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김용석 동아일보 산업1부 김용석 기자 공유하기 yong@donga.com

산업1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술 혁신, 산업의 성장, 글로벌 경영, 사회 변화 등을 오랫동안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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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용석]고장 난 ‘대한민국 반도체 시계’윤석열 정부 첫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수장은 ‘반도체 전문가’ 이종호 장관이 맡았다. 이 장관은 서울대 교수 시절인 2015년 나온 책 ‘축적의 시간’에서 “한국 반도체는 7∼8년 뒤가 문제”라고 일갈했다. 이 장관은 책에서 중국의 빠른 추격, 아직 부족한 한국의 기술 축적, 그럼에도 변치 않는 대학 등을 지적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는 핵심 인력의 위기다. 이미 인력 양성이 시기적으로 늦었다”고 경고했다. 그때 말한 7∼8년 뒤가 바로 2022년 지금이다. 근본적인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아 2015년의 호소를 그대로 끌어와 써도 이질감이 없다. 산업 전환기를 맞아 반도체 인력난 경고음이 터져 나온다. 교육계의 견고한 집단 이기주의와 국민의 미래 먹을거리를 방치한 무능한 정부, 반(反)기업 정서를 눈치 보며 기업 지원을 꺼린 정치가 합작해 ‘대한민국 반도체 시계’를 한동안 멈춰 세운 것이다. 잠들었던 대한민국 반도체 시계를 흔들어 깨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다. 5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 관계자들 전언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방한 일정을 처음 잡기 시작한 때부터 삼성전자를 첫 방문지로 하겠다는 확고한 계획을 바꾼 적이 없었다. 지난해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산업 공급망이 이슈로 떠오른 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정부를 거치지 않고 삼성전자 등 첨단기술 기업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 반도체의 전략적 가치를 중요하게 보겠다는 메시지다. 사실 5월 20일 저녁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바이든 대통령의 시계는 미국 동부 아침뉴스 시간대에 맞춰져 있었다. 바이든이 설 무대엔 미국 측 요청으로 미국 국적의 삼성 직원들이 자리했다. 행사장 화면엔 미국 기업 근로자가 비춰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과의 기술동맹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삼성의 투자가 미국 내 일자리를 만들도록 의회의 법 통과를 설득하고, 합작법인에 노동력을 제공할 노조를 치켜세우며 민주당에 힘을 실었다. 반도체의 전략적 가치를 레버리지 삼아 일석삼조의 무대를 펼친 셈이다. 국제 정세가 시야에 들어온 다음에야 한국의 반도체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는 느낌이다. 7일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반도체 육성책을 강도 높게 주문하자 한덕수 총리는 9일 하루 일정을 반도체로 꽉 채우는 ‘광속행보’를 보였다. 여당도 이날 서둘러 반도체산업지원특위를 설치했다. 2015년 반도체 기업과 전문가들이 경고음을 냈던 인력 양성이 이제야 ‘광속’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글로벌 속도전 속에서 한동안 ‘강제 멈춤’됐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시계도 비로소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반도체와 인재풀이 겹치는 디스플레이 등 다른 산업 분야가 좌불안석이다. 비상이 걸린 반도체와 달리 인재를 구할 활로가 보이지 않는 데다 반도체의 인재 입도선매까지 겹치면 더 큰 피해가 생길까 걱정이다. 문제의 핵심은 반도체 인재 부족이 아니라 기업과 산업 현장의 목소리가 교육 등 다른 시스템에 닿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유럽경영대학원 분석을 인용해 밝힌 데 따르면 교육과 직업이 따로 노는 불균형 문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한국이 가장 심각했다. 반도체 시계가 이제야 도는 가운데 시야 밖에서 또 어떤 기업 현장의 시계가 멈춰 서 있을지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2-06-11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한미 기술동맹 바라보는 기업인들의 시선1983년 하버드비즈니스스쿨 시어도어 레빗 교수가 ‘글로벌라이제이션’을 화두로 제시한 이후 40년 이어져 온 세계 경제 질서는 지금 큰 터닝 포인트를 경험하고 있다. 변화는 글로벌 경제 질서를 착취적으로 활용한 중국에 미국이 메스를 들면서 시작됐다. 이는 미국과 유럽, 중국과 러시아의 진영 대결이 됐다. 경제 블록화와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회귀)이 강화되면서 한국 기업은 근본적으로 다른 시장 지형을 맞닥뜨리고 있다. 기업인들은 20일 한미 양국 정상이 삼성 평택 반도체 공장에서 만난 장면은 이런 지형 변화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명확히 보여준다고 입을 모은다. 글로벌 반도체의 심장인 한국과 대만은 동아시아에서 각각 북한과 중국, 그리고 넓게 보면 러시아를 마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첫 동아시아 방문지가 한국이고, 한국 대통령과 기업인을 만나는 첫 장소가 반도체 공장이라는 그 자체가 강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미국과 기술 동맹으로 한국은 중국과 첨단기술 격차를 벌릴 시간을 벌게 됐다. 인공지능(AI), 양자 컴퓨팅 등 핵심 기술을 공유하면서 미국 대중(對中) 전략의 수혜를 입을 수도 있다. 기업인 A 씨는 “미중 사이 전략적 모호성으로 이익을 얻기 어려워졌지만 방향성과 원칙을 명확히 하고 첨단기술 성장 기반을 다지는 긍정적 효과가 크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파티의 시작’이 아니라 ‘험난한 도전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기업인 B 씨는 “우크라이나 사태 대응에서 미국 리더십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 중동은 이탈했고, 유럽은 무기력하다. 미국 주도 경제블록이 예전처럼 크고 강할까. 2차 대전 후 마셜플랜으로 유럽을 재건하고 공산주의 블록에 승리한 파워를 지금도 보여줄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 밖에도 “중국 의존도 높은 한국의 공급망 재편이 가능할까. 재편 과정에서 경쟁력을 잃지는 않을까. 중국이 오히려 더 많은 기회를 가져가지는 않을까…” 기업 현장엔 명쾌한 해답 없는 질문만 가득하다. 기업들은 지난해부터 미국 정치의 중심인 워싱턴에 잇따라 사무실을 개설하고 미국 내 투자를 늘리며 지형 변화에 대응했다.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한국 기업의 기술력은 바이든의 전략 지도에 명확히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원 팀’으로 손발을 맞출 한국 행정부, 입법부는 도전을 헤쳐 나갈 시야와 실력,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1995년 ‘세계화’ 영문 표현 논쟁이 있었다. 정부는 끝내 한글 발음을 그대로 옮긴 ‘Segyehwa’를 선택했다. 국제 통용된 ‘Globalization’은 국경 없는 시장 통합을 의미하는 반면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국가전략을 의미하기 때문에 고유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런 의지에도 불구하고 국제 흐름에 대응하지 못한 탓에 외환위기를 맞고 말았다. 정부가 민간 주도 경제성장으로 선회하면서 기업 정책의 이념 과잉을 덜어낸 것은 다행스럽다. 그러나 입법 권한을 가진 국회와 협업은 여전히 어렵다. 필요 인재 육성은 아직 부족하다. 눈앞의 이해다툼이 시야를 가려서다. 변화 속 국민 안전과 번영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국가의 그 어떤 성취도 의미를 잃게 된다. 전장에 나선 기업들은 우리가 함께 잘해 나갈 수 있을지, 질문하고 있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2-05-21 03:00
기업 앞세워 운명 개척하는 국가들[오늘과 내일/김용석]한국의 대표적인 신성장 산업인 전기차 배터리 기업들은 리튬, 니켈 등 희소 자원을 무기화하려는 상대국 기업들의 도발에 ‘소리 없는 전쟁’을 치러내고 있다. 이 분야의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해외 광산을 일찌감치 사들여 확보한 경우에도 언제 그 나라 정부가 자원 국유화에 나설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국가의 이해관계가 기업 계약에 우선하는 것. 세계화 시대 신뢰 기반이 무너진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계화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국가와 기업의 관계가 재설정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국가의 외교·안보 전략에서 기업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위협 아래 놓인 대만에서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 TSMC에 대한 투자는 기업 전략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안보 전략이다. 대만의 ‘안전핀’이 된 TSMC는 미국과 중국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미국과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에서 공격적인 반도체 공장 신설에 나서고 있다. 미국에서도 조 바이든 대통령이 국가 경제안보를 위한 반도체 산업 재부흥을 선언하자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로 화답했고, 애플 퀄컴 엔비디아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이 줄줄이 지지를 밝혔다. 인텔은 나아가 반도체 안보 위기를 우려하는 유럽에 110조 원 투자 카드를 꺼내 들며 동맹 강화에도 나섰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기업이 사회 문제를 푸는 주체로서 그 역할을 늘려 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소득불평등 불만이 폭발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리쇼어링(해외 진출한 제조기업의 국내 복귀)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트럼프 행정부도 중국 견제 등 정치적인 이유로 이를 이어 받았다. 바이든 정부 또한 공급망 복원력을 키우기 위한 리쇼어링을 가속화했다. 리쇼어링 이니셔티브에 따르면 리쇼어링 효과로 지난해에만 미국에서 22만 개 일자리가 새로 생겨났다. ‘소비 천국’인 미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체질을 전환한 것이다. 전기차, 제약, 의료기기, 전자제품 등 제조업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양극화 문제를 야기했던 기업들이 ‘최고의 사회안전망’이라는 일자리 창출로 문제 해결 전면에 서게 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낮은 법인세와 유연한 규제로 기업이 주도하는 일자리 문제 해결을 지원했다. 기후변화 등 환경 문제에서도 기업을 통한 해법이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자국 내 생산된 배터리와 전기차 등 친환경 산업에 보조금 폭탄을 경쟁적으로 쏟아붓고 있다. 일론 머스크와 빌 게이츠 등 세계 부호들은 친환경 기술에서 새로운 금맥을 찾으려 앞다퉈 솔루션을 내놓고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의 대항마로 북미 지역 캐나다엔 새로운 전기차 배터리 밸류 체인이 전략적으로 형성되고 있다. 공익을 추구하는 정부가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과 거리를 두고 견제해야 한다는 기존 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이 같은 변화를 따라잡기 어렵다. 기업을 매개로 국가 경쟁력을 발휘하는 글로벌 각축전에서 우리가 가진 강점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국가 정책 구상 단계부터 기업을 참여시키고, 기업들이 제대로 뛸 수 있는 여건을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생각을 바꿔 새로운 민관 협력 모델을 만드는 것이 새 정부의 중요한 숙제라는 얘기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2-04-30 03:00
나는 왜 택시를 잡지 못하는가 [오늘과 내일/김용석]늦은 밤, 나는 왜 택시를 잡기 어려운 걸까. 서울시는 최근 이 질문에 ‘카카오택시 때문’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서울시가 조사해 보니 택시 단거리 호출 성공률이 23%로 장거리의 절반에 그쳤다고 한다. 택시기사들에게 목적지를 미리 알려주는 카카오택시 앱 때문에 단거리 승객을 승차거부한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앱에서 목적지 표시를 지우도록 규제하고 국토부에 있는 규제 권한도 서울시가 갖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서울시 말대로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택시기사들은 앱을 꺼버리고 길거리 승객들에게 목적지를 물어 골라 태우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한 플랫폼 택시가 목적지를 가리는 대신 5000원씩 더 주겠다고 해봤는데도 먹히지 않았다. 피크타임 짧은 시간 안에 최대 이익을 얻으려는 택시기사들에게 목적지는 가장 중요한 정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서울시 주장보다 훨씬 납득이 쉬운 답이 있다. 밤에 택시 잡기 어려운 이유는 그 시간에 택시 탈 사람은 많은데 운행 택시가 적기 때문이다. 서울에 약 7만1000대 택시가 있다. 하루 평균 4만1000대가 운행한다. 심야 피크시간엔 1만6000대밖에 다니지 않는다(작년 말 기준). 왜 그럴까. 일시적으론 코로나19로 승객이 줄자 택시기사도 줄었다는 이유가 꼽힌다. 좀 더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한 택시기사의 말을 인용한다. “개인택시 기사는 대부분 연세가 많아요. 늦은 밤 술 취한 젊은 사람 대하기 싫어하죠. 저녁 먹고 집에 들어가 9시 뉴스 보고 주무십니다.(서울 개인택시 기사 4만9000명 중 76%가 60대 이상이다. 70대 이상도 23.3%에 달한다.) 그런데 또 영업하고 싶은 기사가 있어도 30년 전 만들어진 ‘부제’라는 낡은 규제가 있어서 억지로 휴업을 해야 합니다. 부제라도 없애 공급을 늘려줘야죠.” 서울시는 카카오택시가 수수료 수익을 올리려 일반택시를 빼고 가맹택시에만 콜을 몰아주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카카오는 이에 대응해 배차 알고리즘 구조를 공개했지만 그것만으론 실제 콜 몰아주기가 있었는지 확인하긴 어렵다. 하지만 알고리즘의 목표가 배차 효율성과 승객 만족도를 높이는 것 외에 택시기사의 충성도를 높여 카카오택시 지배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밤에 택시가 안 잡히는 이유와 무슨 관계인지 알기 어렵다. 나아가 카카오택시 알고리즘에 서울 교통문제 해결이란 숙제를 떠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서울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부동산 시장의 교훈과 비슷하다고 본다. 공익을 위한답시고 시장 플레이어들을 규제할 것이 아니라 공급을 늘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밤 시간대 폭증하는 택시 서비스 수요 등을 충족시킬 다양한 신규 사업자 및 서비스의 시장 진입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시장이 활성화되면 공급이 늘어나는 것뿐 아니라 공급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시장 파이를 키우기도 한다. 물론 그 일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이미 플랫폼 택시 등장 등으로 서울시 택시면허 가격이 폭락해 갈등이 크다. 부제를 없애는 것도 개인택시와 법인택시 간 갈등이 있다. 정부가 기존 사업자와의 갈등 해소 등을 풀어내지 못해 새로운 서비스인 ‘타다베이직’의 문을 닫게 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서울시가 ‘그 어려운 길’을 가지 않고 규제 권한 확보에만 매달린다면, 결국 앞으로도 나는 택시 잡기 어려울 것 같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2-04-09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생각의 크기가 혁신성장의 인프라다인도는 경제 규모에 비해 유통산업 발달이 더딘 나라다. 전국 연결 도로, 철도망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대형 유통업을 꿈꾸는 기업가가 등장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시장에선 새로운 시도가 나오지 않았고 재래식 유통업자들의 시장 장악이 이어져 왔다. 사회·경제 기반을 의미하는 인프라(infrastructure)가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 범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기업가가 상상할 수 있는 아이디어 범위는 아마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 나아가 상상의 범위 자체가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결과가 달라진다. 박세리 선수의 LPGA 우승이 없었다면 신지애, 박인비, 고진영 선수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물리적 인프라뿐 아니라 사회 저변의 생각과 상상의 크기가 성장의 기반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혁신성장을 이끄는 기업가들은 하나같이 포지티브 규제를 비판한다. 포지티브 규제는 정부가 법규 등을 통해 ‘A와 B만 할 수 있다’고 정해 놓는 것을 말한다. 허락한 것 외에는 하면 안 되므로 상상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대신 ‘A와 B는 하면 안 된다’고 정하는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금지 항목을 뺀 나머지는 다 해도 되므로 상상의 크기가 커진다. 창의적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명쾌한 원리인데도 실행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혁신의 본질적 속성 탓이다. 혁신은 ‘공정’과 함께하기 어렵다. 새로운 가치 창출을 추구하는 혁신은 기존 가치에 묶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시장은 승자 독식을 부추긴다. 하지만 혁신을 통해 전체 파이를 키워가야 한다는 의지, 동력이 꺼지면 결국 갈라파고스 처지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혁신의 승자가 지속가능성을 추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혁신을 지지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선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비스업보다는 제조업, 내수시장보단 수출시장에서의 혁신, 다시 말해 갈등이 적은 혁신이 항상 좋은 대접을 받았다. 서비스업 혁신이 대체로 기존 가치를 이전하면서 효율성을 키우는 쪽이라면 제조업 혁신은 전에 없던 가치를 새로 만드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라 안 기존 이해관계자와 부대끼는 내수산업보다 나라 밖 시장을 개척하는 수출산업이 환영받았다. 그래서 어떤 기업들은 수출기업 이미지로 포장하는 ‘수출 워싱(washing)’에 나서기도 한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이사회에서 물러나 글로벌 사업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힌 데에도 이런 배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년 전 이사회에서 물러나 글로벌투자책임자(GIO) 직책만 맡아온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두 창업자 행보의 공통분모가 글로벌인 것은 환영할 일이다. 성공한다면 현재 네이버, 카카오 기업 가치의 한계를 돌파할 것이다. 하지만 혁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강한 반작용이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떠올리면 안타까운 일이다. 규제 개혁을 매일 외치지만 변하지 않는 속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갈등을 조정하고 혁신을 수용할 수 있는 생각과 상상의 힘이야말로 혁신성장이 필요한 지금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인프라가 아닐까.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2-03-19 03:00
‘프리패스’ 규제의 위험성[오늘과 내일/김용석]상상으로나마 한 번쯤 바꿔봤음 좋겠다고 생각하는 제도가 하나 있다. 월급 받는 근로소득자에 대한 세금 원천 징수다. 지금은 회사가 소득세 등을 미리 떼고 줘 그냥 세후 급여를 내 월급이라 여긴다. 만약 세전 급여를 모두 통장에 넣어준 뒤 소득세 등을 따로 걷으면 어떻게 될까. 주머니에 들어온 ‘피 같은 내 돈’이 빠져나가는 데 신경이 곤두설 것이다. 손쉽게 세금을 걷지 못하는 만큼 정부는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각종 ‘공짜 정책 시리즈’를 내놓는 데도 훨씬 더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어떤 일을 할 때 상대방 반응을 살피거나 개방된 논의 절차를 거치는 것만으로도 엄격성을 높이거나 숙의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지 않고 공짜로 ‘프리패스’ 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상대방의 존재감은 미미해지게 마련이다.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한 영화에서 이런 명대사가 나왔다. “호의가 계속되면 (상대방은) 그게 권리인 줄 알게 돼.” 정부가 규제를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해관계에 놓인 사람들 의견이 치열하고 투명하게 노출되는 국회 심의 등 절차를 거치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측면을 미리 고민하고 반영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함께 분석해 보니 현 정부에선 손쉬운 절차를 택한 규제 입법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국회 논의를 거치는 법률 대신 정부 안에서 만드는 시행령, 시행규칙 등 하위 법령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지난 정부보다 많았다. 또 규제를 새로 만들거나 강화할 때 정부와 민간위원이 참여하는 규제개혁위원회 본심사를 거친 비중도 크게 줄었다. 규제가 만들어지는 절차가 건강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다. 예를 들어 기업 사외이사 재직 기간을 제한하는 규제가 그랬다. 개인 권리 중 하나인 직업 선택 자유가 제한될 우려가 있는데도 시행령 개정 절차만으로 규제를 만들었다. 국무조정실은 규제개혁위원회 본심사 비중이 줄었다는 보도에 대해 본심사에 앞선 예비심사를 통해서도 면밀하고 충분한 검토가 이뤄지고 있다고 반박했다. 예비심사만으로 면밀하고 충분하다면 본심사 절차는 왜 둔 것인지 묻고 싶다. 사실 기업 현장에선 법이나 시행령, 시행규칙으로 만들어지는 규제는 그나마 양반이라고 말한다. 어디서 누가 얼마나 만드는지 손에 꼽히지도 않는 수많은 가이드라인이야말로 훨씬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강제성이 없는 권고라는 명분으로 적절한 견제가 이뤄지지 않은 채 양산되고 있다. 일례로 금융 분야에선 보안 관련 가이드라인을 사실상 산하 기관인 특정 기관에 맡겨 제정, 시행하기도 한다. 이를 어기면 시장에서 퇴출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가이드라인 때문에 다양한 기술 대안을 적용할 자유, 기술 발전 가능성을 제한받는다. 그런 기준을 한 기관이 만들고 운영하는 건 마치 입법권과 행정권을 모두 갖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규제가 공공 이익을 위한다고 해서 항상 합당한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제한되는 개인과 기업 등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필요한 규제라고 해도 그 범위와 수준을 정하는 논의 과정은 팽팽하고 투명한 긴장관계에 놓여 있어야 건강한 것이라고 믿는다. 규제 검토 허들을 낮추는 정부의 ‘프리패스’가 이어진다면 그 자체로 사회의 진보를 막는 리스크가 될 것이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2-02-26 03:00
‘삼성전자’ 본사가 미국으로 가고 있다[오늘과 내일/김용석]“차라리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는 게 이득이겠다.” 삼성전자가 정치권으로부터 공격받는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오르면 이런 댓글이 심심치 않게 달린다. 푸대접을 받을 바엔 다른 나라 가서 사업하는 게 낫겠다는 자조적 표현이다. 실행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모르지만 오래전 삼성전자 내부에서 실제로 본사 이전을 검토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IBM 같은 글로벌 기업도 사업부별 헤드쿼터를 각각 다른 나라에 두는 실험을 하던 시기다. 삼성의 결론은 옮기면 손해라는 쪽이었다고 한다. 국내 등록 반도체 특허 등 유무형 자산을 이전하는 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역시 현실성 없는 얘기’라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미래의 ‘삼성전자’들은 본사를 외국으로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KOTRA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해외 진출한 한국 스타트업 중 절반(49.5%)은 본사를 해외에 뒀다. 삼성처럼 한국에 묻어둔 레거시가 없는 신생 기업들은 이미 해외에 뿌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톱 기업이 몇 개 나올지 모른다. 미국 등에 본사를 두면 기업 운영에 필요한 돈(투자)과 사람(인재), 시장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 같은 기술과 제품을 가진 기업이라도 미국 시장에 뿌리를 두면 더 높은 몸값을 인정받는다. 소프트웨어 개발자 등 인재를 구하는 데도 유리하다. 미래의 ‘삼성전자’들이 한국을 선호했던 이유 중 하나는 ‘테스트 베드’가 된다는 점이었다. 앞선 모바일 인프라 등으로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은 시장이 작다는 한계를 뛰어넘는 매력 포인트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 경쟁력을 그대로 유지하는지 의문이다. 과거의 ‘삼성전자’들도 해외로 이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15∼2019년 국내 제조 기업들 고용을 분석해 봤다. 5년간 국내 일자리 18만 개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약 11만 명)와 현대자동차(약 7만 명) 임직원 수를 합친 것 만큼이다. 같은 기간 해외법인 일자리는 약 42만 개 늘어났다. 반면 적극적인 리쇼어링(해외 생산시설 자국 내 복귀) 정책을 편 미국, 일본, 독일은 자국내 제조업 일자리를 3%가량 늘리는 데 성공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기업을 수용하려는 의지 차이가 크다. 단적인 예로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하면서 1조 원 넘는 세금 감면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3000억 원대 교육세 면제도 포함돼 있다.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려면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데 지역 공동체가 동의한 결과물일 것이다. 반면 경기도 용인에 반도체 공장을 추진 중인 SK하이닉스는 토지 수용을 놓고 지역 주민과의 줄다리기에 수년째 발목이 잡혀 있다. 공장에 전깃줄, 공업용수 하나 끌어오려면 시청과 도청 문턱이 닳도록 오가야 했다. 결국 글로벌 속도전에 밀린 하이닉스는 기존 공장 부지에서 빈 공간을 찾는 플랜B를 고민 중이다. 기업 성장 관점에서 글로벌 이전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일자리 정부’라면 신생 스타트업이든, 제조 기업이든 한국을 떠나는 이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짜 국가경쟁력은 공공일자리로 일자리 통계를 분칠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기업 시민들이 스스로 모여들어 혁신 가치를 자유롭게 실현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도록 매력적인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2-02-05 03:00
“지속가능성 뒤처진 기업은 사회가 배척… 청년들도 외면할 것”《“지속가능성은 더 이상 부수적인 과제가 아닙니다. 뒤처지지 마십시오. 사회는 변하지 않는 기업을 받아들이지 않고, 젊은 세대는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을 겁니다.” 폴 폴먼 전 유니레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많은 기업이 최우선 과제로 꼽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의 대표적인 롤 모델이다. 동아일보는 그와 두 차례 e메일을 주고받으며 인터뷰했다. 그는 “과거엔 몇 안 되는 사례를 들어 기업들에 지속가능 경영의 중요성을 설명해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며 “비즈니스에선 먼지를 먹는 것보다 먼지를 만드는 게 항상 낫다. 변화의 변곡점에서 앞서 나가야 한다”고 독려했다.》2009년 경영 위기에 놓인 유니레버가 경쟁사 출신 폴먼을 CEO에 앉힌 일은 시장에서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취임 직후 지속가능성을 경영 1순위에 놓는 ‘유니레버 지속가능한 삶 계획(USLP)’을 발표하며 더 큰 파격을 실행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주주, 종업원뿐만이 아니라 환경, 사회 전반의 이익을 고려하는 ‘다중 이해관계자 사업 모델’이 단기적 이익 추구보다 더 좋은 실적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인도, 방글라데시 등 개발도상국 위생 문제 해결을 도와 비누, 세척제 사업을 성장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덕분에 유니레버는 신흥 시장에서 두 자릿수 이상의 지속적인 성장률을 기록했다. 폴먼은 “문제 해결에 더 강한 목표를 가진 브랜드가 더 빨리 성장하고 수익을 올리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고 했다. 폴먼은 유니레버를 경영하며 매출과 이익을 지속적으로 늘렸고, 10년간 주주 수익률 300%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폴먼은 2019년 유니레버를 떠난 뒤 소셜벤처 ‘이매진’을 창업했다. 기업과 단체의 지속가능 경영을 지원하는 단체다. 그는 최근 발간한 책 ‘넷 포지티브(Net-Positive)’에서 지속가능 경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더의 용기라고 강조했다. “용기는 강한 내적 확신에서 나옵니다. 옳은 일은 항상 어렵고, 잘못을 범하긴 쉽습니다. 하지만 강한 목적의식이 있으면 정반대가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리더의 역할이죠.” 기업 자신이 아니라 사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CEO가 아닌 사회 운동가 역할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주주에 봉사하는 것과 사회에 봉사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고 했다. 폴먼은 “당신의 사업이 직원, 고객, 협력업체, 지역사회, 지구, 다음 세대를 포함한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위한다면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데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주주가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백신 업체 모더나의 주주들이 불평등한 백신 보급에 항의한 사례를 주목했다. “모더나 이야기는 많은 고위 경영진에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투자자는 변하고 있습니다. 주가 상승만 생각하는 주주가 여전히 많지만 기업의 윤리와 가치를 중시하는 주주도 많습니다. 모두가 안전할 때까지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이해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후변화, 코로나19 팬데믹 등 위기의 시대에 지속가능성의 가치를 지킨 회사가 더 큰 보상을 받고 있다. 대체육이나 대안 유제품 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게 대표적 사례”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착한 경영’을 하다 보면 손해를 보지 않을까. 이에 대해 폴먼은 ‘경쟁 전 영역’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유니레버는 네슬레, 코카콜라, 펩시콜라와 음료 분야에서 경쟁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냉장고 통째로 음료를 사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유해 가스를 사용하지 않는 냉장고 도입에 서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폴먼은 “우리는 인류의 미래를 놓고 경쟁할 순 없다. 그 게임에선 모두가 이기거나 모두가 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했다. 또 “경쟁 전 영역에서의 협력은 에너지와 금융, 해운, 항공, 식품, 패션 등 많은 분야에서 점점 더 넓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며 “탄소 배출을 중단하더라도 지구 온도는 계속 상승할 것이고, 더 높은 야망을 이끌어내기 위해 새로운 표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폴먼이 제안한 ‘넷 포지티브’에서 ‘포지티브’(긍정적)의 기준은 무엇일까. 폴먼은 판단 기준을 이렇게 제안했다. “당신의 회사가 있기 때문에 세상은 더 나아질까요? 간단히 측정하긴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대답은 ‘예’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사회 기대치와 기준은 계속 변합니다. 지금은 플라스틱이 문제지만 앞으론 태양광 발전 폐기물이 문제가 될 수 있죠. 내용이 무엇이든 넷 포지티브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기업이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긍정적인 사회 영향을 높이는 것입니다.”김용석 기자 yong@donga.com김도형 기자 dodo@donga.com}2022-01-24 03:00
기업인들을 소외시키는 정치 [오늘과 내일/김용석]12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와 10대 그룹 최고경영자(CEO)들이 간담회를 가졌다.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이 “역대 정부가 규제 합리화를 약속했지만 기업인이 느끼는 체감 규제는 늘어나고 있다. 원인이 뭐라고 보느냐”고 질문했다. 이 후보는 “관료 조직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행정편의주의를 막는 것이 선출 권력의 역할”이라는 취지로 답하며 관료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하지만 최근 기업들이 가장 체감하는 중대재해처벌법 규제를 떠올리면 엉뚱한 답변으로 들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재벌 개혁 성과라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취재하면서 만난 부산의 한 중소기업 사장은 연 매출 60억 원 중 10%를 안전 강화에 쏟아붓고도 언제든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생각에 교도소 담장 위에 선 듯한 불안을 호소했다. 그의 불안과 재벌 개혁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나. 해답 실마리를 이 후보의 “중대재해처벌법 실제 적용은 거의 쉽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에서 찾았다. 이 후보는 나중에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통상적으로 노력하는 선량한 경영자라면 법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취지”라고 정정했다. CEO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두는 법을 만든 뒤 여론에 따라 선택적 처벌을 할 수 있는 칼자루를 쥐는 정부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 기업인들은 ‘통상적 노력’과 ‘선량한 경영자’ 판단 기준의 모호함이야말로 가장 크게 체감하는 규제의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공무원이 낡은 규제를 고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낡은 생각으로 규제를 만드는 정치가 문제라는 얘기다. 반면 벤처 업계가 요구했던 차등의결권제 도입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벤처 성장 과정에서 창업자 경영권 보호를 위한 이 법안은 민주당 총선 공약이었고 문 대통령이 통과에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좌초된 이유는 민주당 박용진 의원 발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재벌들 민원 요청 사항인 인터넷은행 특례법 등에 이어 논란이 많은 이 법을 왜 처리하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 법으로 혜택 보는 상장 전 단계의 벤처기업들이 재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공기업 이사회에 근로자 이사 참여를 의무화하는 노동이사제를 처리하면서는 기업인들이 5차례 반대 성명을 낸 것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노동이사제가 민간 기업에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는 차치하고 사실상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기업에서 노조와 경영진 짬짜미로 생겨날 수 있는 대리인 문제를 입법 과정에서 고민한 흔적은 없다. 최근 기업 CEO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면 대선 후보들이 제기하는 이슈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후보들은 디지털 전환과 산업 육성을 말하지만 각론에선 기업의 성장을 돕는 데 인색하다. 하락 장에 화가 난 투자자든, 여성가족부에 화가 난 이대남이든, 탈모에 좌절하는 탈모인이든 표를 든 사람들 불만 대응에만 열중한다. 크든 작든 기업은 문제 해결에 가장 효율적인 주체다. 먹고사는 경제 문제는 물론이고 기후위기, 사회 문제 해결이 기업 비전의 우선순위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정치인 언어에서 기업은 그저 하나의 ‘빌런(악당)’으로 취급될 때가 많다. 아마 표를 든 사람들의 반감 때문일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국가를 경영해야 할 정치인들의 화두가 성장을 이끄는 기업인들의 비전과 서로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국가적인 비극이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2-01-15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기업이 정부 성과 감사하는 자리도 보고 싶다“조직과 융화하지 못한 직원들을 몇 년 동안 살펴봤습니다. 의외로 좋은 대학 출신이 많았습니다. 구성원 모두 똑똑할 필요 없어요. ‘슈퍼 스마트’ 몇 명만 있으면 나머지는 책임감 있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면 됩니다.” 10여 년 전 일이다. 삼성전자에서 인사를 오래 담당한 고위 임원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삼성전자 경쟁력이 제조에서 나오던 시기였다. 1990년대 중반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세계 초일류 품질경영’을 전파하며 세탁기 뚜껑이 규격에 맞지 않자 칼로 깎아내는 제조 현장을 질타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자동차 철판 이음새가 어긋나기(단차) 일쑤인 테슬라가 세계 최고 전기 자동차로 꼽힌다. 마니아들은 테슬라가 자동차 제조사가 아니라 미래를 먼저 경험하게 하는 회사라고 합리화한다. 제조기술이 아니라 고객에게 어떤 경험을 안겨 주느냐로 승부를 가르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삼성, LG 등 주요 그룹이 내놓은 미래비전엔 알파벳 엑스(X)가 빠지지 않는다. 차별화된 고객 경험(experience)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스마트폰, TV, 냉장고를 만들어 파는 게 아니라 제품을 통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반 관리자나 생산라인 숙련 근로자가 아니라 인공지능(AI)·데이터 전문가와 소프트웨어 개발자, 디자이너, 콘텐츠 인력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돌아와 ‘냉혹한 현실’을 말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첫 조치로 단행한 것은 인사제도 혁신이다. 10여 년 전 ‘책임감 있는’ 신입사원을 뽑아 ‘파란 피(삼성 상징 색)’ 돌게 하는 교육으로 사람을 바꿨다면, 이제는 ‘슈퍼 스마트’가 일하고 싶은 회사로 삼성전자를 바꾸겠다는 의미다. 이런 시대에 연간 수만 명을 직접 신규 채용하는 숙제를 푼다는 것은 10여 년 전과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기업에 고용을 독려하고 성과를 집계하는 방식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네이버, 카카오가 아닌 제조 대기업에 먼저 수만 명 채용을 요청한 건 정부 생각이 여전히 제조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다. 사업 환경도 달라졌다. 바이오 신약사업을 키우고 있는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솔직히 바이오가 주력 신성장사업이 되긴 어렵다”고 토로했다. 뛰어난 신약 개발 능력을 갖춘다 해도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이라는 진입장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기업 성장과 생존에서 정부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SK가 조지아에 배터리 공장을 짓는 것은 사업 유불리만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국가 기능이 커지면서 기업과 국가의 2인 3각 게임으로 승부가 판가름 난다는 얘기다. 여러 논쟁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보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 업적을 앞다퉈 인정하는 것은 산업화 고속도로를 미리 닦아 경제성장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가주도 성장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탄소 중립 기술, 전기차 인프라, 인력 양성 교육 등 4차 산업혁명 시대 과감히 투자할 ‘고속도로’가 곳곳에 널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년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주요 그룹 총수를 불러 감사하는 자리를 갖는다고 한다. 정부는 기업 성과를 치하할 게 아니라 동반자로 함께 경쟁에 나서야 할 주체다. 정부 성과를 기업들이 감사하는 자리가 열리는 장면도 꼭 지켜보고 싶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12-27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비호감 기업과 비호감 정치의 상관관계대한민국엔 이른바 ‘반(反)기업 정서’가 있다. 한국인의 기업에 대한 반감은 미국, 일본은 물론 중국보다도 높다. 한 경제단체가 2003년부터 조사했는데 해가 지나도 줄어들 기미가 없어 조사를 중단했을 정도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은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기업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최근 기업들은 주주, 구성원, 소비자는 물론 사회 전반의 이익 창출을 경영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다. 기업에 대한 반감을 호감으로 돌리기 위한 노력이다. 반면 유례없는 ‘비호감 대통령 선거’ 국면을 맞고 있는 정치권에서는 이를 고민하는 목소리를 들어 보기 어렵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참여하고 있는 경쟁의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은 눈앞 상대를 이기는 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진입장벽과 국경 없는 이종격투기장에서 절대평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가 세계 1위 일본 도요타를 이긴다고 해서 게임이 끝나지 않는다. 전기차 1위인 테슬라나 구글, 애플 등 이종(異種) 경쟁자가 수시로 등판한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상상을 자유롭게 실현해야 하는데 각 회사가 뿌리 내리고 있는 나라에서의 각자 다른 규제 환경이나 인재 확보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기업의 호감도는 규제나 인재 확보에 영향을 미친다. 이에 비해 정치 선거는 경쟁이 제한된 상대평가다. 후보 A는 경쟁 후보 B와 C를 이기는 게 지상 과제다.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있다 해도 모두에게 동일한 조건일 뿐이다. 오히려 이를 승리에 활용한다. 많은 유권자들이 찍을 후보가 없다고 불평해도 A, B, C 외에 다른 대안은 주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기업과 정치에 대한 비호감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여러 연구를 보면 반기업 정서의 원인은 크게 두 갈래다. 첫째, 과거 특정 기업과 기업인의 잘못이 누적돼 신뢰를 잃은 탓이다. 둘째, 사회 시스템 전반에 대한 불신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황인학 전 한경연 연구위원의 연구를 보면 정치인, 공무원, 법조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반기업 정서가 높다. 김수한 고려대 교수도 사회제도에 대한 신뢰가 낮을수록 기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분석했다. 정부에 대한 반감이 기업에 대한 반감보다 우선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기업 잘못에서 비롯된 반감은 기업이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사회 기여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 불신에 따른 반감은 기업 혼자 극복하기 어렵다. 기업들이 반기업 정서를 극복하려는 이유는 여러 과도한 규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일부 반발을 무릅쓰고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유치에 수조 원의 세금을 쏟는 건 국가 안보와 일자리를 위해서다. 하지만 국내에선 반도체 공장에 상수도 하나 설치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공당의 주요 인사와 고위 관료마저 “반도체가 일자리를 만드는 건 알지만 내 손으로 대놓고 삼성, SK 같은 대기업을 돕는 정책과 법을 만들 수는 없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저변에 깔린 반기업 정서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30, 40대 일자리가 부족해 경제 중추가 무너지는 상황을 공공 일자리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허상으로 드러났다. 자유로운 기업의 창의와 도전이 일자리를 만든다는 상식을 되살려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상식을 되살리고 신뢰를 회복할 중요한 한 걸음이 되길 바란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12-04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피해 입은 국민 앞에서 ‘비싼 수업료’라는 정부사랑하는 사람끼리 싸울 땐 별 사소한 게 다 무기가 된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차가운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 상대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 관계없는 타인이라면 어림없는 일이다. 중국발 요소수 부족 사태는 이런 싸움을 닮았다. 유럽의 외교전문가인 마크 레너드는 ‘Age of Unpeace’라는 책에서 현재 강대국 국제관계를 ‘서로를 견딜 수 없어 하지만 이혼하지 못하는 부부’로 묘사한다. “좋은 시절에 공유했던 많은 것들은 (비극적이게도) 나쁜 시절엔 서로 해를 입히는 수단이 된다.” 사실 요소수 원료인 요소는 부가가치가 낮고, 만드는 과정에서 유해물질을 배출해 국내 생산이 자취를 감춘 품목이다. 경유를 주유하면 서비스로 한 통 넣어주는, 그런 제품이었다. 중국에서 원료를 가져와 완제품을 만드는 분업 체제면 충분했다. 하지만 중국이 수출을 틀어막자 순식간에 비극이 펼쳐졌다. 200만 경유차 운전자 생계가 위협당했다. 주유소마다 화물차가 몇 시간씩 줄을 섰다. 가격은 10배 이상으로 치솟았다. 물류와 공장이 멈춰 서는 것은 물론이고 소방차와 대중교통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이런 사태를 고스란히 지켜본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 계열 런민쯔쉰은 “이번 위기를 통해 한국이나 미국 모두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이 가진 지위를 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에 대항하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레너드는 전통적인 개념에선 전쟁이 아니지만 무역전쟁, 경제제재, 사이버공격 등으로 매년 나오는 수백만 피해자를 보면 평화라고 부를 수 있겠냐고 반문하며 현재를 ‘불(不)평화의 시대(Age of Unpeace)’로 정의한다. 초연결 시대, 세계의 상호의존성 때문에 서로를 쉽게 공격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역, 관세, 경제제재, 규제 등은 상대방이 의존하는 지점을 타격할 수 있는 무기가 됐고, 세계는 훨씬 더 위험해졌다. 이런 전쟁에선 한 나라의 군대가 아닌 사회의 약자들이 가장 먼저 총을 맞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해 중국을 따돌리고, 미국과 유럽 원자재 시장에서 중국의 ‘더러운 철강’을 제한하겠다고 선전포고했다. 그 여파로 한국 반도체와 철강 회사들, 연관된 많은 중소기업이 전쟁에 휘말려 들고 있다. 원자재 공급망 재편은 인플레이션에 더해 가격 상승 원인이 된다. 높은 물가는 사회 약자들의 삶을 옥죌 것이다. 국민들 삶은 점점 더 위험해지고, 부지불식간에 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데 정부 인식은 안이하기만 하다. 급한 요소수 물량을 확보하고선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전화위복이 됐다. 이번에도 그런 학습효과가 있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늑장대응으로 민간에 피해를 안긴 것도 문제지만 ‘요소수를 공급하거나, 불화수소를 국산화하는 것’만으로 이 사태를 충분히 해결했다고 여긴다면 더 큰 문제다. 이런 시대에 스스로를 지키려면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수출 한국’이 자원 의존에서 독립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만은 국가 안위를 위해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미국과 일본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초연결망의 중심에 선 국가와 공동 운명체가 되기 위해서다. 지금은 ‘평화 속 전쟁’ 시대다. 정부가 세계를 보는 정확한 시야와 긴장감을 갖지 못한다면 결국 위험에 노출된 국민만 또다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11-13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불안감 걷어 내는 누리호의 한 걸음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극적으로 만든 핵심적인 장치가 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어떤 게임을 하게 될지 참가자들이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목숨을 걸어야 할 게임의 룰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게임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의 불안감이란…. 세계 1억4000만 명이 이 드라마에 감정이입한 이유 중 하나는 현재의 보편적인 삶이 어느 정도 그와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게임의 룰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2년 전엔 상상도 못 했을 마스크 낀 삶을 살고 있고, 그 사이 성업이던 동네 노래방은 죄다 문을 닫았다. 자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벼락부자와 벼락거지가 순식간에 엇갈렸다. 기업과 국가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기후변화로 공장이 멈춰서고 삶이 위협받았다. 수백 년 성장 공식의 기본이었던 화석연료 의존을 끊어야 한다는 과제가 눈앞에 다가오자 자원 가격이 요동쳤다. 디지털 자산의 가치 상승 등 기존 질서, 즉 게임의 룰이 흔들리며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모든 것에 새로운 가격표가 붙고, 과거 경험을 벗어나는 빠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며 “머지않은 훗날 개인과 기업은 물론 많은 국가의 운명이 엇갈린 시기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변화를 예측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관건은 적응할 힘을 가지고 있느냐가 될 것이다. 기축통화국이 아니라면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각 분야 세계 1등 기업을 가지고 있어야 환경 변화를 직접 주도하거나 변화에 적응력을 높일 수 있다. 변화 때문에 커진 불안감을 해소하는 궁극적인 길은 모두에게 목돈을 나눠 준다든지, 소득을 보장한다든지 하는 ‘100%의 안전’을 언급하는 약속에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낮은 성공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취하는 데 달려 있다. 27%의 성공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 21일 누리호의 첫 우주 발사가 그랬다. 누리호 겉 표면의 약 80%는 최대 3mm 두께에 불과한 알루미늄 합금판으로 이뤄져 있다. 추진체 탱크의 겉면이다. 두꺼운 종이 한 장 수준의 합금판이 안으로는 대기압 4∼6배의 압력을 견디고 밖으로는 지상 700km까지 비행 중 가해지는 압력과 충격을 견뎌야 한다. 누리호 38만 개의 부품 중 하나라도 이 같은 극한의 조건을 견뎌내지 못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우주 발사는 실패로 돌아간다. 문제는 이런 구조물과 부품을 어떻게 만드는지 세상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용접하는 방법부터 부품을 제어하는 기술까지 직접 찾아내야 한다. 11년 7개월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우주를 상상하며 직접 수많은 시험을 거듭해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 길의 끝, 첫 발사의 성공률은 27%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시도한 국가들의 통계가 그렇다. 미국, 중국, 일본 모두 첫 발사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의 첫 우주발사체 ‘람다 4S’는 4차례 실패 후 5번째 가서야 성공했다. 누리호는 21일 첫 시도에서 73%의 실패 가능성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게임의 룰 체인저가 되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는 길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데는 확실한 성공을 거뒀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에의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이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주도하고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100% 보장된 길이라는 얘기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10-23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정치인들의 ‘기업 병풍’ 활용법정치인이라면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정치인들이 자주 등장하는 장소가 바로 기업 현장이다. 기업 입장에선 현장의 어려운 사정을 살펴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 어려운 장면이 많다. 정치인들이 기업 현장을 자신의 정치 활동 홍보를 위한 배경화면 정도로 여기는 ‘기업 병풍 활용’ 사례를 정리해 봤다. 첫째, 물 들어올 때 노 젓기. 어떤 기업이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거나 이슈가 됐을 때 현장을 찾는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면 배가 쉽게 나가는 것처럼 국민의 관심이 모였으니 주목받기에 좋다. 가물 때 물꼬를 트는 자리보단 물 들어와 배 띄우는 자리가 인기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5월 22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모더나와 백신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백신 수급에 희망이 커졌다. 이 회사 존 림 사장은 귀국 직후인 25일 인천 송도의 회사를 찾아온 더불어민주당 대권 후보를 맞이해야 했다. 이튿날인 26일엔 민주당 최고위원회가 아예 삼바 제2공장에서 회의를 열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위탁생산하는 SK바이오사이언스도 인기다. 지난해 7월 이후 지금까지 정치인들의 방문이 알려진 것만 10번이다. 둘째, 기업에 일 떠넘기기. 한 정치인이 기업 해외 공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방문 전 현장을 답사한 보좌진은 클린룸에 들어갈 때 입는 방진복을 문제 삼았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방진복이 너무 구겨져 볼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기업 직원 하나가 다리미를 구해다가 방진복을 말끔하게 다려야 했다. 난데없이 다림질을 하게 된 그 직원은 ‘내가 여기서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방문자 안내는 기업의 일이지만 정치인의 미디어 노출을 챙기는 건 기업의 일이 아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서슴없이 시키는 것을 우리는 ‘갑질’이라고 부른다. 셋째, 기업 사정은 나 몰라라. 반도체 생산 공장은 각광받는 방문 장소다. 올 5월 한미 정상회담 이후 발길이 더욱 잦아졌다.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안보적 가치가 한층 높아졌기 때문이다. 5월 이후 지금까지 삼성전자 화성과 평택 반도체 공장에 정치인들이 방문한 것은 모두 7차례에 이른다. 한 달에 한 번꼴 이상이다. 반도체 클린룸은 엄격한 룰이 지켜져야 하는 곳이다. 자칫 먼지가 들어가면 불량률이 높아져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최근엔 방역수칙까지 더해졌다. 정작 생산설비를 살펴야 하는 협력회사 관계자들도 쉽게 못 들어가는 클린룸에 정치인과 보좌진이 원할 때마다 들어가 떼 지어 다닌다면 일반 대중의 눈엔 경제 현장을 살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반도체 전문가의 눈엔 황당한 장면으로 비칠 것이다. 방문 일정을 정하는 데 기업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한 정당의 대권 후보는 한 대기업의 생산 공장에 방문하겠다며 하루 전날 밤 일정을 통보했다고 한다. 하나의 단면에 불과할지 모르는 이런 사례들을 문제 삼는 이유가 있다. 의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태도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기업 현장의 어려움을 확인하고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을 기업에 떠넘기거나 갑 행세를 하지는 않는다. 민생을 살피겠다는 의도는 꾸며낼 수 있겠지만 이들이 현장에서 내보이는 태도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진짜 모습은 숨기기 어렵다는 얘기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09-25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플랫폼 기업, 혁신으로 설득하라플랫폼 기업의 독점 문제를 다룰 때 가장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독점이 당장에는 이용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플랫폼 기업들은 시장 점유율이 높아 독점 상태라 해도 소비자들에게 혜택이 있는데 왜 문제가 되냐고 묻는다. ‘국민 메신저’인 카카오톡을 예로 들어보자. 카카오톡의 메신저 시장 점유율은 90%를 넘는다. 건당 20원인 휴대전화 문자를 공짜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 국민이 연결된 메신저를 통해 여러 명이 대화하고 사진과 파일을 편하게 주고받는다. 갑자기 이용료를 받거나 광고로 도배하지 않는 한 ‘독점 카카오톡’과 이용자의 윈윈(win-win) 관계는 계속될 것이다. 오히려 독점이 도움 되는 면도 있다. 모두가 카카오톡에 모여 있는 덕분에 특정인과 대화하려 다른 메신저를 켜지 않아도 된다. 이것을 네트워크 효과라고 한다. 네트워크 효과가 이용자를 옭아매는 록인(lock-in) 효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카카오톡이 이용료를 물리는 순간 모두가 큰 부담 없이 다른 공짜 메신저로 옮겨 갈 수 있기 때문에 적어도 이용자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를 넘겨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카카오는 어느새 택시부터 금융까지 온갖 분야에 진출했다. 계열사만 118곳에 달한다(삼성그룹 계열사는 59곳이다.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해외 매출 비중은 86%에 이른다). 카카오 진출 분야 가운데 택시와 헤어숍, 대리운전 등에선 이미 갈등이 첨예하다. 혁신 혜택 대신 수수료 갈등이 두드러졌다. 카카오의 ‘문어발 확장’이 카카오톡 없이 가능했을까. 전 국민에게 혜택을 안긴 카카오의 혁신이 골목시장에서 수수료 청구서로 되돌아온 셈이다. ‘아마존 저격수’로 이름을 알리며 미국 최연소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에 오른 리나 칸은 이렇게 쉽게 다른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독점 플랫폼 기업의 힘을 ‘지렛대’에 비유했다. 야놀자가 가맹 숙박업소의 정보를 이용해 직접 프랜차이즈 호텔을 운영하고, 쿠팡이 입점 업체의 거래 정보를 이용해 자체 브랜드(PB) 상품을 만들어 전면에 노출시킨다면 이를 혁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카카오가 크고 작은 시장에 속속들이 진출하는 것을 혁신의 혜택으로 볼 수 있을까. 나아가 플랫폼이 몸집을 불릴수록 이용자들이 제공하는 데이터로 기업 가치가 치솟는다. 이 같은 데이터 독점은 새로운 플랫폼 기업의 진입을 막는다. 리나 칸은 이를 ‘진입 장벽’이라고 불렀다. 지렛대와 진입 장벽은 시장 독점에 가깝고 혁신에서 멀다. 지렛대와 장벽을 이용한 아마존의 골목시장 점령을 ‘아마존당하다(amazoned)’라고 표현한다. 국내에서도 ‘카카오당하다’라는 신조어가 공감을 사는 분위기다. 네이버와 카카오 등 플랫폼 기업이 금융시장 등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문턱을 낮춰준 것이 기존 사업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논란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이 역차별은 팍팍한 규제로 숨이 막힌 우리 사회가 플랫폼 기업의 혁신을 인정하고 내어준 소중한 틈새일 것이다. 따라서 그 틈을 통해 혁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혜택을 사회와 나누는 것은 플랫폼 기업이 해야 할 일이다. 불공정, 수수료 장사를 한다는 비판이 누적된다면 혁신에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없애고 일괄적인 규제를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플랫폼 기업들은 지금 혁신과 독점 사이 갈림길에 서 있다. 어디로 갈 것인지 스스로 답을 내놓아야 한다.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09-11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국민들 속 모르는 코로나19 방역 성과 자랑우리는 누군가의 성취를 국가의 이름으로 자랑스러워하는 데 익숙하다.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 1위는 “우리는 ‘방탄 보유국’”이라는 자랑거리가 된다. 그런 마음을 잘 알아서인지 정부는 1년 반 넘게 코로나19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K방역 모범국’이라는 자랑거리를 만들어 냈다. 다른 나라보다 확진자 증가를 잘 막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성취가 공짜가 아니듯, K방역 모범국 유지 비용도 누군가가 고스란히 치러내고 있다. 아이가 동네 체육관에서 운동을 배우다 흥미를 잃어 몇 주 동안 나가지 않았다. 체육관에 들러 그만 다니겠다 말하고 미리 내놓은 몇 달 치 요금을 환불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너무 힘든데 제발 도와 달라”는 관장님의 사정에 마음이 약해졌다. “일단 돈은 묻어 두고 겨울방학에 다시 나갈지 고민해 보겠다”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뒤 체육관에서 확진자가 나왔다. 그 바람에 2주 동안 문을 닫게 됐다. 나는 아이가 체육관에 가지 않았길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손해가 더 커졌을 관장님의 처지에 마음이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확진자 수가 2000명을 넘나들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정부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상황”이라고 후하게 평가했다. 여전히 방역 모범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저임금 인상에 더해 일방적으로 영업제한을 감수하면서 방역 비용을 떠안아야 하는 관장님 같은 자영업자들은 ‘자영업 헬 조선’에 사는 기분일 것이다. 나는 ‘K방역 모범국’에 사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관장님의 ‘자영업 헬 조선’에 안타까워해야 하는가. 지난달에는 잠잠하던 확진자 수가 갑자기 늘어 사람들이 온라인 백신 접종 예약에 몰려드는 일이 있었다. 백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서둘렀다. 하루 30만 명이 사용하도록 만든 시스템에 1000만 명이 몰렸다. 예약 사이트 접속이 안 된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대통령은 “IT 강국인 한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다.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질책했다. 대통령의 질책에 여러 부처와 대기업이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8월 9일 드디어 차례가 와 예약 사이트에 접속했다. 몇 시간 걸려 분통이 터진다던 백신 예약은 5분도 안 돼 초고속으로 마무리됐다. 정부 부처들은 IT 시스템을 개선한 성과를 국민들에게 홍보하겠다며 한데 모여 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정작 3, 4주 뒤여야 알맞다는 화이자 백신 2차 접종 날짜는 6주 뒤로 늦춰져 있었다. 백신 수급 문제 때문이다. 나는 ‘IT 강국’에 사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백신이 부족한 나라’에 사는 걸 아쉬워해야 하는가. 미국에선 인터넷 예약은 고사하고 찾아온 사람 아무나 백신을 맞히고는 종이쪽지에 ‘백신 맞았음’이라 사인해준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나라에서 누구도 스스로 ‘IT 후진국’이라 부르며 창피해하지 않는다. ‘K방역 모범국’ ‘IT 강국’처럼 대한민국에 자랑스러운 이름을 앞세우는 건 좋은 일이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은 함께 위기를 이겨내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국가 리더들이 자랑스러운 이름 앞에만 서려 한다면 곤란하다. K방역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1년 넘게 치르고 있는 자영업자들에게도, 백신 부족을 걱정하며 불편을 감내하는 사람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이름의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08-21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코로나19 급행열차가 바꿔 놓은 기업 풍경몇 년이 지난 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평가한다면 그중 하나는 ‘여러 대의 급행열차가 출발한 시기’로 기록될 것 같다. 개인이 자산을 어떤 형태로 두느냐에 따라 벼락거지가 생겨난 것처럼 기업도 어떻게 사업을 바꾸느냐에 따라 운명이 극적으로 갈리는 시기가 될 것으로 본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국내 대기업은 스타트업을 인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내재 역량으로 기술 흐름을 따라잡거나 스타트업이 만든 시장에 뒤늦게 진입해도 충분히 빼앗을 만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은 한국 창업 생태계의 고질적인 한계로 꼽혔다. 창업가들은 엑시트(exit)할 길을 쉽게 찾지 못한 고립된 혁신가에 머물렀다. 하지만 몇 년 사이 상황은 급반전했다. 유망 스타트업을 인수하려는 대기업이 줄을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외 스타트업을 포함해 대기업들의 인수합병(M&A)은 역대 최대 규모로 치닫고 있다. 동아일보가 리더스인덱스와 함께 분석한 결과 올해 상반기 500대 기업의 M&A 규모는 15조 원에 달했다. 14조4000억 원이었던 지난해 전체 규모를 이미 뛰어넘었다. 현재 진행 중인 M&A가 모두 성사될 경우 총액은 ‘32조 원+알파’에 달한다. 이런 현상은 국내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올 상반기 M&A 규모는 지난해의 3배 이상으로 커진 역대 최대 규모다. 풍경이 바뀐 가장 큰 원인은 코로나19 팬데믹이다. 디지털 전환이 빨라질 것이라는 강한 시그널과 한계기업의 정리가 겹쳤고, 여기에 넘치는 유동성이 더해지면서 변화의 불씨에 휘발유를 부은 격이 됐다. 이 속도와 방향을 맞추지 못한다면 큰 덩치는 의미가 없어졌다. 5대 그룹 소속의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지금 우리 회사의 주요 사업을 판다고 하면 시장에서 얼마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겠나”라고 자조했다. 세상의 속도감이 달라지자 자신의 느린 속도가 두드러진 것이다. 다른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은 “성장 속도가 빠른 기업이나 사업에 투자해 급행열차에 올라타지 못하면 몇 년 뒤 그저 연명만 하는 처지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팬데믹은 또 국제 분업과 통합된 시장 대신 지역주의의 원심력을 강하게 작동시키고 있다. 미국 인텔 반도체 재건에 미국 정부가 지원했고 아마존과 퀄컴이 호응하고 나섰다. 인텔은 4년 만에 2나노 반도체를 만들어 TSMC와 삼성전자를 제치는 초고속 추격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인텔의 세계 3위 글로벌 파운드리 인수 추진 소식이 전해지고 SK하이닉스가 인텔의 낸드 사업 부문을 인수하는 등 시장은 그야말로 지각변동에 들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의 의사 결정 체계는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동아일보 조사에서 M&A 건수 기준 압도적 1, 2위를 차지한 카카오와 네이버는 5년 동안 각각 47개, 30개의 기업을 쓸어 담으며 빠른 속도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200조 원 넘는 유동자산을 손에 쥐고 적극적 M&A를 매번 공언하면서도 2016년 하만 인수 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고민해 온 한계 사업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했다. 의사 결정 체계에 큰 공백이 생기면서 리스크 테이킹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유야 어쨌건 한국의 대표 기업이 급행열차에 오르기는커녕 열차 플랫폼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는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07-31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혁신과 독점, 두 얼굴의 플랫폼 기업10여 년 전 KT 등 대형 통신기업들 사이에선 ‘빨랫줄 장사’라는 자조 섞인 표현이 유행했다. 전국 모든 가구와 개인에게 이동통신과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정작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신기업들은 ‘빨랫줄(통신망)’을 제공할 뿐 그 위에 명품 옷이 걸릴지, 거적때기가 걸릴지 아무 정보를 갖지 못했다. 서비스에 가치를 더하기 어려웠다. 정작 통신망 위에서 인터넷 검색, 온라인 쇼핑, 디지털 콘텐츠 등 서비스를 거의 공짜로 제공하며 마케팅 광고주들 돈을 빨아들인 것은 네이버, 카카오, 구글, 페이스북 등 이른바 플랫폼 기업들이었다. 성패를 가른 것은 바로 소비자 관련 데이터(정보)를 누가 가져가느냐였다. 플랫폼 기업은 막대한 소비자 데이터를 확보한 덕분에 소비자가 무엇을 사고 먹고 기록하는지, 어디로 이동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알고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됐다. 플랫폼 기업의 정보 독식은 플랫폼을 통해 물건과 서비스를 파는 입점 업체를 대상으로도 작동했다. 온라인 쇼핑몰에 입점한 업체들이 고작 주문 내역만 알 수 있다면 플랫폼은 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살지까지 알고 있다. 데이터에서 나오는 디지털 경제 지배력을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손에 쥔 셈이다. 이를 기반으로 금융, 쇼핑, 게임, 택시, 콘텐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진출하면서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소비자들은 모든 서비스가 하나의 접점에서 저렴하게 이뤄지는 혁신의 단맛을 맛보지만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거대 플랫폼으로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장기적인 요금 인상 등 시장 독점 폐해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문제는 혁신과 독점이 플랫폼의 두 얼굴처럼 서로 맞붙어 있다는 점이다. 플랫폼은 독점을 위해 혁신과 투자를 거듭하고, 그 덕분에 (단기간 동안은) 소비자가 혜택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최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수장으로 선임되며 ‘아마존 저격수’로 떠오른 리나 칸 위원장은 자신을 스타로 만든 논문에서 이 같은 문제를 ‘아마존의 반독점법 패러독스’라고 표현하고 아마존 같은 빅테크 독점 폐해는 기존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아니라 성장 자체를 목표로 낮은 가격을 유지하는 아마존은 소비자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소비자 후생 감소를 막으려 설계된 기존 독점금지법으로는 규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칸은 아마존 같은 대형 플랫폼 인프라를 통신망이나 전력망처럼 사회 필수시설로 지정하고 다른 경쟁 플랫폼 기업들이 차별 없이 접근해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도발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칸 임명으로 미 정부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빅테크에 분할 명령을 내릴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는 등 플랫폼 문제 해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일본 등에서도 플랫폼 규제법을 제정하는 등 문제 해결에 나서는 분위기다. 국내에서도 공정거래위원회 등에서 여러 제도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거대 플랫폼과 영세 입점 업체 사이 이른바 갑을 관계의 불공정 계약을 막는 데에서 논의가 그치는 형편이다. 업계에선 중개거래계약서 의무 작성, 계약 기간 일률 제한 등 규제가 플랫폼 혁신 동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반발도 나온다. 플랫폼 문제 해법이 어려운 것은 혁신과 독점이 한 몸처럼 붙어 있다는 데 있다. 독점 폐해를 막되 플랫폼 기업끼리 혁신 경쟁을 보호하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07-10 03:00
[오늘과 내일/김용석]‘우리 편’만 찾는 사람들에겐 미래가 없다딸을 키우는 아빠로서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를 들었다. 한 정보기술(IT) 기업 여성 임원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전 요즘 어린 여자아이를 보면 꼭 코딩을 배우라고 권유해요. 개발자 사회에서 아시안 여성은 희소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글로벌 IT 기업들은 무조건 채용하려고 하죠. 영어를 못해도 상관없어요. 세계 어느 나라든, 살고 싶은 곳에서 좋은 직장을 구해 살 수 있어요.” 글로벌 IT 기업들이 남자 중심 개발자 사회에 다양성(diversity)을 추구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치열한 브레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남자 중에서만 사람을 뽑으면 전체 자원의 절반만 동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같은 성별, 문화를 가진 사람끼리만 모인 조직은 집단적 사고에 따른 실패를 피하기 어렵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미국이 다른 문화 연구에 공들이는 모습을 인상 깊게 지켜본 적이 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동아시아 도서관은 매년 많은 예산을 들여 상당량의 한국 연구 자료를 사 모은다. 정작 한국에선 관심을 못 받고 소실되는 자료도 많다. 당시 그 도서관 한국학 연구 컬렉션의 핵심 테마는 1980년대 운동권 문화와 코리아 디아스포라(이민사회)였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인 자료 때문에 언젠가 우리는 한국 역사를 미국에서 연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UC버클리의 한국 자료는 하버드대에 비하면 크게 못 미치고, 하버드대의 연구 자료 중 한국 자료는 중국 자료에 크게 못 미친다고 한다. 중국을 제대로 연구하려면 베이징대가 아니라 하버드대에 가야 한다는 얘기까지 들어 봤다. 강국들의 힘의 근원을 분석한 책 ‘강자의 조건’은 타 민족과 타 문화를 포용해 다양성을 추구한 것을 핵심으로 꼽았다. 포용을 위해 도입한 공정하고 개방적인 제도도 중요하다. 순혈주의를 고집한 일본과 나치 제국은 몰락했지만 타 민족을 포용한 로마와 몽골은 오래 흥했다는 것.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가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에게 “중국이 언제쯤 미국을 추월할지” 물었다. 리콴유는 “추월할 수 없을 것”이라 답한다. 중국의 인적 자원은 13억에 불과하지만 미국은 (보편적 가치와 개방적 제도를 앞세워 포용한 인구를 합치면) 70억에 달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기업들을 봐도 다양성과 포용이 성공을 가져온 사례는 차고 넘친다. 구글 창업자는 이민자 출신이다. 코로나19 백신을 처음 개발한 독일 바이오엔테크도 터키 이민 2세 부부가 만든 회사다. 인재 제일주의로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고 이건희 회장은 1990년대 초반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대졸 여성 공채를 도입했다. 삼성전자는 지금도 외국인 직원들이 문화적 장벽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프로젝트를 장기간 공들여 진행 중이다. 다양성은 성장은 물론 생존에 필요한 열쇠다. 하지만 역사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포용과 공정, 다양성을 실현한 시대로 평가할지는 의문이다. 고위 공직자들이 ‘우리 편’을 공공연히 말한다. 특정 집단에 ‘친일파’ ‘문빠’ 이름을 붙여 배척하면서 ‘우리 편’ 결집에 활용한다. 그 과정에서 ‘내로남불’이라는 이름이 붙은 잣대가 등장하기 일쑤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럴 바엔 차라리 선출직 공직자도 시험을 봐서 뽑자는 얘기까지 나온다. 인공지능(AI)에 맡기는 게 낫겠다는 자조도 나왔다. 포용하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 사회엔 미래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죽비 소리처럼 들렸다.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06-19 03:00
경제 안보 한 묶음 시대의 생존 전략[오늘과 내일/김용석]쿼드 참여국인 미국과 호주, 일본, 인도를 지도에서 연결하면 남중국해를 지나는 선이 그려진다. 대륙 세력인 중국의 해양 진출을 막는 저지선이다. 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BBC(바이오, 배터리, 반도체) 공급망을 결속하고 첨단기술 동맹을 강화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머릿속엔 이와 비슷한 중국 저지선이 여러 개 그려졌을 거라 생각한다. 먼저 미국과 한국, 대만을 연결하는 ‘중국 반도체 저지선’이다. 회로 선폭 5나노급 최첨단 반도체를 미국에 우선 제공하는 공급망은 중국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는 방어선이 된다. 코로나19 백신을 가진 미국과 바이오 생산 2위인 한국을 연결해 인도태평양 백신 허브를 만들자는 구상을 통해선 이 지역 확장을 노리는 중국의 백신 리더십에 대응하는 저지선을 그릴 수 있다. 미국 내 전기차 공장과 세계 2위 배터리 생산국 한국을 연결하는 공급망은 기후변화 리더십 경쟁에서 전기차를 앞세운 중국의 공세를 막아내는 중요한 방어선이 될 것이다. 미국이 차세대 통신기술 공동개발을 제안한 것은 5세대(5G) 통신 절대 강자인 중국을 둘러싸는 포위선을 그리기 위해서다. 미국은 한국, 일본과 통신기술 동맹을 맺었고, 아프리카와 동유럽에선 화웨이 장비를 쓰지 않는 통신사업자가 중국 편에 맞서 사업권을 따내도록 자금을 지원한다. 한국 BBC와 ICT(정보통신기술) 기업 몸값이 높아진 이유는 바이든 정부 대외 정책 핵심인 중국 저지선을 구상하는 데 딱 들어맞는 퍼즐 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전략적 가치는 한미 협상에서 중요한 지렛대가 됐다. 이런 역할을 한 기업들에 우리 정부가 빚을 졌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기업과 국가의 힘이 하나로 묶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빚졌다고 하기엔 이미 공동운명체다. 지금 상황은 기업의 힘을 키우는 것이 국가의 힘을 키우는 데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음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번 정상회담에 대해 기업인들은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지각변동에 대해선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기업 경쟁력을 높여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문재인 대통령의 머릿속엔 바이든의 구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우리 중심의 연결선이 그려져야 한다고 본다. 먼저 한국 BBC 경쟁력을 지키기 위한 공급망이다. 일례로 한국 반도체 국제 분업에서 일본의 소재·부품·장비는 여전히 중요한 고리 중 하나지만 여러 갈등으로 불안감이 남아 있다. 배터리에선 중국이 쥐고 있는 소재 공급망이 중요한데, 이는 여전히 기업만의 숙제로 남아 있다. 바이오에선 기술이전 협력 구도가 뚜렷하지 않다. 1980년대 한국이 일본을 대신할 반도체 공급망으로 성장했을 땐 미국의 적극적인 기술이전이 이뤄졌었다. 또 하나는 중국 경제에 결속돼 있는 상당수 국내 기업의 생명줄이다. 전문가들은 경제와 안보가 한데 묶이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큰 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본다. 한국 제조업의 탈(脫)중국화가 불가피하다는 예측도 나온다. 주요 대기업을 뺀 나머지 기업 생태계가 이런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은 4대 그룹의 44조 원 투자가 바이든의 “생큐”를 이끌어낸 데 만족할 때가 아니다. 지난 정상회담에서 기업이 정부에 힘을 더하는 걸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정부가 기업에 힘을 더하는 장면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2021-05-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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