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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 원정대’ 3개팀 파견…해인사, 영남 만세시위 중심에 서다

‘독립선언서 원정대’ 3개팀 파견…해인사, 영남 만세시위 중심에 서다

Posted February. 23, 2019 07:54   

Updated February. 23, 2019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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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을 휩쓴 3·1만세운동의 거센 바람은 합천 해인사를 비켜 가지 않았다.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전국 3대 사찰 중 하나인 해인사를 주시했다. 이례적으로 경찰 주재소를 해인사에 설치하고 경비전화도 가설했을 정도다. 대구와 해인사를 잇는 도로도 확장했다. 팔만대장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해인사 경내에 있는 보통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려는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해인사 학생과 승려 300여 명은 친일 성향의 주지 이회광에게 반감을 품고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구국의 길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이용락, ‘삼일운동실록’)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서 유학 중인 학생 등을 통해 해인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됐다. 학생 강재호와 송복만은 200여 리 떨어진 대구까지 걸어가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3만여 장을 사왔고, 밀실에서 독립선언서 1만여 장을 등사했다.

 그 사이 학생 대표 30명은 팔만대장경각 뒷산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했다. 지역별로 나눠 활동하기로 하고 3명씩을 1개 대(隊)로 묶어 3개 대를 조직했다.(‘독립운동사’) 누가 어느 지역을 맡아 떠났는지를 총책 이외에는 알 수 없도록 극비에 부쳤다. 3개 대가 독립선언서를 갖고 △경주 양산 부산 김해 △합천 의령 진주 하동 △거창 안의 함양 산청 등으로 떠났다. 다른 학생들도 각자 연고가 있는 곳을 찾아가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학생이 시위 과정에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강재호 송복만 등 10여 명은 훗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독립군이 됐다. 일부는 불교 비밀결사 ‘만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나머지 학생은 사찰 밖으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 해인사 입구의 일주문(홍화문)에선 3월 31일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학생 200여 명은 오전 11시 홍화문 밖에서 1차로 독립만세를 외쳤고, 그날 오후 11시 군중이 해인사 앞 도로에서 만세시위를 벌이자 다시 합세해 시위를 이끌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3개 팀을 파견함으로써 경상도 일대 만세시위의 중심에 서겠다는 대담성을 보인 점은 다른 사찰에선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라며 “팔만대장경으로 상징되는 호국불교 정신에 대한 자부심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같은 대학 최화정 박사는 27일 열리는 불교계 3·1운동 학술 세미나에서 ‘해인사의 3·1운동’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성동기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