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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교토 우지강변서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제막식

日 교토 우지강변서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제막식

Posted October. 30, 2017 07:52   

Updated October. 30, 201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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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어리석은 역사를 마음에 새기기 위해 모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봤던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면서 하늘을 올려봅시다.”

 28일 오전 11시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 우지강변. 하야세 가즈토(早瀨和人) 우지교회 목사의 말에 현장에 모인 시민 150여 명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도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이어 시인의 조카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가 비석에 새겨진 시 ‘새로운 길’을 낭독했다.

 이날 이곳에선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제막식이 열렸다.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건립되는 것으로 일본 내에서는 세 번째다. 높이 2m, 폭 1.4m의 이 비석은 일본과 한반도의 화강암 기둥이 윤동주를 상징하는 원통을 떠받치는 형태로 제작됐다. 윤 교수는 “큰아버지(윤동주)도 추억의 장소에 시비가 세워진 걸 기쁘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3년 초여름 도시샤대 영어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인은 징병을 피해 귀국을 결심했고, 학우들은 그를 위해 우지강변에서 야외 송별회를 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시인은 송별회 직후인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다 1년 반 뒤 옥사했다.

 시인의 마지막 사진은 1990년대 중반 NHK와 KBS가 공동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중 윤 시인의 학우이면서 당시 같이 사진을 찍었던 기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 씨의 앨범에서 발견됐다. 기타지마 씨의 증언에 따르면 윤 시인은 ‘마지막이니 노래를 한 곡 불러 달라’는 학우들의 요청을 받고 쑥스러워하다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이번에 비석을 세운 자리는 아리랑을 불렀던 강변 근처다.

 사진에 얽힌 사연이 알려지면서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기념비 건립 움직임이 일었다. 2005년 시민단체가 결성됐고, 2007년 각계의 모금으로 비석 제작까지 마쳤으나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10년 동안 건립을 미루다 이번에 시즈가와(志津川)구에서 구 소유 땅에 건립을 허가했다.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안자이 이쿠로(安齋育郞) 대표는 “시인이 청춘의 빛나는 순간을 보낸 이곳에 비석을 세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윤동주의 모교 연세대를 대표해 참석한 백영서 인문대학장은 “감격스럽다. 인간의 존엄과 세계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발신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올해 3월 기념비 건립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를 보고 현해탄을 건너온 중학생도 있었다. 경북 구미 광평중 3학년 박희원 군은 “윤동주 시인을 좋아했는데 기사를 읽고 뜻깊은 행사라고 생각해 용돈을 모아 아버지, 동생과 함께 참석했다”고 말했다.

 NHK PD 재직 시절 마지막 사진을 발굴했던 주인공 다고 기치로(多胡吉郞·61) 씨는 행사 후 기자와 만나 “비석이 세워진 것은 한마디로 감개무량한 일”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윤동주가 인생을 바꿨다’는 다고 씨는 1995년 다큐멘터리 방영 후에도 줄곧 윤동주 관련 연구를 지속해 왔으며 최근 ‘생명의 시인 윤동주’라는 책도 냈다.

 현재 일본에는 윤 시인이 유학했던 교토의 도시샤대와 당시 하숙집이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에 비석이 있다. 도시샤대의 경우 매년 한국인 2만 명이 시비를 찾는다고 한다. 이번에 건립되는 우지 기념비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대학 교내가 아닌 장소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장원재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