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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굴 　　　　- 임이연(33)


편하게 앉으세요. 제가 램프를 켤 테니까 앞쪽을 보시고요. 네, 그렇게 움직이지 마세요. 아래에 달린 둥근 거울을 들여다보세요. 피부 표면이 보일 거예요. 양쪽 볼에 얼룩진 부분이 보이시죠? 기미로 착색이 되어서 그래요. 눈두덩이 밑에 다크 서클이 보이고요. 피부가 너무나 건조한 상태이군요.
여자는 얼굴에 캐츠스코프를 쓰고 있다. 쓴 모습이 고양이를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피부 측정기이다. 버튼을 누르면 우드 램프에 불이 들어와 피부 표면의 모습과 각질층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여자의 머리에서 그것을 벗긴다. 그리고 우드 램프의 전원을 끄고 의자를 당겨 앉는다. 여자의 피부는 엷은 보라색을 띠고 있다. 상담 신청서에 건성피부라고 휘갈겨 쓴다. 여자는 동작을 멈춘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의 눈 아래쪽에는 자외선 때문이거나, 임신, 약물에 의해 생겼을 기미가 두드러져 있다. 마사지를 조금 전에 마친 여자는 맨 얼굴이다. 신청서를 끌어다가 생년월일을 들여다본다. 삼십대 초반이다. 여자에게 해야 할 말을 고르지만 생각이 갈래갈래 흩어진다. 손이 가운 주머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핸드폰에 손가락이 가 닿는다. 고리에 매달린 종을 힘을 주어 잡아당긴다. 짤그랑거리며 전화기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규에게 연락 있었습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허겁지겁 튀어 들어왔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성류굴에서 보았던 규의 번들거리던 눈빛이 떠오른다. 기어코....... 손을 빼내 옷섶에 문지른다. 손바닥이 미끈거릴 정도로 땀이 축축하다. 여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사무실을 불안하게 두리번거린다. 그녀의 눈길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는 캐비닛으로 향한다. 그 위에는 회사에서 나오는 미용 교양지와 샘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신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을 열고 화이트 앰플 한 상자, 콘트롤 마스크, 비타젠을 한 손 가득 꺼낸다. 화장품을 꺼내기 위해 허리를 굽혔던 신 부장이 빙글 돌아선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그 웃음은 이제 막 한 건을 올렸다는 만족감의 표시일 것이다. 뒤에 서 있던 수습사원이 화장품을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간다. 신부장의 책상에는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다. 화장을 지운 얼굴이어서 나이를 짐작하기가 더 쉽다. 저 나이의 여자들은 조금만 분위기를 띄우고, 비위를 맞추면 금세 고객이 된다. 신 부장이 아줌마를 향해 앰플을 들어 보이는 것을 보다 고개를 돌린다. 벽에 그려져 있는 매출 그래프를 보지 않더라도 신 부장은 벌써 선두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 내년에 그녀는 나보다 빠른 승진을 할지도 모른다.
여자의 눈이 벽에 가 머문다. 몹시 불안정한 눈길이다. 나는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여자의 눈길을 따라간다. 오후 세시, 여자는 제일신탁 앞의 은행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거리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에 노란 은행잎이 달그락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여자는 짧은 단발머리에 입술에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았다. 트렌치 코트의 앞단추가 벌어져 카키색의 스카프가 무방비하게 펄럭거렸다. 우리가 다가갈 때까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듯,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지금 홍보 기간이라서 무료로 마사지를 해드려요. 2회까지 해드리니까 놓치지 마세요. 전 별로 생각이.... 우물거리는 여자에게 미스 지가 활짝 웃었다. 한번 받아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여자는 발끝만 내려다보다가 느린 걸음으로 우리를 따라왔다. 여자는 룸에서 한 시간 동안 마사지를 받았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서 곤한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내가 다가갔을 때 여자는 가늘게 코를 골고 있었다. 가운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곤히 잠든 고객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규의 친구였다. 나는 겨우 남자를 기억해 냈다. 그는 규를 찾고 있었다. 수요일에 봉화에 있는 동굴에 간다고 했어요. 오늘쯤은 돌아왔을 텐데요.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숨차게 흘러나왔다. 어제 연구회 사람들이 너뱅이굴에서 규의 랜턴을 발견했습니다.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았고, 집에도 연락이 없습니다. 지금 회원들과 봉화군의 119가 굴 속을 수색하고 있어요. 복도가 갑자기 시끄러웠다. 오후의 커피 브레이크를 갖는 국장들이 짝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김 국장이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나를 마뜩찮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9월 내 실적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벽에 손을 짚는 내게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연락을 해보고 다시 전화를 드리죠. 미스 지가 부장님, 하고 작게 부르며 옆구리를 쿡 찌른다.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가락을 가운 주머니에서 빼낸다.
"어때 마사지 받으니까 좋으셨어요?"
여자의 피부는 적당하게 촉촉해져 있다. 건조한 얼굴을 감안해 집중적으로 수분 팩을 한 탓이다. 미스 지가 따듯하게 데워진 캔 커피를 들고 온다. 미스 지는 수습사원이다. 그녀는 내 고객들을 끌어오고, 그 대신 내게 피부 관리사 현장 교육을 받는다. 일종의 도제수업이다. 본사 교육이 턱없이 부족해 대부분 부장들 밑에는 한두 명씩의 수습사원이 팀을 이루어 일한다.
"피부가 전체적으로 수분이 부족해 탄력이 떨어지고 있어요. 게다가 각질층이 얇아져 있어 주름이 생기기 쉽고요. T존 부위에 거뭇거뭇한 블랙 헤드가 있어 피부색이 어둡게 보이죠. 관리를 한번 받아보세요. 금세 피부가 좋아질 거예요."
내 말을 묵묵히 듣던 여자가 휘둥그러진 눈으로 미스 지를 쳐다본다. 여자의 눈동자가 초조하게 굴러간다. 잘못 짚은 건가. 여자는 피부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불현듯 한쪽 머리가 둥 하게 울리며 현기증이 몰려온다. 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킨다. 웬만하면 미스 지에게 상담을 맡기지 않지만, 여자는 고객이 될 사람 같지가 않다.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사 년이 넘었다. 이제는 상담을 할 때 상대방이 고객이 될지 안 될지 감이 온다. 마사지를 받은 후 매끈하고 촉촉해진 피부 상태에서 여자들을 설득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상담을 할 때 석고 팩이라든가, 콜라겐 벨벳 마스크, 모델링 등 특수 관리가 세 번쯤 들어간다고 말하면 여자들의 표정이 흔들린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개인 숍에서는 옵션 금액이 들어가지만 회사 영업팀인 이곳에서는 무료로 들어간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쯤되면 웬만한 여자들은 신청서에 사인을 하게 되어 있다. 미스 지는 눈치껏 캐비닛으로 가서 콘트롤 마스크, 비타젠, 화이트 앰플 한 상자를 꺼내 올 것이다. 관리에 들어가는 고객들에게 지급되는 화장품들이다. 나는 미스 지에게 적당히 하다 보내라고 눈짓을 한 후 마사지 룸으로 들어간다.
침대에는 현이 엄마가 누워 있다. 그녀는 몇 달 전에 내 고객이 되었다. 현이 엄마는 군살하나 없이 날씬하다. 의자를 끌어와 머리맡에 앉는다. 어디 갔다 왔어. 내 기척에 그녀가 눈을 뜬다. 상담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내 말에 현이 엄마가 다시 눈을 감는다. 수영장에 다녀오는 길이라면서도 그녀는 매번 화장을 꼼꼼히 하고 있다. 리무버를 적신 솜으로 현이 엄마의 눈 가장자리를 닦아낸다. 면봉으로 마스카라가 칠해진 속눈썹 한 올 한 올을 닦아낸 다음, 립스틱도 화장솜으로 눌러가며 왼편 입꼬리에서 오른편으로 움직이며 지운다. 그리고 깨끗한 물에 적신 퍼프를 잘 짜서 다시 한 번 눈가와 입술을 닦는다. 색조화장을 다 지울 동안 현이 엄마는 고른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있다. 클렌징 크림을 그녀의 얼굴에 펴 바른다. 양손 전체를 이용해 턱 부위부터 둥글게 원을 돌리기 시작해 위로 따라 올라간다. 손목이 리듬감을 타기 시작한다. 가운뎃손가락과 넷째손가락을 이용해 양 뺨 주위를 둥글게 돌리며 클렌징을 한다. 손가락들이 현이 엄마의 콧등으로 따라 올라가 이마는 큰 원을 그리며 놀린다. 관자놀이를 통과하여 양 뺨을 다시 한 번 마사지를 하고 턱으로 내려와 본래의 원 모양을 그리며 돌려준다. 오른손과 왼손 전체로 번갈아 가며 목에도 마사지를 시작한다. 목 부근에서 갑자기 손가락이 비틀하더니 현이 엄마의 쇄골까지 미끄러져 내린다. 손목에 힘을 준다는 것이 잘못해서 그녀의 목을 힘껏 눌러버린다. 눈앞이 아득해진다. 고른 숨을 내쉬던 현이 엄마가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아.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건강이 첫째야. 그녀가 눈을 감으며 중얼거린다. 언제 들어왔는지 뒤에 서 있던 미스 지가 작게 혀를 찬다. 티슈를 눌러 유분기를 제거하고, 미스 지에게 보온기에서 스팀 타월을 꺼내오라고 말한다. 혀가 두부처럼 엉겨 말하기가 힘들다.
현이 엄마의 턱에 뜨거운 타월을 덮고 양손으로 두세 번 눌러 준다. 그 모습 그대로 이마 쪽으로 잡아당긴다. 다시 턱 쪽으로 수건을 잡아당기며 얼굴이 뜨거운 열에 익숙해지도록 잠깐 기다린다. 그리고 코를 빼놓고 수건을 삼각형 모양으로 접어 얼굴에 덮는다. 잠시 후 손바닥으로 얼굴을 눌러주고, 신경점을 꾹꾹 지압시킨다. 타월을 펴서 이마에서부터 시작해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클렌징 크림을 닦아낸다. 현이 엄마의 얼굴에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난 뒤, 마사지 크림통을 가지러 가는 내게 미스 지가 따라붙는다. 부장님, 제가 할게요. 좀 쉬세요.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미스 지는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본다. 아까 그 여자 말예요. 카드로 계산했어요. 영 관심 없는 눈초리더니..... 미스 지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으로 크림을 떠서 고객의 얼굴에 바른다. 나는 잠들어 있는 현이 엄마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밖으로 나간다.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에서 담배를 꺼낸다. 고개를 들다가 김국장과 눈길이 부딪힌다. 김 국장은 내가 담배를 꺼내 든 것을 본 모양이다. 그녀의 흰 이마가 찌푸려진다.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에 걸터앉는다. 가운 주머니에서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깊숙이 한 모금 빨아들인다. 가슴이 불안정하게 후득인다. 핸드폰 소리에 놀라 기어코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황급히 발로 비벼 끄고 수화기를 연다. 아까 전화한 규의 친구다. 좀 이따,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제가 근처로 가겠습니다. 대답을 하려는데 기침이 터져나온다. 담뱃불은 이미 꺼졌는데 이 기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간신히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폴더를 닫는다. 다시 전화기를 열어 규의 회사 전화번호를 누른다. 손가락이 떨려서 두 번이나 번호를 잘못 누른다. 신호음이 길게 떨어진다. 전화를 받은 여자에게 규를 바꿔 달라고 말한다.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출근하시지 않았는데요 한다. 지금 실종 신고가.......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를 닫아버린다. 사실이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겨우 화장실 문을 밀고 나간다. 다리가 저릿저릿하다. 세면대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본다. 퍼렇게 질려 있다. 그런 어둠을 한 번 보았으면 좋겠어. 처음 노동 굴의 사진을 보았을 때처럼 말이지. 어디선가 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냥 좋아서 다니는 거야. 특별한 이유는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내가 일축했을 때, 그는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그렇게 잘 알아. 나도 모르는데 네가 무슨 수로 다 아느냔 말이야!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없어. 그저 흉내만 내다 가는 거지.
이 년 전 성류굴이었다. 경북 울진에 있는 그 동굴에 갔었을 때가 말이다. 규는 항상 굴을 찾아다니느라 주말엔 대개 서울을 떠나 있었다. 그가 없을 때는 여자 친구들을 만나거나, 혼자 콘서트에 가서 무명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아니면 시장을 걸어다니다 혼자 물건을 사 모으기도 했다. 왜 그러고도 헤어지지 않는 거야. 그에 대해 들은 신 부장이 하던 말이다. 글쎄. 왜 그랬을까. 그런 식으로 팔 년을 만났으니 말이다. 그 여행은 동해 바다를 따라 7번 국도를 달리는 여정이었다. 통일 전망대가 있는 고성에서부터 포항까지 구비구비 바다를 돌고 산을 돌아 달리는 길이다. 강원도 도계를 지나 경상북도 도계를 넘어섰을 때까지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가끔 담배를 비벼 끄고 새로 불을 붙일 뿐이었다. 왕피천을 지나 수산교를 넘었을 때 성류굴에 가 볼까 하고, 생각난 듯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수산교 앞에서 유턴 해 차를 돌렸다. 동굴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29년 용진에서 였지. 하지만 근대적인 굴 탐사가 시작된 것은 58년 울진에서 성류굴이 발견되어서야. 관광굴이지만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왕피천의 물길을 따라 걸어가며 그가 말했다. 강물에 선유산의 나무들이 물그림자를 이루며 어른거렸다. 동굴 머리 쪽에는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측백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입구부터 시작해 각종 기념품을 파는 집들이 즐비했다. 한참 기다려 입굴을 할 수 있었다. 여름철인데도 굴 속이라 그런지 시원했다. 그러나 굴로 들어섰을 때부터 매캐한 냄새에 비위가 상했다. 석회 냄새라고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통로를 따라 우리도 걸었다. 그는 빨대 모양의 종유석 앞에 서 있다가 사진 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종유석에는 나이테 모양의 단면들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내가 저것이 종유석의 나이를 뜻하는 거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저것은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면서 표면이 저렇게 패이는 거지 나이와는 상관이 없어. 그는 굴 속에 들어오자 갑자기 활기에 넘쳐 유쾌해졌다. 그러나 나는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습하게 차 있는 습기와 매캐한 석회 냄새에 속이 메슥거렸다. 비좁은 통로를 버르적거리며 걸을 때는 꼭 죽을 것만 같았다. 30미터가 넘는다는 석회호수 앞에서 그는 뿌연 물 속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가 어둠 어쩌고 하며 말을 꺼낸 것이 그때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절리를 따라 오목하게 패인 구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런 형태는 주로 이곳같이 석회동굴의 포화수대에서 많이 생기는 모양이지.... 사람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이곳에 어떤 어둠이 있었을까 상상해 봐. 어둠이란 말이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눈빛이 물개 등처럼 검게 번들거렸다. 사람을 홀리게 만들어.... 처음엔 두렵다가도 다시 만나고 싶어지게 하는.... 그런 어둠을 한 번만 보았으면.... 심연(深淵)이라고 하더라. 깊은 못.... 나는 그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고 밖으로 나가자고 소리쳤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밀실 공포증이 있는 거야? 그의 눈이 일그러졌다. 그는 굴 속에 더 있고 싶어했지만 나는 나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막장 끝까지 갔다가 돌아서 나왔다.
세면대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며 오래오래 손을 씻는다. 혹시라도 담뱃진 냄새가 배어 있다간 고객들에게 낭패다. 룸으로 들어가니 미스 지가 현이 엄마에게 벨벳 마스크를 하고 있다. 화이트 앰플을 손가락으로 눌러 짠 미스 지는 현이 엄마의 얼굴에 구석구석 바른다. 벨벳을 할 때 미백 성분이 강화된 화이트 앰플과 에센스를 아낌없이 써야 피부가 유연해진다. 내가 옆에 서서 지켜보자 미스 지는 손놀림을 계속하며 괜찮으세요? 하며 묻는다. 미스 지는 눈, 코 및 입 주위를 절개한 벨벳 마스크를 현이 엄마의 얼굴에 덮는다. 그리고 화장수를 솜에 적셔 마스크를 꾹꾹 눌러가며 적신다. 벨벳은 현이 엄마처럼 건성 피부나 노화된 피부에 했을 때 효과를 볼 수 있는 팩이다. 미스 지는 마스크를 다 붙이고 현이 엄마의 눈에 물기를 짜낸 아이 패드를 올려놓는다. 티슈로 손을 훔치는 미스 지를 구석으로 끌고 간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도록 작게 소곤거린다. 약속이 있어서 삼십 분쯤 나갔다 와야 되거든. 5시쯤에 고객이 올 거야. 누군지 알지? 미스 지는 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내 얼굴에서 무슨 단서라도 잡을 사람처럼 뚫어지게 쳐다본다. 부장님. 무슨 일 있는 거죠? 나는 미스 지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고개를 돌린다. 가운을 벗어 놓고 사무실로 나간다. 아니나다를까 김 국장이 뜨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한창 바쁜 시간에 가운을 벗고 나가는 내가 못마땅한 표정이다. 신 부장은 또 새로운 고객과 상담중인 것 같다. 아이를 데리고 앉아 있는 여자가 열심히 얘기를 듣고 있다. 신 부장은 이 지국에서 가장 많은 고객을 가지고 있다. 김 국장이 유난히 신 부장을 예뻐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김 국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빠르게 걸어나간다. 등이 연신 따끔거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김 국장이 뒤따라 나오지 않을까 신경이 곤두선다. 마주쳐 보았자 좋은 소리 듣기는 글렀다. 규는 봉화로 내려가기 전날 밤에 나를 찾아왔었다. 전에 없던 행동이었다. 언제나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어디 다녀왔어 하던 식에 비하면 의외였다. 그에게 연락이 없으면 으레 그러려니 했다. 어느 때는 그를 기다린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통과한다.
규가 찾아 온 날은 밤늦게 예약 손님이 있어서 몸이 더 피곤했다. 밤안개가 다가와 주위가 부옇게 흐려 있었다. 현관 열쇠를 꽂는데 복도 끝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 그림자는 내게 점점 가까이 왔다. 규였다. 또 탐사를 떠나는 듯 무거워 보이는 키스링 배낭을 짊어지고 있다. 그는 밥은 먹고 일하냐? 뭔 퇴근이 이렇게 늦어 하며 씩 웃었다. 현관으로 들어오자 그가 배낭을 텅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커피 드립퍼에 물을 붓는 동안 그는 베란다 창으로 흐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오늘 좀 자고 가자. 내일 일찍 깨어 주면 더 좋고."
"이번에는 또 어디야? "
"봉화군 석포면에 있는 굴이야. 아직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
말 끝에 그가 비밀스럽게 웃었다. 무언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커피잔을 그에게 주고 바닥에 앉았다. 무릎걸음으로 배낭으로 다가가 매듭을 풀고 안을 들여다본다. 없는 게 없다. 암벽 등반용 장갑, 헬멧, 랜턴, 너무 많아 개수를 셀 수 없는 건전지, 펜치, 니퍼, 드라이버, 약간의 전선줄, 테이프 등 시장의 잡화점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노란 헬멧을 꺼내어 머리에 써보았다. 앞쪽에 불이 들어오는 헤드 랜턴이 장착되어 있었다. 불을 켜니 갑자기 눈이 부셨다. 어리둥절한 내 모습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헬멧을 벗어 놓고 랜턴을 들어 불을 켰다. 형광등 아래여서 그다지 불빛이 밝지가 않았다.
"왜 랜턴에 끈이 달려 있는 거지?"
"동굴을 수직으로 내려갈 때 잘못해서 랜턴이 퉁탕거리며 아래로 떨어질 때가 있어. 그때 초보자들은 랜턴을 찾으려고 겁 없이 내려가려고 하지. 그러다 실족을 해서 아래로 추락하거든. 끈이 있으면 손에서 놓치더라도 밑으로 떨어지지가 않아. 그래도 굴 속은 예측할 수 없지만."
그가 곁에 가까이 앉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한 달 전 너뱅이굴에서 그 어둠을 보았다. 심연이더라. 심연(深淵). 정말 깊은 못에 빠진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생각해 보니 동굴을 찾아다닌 지 벌써 십 년 가까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 그날 처음으로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규의 얼굴이 급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무엇이 말야?"
"지칠 줄 모르는 내가 두렵다. 어둠에 점점 더 내성이 생기는 내가. 한 번만, 온전히 본다면...... 돌아와서 나를 붙들어 맬 거야. 이젠 솔직히 겁이 난다........"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굴을 멀리하겠다니. 내가 옆에서 지켜본 그는 굴을 멀리할 사람이 아니다. 한동안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내게 전화를 걸어댈 것이다. 일요일에 영화라도 보러 갈까? 인사동에서 퍼포먼스가 벌어진단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그는 자주 짜증을 부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소한 일을 가지고 툴툴댈 것이다. 그런 날들이 얼마쯤 흐르면 그는 키스링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떠날 것이다. 몇 년 전 그때처럼 말이다. 수요일 아침, 그는 이르게 현관문을 나섰다. 복도로 그의 등산화가 텅텅 울리며 멀어져갔다. 문을 닫다 신발장 위에 그의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개를 떨구고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텅하고 열리며 여자가 올라탄다. 5층의 어학원의 창구에 앉아 있는 여자다. 가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여자는 치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여자는 문 앞으로 바투 다가가 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어학원 여자는 약국으로 들어간다. 여자의 등을 보다가 나는 그제서야 느리게 계단을 내려간다. 지하의 커피숍에 규의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문을 들어서자 눅눅한 공기가 기도로 달려든다. 커다란 수족관이 놓여져 있는 뒤편에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남자가 앉아 있다. 규와 남자는 동굴연구회 모임의 멤버들이다. 그들은 십여 명의 남자들로 이루어져 각지의 알려지지 않은 굴들을 찾아 케이빙을 다닌다. 그 멤버들 대부분이 대학시절 동굴탐사 동아리에서 만났다고 들었다. 어느 날 규의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이 남자를 보았다. 나를 보자 남자는 반쯤 허리를 곧추세웠다가 다시 주저앉는다. 물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초록색 에이프런의 여자에게 커피를 주문한다. 남자는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를 쳐다본다. 눈초리에 탐색하는 빛이 역력하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규에게 연락 없었죠? "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친구도 묵묵히 머리를 끄떡인다. 목이 타는지 연신 컵으로 손이 올라간다.
"어젯밤 봉화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너뱅이굴에서 규의 랜턴을 발견했다고요. 그곳은 한 달 전 연구회에서 1차 탐사를 갔던 곳이죠. 회원들의 말에 의하면 굴 입구를 막았던 커다란 돌이 밀려져 있었대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냥 들어갔답니다. 저는 이번에 사정상 못 갔지만, 1차 탐사 때 가보았어요. 그 굴은 850m 고지대에 만들어진 함몰구 형태여서, 수직으로 7m를 내려간 후 70도의 경사로 계속 내려갈 정도로 위험한 코스예요. 규는 토요일에 봉화역에서 사람들과 합류하기로 했다는데, 오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했답니다."
"그는 수요일에 떠났어요. 2, 3일 월차를 내어 다녀온다고 하더군요. 오늘은 출근을 한다고 들었어요..... 그럼 혼자서?"
남자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진다. 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다. 라이터를 갖다대는 손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린다.
"규는 혼자 간 것 같습니다. 욕심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너뱅이굴은 아직 막장이 발견되지 않은 곳입니다. 아마 반까지 들어간 사람도 없을 텐데......."
오늘은 월요일이다. 오늘은..... 남자의 눈길을 비켜 느리게 헤엄을 치고 있는 금붕어를 쫓는다. 머릿속으로 물고기의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열 둘을 세는데 남자가 일어선다. 시계를 들여다보고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안쓰러움이 가득하다. 걸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지하 계단을 올라간다. 등뒤에서 친구의 긴 한숨이 터져나온다. 무슨 연락이 있으면 알려드릴게요. 지금도 그곳 119와 회원들이 수색을 하고 있으니 곧 소식이...... 남자는 급히 말을 삼키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긴 듯 허둥지둥 걸어간다. 나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걸음을 옮긴다. 저기요.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등뒤로 어떤 목소리가 다가온다. 네? 고개를 돌리니 주저하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가까이에 있다. 좀전에 내가 상담을 한 여자다. 입술에 거스러미가 일고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그 여자다. 제가 어디를 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취소했으면 해서...... 여자는 우물거리는 음성으로 느리게 말을 잇는다. 그러세요. 지금 올라가셔서 취소하세요. 전표 가지고 있지요? 몸을 돌리다 머리를 갸우뚱한다. 마사지 받은 지가 언젠데 아직 이곳에 있을까.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제일신탁이 바라보이는 가로수에 다가가 머리를 기댄다. 곧 깊은 생각에 잠기며 두 눈이 가라앉는다. 여자를 한동안 지켜보다 다리를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사무실은 나갈 때보다 뒤숭숭하다. 김 국장은 보이지 않는다. 신 부장의 모습도 없다. 등으로 더운 기운이 몰려온다. 힘들게 걸어가 룸의 손잡이를 돌린다. 창 쪽의 가까운 침대에서 신 부장이 고객의 얼굴을 만지고 있다. 그녀의 분홍색 가운이 리듬을 타며 흔들린다. 미스 지가 고객에게 마사지를 막 끝내고 스팀 타월을 덮고 있다. 나를 보자 미스 지는 어떤 얼굴인가 궁금하다는 듯 흘깃거린다. 평소와 다른 내가 아무래도 이상한 모양이다. 행어로 다가가 웃옷을 벗고 가운을 걸친다. 주저앉을 것 같아서 허리에 힘을 주며 등을 편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미스 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부장님, 아까 그 여자 보셨지요? 은행 앞에 서 있던 여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스 지의 목소리가 더 은밀해진다. 집 나온 여자 같지 않아요? 미스 지는 탐정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스팀 타월로 얼굴의 크림을 닦아낸다. 퍼프에 가득 스킨을 묻혀 여자의 얼굴에 바르며 그녀는 계속 종알거린다. 아무래도 수상해. 나는 누워 있는 고객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얼굴을 만져본다. 50대 후반의 이 여자는 다섯 달 이상 관리를 받았는데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 내게 왔을 때 이미 피부가 노화단계로 접어들어 있었다. 피부도 많이 늘어져 있고, 수분 공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탄력을 잃은 상태였으며, 얼굴이 트고 갈라져 있었다. 나는 여자에게 묻는다. 혹시 밀실 공포증이 있으세요? 반쯤 잠이 든 여자는 웅얼거리며 손가락을 허공에 내젓는다. 석고 팩은 눈과 입을 모두 가리기 때문에 밀실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된다. 마치 동굴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심하면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미스 지에게 석고 팩을 할 테니 준비하라고 말한다. 미스 지는 석고 가루와 거즈, 고무 그릇과 스푼을 가지고 온다. 나는 스킨과 로션을 바른 상태인 여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린다. 잘 스며들기를 기다린 다음, 영양 크림을 듬뿍 바르고 같은 동작으로 피부를 두드린다. 화이트 앰플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얼굴에 쏟아 붓듯이 아끼지 않고 바른다. 그리고 에센스 액이 묻어있는 얇은 거즈를 얼굴에 붙인다. 미스 지는 옆에 서서 진지한 눈으로 보고 있다. 석고가 묻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자의 눈썹과 입술에 패드를 올려놓는다. 거즈를 물에 꼭 짜서 얼굴부터 시작해 목까지 잘 덮어준다. 그 상태에서 영양 크림을 또 한 번 얼굴에 골고루 바른다. 다시 크림을 발라야 석고가 마르는 동안 떠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석고가 피부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이유도 있다. 돌아서서 깨끗한 종이 위에 석고 분말 500g 정도를 준비하고, 고무 그릇에 물을 넣는다. 준비된 물에 석고를 골고루 부어 넣고, 잠시 기다린다. 석고가 충분히 물을 빨아먹고 난 후에 천천히 저어가며 잘 갠다. 나는 충분히 개어진 석고를 미스 지에게 고객의 얼굴에 바르라고 말한다. 미스 지는 스푼으로 석고를 이마, 볼, 턱 주위에 떠놓고 펴바르기 시작한다. 나는 미스 지가 하는 양을 지켜본다. 미스 지는 석고를 여자의 코와 인중 등 굴곡이 진 부분에 바르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석고 마스크가 1cm가 넘지 않도록 골고루 펴바르라고 얘기한다. 얇은 부분은 내가 손으로 일일이 가르키며 다시 한 번 덧바르게 한다. 고객이 답답한 지 어깨를 슬쩍 비튼다.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석고가 열을 내면서 굳거든요. 20분쯤 지나면 떼어드릴게요. 여자는 알아들었는지 대꾸 없이 잠잠하다. 답답하니까 잠을 자기로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다.
미스 지에게 뒷정리를 시키고 밖으로 나간다. 사무실 의자로 걸어가 앉는다. 몸살이 나려는지 식은땀이 연신 흘러내린다. 두통과 함께 몸도 덜덜 떨려오기 시작한다. 만일,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맥없이 고개를 흔든다. 창 밖은 어스름이 다가오고 있다. 바람결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벌써 10월인 것이다. 꼭 이맘 때였다. 도서관 뒤편 무성한 수풀이 누렇게 말라가고 있을 때, 규는 긴 계단을 내려와서 저벅저벅 걸어왔다. 혹시 동굴탐사 동아리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랬다. 일면 신기해 보이는 이름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친구와 어울려 그 동아리에 한번 가보기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 동굴 답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깨끗이 포기했던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나를 보았던 모양이다. 등뒤로 땅거미가 다가왔다. 그는 학교 앞, 카페에서 우리들에게 동굴 사진을 보여주었다. 친구의 감탄에 고개를 숙여 그것들을 들여다보았다. 내 눈에는 모든 굴들이 엇비슷하게 보였다. 그는 한 사진을 가리켰다. 이곳이 단양에 있는 노동동굴이예요. 어떤 졸업한 선배가 동아리 방에 찾아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자신이 우연한 기회에 그 동굴 탐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대요. 아직 사람들에게 개방되기 전이었죠. 그곳엔 태초의 컴컴함이 또아리를 틀고 있더래요. 마치 누군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어둠 속으로 용을 쓰며 끌어당기더랍니다. 선배는 깊은 못에 빠지는 사람모양 허우적거렸답니다. 그렇게 경이로울 수가 없었대요. 저도 그런 어둠을 보고 싶어요. 그의 눈이 검게 빛났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오래 눈을 떼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사무실은 이 빠진 빗처럼 성글다. 김 국장은 남편과 저녁 약속이 있는 듯 서둘러 나갔고, 신 부장도 한 시간 전에 마무리를 짓고 떠났다. 나는 미스 지를 불러 먼저 퇴근하라고 이른다. 미스 지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다가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안 가세요? 더 이상 올 고객도 없잖아요. 몸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미스 지는 창가의 캐비닛에 다가가 화장품 샘플을 집어든다. 몸을 돌리던 그녀가 밖을 보며 소리를 지른다. 부장님! 은행 앞에 그 여자 아직도 서 있어요. 정말, 집 나온 여잔가 봐요. 계약도 취소하더니만. 미스 지가 쩝 소리를 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창으로 다가가 거리를 내려다본다. 셔터가 내려진 건물 앞 가로수에 여자가 상체를 기대고 서 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며 여자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미스 지가 종알거리며 가방을 꾸리는 동안, 나는 여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여자는 밤거리에 깃발처럼 꽂혀 있다. 팔 년 동안 나는 규의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저 낯선 여자 보다 더, 그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동굴이 숨어 있는 것인가. 규의 등산화가 쿵쿵 울리며 멀어져갔다. 신발장 위 그의 머리카락이 불쑥 떠오른다. 바람이 덜컹거리며 유리를 흔들고 지나간다. 나는 여자에게서 눈길을 돌린다.
미스 지가 떠나고 이제 넓은 사무실에는 나만 덩그마니 남는다. 유리창으로 걸어가 창문을 모조리 걸어 잠근다. 출입문을 잠그고, 사무실의 형광등을 모두 끈다. 의자에 주저앉는다. 차도를 구르는 자동차들의 바퀴 소리와 급정거하는 마찰음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몸을 둥글게 만다. 창으로 거리의 네온사인과 불빛이 쏟아져 들어와 사방이 어슴푸레하게 떠 있다. 규가 찾는 어둠은 어디에도 없다. 일어나 마사지 룸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환한 불빛 때문에 두 눈이 시큰거린다. 벽에 걸려 있는 전신 거울에 무심코 눈이 부딪힌다. 피부가 퍼렇다. 두 눈이 원유처럼 번들거린다.
'어둠은 사람을 홀리게 하지.... 심연이라고 하더라. 깊은 못... 나는 꼭 보고 싶다.'
규의 목소리가 아득히 울린다. 캐비닛을 열어 석고 가루와 종이, 고무 그릇을 꺼낸다. 물에 석고를 부어 넣고 천천히 젓는다. 그릇에 석고를 잘 개어, 침대로 가지고 올라가 눕는다. 가운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퉁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배위에 석고가 담긴 그릇을 올려놓고 눈과 입에 패드를 놓는다. 더듬거리며 얼굴에 짓이겨진 덩어리를 바르기 시작한다.석고가 열을 내고 굳으며 피부에 단단히 둘러붙는다. 고개가 무거워지며 움직일 수조차 없다. 점점 숨이 가빠온다. 눈을 떠보려고 해도 잘되지 않는다. 사방이 온통 칠흑이다. 콜타르 같은 어둠의 입자들이 끈끈하게 얼굴을 조여온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매캐한 석회 냄새가 코를 찌른다. 뚝뚝 석회수가 종유석을 타고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지금 동굴 속으로 서툴게 걸음을 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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