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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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05.19
손병희씨 장서국내

손병희 선생(1861~1922)이 1922년 5월 19일 새벽 3시 상춘원 별장에서 향년 62세로 서거했다. 손 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이자 천도교 3대 교주였다. 선생은 3·1독립선언식 후 자진 검거돼 징역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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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03.15
총살의 인으로 총살의 과를 결한 계해벽두의 대사건진상국내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1890~1923)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이어 17일 일본 경관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중상을 입힌 뒤, 22일 서울 효제동에서 수백 명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했다. 사건 보도금지는 이해 3월 15일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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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05.01
어린이날 잘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국내

1925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으로 소년동아일보 임시 특별 부록 호외가 나왔다. 호외는 "삼작년(1922년)부터 시작하야 전조선에서 해마다 긔념하야 오는 즐거운 날이외다"라며 관련 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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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07.17
위기절박한 7000여 생령국내

20세기 한반도서 가장 큰 홍수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 긴박한 상황을 시시각각 호외로 알렸다. 한강 범람으로 뚝섬 제방이 무너지고 용산, 청량리 지역 침수로 경찰과 군부대가 출동해 인명구호에 나선 상황을 전하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 호외는 정전으로 윤전기가 멈추기 전까지 수차례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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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04.27
월색조차 처량한아래 돈화문외에는 인산누해국내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1874~1926)이 1926년 4월 25일 망국 15년 8개월 만에 53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국장은 6월 상순에 거행하고 능침(무덤)은 뚝섬 유릉으로 일단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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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06.11
인산누해에 기치역리 재궁은 금곡에 어안착국내

3·1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6·10 만세운동으로 다시 불타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장례일인 인산일(因山日)에 맞춰 계획된 독립만세 운동은 학생들의 선창을 시작으로 운구행렬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이 즉각 가세했다. 일제는 인쇄까지 마친 호외 발행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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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01.13
백서돌발한 근래초유의 대사건국내

나석주 의사(1892~1926)가 1926년 12월 28일 일제의 경제침탈의 징표였던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불발에 그쳤지만, 나 의사는 권총으로 경관 등 일본인 7명을 살상하고 자결했다. 사건 보도금지는 1927년 1월 13일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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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12.28
전국계엄중에 돌발한 대구폭탄사건진상국내

동아일보는 1929년 12월 28일 보도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장진홍 의사(1895~1930)의 의거를 호외를 통해 알렸다. 사건 발생 2년 2개월여 만의 일이다. 장 의사는 1927년 10월 18일 일본 고관을 암살할 목적으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발물을 배달시켜 이 중 3개가 폭발했다. 당시 일본 경관 등 여러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은행 건물 일부가 파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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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11.14
권총괴한 돌현 빈구 수상 저격국제

일본의 하마구치 내각은 1929년 7월 2일부터 1931년 4월 14일까지 이어졌다.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내각총리대신(1870~1931)은 1930년 11월 14일 오전 9시경 도쿄역에서 총격을 받아 집무가 불가능하게 되자 외상이 임시 대행을 겸임했다. 결국 병세의 악화로 내각이 총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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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12.15
혈성대 38인 결사대 조선내침입계획 발각국내

1930년 12월 경기도 이천경찰서 장호원 주재소에서 무기 탈취사건이 일어났다. 이천경찰서는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검거에 나섰으나 아산금융조합 습격 사건마저 발생했다. 범인이 잡히자마자 3차례 호외를 발행했다. 범인은 처음 자백과 달리 단순 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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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09.19
일본군과 중국군 충돌 봉천에서 목하대격전국제

미국의 1929년 대공황 이후 일제는 식민지 확대 수탈 전략으로 경제 위기를 벗어나려 침략전쟁을 벌였다. 일제의 중국 대륙침략의 서막인 '만주사변' 전쟁 초반, 1931년 9월 19일 호외 제1보 내용은 호외 제4보 '봉천 무선전신소 19일 오전 5시 30분 일본군 점령' 내용으로 미루어 사실 전달에 여러 제약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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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03.01
상해사건 화평(和平)해결?국제

일본 관동군은 1932년 3월 1일 상하이사변(1932.1.28)을 틈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지방 군벌 두목들을 요직에 앉히고 정부 주요부서에 일본인을 배치했으며 실권은 관동군이 장악한 괴뢰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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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04.29
백천사령관과 중광공사에게 수류탄을 투척국내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및 상하이사변 전승 기념식에 폭탄이 투척됐다. 일제 요인 다수가 참석한 식장은 순식간에 대혼란에 빠졌다. 윤봉길 의사(1908~1932)의 의거였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고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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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01.26
조선인으로 조직원 무등대장 암살계획국내

조선 청년들이 주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주살하려는 암살 계획이 발각됐다. 박민항 이창용 손기업은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만주에서 무토대장의 뒤를 따라다니며 계속 기회를 엿보다 1932년 겨울 체포됐다. 1933년 1월 26일 보도금지가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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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03.05
미국의 금융공황국제

1929년 주가 폭락으로 인한 미국의 대공황 여파는 1933년까지 계속됐다. 초유의 경제적 비상사태를 맞아 물가는 폭락하고 실업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공황 이전과 비교해 1933년 주가는 80% 폭락하고 1만여 개의 은행이 폐쇄됐다. 대량 실업으로 미국인의 25%가 실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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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03.27
연맹탈퇴 통고문 금일사무국에 발전국제

국제연맹은 1933년 2월 21일부터 열린 제네바 총회에서 중국의 만주 주권 인정을 요구하는 '리튼 보고서'를 찬성 42표, 반대 1표로 채택했다. 반대 1표는 일본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하고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 사무국에 이를 통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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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05.17
암살파괴의 결사적 직접행동국제

일본 해군 극우 청년 장교들이 1932년 5월 15일 총리 관저에 난입해 호헌운동의 중심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太養毅) 내각총리대신(1855~1932)을 암살했다. 사건은 1933년 5월 13일 예심이 종결되고 17일에는 진상 공표와 함께 게재 금지가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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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02.05
울릉도 설해의 실정 제1보국내

1934년 1월 한달 동안 5m에 육박하는 폭설이 울릉도에 내렸다. 교통두절 식량결핍 등 설해가 끊이지 않자 동아일보는 1월 29일 호외로 이 사실을 알렸다. 동아일보는 이어 구호품과 함께 기자를 울릉도 현지에 특파했는데 포항 출발 꼬박 하룻만인 2월 5일 아침 무사히 도착해 도민의 환영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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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07.21
삼남일대 우부 수난국내

1934년 7월, 큰 수해가 삼남(三南) 지방을 또 강타했다. 동아일보는 21~23일 3일에 걸쳐 호외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특파원을 보내 피해 상황을 알리고 각 지분국장과 본사 사원으로 구호반을 조직해 구호작업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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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10.22
근래희유의 함남 권총사건국내

김춘배 의사(1904~1946)는 1934년 10월 2일 밤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경찰주재소의 무기고에 단신으로 침입해 무기들과 실탄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후 김 의사는 18일 간 피해다니며 일본 경찰과 결투를 벌이기도 했으나 20일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가던 중 체포됐다. 사건 보도금지는 22일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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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01.29
세계올림픽 빙상대표권 조선선수 3군이 획득국내

1935년 1월 29일 일본 닛코(日光)에서 열린 세계올림픽 빙상대표 선발 최종 예선대회에서 김정연(5000m 1위) 이성덕(1만m 1위) 장우식(1500m 2위)이 뽑혔다. 이들 세 명의 선수는 1936년 2월 독일에서 열린 제4회 겨울올림픽에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단 채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겨울올림픽에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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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07.23
한강연안에 대홍수국내

중부권에 1935년 7월 20일부터 계속된 집중호우로 뚝섬에서 마포까지 10여 개 부락이 대거 침수됐다. 동아일보는 23일 피해 상황이 심각한 한강 주변 일대에 구호반을 조직해 출동했다. 파주와 문산은 임진강 범람으로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고 선로 일부 유실로 경의선 운행이 일시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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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02.26
청년장교의 지휘로 군대가 행동국제

일왕의 친정을 바랐던 육군 청년장교들이 1936년 2월 26일('2.26 반란사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전 조선 총독) 내부대신 등 정계 원로 요인들을 살해했다. 반란은 3일 만에 진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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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08.10
대망의 올림픽마라손… 당당 손기정군 우승국내

손기정 선수(1912~2002)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경기에서 '2시간29분19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일본 국적이기는 했지만 손 선수의 마라톤 제패는 민족적 감격이었다. 동아일보는 9일 밤부터 대기하고 있다가 10일 아침 호외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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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06.05
함남 보천보를 습격국내

1937년 6월 보천보전투는 동아일보의 두 차례 호외로 세상에 알려졌다. 만주사변 이후 전보다 심해진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위축된 상태에서 독립군의 국내 침투는 의미가 컸다. 김일성(金一成)일파와 최현(崔賢) 일파 300여명이 함경남도 보천보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기습 공격한 상황을 신속히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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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07.08
연습중의 풍태주둔군에 중국병이 돌연발포국제

1937년 7월 7일 밤 중국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이 충돌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이 전면전으로 바뀌고, 중국은 총력 대응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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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02.21
독이문제에 의견대립 이든외상 사표제출국제

중일전쟁으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야심을 분명히 했고 독일 나치 히틀러는 만주국을 승인해 일본과 손을 잡았다. 식민지 쟁탈과 패권 확장을 놓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경쟁하며 이합집산했다. 영국 체임벌린 수상의 타협외교에 반대해 이든 외상이 1938년 2월 20일 사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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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03.12
슈슈닉내각 총사직국제

연합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같은 게르만 민족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토 합병에 제약을 두었다. 독일 히틀러 나치정권은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나치당 지도자 자이스-잉크바르트의 적극 협조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합병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계획하던 슈슈니크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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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09.01
독파양군 수접전국제

독일이 1939년 9월 1일 기습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어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폴란드를 분할하기로 한 합의에 따라 소련이 동부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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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09.16
일소간 노몬한 방면의 정전협정에 의견일치국제

일본과 소련의 양국 군대가 1939년 5월 만주·몽골 국경지대의 노몬한에서 충돌해 일본군 1개 사단이 전멸했다. 일본은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정전협정을 서둘렀고, 그 해 9월 정전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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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05.10
독군, 난백 양국 침입 룩셈부르그에도 진격국제

독일은 1940년 5월 10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브르크 등 저지대 국가를 침공했다. 네덜란드군의 저항은 5월 10일부터 5월 14일 항복할 때까지 계속됐다. 벨기에군은 5월 28일 독일군에 항복했다. 룩셈부르크 침공은 5월 10일 하루만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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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06.17
불내각 돌연 총사직국제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1940년 5월 10일 중립국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해, 프랑스가 구축한 군사 건축물인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아르덴고원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6월 14일 파리에 무혈입성했다. 프랑스 레이노 내각은 16일 사퇴하고 휴전파 페텡 장군이 내각을 구성해 곧바로 독일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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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05.21
당선자 속속 판명국내

1952년 부산 피난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 통과로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제를 갖게됐으나 1954년 5월 20일 민의원 의원만을 뽑는 선거가 실시됐다. 건국 후 세 번째 총선으로 정당공천제가 처음 도입됐다. 집권 여당인 자유당이 온갖 관권을 동원해 압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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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03.09
서울시내 전기중학 합격자명단 발표국내

1968년 중학입시제도 폐지 전까지 중학교 입학시험제도는 국가고시제, 무시험전형 등 변화와 수정이 많았다. 1958년 12월 서울시교육위원회는 59년도 시내중학교 입시요강을 발표해, 무시험전형을 권고하였으나 서울 일류 중학교는 유시험제를 채택했다. 서울시내 전기중학교 신입생 합격 여부는 전국적 관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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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2.16
조병옥박사 미국서 급서국내

민주당의 조병옥 대통령 후보(1894~1960)가 1960년 2월 15일 대통령선거를 불과 한 달여 앞두고 미국에서 신병치료 중 급서했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승만-이기붕, 민주당은 조병옥-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조 후보의 장례는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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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3.15
선거의 불법·무효선언 민주당, 법정투쟁 결의국내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투표는 집권 여당인 자유당의 부정과 불법이 난무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민주당은 투표가 끝나기 전인 이날 오후 4시 30분 '3·15선거는 불법무효'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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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4.11
마산서 오늘밤 중대 사태 경찰서등 관공서 대파국내

1960년 4월 11일 오전 제1차 마산 봉기 때 행방 불명 된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서 발견되자 제2차 마산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관공서 건물을 부숴 나갔고 경찰과 공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2명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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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4.21
민간인사망 94명 4·19데모 희생자 명단국내

계엄사령부는 1960년 4월 21일 상오 9시 민간인과 경찰관 사망자 명단을 발표했다. 각 병원에 안치된 희생자 사체는 유가족들에게 인도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은 시위대가 경무대 가까이오자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을 동원했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한 건 경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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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4.26
이대통령 하야용의 성명국내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26일 오전 10시 20분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선거도 다시 하겠다'고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다음날인 27일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허정 수석국무위원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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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6.15
개헌안 드디어 통과국내

내각책임제로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회는 1960년 6월 15일 출석 의원 211명 중 208명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허정 과도정부는 이날 즉시 개헌안을 공포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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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6.16
아이크 19일 하오 내한국내

아이젠하워 대통령(1890~1969)이 1960년 6월 19일 극동 순방 길에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측은 16일 오후 주한미대사관을 통해 한국체류 일정 변경을 요청해 한국 정부로부터 승낙을 받았다. 아이젠하워는 6·25전쟁 중인 1952년 미국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방한해, 미군부대를 시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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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8.16
총리에 김도연씨 지명국내

민주당의 신·구파 갈등 속에 내각제 초대 총리로 구파인 김도연 씨(1894~1967)가 1960년 8월 16일 지명됐다. 그러나 김도연씨 총리안은 민의원서 인준이 부결됐다. 2차로 신파의 장면 씨를 지명해 8월 19일 가까스로 총리 인준을 얻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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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05.16
오늘미명 군부서 반공혁명국내

박정희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4·19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이 불과 9개 월만에 막을 내렸다.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해 입법·사법·행정권 등 3권을 장악했다.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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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07.03
장도영 최고회의의장 사퇴국내

민주당 정부의 제2공화국 육군참모총장으로 군사 쿠데타 수장에 추대된 장도영 씨가 곧바로 권력 다툼에서 숙청됐다. 1961년 7월 3일 오후 4시 30분 장도영 중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 수반직 사퇴를 밝히자마자 2시간 뒤 최고회의는 사표를 수리하고 최고회의 의장에 부의장인 박정희 소장을 즉시 선출했다. 내각 수반에는 국방부 장관 송요찬 씨가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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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08.12
박의장 정권이양시기를 발표국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8월 12일 기자회견에서 민정 이양시기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박의장은 정권 이양시기를 1963년 여름으로 예정하고 1963년 3월 이전에 신헌법을 제정한다고 했다. 총선거는 1963년 5월,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 국회 구성은 단원제로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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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12.18
새 헌법안 가결 확정적국내

제5차 개헌안이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에 의해 찬성 78.78%로 통과됐다. 개표 결과 18일 새벽 4시 현재 서울은 70%, 지방은 80%을 넘는 찬성율을 보였다고 호외는 전했다. 개정 헌법은 내각책임제를 4년 중임의 대통령중심제로, 양원제를 단원제(4년)로 바꾸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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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02.25
김종필씨 오늘 외유국내

김종필 씨가 4대 의혹사건 관련 속에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 의장의 특명대사로 1963년 2월 25일 버마(지금의 미얀마)·터키·유럽 등 50일간의 외유를 떠났다. 김씨는 24일 밤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국민이 부르면 어디서나 3일 안으로 돌아오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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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03.16
「4년간 군정 연장」가부 국민투표를 실시국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을 제의했다. 박의장은 "군정을 앞으로 4년간 더 연장할 것인가의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선언했다. 동아일보는 이에 대해 15일간 무사설(無社說)로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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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10.17
박정희 후보 당선확정국내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총 7명의 후보가 등록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민정당 후보의 양자 대결로 압축됐다. 1963년 10월 15일 밤새워 개표가 진행됐으나 결과는 17일 새벽 2시에야 정해졌다.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라는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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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11.01
월남에 군부 「쿠데타」국제

월남(남베트남)의 즈엉반민 장군(1916~2001)이 주도하는 군부가 1963년 11월 1일 쿠데타에 성공했다. 쿠데타 과정에서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살해당했다. 이후 즈엉반민은 군정을 선포하고 군사정권의 수반임을 자처했다. 나중에 즈엉반민도 응우옌카인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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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11.23
케네디 미대통령 암살국제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1963)이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자동차 퍼레이드 도중 리 하비 오즈왈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현직 대통령이 퍼레이드 중에 저격 당하는 장면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게 충격이었다. 대통령직은 곧바로 부통령 린드 존슨이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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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3.05
안양서 탄약 대폭발 참사국내

1964년 3월 5일 오후 3시 40분경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안양교도소 뒷편 탄약분해공장에서 탄약이 폭발했다. 이 사고로 교도소 재소자 10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20여 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호외는 전했다. 호외는 이어 폭발 1시간 뒤인 4시 30분 현재 불길을 잡지 못하고 있으며 재폭발 우려가 있다는 상황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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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3.24
「젊은 분노」 장안서 포효국내

제3공화국 정부는 경제와 안보를 위해 일본의 지원을 받고자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35년간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정당한 배상이 중요 해결과제였으나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확보가 시급했다. 1964년 3월 23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일본 오히라 외상의 한일협정 회담 일정이 합의되자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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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4.06
맥아더원수 장서국제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880~1964)이 1964년 4월 5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극적으로 성공시켜 전세을 역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호외는 그를 '극동의 은장(恩將)'으로 표현했다. 그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뿐'이라는 세기의 명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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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4.19
라오스에 쿠데타국제

아베이 장군이 주도하는 우익 라오스 국민군은 1964년 4월 18일 쿠데타를 단행해 정권을 탈환했다. 푸마 수상을 체포하고 각료들의 집을 포위하는 등 수도 비엔티안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호외는 런던발 로이터통신을 인용해 쿠데타 뉴스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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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5.27
네루 인도수상 급서국제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수상(1889~1964)이 1964년 5월 27일 뉴델리의 총리 관저에서 74세를 일기로 갑자기 서거했다. 네루는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였다. 독립 이후 1947년부터 1964년까지 초대 수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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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6.04
서울에 비상계엄 선포국내

정부는 1964년 6월 3일 밤 8시를 기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박정권 타도' 로까지 더욱 격화되자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이다. 대학들은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고, 언론은 사전 검열됐으며 집회시위는 원천 금지됐다. 비상계엄은 7월 29일까지 55일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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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8.03
「언론윤리위법안」, 국회 통과국내

한일회담의 대일청구권 및 평화선과 독도문제 내용을 두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대했다. 정부는 시위 확산이 언론의 비판적 보도와 선동에 있다고 보고 언론 통제 시동을 걸었다. '언론윤리위원회법안' 은 1964년 8월 2일 심야에 야당인 민정당 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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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9.10
언론법시행을 전면보류국내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9월 9일 밤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을 전면 보류키로 결정했다. 언론인들은 '언론법철폐투쟁위원회'를 구성해 반대운동을 벌였다. 박 대통령이 언론사의 자율규제강화라는 언론계의 건의를 받아들여 언론파동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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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9.13
물에 잠긴 암흑의 서울국내

1964년 9월 13일 새벽,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물폭탄을 맞았다. 이날 호외는 2차례 발행됐다. 강력한 집중호우에 강풍까지 겹치는 바람에 한때 정전사태가 발생해 암흑 속에 갇히기도 했다. 20년 이래 최대 강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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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09.15
북괴억류 어부 2백19명 귀환국내

태풍에 밀려 북한에 억류됐던 어부 219명이 1964년 9월 16일 해주를 출발해 연평도로 돌아왔다. 어부들은 7월 경기도 강화도 근해에서 새우잡이를 하다 태풍 '플로시'에 밀려 북한에 억류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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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10.13
소3인승 우주선 「보스코드」호 착륙국제

3명의 우주인을 태우고 발사된 소련 우주선 '보스호트 1호'가 1964년 10월 13일 무사히 지구 귀환에 성공했다. '보스호트 1호'는 24시간 17분 동안 지구를 16바퀴 돌았다. '보스호트 1호'는 공간부족으로 승무원들이 우주복을 입지 않았던 최초의 우주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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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11.04
미대통령에 「존슨」씨 당선확정국제

미국 민주당 린든 B 존슨(1908~1973)이 1964년 11월 3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인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를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존슨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1963년 11월 22일 당일 대통령의 유고로 당시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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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01.24
「윈스턴 처칠」경 장서국제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1874~1965)이 1965년 1월 24일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열흘 동안의 투병 끝이었다. 처칠은 제2차세계대전 직후 총리로 취임해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화가, 저술가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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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02.08
미군, 월맹 본토를 강타국제

로버트 맥너마라 미국 국방장관은 1965년 2월 7일 남지나 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항공모함에 탑재된 항공기 49대가 공산주의 세력의 월맹(북베트남) 군사기지를 폭격했다고 밝혔다. 베트콩이 미군 기지를 공격해 8명의 병사를 사살하고 100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힌데 대한 보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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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03.21
단일변동환율제 22일 0시 기해 실시국내

정부는 1965년 3월 22일 0시를 기해 단일변동환율제로 바꾸는 환율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단일변동환율제는 외환 시장의 상황에 따라 수시로 환율을 결정하는 제도. 환율은 매일 밤 공고토록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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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03.24
미2인승 우주선 귀환국제

미국은 1965년 3월 23일 제미니 3호의 유인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우주선에는 버질 그리섬 소령과 존 영 소령이 탑승했다. 이들은 지구를 3회전한 후 최초의 궤도조절을 통해 성공적으로 귀환했다. 이전의 제미니 1호와 제미니 2호는 무인 시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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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04.03
비둘기부대 「베트콩」에 피습국내

한국의 비둘기부대가 1965년 4월 2일 밤 11시(월남 현지시간) 베트콩의 첫 기습을 받았다. 지원을 받은 한국군은 20여분 간의 교전 끝에 베트콩을 격퇴시켰다. 이 과정에서 아군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비둘기부대는 비전투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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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05.16
박대통령 방미여정에 3부요인 성대히 환송국내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5월 16일 존슨 미국 대통령의 초정으로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10일간의 방미기간 중 존슨 대통령과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갖고 월남(남베트남) 파병과 관련한 협조와 주한미군지위협정 체결에 원칙적 합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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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06.20
「알제리아」에 군부 「쿠데타」국제

알제리 국방장관이자 독립전쟁 당시 군총사령관이었던 후아리 부메디엔이 1965년 6월 19일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아베드 벤 벨라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부메디엔은 1974년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헌장과 새 헌법을 채택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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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07.20
이승만박사 서거국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1875~1965)가 1965년 7월 19일 오후 7시 35분(한국시간) 망명지인 미국 하와이에서 향년 90세로 서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인 자격으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조전을 보냈다. 장지는 국립묘지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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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08.15
「한일」 비준안 끝내 통과국내

한일협정 국회 비준안이 1965년 8월 14일 민주공화당의 단독 처리로 통과됐다. 야당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며 강경하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1951년 10월 20일 도쿄 한일예비회담을 시작한 이래 14년 만에 7시간 심의를 거쳐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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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11.20
자유품에 안긴 납북어민 감격의 귀향길국내

북한은 1965년 11월 20일 납치 어민들을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다. 북한군은 같은 해 10월 29일 오후 서해 강화도 앞바다 휴전선 부근 갯벌에서 조개잡이 하던 어민과 선원 112명을 납북했다가 이 중 104명을 예고없이 송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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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01.11
「샤스트리」 인수상 급서국제

인도의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수상(1904~1966)이 1966년 1월 10일(현지시간) 소련 타슈켄트에서 향년 61세로 급서했다. 그는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타슈켄트 협정에 조인한 지 하루도 안 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샤스트리 수상은 네루에 이은 인도 제2대 수상으로 카슈미르의 인도 합병을 선언해 파키스탄과 영토분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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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02.13
순정효황후 장례식 엄수국내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1894~1966)의 영결식이 1966년 2월 13일 엄수됐다. 거리엔 30만 명의 애도 인파가 몰렸다. 황후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유릉에 순종과 합장했다. 순정효황후는 2월 3일 창덕궁 성복헌에서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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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03.05
일서 오늘 또 여객기 추락국제

영국해외항공회사(BOAC) 소속 여객기가 1966년 3월 5일 일본 후지산을 들이받아 추락했다. 탑승자 124명 전원이 숨졌다. 불과 18시간 전에는 캐나다퍼시픽항공사(CPA) 여객기가 도쿄 하네다공항 착륙 직전에 추락해 64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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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03.17
「제미니」 8호와 「아제나」 우주결합에 첫 성공국제

미국의 닐 암스트롱(1930~2012)이 선장으로 탑승한 제미니 8호 우주선이 1966년 3월 16일 오전 8시 15분(한국시간) 무인 아제나 표적 위성과 우주 도킹에 성공했다. 이날 새벽 1시 41분 케이프케네디 발사기지를 떠난 제미니8호는 새벽 0시에 발사된 아제나와 궤도상에서 '랑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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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06.05
장면박사 서거국내

장면 박사(1899~1966)가 1966년 6월 4일 오후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지병인 간염이 악화돼 향년 6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장면 박사는 4·19혁명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의 내각책임제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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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06.26
한국의 철권 김기수선수 세계타이틀 탈취국내

프로복서 김기수 선수(1939~1997)가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 전에서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를 꺾고 챔피언에 등극했다. 김 선수는 대한민국 50년 권투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세계챔피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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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06.30
미기 하노이 근교 폭격국제

미 공군과 해군 소속인 46대의 전폭기들이 1966년 6월 29일 월맹(북베트남) 수도 하노이 근교 유류 저장소를 폭격했다. 미국 매나마라 국방장관은 하노이 도심에서 5km 떨어진 유류 저장소를 파괴했으며 하이퐁항의 연료저장소도 폭격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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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07.09
한미행정협정 전문국내

한미행정협정(한국과 미국 간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 SOFA)이 14년 간의 교섭 끝에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1966년 7월 9일 서울 중앙청에서 협정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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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10.24
월남참전정상회담 오늘 개막국제

한국, 미국, 월남(남베트남), 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등 월남 참전 7개국 정상은 1966년 10월 24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정상회담을 시작했다. 정상들은 이틀 동안의 회담을 마친 후 공동성명을 통해 월남 자유 수호와 평화 회복 결의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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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11.01
인해로 맞은 「혈맹의 정상」국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 1966년 10월 31일 부인 버드 여사와 함께 전용기 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내한해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두 차례 정상회담에서 월남(남베트남)전 대책과 한국재정 지원 방안 등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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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01.15
여객선·해군 호위구축함 충돌 100여명 사망한듯국내

해군 호위구축함 충남함이 1968년 1월 14일 밤 9시 53분 여수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가던 민간여객선 한일호와 정면으로 충돌해 한일호가 침몰했다. 호외는 15일 낮 현재 승무원을 포함해 87명 중 12명이 구조됐으며 무임승선자를 합해 사망자는 100명에 이를 것으로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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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01.19
해군경비함 북괴에 피격 침몰국내

해군 56함이 1967년 1월 19일 오후 동해 휴전선 인근 해상에서 북한군의 해안포 사격을 받아 침몰했다. 해군경비함은 어로 저지선을 넘어 조업 중인 어선을 남쪽으로 유인하던 중 피격됐다. 이날 피격으로 승무원 79명 중 39명이 전사하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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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02.05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씨국내

윤보선 씨가 1967년 2월 5일 오후 민중·신한 두 당의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임됐다. 서울 필동 유진오 씨 집에서 열린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씨 등 4자 회담은 3시간 동안의 논의 끝에 이같이 결정했다. 통합야당 당수는 유진오 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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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03.23
북괴 중앙통신부사장 극적 탈출국내

김일성 수행기자 출신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 씨(1924~1969)가 1967년 3월 22일 판문점 취재 도중 남한으로 귀순했다. 그는 유엔군측 대표의 전용차에 올라타 북한 경비병의 총격을 뚫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 씨는 1969년 7월 위장간첩으로 사형이 집행됐으나 2008년 재심은 "위장간첩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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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06.06
아랍공·이스라엘 개전국제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5일 아랍연합공화국(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주요 공군기지를 전격적으로 선제 폭격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지상전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개시 6일 만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등을 장악하면서 아랍 3개국의 무릎을 꿇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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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09.04
한국여자농구 첫 금메달국내

한국 여자농구팀이 1967년 9월 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4전 전승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이번 우승은 한국이 국제대회 출전 사상 구기 종목에서 수확한 첫 금메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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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09.07
김창선씨 드디어 구출국내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 광부인 김창선 씨(실제 이름은 양창선)가 1967년 8월 22일 낮 12시 40분경 지하 125m 지점 배수장에 갇혀 매몰된 지 368시간 35분(15일 8시간 35분) 만인 9월 6일 밤 9시 15분 기적적으로 구출됐다. 현장 인파만 1000여 명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까지 발표했다. 이 상황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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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12.28
예산안 변칙 통과국내

여당인 공화당은 1967년 12월 28일 새벽 1시 1968년도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공화당은 신민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아수라장 속에서 예산안을 단숨에 통과시켰다. 예산안은 거의 정부 원안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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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01.22
서울에 무장간첩단국내

북한 특수부대원 30여 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10분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비밀리에 침투했다. 이들은 경찰의 초소 검문에 걸리자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장이 현장에서 순직하고, 민간인 5명이 숨졌다. 군경은 소탕작전을 펼쳐 김신조만 유일하게 생포하고 29명을 사살했다.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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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01.31
베트콩, 월남서 전면공세국제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남베트남해방군)이 1968년 1월 30일 월남(남베트남) 전역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최대 명절인 구정(설날)을 맞아 실시한 일시적 휴전은 완전히 파기됐다. 베트콩은 나트랑 등 일부를 점거하고, 제2도시 다낭에서는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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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05.30
김종필씨 공화당서 탈당국내

1968년 5월 30일 집권당인 공화당 김종필 당의장이 탈당했다. 김 의장은 공화당에 탈당계를 제출하면서 모든 공직을 떠나 정계 일선에서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 의장의 탈당으로 공화당이 심한 격동을 겪을 것으로 전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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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06.05
로버트 케네디 피격국제

미국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1925~1968)이 1968년 6월 5일 이른 새벽 로스앤젤레스 앰베서더호텔에서 연설을 하고 방에서 나오던 중 아랍계 청년의 총탄에 쓰러졌다. 케네디 의원은 피격 25시간 만인 6일 새벽 1시 44분 끝내 절명했다. 1963년 형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피살에 이은 케네디 가문의 불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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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08.22
소, 체코 전역 완전 장악국제

소련이 1968년 8월 20일 동독 등 동유럽 4개국 군과 함께 체코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소련은 체코 국민들의 저항과 세계 여론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두브체크 등 개혁파를 몰아내고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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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11.07
미 37대 대통령에 닉슨 당선국제

미국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1913~1994)이 1968년 11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맞수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로써 공화당은 8년 만에 재집권했다. 부통령에는 스피로 애그뉴가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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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02.17
해외원정 등반 훈련중 대참사국내

한국산악회 해외원정 등반대 대원 21명은 1969년 2월 13일 오전 10시부터 14일 오후 2시 사이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에서 조난당했다. 엄청난 폭설로 인한 눈사태가 이들을 덮쳤고 등반대장 이휘성 육군 중령을 비롯한 선발대 10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생존자 11명은 17일 오후 2시 이를 속초경찰서 설악파출소에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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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07.21
달에 착륙국제

미국 아폴로 11호의 두 우주인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앨드린이 1969년 7월 21일 오전 5시 17분 48초(한국시간) 달 표면에 착륙했다. 달 착륙선은 '고요의 바다'에 완전하게 착륙했고, 암스트롱은 "독수리가 착륙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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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09.14
개헌안 공화 단독 변칙처리국내

1969년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진 제6차 개헌은 대통령의 3선을 허용한 개헌이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1969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3선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국민투표에서 총유권자의 77.1% 투표 중 찬성 65.1%로 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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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12.11
KAL기 납북국내

대한항공의 YS-11기가 1969년 12월 11일 낮 12시 20분경 탑승객으로 가장한 북한 간첩에 의해 대관령 상공에서 납북됐다. KAL기는 승무원 4명과 승객 47명을 태우고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중이었다. 북한은 인질 외교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1970년 2월 14일 탑승자 51명 중 39명을 판문점을 통해 귀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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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03.31
피랍 JAL기 김포 비상 착륙국제

피랍된 일본 국내선 여객기 보잉 727기(요도호)가 1970년 3월 31일 오후 3시 15분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했다. 일본 적군파 9명은 도쿄를 출발해 후쿠오카로 가던 여객기를 납치했고, 북한으로 가려다 기장의 기지로 남한에 비상 착륙했다. '요도호 납치사건'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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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04.18
아폴로13 극적 생환국제

미국의 세번째 달 탐사 우주선 아폴로 13호가 산소탱크 폭발로 달에 착륙하지 못하고 1970년 4월 18일 새벽 3시 8분(한국시간) 지구로 되돌아왔다. 아폴로 13호는 4월 11일 13시 13분(미국 중앙표준시) 발사됐으나 고장으로 인해 달을 선회만 했으며, 생사를 넘나드는 비행 끝에 4월 17일 러벨(선장) 헤이스(달착륙선 조종사) 스위거트(사령선 조종사)는 무사히 지구에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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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01.23
KAL기 납북 미수국내

강원 속초발 대한항공 여객기가 1971년 1월 23일 오후 서울로 향하던 중 이륙 30분 만에 승객으로 위장한 괴한에게 납치됐다가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해안에 불시착했다. 괴한은 수류탄을 들고 항로를 북한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으나 기장의 급보를 받고 출동한 공군기 2대의 유도로 모래밭에 불시착하면서 납북을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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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12.03
시민회관에 큰 불국내

1972년 12월 2일 밤 8시 27분경, 서울 종로구 서울시민회관에 불이 나 소강당 일부를 제외한 건물 모두를 태우고 2시간 만에 진화됐다. 지하 1층 지상 10층의 서울시민회관에서는 토요일 저녁 4000여 명이 MBC '10대 가수 청백전'을 관람했다. 이 사고로 53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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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10.23
이스라엘 전면전 재개령국제

이스라엘은 1973년 10월 23일 이집트군의 계속되는 휴전 위반을 이유로 이집트에 대한 전투를 재개하라고 전군에 명령했다. 이로써 휴전이 발효된 지 14시간 만에 전투가 재개됐다. 10월 6일부터 25일까지 이어진 제4차 중동전쟁은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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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02.14
유정회 2기의원 추천명단 발표국내

유신정우회(유정회)는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원내교섭단체다. 유신헌법에 근거해 국회 내 다수 여당을 만들기 위해 출범됐고 의석수 3분의 1을 차지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협조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6년 2월 14일 78명의 유정회 2기 후보 명단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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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04.23
KAL기 탑승자 106명 헬싱키 도착국내

서울로 향하던 파리 발 대한항공(KAL) 여객기가 1978년 4월 20일 소련에 비상착륙한 뒤 승객 등이 귀환하기 위해 23일 핀란드 헬싱키에 도착했다. 여객기는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가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고 소련의 무르만스크 호수에 강제로 비상착륙했다. 이 과정에서 승객 2명이 사망하고 1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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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07.01
남북한·미 「3당국회담」 평양에 제의국내

방한중인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7월 1일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 북한, 미국이 참여하는 3자 당국 회의를 북한에 제의했다. 공동성명은 또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약속했으며 인권의 존중이 모든 나라에 중요함을 '유념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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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10.27
박대통령 서거 비상계엄전국 선포국내

박정희 대통령(1917~1979)이 1979년 10월 26일 밤 7시50분경 청와대 근처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 대통령권한대행엔 최규하 국무총리가 취임했으며, 27일 오전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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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11.10
헌법 빠른시기내 개정국내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1919~2006)은 1979년 11월 10일 '헌법을 빠른 기간 내 개정하겠다'는 시국담화문을 발표했다. 최규하 권한대행은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해 새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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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12.13
김재규의 시해 사건 관련혐의 정승화계엄사령관 연행조사국내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1979년 12월 13일 아침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해 연행조사중"이라고 밝혔다. 노 장관은 또 "정부는 중앙정보부장 서리 이희성 육군대장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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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01.23
김대중 무기로 감형 각의 의결국내

정부는 1981년 1월 23일 국무회의를 열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김대중 피고인에 대한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할 것을 의결했다. 국무회의는 또 이문영 피고인에 대해서도 징역 20년에서 15년으로 감형하는 것을 비롯해 김대중 관련 11명에 대해 징역 3~5년씩을 각각 감형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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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10.01
88년 올림픽 서울개최국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1981년 9월 30일 밤 11시 45분(한국시간)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 나고야를 52대 27의 큰 표차로 꺾고 88년 올림픽 개최의 영예를 안았다.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한국대표들과 88년도 여름올림픽 서울개최 약정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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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10.07
사다트 애대통령 피살국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1918~1981)이 1981년 10월 6일 군사퍼레이드 참관 도중 기관총 사격을 받고 서거했다. 범인들은 퍼레이드 트럭에서 뛰어내려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사다트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으로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1913~1992)과 1978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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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01.03
경제팀 주축 개각국내

전두환 대통령은 1982년 1월 3일 집권 2년차 새해 벽두에 경제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개각 단행과 함께 야간통행 금지 해제, 중고생 교복자율화 등 유화 정책을 발표했다. 개각과 관련해 "금년 1월부터 시작된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경제전반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기 위한 것"이란 설명이 보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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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05.08
피랍기 승객 내일 출국국내

한국 영토에 불시착한 중공(지금의 중국) 민항기 B296 송환 문제가 1983년 5월 8일 한국과 중공의 3차 회담에서 전격 타결됐다. 승객, 승무원, 기체는 조기 송환하고 납치범 6명은 국제관례에 따라 한국측이 재판관할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합의문서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사용되는 정치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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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08.07
중공 미그21기 귀순국내

중공(지금의 중국) 공군소속 조종사 손천근(46)이 1983년 8월 7일 오후 미그-21 전투기를 몰고 우리 영공을 침범하자, 즉각 출동한 공군기들이 공군기지로 유도해 전투기를 착륙시켰다. 미그기는 오후 2시 41분 중공대전비행장을 이륙해 서해상공을 거쳐 우리 영공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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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10.09
전대통령방문 버마서 대폭발사고국내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5분(현지시간)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순방 첫 방문지인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함병춘 비서실장, 김재익 경제수석 등 공식 수행원과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등 총 17명이 목숨을 잃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두환 대통령 부부는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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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11.14
한국군 현대화지원 대폭강화국내

전두환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3년 11월 13일 서울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갖고 한국군 현대화 지원 강화 등 15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뤄진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은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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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02.10
소 안드로포프 사망국제

소련은 유리 안드로포프 공산당서기장(1914~1984)이 1984년 2월 9일 사망했다고 10일 공식발표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타스통신을 통해 9일 밤 10시 50분 오랜 지병으로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와 로마노프가 후계자로 유력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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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10.31
간디 인도수상 피격 절명국제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1917~1984)이 1984년 10월 31일 오전 9시 40분 관저에서 피격당해 서거했다. 암살범들은 인도 정부에 분리독립을 요구하던 시크교 과격파 출신이었다. 네루 초대 수상의 외동딸이었던 간디는 1966년 수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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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02.13
민정 안정세 구축 민한 참패국내

신민당이 창당한 지 25일 만에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민정당은 안정세를 구축했고 민한당은 참패했다. 신민당은 민한당을 사실상 흡수하면서 거대 야당으로 12대 국회에 포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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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05.26
미문화원 대학생들 농성풀어국내

서울 미국문화원 2층 도서관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대학생 73명이 1985년 5월 26일 낮 12시 5분, 72시간만에 농성을 풀었다. 서울 5개 대학 학생들은 미국의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에 대한 책임 인정과 사과를 주장하며 주한 미국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모두 경찰에 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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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07.18
삼민투위 학생 56명 구속국내

검찰은 1985년 7월 18일 삼민투위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전국 19개 대학의 총 수사대상자 86명 중 63명을 검거해 이중 56명을 구속했으며 13명에게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삼민투는 대학생들의 연합체인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산하 단체로 학내외 소요사태를 주도해왔다고 검찰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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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08.26
중공 경폭격기 이리에 불시착국내

중공(지금의 중국) 경폭격기 1대가 1985년 8월 24일 오후 6시경 전북 이리시 신흥동 정수장 제방 밑에 불시착했다. 중공군 승무원 3명 중 항법사가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사망하고 조종사는 중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논에서 농약을 뿌리고 있던 주민이 숨졌다. 정부는 조종사의 망명 의사에 따라 자유중국(지금의 대만)에 신병을 인도하고 통신사는 중공으로 되돌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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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02.26
마르코스 망명 길 어제 밤 대통령직 사임국제

20년간 장기집권한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1917~1989)이 1986년 2월 25일 밤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은 평화적인 정권이양을 환영하면서 코라손 아키노 여사의 새정부를 승인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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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03.18
최은희 신상옥 탈출국내

납북됐던 영화배우 최은희 씨(1926~2018)와 남편인 신상옥 영화감독(1926~2006)이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미국대사관에 신변보호를 요청해 도움을 제공했다고 미국무성이 17일(현지시간) 밝혔다. 두 사람은 1978년 1월과 7월 차례로 피납됐으며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세우고 1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들은 탈출 후 미국에 체류하다 1989년 5월 한국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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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08.05
독립기념관 본관에 큰 불국내

1986년 8월 4일 밤 10시경 광복절 개관 11일을 앞두고 충남 천원군 목천면 독립기념관 본관에 불이 나 5일 새벽 2시반경 진화됐다. 이날 불로 천장 및 내부 시설물은 불탔으나 유물 등 전시자료 등에 대한 피해는 없었다. 개관은 수개월 미뤄질 것으로 예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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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10.05
금메달 중공94 한국93 일본58국내

서울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가 1986년 10월 5일 끝났다. 9월 20일부터 열린 대회에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가 불참했지만 중공(지금의 중국)은 대규모 선수단을 출전시켜 참가했다. 한국은 일본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해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높아진 국가 위상을 알렸다. 86 서울 아시안게임의 성공은 2년 뒤 개최된 88 서울올림픽의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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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02.09
북한탈출 김씨일가 서울에 왔다국내

북한을 탈출한 김만철 씨 일가 11명이 1987년 2월 8일 밤 10시 24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씨가족은 이해 1월 15일 청진항을 출발해 엔진고장으로 표류하다 구조돼 일본과 대만을 거쳐 북한 탈출 24일 만에 서울에 도착해 자유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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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11.30
115명 탄 KAL기 추락국내

대한항공(KAL) 858편 여객기가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경(한국시간) 버마(지금의 미얀마)와 태국 국경지대 상공에서 실종됐다. 관계당국은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운 사고기가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중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폭발은 북한 특수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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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12.17
노태우후보 당선확정국내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인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득표율 8.61%P(194만5157표) 차로 꺾고 당선됐다.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져 실시된 대선은 여권 후보 한 명, 야권 후보 3명인 이른바 '1노(노태우)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구도 하에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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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04.27
민정 과반의석 미달국내

집권 민정당이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체 299석 가운데 과반에 턱없이 모자란 125석을 얻는 데 그쳐 참패했다. 평민당이 70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떠올랐고, 민주당이 59석, 공화당이 35석을 얻어 야권 3당이 총 164석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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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01.01
전씨 증언 파행 끝내 중단국내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9년 12월 31일 저녁 국회 5공 비리 및 광주특위 연석 청문회에서 증언하다 중단했다. 전씨는 은둔처인 백담사에서 나와 증언대에 섰으나 증언내용을 둘러싸고 여야의원들이 몸싸움까지 벌이면서 청문회는 증인과 여당이 불참한 가운데 파행운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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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03.29
열차전복 73명사망 대참사국내

서울발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반경 부산 구포역을 900여m 앞두고 탈선하면서 전복됐다. 열차는 선로의 지반이 붕괴된 것을 보고 급제동을 시도했으나 무너진 지반으로 곤두박칠쳤다. 이 사고로 78명이 목숨을 잃고 19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전에서 지하전력구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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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07.09
김일성 사망국내

북한의 김일성 주석(1912~1994)이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경 심근경색으로 급서했다. 북한 방송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7월 25일로 예정됐던 김영삼 대통령과의 첫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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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10.21
성수대교 붕괴국내

서울 성수대교의 상판 50여m가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반경 무너져 내리면서 버스와 승용차 등이 추락해 32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을 입었다. 추락한 버스가 상판과 부딪히면서 차체가 찌그러지는 바람에 출근길 시민과 등교학생 등 승객 대부분이 숨져 사상자 수가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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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04.28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 대폭발 사망 100명 넘을듯국내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50분경 대구 달서구 상인동 지하철공사장에서 가스폭발 사고로 차량 수십대가 공사장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등교 중이던 학생 42명을 비롯해 101명이 목숨을 잃었다. 가스폭발은 인근 공사장에서 누출된 가스가 지하철 공사장으로 흘러들어가면서 비롯됐다. 50여m의 불기둥이 치솟고, 차량 150여 대가 파손됐으며 주택 등 80여 채가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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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07.03
붕괴잔해 오늘부터 본격제거국내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 건물 붕괴 참사 5일째인 1995년 7월 3일 구조 작업 방식을 변경해 중장비를 동원키로했다. 생존자 구출을 위해 붕괴현장 주변부를 통해 구조작업을 벌였으나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는 데다 매몰자 생존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삼풍사고를 계기로 이 해 10월 19일 '중앙119구조대'가 발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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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04.12
신한국 140 국민회의 79석국내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는 집권당인 신한국당, 김종필의 자민련, 김대중의 국민회의의 3파전으로 지역당 구도 속에서 전개됐다. 신한국당은 전통적으로 친야 성향을 보여왔던 서울과 수도권에서 승리했다. 신한국당은 총 229석 중에서 139석을, 국민회의는 79석을, 자민련은 50석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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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07.27
중부폭우 대수해국내

1996년 7월 26일과 27일 내린 폭우로 중부지방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26일 새벽 경기북부 및 강원 철원지역에 내린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나면서 군부대 내무반에서 잠자던 육군사병 20명이 숨진 데 이어 27일에도 산사태로 육군과 공군 장병 21명이 숨졌다. 경기 연천군에서는 하천이 범람하면서 1만8000여 명이 긴급 대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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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08.06
KAL기 괌서 추락국내

서울발 대한항공 801편 보잉747 여객기가 1997년 8월 6일 새벽 1시 35분경(한국시간) 폭우 속에서 미국령 괌섬의 아가나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 근처 니미츠힐 밀림 지대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탑승객 254명 중 229명이 숨지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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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06.10
"잘 싸웠다 16강 반드시 간다"국내

2002년 6월 10일 한일월드컵축구대회 조별 리그 D조 한국 대 미국의 경기에서 안정환이 그림같은 헤딩슛으로 동점골을 뽑아내 비기면서 16강 진출 청신호를 켰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강호들을 차례로 침몰시키며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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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06.19
투혼의 한국…16강 보인다국내

한국은 2006년 독일월드컵 본선에서 프랑스, 스위스, 토고와 같은 조에 편성돼 결전을 치뤘다. 한국축구대표팀은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위해 6월 19일 G조 2차전 경기에서 천금같은 박지성의 동점골로 강호 프랑스와 극적 무승부를 이루며 16강의 희망을 이어갔다. 하지만 스위스와의 일전에서 분패함으로써 원정 최고 성적인 1승1무1패를 기록했지만 16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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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5.23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국내

노무현 전 대통령(1946~2009)이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30분 퇴임 후 생활해 오던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 인근의 봉화산 부엉이바위 절벽에서 투신해 63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검찰의 수사를 받던 노 전대통령은 가족 앞으로 짧은 유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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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국내

김대중 전 대통령(1924~2009)이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8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수십 차례의 연금, 수장 위기, 6년여의 옥살이와 2차례의 망명 등 숱한 고비를 이겨내고 첫 수평적 정권 교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 등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거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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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23
북, 연평도에 해안포 공격국내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부터 북한군이 서해개머리 해안포기지 쪽에서 연평도에 무더기로 해안포 사격을 가했다. 6·25전쟁 정전협정 이후 최초로 민간인 거주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북의 공격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은 뒤 “단호히 대응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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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19
김정일 사망국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30분 과로로 열차에서 사망했다고 북한매체들이 19일 낮 12시 보도했다. 이로써 1998년 국방위원장으로 김정일시대를 연 지 13년만에, 1974년 후계자로 공식화된지 37년 만에 김 위원장의 통치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