 없는 연속체로서 추상(抽象)할 수 없는―즉, 뽑아 낼 수 없는 무정형의 덩어리. 여기서 일상이 나뉘어 질 수 없고, 추출될 수 없다는 것은 일상이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시간 개념―즉 지속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우리의 내면적인 삶의 실재는 단지 검증 가능한 현상들의 집합이 아니고, 지속이며 흐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베르그송의 입장은 시간이 균질하지 않고 계량화될 수도 없으며, 시간은 존재 외부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존재 내에서만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봄날은 간다〉에서 일상에서 관찰된 사랑의 총체적인 모습은 상우와 은수의 사랑이 완성되고 와해되는 과정(흐름)이다. 상우와 은수의 일상적인 행위들은 이러한 사랑의 과정들을 촘촘히 메우고 있는데 여기서 그들의 일상적인 언어와 몸짓은 매순간 '이미 끝나버린 것'이 아닌 '무언가가 끊임없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영화 속에서 그들의 일상적인 행위가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향해 지속되는 과정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봄날은 간다〉를 '검증 가능한 현상'들에 집중에서 바라본다면 영화는 관객에게 아무것도 전달해 주지 않는다. 상우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은 단지 지루한 롱 테이크일 뿐이며, 알몸의 상우가 은수의 등을 긁어주는 것은 싱거운 '베드씬'일 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일상적인 행위들이 사랑과 상실의 언어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지속이라는 시간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동시에〈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의 에쎈스가 추출될 수 있었던 것, 반 박자의 차이가 사랑의 날카로움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의 비균질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장면들이다. 이처럼 영화는 베르그송적인 시간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시간의 지배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영화는 넌센스가 되고 만다. 그런데,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시간은 모두 사랑의 시간들로만 환원되는가?



영화는 사랑이 지속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삶이라는 더 큰 지속에 사랑을 위치시킨다.〈봄날은 간다〉는 상우와 은수만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없는 분산적인 내러티브를 취하고 있다. 사랑의 설레임과 아픔을 겪는 주인공 옆에서 아버지는 노래방 기기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고모는 화투를 친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꾸만 역(驛)으로 할아버지를 기다리러 가신다. 이처럼 상우에게는 가족이, 은수의 아파트와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이 사는 오래된 한옥이 있다. 영화는 사랑의 시간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사랑의 시간 그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긴 삶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상우와 은수는 사랑의 시간 보다 더 깊은 삶의 지속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이 과정이라면 사랑 또한 삶의 한 과정인 것이다. 〈봄날은 간다〉가 전반적으로 멜로 영화의 색채를 띠면서도 매순간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바로 이렇게 삶이라는 거대한 지속이 사랑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봄날은 간다〉는 멜로 영화인 동시에 상우라는 한 남자의 가족사적인 영화가 되고 성장기 영화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영화를 지배하는 지속이라는 시간의 성격은 무엇인가? 현재의 끊임없는 연속인가, 아니면 과거의 한없는 축적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가오는 미래의 쉼없는 준비과정인가? 영화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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