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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의 신분상승

Posted June. 19, 2013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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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 난립한, 똑같은 모양의 집장사 집들이 공터들 사이에 어색하게 서있는 한적한 거리를 몇 분 달리고 나자 비로소 그가 살아야 할 동네가 멀리에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택가와 잇대어 있는 암회색의 어두운 공장지대와 굴뚝의 시커먼 그을음이 보였다. 이곳은 바로 멀고 아름다운 동네, 소설가 양귀자 씨의 연작소설에 나오는 원미동()이다. 양 씨가 1987년 펴낸 원미동 사람들에는 서울서 밀려난 사람들, 자본의 논리에 상처받은 이들이 모여든 부천시 원미동 23통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시절 비만 오면 원미동에서 가장 흔히 듣는 말이 있었다. 마누라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살아.

한국의 중장년 이상 세대는 비 오는 날 땅바닥이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 걷기조차 힘들었던 내 마음속의 원미동을 한두 곳쯤은 기억하고 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서울 변두리 에 비 올 때 질퍽거리던 골목이 있는 것은 흉도 아니었다. 그래서 방수 장화는 농사지을 때나 막노동할 때 신는 작업용 신발인 동시에 달동네 서민들에게 비 오는 날의 필수품이었다.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가 1697년 출간한 전래동화집에 장화 신은 고양이가 실려 있다. 방앗간을 하던 아버지가 죽자 3형제 중 첫째와 둘째는 각기 방앗간과 당나귀를 물려받지만 막내에겐 달랑 고양이 한 마리가 돌아온다. 낙심한 막내에게 고양이는 장화를 사 달라 부탁한다. 평범한 고양이는 빨간 장화를 신은 뒤 놀라운 변신을 한다. 지혜롭게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면서 주인에게 해피 엔딩을 선물한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고무 혹은 비닐 재질로 만든 장화를 신고 출근하는 여성을 길거리에서 흔히 보게 된다. 이름값 하는 브랜드 제품이 20만30만 원대, 어떤 것은 70만 원대라는데 불티나게 팔린단다. 거금을 들인 탓인지 맑은 날도 장화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예전 사람들이 고단한 삶을 은유하는 장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면 지금은 장마철 패션의 완성을 위한 소품으로 레인부츠를 탐낸다. 생활필수품에서 패션필수품으로, 장화의 신분 상승이 놀랍기만 하다.

고 미 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