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의 마지막 길에 합당한 예우해야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의 마지막 길에 합당한 예우해야

Posted July. 13, 2020 07:55   

Updated July. 13, 2020 07:55

中文

 6·25 전쟁 영웅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10일 별세했다. 그는 해방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창군 때부터 군에 몸을 담았다. 국방부 정보국장으로 여순반란사건 이후 남로당 군인을 솎아내 규율이 잡힌 군대를 만들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에서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에는 평양 진군의 선봉에 섰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후퇴해 38선에서 교착상태가 이어질 때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이끌어 적의 후방교란을 차단했다. 6·25 전쟁의 결정적인 국면마다 백 장군이 있었다.

 백 장군은 남다른 군 지휘능력과 영어실력으로 한미연합작전의 빼놓을 수 없는 한국 측 주역이었다. 그는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6·25 전쟁 중 32세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고 이듬해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전투경험이 부족한 한국군을 우습게 취급하던 미군도 백 장군의 실력과 용기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은 한국에 부임하면 백 장군을 찾아 인사하는 것을 지금까지도 관례로 삼아왔다. 그는 한미군사동맹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존경받는 노장(老將)으로 늙어가던 그를 뒤늦게 ‘친일파’라고 낙인찍고 나온 것은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다.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이었다. 김광진 청와대 정무비서관은 2012년 국회의원이었을 때 국회 국정감사에서까지 이런 주장을 펴 소동이 일었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간도특설대가 상대한 것은 주로 중국공산당 팔로군이었다. 게다가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부임한 1943년 무렵에는 앞선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팔로군에 소속된 동북항일연군 등은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뒤였다.

 여권과 친여적인 독립단체 일각에서는 백 장군의 서울현충원 안장은 물론이고 대전현충원 안장마저 거부하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문재인 정부의 보훈처는 서울현충원이 포화상태라는 이유로 백 장군의 서울현충원 안장을 거부하고 대전현충원 안정을 결정했다. 백 장군은 생전에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며 대전현충원 안장 결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장권의 품격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 하지만 가능한 방법을 찾아내 백 장군을 서울현충원에 모셔야 한다. 당장은 어렵다면 차후에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준 전쟁영웅에 대한 합당한 대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