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힌다. 어지럽다. 쓰러질 것 같다! 내가 왜 뛰는 거지? 나는 너무 힘든데... 하지만 안 되! 나는 달려야 해. 지금 쓰러져서는 안 되. 포기할 수 없어.'
그는 온갖 인상을 쓰면서 생각한다. 구레나룻을 기른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짧고 왼쪽 눈 아래에는 큼직한 점이 하나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힘들게 보인다. 짧게 올려 친 머리를 쭈뼛 세운 머리카락이 사시나무에 목만 매달려 있는 듯 위태롭다. 그리고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
헐떡거리며 뛰고 있는 그의 이마에 땀이 맺힌다. 맺힌 땀은 바람에 밀려 주르르 흘러내리고 땀이 지나간 자리는 하얗게 소금기가 남는다.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을 닦기 위해 앞뒤로 바쁘게 젓던 그의 팔이 잠깐 멈추었을 뿐 그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 때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고는 달리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누가 빨리 달리는지 내기한 것처럼 여기 있는 사람들은 화려한 색깔의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달리고 있다. 모두들 그처럼 헉헉거리는 무거운 숨소리를 낸다. 그들 중에는 머리칼이 하얀 할아버지가 있고, 달리기보다는 헬스에 어울릴 것 같은 근육질의 남자도 있고, 또 중학생처럼 보이는 어린 남학생도 있다.
그는 좌우로 고개를 두 번 흔들고 "이야아!"라며 소리를 지른다. 잠시 힘들다는 점을 잊는다. 그리고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발을 힘차게 내딛는다.
'빨리 끝내고 싶다!'
다시 한 번 땀을 훔친 그는 한 발짝 더 세차게 발을 내디딘다.

큰길을 가로질러 커다랗고 둥근 노란 풍선으로 출발지점을 표시하기 위해 'START'라고 쓰여진 광화문 네거리에서 달리기를 시작해서 이제 5Km라는 하얀 판에 검은색 글씨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거리를 그는 달리고 있다. 글자판 뒤로는 자원봉사자들이 컵에 물을 담아 선수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그들은 선수들이 찾기 쉽도록 5Km라고 쓰여진 푯말 뒤에 있는데 선수들에게 "힘내세요!" 라는 말과 함께 박수를 쳐준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져 사람들의 응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누군가를 향해 피켓을 들고 응원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웃기게 생긴 그의 구레나룻이 벌컥 마시다 흘린 물 때문에 옹색한 모습이다. 그 수염을 앞세워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옆에서 박수를 치며 힘내라고 응원하는 사람에게는 딱 죽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들은 그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주름살을 만들어 놓은 그의 이마 아래로 눈빛은 진지하고 독기 서린 날카로운 반짝임까지 보인다. 짧은 반바지가 시원하게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빼빼한 다리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뛰고 있는 그를 방해하려는지 줄곧 바람은 앞에서 불어 그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몸에 착 달라붙게 만든다. 그는 무거운 발을 한 발씩 내딛고 있다.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힘이 드는 거지? 힘내자. 지치면 안 되!'
그는 뒤쳐지지 않으려 애쓴다.

2

"반바지 챙겼어?"
그는 아무래도 내일 뛸 마라톤이 걱정이 되는지 아내에게 반바지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대꾸를 바란 것은 아니다. 초조한 사람이 중얼거리듯이 내뱉은 물음이다. 그의 파란색 반바지는 달리기 선수들이 입는 것과 비슷하다. 삼각 팬티보다 조금 더 크고, 헐렁한 반바지다. 동대문에서 8천원 달라는 것을 7천원으로 깎고,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온 게 1주일 전 일이다.
"걱정되는 모양이죠?"
아내는 가지런한 이빨을 보이면서 살짝 웃음을 보이더니, "예, 양말하고 운동화까지 챙겨서 거실에 두었어요." 라고 대답한다.
"그냥 물어본 거야. 걱정은 무슨..."
"아닌 것 같은데요? 잘 뛸 수 있겠어요?"
"그나저나 내일 날씨가 흐리다는데 춥지는 말아야 할 텐데... 그래야 즐겁게 뛸 수 있잖아."
그는 딴 소리를 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열심히 준비한 거잖아. 그렇게 고대하던 날이라 어렸을 때 소풍가기 전 날처럼 즐거운 거 있지. 가방에 담은 김밥이랑 사탕 먹을 생각을 하면서 잠자던 때처럼 즐거워."
"그래요?"
침대가 놓인 안방에서 그들은 조용하게 얘기를 나눈다. 텔레비전에는 토요일이면 이어지는 규칙적인 외화가 화면 가득 채우고, 텔레비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몇 년 사이에 세 번이나 방송된 '폴리스아카데미'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그와 아내는 알지 못한다. 작은 창문 만한 직사각형의 결혼 사진 속에 아내의 미소가 창 밖에서 새 들어오는 불빛에 은은하게 보이고 이제 잠자리에 들기 위해 분홍색 오리털 이불 속에 들어가 얼굴만 내밀고 있는 그 역시 편안해 보인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광화문까지 가야잖아. 나부터 잘게."
"그래요, 먼저 주무세요. 저는 조금 있다 잘게요. 정말 긴장이 되긴 되는 모양이네요. 사실 40킬로를 뛰는 게 장난도 아닐 테고."
"긴장은 무슨.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했잖아. 그걸 테스트하는 게 내일인데 사실 뛰다가 힘들면 그만 두면 되잖아. 뭐, 누가 뒤따라오면서 뛰라고 독촉할 것도 아니고.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잖아. 하다가 못하겠거든 걸으면 되는 건데, 뭐."
아내는 대답 대신 텔레비전을 끄고 거실로 나간다. 그리고 아내가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그는 다 하지 못한 말을 잇는다.
"긴장은 무슨.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지금까지 연습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잘 뛰려는 것뿐이라고. 졸려서 못 뛰면 안 되잖아. 달리는 게 뭐, 힘든 일이라고. 난 자신 있어. 절대 도중에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그때, 거실로 나간 아내가 제법 큰 소리로 묻는다.
"그런데 내일 아침은 무엇으로 할까요?"
"그냥 밥 먹지 뭐."
"삼겹살이라도 구울까요?"
"고기 먹고 배 아프라고? 곧바로 달리기를 할 건데 소화가 될까?"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