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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신한, 함께 미래로’신한이 창업 40주년 만에 종합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40년간 신한을 지지, 응원해준 고객, 주주, 직원, 협력사(퓨처스랩, 스퀘어브릿지 기업) 등이 앞으로도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말단부터 사장까지 대화로 ‘소통팔달’… 조직혁신 DNA 심어 一流기업 도약신한금융그룹 조용병 회장 입사 후 38년간 여러 요직 두루 경험전화녹음으로 인사민원 해결 유명"독창성-도전정신 기반으로 재창업"다짐1980년대 후반. 골치 아픈 인사 업무는 그에게 작지 않은 도전이었다. 당시 조용병 신한은행 인사부 대리는 새로운 실험을 했다. 아무리 인사를 잘해도 은행에서 뒷말이 남기 마련인 법. 인사에서 물먹은 직원들은 인사부 직원에게 원망을 뒤통수에 대놓고 하기도 했다. ‘여기서 오래 일하다간 직원들에게 욕만 먹겠구나.’ 조 대리는 인사 민원을 시스템으로 하는 아이디어를 퍼뜩 떠올렸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인사신문고를 전화로 설치하는 방안이었다. 직원들이 공개적으로 제기하기를 꺼리는 예민한 인사 문제를 전화로 녹음해 남겨두면 나중에 녹음을 듣고 해결 방안을 찾는 방식이었다. 군대에서 말하면 이른바 ‘소원 수리’ 방식으로 전화 녹음 시스템을 이용한 것이다. ‘왜 내가 승진이 안 되나’ ‘내 커리어가 잘못돼 꼬이고 있다’ ‘다른 쪽으로 보내주면 잘할 것 같다’ 등등…대면(對面)으로는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인사 얘기를 전화기에 녹음하라고 하니 많은 직원들이 허심탄회하게 응했다. 조 대리는 전화에 남겨진 민원을 최대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인사담당자가 알지 못하는 직원들의 고충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도저히 안 되는 것은 그 이유를 소상하게 설명해줬다.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리는 직원들도 적지 않았다. 자리와 사람에 대한 미스매치도 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엇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한 지금은 이런 문제를 시스템으로 해결하지만 30년 전만 해도 파격 실험이었다.‘인사신문고’로 직원들 고충에 귀 기울여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당시를 회고하며 “투명한 방식으로 인사 민원을 받으니 직원들의 인사 불만이 확연히 줄어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은행 안에서 ‘엉클 조’로 불리는 조용병식 인사 방식이었다. 조 회장은 당시 인사부 경험이 직원과 조직을 이해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고 털어놨다.그는 미금동지점장과 세종로지점장을 3년 남짓 한 다음 다시 신한은행 인사부장으로 돌아왔다. 2년 남짓 인사부장을 한 뒤 기획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2007년엔 뉴욕지점장으로 ‘해외 물’을 먹었다. 2009년 임원을 달고부터는 자금국제그룹 전무와 경영지원그룹 부행장, 리테일부문장(부행장) 등 영업과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력을 쌓았다. 최고경영자(CEO)가 되기 위한 경영 수업을 차근차근 밟아 올라온 것이다. 물론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인사부장 기획부장 등 요직을 거친 뒤 임원을 달 것으로 기대하던 때 느닷없이 뉴욕지점장 발령이 났다. 잘나가던 리테일부문장(부행장)에서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사장으로 선임되면서 주류에서 밀리는 듯하기도 했다. 2만9000명 이끄는 행원 출신 첫 CEO그는 신한금융그룹에서 행원 출신의 최초 CEO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대전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84년 신한은행에 입행했다. 1982년에 신한은행이 출범했으니 두 살짜리 은행에 문을 두드린 것이다. 당시 은행은 공공기관이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조상제한서’가 네이밍이 돼 있던 때였다.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의 첫 글자를 딴 ‘조상제한서’가 금융계를 지배했다. 거대 공룡과 같은 시중은행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한발 더 뛰고 부단한 혁신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창업 40년을 맞는 올해 조 회장은 38년을 신한과 함께했다. 2015년 신한은행장에 선임된 2년 후인 2017년 신한금융그룹의 총사령탑인 신한금융지주 회장에 올랐다. 은행장 선발을 위한 프레젠테이션에서 그는 ‘GPS’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Global, Platform, Segmentation의 약자다. 조 행장 취임 후 베트남과 일본 진출 등으로 국제화가 가속화됐고, 은행 영업은 IT를 기반으로 시장을 세분화하는 데 성공했다.신한금융그룹 내에서 조 회장은 ‘엉클 조(Uncle Cho)’로 통한다. 누구와도 편하게 소통하는 ‘삼촌’ 같은 리더십으로 사원에서부터 행장까지, MZ세대부터 586세대까지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쌓으면서 소통하고 있다. 지난해 신한금융그룹의 문화포럼 이후 모든 사내 회의에서 공식 호칭은 직함이 아닌 별명으로 불린다. 회장님 대신 ‘엉클 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직원들과의 대면 접촉이 쉽지 않을 때에도 ‘엉클 조’는 사원과 대리급의 오피니언리더그룹, 여성리더그룹과 소통을 이어갔다. 2년 동안 조 회장은 35회, 모두 295명과 언택트로 만남을 이어갔다. 자신의 경영 방침과 철학을 설명하고 현장의 생생한 의견을 듣기 위한 노력이다. 심지어 유럽 출장 중 시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 시간에 맞춰 직원들과 얘기를 나눴다. 현장 목소리 듣는 회장님은 ‘엉클 조’그는 경영진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이다. 최근 조 회장은 그룹 계열사 CEO 및 신한금융지주 임원들과 함께 구간별로 조를 나눠 북한산 둘레길을 완주했다. 행원부터 계열사 사장까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경청하고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면서 ‘원 팀’으로 똘똘 뭉쳐 나가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매일 아침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조 회장은 마라톤 풀코스를 11번이나 완주할 정도로 마라톤광(狂)으로도 알려져 있다. 평소 직원들에겐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한다.조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도전을 상징했던 지난 40년 역사를 모두의 자부심 삼아 일류를 향한 재창업의 각오를 함께 나누자”고 역설했다. 1982년 ‘새로운 금융, 따뜻한 금융’을 갈망하면서 등장한 신한이 이제 40년을 넘어 100년을 준비하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38년 전 한 젊은 행원의 꿈은 고객과 사회에 울림을 던지면서 2만9000명의 임직원들과 함께 일류 금융그룹으로 향하고 있다. 창업 때 ‘고객중심 금융보국(報國)’ 정신을 조 회장은 ‘일류(一流)’라는 콘셉트로 바꾸고 있다. 조 회장은 “일류 기업은 고유한 역사와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영속적이고 도전적이고 독창적이며 명예로운 가치를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2년 전 신한금융그룹의 중기 전략 ‘FRESH2020s’를 수립한 것도 일류를 향한 그의 다짐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이다. Fundamental, Resilience, Echo System, Sustainability, Human-talent의 앞 글자를 딴 이 전략은 신한금융그룹이 나아갈 길과 가치를 명확하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계열사 전직원 ‘혁신ON’ 위한 리부팅지난해 7월 7일 신한금융그룹의 혁신을 시작하는 새로운 단어가 임직원들에게 울려 퍼졌다. RE:boot. 컴퓨터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켤 때 리부팅되는 것을 아이디어로 삼은 슬로건이다. PC를 켤 때 손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하지만 명확한 사인을 통해 신한금융그룹 16개 계열사 임직원 모두에게 혁신이라는 변화의 알람이 켜진 것이다.신한금융그룹 문화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대전환’이란 새롭게 일을 바꾸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세대,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맞게 조직 문화의 패러다임을 움직이는(Paradigm Shift) 것을 의미했다. 조 회장은 이를 ‘문화대전환’이라고 명명(命名)했다. “2001년 지주회사 설립과 함께 설정한 비전이 ‘월드클래스 파이낸셜그룹’이었습니다, 이후 가파른 성장을 일궈냈지만 고객 및 사회와 함께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하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흔히 다른 회사에서 하는 것처럼 외부 컨설팅 회사는 쓰지 않았다. 대신 실무자 중심의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고객과 직원 등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모아 담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더 쉽고 편안한 더 새로운 금융’이라는 비전이었다. 여기에 일상의 기준이 될 핵심 가치로는 ‘바르게, 빠르게, 다르게’로 설정했다.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이다. “차별성 낮추는 것들은 버려라”신한금융그룹의 문화대전환을 역설한 조 회장은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취할 것은 새롭게 서둘러 장착하라”고 주문했다. 앞으로의 40년, 나아가 신한금융그룹 100년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선 취사선택(取捨選擇)이 절실하다는 위기감을 최고경영자는 몸으로 느꼈다.비즈니스 체계의 다변화와 세대 구성의 다양화, 디지털의 가속화, ESG(환경·사회적 책임·지배구조)경영 시대 도래 등 조 회장의 38년 근무 기간 동안 겪어보지 못한 복잡다단한 위기 요인들이 거대한 파고로 덮칠 기세를 직관적으로 체감했다. 조 회장이 과감하게 버리라며 ‘Delete’ 키를 지시한 것은 무엇일까. “내부 관점에서 바라본 업무 프로세스와 직원들의 자부심을 무너뜨리는 요인들, 차별성을 희석시키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과감하게 떨쳐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조직의 활력을 좀먹는 것이죠.”반면 새롭게 장착(Reload)해야 할 가치들로 조 회장은 ‘창업 당시 가졌던 고객 중심의 초심’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직원들의 창의성과 주도성, 미래를 향한 과감한 도전 정신을 주문했다. 버릴 것과 새롭게 얹어야 할 것을 가르는 기준은 고객의 요구라는 한 가지에 모아졌다. 고객의 요구와 행복에 모든 의사결정과 프로세스를 정렬해야 한다고 조 회장은 촉구했다. 직관보다 데이터-실무자에 힘 실어줘조 회장은 소수 리더의 직관으로 조직이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한곳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고 리더의 직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대신 많은 경영 의사결정 과정에서 생생한 데이터와 실무자의 의견에 귀 기울인다. 현장의 목소리로 의사결정의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유연하고 빠른 의사결정 체계를 만들기 위해 ‘Speed(속도)와 Agility(유연성), Quickness(민첩성)’를 그룹 계열사들의 조직 구성에 적용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 신한금융그룹 사옥 로비에서는 조 회장의 현장중심 경영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조 회장은 ‘생각과 행동을 현장 속으로, 바르게 빠르게 다르게!’라는 구호로 셀프 리더십을 설정했다. 행원에서 출발해 신한금융그룹 최고사령탑이 되기까지 갖은 우여곡절에도 그를 지탱한 것은 ‘큰형님’ 같은 리더십이었다. 40년을 맞은 지금 신한금융그룹에서 조 회장이 헤쳐 나가야 할 과제도 만만찮다.순혈주의 버리고 외부 수혈 보강 과제극복해야 할 점으로 조직의 순혈(純血)주의가 꼽힌다. 경쟁 은행에 비해 순혈주의가 강한 것은 보완해야 할 대목이다. 신한금융지주엔 회계 책임자 등 일부를 제외하곤 내부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메기’ 같은 외부 인재가 들어와 조직을 보다 활력 있게 할 필요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신한금융그룹 자회사 사장 16명 중 7명이 외부에서 스카우트됐지만 핵심 인력의 외부 수혈은 보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신한 사태’를 겪으면서 한창 일을 할 중간 라인이 쇠약해진 부분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조 회장이 미래의 기준으로 삼은 디지털은 은행의 ‘SOL’과 카드사의 ‘pLay’로 고객친화적인 앱으로 평가받는다. 배달앱과 헬스케어 등 일상 전반으로 신한의 디지털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오늘 40주년 생일을 맞이한 신한금융그룹의 모태(母胎)인 신한은행이 또 한번 비상(飛上)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출발선상에서 조용병호(號)가 용틀임을 하고 있다.조용병 회장은…1976년 대전고 졸업 / 1981년 고려대 법학과 졸업1984년 신한은행 입행 / 2000년 헬싱키경제대 대학원 MBA2000년 신한은행 세종로지점장 / 2002년 신한은행 인사부장2004년 신한은행 기획부장 / 2006년 신한은행 강남종합금융센터장2007년 신한은행 뉴욕지점장 / 2009년 신한은행 전무2011년 신한은행 부행장 / 2013년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사장2015년 신한은행장 / 2017년 신한금융지주회사 대표이사 회장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2-07-07 03:00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윤종규 KB금융 회장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에게는 회장님 분위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2014년 11월 KB금융지주 회장 자리에 오른 뒤 2017년 연임에 성공하고, 2020년에 3연임을 통과했지만 주변에선 ‘회장님’ 같은 엄숙함이나 권위감은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광주상고 출신으로 외환은행에 입행한 뒤 야간 대학을 다니며 주경야독(晝耕夜讀) 끝에 공인회계사와 행정고시에 합격한 경력은 ‘흙수저’ 성공 신화로 불릴 만하다. 윤 회장은 한마디로 ‘폼을 잡는’ 회장님과는 거리가 멀다. 회장 집무실에 보고를 하러 들어간 임직원들은 윤 회장의 몸에 밴 겸손함에 깜짝 놀란다. 보고를 하러 집무실에 들어가면 언제나 문 앞으로 먼저 나와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고, 보고 후 집무실을 나올 때도 사무실 밖에까지 나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한다. 하루에 수없이 많은 보고가 올라오지만 윤 회장의 이런 자세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멈추지 않은 도전人生그는 1974년 광주상고를 졸업하고 고졸 행원으로 외환은행에 입사했다.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야간으로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입학 후 7년 만인 1982년에 성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은행원과 야간 대학생 생활을 병행하면서 공인회계사(CPA) 시험에 합격했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후 은행원에서 삼일회계법인 회계사로 자리를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웠던 1970년대 중후반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머리에 타고난 성실성으로 회계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삼일회계법인 회계사로 자리를 옮긴 후 이듬해인 1981년엔 25회 행정고시에 합격한다. 야간대학생 졸업반 때 CPA에 이어 행시까지 합격했으니 얼마나 성실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위 전력(前歷)이 행정 관료의 길을 가로막았다. 회계사의 길을 택한 것은 앞으로 걸을 길에 대한 숙명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삼일회계법인 전무와 부대표까지 회계사라는 한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야간이던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과에서 석사과정에 합격해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군 제대 후 재무부 사무관으로 일하던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현 한미협회장)과 함께 대학원을 다녔다. 최 전 장관은 “당시 함께 공부한 윤종규는 아주 성실하면서도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언제 배웠는지 영어와 일어 독일어에도 능숙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 석사과정에 입학하려면 독일어가 필수였는데, 회계사를 하면서 야간 대학을 다니던 그가 언제 제2외국어까지 준비해 입학시험에 통과했는지는 성실함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경영학 박사 딴 뒤에 다시 방송대 법학과로일하면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그는 삼일회계법인 전무 시절 성균관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상고를 나와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그리고 바쁜 회계사 생활을 하면서도 경영학 석사와 박사를 모두 야간으로 학위를 딴 것이다. 최 전 장관은 “윤 회장은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며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르면 노력을 멈출 법도 한데 그는 꾸준히 쉼 없이 노력하는 스타일이다”고 귀띔했다. CPA를 하면서 법률 공부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경영학 박사를 딴 뒤에도 방송대 법학과에 진학해 법을 전공했다. 학업에 대한, 새로운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가 없으면 통상의 이력서에서는 보기 드문 학력(學歷)이다. 이 같은 성실과 노력, 그리고 뛰어난 머리는 금융계에서도 화제가 됐다. 지금은 작고한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은 2002년 3월 그를 국민은행 재무기획본부장(부행장)에 스카우트했다. 주택은행과 합병해 국민은행으로 거듭난 은행에서 순혈주의를 깨고 외부의 피를 수혈한 것이다. 국민은행 개인금융그룹 대표를 지낸 뒤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일하던 그에게 2010년 다시 KB금융지주 최고재무책임자(CFO) 자리에 발탁됐다. 회장과 행장의 갈등의 골이 깊어 ‘KB 사태’라는 갈등과 후유증으로 조직이 어수선했던 2014년 11월부터 KB금융지주 회장을 8년째 맡고 있다. 부행장 재직 때부터 그는 출퇴근할 때 직원들과 경비원들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권위와는 거리가 먼 따뜻한 선배로서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KB금융 타운홀미팅, 현장과의 소통에 힘써윤 회장은 취임 후 국민은행을 포함해 전 계열사를 방문해 타운홀 미팅을 열어 직원들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타운홀 미팅의 주인공은 회장이 아니라 직원들이다. 회장이 미팅을 이끌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직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윤 회장이 즉석에서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고객과 직접 마주치는 직원들에게 영업전략과 인력 양성, 시너지 등 다양한 주제로 얘기가 오간다. 콜센터 근무 직원이 타운홀 미팅에서 유튜브 채팅창을 통해 상담 업무에 대한 고민을 올리자 윤 회장은 “단순 작업은 챗봇이나 보이스봇 같은 AI(인공지능)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고 콜센터의 근무 환경을 개선해 위상과 역량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답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타운홀미팅이 끝난 뒤에는 윤 회장이 추천도서 5권을 직원들에게 선물하고 직원들과 함께 셀카를 찍으면서 격의 없는 소통을 한다. MZ세대 직원들과는 e-소통라이브, 점심도시락 미팅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격의 없는 소통으로 수평적이고 유연한 조직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KB금융은 MZ 세대 직원들이 경영진 마인드로 고민하고 회사 경영에 제언하는 ‘그룹 주니어보드’도 운영하고 있다. 윤 회장은 여기에서 MZ 세대를 만나 젊은 직원들의 생생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경영진의 얘기도 전달하고 있다. 윤 회장은 “미래의 CEO라고 생각하고 그룹을 이끈다면 어떻게 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해 미래의 경영자를 육성하는 것이 주니어보드의 목적”이라고 했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 발굴하는 이색적인 스포츠 마케팅윤 회장의 사람 중심 경영은 스포츠 마케팅에서도 엿보인다. 스포츠 선수를 육성하고 지원할 때 가장 큰 원칙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 발굴과 저변 확대가 필요한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후원하면서 꾸준히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다.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중장기적으로 긴 호흡을 갖고 선수들을 후원하는 것이 독특하다. 2006년 피겨의 김연아를 시작으로 지금은 피겨에서 차준환, 유영, 김예림, 이해인, 임은수, 신지아를 후원하고 쇼트트랙 최민정, 컬링 국가대표팀, 봅슬레이 원윤종, 서영우, 스켈레톤 윤성빈,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등을 후원하며 대한민국 동계스포츠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KB금융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골프와 수영과 육상, 기계 체조 등 기초 종목에서 차세대 유망주를 중심으로 하계 스포츠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비인기 종목을 중심으로 무명 시절부터 후원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시키는 차별화 전략이다. 윤 회장은 이들의 생일에 피규어 수제 케이크와 축하카드를 보내고 때때로 보양식을 전달하기도 한다. 전화나 카톡으로 소통하면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는 세심함도 엿보인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경영자, 그러면서도 소외된 그늘을 보듬는 일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윤종규호(號) KB금융그룹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이유다.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2-05-30 03:00
‘한국의 워런 버핏’박현주 미래에셋 창업주 겸 회장강의실 대신 명동 증권사 찾던 대학생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1970년대 후반 대학생 박현주는 서울 명동 거리를 자주 드나들었다. 대학교 경영학과 강의실 수업은 따분하고 지루했다. 대신 어머니가 준 용돈으로 주식투자를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명동 증권사 객장을 찾아다니면서 실전 투자를 하는 게 강의실에서 듣는 교수님 수업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눈앞에서 돈이 왔다 갔다 하는 짜릿한 게임이었다. 투자한 기업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었다. 어느 하루 대학생 박현주는 ‘사자’ ‘팔자’로 정신이 없는 명동 객장을 뒤로 한채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학생! 거기 똑바로 서 봐”라며 박현주를 불러 세웠다. “네? 저요?”회색 승려 옷을 입은 스님은 박현주를 명동 한복판에 세워놓고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곤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곤 홀연히 사라졌다. “너는 앞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도록 해라.”대학생 박현주가 강의실 대신 증권사 객장에서 주식 투자에 열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름도 모르는 스님의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순간이 아니었나’ 하며 박현주는 당시를 기억한다. 대학생 때 꿈은 공인회계사대학생 박현주의 꿈은 공인회계사(CPA)였다. 당시만 해도 경영학과에 다니면 CPA를 목표로 하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도 괜찮고, 수입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3년 동안 CPA 공부를 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회계학은 할 만했는데 상법 등 법 관련 과목은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회계학 외에 통계학 재무관리 인사관리 조직론 등에 더 흥미가 많았다. 요즘도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통계를 눈여겨본다. 통계청의 인구센서스 발표 자료를 보면서 한국의 미래상을 그려보곤 한다. 많은 것이 통계, 그러니까 수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CPA 시험에는 낙방했지만 당시에 배운 회계학은 박현주가 증권사에 다니고, 이어 창업을 결심하고, 나아가 기업을 확장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같은 재무제표(財務諸表)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좋은 경영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그에겐 늘 돈이 따라붙었다고려대 재학 시절 하숙을 하던 박현주에게 하숙집 선배가 어느 날 툭 던진 말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현주야, 너 관상(觀相)을 봐줄 테니까 나중에 돈 벌면 나한테 10분의 1만 줘라. 너 얼굴 자세히 보니까 돈 아주 많이 벌겠는데?”선배는 당시 주역(周易)에 푹 빠져 있던 사람이었다. “네? 아이고, 무슨 말씀이세요? 나중에 취직해서 저 먹고살기 바쁠 텐데요 뭘.”그러곤 웃어넘겼다. 박 회장은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청년 시절 이 두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명동에서 스친 그 스님은 박현주의 직업을 정해준 셈이고, 하숙집 선배는 그가 백만장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박 회장은 “돌이켜보면 내가 증권사에 취직하고 나아가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이라고 예언이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고 회고했다. 박현주에겐 ‘투자의 귀재(鬼才)’라는 표현이 늘 따라붙는다.“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는 얘기도 박현주에겐 수식어나 다름없다.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한지 5년 만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을 달았고, 입사 10년 만에 강남본부장으로 전국 최연소 이사가 됐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아직도 이 기록을 깬 증권맨은 없다. 주식을 사고파는 매매 실적인 주식약정은 전국 1위에 항상 박현주라는 이름을 올릴 1990년대 중반 그는 잘나가던 증권사에 돌연 사표를 던졌다. 인생의 멘토였던 김재철 회장 만류에도…39세 때였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지극히 아끼던 박현주의 사표를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의 사표를 말릴 수 없었다. “회장님, 지금 회사를 나가지 않으면 영영 봉급쟁이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흔이 되기 전에 창업해서 제 회사를 갖고 싶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평생 후회하면서 산다면 행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박현주는 당시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 구재상(현 케이클라비스 대표)과 서초지점장이던 최현만(현 미래에셋증권 회장)과 함께 동반 사표를 냈다. 이들은 창업 동지이자 ‘박현주사단(師團)’으로 불렸다. 구재상은 운용의 베테랑이었고, 최현만은 관리의 달인(達人)이었다. 이렇게 3인방은 잘나가던 직장을 뿌리치고 힘을 합쳐 창업이라는 미지의 길로 들어섰다. 샐러리맨으로선 최고의 전성기에 창업을 택한 역(逆)발상이었다. 동원증권은 이들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1년 이상 퇴직금도 지급을 미루는 등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7명 직원 압구정에 투자자문사 차려출발은 단출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인 압구정동에 조그만 투자자문 회사를 차렸다. 직원은 달랑 7명이었고, 자본금 100억 원짜리 회사였다. 자본금은 박 회장의 퇴직금과 사재(私財)를 털었고, 박현주라는 이름을 믿고 외부에서 투자한 돈도 들어 있었다. 회사를 창업한 뒤 행운인지 불행인지 외환위기라는 유래 없는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졌다. 원화가치가 곤두박질치고 금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치솟았다. 부도나는 회사가 잇따르고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잘린 샐러리맨들이 넘쳐났다. 가장이 직장을 잃으면서 무너지는 가정도 잇따랐다. 주가가 폭락하고 아파트 값도 폭락했다. 부도난 대한민국의 현주소였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상징이던 대우그룹이 마침내 무너졌다. 당시만 해도 고금리 수익증권을 팔던 투자신탁회사의 부실은 곪을 대로 곪은 상황이었다. 모두 내 돈이 어떤지,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아야 했다. 이 모든 위기가 박현주에겐 오히려 기회였다. 투자의 패러다임을 바꿀 절호의 찬스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투자신탁회사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는 무렵 ‘투명한 자산운용’을 내걸고 뮤추얼펀드 돌풍을 일으켰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현주펀드’를 선보였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증권사 객장에서 개미군단을 상대하던 그가 이제는 직접 투자가 아니라 간접 투자로 돌아설 때라고 역설했다. 박현주는 서울 조선호텔을 시작으로 부산 서면의 롯데호텔, 광주 파크호텔, 대전 유성호텔 등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면서 투자설명회에 직접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왜 지금 뮤추얼펀드인지, 내 돈을 누가 운용하는지 투자자들이 알아야 하는 펀드매니저 실명제 바람이 이때부터 불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길거리를 가다보면 돈이 발길에 툭 차일 정도로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투자의 패러다임이 급속히 바뀌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만큼 기회가 많았을 때였지요.”조그만 자문사로 출발해 인터넷증권사로 시작한 미래에셋증권은 출범 17년 만인 2016년 여의도 자본시장의 부동(不動)의 1위이던 대우증권을 인수해 자본시장의 ‘메기’가 됐다. 터를 먼저 보는 박현주의 대체 투자자본시장에서 박현주는 주식과 펀드의 대명사였다. 주식브로커로 출발한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주식 투자의 달인이었다. 개별 종목 투자의 위험이 커지면서 개인투자자들이 펀드로 갈아타야 한다면서 내놓은 것이 뮤추얼펀드 1호인 ‘박현주펀드’였다. 자산운용사 설립에 이어 SK생명 인수로 미래에셋생명을 만들고, 이어 대우증권을 인수했다. 미래에셋금융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면 증권 보험 자산운용 등 3대축으로 짜여 있다. 하지만 박현주가 부동산을 보는 눈은 매의 눈처럼 매섭다. 지금은 해외 부동산과 호텔에까지 투자하면서 포트폴리오 범위를 넓히고 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박현주 회장의 부동산 투자는 풍수(風水)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풍수지리라는 것은 땅의 이치에 기반한다고 믿는다. 좋은 땅의 기운이 좋은 자리를 만들며, 같은 땅이라도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곳은 좋은 터가 아니라고 한다.“잘 모르는 사람들은 풍수를 주술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가의 관점에서 보면 풍수는 과학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옥 터를 잘못 정하는 바람에 낭패를 본 기업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죠. 비즈니스를 하면서 제 자신도 풍수에 대한 공부를 꽤 했습니다. 미래에셋 부동산의 역사도 여기서 비켜가지 않았습니다.”뮤추얼펀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2000년 초반 박 회장은 미래에셋 사옥을 서울 여의도 옛 주택은행 본점 건너편의 한국유리 빌딩으로 정했다. 한국의 맨해튼 격인 여의도는 지기(地氣)가 센 탓에 대로변에 위치한 사옥들은 풍파가 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의도 국회를 바라보는 쪽에 들어선, 대로변에 위치한 많은 금융회사들이 부도가 나거나 문 닫는 사례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미래에셋의 첫 사옥인 한국유리 건물은 대로변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앞서 미래에셋은 서울 강남의 삼성동에 있는 빌딩을 샀다가 서둘러 매각한 전력이 있었다. 박 회장이 보기엔 건물은 좋았지만 사무실용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미래에셋 본사 부지는 옛 주전소(鑄錢所)지금 본사가 있는 서울 을지로의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은 청계천을 바라보는 입지로 과거 주전소(鑄錢所) 터였다. 청계천 공사가 진행될 무렵 매입한 이곳에 빌딩을 세우고 비즈니스를 한 이후 미래에셋의 사업은 번창 일로를 걸었다. 동전을 찍어내는, 다시 말해 돈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던 만큼 돈 벌기엔 딱 좋은 부지라고 한다. 물론 이 결정은 박 회장이 직접 내렸다. 박 회장은 당초 센터원 빌딩 36층에 있는 회장 사무실의 책상이 청와대를 마주 보는 쪽으로 배치된 것을 보고 청와대를 비껴 옆으로 좌석 배치를 바꾸었다고 한다.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전망으로선 좋을지 모르지만 강한 기운에 압도될 수 있어 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서울 광화문 포시즌호텔은 처음에 사옥 부지로 활용하려 했지만 박 회장이 호텔 부지로 바꾸었다. 입지상 오피스로 사용하기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래에셋의 사옥 입지를 결정할 때는 이처럼 창업주인 박 회장이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난 후 여러 조언을 받아 최종적으로 이뤄졌다. 남해안을 나폴리 같은 아름다운 해양도시로요즘 박 회장은 틈날 때마다 강원 홍천과 전남 여수 경도, 남해안과 동해안 등지를 둘러보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탐색하고 있다. 해안을 낀 곳에 새로운 해양 도시를 설계하는 꿈을 꾸곤 한다. 서울이 아닌 동해안이나 남해안 등지에 외국인학교나 국제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육 인프라를 지방으로 분산하면 자연스레 수도권 중심에서 벗어나 지방과의 균형 발전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여수에서 거제까지 남해안을 자동차로 드라이브하면 유럽의 어느 해변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마치 나폴리 같은 곳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죠. 이런 아름다운 천혜 관광자원을 잘만 개발하면 지역 주민들이 수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는 관광 수요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요. 정부가 균형발전 지방분권 얘기만 할 게 아니라 잘 개발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획기적으로 해야 합니다.”아들과 두 딸 자신의 삶 개척해야미래에셋은 올해 창립 사반세기를 맞았다.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로 창업한 지 어느덧 2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창업 당시 39세던 박 회장은 이젠 60대 중반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하는 대규모 기업집단 서열에 미래에셋그룹은 20위다. 재벌로 출발하지 않은 회사로 이처럼 고속 성장을 한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박 회장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미래에셋을 100년 기업으로 키워야 할 토대를 만들어놔야 하기 때문이다. 슬하에 두 딸과 아들 등 3남매를 둔 박 회장은 세습경영을 하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상태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세습을 하는 한국 재벌 오너 2세와 3세 등 후세를 보면서 이들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해 왔던 것이다. 두 딸과 아들에게는 주식을 물려주지만 경영에는 직접 간여하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대신 1년에 두어 차례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해 대주주로서 경영권 참여에 국한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재벌 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장점을 딴 ‘미래에셋식 경영’이다. 과감한 세대교체로 샐러리맨 신화 만들 것많은 인재들이 서로 경쟁해 회사의 전문경영인이 되는 문호를 활짝 열어놓으면서도 전문경영인이 오래하는 폐단을 줄이기 위해 대표이사 정년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재벌 체제는 지양하면서도 재벌 총수가 물러나면 그를 보좌하던 중역들도 자연스레 물러나는 한국 재벌의 과감한 세대교체의 장점을 본받겠는다는 생각이다. 박 회장은 대표이사에 대해 정년제도를 도입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생각이다. 대표이사에 정년제를 도입하면 임원들도 자연스레 정년제에 해당할 것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정착될 것이라는 기대다. 지난해 말 박 회장은 과감한 세대교체 인사를 단행했다. 젊은 피가 자연스레 조직에 수혈됨으로써 미래에셋을 보다 젊게 가져가야 할 적기로 판단한 것이다. 미래에셋을 100년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유능한 샐러리맨 출신들이 그룹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기회를 대외적으로 공표한 셈이다. 젊은 피들이 꾸준히 미래에셋을 노쇠하게 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100년 기업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박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이를 위해 박 회장을 비롯한 창업 세대들은 뒤로 서서히 물러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한국 기업과 금융회사에서 전문경영인 체제가 오히려 조직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역동성을 저해하는 경우가 적잖았습니다. 재벌 체제의 좋은 점은 따오고 전문경영인 시스템의 장점도 배합해 미래에셋만의 새로운 지배구조를 만들어 나갈 생각입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2-04-04 03:00
박현주 신화 이어갈 ‘전문경영인 회장 1호’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포하면서 제1호로 찍은 사람은 그의 오른팔과 마찬가지인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수석부회장이었다. 미래에셋의 대표 회사인 미래에셋증권을 이끌게 된 최현만 회장은 박 회장이 동원증권을 박차고 나올 때 미래를 같이 약속한 창업 동지였다. 박현주사단으로 꼽히는 최현만은 관리를 전담했고, 구재상은 운용을 도맡으면서 창업주 박현주와 명운을 같이하는 사이가 됐다. 2012년 말 구재상이 자신의 사업을 위해 케이클라비스투자자문사를 설립하려고 사표를 던졌을 때도 최현만은 꿋꿋이 미래에셋을 지키면서 박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회사 명운 같이한 창업 3인방 한 축1990년대 후반 회사를 만든 지 얼마 안 돼 박현주는 최현만 구재상과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창업 동지들과 함께 미래에셋을 글로벌 회사로 키우겠다는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위한 여행이었다. 회사의 앞날을 서로 얘기하고 미래에셋의 청사진을 그리면서 제주도에서 휴식도 취할 겸 영화 감상을 하고 운동도 하면서 3박 4일을 보냈다.이 여행이 각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세 사람이 박 회장을 중심으로 창업 멤버로 서로를 인식했다는 사실이었다. 회사 설립 초기 여행 중 골프 라운딩을 하면서 구재상이 제주 오라컨트리클럽에서 홀인원을 하는 경사를 맞았다. 박 회장은 당시 “미래에셋 앞날에 운수가 대통할 조짐”이라고 했고, 홀인원 당사자인 구재상은 한라산을 배경으로 엎드려 큰절을 했다. 미래에셋 창업세대들 사이에선 제주도 홀인원이 두고두고 회자(膾炙)됐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미래에셋 비즈니스는 날로 번창했다. 특히 구재상이 이끄는 미래에셋의 운용 부문에서 뛰어난 성과는 여의도 증권가를 압도했다.주식 브로커 시절 펀드매니저 등 거래업체를 접대하느라 밤새 술을 마셔야 했던 기억이 남아 있던 박현주 회장은 여의도를 장악한 미래에셋자산운용 펀드매니저들에게 술 접대나 향응을 일절 받지 못하도록 엄명했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까지 술 접대를 해야 했던 쓰라린 기억을 자본시장 후배들에게는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미래에셋자산운용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래에셋 포트폴리오에 편입된 상장 대기업들은 자본시장에서 미래에셋의 강력한 파워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구재상이 운용에서 탁월한 성공을 거두는 사이에 박 회장은 해외를 누비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미래에셋 진출 발판의 기틀을 닦았다.박 회장이 전문경영인 회장 체제 1호로 최현만을 발탁한 데는 깊은 숙려(熟廬)가 있었다. 처음엔 창업 세대의 퇴진을 염두에 두고 미래에셋의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으려고 했던 박회장은 전문경영인 회장 1호로 누구로 할지 고심을 거듭했다.‘100년 기업을 만들기 위해선 4분의 1 능선을 넘어서는 지금이 세대교체의 적기다. 조직을 역동적으로 만들기 위해선 젊은 피가 전면에 나서야 할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 박 회장으로부터 차세대 주역들을 발굴하라는 얘기를 들은 최현만은 각사 대표이사들에게 자신들을 대체할 인재 풀을 3배수가량 만들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최 수석부회장 또한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차세대 인재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최현만은 미래에셋 신화의 주역으로 박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좌한 평생의 동지였다. 1997년 회사 창립 후 그가 맡은 대표이사 직책은 손가락에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다. 1997년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 1999년 미래에셋벤처캐피탈 대표, 1999년 E*미래에셋증권 대표(이후 미래에셋증권으로 개명), 2000년 미래에셋증권 대표, 2007년 미래에셋증권 총괄대표이사 부회장, 2012년 미래에셋생명 대표이사 수석부회장, 2016년 미래에셋대우 대표이사 수석부회장 등이 그가 갖고 있는 명함이다.관리에 집중하며 세대교체 징검다리미래에셋그룹 내에서 최현만은 박 회장에 이어 ‘넘버2’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 왔다. 박 회장을 어느 자리에서나 깍듯이 모셨고, 창업 동지라고 함부로 대하는 일도 없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박 회장을 대신해서라면 국회든 정부 부처든 청와대든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최현만이 미래에셋그룹의 관리에 집중한 덕분에 박 회장은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1년의 절반을 해외 비즈니스로 돌아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는 시스템으로 만들게 됐다. 박 회장은 기업 경영에 아들과 딸을 참여시키지 않기로 한 대신 최현만을 회장으로 발탁했다. 세대교체라는 큰 흐름 속에 막판 고심 끝에 최현만을 낙점한 데는 샐러리맨으로서 최고경영자의 꿈을 실현시키는 데는 그만한 상징적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샐러리맨 출신 CEO의 상징적 인물“한국 재벌 경영의 문제점은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 해서 자식 세대가 고스란히 물려받는 구조입니다.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비즈니스라고 무조건 물려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미래에셋은 전문경영인들이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수한 샐러리맨이 사장이 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어야 천하의 인재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그래야 미래에셋이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해 100년 기업으로 존속할 수 있습니다.”박현주 회장은 일찌감치 경영의 많은 부분을 계열사 대표이사들에게 일임해 오고 있다. 자신은 그동안 그룹 차원에서 큰 거래를 결정해야 할 때 최종 결심하는 선에서 경영을 하는 정도다. 창업 당시 박 회장은 최현만을 창업 동지로 삼으면서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가 지닌 성실과 노력, 근면, 신뢰를 높이 산 것이다. 미래에셋에서 함께한 지난 25년 동안 최현만은 박 회장의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서울 중구 을지로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 36층에는 회장 집무실이 있다. 박 회장은 수년 전부터 이 사무실을 최 수석부회장에게 쓸 것을 권유했지만 최현만은 한동안 비워놓았다. 그의 집무실엔 ‘호랑이는 앓은 듯이 걷고 있고 독수리는 조는 듯이 앉아 있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25년 전 창업 때부터 박 회장과 함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글귀다. 창업 당시 자본시장에서 항상 먹이를 찾고 기회를 보는 소수게임에서 승부를 놓치지 않고 깨어 있다는 다짐이다. 창업 사반세기를 맞아 미래에셋의 리더십은 박현주에서 최현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래에셋에 최현만호(號)가 이끄는 혁신의 DNA가 어떻게 뿌리를 내릴지 글로벌 시장은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다.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2-04-04 03:00
박현주 회장이 창업동지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지난해 10월 하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미래에셋에 2세 경영은 없다”고 선언했을 때 최현만 수석부회장은 사내 일로 주말도 반납한 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박 회장이 후계 구도를 자신의 아들, 딸에게 넘기지 않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겠다고 공식화했을 때다. 당시 최 수석부회장은 자신의 뒤를 이을 전문경영인 풀을 만드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내가 없을 때 누가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 3배수 ‘인재 뱅크’를 만들어야 했다. 박 회장의 미션을 받은 최 수석부회장은 미래에셋의 후계 구도를 그리고 있던 터였다. 창업주인 박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한 만큼 최 수석부회장 또한 창업 세대의 일선 후퇴가 임박한 것으로 보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30대 중반에 미래에셋을 창업해 예순을 넘기기까지 하루도 쉼 없이 달려 왔다. 1997년 여의도 증권가에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때였다. IMF 외환 위기를 전후해 창업한 이후 20여 년의 질풍노도(疾風怒濤) 같은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박현주의 ‘오른팔’ 최현만최현만은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창업 동지다. 이른바 ‘박현주 사단’의 핵심이다. 1989년 하반기 동원증권(당시 한신증권)에 입사한 그는 늦깎이 샐러리맨이었다. 나이 서른에 증권사에 입사했으니 동기생들보다 4~5살이 많았다. 증권업계가 활황이던 1989년이었다. 당시 입사 경쟁은 치열했다. 종합주가지수가 1989년 4월 1일 1007.77이라는 역대 고점을 찍은 직후라 증권업계는 샐러리맨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방대인 전남대, 그것도 전공이 정치외교학이라 증권과는 거리가 먼 이력서였다. SKY 상경계 출신들이 경쟁적으로 증권사 입사 문을 두드린 때라 최현만은 비주류 중의 비주류로 꼽혔다. 그런 최현만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1993년 4월 박현주 회장이 한신증권 중앙지점장이었을 때 최현만은 대리였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투자의 귀재,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던 박현주 지점장이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 밤 12시가 되기까지 최현만 대리는 하루 종일 고객과 부대끼면서 살았다. 지방대 출신의 약점을 성실과 노력, 근면과 신뢰로 넘어서는 그가 박현주 지점장의 눈에 서서히 들어왔다. 박 회장은 최현만을 창업 동지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로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박현주의 ‘왼팔’ 구재상1990년대 한국 자본시장에서 박현주는 ‘신화’와 같은 존재였다. 입사 3년 만에 과장, 5년 만에 지점장을 달아 전국 최연소 지점장 기록에 올랐다. 증권사 지점이 증권 거래 수수료로 먹고 살던 시절, 샐러리맨으로서 최고 정점이던 어느 날 갑자기 잘 나가던 회사에서 사표를 던졌다. 전국 약정(주식 거래실적) 1위인 그는 마흔이 되기 전에 자기 일을 해보고 싶었다며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다. 1996년 동원증권 강남본부장을 끝으로 박현주가 창업에 뛰어들었을 때, 그의 옆엔 최현만 서초지점장과 구재상 압구정지점장이 있었다.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은 아끼던 박현주가 사표를 내자 극구 만류했지만 지금 포기하면 영원히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박현주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한국 자본시장의 메기가 돼 보겠다는 박현주의 생각은 운용에선 구재상 압구정지점장, 관리에선 최현만 서초지점장이라는 에이스를 발탁했기 때문에 가능한 꿈이었다.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하기까지 ‘박현주 사단’으로 불리는 최현만과 구재상이라는 든든한 뒷짐이 있었다. 지금은 미래에셋에서 독립해 케이클라비스라는 이름으로 창업에 나섰지만 구재상은 미래에셋의 발판을 만들고 안정적인 운용으로 수익을 내게 한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박현주의 리더십에 구재상의 뛰어난 운용 능력, 최현만의 촘촘한 관리 능력이 오늘 날 미래에셋의 토양이었던 것이다.●미래에셋 센터원의 회장 집무실엔 누가?미래에셋의 큰 그림을 설계하고 비전을 짜는 업무에 몰두하는 박현주 창업주는 사무실이 별도로 없다. 서울 중구 을지로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 회장 집무실은 몇 해 전부터 비워놓았다. 박 회장은 그 자리를 최 수석부회장이 쓸 것을 권유했지만 최 수석부회장은 한사코 마다했다. 그 후 2년 뒤에야 박 회장 집무실로 옮겼을 정도다. 최 회장의 집무실엔 ‘호랑이는 앓은 듯이 걷고 있고 독수리는 조는 듯이 앉아 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창업 당시 자본시장에서 항상 먹이를 찾고 기회를 보는 소수 게임 승부를 놓치지 않고 항상 깨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미래에셋벤처캐피탈 대표,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 E*미래에셋증권 대표, 미래에셋증권 사장,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 미래에셋증권 수석부회장, 그리고 미래에셋증권 회장에 이르기까지 최 회장의 이력은 미래에셋의 역사와 마찬가지다. 외환 위기로 한국 자본시장이 존폐 위기에 처할 1998년 무렵 최현만이 이끌던 서울 강남 압구정동의 미래에셋투자자문이 설립 4개월 만에 1000억원의 자문계약고를 올린 짜릿한 기분을 최 회장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IMF 외환 위기에서 주식과 채권 파생상품 등에 투자해 4개월 만에 85%라는 경이적인 수익을 내자 너도 나도 그에게 돈을 맡기려고 문을 두드렸다. 박현주의 뛰어난 리더십 뒤에는 최현만의 그림자 같은 관리와 언제나 2인자인 ‘서번트 리더십’이 있었다. ●박 회장이 최현만을 후계로 선택한 이유지난해 10월 하순 최 수석부회장은 박 회장의 전격적인 전문경영인 체제 선언을 ‘세대교체’ 신호로 받아들였다. 30대 창업 세대들이 예순을 넘기는 만큼 미래에셋이 활력을 잃지 않으려면 과감한 세대교체만이 해답이라고 본 것이다. 창업주의 의중을 간파한 그는 자신을 이어갈 젊은 인재들을 어떻게 발탁하고 물러날지를 고민했다. 박 회장은 임원들에게 정년제를 도입하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조직에 ‘젊은 피’를 수혈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런데 박 회장은 전문경영인 1호로 최현만을 마지막 순간 발탁했다. 아니 겉으로는 그랬을지 몰라도 박 회장 머릿속엔 일찌감치 그를 낙점해뒀을지도 모른다. 창업주인 박 회장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때라고 생각한다. 미래에셋의 굵직한 거래 때 박 회장이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일 외에는 대부분을 CEO들에게 일임하고 있다. 그만큼 시스템으로 움직이도록 조직을 만들어놓았다. 박 회장은 “이제 깊은 산골에 들어가 양을 기르며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싶다”고 주변에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한다. 그의 꿈이 얼마나 빨리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문경영인에게 그룹을 맡기겠다는 생각은 확고한 듯했다. 박 회장은 왜 창업 동지나 마찬가지인 최현만 수석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을까. “자식들에게 회사 경영을 맡기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 무조건 받아서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미래에셋은 전문경영인들이 이끌어 가게 될 것입니다. 자식에게 주식은 물려주겠지만 지분만큼 이사회에 참석해 의견을 내는 방식으로 회사 경영에 충분히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겠지요. 샐러리맨이 사장이 되는 문이 활짝 열려야 천하의 인재가 모여들 것입니다. 그래야 미래에셋이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할 것입니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기로 결심한 박 회장의 속내다.●최현만의 미래에셋, 혁신 DNA 산실되나 올해 창립 25년을 맞는 미래에셋은 이제 최현만 회장의 새 리더십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동안 박현주라는 큰 그림자에 가려 있던 최현만 체제가 미래에셋 4반세기의 문을 열고 새로운 리더십을 맞게 되는 것이다. 최 회장은 기자에게 “열심히 일하면 월급쟁이도 회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창업주인 박 회장이 저를 통해 메시지를 낸 것으로 생각한다”며 “외환위기 때 압구정동의 조그만 사무실에서 출발한 미래에셋이 한국 자본시장의 최강자로 올라선 것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하게 혁신의 길을 개척해왔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연말 ‘2만 번의 통찰-상위 1퍼센트 부자들이 부를 얻는 비밀’(한국경제신문)이라는 책을 펴냈다. 대우경제연구소 출신인 한상춘 박사와 공동으로 최상위 부의 미래를 예측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돈의 흐름을 살펴봤다”며 지인들에게 회장 취임 기념 선물로 나눠주고 있다. 박 회장과 최 회장은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 정도다. 박 회장이 그를 ’신뢰의 경영인‘으로 꼽은 이유는 단지 오랫동안 미래에셋에 몸담아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해석하기 어렵다. 그는 앞에 나서지 않고 언제나 박 회장의 뒤에서 조용히 일하고 있었다. 이제 혁신의 미래에셋 DNA를 최 회장이 뿌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그가 세대교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지, 아니면 새로운 리더십을 선보일지 여의도 증권가, 나아가 글로벌 시장이 주목하고 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2-02-06 09:00
지진이 나면 롯데월드타워로 대피해야 하는 이유는?[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2020년 1월 19일 영면한 롯데 창업주 고 신격호 회장이 별세 2주기를 맞았다. 울주 고향 한 산기슭에 단아하게 묻힌 신격호의 인생은 한국의 근현대사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청년 신격호는 소설가를 꿈꾸었지만 현실은 양을 키우는 식민지 조선의 농업인이었다. 낯선 도쿄에서 롯데 신화를 일구기까지 신격호의 비즈니스에는 특별함이 있었다. 한국의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해 세계 최고층을 만들겠다는 집념으로 일군 롯데월드타워에서 내려다본 한강은 대한민국의 기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신격호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나남)에 나타난 고인의 도전과 기업가정신에서 우리 시대 거인의 저력을 엿볼 수 있다.“몇 년이 지나면 투자금을 회수할 것이라 보십니까?”“회수 불가!”“네?” 서울의 랜드마크로 우뚝 선 잠실 롯데월드타워 건설 과정에서 롯데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은 이런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기업은 이윤 창출이 목적이다. 신격호의 생각은 달랐다. 롯데월드타워를 지으면서 사업성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우유 배달로 시작한 신격호의 꿈은 고국에 멋들어진 ‘명소(名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롯데월드타워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신격호는 ‘한강의 기적’을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일제 치하 식민지 조선에서 현해탄을 건넌 신격호는 ‘재팬 드림’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시모노세키 항에 내리자마자 얼굴에 피가 철철 흐르도록 흠씬 두드려 맞은 일본 형사의 매였다. 몸뚱이 하나로 조선 청년 신격호는 척박한 일본 땅에서,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쿄 땅에서 오직 성실과 노력, 창의로 지금의 롯데 신화를 만들어냈다. ●“롯데월드타워 돈 벌려고 했으면 못 지어”“일본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를 신 회장이 수집하면 어떻겠소?”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생전 언젠가 신격호 롯데 회장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호암 이병철은 대단한 문화재 수집가였다. 신격호는 이 회장의 문화재 수집품을 보면서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던 중 이병철 회장이 던진 한마디는 신격호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나도 문화재를 수집해 볼까? 국가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보람도 느낄 수 있을 것 아닌가.’ 신격호는 실제 ‘문화재 공부’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교양 수준의 학습이었지 문화재를 탐구해 수집할 만한 ‘광(狂)’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과거의 유산보다는 미래에 남길 문화재를 창조하는 것에 흥미가 있었다. 그 마지막이 ‘롯데월드타워’라고 신격호는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신격호가 롯데월드타워를 구상한 것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잠실이 황량한 허허벌판이었을 때다. 신격호는 거기에서 낙원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 고난의 길이 될지를 그 때는 몰랐다. “회장님,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십니까. 그냥 아파트 지어서 파는 게 골치도 아프지 않고 수익도 엄청날 겁니다.‘ 주변 많은 사람들이 신격호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아파트 지어서 올리면 분양수익만 챙겨도 크게 남는 장사인데, 뭣 하러 타워를 올리느냐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신격호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소이부답(笑而不答). 돈은 이제 벌만큼 벌었다. 사회에, 국가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기업가정신을 넘어 시민정신이 앞선 신격호였다. 이병철 회장의 과거 문화재 수집을 넘어선 현대판 국보급 문화재를 만들겠다는 것이 염원이었다.●이집트의 파라미드와 북한의 유경호텔 1994년 4월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러 간 신격호는 그 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 찬란한 인류사에 빛나는 문화유산인 피라미드 안에서 느낀 감흥은 마치 천체를 유영하는 듯한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피라미드는 영생(永生)을 추구한 전제 군주의 욕망이 노예의 노동을 착취한 구시대의 유물이었지만 이집트 문명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10만 명이 20년이나 매달려 지은 것이 피라미드였다. 인간과 건축물 사이에서 신격호는 혼란스럽기만 했다.”언제까지 서울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고궁만 보여줄 것인가? 숭례문 경복궁이 대한민국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까? 한국을 찾아오는 지구촌 시민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공유 건축물, 세계적 명성을 가진 건축물이 있어야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인 문화 유산을 반드시 남기고 싶다.“ 롯데월드타워가 들어선 곳은 당초 신격호가 ’시월드‘라는 실내 해양공원을 조성하려고 매입한 것이었다. 여기다 지상 33층 규모의 호텔과 백화점 문화관광홀을 만들기 위해 1987년 12월 14일 부지 8만7183㎡(2만6372평)를 사들였다. 당시 돈으로 863억원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이 막 완공되고 잠실 개발이 한창이던 때였다. 석촌호수 앞의 이 부지는 당시 나대지였다. 신격호의 계획이 180도 바뀐 것은 그 무렵 북한이 105층 높이의 초고층 유경호텔을 건설한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였다. 북한이 서울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해 높이 330m인 피라미드 모양의 최고층 호텔을 짓는다는 플랜이었다. 이 계획은 자금난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바람에 한동안 평양 시내의 흉물로 방치돼 있었지만, 신격호에겐 큰 자극이 됐다. ●”언제까지 외국인들에게 경복궁과 고궁만 보여줄 것인가“”경복궁 같은 고궁 외에도 한국을 상징하는 새로운 공간,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축조물을 만들어 보자.“신격호는 북한의 유경호텔에 맞서 100층 이상 규모의 호텔과 백화점, 면세점을 짓기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단순한 건물 욕심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재벌의 투기억제 대책을 발표, 비업무용 부동산 처분 명령을 내리면서 롯데월드타워 건설은 한동안 표류 상태에 빠지게 됐다. 부지를 사들인지 24년이 지난 2011년 6월 4일 새벽 5시 신격호는 희미한 여명(黎明) 속에서 레미콘 차량들이 쉴 새 없이 공사 현장을 드나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야 주춧돌을 놓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지하 암반에 108개의 파일을 박아 보강하고, 그 위에 5천300대의 레미콘이 32시간 동안 쌓아 올린 두께 6.5m의 기초 매트와 함께 콘크리트 양은 다른 건축에 비해 2.5배나 많이 들어갔다.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성과 견고함을 갖춘 공사의 시작이었다.●23번 바뀐 마스터플랜, 최종 승자는 ’붓‘ 20년이 넘는 동안 롯데월드타워 마스터플랜은 23번이나 바뀌었다. 건물 외관에서부터 다른 초고층 건물과 차별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처음엔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나 세계무역센터(월드트레이드타워)를 참고했다. 2002년에는 파리 에펠탑에서 영감을 얻어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의 모습을 구현하기도 했다. 무려 23차례의 디자인 변경 끝에 한국적 외관이 좋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전통미를 살린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이를 건물로 구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방패연, 삼태극, 대나무, 엽전, 전통문살, 첨성대, 가야금, 도자기, 붓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적 요소를 모티브로 10개가 넘는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최종 디자인은 한국의 전통미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곡선미를 택했다. 처마와 저고리, 버선 등에서 나타나는 곡선미를 건물 상층부에 보여주고 새 부리 모양의 전망대를 만들었다. 롯데월드타워를 멀리서 보면 붓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습임을 알아 챌 수 있다. 설계는 미국 건축설계회사인 KPF가 맡았다. 설계비만 3000억원이 들었다. KPF사는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상하이 금융센터 등을 설계한 초고층 건물 건축의 베테랑 기업이었다. 천문학적 금액이었지만 신격호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KPF는 전례 없는 복합 구의 초고층 건물인 롯데월드타워를 설계하면서 많은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지진이 나면 롯데월드타워로 대피해야 한다‘ 롯데월드타워 건축에 들어간 투자금은 총 4조2000억원이다. 555m 높이에 지하 6층 지상 123층 초고층 빌딩이다.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신격호의 꿈은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빌딩을 짓고 싶었지만 허가가 늦어지면서 희망을 이루지 못했다. 대지 2만6372평에 연면적은 24만3776평이다. 연면적을 축구경기장으로 따지면 115개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해마다 5000만 명이 롯데월드타워를 드나들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1년에 한번은 롯데월드타워를 다녀간 셈이다. 이 가운데 10%인 500만 명이 해외관광객이다. 신격호의 꿈은 이렇게 달성되고 있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에게 롯데월드타워는 명소(名所)가 된 것이다. 2014년 10월 월드몰 개장 이후 지금까지 다녀간 사람이 누적으로 2억8000만 명에 이른다. 서울 명동과 홍대 등 강북에 밀집된 외국인 쇼핑지가 롯데월드타워로 확장되고 있다. ”롯데월드타워의 모든 기록은 역사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하다. 공간의 효율성 보다 구조적 안전성에 최우선을 둬 설계했다. 40층마다 대나무의 마디 역할을 하는 구조물을 설치했다. 진도 9도의 강진과 초속 80m의 바람에도 견디도록 했다. ’앞으로 지진이 나면 무조건 롯데월드타워로 대피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롯데월드타워에 적용된 설계와 핵심 기술은 이전의 대한민국 건축사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많다. 롯데월드타워 건설 현장은 매 순간이 새로운 시도였고, 모든 결과는 대한민국의 신기록이었다.“신격호가 생전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심경이다. 2015년 12월 외부 공사를 마무리하고 내부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대들보를 들어올리는 상량식(上梁式)이 이뤄지던 날 신격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초고층 건물에 대한 우려를 희망으로 바꾸고, 질책을 격려로 바꾸기 위해선 뼈를 깎는 노력이 뒤따라야 했다. 공사에 참여한 500만 명의 작업자와 롯데월드타워를 응원해 준 국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자리였다. ● 소년 같은 신격호의 모습을 보다 롯데월드타워 건설이 한창 마무리에 들어갈 즈음 신격호의 건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외부 활동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필생의 숙원인 롯데월드타워 완공을 내 손으로 이루고 말겠다는 집념은 그를 병상에서도 가만 누워 있게 하지 못했다. 한 달에 두세 차례 대면 보고를 받고 공사 현장도 찾았다. 롯데의 한 간부가 전하는 뒷얘기다. ”공사 초기엔 명예회장님이 일본과 서울을 오가면서 이른바 ’셔틀 경영‘을 할 때였습니다, 기분 좋게 보고 받는 모습을 보면 마치 동심(童心)으로 돌아간 해맑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임원들이 뭔가 껄끄러운 보고를 해야 할 때는 롯데월드타워 보고 때 살짝 끼워 넣는 경우도 왕왕 있었습니다. 명예회장님이 기분이 좋은 때라 묻어가는 경우가 있었지요.“ 롯데월드타워 42층부터 71층까지엔 ’시그니엘 레지던스‘라는 주거 단지가 있다. 최소 63평에서 넓게는 376평까지 호화 거주시설이다. 평균 분양가가 평당 6900만원으로 한 채에 60억~300억원에 이른다. 배우 조인성과 클라라, 동방신기의 시아준수 등 유명인들이 살고 있다. 롯데는 올해 분양을 마치면 1조 5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투자금(4조2000억원)의 3분의 1 수준이다. ●공수래공수거, 조선 청년 신격호가 남긴 것신격호는 그의 회고록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장부상으로는 회수 불가일지 몰라도 장구한 세월에 걸쳐 얻는 무형의 이익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서울의 품격을 높이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이 프로젝트는 사업으로 봐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다만 타지에 가서 번 돈으로 한국에 좋은 건축물, 국제적 명물로 한국이 자랑할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롯데의 비전을 품고 잠실벌에 우뚝 솟은 롯데월드타워는 이제 21세기 대한민국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기꺼이 우리 국민과 고객 모두에게 ’가족이 함께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바친다.“ 신격호는 지금 자신이 태어난 울주 산골의 둔터 마을의 산기슭에 묻혀 있다. 일제 시대 천자문을 배우면서 보낸 어린 시절, 그는 미래의 꿈을 찾아 보통학교에 진학했다. 소설가의 꿈과 양을 치는 농업인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어느 날 경성(서울)을 보면서 큰 세상을 발견했다. 조국이 먹고 살기 어려울 때 청년 신격호는 울산에서 북한 함경도 개마고원까지 올라가 종양(種羊)장에서 1년 동안 양치기 견습생도 했다. 스무 살 되던 한겨울 공부를 더 하고 싶어 83원을 들고 부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항으로 향했다. 미지의 세계 일본에서 신격호는 오로지 신의와 성실, 노력과 창의로 일본인을 감동시켰다.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는 무덤 한편의 와석(臥石).”여기/ 울주 청년의 꿈/ 대한해협의 거인 신격호/ 울림이 남아 있다 거기 가봤나? 2020년 1월 19일 영면“ 잠실에 우뚝 솟은 롯데월드타워, 그리고 울주 둔기리에 있는 고(故) 신격호 롯데 창업주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묘소가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실감케 한다. 우리 시대의 거인(巨人) 신격호의 명복을 빈다.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2022-01-30 09:00
와석 비가 전부…너무나 소박한 신격호 회장의 묘소[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나는 늘 자식들에게 내 사후(死後) 묘소는 소박하게 꾸미라고 신신당부했다.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보면서도 나는 화려한 조형물은 생자(生者)를 위해 만들어야지 사자(死者)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향 땅의 안온한 품에 안기기만 하면 될 뿐이니 거창한 비석이나 높은 봉분(封墳)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너무나 소박한 롯데 창업주의 묘소 2년 전인 2020년 1월 19일 영면한 롯데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의 묘소는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선영에 조성됐다. 재벌 회장의 묘소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너무나 소박한 무덤이었다. 무덤 앞의 상석도 없을 분 아니라 작은 봉분에다 벌레를 방지하기 위한 노송(老松) 나무가 전부다. 사자(死者)의 위용을 뽐내듯 묘역 주변을 지키는 비석 또한 이 곳에선 찾아보기가 어렵다. 여느 필부필남의 묘소와 다름없다. 수중에 달랑 110원을 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에서, 그리고 고국에서 ‘롯데 신화’를 일군 창업주가 잠들고 있는 곳은 세속의 영달(榮達)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무덤 한 편에 있는 와석(臥石)만이 이 곳이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무덤임을 알린다. “여기 / 울주 청년의 꿈 / 대한해협의 거인 신격호 / 울림이 남아 있다 거기 가봤나? 2020년 1월 19일 영면” ‘거기 가봤나’는 신격호 명예회장이 평소 임직원들에게 많이 던졌던 질문이다. 현장을 중시하는 경영과 고인의 생전 부지런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신격호의 묘소는 둔기리 한 야산에 위치해 있다. 고향 생가가 수몰(水沒)돼 거처를 잃은 아버지를 위해 마련한 2층 양옥 별장과는 1km, 신격호의 부친 선인(先人) 묘소가 있는 언양읍 구수리와는 3km 거리에 있다. 고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옛 둔기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비즈니스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마지막 거처는 그가 유소년 시절을 보낸 고향 땅이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인가. 신격호의 집이 있었던 둔기마을은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기치로 울산공업단지가 조성될 무렵 용수(用水) 조성을 위해 인근에 대암댐이 건설되면서 1969년 동네가 전부 물에 잠겼다. 신 명예회장은 고향이 물에 가라앉자 거처를 잃은 아버지를 위해 1970년 지금 자리에 있는 2층 양옥 별장을 지었다. 2층 창 너머로 옛 삶의 터전을 바라보던 선친(先親)은 별장에서 2년여를 살다가 1973년 작고했다. 신 명예회장은 회고록에 “야반도주하다시피 일본으로 떠나 오래 소식을 전하지 못한 이 장남의 불효를 애절하게도 이제는 갚아드릴 방법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신격호 회고록에선 마지막 장에 ‘내 가족 이야기’가 나온다. 재벌 회장의 삶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참으로 소박한 일상들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별장에 부속 숙소를 지어 가까운 혈족들이 모여 함께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나도 별장에 내려가면 그들과 어울리며 응접실에서 한국 대중가요를 즐겨 듣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내 사랑 내 곁에’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한계령’ ‘칠갑산’ ‘만남’ ‘무시로’ 등이다. 박목월 시인의 ‘사월의 노래’라는 시에 김순애 작곡가의 곡으로 만들어진 가곡도 애청(愛聽)곡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라는 가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음이 울적할 땐 불경을 읽거나 반야심경 병풍을 펼쳐놓고 독경한다.” “관자재보살이 반야 바라밀다를 깊게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이라는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났도다.”재벌의 삶은 아주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신격호는 가족을 중시하고 친척과 가깝게 지내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즐길 줄 아는 범인(凡人)이었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대중가요를 즐겨 부르고 소소한 일상과 가족이라는 편안한 굴레를 가슴 깊이 간직하는 가장(家長)이기도 했다. 신격호는 또 회고록에서 신혼 초에 아내에게 “정원에 빨간 기와가 있는 집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나중에 집을 지을 때 정원 터를 넓게 잡아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사업에 몰두하느라 함께 해외여행을 갈 여유는 없었다. 결혼하고 25년이 지난 뒤에야 나이아가라 폭포로 첫 해외여행을 갔을 정도였다. 한국 속담에 ‘마누라 자랑하는 팔불출’이라지만 나는 평생을 올곧게 살며 나를 내조한 품격 있는 아내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1941년 겨울 스무 한살 조선 청년 신격호는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우유와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고학을 이어가 와세다실업고 야간부에 편입을 했다. 일본에 건너간 지 9년 뒤인 1950년 9월 한국전쟁 와중에 다케모리 하츠코와 결혼했다. 이로부터 25년 뒤에야 부부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했으니, 그게 1975년 무렵이다. 한국에 롯데제과(1967년) 호텔롯데(1973년) 롯데칠성(1974년) 등의 회사를 설립한 후에야 부부 여행을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그 해엔 실업야구단 롯데자이언츠가 창단된 해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경구의 깊은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회고록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집트 피라미드 수학여행이 남긴 것 1994년 4월 신격호는 이집트 여행을 갔다. 피라미드 구경을 위한 수학여행이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시내 곳곳엔 흙더미로 만든 움막집이 즐비했다. 집 안에서 어른거리는 주민들의 행색은 몹시 남루했다. 한국의 포니자동차가 카이로에선 택시로 쓰이고 있었으니 중대형차가 즐비한 서울과는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 카이로에서 승용차로 30분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볼 수 있었다. 피라미드 밑변이 230m로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걸어가는 데 한참 걸렸다. 2.5t 무게의 돌을 무려 230만개나 쌓아올려 만든 것이라는 설명에 깜짝 놀랐다. 이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10만 명이 20년 동안 매달렸다는 기록이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기록돼 있다.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서니 도굴꾼들이 내부를 마구 뒤져놓은 바람에 볼 것은 마땅히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정교한 이음매로 연결된 돌덩어리를 손으로 더듬기만 해도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졌다고 그는 기억했다. 컴컴한 피라미드 속을 사다리를 타고 이리저리 헤매는 기분은 신비감 자체였다. 영겁(永劫)의 시간을 뛰어넘어 온 듯한 적요(寂寥)를 느낀 신격호는 마치 광활한 우주 속에서 유영(遊泳)하는 기분을 느꼈다.●파라오의 무덤과 카이로의 움막집 신격호는 이 거대한 피라미드 앞에서 인간의 도전 정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몸을 떨었다. 설계자와 시공자, 공사감독관, 일꾼 등 오랜 세월 전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들에게 후세로서 저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를 다녀 온 신격호의 머리 속에선 피라미드의 잔상이 떠나지 않았다. 거대한 피라미드의 위용, 피라미드 속 안의 신비로움, 이런 역사(役事)를 만든 이집트인들, 그리고 오늘날 수도 카이로의 남루한 서민들의 행색…. 파라오의 무덤은 웅장했지만 정작 그 속의 삶은 어땠을까. 사자(死者)의 영예를 위한 생자(生者)의 희생은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을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관광지가 된 피라미드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간의 불굴의 도전정신과 설계자와 감독관, 일꾼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신격호의 머리 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죽은 자를 위한 화려한 조형물의 가치란 무엇인가. 이윽고 신격호의 머리 속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랜드마크는 무엇인지에 모아졌다. 숭례문? 경복궁?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이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파리의 에펠탑, 런던은 빅벤, 그렇다면 서울엔 무엇이 있을까? (계속)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2-01-23 09:00
“창업주 도전정신 잇는 스타트업 지원”“남다른 열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셨던 아버님의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우리도 이어받으면 좋겠습니다.” 롯데 창업주인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2주기 추도식이 열린 18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1층에 마련된 창업주 흉상 앞에 헌화하면서 이 같은 소회를 밝혔다. 신 회장은 앞서 15일엔 울산 울주군 선영을 찾아 고인의 넋을 기리며 참배했다. 신동빈 회장 체제는 창업주 타계 이후 조용한 변화와 혁신의 길을 걸어왔다.○ 명예회장 숙원 사업인 화학에 매진신 회장은 11년 전인 2011년 2월 재계 5위 롯데그룹의 회장이 됐다. 1997년 부회장 승진 이후 14년 만이었다. 1990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상무로 롯데그룹에 몸담은 지 21년째 되는 해였다.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은 2004년 롯데정책본부 본부장에 취임했을 때였다. 이후 말레이시아 타이탄케미칼, 미국 뉴욕팰리스호텔 등을 비롯해 하이마트, KT렌탈, 삼성의 화학 계열사까지 국내외에서 30여 건의 인수합병(M&A)을 성공적으로 일궈냈다. 신 회장의 공격적인 행보에 지금은 30여 개 국가에서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의 두드러진 업적은 신 명예회장의 숙원이던 화학사업을 유통업에 버금가는 그룹의 양대 핵심 축으로 성장시켰다는 데 있다. 2015년 삼성그룹의 석유화학 부문인 삼성SDI 케미칼 사업부문과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을 인수해 화학사업의 퀀텀 점프(비약적 도약) 계기를 만들어냈다. 정밀화학 분야 진출로 전통적인 석유화학 기업에서 종합화학 회사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다. 2020년 초엔 자회사인 롯데첨단소재를 합병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혔다. 2019년 5월에는 미국 루이지애나주 레이크찰스에 셰일가스 기반의 에틸렌 생산설비인 ECC(Ethan Cracking Center) 공장을 세웠다. 신 회장 주도로 31억 달러(약 3조6000억 원)가 투자된 대규모 프로젝트로 에틸렌 100만 t, 에틸렌글리콜 70만 t의 생산 능력을 갖춘 석유화학단지다. 한국 석유화학 역사에서 셰일가스를 활용한 프로젝트에 투자한 첫 사례로 꼽힌다. 그가 회장에 취임할 당시 롯데그룹의 총자산은 87조 원이었지만 10년 동안 44%나 늘어 125조7000억 원(2020년)에 이른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해 꾸준히 투자한 혜안에 따른 결과였다. 앞으로 바이오와 헬스케어 등 다양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할 방침이다.○ 창업주 도전 정신 계승하는 스타트업 지원신 명예회장은 청년 시절 혈혈단신으로 일본행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고 주경야독 끝에 창업에 성공해 ‘롯데 신화’를 만들어냈다. 신동빈 회장은 창업주의 이런 도전과 창의, 기업가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6년 2월 롯데벤처스(옛 롯데액셀러레이터)를 출범시켰다. 신 회장이 롯데미래전략연구소에 미국의 ‘와이콤비네이터’ 같은 창업보육 기업을 만들어 달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었다. 자본금 150억 원 중 신 회장이 사재로 50억 원을 출연했다. 이 회사는 지난 6년 동안 스타트업을 발굴해 육성하고 직접 투자도 진행하고 있다. 운용 자산은 총 2571억 원으로 롯데스타트업펀드1호 등 13개 펀드를 운용한다. 국내 스타트업들의 해외 진출에도 팔을 걷어붙여 지난해 베트남에 벤처캐피털 회사를 설립했다. 지난해 11월 창업주 탄생 100년을 맞아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시작해 미국 실리콘밸리 한인창업가 모임과도 교류 폭을 넓히는 데 힘쓰고 있다.○ 스포츠 인재 육성에도 힘 보태신 명예회장이 권투선수 홍수환 씨, ‘불멸의 승부사’로 불리는 바둑선수 조치훈 9단과 인연을 맺고 후원한 일은 유명하다. 스포츠와 문화예술 인재를 육성한 신 명예회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신동빈 회장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대한스키협회장을 지내며 국가대표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스키협회에 150억 원을 지원하는 등 유망주를 육성하기 위해 올림픽뿐 아니라 유스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컵, 주니어세계선수권 등 주요 국제대회에 인센티브를 쾌척했다. 형제 사이인 롯데 신격호, 농심 신춘호 창업 1세대는 생전에 화해하지 못한 채 작고했다. 자식 세대인 신동빈 롯데 회장과 신동원 농심 회장은 사촌끼리 서로 단합하는 모습이다. 신동빈 회장은 지난해 11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신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 신동원 회장을 초청해 아버지 세대의 묵은 갈등을 씻으며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다.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2-01-20 03:00
최태원 商議 회장은 왜 연초부터 공정거래위원장을 초청했을까?[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요 며칠 사이에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을 두 번이나 만났다. 한번은 지난해 연말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에서, 또 한 번은 연초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지난해 12월 15일엔 SK 회장으로서 공정위 사건 당사자인 피심의인 신분이었고, 신년엔 대한상의 회장이라는 경제단체장으로 조성옥 위원장과 마주한 것이다.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장과 최 회장 사이에 불과 한 달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잇따른 두 사건을 놓고 재계에선 화제가 됐다. 재벌 회장과 공정위 수장(首長)의 회동이 갖는 정치적 경제적 함의가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신년 공정거래 정책 놓고 대기업 사장단 간담회 이달 13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간담회는 조 위원장이 공정위의 올해 공정거래 정책 방향을 놓고 대한상의 회원사 대표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였다. 상의 회장을 맡고 있는 최 회장과 우태희 상의 부회장,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 공영운 현대자동차 사장, 하범종 LG 사장, 조현일 한화 사장 등 대한상의 10개 주요 회원사에서 사장급 경영인들이 참석했다. 지난해 12월 30일부터 시행된 개정 공정거래법을 설명하는 행사였다.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40년 만에 전면 개편된 공정거래법을 놓고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대기업 사장단들과 소통하는 자리에 공정거래위원장이 직접 설명하러 온 것이다. 과거 같으면 재계를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이런 행사를 주관했을 테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전경련 패싱’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상의가 전경련 대체 기관으로 위상이 변화하는 모습이다. 이날 오전 10시30분부터 1시간 동안 열린 정책간담회에서 조 위원장은 올해 공정위 정책의 중점 방향을 설명했다. 경제검찰인 공정위를 재계가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최 회장의 당부도 이들의 대화에 녹아 있었다. 형식은 정책 간담회였지만 두 사람의 발언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뼈 있는’ 말들이 오갔다.●뼈 있는 말 오간 간담회 조 위원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공정위는 시장을 하나의 정원으로 볼 때 시장경제를 잘 가꾸는 정원사”라고 비유했다. 그러면서 “새싹이 큰 나무가 되는 결실이 맺어진다면 이용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처럼 새 기업이 진입하고 혁신하며 독점적 지위를 가진 기업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하는 것이 공정위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앞서 최 회장이 인사말에서 “기업 입장에선 공정위는 시장 질서를 유지하는 파수꾼이자 경제검찰”이라고 규정한 데 대한 반박으로 들렸다. 최 회장은 조 위원장에게 공정거래 정책의 탄력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는 산업 환경에서 한국 기업만 공정거래 정책에 얽매여 경쟁에서 뒤쳐지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최 회장은 “세계적으로 산업과 시장 판도가 급격하게 재편되는 상황이며 우리가 ‘세계 시장의 공급자가 되느냐, 수요자가 되느냐’에 따라 국가 명운이 크게 엇갈릴 것”이라고 했다. 이어 새로 도입된 제도와 관련해 “기업들이 위법 리스크에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여 달라”고 촉구했다. 조 위원장은 개정 공정거래법을 설명하면서 “총수 일가의 사익 추구와 부당한 영향력 행사에 대해 많은 걱정이 있다”며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만들고 부당 내부거래를 제지하는 것이 공정위의 기업집단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지난해 연말 공정위가 SK의 사업 기회를 최 회장에게 부당하게 제공한 것을 제재한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됐다. ●공정위 심판정에 선 그룹 회장 지난 해 12월 15일 최 회장은 세종정부청사 공정위 심판정에 직접 출석했다. 대기업 오너 출신 최고경영자가 공정위 사건에 출석하는 것은 그동안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사건에 대한 언론과 재계의 관심도 높았다. 최 회장은 이날 심의가 진행된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40분까지 무려 12시간 가까이 심판정에서 피심의인 신분으로 자리를 지켰다. 통상 이런 경제 사건의 경우 로펌에서 대리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최 회장은 사건 당사자 신분으로 직접 소명하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 회장은 검사 역할을 하는 공정위 심사관과 자신의 변호인이 치열하게 법리 공방을 벌이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발언 기회를 얻어 직접 소명을 하기도 했다. 공정위 전원회의는 조 위원장이 주관했다. 법정으로 친다면 심판정 중앙에 자리 잡은 조 위원장이 부장판사 역할을, 공정위 심판관은 검사 역할을 맡고, 최 회장은 피의자 신분이 된 것이다. 공정위가 아침부터 밤까지 릴레이 심의를 이어간 것은 SK그룹 총수가 SK의 사업 기회를 사익(私益)으로 편취했다는 의혹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당사자의 해명도 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판정에서 조 위원장은 회의 진행을 위주로 하면서 최 회장에 대해 별다른 질의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 사건은 재벌 총수가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의 사업 기회를 가지려고 개인적으로 투자한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관심이 높아 재계의 주목을 끌었다. 공정위 전원회의는 최 회장의 심판정 출석에도 관련 사건을 제재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SK와 최 회장에게 각각 과징금 8억 원씩 총 16억원을 매겼다. 다만 시민단체 등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검찰 고발은 하지 않기로 했다. 공정위로선 문재인 정부 출범 후 4년 동안이나 묵혀놓은 사건을 종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SK실트론 주식 29.4% 최 회장 직접 취득이 논란 최 회장이 재계 총수로는 처음으로 공정위 심판정에 서게 된 사건은 무엇일까. 해당 사건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SK는 반도체 소재산업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7년 1월 (주)LG가 갖고 있던 반도체 웨이퍼 생산회사인 LG실트론 주식 51%를 사들였다. 이후 SK는 주주총회 특별결의 요건을 갖추는 동시에 인정적인 경영을 위해서는 유력한 2대 주주가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추가 주식 매입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어 SK는 19.6% 지분을 갖고 있는 KTB로부터 주식을 취득했다. 나머지 지분인 29.4% 지분을 소유한 우리은행으로부터는 SK가 아닌 최 회장이 매각 입찰에 참여해 단독 적격 투자자로 선정돼 2017년 8월 총수익스와프(TRS) 방식으로 사들였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최 회장이 취득한 SK실트론 29.4%는 SK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 기회’였지만 이를 총수가 개인적으로 투자해 이익을 가로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근거로 공정위는 SK가 2016년 12월 LG실트론 경영권 인수 검토 때 LG실트론의 기업 가치가 1조1000억원에서 2020년엔 3조3000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 자료를 제시했다. 공정위는 최 회장이 취득한 LG실트론의 주식 가치가 2017년 대비 2020년 말 기준으로 하면 1967억원이나 증가한 것으로 계산했다. SK가 지분 인수를 포기하고 총수에게 밀어준 사업 기회로 최 회장이 2000억원 가까운 부당 이득을 챙겼다는 게 공정위 판단이었다. ●“당혹스럽고 억울한 심정” 읍소 최 회장은 이런 공정위 판단에 억울하다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공정위 심판정에서 한 최후 진술의 요지는 이렇다. “내가 SK에 갖고 있는 주식이나 재산은 실트론에 갖고 있는 주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큰 액수다. 개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SK에 손해를 끼친다는 일은 저 개인으로도 할 수 없는 얘기다. 실트론 지분 인수가 SK그룹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름대로 개인적인 리스크가 있지만 감안하고 추진했는데 오히려 회사 이익을 가로채려는 행위로 평가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당혹스럽고 억울한 심정이다.” 이 사건은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가 2017년 11월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행위라며 공정위에 조사를 요청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번 심리로 무려 4년 만에 공정위 결정이 이뤄졌다. 공정위 전원회의 결정은 1심 재판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시정 명령과 함께 과징금 16억원 부과에 불복하면 고등법원에 취소처분 소송을 내고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한다. 사건을 신고한 경제개혁연대는 공정위가 검찰고발 조치를 하지 않고 유사 사업기회 제공 같은 것은 하지 말라는 부작위(不作爲) 시정 조치 명령만 내렸다고 반발했다. 최 회장 주변에선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법정 소송도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한다. ●경제단체장 메시지로 기업 환경 개선 노력 최 회장이 공정위 심판정에 직접 출석한 것은 재계에 던지는 함의가 적지 않다. 주변에선 출석을 말렸지만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두 차례나 수형 생활을 한 것은 최 회장에겐 아프고 힘든 기억들이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한나절 꼬박 공정위 심판정에서 심의 현장을 지켜본 것은 사건 당사자이기도 하거니와 변호인에게 맡기는 것이 일견 무책임하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는 것이 최 회장 주변의 얘기다. 많은 대기업 오너 출신 최고경영자들이 국정감사 때 증인으로 출석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관 업무에 치중하는 것이 한국 기업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각에선 기업 총수가 공정위 심판정에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로 공정위가 경제검찰로 위상을 세웠다는 얘기도 없지 않다. 대한상의를 이끄는 경제단체장으로서 자신을 심판정에 서게 만든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을 정책간담회 첫 연사로 초청한 것을 놓고 갖가지 해석을 낳는 이유다. 재계를 이끌고 있는 경제단체장으로서 더 이상 정부와 다툼을 벌이는 재판으로 가지 않고 당국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신호가 아닐까. 사익 논란에 휩싸인 과거를 해소하고 대한상의 최고 사령탑으로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비중을 두려는 것 같다는 말이 재계 안팎에서 들린다.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2-01-16 09:00
최태원 SK 회장은 왜 ‘스토리’에 빠져들까?[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지난해 3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스토리’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기업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출과 이익을 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기업의 목표는 ‘주주가치의 극대화’라고 경영학 교과서에선 가르친다. 이윤을 내지 못하면 존립하기 어려운 것이 기업의 본질이다. 그런데 왜 최 회장은 매출과 이익 같은 재무지표, 즉 기업의 ‘숫자(number)’보다는 기업이 사회적 가치(social value)를 창출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따지는 ‘스토리(narrative)’에 집착하는 것일까? 기업의 사회적 책무와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최 회장의 대한상의 회장 취임 후 첫 작품인 ‘국가발전 프로젝트’를 보면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창업오디션 기획·연출한 ‘최태원 멘토’지난해 6월 대한상의 최 회장이 첫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프로젝트 이름은 ‘국가발전 프로젝트 공모전’. 최 회장은 “코로나19로 모두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경제 활력 회복 방법을 몇몇 사람의 머리로만 고민하는 것보다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공모전을 통해 집단 지성을 활용한다면 좀 더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공모전 취지를 밝혔다. 흔히 대한상의 같은 경제단체들은 대기업과 기업 오너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국민들 머리에 깊이 각인돼 있는 게 현실이다. ‘상속세 때문에 경영을 못 하겠다’, ‘강성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높은 법인세 때문에 장사하기 힘들다’ ‘규제가 얽매여 혁신을 하기 어렵다’ 등은 대기업과 최고경영자들의 대(對)정부 민원을 해결하는 ‘레퍼토리’로 통했다. 앵무새처럼 떠드는 이런 목소리에 일반 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재계의 이익을 강조하는 경제단체에 국민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느냐’로 귀착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반(反)기업 정서의 중심에 재벌 대기업과 경제단체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최 회장은 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적 반감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창업공모전을 기획했다. 재계의 대변인 역할보다는 국민들의 참신한 사업 아이디어를 구하겠다는 전략이다. A4 용지 한 장에 사업 아이디어를 제출하면 대상 1억원 등 총 10편의 아이디어에 2억2900만원의 상금을 내걸었다. 사업제안 이유와 사업개요 기대효과 등을 담은 아이디어를 공모전 홈페이지에 제출하도록 하는 등 절차도 간단히 했다.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는 비즈니스에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프로젝트 제안서가 4700여개나 쏟아졌다. 국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창업 아이디어 공모전에 예상 밖의 지대한 관심이 모아진 것이다. 이 가운데 전문가의 심사를 통과한 50개의 창업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을까? 대한상의는 미래 기술이 30%로 가장 많았고, 의료 복지와 환경 보전이 각각 25%로 절반을 차지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20%는 창업지원 플랫폼에 대한 아이디어였다. 유명 CEO 멘토링 거쳐 창업아이디어 사업화대한상의는 30여 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서류 심사에 이어 20개의 본선 진출작을 추렸다. 국민투표단을 모집해 창업 아이디어 선정에 국민 여론을 수렴하는 장치도 마련했다. 국민들의 관심을 고조하기 위한 흥행 수단이었다. 이와 별도로 국내 대표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각 팀을 이끄는 멘토로 자원했다. 마지막 6개로 선정된 팀에 CEO 멘토가 따라붙었다. 최 회장을 비롯해 최정우 포스코 회장, 장병규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 정경선 실반그룹 대표, 권명숙 인텔코리아 대표, 김현정 딜로이트컨설팅코리아 부사장이 멘토로 참여했다. 최종 본선까지 오른 6개 팀은 멘토에 따라 SK팀 포스코팀 크래프톤팀 인텔팀 딜로이트팀 등의 이름을 달았다. 멘토들은 사업 아이디어를 한번 들여다보는 정도가 아니라 전문가까지 동원해 10여 차례 미팅을 갖는 등 사업설계 단계부터 촘촘하게 도움을 줬다. 상의는 창업공모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기 위해 ‘대한민국 아이디어리그’라는 이름으로 SBS와 지역 민방을 통해 12월 중순부터 낮 시간에 80분 동안 전국에 방송하도록 했다. 방송에는 20여개 출품작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아이디어 선정 과정과 공모한 10여명의 심층 인터뷰, ‘톱6’ 선발전, ‘멘토-멘티’ 선발전 등을 소개하고 심사위원 멘토링 과정과 ‘올해의 아이디어’를 가리는 최종 라운드까지 담았다. 대국민 홍보전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당선작 6개 대한상의가 사업 추진장장 6개월의 진행 끝에 대한상의는 연초 ‘국가발전 프로젝트’ 수상작 6개를 발표했다. 상금 1억원을 받은 1등은 ‘치매 막는 10분 통화’가 선정됐다. 16년차 직장인이 낸 창업 아이디어는 부모님께 전화 한통으로 치매진단검사(K-MMSE)를 몰래 실시하는 것이었다. 일상적 대화로 치매를 조기 발굴해 부모님과 부양 가족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사회적 가치 창출 금액이 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치매 첫 증상 후 환자가 실제 병원에 가기까지 2년 반이 넘는 현실을 개선하는 사업 아이디어였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멘토를 맡았다. 2위는 최태원 회장이 15살 중학생 소녀와 손잡고 만든 전남 강진과 경북 상주 강원 영동을 잇는 테마여행 시제품으로 NFT(대체불가토큰)을 활용한 AR(증강현실) 보물찾기 사업 아이템이었다. 강진 가우도에서 풍어제 전설을 기반으로 ‘AR 물고기’ 게임을 즐기고 상주 임진왜란 격전지에서 NC소프트의 리니지 구슬을 얻는다는 스토리를 담았다. 멘토인 최 회장은 사업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게임회사와의 공조와 지자체 축제와의 협업, NFT 규제 우회로 등을 조언했다고 한다. 3위를 차지한 ‘우리동네 병원’은 세브란스병원 의사인 김진현 씨가 제안한 것으로 저녁에 응급실이 아닌 병원을 활용하는 방안을 사업화하는 것이었다. 국민들이 낮 시간대에 진료 위치와 시간, 증상 등을 앱을 통해 요청하고 의사들은 이 앱을 확인해 야간 진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응급실 경증 환자가 많이 몰리는 시간이 오후 6시부터 밤 12시까지로 성인의 56%, 소아의 74%가 이 시간대에 몰리는 것을 해소해 보자는 취지다. 공동 3위를 차지한 ‘폐업도 창업팀’은 이태리 레스토랑 셰프인 백명기 씨의 아이디어로 722만에 이르는 자영업자가 따라할 수 있는 폐업 가이드를 만들어 바코드와 연동한 거래물품 정보 제공, 중고 묶음 플랫폼 활성화 등으로 자영업자의 재기를 도울 수 있도록 하는 사업 아이템이 꼽혔다. 6위에 뽑힌 ‘내 귀에 캔디팀’은 국민건강보험공단 5년차 직장인의 아이디어로 폭언에 시달려온 감정 노동자가 남자 친구인 AI 개발자와 합심해 비속어 차단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전화 통화에서 비속어가 나오면 자동으로 차단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연 500억원에 이르는 감정 노동자의 치유 비용을 줄이도록 하자는 것이다. 최 회장은 “수상작 톱6 사업 아이템을 대한상의에서 실제로 추진하고 한번 사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발전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사업 아이템 제안자에게는 지분 4.5%를 주기로 했다.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프로젝트도 백서로 제작해 누구나 쉽게 들여다보고 사업 아이디어로 결실을 맺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규제 때문에 주옥같은 아이디어가 사장(死藏)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규제 샌드박스를 활용해 우회로를 찾는 방안도 모색하기로 했다. 사회적 가치 높이는 곳에 인센티브 주는 최태원의 경영 방식최 회장이 ‘국가발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창업오디션을 기획 연출한 것은 SK그룹 경영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업이 ‘돈 버는 기계’로 인식된다면 영구 존속하기 어려우므로 사회 문제를 푸는 일에 기업이 앞장서야 한다는 그의 경영 철학이 뿌리다. SK그룹은 2015년부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회사를 해마다 40~50개를 선정해 ‘인센티브’라는 명목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한 기업 당 평균 5000만원 안팎의 상금이다. 본업과 연계하면서 환경, 고용, 사회 서비스 및 사회 생태계 등 사회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회사를 발굴해 포상한다. 여기에는 기업의 고유한 스토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어떻게 환경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고, 사회적 약자의 고용을 창출하는 데 어떻게 힘썼는지에 대한 경영 스토리면 충분하다. 최 회장의 대한상의 총 사령탑으로 첫 작품인 ‘국가발전 프로젝트’ 역시 궤를 같이 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매몰되지 않고 국민들이 편안한 나라가 되는 데 창업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업 아이템이 구체화되며, 이것이 사회 문제를 푸는 데 거름이 되도록 상의가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려는 시도다. 이 사업은 올해도 이어진다. 지난 해 SK그룹의 경영 화두(話頭)는 ‘파이낸셜 스토리’ 창출이었다. 매출액과 영업이익 등 재무성과를 중심으로 한 기업 가치에서 벗어나 매력적인 목표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담긴 ‘파이낸셜 스토리’로 시장에서 신뢰를 얻어야 기업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고 최 회장은 강조한다. 이런 그룹 최고경영자의 방침에 따라 SK CEO들은 고객과 투자자, 시장 등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회사의 성장 스토리를 제시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 지난해 최 회장은 상의 부회장단에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박지원 두산 부회장 등 IT(정보기술) 업계와 금융계 및 재계의 ‘젊은 피’를 대거 수혈했다. 2년차를 맞는 최태원 호(號) 대한상의가 ‘국가발전 프로젝트’에 이어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데 어떤 작품을 내놓을 지 관심이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2-01-09 09:00
폐어망 재활용해 명품 브랜드에 공급… 해외서 러브콜 ‘K텍스타일’경북 영주에 자카드(패턴이나 무늬가 있는 직물) 제직공장을 운영하는 태평직물은 회사 매출의 98%를 미주와 유럽에서 벌어들인다. 이 회사의 원단은 프라다와 마이클 코어스, 룰루레몬, 토리버치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가방과 의류에 사용되고 있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명품 브랜드에 직물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은 태평직물이 리사이클 나일론과 오가닉 코튼, 생분해 친환경 가공 등 글로벌 패션 추세에 발 빠르게 맞춰 바이어들의 관심을 모았기 때문이다. 김자장 태평직물 대표는 “해마다 계절별로 다양하고 새로운 기법의 신제품을 선보인 것이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들을 만족시킨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의 섬유산업은 1987년 단일 업종으로는 처음으로 100억 달러 수출 실적을 올렸다. 수출산업이 다변화되면서 섬유업은 뒷전으로 밀린 사양산업이라는 말도 나오지만 프리미엄 소재로 제품을 차별화한 중소기업들엔 딴 나라 얘기다. 오랫동안 축적된 제조 기술에 한국인의 창의성을 더해 제품 차별화에 성공한 작지만 강한 기업들의 성공 스토리가 잇따라 들려오고 있다. 프리미엄 기능성 원단과 친환경 소재 원단을 수출하는 코리아실크로드는 투습방수와 발열, 초경량 및 친환경 소재를 중심으로 글로벌 하이엔드 브랜드인 휴고보스, 아르마니, 마이클 코어스 등을 주요 바이어로 갖고 있다. 대구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2001년부터 이탈리아 현지인을 채용해 이탈리아 지사와 디자인스튜디오를 만들고 대구 생산본부와 패션섬유소재 기술연구소도 설립했다. 2011년 미국에서 가장 큰 의류패션 전시회인 라스베이거스 매직쇼에 참가했을 때 일화다. 이 회사 곽노명 대표는 “부스를 옮겨 다니며 꼼꼼하게 품질을 체크하고 있던 아메리칸어패럴 디자인팀에 코리아실크로드 제품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유럽의 패션 트렌드를 소상하게 브리핑하자 즉석에서 10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아메리칸어패럴과 거래한 금액은 100만 달러를 넘는다. 이 회사는 내년엔 바다와 해안가에 버려진 폐어망을 수거해 재활용한 나일론 원단 생산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명품 프라다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이탈리아산 폐어망 재활용 나일론 원단을 대체할 K텍스타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웃웨어용 패션 소재에서 산업용 섬유까지 폭넓은 아이템을 취급하는 베코인터내쇼날은 1993년 설립된 우리나라 1세대 프리미엄 텍스타일 수출 기업이다. 유럽 시장에서 한국 원단은 저가라는 편견의 벽을 깨고 야드(약 90cm)당 10달러를 넘는 고가 원단도 한국에서 수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탈리아 명품 의류인 스톤아일랜드를 비롯해 아르마니, 에르메네질도 제냐, 폴스미스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해 고급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이 회사 정병일 대표는 2006년 5월 이탈리아 스톤아일랜드 본사에서 가진 바이어와의 첫 미팅에서 받은 “코리아가 어디냐”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니까 앉을 필요는 없고 거기에 서서 설명해 보라”는 얘기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정 대표의 열띤 브리핑은 주어진 5분을 훌쩍 넘겼고, 바이어들은 베코의 원단을 수없이 만져 보면서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했다. 원단의 촉감을 천천히 느끼면서 정 대표와의 대화는 점심을 거른 채 이어지며 무려 3시간이 넘어서야 미팅을 마쳤다. “갖고 오신 원단은 저희에게 주고 가세요.” 미터당 1달러짜리 싸구려 원단을 팔러 왔을 거라는 스톤아일랜드 측의 편견을 정 대표가 3시간 동안 무너뜨린 것이다. 최근 패션 시장의 화제로 떠오른 비건 소재 인조가죽 원단을 세계 시장에 공급하는 디케이앤디는 글로벌 합성피혁 전문 기업이다. 이 회사 최민식 대표는 직원 10명을 두고 유통업을 하다가 사옥을 처분한 돈으로 경기 안산의 합성피혁 공장을 인수한 데 이어 법정관리 대상인 베트남 공장도 인수해 국내외 생산 인프라를 확보했다. 이와 함께 부설 연구소를 설립해 기능성 제품뿐 아니라 친환경 제품 개발을 위해 천연피혁을 넘어서는 친환경 합성피혁 제품 연구에 몰두했다. 이런 노력으로 유럽섬유환경인증인 OEKO-TEX 1등급을 땄고, 리사이클 소재를 접목한 프리미엄 에코 가죽을 선보였다. 일본을 뛰어넘는 제품력을 인정받아 막스마라, 월포드, 나이키, 에르노, SMCP그룹 등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최 대표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30% 이상 매출이 올랐다”고 말했다. 이처럼 강소 섬유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은 명품 바이어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혁신적인 노력에 따른 것이다. 여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섬유패션 활성화 기반 마련을 위해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을 통해 매년 100개 이상의 섬유회사를 지원하고 있다. 국내 80여 개 프리미엄 패션 소재 기업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프리미에르비지옹 전시회 참가 자격을 갖고 있다.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1-12-28 03:00
‘품질경영’ 외친 신격호 “가나초콜릿에 쥐 털이? 전부 불 태워뿌라!” [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1921년 11월 3일 태어난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 회장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롯데그룹은 이를 기념해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는 제목의 신격호 회고록(나남)을 최근 발간했다. 회고록에 나타난 신격호의 숨 가쁜 도전과 성공의 스토리는 시계추를 돌린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패전한 일본 땅에선 세상이 180도 달라졌다. 1945년 8월 28일 더글러스 맥아더 총사령관이 일본에 주둔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일본 정부를 총지휘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황폐화된 도시들도 하나하나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도시가 폐허더미가 되면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조선청년 격호도 다시 일어서야 했다. 학교도, 사업도 원위치였다. 격호의 모든 투자금이 미군의 폭격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설에서 운명의 여주인공인 샤롯데는 격호의 편이었다. ●꿈결에 나타난 여성의 정체는?공장 야전 침대에 누운 격호가 깜빡 잠이 들었다. 하얀 피부의 금발 여성이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있었다. 격호가 만든 화장품이었다. 꿈이었지만 너무도 생생했다. 선잠을 자다가 일어난 격호는 이상야릇한 기분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책꽂이에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설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 그려진 샤롯데의 얼굴이 격호에게 다가왔다. 그렇다, 꿈속 여성은 샤롯데였다. 자신도 모르게 ‘롯데!’라는 말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새벽 동이 트자마자 격호는 인쇄소로 달려가 ‘롯데’ 라벨을 주문했다. 화장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전쟁이 끝난 뒤 격호가 주목한 사업은 비누였다. 와세다고등학교 응용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격호는 군수용으로 쓰던 유지와 글리세린 등 원료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하치오지의 남루한 창고에 가마솥을 걸었다. 원료를 끓여 비누를 만들자 순식간에 팔렸다. 여기다 좋은 향을 첨가하고 포장지에 멋진 그림을 넣자 가격을 3,4배로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격호의 첫 사업 성공이었다. 이듬 해 3월 와세다 고교를 졸업했다. 이젠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비누 공장을 도쿄 서부 오기쿠보에 있는 곳으로 옮겼다. 미군의 공습으로 절반이 파괴된 건물을 사들여 수리를 마쳤다.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비누, 크림, 포마드 등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신제품을 개발할 땐 와세다대학 공학도서관을 찾아가 유제품 생산 매뉴얼을 숙독하고 제조공법을 연구했다. ●하나미츠 어른의 빚을 갚다 ‘롯데’ 라벨을 붙인 화장품은 대성공이었다. 작은 유리병에 담아 롯데 상표를 붙이고 고급스럽게 포장을 했다. 종업원 10여명이 원료 구입과 생산, 포장, 배송, 수금 등을 나눠 맡았다. 수입이 너무 많아 밤 새워 돈을 정리하기도 했다. 돈뭉치가 밀가루 포대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날이 잇따랐다. 당시 번듯한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월급이 200엔 남짓할 때 격호의 한달 수입은 4만 엔이나 됐다. 직장인 200여명이 벌 돈을 혼자서 벌어들인 셈이다. 거래 은행에서는 격호를 귀빈 대우했다. 예금이 20만 엔을 넘을 즈음 은행에서 6만 엔을 인출했다. 그리고 격호에게 투자금으로 6만 엔을 맡겼던 하나미츠 어른을 찾아갔다. “어르신! 6만 엔을 돌려 드리려 왔습니다. 저를 믿고 투자해 주신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미츠 부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미츠 부부와 격호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무 것도 없는 격호를, 오직 성실과 근면, 그리고 정직하다는 것을 신뢰하고 맡긴 6만 엔은 미군의 폭격으로 한 순간에 공중의 재가 돼버렸다. 그런데 불과 2년도 안 돼 빚을 갚으러 온 조선 청년을 보고 하나미츠 어른은 자신이 사람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본전 장사만 하신거지요. 이자는 못 받으셨으니 도쿄에 작은 집 한 채를 사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사시면서 롯데공장에도 놀러 오십시오.” 두 부부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조선청년 격호가 기를 쓰고 하나미츠 어른의 빚을 갚으려 한 것은 돈 거래를 넘어선 신의(信義)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식민지 조선의 한 청년에게 성실성 하나만 보고 거액의 돈을 맡긴 사람을 배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격호는 조선에서 ‘조센징’ ‘바카야로’라는 멸시를 받고 자랐다. 근거 없는 일본인들의 조선인 비하가 팽배했지만 한국인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격호 자신이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미츠 어른은 격호가 마련한 도쿄 자택에서 여든이 넘도록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의 아들과 딸도 롯데에 입사해 정년퇴직 때까지 회사를 다녔다. 인생에 큰 도움을 준 어른에게 격호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결초보은(結草報恩)한 것이다. 대를 이은 인연에는 격호의 따뜻한 마음과 사람과의 인연을 중시하는 인생 철학이 연계돼 있었다.●롯데껌으로 승승장구 화장품 사업에 성공한 격호는 1947년 초 거래처 배달을 마치고 온 직원으로부터 미국산 껌을 하나 건네받는다. 난생처음 껌을 씹어 본 격호는 달콤하면서도 코끝을 톡 쏘는 향기에 홀딱 반하고 만다. 조악한 일본 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품질이었다. ‘롯데 브랜드로 고급 껌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1947년 4월 격호는 추잉껌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선 가내수공업 수준의 공장을 포함해 400여개 껌 공장이 난립해 있었다. 우선 제품을 어떻게 차별화할지를 생각했다. 공장에 직원들이 하얀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도록 했으며 손 씻기, 손톱깎기, 이발 등으로 청결하다는 이미지를 주도록 했다. 껌을 절단하고 포장하는 여직원들의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모자를 반드시 착용토록 했다. 여기다 약제사 1명을 고용해 생산라인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도록 했다. 공장 바닥은 티끌 하나 안 보이도록 깨끗이 청소했다. 공장을 방문한 과자대리점주들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우리 아이에게 줄 껌이라면 롯데 껌을 사야겠네!” 격호는 훗날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 유명한 CM송으로 “껌이라면 역시~ 롯데 껌!”이라는 가사를 당시 대리점주들의 탄성에서 착안해 만들었다. 화장품에 이어 오늘의 롯데그룹을 만든 롯데 껌은 이 때부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950년 3월 신주쿠 하쿠닌쵸 3-270번지에 롯데제과 공장을 신축하면서 신격호의 롯데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격호는 선진국의 고급 제품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하루에 껌을 20~30개씩 씹느라 턱이 아파 밤에 잠을 설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격호가 신동주와 신동빈을 낳은 다케모리 하츠코라는 여성과 만나 결혼한 것도 이 즈음 일이다. 고향에 두고 온 아내가 출산 후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한 격호는 홀아비 신세였다. 하츠코는 유지 원료 도매상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20대 초반 여성이었다. 대학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하츠코의 차분한 성격과 잔잔한 미소에 격호가 호감을 갖게 된 것이다. 서른 나이에도 공장 한 구석에서 숙식을 하던 격호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구애를 한다. 하츠코는 ‘마음이 맞고 사람만 좋으면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두 사람은 1950년 9월 30일 고이와에 있는 처가 동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야근 직원의 산재(産災)에 연립주택 한 동을 건네 롯데 브랜드가 히트를 치면서 주문이 폭주할 무렵 격호의 공장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다.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던 경리직원 한 명이 야근을 하다가 회사에서 쓰러진 것이다. 직원은 며칠 뒤 사망했다. 주문 폭주에 비명을 지르던 회사 분위기가 한 순간에 싸늘해졌다. 동료의 죽음에 직원들은 일손을 잡지 못한 채 안절부절 했다. 격호도 큰 충격을 받았다. 앞만 보고 달려온 그였기에 자신이 고용한 직원이 열심히 일을 하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회사에서 고생하다가 하루아침에 순직을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 했다. 돈만 바라보고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회사가 유족의 생계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겼다. 격호는 직원 장례가 끝난 뒤 고인의 부인을 회사로 정중하게 모셔 위로했다. 그리곤 등기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부군께서 롯데를 위해 열심히 일하셨는데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을 키우셔야 하니 이 연립주택에 입주해 사시고 나머지 세대는 세를 놓아 생활비와 자녀 학비로 쓰십시오.” 격호가 건넨 문서는 다세대 연립주택 한 동(棟)의 등기문서였다. 부인은 깜짝 놀랐다. 이만큼 배려해 주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한 순간에 가장을 잃었으니 회사를 원망할 마음이 컸을 텐데 부인은 울먹이면서 고마워했다. 그래도 격호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어떤 보상을 하더라도 단란한 가정을 깬 것을 돈으로 메울 수 있을까.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싸늘했던 회사 분위기도 되살아났다. 격호에게 달려와 눈물을 글썽이는 직원들도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조선청년 신격호가 일본에서 성공한 비결을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기업을 일구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만약 당시 회사의 성장에 도취해 직원들의 아픔을 달래지 않았다면 롯데라는 기업은 어떤 평판을 받았을까. 기업이 영구 존속하려면 최고경영자가 직원을 존중하고 직원의 아픔을 가족처럼 달래는 것이 필요하다. 매출을 더 올리는 것보다 직원과 사회를 보듬는 것이 기업 경영에 더 중요하다는 것을 격호는 일찌감치 터득한 것이다. ●초콜릿에 묻은 가느다란 실 하나, 2억 엔 원료 불태우다 화장품에서 시작해 껌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아 탄탄한 사업 수완을 보여준 격호는 마침내 초콜릿 사업에서도 승부수를 띄운다. 롯데 가나초콜릿을 선보이기 위해 격호는 스위스 출신의 초콜릿 전문가를 초빙했다. “제품이 아니라 예술품을 만들어 주세요. 원가가 비싸더라도 품질이 최우선입니다.” 제품을 대하는 격호의 경영관이 이 한마디에 다 녹아 있었다. 롯데 가나초콜릿이 일본 열도를 휩쓸 당시인 1964년 말 롯데는 처음으로 대졸 신입사원공채를 모집했다. 선발된 공채 1기생에 한국 대학 졸업생 6명이 포함돼 있었다. 화공, 기계, 전기 전공 학생들로 뛰어난 에이스들이었다. 격호는 이들에게 첫 두 달은 카카오 콩이나 설탕 부대를 나르는 허드렛일을 시켰다. 현장의 밑바닥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신입사원을 뽑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공장장은 전화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숨가쁘게 말했다. 공장으로 달려온 격호는 상황을 파악하곤 기가 막혔다. 간밤에 출고한 초콜릿에 대한 품질검사를 하다가 제품에서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는 보고였다. 현미경으로 찾은 작은 물체를 직접 확인해보니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었다. “이기 머꼬?”“잘 모르겠습니다. 단정할 순 없지만 창고에 쌓아둔 카카오 콩 부대에 쥐 한 마리가 들어가지 않았나 추정할 뿐입니다.”“그라모 이기 쥐 털일 수도 있다는 말이가?” 격호는 아찔했다. 아니 등골이 오싹했다. 롯데 제품에서 쥐 털이 발견됐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바로 공장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출고 전에 발견돼 다행이었다. “전량 불 태워뿌라!” 10톤짜리 탱크 3개에 가득한 초콜릿 원료를 모두 없애라고 지시했다. 원료 값만 2억 엔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회사로선 엄청난 손실을 각오해야 했다. 이날 출고분 뿐 아니라 요 며칠 사이 만든 제품과 원료를 모두 불사를 것을 지시했다. 공장장과 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손해를 보더라도 격호가 줄기차게 외친 품질경영을 스스로 무너뜨릴 순 없었다. 품질에서만은 소비자가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격호의 신념이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1-11-21 09:00
KAIST 기부 ‘휴보 아빠’ 200만원 주식이 50억 된 사연[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지난 달 25일 카이스트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휴보(HUBO) 아빠’로 불리는 오준호(67)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명예교수가 학교에 발전기금으로 50억3900만원을 내놓은 것이다. 오 교수는 국내 최초로 이족보행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든 세계적 로봇공학자로 손꼽힌다. 지난해 2월 정년퇴임한 그가 50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하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10년 전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교수로 ‘교원 창업’을 하면서 학교에 200만원어치 주식을 내놓은 게 50억원의 거금이 됐다.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일 대전시 유성구 카이스트 인근에 자리 잡은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찾았다. 이 회사는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2021 로보월드’에서 사족보행 로봇을 뒤집어 논란이 됐던 제품을 만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서남표 총장, ‘실험실 창업 해보자’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오 교수는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에서 공학박사를 받은 뒤 카이스트 기계공학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2000년대 초 카이스트에서 기술이전센터장과 신기술창업지원단장을 맡으면서 기술 이전과 학생 창업 특허 등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엔 “연구중심대학에서 무슨 창업이냐”며 교수가 창업하는 것을 학자의 ‘외도(外道)’로 보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기술이 사장(死藏)되는 것은 문제라면서 ‘연구만 하는 기술은 어디다 쓰느냐’는 정부의 따가운 눈총도 받을 때였다. “2005년부터 카이스트 휴머노이드로봇연구센터를 이끌어 두 발로 걷는 ‘휴보’를 연구실에서 만들었어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경제난이 고조되자 정부에서 정책자금을 풀면서 미국 대학에도 많은 돈이 지원될 즈음이었습니다. 2011년 미국 대학에서 휴보 6대를 구매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휴보 한 대에 40만 달러라고 했더니 6대를 사겠다고 240만 달러 견적서를 보내왔어요. 2,3주 뒤엔 싱가포르 전자연구소에서도 휴보 2대를 연구용으로 쓰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엉겁결에 휴보 8대 선주문을 받게 된 것이죠.” ‘휴보 아빠’로 불리던 오 교수는 연구용인 휴보를 상업용으로 팔 경우 AS 문제가 있어 쉽지 않다고 생각해 고민의 날이 이어졌다. 오 교수의 고민을 들은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 “실험실 창업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대학이 상아탑으로 불릴 때 교수가 창업을 하는 데 대한 절차나 행정이 무척 까다로웠다. 특히 ‘외도’라는 학내외의 눈총이 따가운 시선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 총장의 강력한 권유에 힘입어 실험실 창업에 뛰어들게 됐다. 운명적인 선택이었다. ● 지분 20%를 학교에 기부하다지금은 여러 규제가 풀렸지만 당시엔 교원 창업은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교수가 창업한 뒤 1년 동안은 회사 대표이사를 맡아야 했다. 1년 동안 교수 신분을 갖고 휴직이나 겸직이 가능했다. ‘1+1 조항’이 있는데 휴직·겸직을 1년 더 연장할 수 있다. 문제는 창업 2년이 지난 뒤였다. 계속 회사 대표를 맡으려면 교수직을 내려놓든가 그렇지 않으면 회사 경영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 오 교수는 창업 1년 뒤 레인보우로보틱스 대표 자리를 카이스트 제자인 이정호 박사에게 넘겼다. 그리곤 경영에선 손떼고 기술자문을 맡았다. “자본금 1000만원으로 출발했어요. 2011년 창업 당시 회사 지분의 20%를 학교에 기부하는 게 룰이었어요. 주식 400주(200만원 어치)를 학교에 냈습니다. 이러니 누구도 창업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20% 의무기부 조항이 2%로 낮춰졌습니다. 교원 창업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후 자본금을 1억원으로 늘렸는데 추가로 학교에 더 기부할 필요는 없었어요.” 미국과 싱가포르 등에 휴보 10대를 팔기로 하고 생긴 40억원은 시드머니가 됐다. 창업 후 4,5년 동안 누적 매출이 130억원 가까이 발생했다. 오 교수의 석 박사 제자 등 직원 15명을 둔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이렇게 출발했다. 회사가 어려웠을 때도 현금 20억~30억원은 항상 비축해 두고 있었다. 여느 벤처회사와 달리 자금사정에 여유가 있었던 것은 휴보의 뛰어난 기술력과 잠재적 성장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2015년 재난로봇 경연대회 ‘팀카이스트’ 우승을 거머쥐다2015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퍼모나 시에서 열린 재난로봇 경연대회 ‘다르파 로보틱스 챌린지(DRC)’는 오 교수에게 한국 로봇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였다. 오 교수가 주도한 팀카이스트(TEAM KAIST)의 ‘휴보’가 미국팀의 ‘아틀라스(Atlas)’를 제치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2004년 오 교수가 한국의 첫 인간형 로봇을 만든 후 11년 만에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전 세계 로봇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진검승부를 벌이는 대회였습니다. 걸어 다니는 로봇 10대가 참가했는데 팀카이스트가 당당히 1등을 했지요. 당시 카이스트 휴머노이드로봇연구센터장을 맡고 있었는데 사실은 레인보우로보틱스가 일궈낸 기술의 승리였습니다. 그 때 잇단 투자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고사했어요. 외부 투자를 받을 만한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어요.” 2017년 회사는 벤처캐피탈 투자를 유치한다. 한국투자파트너스 KTB네트워크 SBI인베스트먼트(소프트뱅크인베스트먼트) 등에서 100억원을 내고 지분 14.5%를 가져갔다. KUDOS는 지분 4.5% 투자자다. 빠른 시일 내에 주식시장에 상장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투자 조건이었다.● 2번의 상장 실패, 지난해 최고 경쟁률로 코스닥 입성세계적인 로봇 기술을 인정받고 벤처캐피털의 투자도 유치했지만 주식시장에 상장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18년 투자 유치 후 상장신청서를 냈지만 자격 미달로 주간사에서 철회를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이듬 해 회사 면모를 갖춰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최종 심사에서 낙방했습니다. 주력 제품인 협동로봇(인간과 함께 일하는 로봇) 개발에 전력해 시제품까지 내놓았지만 주력분야 매출은 아직 발생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로 지적됐습니다. 기술력은 A를 받았지만 이 로봇이 과연 시장에서 팔릴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것이죠. 주간사인 미래에셋대우에서 상장 후 소화되지 않는 주식은 모두 인수한다는 주간사보증 트랙을 내걸었지만 증권거래소에서 마지막 단계에서 퇴짜를 맞았어요. 당시엔 실망이 컸지만 이것이 절치부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마침내 지난해 10월 매출 50억원인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성장성을 중시한 기술상장 특례로 예비심사를 통과했다. 적자액은 20~30억원이나 됐지만 미래 성장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청약경쟁률이 1470대 1로 코스피 코스닥 사상 통틀어 최고였다. 카카오게임즈 하이브 보다도 인기가 높았다. 1만원 공모가(액면가 100원)는 첫날 ‘따상’(시초가가 공모가의 2배에 상한가로 종가 마감)을 치고 하루 조정 후 3일째 다시 상한가로 마감했다. 카이스트에 주식으로 기부한 400주는 무상증자와 액면분할을 거치면서 어느덧 20만주가 됐다. 카이스트는 18만주 가량을 매각해 50억여 원의 거금을 챙기게 됐다. 카이스트 39번째 창업 교원인 오 교수는 10년 만에 200만원을 50억원으로 만들어 쾌척했다. 많은 창업과 도전이 있었지만 연구와 창업을 동시에 하면서 이런 성과를 낸 것은 전례가 없었다. ‘오준호기금’은 용처를 아직 정하지 않고 앞으로 카이스트에서 필요한 곳에 쓰도록 했다.● 1500억 주식부자, 월급은 회사 환원, 법인카드도 없어레인보우로보틱스 주식 절반을 갖고 있는 오 교수는 이제 3000억 원짜리 회사의 최대 주주로 주식 가치를 환산하면 그의 재산이 1500억원에 달한다. 그에게 돈은 어떤 의미일까? “아직 보호예수 기간에 걸려 주식을 팔려고 해도 현금화할 수 없어요. 더욱이 대주주에겐 주식이 회사를 지키기 위한 것이므로 현금화하기 어렵습니다. 대주주가 주식을 팔면 누군가 M&A(인수합병)하지 않겠어요? 우리사주를 받은 직원들이 신이 났지요. 주식시장에 상장하기 4년 전에 지분 5%를 직원들에게 거의 공짜로 나눠 줬어요. 공모 전 주식 액면가로 줬는데 시가(時價)로 치면 200~300억원 가량 될 겁니다. 임원 말고 직원들은 평균 2억원 쯤 혜택을 받았을 겁니다. 기업공개 땐 우리사주 몫 2%를 30% 할인된 가격으로 직원들에게 주고 투자금 70%는 대여금으로 융자해줬습니다. 30억원을 챙긴 임원은 ‘먹튀’한 경우도 있었지요.” 레인보우로보틱스엔 회식(會食) 문화가 없다. 이러다보니 회계상 처리하는 ‘회의비’ 항목도 없다. 골프와 술을 하지 않는 오 교수는 법인카드도 갖고 다니지 않는다. 일을 하다가 늦으면 짬뽕을 시켜먹는 정도라고 한다. “제가 대주주인데 회사에 돈 들어왔다고 챙기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돈을 챙기면서 다른 임직원들에게 회사에 헌신하고 희생하라고 말을 할 수가 없겠지요. 저는 기술 자문만 해주는 정도로 역할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회사 통장을 보거나 회계 보고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어요. 인사 문제에도 일절 간여하지 않습니다. 경영 재무 인사에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아요. 외부에서 투자금을 받기 전엔 월급도 한 푼 받지 않았어요. 4,5년 일하니 월급으로 5억~6억 원 정도 쌓였어요. 회사에서 넣어준 퇴직연금 2억5000만원도 나중에 회사계정으로 넣었어요. 우리 회사는 판공비나 접대비가 없습니다. 내가 희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라면 안되지요.”● ‘자신에 정직하지 않으면 스스로 망한다’오 교수는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세계적인 회사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휴보’를 만들 때부터 모든 기술을 이해하고 기술을 지배하지 않으면 승자가 될 수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물건은 사올 수 있지만 기술을 장악하지 않으면 언젠가 다른 기술에 종속될 수 있다고 본다. 기술을 개발하고 내재화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떤 계약이든 연구용역을 받든 고객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뻥튀기하거나 과장하는 것은 무척 싫어합니다. 저는 ‘세계 최고’라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것만 얘기합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창업이 쉬운 게 아니지만 결국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실과 근면 정직이 바탕이 되고 여기에 창의력이 더해지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국밥집을 해도, 택시기사를 해도 성실하고 근면하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인테리어나 도배업을 해도 성실하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지요. 게으르고 정직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직하지 않다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실패를 하면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면서 환경이 따라주지 못했다고 푸념하지만 사실은 내부 요인에 의한 것입니다.” 오 교수는 기부를 생활화하고 있다. 2015년 다르파 챌린지 수상금 200만 달러 중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1억원을 한국로봇학회에 기부해 미래의 과학 꿈나무에게 매년 ‘오준호기술상’을 수여하고 있다. 복지회 등에 월 5만원, 호스피스재단에 매달 10만원을 꾸준히 기부한다. 정치후원금으로 10만원, 100만원을 할 때도 있다. 평소에 하는 잔잔한 기부도 하지만 기회가 있을 때 큰 기부를 하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 “세금 내고 자식 물려줄 바엔 재산 기부할 것”앞으로의 포부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대주주로서 회사를 키우고 가치를 높이는 데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곤 직원과 사회 학교 어디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대부분의 재산을 기부할 생각입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끝인데, 세금이나 자식에게 넘겨줄 바엔 유용한 곳에 쓰이면 좋겠지요. 우리 청년들이 어렵다 힘들다 그러는데, 우리 세대는 훨씬 어려웠어요. 이태리식당 즐겨 찾고, 1년에 한번 해외여행 다니고, 젊을 때 좋은 차를 사고, 주변 환경과 입지 좋은 집에 사는 것을 우리 세대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회사에선 한심해 보이는 직원이 행복해 보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같은 곳에 가보면 1960년대 서울 청계천 같은 곳에 사는 아이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아요? 월급 100달러 타려고 아등바등하다가 한국을 기회의 땅으로 찾아오는 외국인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요. 한국에선 성실 근면 정직하면 누구나 성공합니다. 도대체 ‘헬 조선’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모두가 어렵다는 청년 세대에게 오 교수는 위로의 말 보다는 따끔한 충고로 격려를 대신했다. 창의성까지는 기대하기 어려워도 근면 성실 정직만 갖춰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1-11-14 09:00
부관연락선 탄 조선청년 신격호, 日시모노세키항에서 폭행당하다 [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1921년 11월 3일 태어난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 회장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롯데그룹은 이를 기념해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는 제목의 신격호 회고록(나남)을 최근 발간했다. 회고록에 나타난 신격호의 숨 가쁜 도전과 성공의 스토리는 시계추를 돌린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일본 폭격기가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한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됐을 때 신격호는 나이 20살의 청년이었다. 당시 그는 고향인 울주군 언양 근처인 경남 양산에서 양(羊) 지도기술원 자격증을 갖고 양을 목축해 양털을 공급하는 경남종축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농촌소득 증대사업으로 알고 있었던 격호는 머지않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전쟁에 대비한 군복 생산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면 서기와 비슷한 월급인 30원을 받으면서 안정된 생활에 젖어들 무렵. 일제의 전시총동원이 떨어지면서 격호는 심란한 마음을 독서로 달랬다. 이광수 현진건 염상섭의 소설과 함께 백석(白石)의 시집 ‘사슴’을 읽는 문학청년이었다. 일본 극작가 겸 소설가 야마모토 유조의 에세이 한 구절은 청년 격호의 가슴에 강렬하게 다가왔다. “하나 뿐인 자신을, 한 번 뿐인 삶을, 진정으로 살지 않으면 태어난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동경에 가서 더 공부를 하고 싶슴더’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후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기쁨은 잠시, 11남매의 장남인 격호에게 자식은 무거운 책임감이기도 했다. 야마모토 유조 작가의 말처럼 “태어난 보람을 찾아 큰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열망이 청년 격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새까만 번민의 밤을 잠 이루지 못한 나날이 며칠째 이어졌다. 격호는 결국 아버지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는다. “동경에 가서 공부를 더하고 싶슴더.” “곧 애비가 될 놈이 무슨 헛소리냐?”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반응도 싸늘했다. 답답한 마음에 작고한 큰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매사에 진취적이고 격호를 아끼는 큰 아버지였다. “큰 아부지! 사내대장부가 울주 깡촌에서 양털만 깎고 살기엔 너무 억울함더. 대처(大處)에 가서 대망을 이루고 싶어예!” 무덤 뒤 산 골짜기에서 솔개 한 마리가 창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큰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니 이름대로 해보거래이! 임금에게도 직언하는 격군심지비(格君心之非), 사물의 이치를 바로 보는 격물치지(格物致知), 그러라고 니 이름에 격(格)을 쓴 거 아이가!” 그 길로 격호는 다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떠나리라. 가서 반드시 큰 꿈을 이루리라.’●시모노세키 부관연락선 7시간 항해 끝 격호를 기다린 것은? 일제 식민지 치하인 조선, 더욱이 전시 상황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가까스로 사촌형님의 도움을 받아 울산경찰서장을 찾아갔다. 위세가 대단했던 일본인 서장은 뜻밖에 격호를 우호적으로 대해줬다. 가족 몰래 여행허가증을 받았다. 할아버지 부모님 형제 아내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막무가내 부산으로 향했다. 수중에 있던 돈은 110원. 네 달치 월급이었다. 양복을 하나 사 입고 시모노세키 행 부관연락선 배표를 한 장 사고 나니 83원이 남았다. 일본에 가서 무엇을 할지 누구를 만날지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부관연락선 3등실에 몸을 실었다.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7시간 동안 배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심하게 토를 하는 바람에 악취가 진동했다. 일본 혼슈(本州) 남서부 시모노세키항에 내린 격호를 기다린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니었다. 여행허가증만 믿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특별고등계 취조실에 끌려갔다. 사상범을 다루는 악명 높은 경찰 조직이었다. 격호는 밤을 새워 백지 10여장을 빼곡하게 채워야 했다. 출생 관계, 학교, 직장, 부모 형제, 여행 목적 등 쪼그리고 앉아 일본에서의 첫 밤을 이렇게 꼴딱 새웠다. “야마모토 유조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그 작가는 신성한 전쟁에 반대하는 분열주의자 아닌가?” 형사가 주먹으로 격호의 얼굴을 후려쳤다. “너 공산주의자지? 공산당에 가입하려고 일본에 온 빨갱이지?” “공부하러 왔습니다. 학교에 다니려고요. 소설가 지망생으로 문학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또 다시 주먹질이 이어졌다. 코피가 터져 입술 주변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형사는 다시 백지 10여장을 또 던져줬다. 진술서를 쓰는 동안 옆방에서 고함소리와 채찍 소리,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식민지 조선의 한 청년이 일본에 들어오는 길은 이처럼 멀고도 험난했다. 울산경찰서장의 여행허가증을 받게 된 경위도 샅샅이 조사했다. 긴 취조와 폭행 끝에 마침내 취조실을 나서는 순간 시모노세키의 하늘은 노랗게 보였다. 그리고 어지러웠다. 도시 풍경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청년 격호는 ‘나중에 큰 인물이 되면 이런 괄시를 받지 않을 거야’라며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우유배달원에서 대리점 소(小)사장으로 도쿄에 언양보통학교를 같이 다닌 고향 친구가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단칸방에 동생과 함께 자취하는 친구에게 얹혀 산 것이 격호의 일본 생활 시작이었다. 운이 좋게도 동네 우유대리점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말을 듣고 금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어두운 새벽 손수레를 끌고 500ml짜리 우유병 100여개를 싣고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근면하고 성실한 격호를 눈여겨 본 우유대리점 사장은 도쿄 생활에 적응할 무렵 배달구역 두 군데를 떼어주며 독자적으로 운용해보라고 했다. 꼭두새벽에 하는 험한 우유 배달을 그만두는 배달원이 적지 않았다. 그 때마다 격호가 두세 명 몫을 해냈다. 많을 때는 우유 350병을 돌리기도 했다. 우유 배달 후에는 빗자루를 들고 집하장 바닥을 쓸고 물걸레로 닦았다. 결근이나 지각 한번 하지 않는 격호를 대리점 사장은 눈여겨 봐온 것이다. 도쿄에 온지 불과 넉 달 만에 작은 대리점의 사장이 됐다. 격호는 배달원 2명을 고용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유를 배달했다.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노인을 위해 양유(羊乳)를 수소문해 배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유 배달 길에 만난 낯익은 신문보급소 총무는 “배달원 소년이 다쳤다”며 울상을 지었다. 격호는 이 때부터 우유와 신문을 함께 배달했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수입을 더 늘릴 수 있었다. 다다미 4개짜리 방을 얻어 자취 친구 집 신세를 면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배움과 문학을 놓지 않았던 청년기 격호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트럭기사 조수로, 건설 잡역부나 전당포 점원으로도 일했다. 공부를 하려면 우유대리점 만으로는 생활비와 등록금 책값을 조달하기가 빠듯했기 때문이다. 2년제 울산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한 격호는 와세다실업학교 야간부 4학년 편입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부기(簿記)나 주산, 제도(製圖) 등을 배웠다. 격호 또래의 대학생을 보면서 얼른 중등과정을 마치고 고등교육을 받고 싶었다. 와세다 실업학교를 졸업한 격호는 교무주임으로부터 와세다고등학교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학비가 싼 데다 성적이 좋으면 산학협동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색이 짙은 1943년 4월 격호는 와세다고 응용화학과에 입학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와세다고 2학년생 격호에게 마침내 창업의 기회가 찾아왔다. 전당포와 고물상을 운영하던 64세의 하나미츠 어른을 우연히 만났다. 그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회계장부를 말끔하게 정리해준 격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와세다고에서 커팅오일 개발연구소에 배치돼 일하던 격호에게 그는 자신의 전 재산 6만 엔을 맡겼다. 커팅오일 제조업을 생각한 하나미츠 어른은 “자네가 우리 점포에서 일할 때 눈여겨봤다”며 “단 한번도 지각하지 않고 1전 한 푼의 금전 사고도 없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회계장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창의성을 보였다”고 감동했다. 수익금은 2대 1로 나누는 조건이었다.●모든 투자금, 폭격으로 사라지다 성실과 근면, 노력에다 창의성까지 갖춘 격호를 일본인들은 주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은 격호는 인부 대여섯 명을 고용해 오일 제조설비를 갖추고 원료인 광유와 유지도 조달했다. 학생창업가가 된 것이다. 마침내 시제품이 나와 공업청에 품질 검사를 의뢰하고 본격적인 판매를 준비했다. 설레는 격호에게 그러나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도쿄 시가지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8만 명의 사상자와 이재민 100만 명이 생겼다. 격호의 공장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막 판매를 시작하려는 때 투자금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라진 것이다. 모든 공장설비가 없어졌다. 낙담한 격호, 그렇다고 언제까지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행히 투자금이 절반가량 남아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도쿄 서쪽 하치오지 지역에 비어 있는 섬유공장을 발견해 재기를 노렸다. 여기에 오일 제조설비를 갖췄다. 납품처는 이미 확보해놓은 상태였다. 생산품을 쌓아놓고 납품 기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1945년 8월 1일 하치오지 상공에 B-29 전폭기가 떼를 지어 나타났다.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또 다시 시작됐다. 하치오지는 삽시간에 초토화돼 버렸다. 출하를 눈앞에 둔 격호의 공장도 잿더미가 돼 버렸다. 눈에선 피눈물이 났다. 하나미츠 어른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헛웃음만 지었다. 그의 부인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하나미츠 어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격호는 엎드려 사죄하고 빌고 또 빌었다.●패전 일본, ‘샤롯데’가 신격호에게 손짓하다 “어르신, 6만 엔은 제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하나미츠 어른은 그러나 “빌려준 돈이 아니고 투자한 돈이니 아무 잘못도 없는 당신이 갚을 필요가 없네”라며 격호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모든 것을 잃고 며칠을 보내자 1945년 8월 15일이 됐다. 일본이 항복하고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것이다. 시모노세키항은 부산으로 가려는 한국인들로 연일 초만원이었다. 고향을 등진지 어느 덧 3년 8개월. 격호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학업을 마치지도 못했고, 호주머니엔 돈도 몇 푼 남아 있지 않았다. 더욱이 하나미츠 어른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더 이를 악물었다. 전쟁이 끝난 일본에선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패전으로 망한 일본, 달라진 세상은 격호에게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였다. 우유배달 일을 하면서 자주 서점을 찾아 독일의 문호(文豪)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단숨에 읽은 격호. 소설의 여주인공 ‘샤롯데’는 격호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1-11-07 09:00
“미래에셋은 ‘2세 경영’ 없어… 우수 샐러리맨에 CEO 자리 열어줄것”미래에셋금융그룹이 전문경영인 체제로 변신하면서 대표이사에 정년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오너의 세습 경영을 하지 않는 대신 조직의 동맥경화를 예방하기 위해 대표이사 정년제라는 독특한 카드를 채택하기로 한 것이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사진)은 2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년이면 미래에셋 창립 25주년을 맞게 된다”며 “1997년 창업 때 30대였던 주역들이 물러날 시기에 즈음해 조직을 보다 젊게 가져가기 위해 이 같은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한국 재벌들이 지속가능한 역사를 일궈갈 수 있었던 데는 2세, 3세, 4세로 경영권이 물려지면서 임원들의 활발한 세대교체도 동시에 이뤄졌기 때문”이라며 “재벌 경영의 공과를 분석하면서 좋은 점은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슬하에 두 딸과 아들을 둔 박 회장은 세 자녀에게 미래에셋 지분은 넘겨주지만 자녀들이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향후 미래에셋 경영에 ‘2세 경영’은 없으며 그 대신 세 자녀는 확대이사회에 참석해 대주주로서 의견을 제시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 회장은 “다만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한 한국 대기업에서 발견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며 “노쇠한 최고경영자가 전문경영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자리를 고수해 조직의 역동성과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대표이사 등 주요 임원에 대해선 나이가 들면 자동으로 물러나도록 정년제를 회사 정관에 도입해 ‘대리인비용(agency cost)’을 줄이겠다는 포석이다. 박 회장은 “삼성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는 활발한 세대교체를 통해 조직을 보다 젊게 가져가 격변하는 경영환경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미래에셋은 우수한 샐러리맨들이 경쟁을 뚫고 최고경영자가 되는 문호를 활짝 열어놓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3년 전부터 그룹의 주요 대표이사들에게 자신을 대체할 만한 차세대 경영자를 3명가량 매년 말 추천해 핵심 인재풀에 넣어 차기 리더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박 회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즈음 회사를 창업할 당시 65세가 되면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갖고 있었으며, 창업 멤버들과 인식을 공유했다”고 덧붙였다. 1958년생인 박 회장은 만 63세로 수년 전부터 은퇴를 고민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래에셋의 대부분 국내 사업은 그룹 계열사 대표들에게 맡겨 시스템을 통해 움직이도록 하고 있으며 박 회장은 글로벌 투자전략 수립과 대규모 투자의사 결정에만 참여하고 있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이 100년 기업으로 존속, 발전하기 위해선 과감한 세대교체로 젊은 조직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필요하며, 이 시기를 자신의 은퇴 시점 전후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1-10-27 03:00
박현주 “미래에셋에 ‘2세 경영’은 없다…전문경영인 체제로 갈 것”[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인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조직의 동맥경화를 막기 위해 대표이사들에 대해서도 정년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창업주인 박 회장 은퇴 후를 대비해 미래에셋금융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면서 조직을 한층 젊게 가져가겠다는 포석이다. 박 회장의 세 자녀들은 현재 미래에셋에 근무하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너 경영’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른바 한국 재벌의 등식인 2세 경영, 3세 경영이 미래에셋에서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박 회장은 21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 같은 미래에셋 경영 후계구도의 청사진을 밝혔다. “자녀들은 하고 싶은 일 하게 내버려둬, 지분으로 이사회 참여”1958년생으로 올해 나이 63세인 박 회장은 오랫동안 미래에셋의 경영 구도를 고민해왔다. 슬하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둔 박 회장은 자식들에게 주식 지분은 물려줄 계획이지만 미래에셋의 경영 일선에는 참여하지 않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대주주 자격으로 경영권은 갖겠지만 회사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기겠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두 딸과 아들은 회사 지분을 가진 대주주로서 이사회에 참여하는 선에서 머물 것”이라며 “세 아이들에게도 이런 얘기를 했으며, 경영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박 회장의 첫 딸인 하민 씨는 지난 6월 미국 유학 시절 만난 미국 스탠퍼드대 생물학 전공 연구원 겸 교수와 결혼해 미 서부에서 생활하고 있다. 미국 코넬대 사학과를 졸업한 하민 씨는 스탠퍼드대에서 MBA를 마쳤으며 글로벌 컨설팅회사 매킨지에서 인턴을 한 뒤 미래에셋에서는 사원으로 부동산투자 업무를 하면서 2년가량 근무한 경력이 있다. 지금은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 벤처캐피털 회사에 취직해 벤처캐피탈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둘째 은민 씨는 아직 학생으로 미국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MBA 과정에 모두 합격해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 준범 씨는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한 뒤 금융업과는 무관한 국내 한 중견기업에 근무하고 있다. 게임에 관심이 많아 창업을 하거나 기업 인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박 회장은 자녀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좋다”면서 굳이 미래에셋 경영에는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강조해왔다. 다만 자녀들이 상속받은 지분을 보유하면서 회사 이사회에 참석하는 방식에 국한해 경영에 참여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도 매달 이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연 두 세 차례 열리는 확대이사회에 대주주 자격으로 참여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라고 한다. 내년에 창립 4반세기, 39세에 창업해 어느덧 60대 미래에셋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인 1997년 박 회장이 미래에셋캐피탈로 창업한 것이 모태(母胎)로 올해 창립 24주년을 맞았다. 내년이면 창립 4반세기가 되는 것이다. 만 39세에 창업한 박 회장은 어느덧 60대에 들어서 있다. 올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자산기준 대기업 서열로 미래에셋은 20위에 올라 있다.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생명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계열사가 38개에, 자산 규모가 19조3330억원에 달한다. 금융회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20대 그룹 안에 들어 있다. 창업 멤버였던 최현만 수석 부회장이 1961년생이고, 최경주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은 1962년생이다. 하만덕 미래에셋생명 부회장이 1959년생, 조웅기 미래에셋대우 부회장은 1963년생이다. 미래에셋캐피탈 창업 당시 30대였던 이들이 이젠 60세 언저리의 고령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박 회장은 지난해 8월 서울 을지로 미래에셋 본사가 있는 센터원빌딩 35층에 있던 회장 집무실을 뺐다. 이 공간은 현재 최현만 수석부회장이 사용하고 있다. 그룹의 굵직한 의사결정에만 참여하는 박 회장은 글로벌투자 전략을 수립하고, 금융산업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명함에는 직함이 미래에셋 글로벌투자(GI)전략가로 돼 있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은 앞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게 될 것”이라며 “여느 재벌그룹처럼 2세, 3세로 물려주는 오너의 세습경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청년들과 샐러리맨의 꿈인 ‘사장’을 미래에셋에서도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박 회장은 “많은 인재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미래에셋의 CEO(최고영영자)가 되는 길을 활짝 열어놓겠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미래에셋은 전문 경영인을 조기에 발굴해 육성하는 후계 프로그램을 수년 전부터 가동하고 있다. 최경주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은 “주요 계열사 CEO들은 매년 자신을 대체할 인적 자산으로 누가 있는지를 박 회장에게 추천해야 한다”며 “차세대 CEO를 발굴 및 관리, 육성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여기에 속하는 인재들은 전문교육의 기회도 갖는다”고 밝혔다. “전문경영인 체제, 오히려 조직 동맥경화 우려”박 회장은 미래에셋의 후계 구도를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조직이 활력을 잃지 않도록 제도적인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박 회장은 “한국의 재벌 체제가 2세에 이어 3세, 4세에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데는 과감한 세대교체를 통해 조직의 활력을 불러일으킨 것이 유효했기 때문”이라며 “아버지에서 자식으로 경영권이 넘어갈 즈음에 아버지를 보좌한 많은 참모들이 함께 물러난 것이 오히려 조직의 역동성을 고취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재벌 체제의 지속가능성이 과감한 세대교체를 통해 더욱 공고화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오너 회장이 나이가 들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경우 그를 보좌한 많은 참모들이 ‘나도 집에 갈 시간이 됐구나’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고, 후계 구도가 정착되면서 ‘젊은 피’들이 자동적으로 수혈되는 것은 재벌 체제의 선순환 구조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그러나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 대기업의 경우 나이가 많은 전문경영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고수하려고 하면서 오히려 조직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노쇠해지는 경향이 뚜렷했다고 지적했다. 노욕(老慾)에 사로잡힌 ‘전문경영인 역설(paradox)’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모델이 돼 있는 국내 한 제약회사의 경우 연로한 분들이 오래 자리를 지키면서 조직이 경직되고 젊은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도 눈에 띈다”며 경영학에서의 이른바 주주의 ‘대리인비용(agency cost)’이 막대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박 회장은 “경영학에서 마치 전문경영인 체제가 좋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전문 경영과 오너 경영은 각각 장단점이 공존하며 한국에서 소유 경영이 괄목한 만한 성과를 냈기 때문에 좋은 점은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재벌의 오너 경영에서 눈여겨 본 것은 다음 세대로 경영권이 넘어갈 때마다 과감한 인적 교체로 젊은 피가 조직에 수혈된 것이 다음 체제를 오히려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이른바 조직에서 연로한 ‘꼰대’들이 사라지면서 후대 오너 경영인들의 운신 폭이 넓어지도록 길을 터준 것은 대단한 강점이었다고 보고 있다.“임원도 나이 많으면 물러나도록 장치 강구할 것”박 회장은 구체적인 은퇴 시기는 정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미래에셋의 경영 시스템을 어떻게 가져갈지를 고민해왔다.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꾸면서 샐러리맨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면서도 조직이 노화되지 않도록 하고, 지나친 대리인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구도가 박 회장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경영 시스템이다. 박 회장은 “한국 재벌 경영의 장점도 많지만 리스크 또한 만만치 않음을 재벌들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면서 “한국에서 대기업을 꾸려가는 것은 수많은 법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며, 이런 위기는 오너 경영의 지속 가능성에 위협이 되는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일부 재벌 경영의 경우 세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자녀들이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고 토로했다. 고액의 배당만 받으면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데도 오너 경영의 전선(戰線)에서 고생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래서 박 회장이 생각해낸 것은 전문경영인에 대해서도 정년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박 회장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갈 경우 전문경영인이 나이가 들어서도 권한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을 자제할 수 없는 것이 약점”이라며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이끄는 한국에서 이런 사례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처럼 임원에 대해서도 일정 나이가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방안이 좋은 것 같다”면서 “미래에셋금융그룹의 회사정관에 이를 못 박아 시스템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문경영인 체제가 오히려 조직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역동성을 저해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다만 임원의 나이 제한을 어느 선에서 정할지에 대해선 고민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1970년대 생의 임원 비율이 주류를 차지하는 등 세대교체가 활발한 편이다. 암묵적으로 최고경영자도 62세 부근을 마지노선으로 여기는 대기업도 있다. 하지만 국내 어느 대기업에서도 임원에 대한 정년 제도를 채택한 곳은 아직 없다.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임원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짐을 싸야 하는 방식이다. 미래에셋의 임원정년제가 도입될 경우 국내 다른 대기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지 관심이다. 100년 기업을 만들기 위해선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젊은 리더와 조직 문화로 변모해야 한다는 것이 박 회장의 후계 구도의 핵심인 듯하다.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2021-10-24 09:00
“성장담론 없는 분배정책은 ‘사이비 진보’…분배담론 없는 성장정책은 ‘사이비 보수’”[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교수 시절 얘깁니다. 강의실 앞줄에 앉은 학생이 법정스님이 쓴 ‘무소유’를 들고 있기에 ‘재미있어?’라고 물어보니, ‘느낀 게 많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얘기했죠. ‘너 이제 큰일 났다. 이제 거지 되겠다’라고요.”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는 그 학생에게 “좋은 책이다. 하지만 마음의 고향으로만 삼아라”고 했다고 한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몸이 아프면 보살펴줄 사람이 있었고, 기거할 곳이 없으면 기거할 곳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김 교수는 “현실세계에서 보통 사람에겐 무소유는 궁핍이다. 보통의 많은 스님에게도 그렇다”고 가르쳤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습니다. 지난해보다 좀 더 벌고 싶어 하죠.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과 멋있는 곳에서 식사라도 한번 하고, 명품 지갑도 하나 사고, 주변이 어려운 사람들 많이 도와주기도 하면서 살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당연한 욕구지요. 그런데 성장이 멈추고 분배를 두고 싸움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어려워지는 사람은 늘 가지지 못한 쪽이죠.” 김 교수가 성장담론과 분배담론을 담은 책, ‘국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없고, 없어야 할 곳에는 있다’(도서출판 선)를 최근 발간했다. 그는 책에서 성장담론이 없는 분배정책은 ‘사이비 진보’라고 비판했다. 또한 분배담론이 없는 성장정책은 ‘사이비 보수’라고 꼬집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정책실장을 맡았고, 박근혜 정부 말기에는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던 그는 국민의힘 전신(前身)인 자유한국당에서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 진보와 보수를 넘나든 경력을 갖고 있다.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성장이 없으면 빈자(貧者)가 죽는다’ 그는 먼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했다. “그냥 돈만 뿌리는 정책입니다. 평소에 성장담론을 멀리해왔기 때문에 정책 마련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죠. 이름부터 국제노동기구(ILO)의 ‘임금주도성장’을 모방한 것 같아요. 문제는 소득을 늘리는 합리적 방안도 없고, 소득이 성장으로 연결되는 분명한 고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진보의 어설픈 성장 구호이자 분배 구호입니다.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거죠.” 김 교수는 “성장을 생각하지 않는 분배는 정책이 아니다”며 “경제정책이 아닌 것은 물론 사회정책으로서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간과한 것은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의 특성과 미국의 4배나 되는 자영업자의 비중 등을 고려하지 않은 한마디로 ‘이상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진보세력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스웨덴을 볼까요? 한국 진보들이 목숨 걸고 반대하는 영리병원이 스웨덴에 있죠, 심지어 교육도 학교선택제를 포함해 영리학원까지 있습니다. 노사 합의 아래 상장기업의 차등의결권도 인정하고 있어요. 분배 문제도 단단한 성장 정책의 틀 안에서 논의하는 겁니다.” 스웨덴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이지만 미국 보수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이 발표하는 경제자유도는 한국보다도 더 높다. ●분배담론이 없는 ‘사이비 보수’ 김 교수는 “진보든 보수든 이젠 분배담론이 없으면 안 된다”면서도 “유감스럽게도 보수집단은 이 문제에서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보수는 잘 살고 못 사는 문제를 사회나 국가의 책임이 아닌 개인적 책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경기 불황의 여파로 청년과 노년층 영세 자영업자들이 시장체제 밖으로 밀려나면서 한국사회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고 꼬집었다. “최근엔 보수 진영에서도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변화입니다. 다만 여전히 소극적인 자세가 주류지요. 매표(買票) 행위에 가까운 진보정권의 돈 뿌리기를 비난하지만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담론이 부족합니다. 왜 그럴까요? 보수 진영에선 이 문제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세월을 그동안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와 자본과 노동만 투입하면 생산이 일어나는 요소투입형 경제구조를 오랫동안 경험했기 때문에 분배 자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이다. 여기다 가족 등 전통적인 공동체가 사회안전망으로서의 기능을 해왔다. 부모와 자식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서로를 돌보는 도덕적 책무를 갖고 있었다. 분배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걱정을 덜어줬다는 얘기다. “이젠 이 모두가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가 돼 버린 것이 현실입니다. 내수시장 비중이 커지고 있고, 경제도 혁신주도형으로 전환되고 있죠. 노인과 청년, 영세 자영업자들은 시장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어 시장 밖에 존재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시장에 맡겨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김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론, 성장을 위해서도 분배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분배 문제가 잘못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물론 시장경제 체제를 밑바닥부터 흔들 수 있어 ‘보수 버전’의 분배담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보수 버전 ‘수호천사’ 만들기 김 교수는 보수 진영에서의 분배담론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자유주의의 수호천사로서의 분배정책이 되려면 무엇보다 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를 잊어선 안 됩니다.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축소와 고령화의 진전으로 시장 중심의 1차 분배에 원천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요.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시장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국가가 보듬어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분배담론은 ‘보충성의 원칙’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국가는 시장과 공동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데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죠.” 정부의 재정 투입보다 1차적 분배 기능을 하는 시장에서 불합리를 제거하는 데 더 관심을 둬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21세기 자본’을 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연소득 50만~100만 불 이상 고소득자에게 80%의 소득세를 물리자고 한 주장을 예로 들었다. “경제적 불평등이나 양극화가 더 이상 용인하기 힘든 상황까지 왔기 때문에 이런 과격한 주장이 나오는 겁니다. 속은 시원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열광할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에선 경제 대공황 이후 소득세를 계속 올려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땐 무려 91%까지 오른 적이 있었어요. 그러고도 미국이 망하지 않고 경제도 오히려 더 좋아졌으니 이런 얘기까지 나오는 거겠죠.” 하지만 당시 91% 세율 적용대상은 소득 20만 불 이상으로 그 수가 1만 명에 불과했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그것도 각종 공제제도가 있어서 상당 부분이 과세 대상에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상위 1% 부자에게 적용된 평균 세율은 40~45%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많은 부자들이 펀드나 투자은행 주식 등에 돈을 넣어 언제든지 움직이기 쉬운 구조로 갖고 있어요. 자본시장이 개방돼 서울에 있던 돈이 금방 뉴욕으로, 다시 이 돈이 런던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선 세금을 가파르게 올리면 아차 하는 순간 자본이 다른 나라로 이동할 것입니다.” 그는 분배정책의 우선 순위로 투자활성화 정책을 꼽았다. 누구나 맡고 싶어 하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임금을 주는 것이 경제적 가치를 배분하는 1차 파이프라인이라고 강조했다. 금융, 의료, 문화, 관광 등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돈이 제대로 된 산업에 투자될 수 있도록 흐름을 잡아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혁명적인 규제 완화로 기업과 개인의 상상력과 창의력, 혁신역량과 도전정신이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 분배정책의 첫 단추를 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저계급론이 지배하는 세상 김 교수는 계급의 세습 문제를 걱정했다. 어떤 부모 아래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차디찬 믿음이 우리 사회에 정설이 돼 떠돌아다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금 수저, 흙 수저 같은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대다수 국민들의 가슴을 때리고 있다”고 개탄했다. 문제는 상황이 저절로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있다. 시장의 분배 구조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 대신 공동체가, 기업들이 시민정신을 발휘해 주면 좋겠지만 국가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진단이다. “젊은 친구들이 실업급여 타먹는 데 정신이 팔려있다고 비난하지요? 많은 부분에서 지금 제도가 청년들이 정부의 푼돈이나 타먹는 구조로 만들고 있어요. 지금의 보장율과 기간으로는 ‘잔돈’ 수준이어서 모두들 그냥 챙겨먹을 대상이 돼 버렸습니다.”김 교수는 현재 GDP(국내총생산)의 12.2%에 머물고 있는 사회비 지출을 장기적으로 OECD 평균인 20%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수백 개로 잘게 쪼개진 보조금 체계가 너무 어지러워 복지 수혜자가 놓치기 일쑤여서 기본소득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부(負)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처럼 대상을 선별적으로 할 거냐. 아니면 포괄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처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하는데 소득 파악에 대한 어려움을 생각하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포괄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부자에게 줄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부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부자가 언제 더 내더라도 더 내게 돼 있습니다. 이를 놓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증세와 규제완화 대타협 이뤄내야” 따뜻한 보수가 되려면 보수의 확고한 분배담론을 정립해야 한다고 김 교수는 거듭 강조한다. 문제는 돈이다. ‘증세 없는 복지’를 하겠다고 하지만 이는 국민을 속이는 일이다. 정부 지출에 대한 구조조정을 통해 돈을 마련하겠다는 좋은 말이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는 게 김 교수의 지론이다. “GDP의 1%만 더 쓴다 해도 매년 20조원이 더 필요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구조조정해서 이 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부자 증세요? 물론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다분히 감정적인 접근일 뿐입니다. 최고세율 위에 한 구간 더 주자는 얘긴데, 그래서 얼마를 더 거둘 수 있을까요? 그래 봤자 몇 조원입니다. 그저 부자들 좀 더 힘들게 하자는 얘기밖에 안 되는 것이죠.” 김 교수는 복지국가 스웨덴을 거론했다. 스웨덴에선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사람이 연평균 소득 53만7200크로나, 우리 돈으로 7000만원 소득자에 해당한다. 평균소득의 1.6배에 해당하는 구간에 최고세율을 매기고 있는 것이다. 국가 재정의 중심이 상위 1%도 아니고, 상위 10% 아닌 중산층이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맡고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복지국가인 북유럽의 노르웨이 덴마크도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은 근로소득세 면제자 비율이 40% 안팎입니다. 법인세도 비슷해요. 영국이 5% 미만이고 대부분 국가에서 20~35% 정도입니다. 부자증세나 증세 없는 복지를 얘기할 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짐을 나눠지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국민개세(皆稅)주의와 함께 중산층 역할론이 강조돼야 합니다.” 그는 보수의 분배담론의 포인트로 법인세와 소득세의 실효세율 인상 카드와 규제 개혁을 맞바꾸는 대타협을 꼽았다. 기업과 자본은 보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 받는 대신 세금 인상을 수용하고 국가는 이들에게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하는 대신 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할 재원을 얻는 것이다. “부자를 죽여 빈자를 살릴 수 있을까요? 절대 어렵다고 봅니다. 부자와 빈자 모두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과 캐나다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를 따라가자는 게 아닙니다. 광복과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에 이어 이제 한국 호(號) 어디로 가야할지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안전망이 갖춰진 자유주의 세상이 모델이 돼야하지 않을까요?”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1-10-17 09:00
‘흙수저’ 출신 경제 관료가 글로벌 무대서 주목 받은 사연[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이계문(61) 서민금융진흥원장은 경기도 가평의 깡 촌 출신이다. 아버지를 3살에 여의는 바람에 18살 더 많은 형과 어머니 손에서 컸다. 경기 가평군 현리의 면소재지에 있는 조종고를 졸업했다. 한 반은 인문계, 또 한 반은 농업계인 종합고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동국대 산업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삼성그룹 공채에 합격했지만 ROTC 복무를 마친 27살에 늦깎이 고시생이 돼 공부를 시작했다. 몇 차례 낙방 후 31살 때인 1990년 3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고시로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시절,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다. UN 산하 공인기구인 SDGs 협회는 지난 8월 그를 ‘글로벌 지속가능 리더 100인’에 선정했다. 한국에선 구광모 LG그룹 회장, 방탄소년단(BTS)이 이름을 올렸다. UN은 왜 그를 주목했을까. 지난 달 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서민금융진흥원 집무실에서 이 원장을 만났다. ●토끼 키우고 농사일 돕던 어린 시절그는 ‘흙수저’였다. 세살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6남매 중 막내인 그는 큰형 보다 18살이 적다. 형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 농사를 짓는 어머니는 5일마다 한번씩 열리는 시골 5일장에 나물을 이고 가 팔았다. 가족이 모두 노동력이 돼야 먹고 살 수가 있었다. 어린 계문도 틈틈이 농사일을 돕고 토끼도 키워야 했다. 그가 다닌 가평군의 조종고는 요즘으로 치면 특성화고다.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 재경관으로 근무할 때 워싱턴을 찾은 유일호 당시 경제부총리가 “조종고가 어디죠?”라고 물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학교다. 서울대가 대부분인 기획재정부에서 그는 시골 고등학교에 동국대를 나온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해 뛰어난 성적을 보인 계문에게 지도교수는 공부를 더 하는 게 좋겠다고 해 카이스트에 진학하려고 마음먹었다. 마침 친한 친구가 카이스트에 합격한 터였다. 당시 카이스트 석사과정에 들어가면 군 복무를 면제해 주는 프로그램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군 주둔지 근처에 살아 군인들의 모습을 보아온 큰 형은 계문에게 “ROTC를 하면 취직이 잘 된다”며 ROTC 복무를 권유했다. 삼성그룹 공채 시험에 합격해 신입사원 연수를 받은 뒤 군 복무를 했다. ●늦깎이 고시생이 되다군 복무를 끝내자 삼성에선 1주일 내에 복직하라고 알려왔다.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됐다. 편안한 직장 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문을 두드려 볼 것인가. 소위로 복무하면서 받은 월급이 14만3000원이었다. 이중 매달 9만원씩 저축을 했다. 제대 때 통장을 보니 300만원이 쌓여 있었다. 지금 물가로 따지면 3000만 원가량 되는 큰 돈이었다. 이 정도면 집에 손 안 벌리고 다른 미래를 설계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손을 벌릴 데도 없었다. 큰 형은 이미 조카들이 자라 막내 동생에게 지원할 여유가 없었다. 카이스트에 다니던 친구가 과학도 보다는 행정고시가 더 유망하다고 귀띔해줬다. ‘고시계’라는 수험 잡지를 사다주기도 했다. 시골 5일장에서 나물을 파는 어머니께 차마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내가 너를 위해 돈을 좀 모아놓았어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께 군에서 모아놓은 돈이 있다고 했다. 2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 원장은 눈물을 글썽인다. 가평의 시골 빈집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27살 때였다. 첫해 1차는 낙방이었다. 무엇보다 영어가 너무 힘들었다. 농촌 종합고를 나온 그가 영어를 잘 할리 없었다. 그렇다고 학원에 다닐 돈도 없었다. 다음해 1차에 겨우 합격했지만 2차 시험에선 떨어졌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논술로 치르는 2차 시험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통계학이나 숫자로만 공부하던 것과 논술은 별개 세상이었다. 서양철학사와 논리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논술의 기초가 되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도전한 1차 시험에서 붙었지만 2차 시험에선 0.04점 차로 떨어졌다. 낙방의 아쉬움보다 다음엔 붙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3문제를 주고 20페이지를 작성해야 하는 논술시험에서 당락이 갈렸다. 다음해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행정고시 재경직이었다. ●철저하게 성과로 평가받는 기획재정부 문화 당시 행시에서 최고 인기를 끈 재경직 석차는 행시 전체 석차와 엇비슷했다. 학부에 행정학과가 없는 서울대에서 경제학과 경영학과 학생들이 재경직에 도전했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대부분 서울대 출신이었다. “첫 발령을 받았는데, 7급 주무관이 ‘왜 여기를 오셨나’고 해 당황했어요. 나이도 많았고 죄다 서울대 출신인데 국장까지 오를 수 있겠느냐는 얘기였죠. 경쟁이 덜한 다른 부처에 가면 쉽게 국장까지 승진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연세대 고려대 졸업생도 찾아보기 어려운 경제기획원에서 오히려 계문은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서울대 출신이 주류여서 학연보다는 오로지 실력으로 평가받았다. 성실한 계문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경기고-서울대(KS) 출신 상사들과 일하는 게 오히려 편했단다.“기재부는 밑에서 일을 못하는 부하를 데리고 있으면 자기가 한 방에 날라 가기 때문에 오로지 실력 있는 사무관이나 서기관이 발탁됩니다. 한번 실수는 봐주지만 두 번 똑같은 실수를 하면 다음 인사 때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죠. 상사들이 일 잘하는 부하와 못하는 부하를 금방 파악합니다. 본부 과장을 못하고 옷 벗는 사람도 있었어요. 해외에서 재경관을 했던 사람인데, 장관이 현지 방문 했을 때 본부에 전문(電文)을 쳐 보고를 했는데, 그게 형편없었던 거예요. 이게 소문이 나면서 누구도 같이 일하려고 하지 않았던 거죠. 일을 못하면 보직을 빼앗아버리는 냉정한 곳이 기재부입니다.”일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계문은 인사 때마다 두 군데 이상에서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모신 상사 중에서 장관이 된 사람만 14명이나 됐다. 특히 윤증현 전 장관의 경우 국장과 실장 장관으로 모셔 좋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시절엔 경제종합대책을 3번이나 발표할 만큼 일복에 치여 살았다. 부총리 격려금까지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재경부 기획조정실에서 대통령 업무보고 자료는 그의 몫이었다. 산업자원과 외화자금과 서비스경제과 정책기획관 등 예산과 금융, 거시정책을 두루 맡았다. 주미한국대사관 워싱턴 재경관에 이어 현장을 뛰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기재부 대변인도 맡았다. ●서민금융진흥원장 취임식 대신 현장으로 27년의 경제관료 생활을 끝낸 2018년 10월 그는 서민금융진흥원 원장에 취임했다.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는 자리다. 가평 농촌의 서민 출신인 그가 서민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서민금융진흥원은 신용등급이 낮아 은행에서 대출이 거절된 사람들이 불법 사금융이나 고금리 대출에 빠지지 않도록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대출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신용보증기금이 돈이 필요한 중소기업에게 보증을 서주는 곳이라면, 서민금융진흥원은 신용등급이 낮은 서민들에 보증을 서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해준다. 대출 후 빚을 갚지 못해 독촉에 시달리는 경우엔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아가면 연체이자를 탕감해주고 원금도 일부 면제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 원장은 “서금원이 환자를 위해 투약하는 약국이라면 신복위는 외과 수술을 하는 병원인 셈”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패자부활전’을 위한 기회의 장(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잘 모르는데다 ‘사회적 낙오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선뜻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곳이다. 첫 출근 날 취임식을 마다하고 서울 관악센터를 찾아 사람들을 만나 상담부터 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경제관료 때 몸에 밴 신조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국에 산재한 50개 센터 가운데 44개를 찾아 상담을 했다. 전통시장도 31곳을 찾아 나섰다. 현장에서 만나 직접 얘기 나눈 서민이 117명이나 된다. “상담을 하다보면 엉엉 우시는 분들이 적지 않아요. 빚이 많아 부끄럽다고, 주체할 수 없는 부채의 늪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받아온 것이지요.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워진 영세 자영업자나 저소득 근로자, 프리랜서 등 수입이 뚝 끊긴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요즘엔 청년들도 취업을 못해 아르바이트조차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서민금융 뿐 아니라 금융 전반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 안타까웠습니다.”●코로나19에 빛난 챗봇과 앱돈이 모자라 궁지에 몰리는 사람들은 잘 나서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에게는 어렵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낙인 효과’ 때문에 끙끙 앓기만 하다가 극단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원장이 집무실에 있지 않고 현장을 찾아다니는 이유다. 신용점수 하위 10% 이하 계층인 신용등급 7등급 이하가 379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221만 명이 연체 상태에 있다. 은행이나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해줄 리가 없다. 돈이 필요하면 대부업이나 불법 사(私)금융을 찾아야 하는 처지다. 이 원장은 직원들과 함께 고객인 저소득 취약 층이 있는 곳을 찾아 자원봉사에 나섰다. 요즘 입사하는 직원들은 서민들 어려움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쪽방촌 도시락 봉사와 배식 봉사, 장애인 농장을 찾고 미혼모 시설을 방문했다. 고금리 일수에 허덕이는 전통시장 상인들도 찾아 상담을 진행했다. 상대방 입장에서 어떻게 서금원과 신복위가 지원을 할지 찾아 나섰다.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24시간 상담 앱과 챗봇이었다. “저희 고객들은 모두 생업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어렵게 찾아온 고객이 서류 작성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창구에서 수기로 써야했던 종이를 싹 없애고 신분증 하나만으로도 바로 상담할 수 있도록 했지요. ARS를 이용한 콜센터도 상담사가 직접 받도록 했습니다. 문턱을 낮춰야 사람들이 찾아올 것 아닙니까. 생업에 바쁜 서민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24시간 상담 받고 서민금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챗봇 상담과 앱을 지난해부터 선보였지요.”24시간 상담 가능한 앱은 지난해 코로나19로 빛을 발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고객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이 원장의 경영철학이 위기에 돋보인 것이다. 불법 대출 광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금리 대출에 손댄 취약 계층과 청년들에게 1인당 평균 880만원의 채무를 경감해주는 조건으로 유튜브를 통해 금융교육을 이수하도록 의무화했다. 저신용 저소득 서민들의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앱과 홈페이지에서 가장 유리한 대출상품을 비교해 선택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33개나 되던 입력 항목을 13개로 대폭 줄이면서도 20% 이상 고금리를 쓰던 서민들이 11.7% 금리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장을 중시한 이 원장의 경영방침은 현장에서 속속 구체적 성과로 나타났다. 이 원장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을까.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팬데믹 위기에 한국의 서민금융은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K글로벌 서민금융 모델이 된 ‘서금원’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이 원장은 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서민들이 24시간 상담 가능한 앱을 만들어 코로나19에도 ‘K-서민금융’이라는 브랜드를 창출할 수 있었다. 유엔이 주목한 것도 이 부분이었다. 지난해 8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특별협의지위기구인 UNSDGs협회는 ‘2020 글로벌 지속가능 100’ 리스트에 서금원과 신복위를 나란히 올렸다. 이어 10월에는 ‘UN 지속가능개발목표경영지수(SDGBI)’에 애플, 아마존 등과 함께 최우수그룹으로 선정했다. 협회는 “저신용 저소득자가 24시간 언제라도 상담과 신청을 할 수 있도록 챗봇과 앱을 활용해 서민금융 상담의 편의성과 접근성을 확대하고, 서민 취약계층의 금융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맞춤대출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고객 관점의 서민금융 서비스에서 혁신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경사는 잇따랐다. 지난 8월 30일 이계문 원장은 ‘2021 글로벌지속가능리더100’ 리스트에 선정됐다. 지난 1년 동안 전 세계 주요 리더 2000명과 글로벌 기업 3000곳을 대상으로 선정한 결과였다. 팀 쿡 애플 CEO,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 사티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방탄소년단(BTS), 구광모 LG 회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대기업 구조조정하면서 든 돈이 얼마인지 아시죠? 기아차에 8조원, 대우그룹에 40조원, 대우조선해양에 10조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갔습니다. 엄청난 국민세금이 투입됐지만 노조는 모럴해저드에 빠져 있었어요. 서금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최고 3000만원, 평균 880만원의 자금을 지원해 줬어요. 제도권 금융에서 외면 받은 금융의 사각지대에 있는 서민들입니다. 소액일수록 빚은 갚으려고 해요. 시장의 실패로 인해 제도권 금융에서 방출된 이웃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직원들에게 우리는 월급 받으면서 남을 돕는 감사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유엔이 주목한 서금원의 앱은 지금까지 130만 건 다운로드 됐다. 이를 이용하는 고객이 130만 명이라는 얘기다. 5점 만점에 4.8점으로 1700만 명이 이용하는 카카오뱅크 앱 점수 4.3 보다 훨씬 높다. 공무원 하면 책상머리에 앉은 ‘탁상공론(卓上空論)’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시대. 가평 시골 출신의 계문은 경제 관료를 하면서도 ‘현장에 답이 있다’면서 평생 현장을 쫓아다니면서 살아왔다. UN이 그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이런 현장 경영의 결실이 아닐까.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1-10-03 09:00
“건면으로 ‘제2 신라면’ 도전… 라면업계 세계 1위 오르겠다”신동원 농심 회장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등 글로벌 시장에서 라면시장 1위에 도전하기 위해 제2의 신라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신 회장은 고 신춘호 회장이 평생 일군 신라면을 세계인의 입맛에 맞추면서 K푸드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14일 내놓았다. 7월 회장에 취임한 신 회장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미국 시장에서 신라면의 인기가 치솟았다”며 “두드러진 변화는 미국인들이 신라면블랙을 간식이 아닌 든든한 한 끼 식사로 인식이 바뀌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신라면은 미국에서 한인 마트나 아시안 마켓보다 현지 대형 유통체인인 코스트코와 월마트에서 훨씬 많이 팔리고 있다. 라면 본산지인 일본에서도 코로나19를 계기로 집 안에서 식사하는 추세가 뚜렷해지면서 신라면과 짜파게티 너구리 등 농심 인기가 꾸준하다. 신 회장은 “트렌드 변화에 민감한 젊은 직원들로 태스크포스를 발족해 MZ세대들이 자유롭게 신제품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다”며 “우리가 생산하는 모든 제품이 제2의 신라면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새 제품을 발굴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심은 상반기 미국 시장에서 전년 동기보다 8.2% 증가한 1940억 원어치의 매출액을 올렸다. 일본에서도 429억 원, 호주에서는 171억 원의 매출을 거둬 각각 11.6%의 신장세를 나타내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장세가 뚜렷하다. 신 회장은 “올해 말 준공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제2공장이 가동되면 미국을 비롯해 멕시코 등 남미 시장에 연간 8억5000만 개의 라면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3월 작고한 창업주 신춘호 회장은 라면 신제품 개발에서부터 광고 카피 등 세세한 부분까지 다 챙겼다. 신 회장은 “그동안 잘해 온 것은 계속 잘해 나가고 부족한 것은 개혁해 더욱 좋은 성장을 일궈나갈 것”이라며 “선친의 뜻을 이어 글로벌 라면시장에서 확고한 1위로 발돋움하도록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신 회장은 7월 취임사에서 ‘미래&성장’을 농심 경영의 청사진으로 강조했다. 신 회장은 라면에서 한 단계 나아가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한다는 플랜을 공개했다. 그는 “건강기능식품과 대체육, 비건 식품 등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해 키워 나가겠다”며 “특히 콜라겐 사업의 경우 농심의 단백질 기초연구 역량을 사업적으로 재편하고 확대한 좋은 사례”라고 말했다. 콜라겐 사업은 지난해 3월 제품을 선보인 후 비타민, 프로바이오틱스, 단백질 등 좋은 성분을 포함한 다양한 상품을 잇달아 내놓았다. 지금까지 누적 매출은 400억 원을 넘어섰다. 신 회장은 “대체육과 비건 식품도 농심의 콩단백 개발 역량을 토대로 개발했다”며 “국내 어떤 기업보다도 연구 역량이 뛰어난 R&D센터에서 새로운 사업모델을 발굴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6월 17일 뉴욕타임스는 ‘세계 최고의 라면(the best instant noodle)’에 신라면블랙을 꼽았다. 고 신춘호 회장이 주도해 개발한 신라면블랙을 이제 아들 신 회장은 건면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건면은 맛이 없다’는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싶었습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신라면 맛에 건면을 접목한다면 맛있는 건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제품 개발에서부터 출시까지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챙겼습니다.” 신 회장은 젊은 세대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지난해 말 e스포츠팀인 ‘레드포스’를 창설했다. 리그오브레전드(LOL) 팀인 레드포스는 롤드컵(LOL월드챔피언십) 선발전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그는 “e스포츠 사업으로 젊은 소비자와 더 가깝게 소통하고 호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글로벌 시장 공략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신 회장은 “앞으로 MZ세대의 새로운 취향을 연구하고 급증하는 1인 가구와 노인 가구에 맞춰 다양한 제품을 내놓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으로 ‘룬샷’(사피 바칼 저)과 ‘Think Again’(애덤 그랜트 저)을 꼽았다. 신 회장은 “얼핏 보기엔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꾸고 큰 위기를 이겨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며 “빠르게 변화하는 경영 환경에서 계속 의심하고 다시 생각해보는 유연한 사고를 가지는 계기가 됐다”고 귀띔했다.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21-09-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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