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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1990.08.10 ~ 1994.06.26
남산의 부장들
동아일보는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관여해온 한국현대사의 이면을 추적해 약 3년 10개월여 동안 장기 연재했다. 본 시리즈는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때부터 5공화국 마지막해인 1987년까지의 ‘남산’의 실체를 파헤친 내용으로, 책으로도 출간해 50만 부 이상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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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山의 부장들]<1> 初代부장 金鍾泌씨 共和黨사전조직 政治자금 의혹
「南山」의 부장들 〈1〉初代부장 金鍾泌씨, 共和黨사전조직 政治자금 의혹《 「權力의 觸手」30년 서울「南山」。 지난날의 중앙정보부와 오늘의 국가안전기획부의 별칭이다。 61년6월 中情이 창설된 후「南山부장」들은 정권유지와 국가안보면에서 독특한 역할을 맡아왔다。 「南山부장」을 지낸 사람은 모두 17명(서리 2…
1990.08.10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2> 3代부장 金在春씨, 盧泰愚대위등 「7.6모의」 不問
南山의 부장들 〈2〉3代부장 金在春씨, 盧泰愚대위등 「7·6모의」 不問 金鍾泌초대중앙정보부장의 활동반경은 뒷날 南山부장들의 힘과 역할을 엿보게 해주었다。 韓國외교의 분수령이자기복으로 여겨지는 65년韓日협정의 뼈대는 金|오히라(大平)메모였다。 金부장은 62년말 朴正熙최고회의의장의 밀명을 받고 日本으로 건너…
1990.08.17
19면 사회
[南山의 부장들]<3> 4代부장 金炯旭씨, 63년 大選때 野黨분열작업에 큰몫
南山의 부장들 〈3〉4代부장 金炯旭씨, 63년 大選때 野黨분열작업에 큰몫 제4대 중앙정보부장은金炯旭씨였다。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조차「확정」되지 않은 인물。 누군가에의해 영원히「실종」됐을것이라는 추측만 남기고있는 金씨의 운명은 여러모로 朴正熙정권의 영욕을 상징하는듯 하다。 육군중령으로 5·16쿠데타…
1990.08.24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4> 4代부장 金炯旭씨 숱한 政治테러 자행…物證 없애
南山의 부장들 〈4〉4代부장 金炯旭씨 숱한 政治테러 자행…物證 없애 金炯旭정보부장은 朴正熙대통령의 신임을 잃지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기자와 정치인에대한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테러사건은 당시 국회에서도 특별조사가 진행됐으나 진상을 가리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金부장…
1990.08.31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5> 金炯旭, “尹潽善후보 당선되면 저격하라”
南山의 부장들 〈5〉金炯旭, “尹潽善후보 당선되면 저격하라”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殺意번득이는 테러가 잇달고 도무지 범인의 그림자도 드러나지 않던 60년대후반。 그시절 정보부장 金炯旭의 이름 석자는 분명 공포정치의 대명사였다。 朴正熙대통령개인과 정권의 이해관계가 걸린 어떤 사안、누구를 가리지않고…
1990.09.07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6> 朴鐘圭, 中情찾아가 권총 휘둘러
南山의 부장들 〈6〉朴鐘圭, 中情 찾아가 권총 휘둘러 60년대후반 金炯旭정보부장의 힘은 정치무대에서가히 無所不爲라 할수 있었다。 『당시 金부장은 朴正熙대통령을 위한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았다』고 金在淳의원(民自·前국회의장·당시共和黨대변인)은 회고한다。 金부장의 절대적인 파워는 두말 할것도 없…
1990.09.14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7> 의원 弱㸃잡고 안하무인 행패,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7〉의원 弱㸃잡고 안하무인 행패, 金炯旭 金大中의원이 金炯旭부장과 中情을성토한것은65년7월31일이었다。 당시 국회에선 韓日협정비준동의안 심사특위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의 국회속기록。『정보기관이 쓸데없이 정치에 개입하고 위로는 정부 고위당국자 국회 與野정치인 주위에 4중 5중의 정보망을 …
1990.09.21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8> 金載圭와 함께 JP제거工作,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8〉金載圭와 함께 JP제거 工作, 金炯旭 金炯旭정보부장의 정치공작은 여당인 共和黨의원들을 상대로도 이루어졌다。 여당내의 공작 사찰대상은 주로 朴正熙대통령의장기집권을 가로막을지도모르는 잠재세력과 金鍾泌당의장및 그 계열이었다。 당시 共和黨 초선의원李萬燮의원(뒷날 국민당총재)도 金부장에게 당하…
1990.09.28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9> 모함과 査察┄사사건건「反JP」,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9〉모함과 査察┄사사건건「反JP」, 金炯旭 金炯旭정보부장은 64년하반기부터 줄곧 反JP대열에 섰다。 韓日회담반대데모와 관련한 JP의 공직사퇴및 2차외유를 주도한이후 그는 부장을 그만둔 69년까지 쉴새없이JP계를 짓눌렀다。 JP계 金龍泰의원도 표적에 속했다。 65년 어느날朴正熙대통령은 金의…
1990.10.05
19면 사회
[南山의 부장들]<10> 아들 不具된뒤 성격 暴惡,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10〉아들 不具된 뒤 성격 暴惡, 金炯旭 金炯旭정보부장의 기질과 성격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 그를 잘 알았던 舊共和黨의원들은 金부장이이념 사상적으로는「極右」였고 성격적으로「난폭」했으며 정치적판단에서는 교활하다싶을 정도로 자기보호에 민감했다고 증언하고있다。 그러나 유별나게 고향사람(黃海…
1990.10.12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11> 3選개헌「惡役」맡고 自滅재촉,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11〉3選개헌「惡役」맡고 自滅재촉, 金炯旭 金炯旭정보부장은 임기후반(67~69년)을 3選개헌을 위해 바쳤다。 朴正熙대통령이 개헌 지휘봉을움직이는 대로 金부장은장애물을 제거하고 政敵을무찌르는 충실한「행동대장」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그 惡役이 金부장 권력가도의 끝이었다。개헌이라는 또 한차례 헌…
1990.10.19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12> 「복지회」관련 JP계 의원들 拷問,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12〉「복지회」관련 JP계 의원들 拷問, 金炯旭 金炯旭정보보장은 68년5월 共和黨내의 국민복지회사건을 조사했다。 팀장은中情의 方俊模 감찰실장이었다。 복지회라는 조직구상을갖고 金鍾泌당시共和黨의장 계열에 접근한 사람은 宋相南씨(예비역 공군대령)였다。 宋씨는 共和黨의 산업화정책에 따라 도시는 …
1990.10.26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13> 軍納에 개입 커미션 뜯어 착복도,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13〉軍納에 개입 커미션 뜯어 착복도, 金炯旭 金炯旭정보부장의 국민복지회에 대한 拷問조사는68년6월 정치쟁점으로 비화됐다。 야당은 현역 共和黨국회의원 金龍泰를 中情이 고문할 수 있느냐고 공세를 폈다。 당시 與野총무회담에서新民黨의 鄭成太원내총무는 中情의 의원연행조사를따지기 위해 丁一權국…
1990.11.02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14> 개헌반대 발언 YS에 초산테러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14〉개헌반대 발언 YS에 초산테러 金炯旭 69년1월8일 共和黨 吉在號사무총장은 마침내「3選개헌 검토중」이라고 발표、가파른 개헌高地에의돌진을 선언했다。 그제야 국민들은 68년한 해의 구호가「중단없는전진」으로 내걸린 연유를깨닫게 됐다。 共和黨정권의 3選개헌추진 최종결정은 68년말三清洞모임에…
1990.11.09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15> 野議員 3명 「改憲지지」로 포섭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15〉野議員 3명 「改憲지지」로 포섭 金炯旭 3選개헌 고지는 예상했던것보다 가파르고 험난했다。 야당 종교계 재야 대학생 고교생에 이르기까지국회에서 거리에서 육탄으로 맞서 저항하고 반대했다。 共和黨정권 내부의 金鍾泌계열 의원들의 항거도한동안 거셌다。 69년 4·8항명으로 共和黨을 …
1990.11.16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16> 권총꺼내「李萬燮제거」지시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16〉권총꺼내「李萬燮제거」지시 金炯旭 69년7월29일。 야당의원曺興萬 成樂絃의 변절선언(3선개헌지지)은 개헌안발의를 위한 전주곡으로마련되었었다。 바로 그날 共和黨은 서울영빈관(호텔新羅자리)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개헌안을 발의할 참이었다。 다음날인 7월30일 새벽4시40분까지 무려 18시간이나 …
1990.11.23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17> 해임된뒤 보복불안…「용서」구걸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 〈17〉해임된 뒤 보복불안…「용서」구걸 金炯旭 3選개헌안이 국민투표로 확정된 것은 69년 10월17일이었다。 누구나 예상했던대로 대통령 朴正熙의집요한 집권욕의 승리였다。 총투표수 1천1백60만4천38표중 찬성 7백55만3천6백55표、반대 3백63만6천3백69표로 찬성률은 65·1%였다。 青瓦臺…
1990.11.30
19면 정치
[南山의 부장들]<18> 불안속 亡命…79년「영원한 실종」 金炯旭
南山의 부장들〈18〉불안속 亡命…79년「영원한 실종」 金炯旭 시인 가운데 千祥炳이라는 이가 있다。 그는 오늘날 金炯旭정보부장 시절의한 증인으로 남아있다。 「아이론 밑 와이샤쓰같이/당한 그날은|/이젠몇년 이었는가/무서운 집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 날은|/내 살과 …
1990.12.07
19면 사회
[南山의 부장들]<19> 3選개헌후 유순한 金桂元 기용
南山의 부장들 〈19〉3選개헌후 유순한 金桂元 기용 69년 가을 육군참모총장을 그만 두고 대장으로 예편된 金桂元씨(현재67세)는 부인 徐鳳仙씨(〃62세)와 둘이서만 단풍구경을위해 고향쪽으로 떠났다。 서울 清凉里에서 기차를타고 慶北 榮州방면으로길을 나섰다。 오랜 군생활에서 벗어나 부관도 딸리지않은 부…
1990.12.14
19면 사회
[南山의 부장들]<20> 金成坤 정치자금 관리에「명수」 金桂元
南山의 부장들 〈20〉金成坤 정치자금 관리에「명수」 金桂元 朴正熙대통령은 의심많은 「전략가」였다。 그리고 작건 크건 승부에는 진지했고 어떤 의미에서 매정하고 표독했던 인물이었다。 對野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목표를 세우면 언제나 적을 거꾸러뜨리거나 자신이 쓰러져야 하는 것으로 믿었다。…
199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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