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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보유자 

제102호

1996년 3월 11일

김표영(金杓永, 1925년생)

 

  배첩은 그림이나 책에 종이와 비단을 붙여서 미적 가치를 더하고 실용성 및 보존성을 높여 서화의 문화적 가치를 높여 주는 전통적인 서화 처리법을 말한다. 지식의 전달 매체인 문자나 그림이 종이 위에 그려지고 쓰여지면서 그것의 미적 가치를 높여 주거나 사용상의 실요성을 보충하기 위해 배첩 기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배(褙)는 등[背]에다가 옷[의=衣]을 입힌다는 의미이다.

 

  서기 357년의 안악 3호 고분벽화의 병풍 그림과 서기 407년의 덕흥리 벽화의 병풍 그림 등은 삼국시대의 배첩장의 존재와 함께 그 당시 귀족층의 예술품 향유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고려 초에는 새로운 왕조 운영의 정치 이념으로 대두된 유학적 규범과 의식의 보급에 관련된 교화적 성격의 인물화와 초상화가 그려졌다. 특히 왕과 왕비의 진영(眞影)을 비롯하여 공신과 같은 선행자의 초상화가 제작되었음을 볼 때 그림의 배첩을 전문으로 담당한 장인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의 국교가 불교라서 사경화(寫經畵)가 발달하는 회화상의 특징을 보이며 사찰에서 불화가 많이 제작되었던 것도 배첩 기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 목판 인쇄술과 제지 기술이 한층 더 발달하게 된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의「예전(禮典)」과「공전(工典)」에 보면 도화서에 배첩장 2명이 소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그림이 그려진 다음 배접의 일을 전문 장인의 손에 맡겼다는 명확한 증거라 할 수 있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지도를 배접하여 족자를 제작하고 인쇄한 책, 그리고 상소문을 배첩하는 내용과 왕실에서 선조의 영정을 모사하거나 보수하는 일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왕실의 사업이라 배첩 기술의 전문화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일제 때에 일본의 표구업이 들어와 일본 표구를 배운 한국인 표구사들이 개업하면서 표구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었다.

 

  족자를 예로 들어 배첩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족자는 서화를 벽에 걸어서 볼 수 있도록 만든 두루마리식의 배첩 형태로 어진(御眞)이나 공신의 초상화 그리고 탁본한 비문과 그림을 주로 담고 있으며 전통 가옥의 실내 구조에 맞는 서화 처리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의 예술적 욕구가 담겨져 있다. 족자의 배첩은 종이의 적절한 배접과 화심에 맞는 비단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 족자에 사용되는 도구는 반달목, 축봉, 장식핀, 족자끈, 비단이다.

 

  먼저 서화 뒷면에 배접하고 화심에도 얇은 한지로 배접하여 건조판에 말린다. 건조가 되면 떼어내어 가장자리의 배접지를 재단해 준다. 그리고 화심의 가장자리에 배접한 비단을 달아 주는데 화심의 크기에 따라 비단의 크기가 결정된다. 풀칠하는 부분의 폭이 얇기 때문에 나무망치로 풀칠한 부분을 골고루 두들겨 접착시켜 준다. 풀칠이 끝나면 비단의 가장자리를 알맞게 잘라 주고 세로축의 가장자리를 1.5센티미터 정도 안으로 접어서 풀칠한 뒤 끝을 마무리해 준다. 이것을 일명 가접기라고 하는데 비단의 실이 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리고 반월목과 축봉을 감싸기 위한 주머니를 달아 준다.

 

  다음에는 족자 뒤의 전면에 배접을 두 번 해 준다. 뒷면에 붙일 종이의 전면에 된푼로 풀칠을 하는데 이때에 종이는 두 장으로 나누어 두 번 붙여 준다. 두 번의 배접이 끝나면 다짐귀얄로 뒷면을 꼼꼼히 쳐 준다. 화심과 배접지의 접착을 강하게 하고 건조될 떄 화심의 수축 작용을 막기 위함이다. 그리고 축 다는 면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족자의 상단과 하단에 색지를 발라 준다. 다시 그림의 전면이 건조판을 향하도록 하여 풀은 가장자리만 칠하여 붙여 준다. 그리고 그림 안으로 공기를 넣어 주어 화심이 건조판에 붙지 않도록 한다. 가장자리에만 풀칠하는 이유는 가장자리가 건조되면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금림이 팽팽히 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족자는 화심에 한 번, 비단에 한 번, 전체에 두 번 총4회에 걸쳐 배접한다.ㄷ 건조가 된 다음에는 건조판에서 떼어내어 서화를 유연하게 하고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밀초로 밀어 준 뒤 그 위를 구슬 꾸러미로 촘촘히 밀어 준다. 이것이 끝나면 마지막 단계로 축봉 달기를 한다. 사용되는 재료는 축봉, 반월목, 축수, 장식핀, 족자끈이다. 구슬 꾸러미 밀기가 끝나면 비단의 끝선에 맞추어 가장자리의 배접지를 제거한다.

 

  맨 먼저 그림 상단에 반월목(직경 2센티미터)을 감쌀 수 있도록 비단과 배접지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반월목을 글미 폭에 맞게 잘라서 양쪽 끝 부분에 비단 색깔(하늘색)과 같은 순지를 직경 3센티미터 정도로 잘라서 반월목 끝 부분을 감싸 주고 비단과 배접지가 분리된 곳에 풀칠하여 반월목을 감싼다. 반월목의 3분의 1, 3분의 2 지점에 그림과 같이 장식핀을 박고 장식핀 구멍을 통해 족자끈을 연결해 준다. 그림을 걸어서 알맞게 지탱할 수 있도록 여유 있게 묶어 준다. 그리고 족자를 말아서 묶어 주기 위해 족자끈의 가운데 지점에 끈을 연결해 준다. 상단의 축 감싸기가 끝나면 하단에 축봉을 달아 준다. 하단 끝 부분에 축봉(봉의 직경은 4센티미터)을 달 수 있도록 비단과 종이를 분리하여 축봉을 감싸서 배접지부터 말고 그 위에 비단을 말아 주면 작업이 마무리된다.

 

  배첩장 김표영(1925년생)은 1973년에 지류문화재 수리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독보적으로 지류문화재만을 전문적으로 수리하면서 전통 배첩 기술을 연구하고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김표영은 열네 살 되던 1938년 강화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7월 사촌 매형 윤병세가 청주에서 경영하는 청주표구사에서 일하면서 표구업에 입문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그는 1954년에서 1957년까지 만 3년 동안 인사동에 있는 박당표구사에서 일하면서 그 당시 최고의 표구사인 김용복에게 배접 기술을 전수받았고 인근에서 표구사를 운영하면서 13년동안 사사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김용복을 스승으로 여긴다.

 

  1973년에 지류문화재 수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18년 동안 문화재관리국,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창덕궁, 경복궁, 송광사 등의 주요 기관의 지류문화재를 수리하였다. 전국 주요 사찰의 탱화며 괘불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지금 갈현동으로 공방을 옮겨 자신의 표구점에다 지류문화재보존연구원을 설립하여 집중적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류문화재를 수리하는 동안 세 명의 제자를 얻었다. 강문화, 정우식, 이종훈이 그들이다. 모두 일을 배운 지 20년 이상 되고 지류문화재 수리기능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