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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사나이 　　　　- 장상길(31)


"잊으셨어요? 지난번 가게에 오셨을 때…"
그새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닌게 아니라 그런 말이 오간 듯도 싶었다. 아니, 사내와 그런 얘기를 주고받은 건 분명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술자리에서 으레 벌어지는 호언과 장담처럼, 혹은 과장과 윤색처럼 술자리가 파하면 함께 파기되어도 상관없다는 암묵적 동의 하에 오고간, 이를테면 노름빚이 그 변제의 의무가 없는 것처럼 그날 사내와의 약속도 이행의 부담이 배제된 약속 아닌 약속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사내는 술자리의 룰을 깨고 이행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난감한 심정으로 잠시 말을 갈무리했다가 이제야 상기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기억납니다. 창녕 어디라고……"
"기억하시는군요. 이번 주가 어떨까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뭐 바쁘시면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글쎄요. 특별히 바쁜 일은 없지만."
나는 말끝을 흐리며 주저의 심정을 사내에게 내보였다. 우회적인 파기의 통고였다. 사실 그 약속이란 게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술좌석에서 쌓은 교분만으로는 사내와의 동행이 그닥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고. 앞 뒤 어느 쪽으로도 선뜻 발을 내딛을 수 없는 형국이었으니 말하자면 내 진퇴의 향방을 사내에게 떠넘긴 셈이었다.
"준비는 필요 없어요. 하룻밤 묵을 거니까 딱히 부담 느낄 일도 아니죠."
사내가 승낙의 뜻으로 내 말을 받아들인 걸까?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았다. 뒤꼬리가 잘리긴 했어도 그건 누가 들어도 거부의 의미였다. 사내가 내 말을 오해한 게 아니라 내 뜻과는 상관없이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아무리 변제 의무가 없는 게 노름빚이라지만 저잣거리의 법칙에 따르면 노름빚도 엄연히 이해관계가 명확한 채무일 것이다. 혹시 그날 다른 언질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무슨 이면 합의서 같은. 그렇지 않고서야 사내가 이처럼 떼를 쓸 리가 없을 텐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교통사고로 죽은 현명의 얘기를 했고, 사내가 오며가며 짧게 합석을 했고, 사내가 직접 빚었다는 약술을 입가심으로 마시고……. 신문의 TV 프로그램 편성표처럼 미자네에서 늘상 반복되는 일들이었다. 그러다 불쑥 사내가 창녕 어딘가에 있다는 암자 얘기를 꺼낸 것이다. 거기서 길어온 물로 이 술을 빚지요, 라며.
"아차."
"왜요. 무슨 일이라도."
이번 주라면 아내와 함께 포천의 기도원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근래에 부쩍 심해진 아내의 성화 탓에 그러마고 약속은 했으되 그 일만 생각하면 뒷목부터 뻣뻣해지던 터였다. 안수기도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아내의 믿음이 나를 위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믿음의 맹목성에 대해서만큼은 또한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동안은 아내의 선교에 대해 묵살과 무시로 일관했지만 그럴수록 반드시 이교도의 품에 십자가를 안기리라는 아내의 전의는 배가되는 듯 했고, 24평의 작은 공간은 기묘한 종교 갈등으로 늘 어수선했다. 아내는 항상 그 불안정감을 내 탓으로 돌렸다. 그러다 마침내 내가 백기를 들었던 것이다. 백기투항의 의미를 짐짓 합리화시키면서 말이다. 그래 한 번 가주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겠냐.
"아닙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사내와의 약속도 약속이니 선후를 따지자면 사내와의 약속이 먼저였다. 그러잖아도 핑계거리를 요량하던 참이었는데 거짓으로 핑계거리를 만들지 않아도 괜찮게 됐으니 예컨대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그럼 이번 주로 정해도 괜찮겠죠?"
사내는 금요일 다시 사무실로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자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고개를 치들었다. 사내에게 대관절 무슨 이득이 있길래 저토록 적극적으로 동행을 강청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고객관리 차원인가? 4년 단골에 대한? 그러나 그런 이유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무슨 하룻밤 술값으로 기백만원씩 나오는 룸살롱이 아닌 다음에야 고객관리라니. 그렇다면 혹시라도 혼자 다녀오는 게 적적해서? 그러나 그간 겪어본 사내의 성정으로 짐작컨대 그것도 이유로는 적절치 못했다. 그렇다면 이유가 도대체 뭘까?

2
문 밖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아직 열리지 않은 하늘처럼 아내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현명의 3주기 어쩌고 하며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아내는 진작부터 내 외출을 미심쩍어 하고 있었다. 아내는 내 거짓말을 귀신처럼 알아낸다. 결혼 7년, 나는 거짓말이 늘었고 아내는 기도 시간이 늘었다.
기도원에 가마고 약속한 뒤로 아내는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어딘가 들떠 있었다. 내 결정이 오랜 기도에 비로소 화답을 주신 때문이라고 아내는 믿었다. 오랜만에 아내는 웃음을 찾았고, 기쁨과 신에 대한 존경심으로 충만한 마음은 여러모로 생활의 탄력을 되찾아주었다. 아내에게 웃음을 찾아준 건, 그러나 내가 아니었다. 아내에게 내 결정은 단지 기도에 대한 증거일 뿐이었다. 아내의 기도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을 향한 구원의 기도라는 점에 대해서는 솔직히 싫지만은 않았다. 나와 아이의 안위와 건강, 그리고 가정의 안녕 따위를 위해서만 아내의 기도는 모아졌다. 그건 아내가 지켜야할 유일하고 지고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아내가 선택한 전략이 바로 믿음이었으므로 나로서는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의지하는 게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불꽃처럼 타오르는 질투의 감정은 아내의 믿음에 대한 반감으로 대체되곤 했다. 아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 아내는 과연 누구를 찾을까? 그건 남편으로서의 무력감과도 다름 아니었다.
기도원에 갈 수 없다고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웃음이 나로 인해 가능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기도원에 가기로 한 건 당신의 기도 탓이 아니라 순전히 내 자의로 결정한 거라고. 당신의 믿음이 구할 수 있는 건 단지 심리적인 안정뿐이라고, 나도 모르게 가시가 달린 말을 아내에게 던졌지만 아내는 수긍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도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아직 증거를 기다리기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아내는 침대맡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오늘 못 올 거 같으면 전화할 게."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사내는 약속시간에 맞춰 아파트 입구에 나타났다. 사내가 타고온 화물차의 적재함에는 10여 개 남짓한 흰색 플라스틱 물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날씨가 꽤 쌀쌀해졌죠? 아직 초설도 전인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올 겨울은 아무래도 내복을 입어야 할 거 같습니다."
내가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사내는 이곳 지리에 익숙한 듯 차를 몰았다. 차안에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 흐르고 있었다.
"초행이 아닌 모양이죠?"
"길이야 뭐, 예전에 택시를 몰았거든요. 길에서 길이 나니까 길이란 게 원래 하나잖아요. 한 십 년 택시 운전을 하다보니 길을 이해했달까, 아무튼 길눈은 밝은 편입니다."
길을 이해한다는 사내의 말이 사실인지 어쩐지 고속도로로 접어들 동안 사내는 한 번도 길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나에게 길을 묻는 법도 없었다.
차가 톨게이트에 들어설 무렵엔 날이 완연히 밝아 있었다. 통행료를 내겠다고 했지만 사내는 극구 사양했다.
"손님이라면 손님인데 손님한테 밥값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 손님이라는 말이 이상스레 마음에 걸렸다. 관계란 게 원래 서로에게 합당한 자격을 상정한 뒤에야 지속되는 법이니 사내와 나 사이라고 그런 관계의 경계선이 없을 리 없었다. 그렇담 내가 손님의 자격으로 사내와 함께 길을 나섰단 말인가. 지금이야 술손님은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방 손님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손님이란 말인가. 나는 사내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사내와 안면을 트고 지낸지도 그럭저럭 4년을 넘기고 있었다.
영천집이라는 엄연한 상호가 있음에도 우리는 사내의 술집을 미자네라고 불렀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이미자의 애잔한 노랫소리 때문이었다. 현명이 교통사고로 죽기 1년여 전부터 그의 손에 이끌려 미자네에 출입했으니 벌써 햇수로 4년을 들락였지만 이미자의 노래를 술만큼이나 사랑한다는 것 외에 내가 사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손님이 없을 때는 짧게 합석을 할 때도 있었지만 사내는 별로 말이 없었다. 정치적인 성향을 내비치는 적도, 이런저런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주장이 없었다. 말하자면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고, 니가 싫다면 나도 싫고, 니가 옳다면 나도 옳다는 식이었다. 그 집에 유난히 단골손님이 많은 것도 어쩌면 사내의 그런 중도적 성향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투로도 사내의 내력을 짐작키는 어려웠다. 영천집이라는 상호 역시 사내가 가게를 인수하기 전부터 내걸린 간판이라고 하니 사내와는 무관한 상호였다. 어찌 보면 영락없이 술도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찰라간 내비치는 면면은 세상이치를 단박에 월경한 기인처럼 보이게도 했다. 그러고 보니 택시 운전을 했다는 말도 4년만에야 얻어들은 유일한 사내의 전력이었다.
"택시 운전은 왜 그만 두셨어요?"
차가 기흥 인터체인지를 지날 무렵 내가 불쑥 던진 질문이었다. 끝도 없이 귀를 후벼파는 이미자의 노래에 얼마간은 질려 있었고, 낯익었달 수도 낯설달 수도 없는 동행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관계의 경계선을 조심스럽게 넘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양이 때문이에요."
"고양이요?"
"예. 고양이. 파문의 중심은 항상 작은 점에 불과하거든요."
택시를 운전하던 십 년 전쯤 사내는 호남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에는 부인과 다섯 살 난 딸이 동승해 있었다. 도로는 아침나절부터 흩뿌린 가랑비로 젖어있었지만 사내는 길을 재촉했다. 시간에 맞춰 처가가 있는 고흥에 닿으려면 차에 날개가 돋아 하늘길을 연다해도 촉박했다. 일을 마치자마자 곧장 길을 나선 터라 몹시 피곤했지만 사내는 자신의 택시와 운전 실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이틀을 꼬박 운전대를 잡았어도 끄떡없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운전보다도 맛 좋고 양 많은 기사 식당을 찾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사내는 늘상 생각해왔다. 꿈도 항상 페라리를 몰고 차적이 끊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꿈만 꾸던 사내였다. 물기에 젖은 도로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지만 사내는 엑셀레이터를 밟고 있던 오른쪽 발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택시는 아슬아슬하게 다른 차들을 추월하며 빠른 속력으로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길은 친구처럼 친숙했고, 핸들을 움켜쥔 두 손에 전해지는 속도감은 섹스처럼 유혹적이었다.
사내가 그 물체를 발견한 건 광주 진입로를 얼마쯤 지나친 뒤였다.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가 싶어 핸들을 쥔 양손에 힘을 주며 눈을 치뜨니 차는 이미 중앙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깜빡 졸음이 몰려왔던 것이었다. 아차 싶어 핸들을 바로 하고 막 차선을 되찾아 숨을 쓸어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저만치 갓길 위에서 뭔가 눈에 아른거렸다. 고양이 한 마리가 막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고양이는 자신의 속도를 과신합니다. 자기보다 빠른 건 이 세상에 없다고 믿죠."
아주 잠시잠깐 사내는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고, 그게 곧 파문의 작은 시작점이었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핸들을 꺾는 순간 속도를 이기지 못한 차체가 중심을 잃고 팽그르 돌았다. 핸들에서 두 손이 튕겨져 나오고 택시는 이미 사내의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날카로운 칼이 베고 지나가는 듯 공포감이 등줄기로 뻗어 올랐고, 차는 다시 중앙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사내가 다시 핸들을 움켜쥐려는 순간에는 이미 거대한 트레일러 바퀴가 사내의 코앞으로 바투 다가선 뒤였다. 아내와 딸은 뒷자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깨어보니 병원 응급실이더군요. 아내와 딸애의 장례식은 이미 끝난 뒤였구요."
사내는 어찌 들으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담담하게 자신의 사고 경험을 얘기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후회도 비감도 스며있지 않았다. 처참한 사고현장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베테랑 기자처럼 감정이 일절 휘발된 목소리로 사내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죠. 한갓 들고양이 한 마리 살리려다 가족을 해친 꼴이 됐으니 말예요. 저 역시 반년을 넘게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아무튼 퇴원하고 거동이 한결 자유로워지자마자 저는 고양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예? 그때 그 고양이를 말입니까?"
"하하. 아닙니다. 무슨 붙박이 이정표도 아니고 그걸 어디서 무슨 재주로 찾습니까."
"그럼?"
"말 그대로 고양이 말입니다. 식육목 고양이과의 포유류. 산으로 들로 아파트 지하실로 고양이가 있을만한 곳은 어디든 달려갔죠. 고양이를 잡아 그 고기를 팔았습니다. 손님처럼 관절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처구니없게도 저는 그걸 복수라고 여기고 있었어요. 죽은 아내와 딸에 대한."
나 역시 관절이나 신경통에 그만한 약이 없다는 소리에 고양이를 입에 댄 적이 있었으니 어쩌면 사내가 잡은 고양이를 먹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양이 고기라, 순간 쫘악하고 온몸에 소름이 퍼져나갔다. 원래 관절염처럼 원인 규명이 안된 병일수록 치유에 관한 속설이 많은 법이었다. 태반이 믿을 바 못 되는 사기술이거나 설령 병에 도움이 된다해도 근본적인 치유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먹은 고양이가 서너 마리는 족히 넘었다. 나는 담배를 빼물며 짐짓 사내에게 말을 던졌다.
"수요가 엔간했던 모양이죠?"
"여기저기서 소문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숱했죠."
"그런데 어쩌다 영천집은……?"
"이미자가 지금까지 발표한 노래가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아세요? 이천 하고도 예순 다섯 곡예요. 그걸 다 듣고 노래에 담긴 뜻을 죄 깨우치려면 한세상으론 어림없어요. 너무 늦게 그걸 깨달았어요. 진작에 깨쳤더라면 살생도 좀더 일찍 중단했을 텐데 말입니다."
난데없이 이미자가 발표한 노래라니 뭘 염두에 두고 한 말일까. 이미자 노래 때문에 살생을 그만뒀다는 뜻인가? 사내가 고양이 사냥을 그만둔 연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더이상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쩐지 더는 캐물어서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했거니와 이미자 노래로 둘러치는 양을 보니 설사 물어도 대답은 함흥차사가 뻔할 거 같았다.
"잠깐 쉬었다 가죠."
사내가 카세트 테잎을 바꾸며 말했다. 차는 어느새 옥산 휴게소 입간판을 뒤로한 채 달리고 있었고, 이미자는 엘리지의 여왕답게 곧바로 새로운 노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옛날에 이 길은……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3
어디서부터 잠이 들었을까. 옥산 휴게소에서 사내가 건네준 커피를 마시고 쏟아지기 시작한 잠이었다. 사내가 히터를 틀던 것까지는 기억에 있었다. 해는 중천에 올랐다가 서쪽으로 막 내려서고 있었고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어딘가 지방 국도를 달리는 중이었다. 겨울을 목전에 둔 국도변 들녘이 을씨년스러웠다.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히터 열기 때문인지 머리가 풀린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애써 잠의 끝자락을 떨치려고 바둥바둥 정신을 곧추세워 보았지만 잠의 여운은 완강하게 내 머리채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볼륨을 줄인 스피커에선 여직도 이미자였다.
"피곤하셨던 모양이죠? 화물차라 몸이 배길텐데 곤히 주무시더군요."
"그랬던 모양입니다. 원래 차에서는 잠을 잘 못 자는 데 꼭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아닌게아니라 수면제를 먹은 듯도 싶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복용한 진통제 때문일까? 차안에서, 그것도 처음 얻어 타는 낯선 차안에서 이토록 곤한 잠이라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도 잠은 뿌리째 뽑히지 않고 내 주위를 서성이고 있으니 사내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운전하는 옆자리에서 세상 모르고 잠을 자는 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실례인 법이다. 창을 좀 내려도 되겠냐고 사내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저 생각일 뿐,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귓전을 슬슬 간질이고 있는 이미자의 노래도 자장가로 들려 나는 다시금 깊은 잠속으로 속수무책 빨려들고 말았다.
"푹 주무세요. 깨어나면 이미 도착해 있을 겁니다."
내가 완전히 잠에서 깬 건 그로부터도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해가 서산마루에 들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네시였다. 차는 국도도 벗어나 어딘가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너비로 사면을 깎아 나선으로 길을 낸 전형적인 산길이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창 밖은 그저 산과 나무와 마른 숲 일색으로 풍광 좇아 떠도는 과객에게나 어울릴 법한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열어놓은 차장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잠을 깨운 듯 싶었다. 히터도 꺼놓아 오싹 한기가 올랐다.
"여기가 어디쯤이죠?"
"다 왔습니다. 그러잖아도 걱정이 돼서 깨우려던 참이었는데."
정오 무렵에 잠깐 깨어난 걸 제외하면 차 속에서 꼬박 여섯 시간을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었던 셈이었다. 절로 고개가 갸웃해지는 일이었다.
천천히 산길을 오르던 차가 멈춘 곳은 자동차 서너 대를 주차시킬 정도의 평지였다. 차가 들 수 있는 길은 그곳이 마지막이었다. 차가 올라온 길 맞은편으로 좁은 오솔길이 산 속 깊숙한 곳을 향해 뻗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리로 가야할 모양이었다. 해가 산너머 서쪽으로 완전히 가라앉은 뒤로 산색은 이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합니다."
사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적재함의 물통을 노끈으로 엮기 시작했다. 나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다시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무릎 안쪽에서 다시금 통증의 징후가 느껴진 탓이었다. 차에서 내려 어깨와 골반 그리고 무릎 관절을 천천히 이완시켰다. 심하게 통증이 느껴지는 곳은 없었지만 이 정도의 여독에도 내 몸은 쉽게 피로해졌고, 그 피로감은 곧장 관절의 지독한 통증으로 이어진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힘드시죠?"
나는 애써 밝은 표정을 사내에게 지어보였다. 내 관절염이 심상찮다는 건 사내도 이미 알고 있는 터라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진 멀쩡합니다."
사내와 나는 다섯 개씩 엮은 물통 꾸러미를 나눠들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내 말로는 20분 가량을 걸어야 한다고 했으니 산길임을 감안할 때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다. 길은 험하지 않았지만 몸이 굳어 있어 발걸음은 더디게 움직였다.
"잠시 쉬었다 가죠."
물통을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자 사내는 담배를 청했다. 그러고 보니 사내가 담배를 피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사내는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엿보이고 있었다. 동행이란 신뢰감이 사내의 경계심을 무디게 만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이 나는 곳 근처에 불회사라고 조그만 암자가 하나 있어요. 스님은 없구 명화라고 이름을 쓰는 처녀 하나가 암자를 지키고 있는데 거기 주지로 계시던 분이 그 처녀 젖먹이 때 데려왔다죠. 실은 손님을 이리 모신 건 바로 그 처자 때문입니다."
"처자 때문이라뇨?"
"그 처자 신통력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신통력요? 무슨……"
"치유. 이런저런 병을 기가막히게 고친다 이겁니다.
그야말로 맙소사였다. 화를 피하는 묘책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패착이었다.
"그런 얘기는 없었잖습니까."
내가 여기까지 사내를 따라나선 건 술 빚는 법을 일러줄 테니 집에서 직접 담가 장복하라는 사내의 권유 때문이었다. 어떤 효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내가 약이라며 내오는 술을 한 잔 마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통증이 슬며시 수그러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명치끝에서 시작된 따듯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며 몸속의 차갑고 악한 기운을 밀어낸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쩔 땐 온 몸에 바싹 소름이 돋을 때도 있었다. 전신에 그 기운이 퍼지고 나면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알콜 기운이 감각을 무디기 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알콜이 일종의 최면이라면 사내의 약술은 완화 내지는 치유랄까, 오랜 병력 탓에 그런 구분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쾌를 전제하지 않은 약은 어차피 몸에 내성을 기른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사내의 약술도 마찬가지일 뿐이라고 나는 폄하했다. 처음 사내와의 동행을 주저했던 건 의학적 검증을 받지 않은 민간 의술에 대한 내 완고한 불신이 한 원인이기도 했던 터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신통력을 가진 산중처녀라니. 나는 뜨악한 얼굴로 쏘듯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진작 말씀드리지 않은 건 혹시 손님께서 무슨 오해라도 하실까봐 그런 겁니다. 저야 순전히 호의로 나선 일이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선 꼭이 의심은 아니래도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저더러 치료를 한 번 받아봐라 이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무작정 찾아간다고 아무나 봐주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하루 푹 쉬러 왔다고 생각하세요. 그 처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그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니 뭐 어떻다 말씀드릴 순 없고, 아무튼 인연이 닿으면 뭐 어쩔지는 모르겠지만요."
사내는 담배를 신발 밑창에 비벼 끄고 자리를 털었다.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가 뛰쳐나와 사내보다 먼저 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10년 전 사내가 넘었던 중앙선을 내 자신이 똑같이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에 불현듯 나는 휩싸여 있었다. 혹은 경계선, 그 선을 넘는 순간 길 저쪽으로부터 달려온 고양이 한 마리가 역시 내 안으로 뛰어드는 건 아닐까? 그리하여 사내가 떠안은 불행의 무게가 고양이 사냥이라는 복수심으로 재생했듯 내게는 또한 무슨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따라올테면 오고 내키지 않으면 돌아서도 좋다는 무언의 암시인 듯 사내는 나를 버려둔 채 이미 저만치 앞서 있었다. 사내가 짊어진 흰색 물통과 사내 앞으로 이어진 길을 나는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길은 말하자면 치유의 들머리인 셈이었다.

4
"흉가처럼 조용하군요."
"주지스님이 돌아가신 뒤로 이렇다죠. 그전에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찾아왔다는데."
산이 휘감고 있는 산사는 땅거미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고 있었다. 창호지 틈으로 새어나온 불빛이 시나브로 마당에 스며들고 있었지만 사내가 말한 처자는 어디에서고 보이지 않았다. 이름이 명화라고 했던가. 등에 맺혔던 땀은 식어 증발한지 오래였고, 나는 알 수 없는 조바심으로 사내의 눈치를 힐긋힐긋 살피고 있었다. 여자가 나타난 건 멀리 보이는 능선의 윤곽이 짙은 먹빛으로 완전히 덧칠된 뒤였다.
내 시선은 처음부터 고양이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자 발치로 바싹 따라붙은 고양이, 고양이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와 사내를 번갈아 올려보고 있었다.
"그간 별고 없으셨죠?"
여자는 여자가 오른팔에 끼고 있는 대바구니를 내려놓으며 합장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대바구니 속에는 마른 나뭇잎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입성으로 보아 어디 밭일이라도 마치고 오는 듯 싶었다. 나는 슬쩍 시선을 올려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위에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고양이가 등을 구부리며 여자의 발목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사내의 인사에 여자는 이번에도 합장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속세에서 오고갈 법한 인사치레는 그 뒤로도 없었다. 여자가 묵을 방을 안내하고 물러날 때까지.
"듣기는 하지만 말을 못해요."
방에 들고 사내가 처음 한 말이었다. 그러나 내 관심은 여자가 아니라 온통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
"아, 그놈 제가 선물했어요. 뭐, 선물이라는 표현이 어쩔까 싶긴 하지만. 그놈 어미가 제 손에 해를 입었거든요. 바로 이 산에서요. 차마 어린것까지는, 버려 두지 못하고 여기에 맡겨버렸죠. 사람 손에서 자란 놈이지만 산을 가까이 두고 있어선지 야성이 강해요."
사내가 고양이 사냥을 다니던 때의 비극이었다. 나는 사내의 말을 듣고서야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기묘한 기대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안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안긴 건 사실이었으나 그건 내 고양이가 아니라 아직도 사내의 고양이일 뿐이었다.

어디를 갔는지 저녁밥을 먹자마자 모습을 감춘 사내는 지금껏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듣기는 하지만 말을 못하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상을 물리고 찻쟁반을 들고 들어온 여자는 여태도 자리에서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듬성듬성 오가던 반쪽 대화가 뚝 끊긴지도 10여분을 넘기고 있었다. 이쯤에서 티타임을 그만 끝내자는 의미로 나는 이미 식어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을 뿐인 찻잔을 들어 냉큼 목으로 털어 넣었다. 코끝으로 약간 비릿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여자가 찻쟁반을 한쪽으로 치우기에 내 뜻을 알아챈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여자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손짓으로 뭔가 말을 했다.
"자리에 누우라구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사내의 말이 떠올랐다. 인연이 닿으면……. 지금부터 신통력을 부려보시겠다. 호기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생면부지 여자의 손짓 한 번에 간단히 누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슨 치료를 어떻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얼마간은 불안하기도 했다.
내가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자 이번에는 아예 손을 가져와 지그시 어깨를 눌렀다. 가까이 다가온 여자의 몸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게까지 하는데야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나는 장작으로 한껏 달궈진 아랫목에 천천히 몸을 뉘였다. 방바닥의 뜨끈한 열기가 등줄기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잠시 몸 여기저기를 살피는가 싶더니 여자는 이내 내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무슨 마사지를 하는가보다 싶었지만 잠자코 몸을 맡기고 있자니 그건 아니었다. 몸에 손을 댔다가 떼는 간격도 짧았고 그 강도 또한 마사지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오가는 애무처럼 여자의 손길은 조심스럽게 내 몸 구석구석을 핥았다. 명치 아래 똘똘 뭉쳐있던 욕정의 덩어리가 일순 대가리를 쳐들었다. 마음을 다잡으며 되도록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써보았지만 허사였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처럼 마음과 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숨결이 안정을 잃고 상하좌우 방향도 없이 요동쳤다. 점점 진하게 풍겨오는 여자의 냄새가 혈관 속으로 파고들듯 되게 밀려들었다.
사투라면 사투였다. 여자의 손길에 반응하는 몸과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의지력의. 그러나 그건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단단한 암초에 닻이 걸려 옴나위 못하는 범선처럼 이 방 어디에도 탈출구는 없었다. 탈출구가 없는 의지는 만용일 뿐이죠. 그건 덫이거든요. 덫에 걸린 고양이를 보면서 어느 순간 내 자신이 바로 그런 덫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지만 너무 멀리 와버린 뒤였죠. 돌아보니 내가 타고 왔던 배는 이미 폭풍우가 삼켜버렸더군요. 항구는 저렇게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 말입니다.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내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아니 내 의지는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곧이어 거센 폭풍우가 수면을 뒤흔들고 귓전을 후려치는 바람. 참, 이상하네. 또 정신이 이렇게 아득해지니. 차에 무슨 약이라도 탄 것처럼. 마음이 먼저 허공으로 뜨고 뒤미처 몸이 떠올랐다. 허공에 둥실 뜬 채로 아래를 내려보니 여자가 알몸으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발갛게 물든 여자의 귓불이 아내처럼 정겨워 보였다. 그로부터 나는 대관절 깊이 모를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현실인가 싶으면 꿈이고 아득한 꿈인가 싶으면 여자의 홍안이 두 눈속에 담겨 있고,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밟고서 나는 어느 쪽으로도 감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아까참에 보았던 고양이 눈을 다시금 맞닥트린 듯도 싶다. 아무튼 여자의 동공은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시시로 변했다. 때로는 꽃으로 때로는 둥근 보름달로 때론 교회당의 뾰족한 탑루로, 그리고 때론 고양이 눈으로. 이제야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안으로 달려든 것인가. 불현듯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아내는 하늘 어딘가에 있다는 그 남자에게 해답을 구하고 있겠지.

5
해는 이미 뜬지 오래였다. 지난밤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잠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숙면 탓인지 아니면 여자 때문인지 몸도 어딘가 모르게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어디에서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의 해찰인 듯 가끔 울리는 풍경소리 말고는 문밖은 고요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을 열자 이제껏 맡아보지 못한 공기가 코로 기도로 폐로 일시에 밀려들었다. 나는 성찬을 탐하듯 계속해서 숨을 마시고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 숨을 고르고 나니 문득 허기가 몰려왔다. 엊저녁 여자가 내온 밥상이 머릿속에서 빙빙 원을 그렸다.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사람 기척은 없었다. 다만 어제 봤던 고양이가 본당 계단에 앉아 나를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신발을 꿰며 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고양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내 시선을 맞받고 있었다.
문지방에 걸터앉아 얼마나 고양이와 눈싸움을 벌였을까 저만치서 사내가 양손에 물통을 들고 낮게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시하고는 공기가 다르죠?"
물통을 내려놓는 사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대롱대롱 메달려 있었다.
"고양이하고는 오래 시선을 마주하지 마세요. 고양이가 혼을 뺏어가거든요."
"……"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어제는 어디에……"
"요 위에 사부님이 계세요. 그분께 술 빚는 법을 배웠죠. 그만 출발해야 할 거 같아요. 요기는 가다 어디서든 간단히 때우죠."
시간은 벌써 10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나머지 물통은 내가 잠든 사이 이미 사내가 차로 옮긴 뒤였다. 여자를 다시 보고 싶었지만 여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물통을 고무밧줄로 고정시키자마자 사내는 곧장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내가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저녁 장사를 하려면 마냥 꾸물댈 일도 아니었다.a "쭉 들이켜 보세요. 아마 가게에서 드시던 맛과는 다를 겁니다. 스승께서 직접 묵힌 술이라 색깔부터가 다르죠?"
나는 사내가 컵에 따라 건네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빛깔은 사내의 가게에서 먹던 술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맛도 매 한가지였다. 그런데 기분만큼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그런데 인연은 얻으셨습니까?"
사내가 카세트 테이프를 데크에 꾹 밀어 넣었다. 아주 오래 전의 목소리로 이미자는 여로를 부르고 있었다. 그 옛날 오색댕기 바람에 나부낄 때…….
"글쎄요. 뭐."
"하하 알겠습니다. 뭐든 처음부터 결과를 알 수는 없는 일이죠."
"그런데 젊은 여자가 왜 이런 곳에서 살고 있을까요?"
"글쎄요. 정식으로 수계까지 받은 비구니였단 소릴 듣긴 했지만 사람 사는 일 전들 알 수 있나요. 이유가 있어 머릴 깎았듯이 다시 머릴 기른 것도 무슨 이유가 있긴 하겠지만요."
사내는 이윽고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방금 걸어나온 길을 뭐라 설명키 어려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길은 좁았고 사람이 오간 흔적은 좁은 길만큼이나 미미했다.

한 30분은 달려온 거 같았는데 아직도 바로 앞은 우뚝한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산 속 풍경이란 게 그만그만 변화가 없어서 그런지 사내가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산을 벗어나려면 아직 멀었습니까?"
"지루하세요? 거의 도착했습니다. 산길이라서 그렇지 실제로는 얼마 안 되는 거리예요. 길을 잃은 건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쇼. 설사 길을 잃었다고 해도 이런 곳이라면 장님처럼 한세상 다해도 후회는 없을 거 같지 않습니까?"
"불행을 겪으신 분치고는 낙천적이군요."
"파문은, 언젠가는 가라앉습니다. 그러면 다시 평화로운 수면이 남을 뿐이죠. 간단합니다."
평화로운 수면, 이라고 사내는 말했다. 간단하다고.
"올 때처럼 한 숨 푹 주무세요. 깰 때쯤이면 아마도 집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최면의 신호였을까, 조금씩 수위를 높여가던 잠기운이 수문으로 방류되는 소양강 물줄기처럼 일시에 몰려왔다. 사내가 히터를 틀었다. 뜨거운 바람이 발치로 쏟아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도 이곳이 어딘 줄 모르고 있다. 사내가 말했던 창녕 쪽은 아무래도 아니지 싶은데. 그럼 여긴 어디쯤일까. 하늘이 갈치 비늘처럼 온통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만 현명이 교통사고를 당한 게 어디였더라. 불회사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인가. 사내는 뭔가를 뒤로 감추고 있었다. 그게 뭘까? 내가 관계의 중앙선을 혹시 넘은 건 아닐까?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지만 급격하게 몰려드는 잠기운으로 나는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고 잠에 몸을 맡겼다. 아련히 감겨오는 의식을 비집고 이미자의 노래가락이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하늘거렸다.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 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어있던 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이미자 노랠 어지간히도 좋아하시는군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나는 애써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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