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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일장기 말소는 동아일보에선 항다반사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장기 말소는 동아일보에선 항다반사였다

Posted December. 26, 2005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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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분량의 이 수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활약했던 기자들의 회고록을 담은 신문기자 수첩(1948년 모던출판사 발행)에 실린 것으로 최근 동아일보 사사편찬위원회 연구팀이 국회도서관에서 찾아냈다.

이 기자는 수기에서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 지면에서 일장기 말소는 항다반()으로 부지기수였다며 당시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독립만세를 방불케 한 손기정 만세

1936년 8월 9일(현지 시간)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전해들은 동아일보 기자들은 호외를 만들어 뿌리는 한편 메가폰을 들고 가두선전을 통해 소식을 알렸다. 당시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 모인 군중은 31운동 때를 방불케 하는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회사 앞에 야심한 삼경()이건만 운집한 대군중 모두가 전파 일성에 환희 일색이요, 함성 환호뿐이다.목이 터지게 외치는 손기정 만세! 소리는 기미년 독립만세 소리에 방불한 바 있었다.

이로부터 16일째인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 체육 주임기자였던 이길용(당시 37세) 기자는 청전 이상범( ) 화백, 사진반원, 편집부원 등 여러 직원과 힘을 모아 이날 발간될 신문에서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 유니폼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웠다. 이튿날 아침부터 동아일보 기자 10여 명이 차례로 종로경찰서에 붙들려 갔다. 이 기자는 단 여섯 방밖에 없는 경찰부 유치장은 대거 10명의 사우()로서 난데없는 매(고문)의 합숙소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란 크나큰 기관의 문이 닫혔고, 날마다 중압 속에서일망정 왜정의 그 눈초리를 받아가면서도 조석으로 그렇게도 우렁차게 활기 있게 돌던 윤전기가 시름없이 멈춰 녹슬게 됐다며 정간()을 당했던 안타까움과 분노를 회고했다.

일장기 말소는 항다반사()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에서 일장기를 말소하는 일은 마치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처럼 흔했다고 증언한 이 기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정황에서 일장기를 지웠는지도 예시했다.

지방이건 서울이건 신문지에 게재해야 할 무슨 건물의 낙성식이니, 무슨 공사의 준공식이니, 면소니 군청이니 또는 주재소니 등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차해 다는데 이것을 지우고 싣기는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우리로서 어찌 손기정 선수 유니폼에 선명했던 일장 마크를 그대로 실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기자는 이 나라의 아들인 손 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에 그 유니폼 일장 마크에서 엄숙하게도 충격을 받았다며 그래도 월계수 화분을 들고 촬영한 손 선수 인물로는 처음인지라 넣고 싶은 욕심에 그것을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다고 설명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한 첫 회고

이 기자는 1947년 11월에 쓴 이 글에서 일장기 말소사건이 광복 후 영문()으로는 미 주둔군 보도진을 통해 알려졌지만 이처럼 자세히 쓰여지기는 내 알기에는 이것이 처음 되는 자술()이다고 썼다. 그러나 이 기자는 625전쟁 중 납북됐고 이 글은 이후 잊혀졌다. 이 때문에 이 수기는 동아일보 사사()는 물론 한국체육기자연맹이 펴낸 책 일장기 말소 의거 기자 이길용(1993년 발간)에도 수록되지 못했다.

이 기자의 3남 태영(64전 중앙일보 체육부장) 씨는 그동안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해서는 이 화백 등 다른 기자들의 회고밖에 없었는데, 선친께서 직접 쓰신 수기가 발견됐다는 점에 매우 놀랍고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언론사학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일각에서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동아일보의 편집방침과는 관계없는 이 기자 개인의 결단일 뿐이라고 폄훼하지만, 이 기자의 이 수기가 동아일보 내부의 반일적 분위기와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 의거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고 말했다.

26일 오후 6시 반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는 이 기자를 기리는 제17회 이길용 체육기자상 시상식이 열린다.



전승훈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