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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전에도… ‘전염병 공포’는 사회를 짓눌렀다

150년 전에도… ‘전염병 공포’는 사회를 짓눌렀다

Posted April. 11, 2020 07:52   

Updated April. 11, 2020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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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메커니즘이 갑자기 억제되고 장액이 급속하게 빠져나간 육체는 축축하게 시든 살덩이로 바뀌는데 … 그 안의 마음은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 있으며 영혼은 시체 속에 갇힌 채 공포에 질려 밖을 본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19세기 콜레라 환자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환자의 정신만은 또렷하다. 이 때문에 무색무취의 자그마한 알갱이들이 둥둥 떠 있는 물이 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도 초 단위로 수명이 줄고 있다는 인식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당대 사람들은 이를 ‘콜레라의 저주’라 불렀다.

 대규모 전염병의 공포는 사회를 짓누른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발병 원인을 규명하고 공포를 극복할 해법을 찾느라 꿈틀댄다. 1854년 런던도 마찬가지였다. 뉴욕타임스나 가디언 등에 글을 기고하며 과학 대중화에 힘쓴 저자가 콜레라균이 휩쓸고 지나간 런던 소호 지역 브로드 거리를 조명했다. 그리고 의사 존 스노와 교구목사 헨리 화이트헤드라는 인물이 콜레라 확산을 막고 학계 패러다임까지 바꾼 여정을 그렸다. 인물들에게 몰입도 높은 서사를 입혔고 치밀한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이뤄진 상세한 묘사가 미덕이다.

 1854년 8월 28일부터 9월 9일까지 약 2주간이 책의 시간적 배경이다. 이 기간 발병지로부터 반경 225m 이내의 거주민 중 500명 이상이 쓰러졌다. 9월 8일 세균의 온상으로 식수 펌프가 지목됐고 펌프 손잡이를 제거하며 이 일대 콜레라는 감소세로 접어들었다.

 당시 콜레라의 급속한 확산을 이해하려면 영국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런던을 묘사하는 글에서 빠지지 않는 단어는 ‘악취’였다. 산업 발전으로 ‘연기 나는 도시’가 선진 도시임을 입증하듯 화석연료가 매일 타올랐다. 쓰레기와 오물이 넘쳐나는 하수도 또한 지독한 냄새의 원인이 됐다. 1851년 런던 인구가 세계 최대 수준인 240만 명으로 불어나며 시체도 넘쳐났다. 매주 구덩이 속에 시체를 던져 넣고 묻기를 반복하며 도시는 악취에 찌들어갔다.

 하수시설을 충분히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수세식 변기는 거리마다 오물을 넘치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화려한 도시의 뒷골목에서는 동물 사체와 사람 시신, 그리고 오물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돈 될 만한 것을 건져내는 넝마주이도 많았다.

 악취는 학계에서 “질병의 원인”으로 통했다. 불결하고 독한 냄새가 공기 중에 퍼져 사람을 병들게 한다는 독기론(毒氣論)이 주류 이론이었다. 하지만 존 스노와 헨리 화이트헤드가 콜레라 사망자들의 행적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원인은 오염된 물이었다.

 이들이 처음 “콜레라는 수인성 질병”이라고 주장했을 때 보건 당국은 “공기의 독성이 너무 강해 물까지 감염시킨 것”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콜레라 사망자의 분뇨와 온갖 세균이 담긴 오염된 구덩이의 물이 펌프 안으로 유입된 사실이 밝혀졌다. 콜레라와의 싸움에서 결정적 전환이 이뤄진 순간이다. 이 여정을 기록한 감염지도는 지금도 전해진다.

 150년 전 콜레라와의 싸움은 남 일 같지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는 연구진, 병마와 싸우는 환자와 의료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며 ‘격리일지’를 쓰는 우리도 후대에 남길 새로운 감염지도를 쓰는 셈이다. 이 책이 개정판임에도 다시 읽어볼 만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기윤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