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이승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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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승헌 부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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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5~2024-04-24
칼럼100%
  • 스티븐 비건의 닭집과 칠순의 한미동맹[오늘과 내일/이승헌]

    이제 그를 서울 광화문 닭집에서 자주 보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미국 국무부의 2인자로 최근 확정된 스티븐 비건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 이야기다. 비건은 서울에 올 때면 틈나는 대로 광화문의 닭요리 집에 들렀다. 하지만 국무부 2인자가 된 만큼 경호가 강화돼 탁 트인 공간에서는 자주 식사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백악관 한반도 라인에도 최근 변화가 있었다. 앨리슨 후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한반도보좌관은 최근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으로 승진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 관련 대외정책을 아우르는 자리. 전임자인 매슈 포틴저는 NSC 2인자인 부보좌관으로 올라섰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내 한반도 3인방의 승진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나. 오래 알고 지낸 카운터파트가 승진한 만큼 우리 일이 좀 수월해질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동맹 일이라면 너무 당연하게 여길 때가 적지 않다. 사실 비건이 서울 닭집에 가기 어렵게 됐다는 것은 그가 한반도 업무에 지금처럼 관여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부장관(Deputy Secretary)은 그야말로 장관 대행이다. 북핵은 상황 관리 정도만 하게 될 수도 있다. 후커를 알고 지낸 한 외교관의 이야기는 동맹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나이브하다고 일깨운다. 후커의 승진 소식에 축하 겸해서 연락했더니 ‘(내가) 직급이 달라졌으니 (당신보다 높은) 다른 분을 카운터파트로 삼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답을 들었다고 한다. 포틴저는 주미대사 정도 아니면 만나기도 어려운 사람이 됐다. 이들의 달라진 모습이 떠오르는 건 이제 70주년을 맞는 한미동맹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1950년 미국의 6·25전쟁 참전으로 시작된 한미동맹은 철통(ironclad)처럼 굳건(robust)하게 린치핀(linchpin·핵심 축)으로 양국을 이어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청와대 주인과 무관하게 미국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한미동맹이 내년만큼 도전적인 한 해를 기다린 적도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내년 상반기 방한을 예고하고 있다. 6년 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대적으로 환영할 것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중국의 경제 보복 조치가 여전한 상황에서 시 주석 방한으로 이를 풀어내면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호재다. 워싱턴은 태연한 척하겠지만 사드를 고리로 한중이 다시 가까워지는 게 유쾌할 리 없다. 여러 번 공수표가 됐지만 김정은의 총선 전 답방 카드도 아직 살아 있다. 김정은이 내려온다면 문재인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대북제재 완화를 추진하려 할 것이다. 둘 다 한미동맹에 마이너스 요소들이다. 한미 정치 일정도 동맹 관점에선 달갑지 않다. 트럼프는 내년 2월 3일 첫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를 시작으로 8월 공화당 전당대회를 거쳐 11월까지 대선으로 질주할 것이다. 버락 오바마도 대선 기간엔 외국 이슈에 신경 쓰지 못했다. 문 대통령도 신경이 내년 4월 총선에 쏠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휴화산인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협상도 상반기에 다시 열린다. 필자의 이런 걱정이 그냥 기우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영원불변한 건 없다. 워싱턴의 한 지인이 한미동맹에 대한 자신의 자세라며 들려준 말이 떠오른다. “Hope for the best, plan for the worst(최선의 결과를 희망하되 최악의 상황도 대비하라).” 칠순을 맞는 한미동맹이 계속 건강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는 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와 함께할 거라 마냥 기대만 하고 있는가.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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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낙연 총리 “신발 신고 발바닥 긁는것 같은 정책은 곤란… 현장이 시작이자 끝”

    《“그날 강풍이 불었다. 손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걸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새벽까지 기다렸다. 굉장히 긴 밤이었다. 그래도 눈앞이 캄캄해진 사람들에게 위로만 할 게 아니라 눈앞을 보이게 해드리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낙연 국무총리(67)는 2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리 이낙연의 인생 장면’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올해 4월 4일 강원 고성군에서 발생한 산불 사태를 들며 당시를 회상했다.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와 정부라면 각론을 갖고 그런 분들께 삶의 앞날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전날(21일)에도 화재 발생 이후 네 번째로 고성군을 찾아 이재민들의 상태를 살피고 피해 복구 상황을 챙겼다. 》 정치권에선 이 총리가 최근까지 차기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배경 중 하나로 어느덧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현장 중심 디테일 행정을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역대 많은 정치 지도자가 말로는 현장 행정 구현을 외쳤지만 실제론 국민들에게 제대로 체감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총리는 “현장은 문자 그대로 시작이자 끝이다. 정치, 행정, 정책도 모두 현장에서 나와서 현장에서 끝난다”며 “뭐가 문제인지, 그것이 과연 해결됐는지 알아보려면 결국 현장을 가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세균 후보자의 국무총리 지명으로 이제 정치권의 시선은 그의 퇴임 후 행보에 쏠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해 내년 4월 총선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당의 대주주인 친문(친문재인) 그룹과의 역학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지 하나하나가 여권 내 정치 지형은 물론이고 차기 대선 흐름에도 영향을 미칠 요소들이다. 이 총리는 총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렇지만 총선 이후 펼칠 ‘이낙연식 정치’에 대해서는 ‘실용적 진보주의’라는 기조 아래 디지털 경제부터 한반도 주변 강국과의 신뢰 외교까지 풀어냈다. 출산율 저하 대책에 대해선 가장 어려운 이슈라며 ‘문화인류학적 고민’까지 털어놓았다. 이날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 총리공관 집무실에서 2시간가량 이어졌다. ○ “정치·행정, 각론 부족하면 국민은 답답” ―차기 지도자 여론조사에서 1위를 오래 지키고 있는 것은 안정감과 함께 이 총리 특유의 업무 처리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우리의 정치와 행정이 아직도 총론에 맴도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국민의 삶은 각론으로 고통받는데, 정치와 행정은 각론이 부족하다면 국민은 답답하게 생각할 것이다. 저라고 특별히 다르겠냐만 현장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아는 편이라고 국민이 느끼는지 모르겠다.” ―기존 정치인에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라고 보나. “강원도 산불 때 보통의 정치인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것들을 본 게 아닌가 싶다. 총리가 현장에 가서 (집에서 빠져나오느라) 혈압약 챙겼느냐고 묻고, 볍씨 탄 것 무상으로 드리겠다고 하자 ‘희한한 사람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각론이 없는 정치행정이나 정책은 공허하다. 각론도 매우 구체적인, 개개인의 삶에서 가장 갈급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 예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야당 국회의원일 때 호남선 복선화에 35년이 걸렸다. 그때 DJ가 이랬다. ‘개미가 기어가도 갔겄소.’(웃음) 그런 답답한 느낌이 국민에게 있지 않나 싶다.” ―재임 기간 동안 공직사회의 태도 변화를 많이 이끌어냈다고 평가하나. “지난주 총리실 직원들과 송년 만찬을 했는데 ‘과거보다 훨씬 더 총리실 위상이 높아진 것 같다’고 하더라. 부처들이 훨씬 협조적이고 자기들도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하더라. 여러 부처가 참여하는 회의 안건을 내가 사전에 보고받는다. 미세한 보완도 있고 어떤 건 통렬하게 얘기한다. ‘회의에 상정하지 않아도 좋으니 전개의 순서나 각론의 보충이라든가, 이유로서 설명되는 걸 대대적으로 보완해 달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땀이 날 거다. 지금까지는 격화소양(隔靴搔양), 신발을 신고 가려운 발바닥을 긁는 것처럼 현실과 거리가 먼 정책이 더러 있었다.” ―정치인으로서 공직사회에서 쓴소리를 많이 하는 데 대한 부담은 없나. 다 우군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 아닌가. “있다. 있지만 그것 때문에 (공직 변화를) 포기할 순 없었다. 인심을 얻기 위해서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나는 그게 잘 안된다(웃음).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해 달라’ ‘살살해라’고 한다. 나는 야단을 쳐도 목소리를 높이진 않는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여러 번 해도 안 바뀌면 언성이 높아진다. 내 앞이니까 그러는지 몰라도 많은 걸 배웠다는 얘기들은 한다.” ―향후 정치적 행보와 관련해 가장 자주 거론하는 게 ‘실용적 진보주의’ 아닐까 싶다. DJ가 언급했던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이낙연식 표현인가. “DJ의 오랜 축적이 반영된 말씀과 비교되기엔 과분하다. (영향을 받은 것은 맞나.)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같은 기류다. 워낙 다종다양한 문제들이 생기기 때문에 방향 하나만 보고 그런 문제들을 경시하고 갈 수 없다는 거다. 국민은 각론으로 고통받는데, 자꾸 총론적 방향만 얘기해선 안 된다. 실용과 진보 중 뭐가 더 중요한지도 미리 정할 필요가 없다. 방향성을 가지면서도 수단은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부동산 문제는 인간의 욕망과 거의 씨름하다시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돈이 있는 사람이 특별한 노동을 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벌고, 그로 인해 절대 다수의 국민이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도와주기 위해 금융기관이 돈까지 빌려주는 게 과연 옳은가. 이를 막겠다는 건 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정책이라고 본다.” ―총리 재임 기간에 가장 후회하거나 아쉬운 게 있다면…. “후회보다는 마음이 가장 무거운 게 출산율 저하 문제다.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아니고서야 지구상의 모든 개체는 늘어나게 돼 있다. 저출산은 지구 생명체로서 처음 겪는 일이다. ‘나로서 살고 싶다’는 청년 여성들의 고민을 이해한다. 정부가 더 노력해야 하지만, 행정으로 정책으로 변화를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인생을 먼저 살아보신 선배 여성들이 따님들과 인생, 가정,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굉장히 무거운 고민이다.”○ “디지털 경제 이해, 약자에 대한 연민 필요” ―다음 정치 지도자가 인식하고 준비해야 할 이슈,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디지털 경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DJ가 정보기술(IT) 강국의 초석을 놨다면 문재인 정부는 ‘디지털 경제의 초석을 놨다’고 평가받아야 한다고 문 대통령께도 말씀드렸다. 사회 분야에선 갈등의 조정이 가장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지도자라면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약자에 대한 ‘심퍼시(sympathy)’, 즉 연민을 가져야 한다. 시장 질서대로 내버려둔다면 정부가 필요하지 않다.” ―국제 정치 지형에서 한국의 위치에 대한 정치 지도자의 고민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떤 스탠스가 필요한가. “이럴 때일수록 신뢰가 중요하다. 큰 나라들 사이에 놓여 있는 우리로선 그게 숙명이다. 안보에서는 미국과의 신뢰가 흔들려서는 안 되고, 경제 관계에선 중국과의 신뢰가 흔들려선 안 된다. 일본과는 역사에서 시작된 문제가 최근 일본 지도자의 태도 때문에 감정적인 선으로까지 커졌다. 일본을 우정으로 대하는 사람으로서, 일본이 더 많이 후회할 거라고 생각한다.” ―대학생 때 하숙비를 못 낼 정도로 가난한 성장기를 보냈다. 이런 경험이 이 총리의 정치에 어떤 영향을 줬나. “내 몸에 그런 정서가 피처럼 흐르고 있다. 대학 시절 1학년 때부터 아버지가 하숙비를 못 보냈다. 1년은 입주 가정교사를 했고 이후 친구 자취방과 선배 하숙방을 전전했다. 내 대학 졸업 앨범에는 시신을 찍어놓은 것 같은 얼굴이 하나 있는데 그게 나다. 입대 영장이 나오자마자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군대를 갔다. 그런 경험이 약자에 대한 연민 같은 걸로 작동하는 것 같다. 나의 청춘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이제 다시 새로운 정치의 무대로 나서게 된다. 총리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은 언제인가. “전남도지사 시절이다. 기자와 국회의원은 왕성한 문제의식으로 일한다. 그러나 정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수행되며, 때로는 왜곡되거나 악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모른다. 그것을 지사와 총리로 일하면서 더 알게 됐다. 선거 역시 도지사 선거가 가장 모험적인 도전이었다. 정치권에선 다들 (내가) 진다고 했다. 조직에선 내가 밀린 게 맞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정치권은) 기존에 입력된 데이터로 미래를 예측하는 버릇이 있다 보니 다이내믹한 변화를 미처 못 본 거다.”▼ “안보에선 美와, 경제에선 中과 신뢰 흔들려선 안돼” ▼“상대 짓누른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험한 말 하는 사람들이 단명하더라”―대선 주자로서는 세력과 계파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 국면에선 그 생각을 별로 하고 있지 않다. 기본적으로 (나를) 돕는 사람이 필요한 건 맞다. 다만 계파나 조직에 너무 함몰되는 정치가 발전적일까에 대한 의문이 있다. 좀 (상황을) 보자.” ―내년 총선에서 서울 종로 출마 가능성이 있는가. “아직 뭐라 얘기하기가 적절치 않다. 당의 생각을 알기도 전에 내 의사를 조금이라도 내비친다는 것은 당에 부담이 될 것 같다.” ―국회가 꽉 막혀 있다. 어떻게 해야 야당과의 협치가 가능할까. “전무후무한 2017년 대통령 탄핵 여진이 이어지면서 최근 몇 년간 한국 정치는 특수한 상황에 놓였다. 내년 총선이 한국 정치의 큰 분기점이 될 것이다. 총선 결과에 따라 협치의 가능성이 열릴지, 아니면 극단의 정치가 지금보다 기승을 부릴지 갈림길에 있다. 자칫 유럽을 휩쓰는 것 같은 극단의 정치가 득세할 수도 있다. 정당들이 자기 쪽만 돌아보면서 기대려 하지 말고 상대를 쳐다보면서 국가대계를 건설적으로 꾸려가야 한다.” ―이 총리 하면 ‘사이다 발언’으로 상징되는 말과 글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의 말과 글이 너무 거칠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상대편을 짓누른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우리 캠프, 반대 캠프가 아닌 그 가운데 회색 지대에 놓인 사람을 끌어오는 게 중요하다. 후임 대변인들에게도 이를 많이 이야기해 줬다. 그리고 대체로 보면 험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단명하더라.”○ “문 대통령, 친구들과 막걸리라도 한잔 했으면…” ―역대 대통령들과의 추억이 남다를 듯하다. DJ,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각각 어떻게 기억돼 있는가. “DJ는 말과 글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다. 기자나 교수 출신이 연설문을 써도 ‘혼이 없다’며 당신이 다시 쓰셨다. DJ가 존경받는 지도자라면 노 전 대통령은 사랑받는 지도자였다. 때로는 거칠게 보이는 것마저도 대중적 사랑의 원천이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 말실수를 한 게 화가 나서 대변인으로서 전화했더니 ‘제가 사고 쳤죠. 소주 한잔 합시다’ 이러더라.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문 대통령은 진지하고 신념이 강하다. 굉장히 치밀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람을 대할 때 따뜻하다. 술을 드셔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농담을 하지 않고 선을 지킨다.” ―문 대통령이 총리의 향후 거취와 관련해 “이제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놓아드리는 게 도리”라고 표현했다. “과분한 말씀을 해주셨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평가는) 제 역량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의 따듯함과 배려가 반영됐다. 얼마 전 주례회동에서 ‘중점 관리 대상인 28건의 갈등 과제 중 18개가 개선됐거나 개선 과정에 있다’고 (퇴임 전) 결산보고를 드렸다. 그랬더니 ‘하나하나가 오랜 세월을 끈 문제였는데 총리님께서 참 수고 많이 하셨다’고 하시더라. 대통령은 자신의 뜻과 다르더라도 ‘왜 이렇게 못하냐’가 아니라 당신의 생각을 말씀해주신다.” ―떠나면서 문 대통령에게 고언을 해준다면…. “조금 더 여유 있게 일하셨으면 좋겠다. 때론 피로 기미도 보이신다. 친구들과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조금씩 쉬시는 게 좋을 거 같다.” ―스스로 “이낙연은 ○○○ 총리였다”고 평가한다면…. “많은 국민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도 ‘좋은 총리였다’고 기억된다면 영광이겠다.” 인터뷰=이승헌 정치부장 / 정리=황형준 constant25@donga.com·김지현 기자 ▼ 李총리, 바지 뒷주머니엔 항상 ‘깨알 수첩’ ▼정책구상-대화내용 빼곡히 적어… 4월 강원산불 8쪽 메모 화제공무원들에도 업무문화로 확산… 수첩 한권 다 쓰는데 한달 안걸려이낙연 국무총리의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엔 항상 종이 수첩 한 권(사진)이 들어있다. 매일 만난 사람들의 이름과 주요 발언부터 순간순간 떠오르는 정책 구상이나 아이디어까지 빼곡히 적는 ‘깨알 수첩’이다. 올해 4월 강원도 산불 당시에도 통신장애부터 잔불 정리, 뒷불 감시, 이재민 대책 등 재난 발생에 따라 필요한 조치들이 8쪽에 걸쳐 적힌 그의 수첩이 화제가 됐다. 22일 인터뷰를 할 때도 뒷주머니에 수첩이 있었다. 하루 전날인 21일 산불 발생 후 네 번째로 방문한 고성 산불 피해 복구 현장에서 파악한 추가 관련 조치들을 적었다. 글씨는 금세 알아볼 수 있게 굵은 사인펜으로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어느덧 자신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가 된 수첩에 대해 이 총리는 “하다 보니 쓰는 게 습관이 됐다”고 했다. 21년 기자 생활을 하면서 굳어진 습관이다. 그는 “쓰면 훨씬 더 기억이 되고 머릿속에 남는다”고 했다. 이 총리는 “20여 명과 저녁에 막걸리를 마시며 간담회를 하더라도 메모를 하기 때문에 끝날 때쯤엔 전원의 성함과 직함을 기억할 수 있다”며 “30명까진 즉석 암기가 가능하다”고도 했다. 이 총리의 메모 습관은 그가 총리로 재직하는 2년 6개월여 사이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업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총리는 “(회의에) 배석하는 국장이나 차관이 (수첩에) 메모도 하지 않고 멀뚱멀뚱 있거나, 회의 자료 뒤쪽에 끄적이는 걸 보면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 싶어 갑갑하기도 했다”며 “내가 배석자들에게 일일이 답변을 요구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점점 수첩에 메모하는 고위공무원들이 늘더라”고 했다. 그는 평소 다 쓴 수첩은 침대 머리맡 서랍에 보관하다 서랍이 꽉 차면 다른 서랍으로 옮겨둔다고 했다. 수첩 한 권을 다 쓰기까지 한 달이 채 안 걸린다고 했다.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 201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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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리스 현상 대처법[오늘과 내일/이승헌]

    이쯤 되면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논쟁적인 미국대사라는 데 별 이견은 없어 보인다. 거의 하나의 현상이라 할 만하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 이야기다. 최근 주로 부정적인 이슈의 중심이 되고 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기폭제가 됐다. 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을 자기 집으로 불러 50억 달러 이야기를 스무 번가량 꺼냈다는 게 대표적이다. 얼마 전 의원들에겐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 좌파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시끄러웠다. 급기야 좌파 성향 단체들이 해리스 대사를 그려놓고 ‘참수’ 퍼포먼스까지 벌이려 했다.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지만 경찰의 사전 경고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을 뽑는 이벤트로 대체됐다. 전임 대사인 마크 리퍼트가 2015년 3월 서울 한복판에서 과도 테러를 당하자 회복을 기원하는 부채춤 퍼포먼스까지 벌어진 것과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리퍼트를 비롯해 성 김, 캐슬린 스티븐스, 토머스 허버드, 스티븐 보즈워스 등 최근 주한 미 대사들을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전형적인 외교관이었다. 절제, 모호함이 업무 수칙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해리스는 아직 군인이다. 그것도 아주 잘나가던 군인. 해군 시절 몰던 대잠초계기 P-3 오라이언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그렇게 좋아할 수 없다. 그의 언어는 머뭇거림이 없다. 그와 대화를 나눠 보면 자신감을 넘어서는 묘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지난해까지 아시아계 최초의 미 태평양사령관(현재 인도태평양사령관)을 지냈다. 지구 면적의 52%에서 벌어지는 미군 작전을 관할했고, 거느린 병력은 37만5000여 명, 지휘하던 항공모함만 5척이었다. DNA가 다르니 어쩔 수 없다는 건 아니다. 남의 나라에 왔으니 해리스도 변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해리스가 고압적으로 보이는 그 콧수염부터 밀었으면 좋겠다. 군인 시절 파르라니 면도한 얼굴에 해군 정복을 입고 미 워싱턴 청문회장에 나타나 토론하던 해리스는 지금보다는 더 호감 가는 인상이었고, 이성적 대화가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미국에선 수염 기르는 게 흔한 일이지만 한국 사회에선 아직 거부감이 있는 것도 해리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해리스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이 한미 동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감정과 무관하게 변치 않는 건 해리스가 트럼프를 대신해 한국에 와 있는 특명전권대사라는 사실이다. 리퍼트가 테러 당했을 때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미국인들이 보였던 날 선 반응이 아직도 생생하다. 동맹이라고 해서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최측근을 보냈더니 수도 한복판에서 칼을 맞을 때까지 한국은 뭐 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예비역 해군 제독(4성 장군)인 해리스의 집을 대학생들이 두 차례 무단 침입하고, 일부에선 참수를 거론하고 있다. 미국에서 참수는 beheading, 말 그대로 머리를 잘라낸다는 대단히 도발적인 행위로 인식된다. 미국이 몇 년 추적 끝에 지도자(알 바그다디)를 제거한 이슬람국가(IS)에 전쟁을 선포했던 계기는 2014년 미국인에 대한 참수 장면이 공개되면서다. 이렇게 민감할 때일수록 선을 넘지 않아야 우리도 상대방에게 바뀌라고 요구할 수 있다. 손님이니 일단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순서다. 얼마 전 “해리스 외가가 일본인”이라는 한 중진 의원의 말을 접한 해리스는 “난 미국인인데 왜 일본을 거론하느냐”며 심각한 표정으로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고 한다. 대사 한 명의 언행을 두고 한미가 싸워본들 누가 득을 보겠나. 김정은 웃을 일만 하나 더 늘어날 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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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총선 승리 이끈 이회창 공천 모델 배울 필요”

    《“솔직히 쓰러지기 몇 시간 전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5일 국회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지난달 27일 단식 중단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8일간의 청와대 앞 단식 후 처음 언론 인터뷰에 나선 황 대표는 수염까지 길러 수척해 보였다. 9월 삭발 장면에 수염을 합성해 온라인에서 한때 돌았던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했다. 50분간의 인터뷰에서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답하던 황 대표는 당내 일각에서 나오는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한국당에 친황이 어디 있느냐”며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손동작이 커지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청와대가 검찰 방해하면 ‘비상한 대책’ 나올 것” ―이전보다 살이 빠진 것 같다. 단식장에서 이송될 당시 상황이 기억나나. “체중이 좀 많이 빠졌다. 7∼8kg 정도? 쓰러진 날(지난달 27일) 오후 7∼9시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부턴 기억이 없고 깨어 보니 병원에 와 있더라.” ―그래도 앞으로 필요하다면 단식을 또 할 수 있나. “앞으로 (단식이든 뭐든) 뭘 하겠다 하는 방법론에 관한 것보다도 이 정권의 폭정을 막기 위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뭐든 방안을 다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단식 기간에 당 후원금도 1억 원 이상 들어오고 보수 결집 효과가 있었지만 지지율은 보합세다. 단식의 성과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나. “제1야당 대표가 왜 단식을 하게 됐는지 관심 갖는 국민들이 많았던 것 자체가 단식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문제가 뭔지 잘 모르는 국민이 적지 않았는데 사안의 심각성을 환기시키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장외투쟁과 삭발, 단식 등 투사형 정치인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 아닌가. “내가 당에 들어와 처음에 내건 기치가 ‘싸워서 이기는 정당’ ‘역량 있는 대안 정당’ ‘미래를 준비하는 정당’이 되자는 거였고 이런 순서로 진행됐다. 처음에 국회 안에서도 싸우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민생투쟁 대장정도 했다. 이후 민부론 민평론 민교론 등 정부 실정에 대한 정책 대안도 내놨다. 선거가 임박해서가 아니라 평상시에 우리처럼 대안정책을 준비한 정당이 있었나. 투쟁을 하면서 정책을 찾아 원내에 반영하는 과정이 복합적으로 진행됐다고 자평한다.” ―울산시장 하명 수사 의혹과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의 감찰 무마 의혹을 황 대표는 어떻게 규정하고 있나. “이 사건은 문재인 청와대의 총체적 비리 의혹이 담긴 게이트 사건이다. 단순히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 대통령의 가까운 친구(송철호 울산시장)를 도와주기 위한 정부의 조직적 불법행위다. 청와대라는 권력기관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결국 잘나가던 한국당 (김기현) 후보가 떨어지고 선거 결과와 민심이 왜곡됐다. 청와대 대변인의 말도 반나절 만에 거짓말로 드러났을 만큼 은폐를 위한 거짓도 조직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에선 앞으로 이 사건에 어떻게 대응할 건가. “은폐 시도가 나오면 특검으로 가거나 국민 저항권을 행사해서라도 뒤에 진짜 배경이 누구인지까지 진상을 철저히 밝혀야 한다. 넓은 의미의 저항권은 정부의 비리에 대해 사과를 촉구하는 거고, 극단적 (국민) 저항권이 뭔지 다 아실 테니 따로 구체적으로는 말씀 안 드리겠다. 국민의 저항이 찻잔 속 태풍이 되지 않도록 다양한 노력을 하겠다. 법적 조치가 잘된다면 (극단적 국민 저항 등) 비상한 대책까진 안 나오겠지만 요즘처럼 청와대가 나서 검찰 수사를 방해하면 양상이 달라질 거다.” ―마침 오늘(5일) 추미애 의원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법무부 장관 적임자인가 하는 부분에선 회의가 적지 않다. 장관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여야 하지 부임 후 어떻게 할지 공부해선 안 된다. 추 후보자가 법조인이긴 하지만 너무 오래 정치권에 있었다. 정치·정무적 관점에서 편향된 생각을 갖고 법무행정을 편다면 바른 행정이 되기 어렵다. 아직 청문회 자체를 거부할 생각은 없지만 소명과 검증의 과정이 필요하다.” ―추 장관 지명은 결국 검찰 개혁을 노린 것으로 보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검찰 개혁한다고 검찰을 잘 모르는 분들이 왔는데 잘 안 되지 않았나. 전례를 보면 다시 악순환의 그림자가 보인다. 밖에서 보는 것과 실제 환부는 다른데 조직을 잘 모르면 어디를 고쳐야 할지 잘 모른다. 검찰 개혁은 검찰을 정말 잘 알면서도 부처에 녹아들지 않는 사람이 해야 한다.”○ “새 원내대표는 협업과 소통 더 잘되는 분이길” ―나경원 원내대표의 임기 연장 불허를 두고 당내 논란이 여전하다. 왜 그런 결정을 했나. 나 원내대표의 원내 전략에 대한 불만인가. “나 원내대표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고 좋은 결과들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임기가 끝나면 일단 정리하는 게 원칙이다. 총선이 6개월 미만 남은 상황이면 연장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이 있지만 원칙은 존중돼야 한다. 여러 사람이 차기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하려고 하니 그분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게 공정하다고 판단했다.” ―새 원내대표는 어떤 역할을 하면 좋겠나. “원내대표는 투쟁을 강하게 하면서도 경우에 따라 협상을 통해 주고받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과정에서 다른 분들과 협업 및 소통을 잘하면서 싸울 땐 싸우고 협상할 땐 협상하는 게 어우러지는 분이 됐으면 좋겠다. 패스트트랙 법안에 대한 협상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향후 본회의에서 필리버스터를 다시 신청할 수도 있나. “원내대표의 결정 사안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민주당과 2, 3, 4중대 분들과도 여러 싸움이 필요할 텐데 전략은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 정도로 말해 두겠다.” ―단식 복귀 후 당직 개편을 두고 ‘친황 체제 구축’이란 평가가 나오는데…. “(목소리와 손동작이 커지며) 친황이라 불리며 나에게 좋은 말을 하던 분도 요즘 나를 공격하는 말도 하더라. 친황이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웃음) 내 머릿속에는 계파라는 생각 자체가 없다. 행정부에 있을 때부터 인사에서 내 사람을 챙겨본 적이 없다. 내가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적임이 아닌 책무를 부여하면 결국 나와 당에 어려움이 온다는 걸 안다. 또 친황이란 말이 당과 지도부를 폄훼하는 의도로 나온 거라 정말 소모적인 언사라고 생각한다.” ―내년 총선에서 불출마를 선언하며 당 개혁을 요구한 김세연 여의도연구원장은 유임시키는 게 황 대표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여의도연구원은 이제 총선에 대비해 전략적 대응을 해야 한다. 김세연 원장과 박맹우 사무총장, 김도읍 대표비서실장 등 교체된 분들이 잘했다 또는 잘 못했다는 게 아니라 4개월 반 남은 총선을 새 마음 새 각오로 다시 시작해 승리로 가자는 뜻이다.”○ “2000년 16대 총선의 이회창 모델 배우겠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어떤 공천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첫째는 이기는 공천, 둘째는 공정한 공천, 셋째는 경제를 살리는 공천, 넷째는 가치에 부합하는 공천이 돼야 한다. 그렇다고 비열하게 이기면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니 이 항목 중 우선순위가 있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정말 우리 당의 가치에 맞는 후보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공천이 돼선 절대 안 된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공천이 돼야 한다.” ―황교안만의 공천관리위원장 인선 기준은 무엇인가. “앞선 총선을 보면 공관위원장이 객관적이고 공정했고 역량 있는 분이었을 때 대개 이겼다. 주변에선 ‘이회창 전 총리의 공천 모델을 배워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분이 (대선에서 실패했기에) 완전히 성공한 분은 아니라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지만 총선 승리를 이끈 모델을 배울 수는 있다고 본다.”(2000년 16대 총선 당시 제1야당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임명한 윤여준 총선기획단장이 당내 계파 수장인 김윤환 이기택 의원 등을 쳐내며 쇄신 의지를 보인 끝에 273석 중 133석을 얻어 ‘여소야대’ 국회를 이뤄낸 바 있다.) ―총선기획단이 내놓은 ‘지역구 현역 33%, 비례대표 포함 50% 교체안’으로 충분하다고 보나. “총선기획단에서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줄 수 있는 공천이 되려면 어느 수준의 인적 쇄신이 이뤄져야 하는지 감안해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것보다 조금 더 국민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 통합 논의가 두 달 반째 가시적 성과가 없다. 현재 어디까지 왔나. “한두 달 안에 될 것 같으면 왜 갈라졌겠는가. 다시 하나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대통합 시한은 빨리 진행될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는데, 내년 총선에 도움이 되는 통합이 되려면 늦어도 내년 1월 말까지는 돼야 한다고 본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크리스마스(25일)에 수감 1000일째를 맞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총선 전 메시지에 주시하는 이도 많다. 박 전 대통령이 총선 때 어떻게 하길 바라나. “박 전 대통령은 연세도 적지 않고 몸도 안 좋아 국민 통합적 차원에서 정부의 선처가 필요하다. 구속 취소, 형집행정지, 보석이든 영어의 몸에서 풀리는 게 제 바람이다. 그런데 그분이 총선에서 어떤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건 밖에 있는 우리들의 욕심이지 싶다. 나라 사랑이 아주 강하신 분이니 자유민주주의가 지켜지길 염원하는 그분의 뜻을 존중하는 게 좋겠다.”인터뷰=이승헌 정치부장 / 정리=조동주 djc@donga.com·이지훈 기자}

    • 201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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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소미아 불장난은 한번으로 족하다[오늘과 내일/이승헌]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사태는 가까스로 넘겼지만 여진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일본이 수출 규제 해제에 미온적으로 나오자 청와대와 여당에서 ‘조건부 연장’을 강조하며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고 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일본에 대해 “트라이 미(Try me)”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자꾸 나를 건드리면 언제든지 지소미아 종료 버튼을 다시 누르겠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일본에 주어진 기간은 40일”이라며 일본의 태도가 올해 말까지 변하지 않으면 지소미아를 종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외교부도 이런 기조에선 다르지 않다. 조세영 1차관은 데드라인에 대해 “몇 개월 정도(만 기다릴 수 있다)”라고 했다. 정부여당 인사들의 이런 반응을 접하면서 필자는 지소미아 종료 시한 직전에 다양한 기회로 만났던 미 행정부 인사들의 말과 표정이 떠올랐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지만 비공개를 전제로 만났기에 이들이 누구인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의 반응이 외교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의 수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요약하면 한국에 대단히 실망했고(disappointed), 이런 상황이 황당하다(embarrassed)는 것이었다. 이들의 반응이 반드시 정당하거나 합리적이라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은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좋든 싫든 우리의 지소미아 종료 카드, 그로 인해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상황에 대해 미국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강경했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가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 결정에 대해 갱신(renew)이라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사용한 건 이런 기류를 완곡하게 담아낸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 사람들은 지소미아 카드로 이른바 ‘한국식 벼랑 끝 전술’이 먹혔다는 데 방점을 둔다. 한 고위 관계자는 “우리가 지소미아 종료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막판에 미국이 움직여서 일본을 설득할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효과가 있었다고 해서 일본에 수출 규제 해제를 압박하기 위해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는 한국을 미국이 어떻게 바라볼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정부가 지소미아를 조건부 연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정부가 지난달 22일 오후 6시에 발표하기 수 시간 전 미국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팩트와 기대가 뒤섞여 있었지만 한국 정부가 입장을 바꾸었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담겨 있었다. 당시 워싱턴은 새벽이었다. 그만큼 이 사안을 한미동맹, 한미일 안보 핵심 현안으로 보고 24시간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얘기다. 우리 정부도 미국의 이런 점을 활용해 일본의 태도 변화를 유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소미아에 대한 미국의 생각을 이렇게 확인했는데도 버젓이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또 흔든다면 우리가 과연 트럼프보다 한미동맹에 대해 더 절실하고 수호 의지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주한미군 분담금을 50억 달러 내라는 트럼프의 동맹 인식이 천박하다고 마냥 비판할 자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지소미아 카드를 협상 칩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을 유지하는 선에서 대처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한미동맹을 스스로 옭아매는 이런 식의 자해적 협상은 우리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이 다른 건 몰라도 전통적으로 안보에는 여야 구분 없이 보수적이다. 트럼프 시대엔 더 말할 것도 없다. 안보를 담보 삼는 도박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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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용 용퇴론이 나오는 세 가지 이유[오늘과 내일/이승헌]

    요즘 정치권에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거취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나온다.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좌초된 후부터 나오기 시작했던 건데 최근 더 자주 들린다. 1일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이동식발사대(TEL)로 발사하기 어렵다”고 말해 이른바 ‘TEL 진실게임’을 유발해서 더 그럴 것이다. 필자는 최근 사건을 계기로 그에 대한 한미 외교가의 평가를 두루 접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정 실장에 대한 평가가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했다. 박수 칠 때 떠나야 한다는 게 다수였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정무적 감각이나 외교적 감수성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 한마디, 단어 철자 하나가 미칠 파장을 놓고 몇 시간씩 씨름하는 게 외교인데 이전보다 말을 너무 막 한다는 것이다. ICBM 발언이 결정적이었지만 다른 발언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표적인 게 “지소미아는 한미 동맹과 전혀 관계없다”(10일 기자간담회) 발언이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 등 일련의 미국 인사들이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지소미아 복원을 이야기한 것만 봐도, 정 실장의 이 발언은 2019년 한국의 외교안보 컨트롤타워가 했다고는 잘 믿기지 않는다. 둘째, 너무 고령 아니냐는 말도 적지 않다. 사람마다 체력이나 물리적 능력의 차이가 있으니 기계적으로 나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정치권처럼 청와대도 때 맞춰 의무적으로 물갈이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1946년생인 정 실장은 올해 73세로 정치권을 제외하고 현 정부 인사 중 최고령. 문재인 대통령보다 일곱 살 많다. 역대 최고령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도널드 트럼프와 동갑이다. 안보실은 요즘도 밤사이 해외에서 오는 보고를 챙기느라 돌아가며 철야 숙직을 설 정도로 노동 강도가 만만치 않다. 정 실장의 새로운 카운터파트인 로버트 오브라이언 신임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966년생으로 정 실장보다 스무 살 아래다. 셋째, 상황 대처능력이 이전 같지 않다. 다시 문제의 ICBM 발언 사건. 정 실장은 1일 국감에서 이 발언을 한 뒤 문 대통령을 수행해 3일 태국을 찾았다. 정 실장은 주변에 “내가 어떻게든 좀 설명하고 싶다”고 했고 5일 귀국하자마자 청와대는 작성 주체가 불분명한 보도 참고자료를 뿌렸다. 알고 보니 안보실에서 작성에 관여했는데, 지금 봐도 내용이 낯 뜨겁다. 정 실장의 ICBM 발언 논란을 가라앉히겠다며 “TEL 발사는 Transporter 운반해서 Erector 세우고, Launcher 발사까지 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운반만 하고 세운 것만으로는 TEL 발사로 규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오히려 논란을 더 키웠다. 기습 전개에 따른 신속 타격이라는 이동식 발사의 요체를 무시한, 그야말로 유체이탈 화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외교관들은 ‘의견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agree to disagree)’는 식으로 가급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표현하라고 훈련받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전직 외교관은 “복잡한 사안이 발생해도 꼬투리 잡히지 않게 대처하는 게 외교인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비핵화 대화 기조를 만들어내려 평양으로, 워싱턴으로 뛰어다닌 노(老)외교관의 그간 노력을 폄훼할 수는 없다. 다만 고단한 국가안보실장을 계속 수행하기엔 버거운 듯한 징후가 계속 감지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 실장이 그간 축적한 지혜를 발휘할 다른 기회를 빨리 찾아주는 게 본인과 문 대통령, 더 나아가 외교정책 서비스의 수혜자인 국민에게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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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희상 “내년 총선후 개헌해야… 여야 막론하고 찬성세력 3분의2 됐으면”

    《“내년 총선 후 구성되는 21대 국회에선 개헌을 해야 한다. 개헌에 찬성하는 세력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 됐으면 좋겠다.” 문희상 국회의장(74)은 14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지핀 개헌 논의에 대해 “21대 국회가 열리고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그때밖에 할 수 없다”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해 7월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문 의장은 연내 개헌 처리를 목표로 삼았지만 동력을 얻지 못했다. 문 의장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터져 나오는 세대교체 요구에 대해선 “어느 때나 세대교체 요구가 있었지만 제대로 하기 위해선 시대정신과 국민 요구에 맞는 선명한 깃발과 그에 맞는 기수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세대교체론은 인위적일 수 있다”고도 했다.》 문 의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거쳐 열린우리당 의장과 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낸 6선(경기 의정부갑) 의원이다. 인터뷰는 임기 반환점을 돈 문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향후 과제, 총선 전망, 한일 갈등 해법,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처리 등에 대한 생각을 듣기 위해 14일 국회의장실에서 1시간 10분가량 진행됐다. 다음은 문 의장과의 일문일답.○ “개헌, 고칠 수 있는 것부터 고쳐야” ―문 대통령이 10일 여야 5당 대표 만찬회동에서 “내년 총선 공약으로 개헌 공약을 내걸어서 민의에 따르자”고 했다. “그렇게 될 거라고 본다. 역대로 ‘정치가 꽉 막혀서 더 나아갈 길이 없다’고 했을 때 이를 뒤집어 놓은 게 국민이었다. 4·19혁명과 6월 민주항쟁이 끝나고 제도적으로 마무리 지은 건 개헌이었다. 개헌의 기본 원칙은 제왕적 대통령제에 집중된 권력을 분화시키고 지방자치를 활성화해서 지방자치단체가 자립할 근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개헌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있다. 방법론이 중요해 보인다. “21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대통령 임기를 2년쯤 남겨둔 그때밖에 할 수 없다.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 됐으면 좋겠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에서 세대교체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데…. “불진즉퇴(不進則退)라고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 퇴계 이황의 말씀이다. 늘 앞으로 나가야 하고 교체되고 변화돼야 된다. 교체는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깃발이고 하나는 기수다. 시대적 정신과 국민 요구에 맞춰 깃발을 늘 닦고 있어야 한다. 구깃구깃한 옛날 깃발을 그대로 신줏단지처럼 가지고 있으면 제대로 된 정당도, 제대로 된 국민도 아니다. 그 다음이 기수다. 그 (범주) 안에 세대교체가 들어간다.” ―일각에선 세대교체가 반드시 새로운 정치를 뜻하는 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혁명이 아닌 이상 (인적 교체가) 작위적이어선 안 된다. 문제는 (새로운 사람들이 내거는 깃발이) 시대정신에 맞거나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 하지 말라고 해도 바뀌게 된다. 인위적으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억지로 하는 건 정략적 주장일 뿐이다. 세대교체에 대한 최종 판단은 결국 국민이 하게 될 것이다.” ―각 당이 2030세대에게 비례대표 50% 할당하자는 주장이 있다. “일리가 있다. 여성할당제를 하는 멕시코는 의원 50%가 여성이다. 그런 식으로 청년도 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정확한 배분 비율은 각 당에서 정하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점진적으로 그쪽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보수 통합 논의는 어떻게 평가하나. “특정 정당을 가정하고 얘기하진 않겠다. 중요한 건 기수가 기수답지 않다면 모래알처럼 안 모인다. 깃발과 기수가 맞아떨어져야 된다. 보수통합도 깃발부터 선명해야 된다. 우선 통합이건 연대건 선거연합이든 세력끼리 뭉치자고 할 땐 대의명분이 뚜렷해야 한다. 대의명분이 없으면 시너지는커녕 마이너스가 된다. 둘째, 공개적으로 논의를 해야 한다. 비밀로 해서 마지막에 터뜨리는 것과 공개하는 게 있는데 성공 확률은 후자가 더 높다. 밀실에서 하면 야합이 된다.”○ “국민통합에서 실패하면 0점” ―문재인 정부가 반환점을 돌았다. 청와대 참모를 교체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지적도 많다. 어떻게 평가하는지…. “문 대통령이 반은 성공했다고 본다. 그런데 이제부터다. 이제부터는 핑계 댈 일이 없다. 이제부터 결과로 책임져야 된다. 평가의 시간이 시작됐다. 시간이 재깍재깍 흐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 생기는 문제점은 개선하겠다고 해야 한다. 아주 실용적인 접근으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예상하면서 민생, 경제 위주로 전략을 맞춰야 한다.” ―반은 성공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대목이 성공했다는 것인가. “(임기) 반을 지났는데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한다는 비율이 절반가량 나오니까 하는 말이다. (적폐청산 등) 기본 방향 설정이 잘못됐다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런데 앞으로는 민생, 경제, 통합과 협치가 중요하다. 아무리 안보와 경제에 유능한 대통령이라고 해도 국민통합에서 실패하면 빵점(0)이다. 대통령의 능력은 국가경영과 국민통합의 곱셈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임기 하반기엔 (문재인 정부가) 민생과 협치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어떻게 평가하나. “대통령의 독특한 캐릭터를 보완하는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현명하고 말을 맛깔나게 한다. 방어에 아주 제격이다. 정권의 대외창구로서의 총리의 임무는 방어다. 최일선에서 말로 막아야 하는데 내공도 있고 논리에서도 지지 않는다. 차기 주자에 대한 기대와 특정 지역(호남)에서 절대적 지지를 확보한 사람으로서 여유가 있다.” ―검찰 개혁 법안을 부의하기로 한 12월 3일이 얼마 안 남았다. 향후 패스트트랙 처리는 어떻게 전망하면 되나. “12월 3일 부의된 뒤 본회의가 언제 열리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나는 그때까지 여야에 시간을 줬으니 합의를 해오라는 거다. (부의되면)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타이밍에 예산, 사법개혁, 정치개혁 법안 일괄해서 처리될 거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여야 간 합의가 안 되면 상정이 불가피하다고 하는데 한국당은 ‘게임의 룰’을 합의 처리를 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건 거짓말이다. 역대 선거법을 합의해서 결정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대부분 과반수로 밀어붙였다. 합의한 것은 선거구 획정이다. 그것도 안 하면 돌아버린 국회, 미친 국회다. 시간이 많지 않다. 12월 17일부터 예비후보자 등록을 해야 된다.” ―의원 정수 늘리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제 묵은 쟁점이다. 여당과 제1야당이 반대하니까.”○ “지소미아 종료 뒤집을 명분 없어” ―이달 초 한일 기업의 자발적 기부금과 양국 국민의 성금으로 기금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루아침에 뚝 떨어진 안이 아니다. 여기서 만날 수 있는 사람 다 만났고 그쪽에서도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 다 만났다. 내가 꼭 전해야 할 말은 두 사람이 의장 특사 자격으로 세 번에 걸쳐 일본에 가서 전달했다. 나 나름대로는 점검을 한 안이다. 현재 안은 만들었다. 법안 형태로 제출할 것이다.” ―일각에선 ‘문희상 이니셔티브’라고도 하는데 일본 측 반응은 어떠한가. “지금까지 나오는 게 절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나.” ―지소미아 종료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대로 종료되면 (한미일 관계에) 후폭풍이 일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지소미아를 종료한다고 얘기했고 그걸 뒤집을 만한 명분이 없는데 어떻게 이를 취소한단 말인가. 그건 주권 국가가 아니다. 일본이 먼저 화이트리스트 배제할 때 안보를 이유로 삼았다. 우리를 못 믿겠다는데 우리가 왜 정보를 줘야 하나.” ―미국은 적극적으로 일본을 설득하고 있다고 보나. “일본은 우리보다 10배의 압력을 (미국으로부터) 느끼고 있을 것이다.” ―여당 중심으로 과도한 방위비 분담금 요구에 대해 국회 비준 동의에 반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어떻게 만들어진 한미동맹인데 이를 돈으로 계산하자는 건 나로선 이해가 안 된다. 우리가 돈을 주니까 주한미군이 와 있는 것이냐고 미국에 되묻고 싶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국회 동의를 얻어야 되기 때문에 정부가 들고 오는 안을 우리가 동의 안 해 줄 일은 없다. 정부가 합의될 정도로 (협상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미동맹을 서로 깰 순 없지 않은가.”인터뷰=이승헌 정치부장 / 정리=길진균 leon@donga.com·황형준·김지현 기자}

    •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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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한국당이 요즘 잘 안되는 진짜 이유[오늘과 내일/이승헌]

    자유한국당이 조국 사태 이후 지지율이 반짝 상승하다가 다시 고전하는 이유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광화문 집회’로 상징되는 지지층 결속이라는 호재에도 워낙 다양한 악재들이 터지다 보니 한국당도 정신 못 차릴 지경이라고 한다. 조국 사태에 기여한 의원들 표창장 논란부터 패스트트랙 ‘투쟁’ 참여 의원에 대한 공천 가산점 문제, 문재인 대통령 비하 애니메이션에 이어 박찬주 전 대장 영입 논란이 불거졌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겠다며 영입했던 이자스민 전 의원은 정의당에 뺏겼다. 이를 놓고 황교안 대표의 일방통행식 당 운영이 문제라는 사람도 있고, 나경원 원내대표의 원내 전략이 시원찮다는 말도 있다. 한국당의 고질적인 웰빙병이 도졌다는 한숨도 들린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한국당의 악재 시리즈 전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거론되는 이유들도 너무 관습적이다. 오히려 대국민 소통 부족이 진짜 이유 아니냐는 말을 필자는 당 안팎에서 자주 접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유권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시뮬레이션도 해보지 않고 내키는 대로 하고 있다는 얘기다. 표창장부터 영입 논란까지 지지층 의중도 알아보지 않고 저지르다가 일이 터졌다. 사실 정치는 팔 할이 커뮤니케이션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별명이 왜 ‘위대한 소통자(great communicator)’일까. 할리우드 배우 출신인 그가 대단한 학벌이나 정치적 배경, 카리스마보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원하는 걸 미리 파악하는 데서 리더십을 길어 올렸기 때문이다. ‘정치적 눈치’가 남달랐다는 애기다. 그렇다면 한국당 의원들은 아예 소통에 자질이 없나. 그렇지 않다. 한국당 의원들을 사석에서 만나 보면 자기들끼리는 잘 통한다. 남성 의원들끼리는 ‘형’ ‘동생’ 하면서 수시로 연대를 과시하고 연락을 주고받는다. 밥자리에서 누구 이야기가 나오면 휴대전화를 꺼내 “야, 어디냐? 얼굴 좀 보자”고 하고, 실제로 달려와 서로 대화하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남녀 의원들끼리는 ‘누님’ ‘오라버니’ 하는 경우도 봤다. 이렇게 서로 이야기도 잘하고 사회성도 좋아 보이는데 왜 대국민 소통은 잘 안되는 걸까. 한국당 의원들의 이전 경력에 힌트가 있다. 판사 검사 장차관 장성…. 대부분 ‘갑’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다. 아랫사람과 상대방에게 지시하는 게 본업인 직군이다. 평생 ‘을’의 위치에 있어 볼 일이 없다.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떻게 나오는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국회의원 몇 년 했다고 그 체질이 쉽게 바뀔 리가 없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는 젊은 시절부터 바닥 민심과의 소통을 몸으로 익힌 사람이 많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 모두 현장 반응에 얼마나 기민하게 반응하느냐가 그 분야에서 생존을 좌우한다. 같은 법조인이더라도 민주당엔 판검사 출신만큼이나 일선 변호사 활동을 한 사람이 많다. 법조인으로서 능력을 떠나 민심에 대한 반응 속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다들 ‘눈칫밥’을 먹어본 사람들이다. 이런 능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거나 학원에서 단기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한국당의 고민이 있다. 결국 지도부 몇 사람의 문제라기보단 사람 전체의 문제다. 자연스레 내년 총선 공천 문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얼마나 새 사람을, 순발력 있게 바닥 민심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충원해서 당의 체질을 조금이나마 바꾸느냐에 내년 4월 15일 이후 한국당의 정치적 미래까지 달려 있는 것이다. 총선까지 앞으로 162일. 한국당은 과연 이걸 해낼 수 있을까.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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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낙연 총리의 또 다른 도쿄 미션[오늘과 내일/이승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일본인 첫 노벨 문학상을 안긴 소설 ‘설국(雪國)’의 유명한 첫 문장. 이낙연 국무총리가 섬세한 글쓰기의 중요성을 주변에 이야기할 때 종종 인용해 온 문장이다. 주장하지 말고 손에 잡히듯, 알기 쉽게 묘사하라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인지 이 총리가 처음부터 일본을 잘 알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총리가 일본을 알게 된 계기는 30년 전 기자 시절 도쿄특파원으로 내정되면서다. 그때 이 총리는 일본어를 거의 못 했다. 카투사에서 군 복무를 해 영어를 더 잘했다. 사정이 급했던 이 총리는 어학원에서 일본어 수업을 초급반, 고급반 동시에 두 개를 끊었다. 문법을 배우다 갑자기 프리토킹하는 식이었다. 자극을 받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고 한다. 맨땅에 헤딩하듯 일본어와 씨름한 지 6개월. 일본 국민작가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등을 읽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도쿄는 학원과 달랐다. 부임하고서 얼마 안 돼 선술집에 갔는데 메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지만 메뉴별 특성, 술과의 궁합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지인에게 술집에서 알아야 할 안주 목록을 팩스로 받아 통째로 암기하기 시작했다. ‘이치닌마에(一人前·각자의 밥상을 차려주는 것으로 한 사람의 몫을 하라는 뜻이기도 함)’ 등 식사 자리에 녹아든 일본 문화도 알게 됐다. 얼마 뒤부터 모임이 있으면 대부분 이 총리가 주문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 총리는 정치인이 되고서도 종종 도쿄특파원 같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2002년 11월경. 그의 대변인이었던 이 총리는 노 전 대통령과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대선 후보와의 단일화를 취재하러 온 일본 기자가 한국말로 묻자 일본어로 답했다. 일본 기자는 “저 한국말 잘합니다”라고 했지만 이 총리는 계속 일본어로 말했다. 결국 대화는 일본어로 진행됐다. 옆에 있던 필자는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일본을 잘 안다는 자기 과시보다는, 어렵게 일군 지일파라는 브랜드를 잃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 비슷한 걸 느꼈다. 요즘 이 총리가 일본 인사들과 대화하면서 일본어로 했다고 강조할 때도 이 장면이 오버랩된다. 이 총리는 굳이 구분하자면 타고난 ‘금수저 지일파’라기보단 ‘생계형 지일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총리가 22일 일본을 방문해 일왕 즉위식에 참석하고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나는 게 확정된 뒤 다양한 관측이 나온다. 한일 정상회담의 초석을 놓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많지만 더 이상의 관계 악화를 막는 상황 관리에 그칠 것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이 총리에겐 또 다른 미션이 있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에도 30년간 ‘전투적’으로 일본을 알고 경험하려 했던 지일파가 있다는 메시지를 일본 사람들에게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장의 성과를 내느냐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다. 한일 갈등이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이전과는 너무 달라진 아베의 일본이 우선 문제겠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도 일본의 속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대일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지일파라는 이 총리가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 이후 대일 문제의 수면 위로 등장하는 데 꼬박 1년 걸린 게 현실이다. 일본은 자신들을 잘 아는 사람을 내보내지 않는 문 대통령을 그 시간만큼 비딱하게 봤을 것이다. 이는 한미동맹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문재인 정부에 미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외교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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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의 SLBM에도 무감각해진 한국 사회[오늘과 내일/이승헌]

    “가장 좋은 무기는 아예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무기라는 사람들이 있다. 난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적이 공포를 느끼도록 시험 발사든 뭐든) 단 한 번만 사용해도 되는 무기를 선호한다. 그게 미국의 방식이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굴지의 무기개발업자인 주인공 토니 스타크가 신무기를 시험 발사하면서 한 유명한 말이다. 영화 속 대사지만 군사 패권 국가로서 미국의 속성을 이처럼 날카롭게 지적한 말을 필자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실제로 미군은 핵무기를 시험 발사할 때 종종 외부에 공개한다. 위력을 감상하고 긴장하라는 것이다. 9월 미 캘리포니아 인근 해안에 있는 핵잠수함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트라이던트2-D5를 시험 발사한 뒤 공개했다. 2일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미니트맨3를 시험 발사했고 즉시 외부에 공개했다. 그런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북한이 최근 ICBM, SLBM 카드를 잇달아 만지작거리자 대남 단거리 미사일 도발 때와는 달리 화들짝 놀라고 있다. 북한은 2일 SLBM인 북극성-3형을 시험 발사했고 5일 비핵화 실무협상이 결렬되자 ICBM 시험 발사 가능성을 거론하고 나섰다. 그러자 미국은 온갖 북한 미사일을 탐지할 수 있는 첨단 정찰기인 조인트스타스 두 대를 일본 오키나와에 배치했다. 자기들이 누구보다 그 군사적 위력은 물론 국제 안보지형에 미칠 파장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지금은 ‘김정은과 아름다운 친서를 주고받고 있다’는 트럼프는 김정은의 ICBM에는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2017년 11월 ICBM인 화성-15형 시험 발사에 성공하자 “북한의 고립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김정은이 ICBM 시험 발사 버튼을 다시 누른다면 친서는 당분간 없던 일이 될 것이다. 미국이 중앙정보국(CIA) 등의 분석과 달리 북한이 ICBM 핵심인 탄두부 대기권 재진입(re-entry) 기술을 확보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도, 이를 인정하는 순간 북한이 미 본토를 타격할 핵무기 보유국이 되기 때문이다. 미 국방부와 합참은 북한이 SLBM을 쏘자 이례적으로 3일 공동 브리핑을 하고 “북한의 실험은 불필요한 도발(provocative)”이라고 규정했다. 비핵화 대화가 시작된 뒤 자제했던 ‘도발’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바다 기반(sea-based) 발사대(수중 바지선)에서 쐈다”며 잠수함에서 발사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SLBM의 파괴력은 잠수함에 탑재된 채 조용히 목표 인근까지 와서 기습 발사하는 데 있다. 미국이 잠수함 발사 가능성을 언급하는 순간 북한은 ICBM에 이어 또 다른 핵전력을 소유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실 여부를 떠나 SLBM 요건을 100%는 갖추지 못했다고 강조한 것이다. 주변 상황이 이런데 한국은 이상하리만치 북한의 SLBM 도발에 조용하다. 과민반응하면 북한 의도에 말려들 수 있겠으나, 우리 명운이 달린 안보 이슈인데도 최소한의 사회적 논의와 우려 자체가 실종됐다. 북한은 공군 전력이 취약해 미국처럼 전략폭격기를 둘 수 없어 ICBM, SLBM이 핵 전력 ‘투 톱’이다. 그런데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SLBM은 9·19 남북 군사합의에 위배되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도 별 문제 삼지 않고, 일주일도 안 돼 SLBM 도발은 남의 나라 일처럼 되어가고 있다. 조국 블랙홀 때문이라지만 이 정도면 한 나라의 안보 감수성이 거의 제로 상태라고 봐야 한다. 언젠가는 조국 사태에서 빠져나와 안보 상황을 점검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때는 이미 꽤 늦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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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노영민 비서실장이 잘 안 보인다[오늘과 내일/이승헌]

    최근 대통령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화제인 책이 있다. 미국 언론인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인 크리스 위플이 쓴 ‘게이트키퍼(The Gatekeepers)’. 부제는 ‘How the White House Chiefs of Staff Define Every Presidency’다. ‘권력의 문지기’인 비서실장이 (자신이 모시는) 대통령과 그 정권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것이다. 바람직한 비서실장 역할을 알아보려 전직 비서실장 17명을 인터뷰했다. 미국 권력구조를 벤치마킹한 우리 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필자는 이 중 3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첫째, 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나쁜 놈’(SOB·son of a bit××)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를 비서실장으로 보좌한 제임스 베이커는 “비서실장은 (예스맨이 아니라) ‘노맨’(naysayer)이어야 한다. 그래서 워싱턴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라고 했다. 둘째, 대통령과 의회 간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의 초대 비서실장인 람 이매뉴얼은 ‘오바마케어’를 통과시키려 한동안 점심 약속 대부분을 의원들과 잡았다. 아침 운동도 백악관이 아니라 의회 내 시설을 이용하며 스킨십을 넓혔다. 셋째, 비서실장(Chief of Staff)은 실장(Chief)보다는 비서(Staff)에 방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서실 조직을 장악하려 ‘사내 정치’에 매달리다 보면 대통령 보좌라는 본연의 업무에 소홀해진다는 이유에서다. 이 책을 소개받은 것은 정치권에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노 실장은 1월 임명될 때 ‘원조 친문’의 귀환이라며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3선 국회의원에 주중 대사를 지낸 헤비급. 전임 임종석 실장보다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 한미동맹 균열, 조국 사태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국정 난맥 도미노를 막기 위해 노 실장이 존재감을 발휘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국회에 나가 북한 핵실험 횟수를 잘못 말한 게 구설에 올랐다. 노 실장이 당초 기대에 못 미치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책이 주목한 3가지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노 실장이 국정 현안을 놓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치적 무게에 맞는 고언을 하고 있는가. 여권 인사들 대부분이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고 국회, 특히 야당과 활발하게 접촉하는가. 야당 중진들이 노 실장과 막걸리 한잔하며 세상 이야기 나눴다는 말 역시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그 대신 비서실 기강 잡고, 인사 접촉 시 보고체계를 강화했다는 말은 종종 들린다. 그런데 이게 100% 노 실장 잘못만은 아니라는 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다시 ‘게이트키퍼’ 이야기. 제임스 베이커는 “비서실장이 자신 있게 일하려면 대통령으로부터 제대로 힘을 받아야 한다(empowered by president)”고 조언한다. 대통령의 성패에 비서실장이 영향을 미치듯, 실장 역할도 대통령이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누군가의 비서 노릇은 고되다. 전임 임종석 실장은 1년 7개월 하면서 스트레스로 치아 6개가 빠져 임플란트를 했다. 문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좌하며 치아 10개가 빠졌다. 지금까지의 비서실장 ‘성적’만으로 정치인 노영민을 평가할 수도 없다. 하지만 조국 사태에 가려진 국내외 도전 과제가 파도 더미다. 노 실장이 이제라도 온몸을 던져 존재감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다. 필요하면 문 대통령과 담판이라도 해야 한다. 대통령비서실장이 제 기능을 못 하면 정권만 불행해지는 게 아니다. 국민도 피곤해진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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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정부 실력으론 제2의 조국 사태 못 막는다[오늘과 내일/이승헌]

    “눈 오면 자기 집 앞을 잘 치우던가요?” 2017년 2월 어느 토요일 오전. 워싱턴 특파원이던 필자 집에 정장 차림의 흑인 남성이 찾아와 백악관 신분증을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 옆집 아저씨가 차관보급 공직 후보자로 지명되는데 이웃을 대상으로 평판 조회 중이라고 했다. 이 남성은 눈 치우기 외에도 이런 질문을 했다. △옆집 아저씨가 주말 파티를 자주 한다는데 시끄럽지 않으냐 △파티 후 통상 술병은 얼마나 배출하느냐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싸우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느냐…. 별걸 다 묻기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 남성은 “미국을 위해 중요한 질문”이라며 심각한 표정이었다. 성실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아보니 옆집 아저씨는 몇 개월의 검증 후 낙마했다. 평판 조회가 이 정도였으니 본 검증 수위는 대단했겠다고 짐작만 했다. 2년 반 전 장면이 떠오른 건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검증 논란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조 장관이 대통령민정수석이었으니 검증이 엉망이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민정수석이었다면 훨씬 나았을지 역시 모르는 일이다. 사람의 문제도 있겠지만 현 정권 들어 정부의 인사 검증 역량, 시스템이 어느 때보다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조국 논란이 보여주듯 도덕성 검증은 드러나지 않은 의혹이나 논란까지 얼마나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딸 입시 관련 의혹, 사모펀드 논란은 드러난 자료만으로는 금방 알 수 없다. 주요 공직 후보군에 대한 광범위한 평가 수집과 정보 축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그런 기능을 하던 기관과 조직은 적폐 청산을 이유로 없어지거나 축소됐다. 대표적인 게 국가정보원의 국내 파트. 댓글 조작 사건 등을 계기로 국내 파트가 대폭 정리되면서 ‘인사 파일’ 작성 기능도 사라졌다. 국내 정보는 국정원 힘의 원천. 정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며 그 뿌리를 잘라낸 것이었다. 평가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1년쯤 지나자 문제가 나타났다. 국정원이 제공하던 최고급 인사 정보가 끊기면서 청와대 민정 라인 검증에 하나둘씩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 경찰 국세청 등 다른 기관에서 인사 기초 정보는 계속 들어오지만, 이 분야에 특화된 엘리트 조직의 부재를 메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국정원 최고위급 인사에게 이 문제를 물었더니 “금단현상이 있겠지만 어쩌겠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부실 인사 검증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조국 청문회에서 확인했듯 국회의원들에게만 검증을 맡길 수도 없다. 결국 제2의 조국 사태를 막기 위해선 주요 공직 후보군에 대한 중립적이면서도 충분한 기초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별도 조직을 두든, 기존 수사기관에 기능을 추가로 부여하든 고위 공직에 나서려면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조사를 군말 없이 거쳐야 한다는 사회적 약속 같은 것 말이다. 사찰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를 들어 반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낙하산 인사나 깜도 안 되는 인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관이 되는 장면을 하도 자주 봐서 그렇지, 원래 공직은 그 정도의 무게와 시험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청문 선진국인 미국에선 공직 후보자 검증을 표현할 때 ‘전면적 조사’라는 뜻의 ‘Scrutiny’를 자주 쓴다. 그냥 훑고 마는 게 아니라 필자 옆집 아저씨도 거쳤을 그런 과정 말이다. 미국이 트럼프의 좌충우돌에도 주요 공직자들이 있어 어느 정도 돌아간다면 그건 1차적으로 백악관 연방수사국(FBI) 국세청(IRS) 등이 총동원되는 저인망식 검증 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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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靑이 지소미아 깨며 간과한 ‘USA’의 본질[오늘과 내일/이승헌]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 후 미국의 다양한 불만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미국도 파기 결정을 이해했다”는 청와대의 설명에 “거짓말”이라는 미 국무부 관계자의 반응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름만 대면 청와대도 금방 아는 워싱턴의 한 전직 관료는 “지소미아 파기는 1905년 (일본과)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한국 정부의 가장 큰 전략적 오산(the greatest strategic miscalculation Korea has made since Korean officials signed the Eulsa Treaty in 1905)”이라고 흥분했다. 한일 위안부 갈등 국면에서 우리 편에 섰던 래리 닉시 박사(한미연구소 연구위원)는 “이번 결정으로 한국은 다른 사안을 놓고 대미 협상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워싱턴의 반응에 집권세력은 꽤 놀란 듯하다. 김현종 안보실 2차장이 파기 결정 다음 날 브리핑을 자처하며 미국과의 소통을 강조한 게 그렇다. 어떻게 이런 인식 차가, 그것도 동맹 간에 드러난 것일까. 필자는 청와대가 지소미아 파기 결정 전 미국과 관련해 핵심적인 사실 두 가지를 간과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첫째, 지소미아는 초당적 이슈라는 점이다. 지소미아는 트럼프 작품이 아니다. 지소미아는 문재인 대통령 이상으로 진보좌파였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몇 차례 한일 정부를 설득한 끝에 2016년 11월 체결됐다. 오바마는 트럼프 못지않게 중국의 굴기를 막으려 했고 그 1차 저지선이 바로 한미일 3각 안보 축. 더 정확히는 주한미군의 병참 역할을 하는 주일미군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일본이 지소미아를 통해 한국의 대북 정보를 잘 받아야 했다. 이 안보 구상은 중국과 경제전쟁을 치르는 트럼프 시대에 더하면 더했지 달라질 게 없다. 지소미아를 놓고 보혁으로 찢어진 우리 정치권과 달리 미국에선 여야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는 그걸 건드린 것이다. 둘째, 무엇보다 미국은 평소에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다가도 안보 이슈에는 이상할 정도로 뭉친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다. 누구나 제 나라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하겠지만, 인디언을 몰아내고 영국과 혈전을 치른 ‘전쟁 국가’ 미국은 그 차원이 다르다. 미 언론은 요즘도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라도 쏘면 ‘미국 땅에 닿을 수 있다’면서 영토(territory)라는 국제법 개념보단 흙(soil)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어렵게 일군 내 나라 흙 한 줌도 내줄 수 없다는 뉘앙스다. 애국자(Patriot)라는 표현이 정권을 막론하고 요즘도 거부감 없이 사용되는 게 미국이다. 미사일 요격체계(패트리엇 미사일), 미식축구팀(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은 물론 테러방지법 이름도 애국법(Patriot Act)이다. 태극기가 특정 정치세력의 아이콘이 되고 일각에선 이를 비하하는 한국에서, 애국자라는 표현을 이리 사용했다면 ‘국뽕’ 논란으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끊이지 않는 질문 중 하나는 과연 정부에 미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냐는 것이었다. 외교부 내 ‘워싱턴 스쿨’의 씨가 마르고 ‘코드 인사’를 집중 배치하면서다. 지금은 어떤가.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식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여럿 있다. 하지만 외교 상대로서 미국의 본질을 파악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지소미아 파기로 한미동맹이 밑동부터 흔들리고 있다. 이번 결정을 주도한 외교안보라인, 특히 청와대 국가안보실 사람들은 영어 좀 한다고 자만하지 말고 더 늦기 전에 겸허하게 워싱턴과 소통에 나서야 한다. 안 그러면 70년 한미동맹의 역사에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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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교안이 생각만큼 잘 안 되는 진짜 이유[오늘과 내일/이승헌]

    “하∼∼∼.” 얼마 전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주변 인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긴 한숨이 들렸다. 계속 말이 없기에 전화가 끊긴 줄 알고 “여보세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대표님이 잘해 보려고 하는데, 어렵네요. 언젠가는 잘되겠죠? 그렇죠?” 요즘 한국당 사람들이 황 대표에 대한 걱정이 많다. 황 대표를 간판으로 내년 총선과 2022년 대선을 치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황 대표의 대선 주자 선호도 추이도 이런 걱정을 부채질한다. 지난주 리얼미터 조사에선 2월 취임 후 처음으로 20%대가 무너졌다. 황 대표와 함께할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감수성, 콘텐츠 부족을 문제 삼는다. 엉덩이 댄스 논란을 시작으로 청년들에게 아들의 취업 스토리를 버젓이 전한 게 대표적이다. 취임 6개월이 다 되도록 내세울 정치적 상품이 없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 황 대표 걱정할 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감수성, 콘텐츠 부족이 정말 문제의 핵심일까. 이걸 갖추면 보수의 고민은 사라질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우선 감수성. YS 이후 최근 한국당이나 그 전신 정당 출신 대표나 대통령 중 정치적 감수성이 탁월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대쪽 총리’ 이회창부터 이명박 박근혜까지, 감수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감수성은 진보세력들이 비교 우위를 갖는 영역. 초 단위로 돌아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게 보수세력은 어지간해선 만족스러운 감수성을 선보이기 어렵다. 콘텐츠는 정치인들을 비판할 때 가장 ‘편하게’ 꺼내 드는 소재. 하지만 DJ, JP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콘텐츠에 자신 있어 할 정치인은 현재 대한민국에 없다. 걱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조차 별 생각 없이 레토릭과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 오히려 황 대표의 진짜 문제는 2019년 8월 지금 집권세력과 차별화된 제도권 보수세력만의 메시지 부족에 있지 않나 싶다. 황 대표가 최근까지 주요 이슈에 대해 밝힌 입장은 ‘황교안 메시지’라기보다 문재인 정부나 김정은에 대한 리액션에 가깝다. “총체적 안보 붕괴 상황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 표명과 대국민 사과를 촉구한다.” 황 대표가 북한의 미사일 도발 직후인 10일 긴급회의에서 한 말이다. 안보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법한 말이다. 이 정도 메시지로는 문재인이라는 ‘정치 함수’에서 종속 변수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미국의 현 집권세력이 보수인 만큼 워싱턴으로 가서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겠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집권세력에 아쉬워하는 걸 파고들어 그 대안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겉돈다. 대통령 비서를 법무부 장관으로 보내는 내로남불이 저급하다면 비난을 넘어 보수만의 품격을 궁리해야 한다. 미국 보수의 상징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1984년 73세로 재선에 도전했을 때 월터 먼데일 민주당 대선후보(당시 56세)와의 TV토론에서 나이를 문제 삼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 목적으로 선거 기간 중 이용하지 않겠다.” 먼데일도 웃어 버렸고, 선거는 이걸로 끝났다. 물론 사람은 잘 안 바뀐다. 국무총리와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낸 성공한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으면 거기까지다. 황 대표 혼자 다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은 당도 그의 변화를 도와야 한다. 아직도 친박 비박 타령하며 팔짱 낀 채 황 대표가 쓰러지길 기다리거나 벌써 비대위를 거론하는 건 보수세력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상황에서 황교안이 좌초하면 혼자만 망할 것 같은가.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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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트리트 파이터에 둘러싸인 ‘고구마 文’[오늘과 내일/이승헌]

    #1. “규범적이죠. 한번 정하면 벗어나려 하지 않는….” 명실공히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 중 한 명은 얼마 전 정치인으로서 문 대통령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 특징이 있을 텐데 망설임 없이 ‘규범’을 골랐다. 법이나 원칙을 잘 지킨다는 뜻도 있겠지만 스스로 정한 기준을 허물지 않겠다는, 정치적 고집에 방점이 찍힌 말이었다. #2. “그래서 별명이 고구마 아닌가.” 여권의 최고위급 인사는 최근 문 대통령의 리더십을 평가하면서 이리 말했다. 고구마는 2017년 대선 전부터 있었던 문 대통령의 별명 중 하나. 한 가지 문제를 우직하고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숙고하는 타입이라는 뜻에서 붙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고구마’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듣고 새삼 놀랐다. 그는 “고구마 외 다른 비유 대상을 아직 잘 못 찾겠다. (꽉 막혔다는 것 말고도) 속이 꽉 찼다는 의미도 있지 않으냐”고 했다. 문 대통령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떠오른 것은 한 달간 우리 주변에서 잇달아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서다. 최근 한 달처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돌아가며 한반도를 정신없이 들었다 놨다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았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4일부터 초유의 대한(對韓) 경제 보복 중이다. 러시아는 우리 영공을 무단 침범했고, 중국은 러시아와 카디즈를 넘나들었다. 김정은은 트럼프와 악수한 지 한 달도 안 돼 신형 잠수함, 탄도미사일을 선보이며 한 달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하나같이 국제사회에서 말하는 일반적 통념(conventional wisdom)의 틀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사안들이었다. 필자는 이 한 달을 지켜보며 우리가 트럼프, 시진핑, 푸틴, 아베, 김정은을 통칭할 때 사용하던 ‘스트롱 맨’이란 표현을 이제 그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2019년 7월 현재 이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권투로 치면 변칙 복서, 격투로 치면 유파(流派)나 규칙이 딱히 없는 ‘스트리트 파이터’에 더 가깝다. 이들을 길거리 싸움꾼으로 격하하자는 게 아니다. 실체를 제대로 보자는 거다. 굳이 패권 추구의 속성을 설파해 유명해진 존 미어샤이머의 국제정치이론인 ‘공격적 현실주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최근 국제정치에 스포츠처럼 ‘싸움의 규칙’이란 게 존재하는가. 큰 틀의 국제질서 속에서 최소한의 체면치레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기존 질서를 타파하겠다는 트럼프 등장 후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낯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문 대통령과 집권 세력을 보면 국제문제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원칙에 매달리거나 경직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 문 대통령의 대일(對日) 스탠스는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러시아는 영공 침범을 했는데 청와대는 러시아 무관의 발언을 놓고 해석이 엇갈리다 대응 시점을 놓쳤다. 김정은이 ‘남조선 당국자의 자멸’이란 표현을 쓰면서 한미동맹을 갈라놓으려 하는데, 청와대는 9·19 군사합의 위반이 아니라고 한다. 이슈마다 한두 발씩 대응이 늦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 대통령의 원칙 우선주의는 국내정치에선 위력적이다. 국제무대와 달리 국내에선 대통령이 1인자이기 때문이다. 적폐청산 수사, 소득주도성장 드라이브도 다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 더군다나 주변 정상들이 한결같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권투인 줄 알았는데 “킥복싱 아니었냐”며 발길질하는 게 좋든 싫든 지금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원칙주의 그 이상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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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우리 군은 진돗개인가 푸들인가[오늘과 내일/이승헌]

    최고 권력자와 군의 이상적인 관계는 어떤 것일까. 이 질문과 관련해 종종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2015년 9월 25일 오후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포트마이어 기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만찬을 불과 4시간 앞두고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이 급히 들어섰다. 미군 현역 최고위직인 마틴 뎀프시 합참의장의 전역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오바마와 뎀프시 사이가 늘 좋았던 건 아니다. 이슬람국가(IS) 격퇴전 해법을 놓고는 적지 않게 충돌했다. 오바마는 취임 후 ‘No boots on the ground(전투화 한 켤레도 땅에 닿지 않게 하겠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전쟁터에 미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것. 하지만 뎀프시는 “전쟁을 빨리 끝내려면 지상군을 보내야 한다”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오바마는 뎀프시를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군인으로서 정체성과 고집을 높게 평가했다. “마티(뎀프시의 애칭) 집무실에는 빈 시가 상자가 있는데 그 안엔 마티가 (2003년) 이라크전에 참전했을 때 휘하에서 전사한 132명의 미군 이름과 사진, 그들의 희망이 적힌 카드가 있다. 상자 겉에는 ‘(전사자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자(make it matter)’는 문구가 있다. 마티는 회의 때 132장의 카드 중 3장을 꺼내 항상 품에 지녔다.” 엄숙하던 전역식장에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마티를 합참의장에 임명한 것은 그가 보여준 군의 비전, 신뢰 때문이었다. 마티는 나에게 언제나 에두르지 않고 정직하게 조언했다. 당신 덕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마치고 IS 격퇴전을 치를 수 있었다. 이제 마티 당신을 내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럽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의 뎀프시는 “백악관 회의 때 종종 군인으로서 할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를 허용해 준 대통령에게 감사드린다”며 “조국의 제복을 입은 것은 생애 최고의 영광이었다”고 화답했다. 북한 목선 노크 귀순 사건과 해군 2함대의 허위 자수 강요 사건은 장르는 다르지만 은폐 의혹이라는 점에서 사건의 본질은 같다. 군은 왜 은폐하려 했을까. ‘윗선’의 심기를 거스르면 큰일 난다는 인식, 눈치 보기가 어느 때보다 팽배해 있기 때문이라는 게 군 안팎의 이야기다. 목선 사건 직후인 지난달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정경두 국방장관이 차렷 자세를 한 채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과하는 장면은 지금 벌어지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 한 여권 관계자는 “군이 경계태세 발령 때 ‘진돗개 경보’를 사용한다. 그만큼 충직하면서도 당당하고 날카롭게 나라를 잘 지키라는 뜻도 담겨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지금 이게 뭐냐”고 했다. 군이 늘 이랬던 건 아니다. 윗선 눈치 보기는 북핵 비핵화 협상이라는 불가항력적 요인도 작용했을 것이다. 군은 적과 싸우기 위한 조직인데 지금 상황은 군의 실존적 이유와 배치되는, 혼란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군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길들여지는 건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대화 기조일수록 군이 안보 이슈만큼은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을 자처할 수 있어야 한다. 국방장관이 필요하면 국무회의에서 일부러라도 반대 의견을 내야 정부 차원에서 안보 이슈를 제대로,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현 정부 들어서도 한미 양국 군이 굳건한 한미동맹을 만들자며 틈만 나면 사용하는 표현이 military presence(군의 주둔)와 deterrence(억제)다. 군이 강력한 존재감을 바탕으로 실존하고 있음을 적에게 보여줘야 도발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군은 지금 최소한의 존재감이 있는가.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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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한국당, 이런 ‘정치 IQ’로는 총선 망한다[오늘과 내일/이승헌]

    “진작에 저렇게 좀 하지….” 2007년 10월 서울 중구 남대문로 단암빌딩.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선거 캠프 발대식에서 갑자기 책상 위로 올라가자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회창은 노타이에 점퍼를 입은 채 “이제부터 나를 총재라고 부르지 마라. 자, 발로 뛰자, 아래에서 위로, 창을 열자”라고 외쳤다. 다들 처음 보는 이회창의 모습이었다. 한 측근은 “대법관 출신의 ‘대쪽 총리’를 자신의 브랜드로 내세웠지만 정작 많은 유권자들은 그를 귀족 엘리트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봤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변하는 데 10년 걸렸다”며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벌써 대통령이 됐을 텐데”라며 씁쓸해했다. 그는 두 달 후 15.07%의 득표율로 비교적 선전했지만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종종 정치의 세계에선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보다 밖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데, 주변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인식하면 정말로 그렇게 규정될 수 있다는 얘기다. 억울할 수도 있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래서 ‘정치 IQ’가 좋은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필요하면 실제와의 차이를 줄이려고 한다. 이회창의 ‘뒤늦은 깨달음’이 떠오른 것은 요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에서 벌어지는 풍경 때문이다. 과연 한국당은 자신들의 원조 격인 이회창이 대선을 두 번이나 날려 버린 뒤 깨달은, 이 비싸고 뼈저린 교훈을 알고 있을까. 아직 아니라고 본다. 대표적인 게 최근 여성 당원 행사의 ‘엉덩이 춤’ 논란이다. 한국당은 여성 비하 의도가 없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이를 여성 비하라고 인식하고 있다.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별도 수사를 하지 않는 한 정치의 세계에선 여성 비하로 굳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당은 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성 인지 감수성 제고 대책을 내놓기보단 남 탓을 한다. 황교안 대표는 지난달 27일 “좋은 메시지를 내놓으면 하나도 보도가 안 된다. 실수하면 크게 보도가 된다”고 했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렇게 말해 봤자 “한국당이 여성 비하 해놓고 대표는 언론 탓을 한다”는 인식을 더 굳힐 뿐이다. 강효상 의원의 한미 정상회담 통화 유출 파문에 대한 대응도 비슷하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청와대가 강 의원의 폭로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는 (그 폭로 내용이) 기밀이라고 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일부 보수 인사도 이 말을 듣고 “나경원 말이 이해가 안 된다. 어쨌든 유출한 것 아니냐”고들 한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에 비판적인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사실상 간첩 행위를 한 것 아니냐”고 지적할 정도다. 한국당과 강 의원은 “청와대가 해명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럴수록 “한국당이 외교 기밀을 유출했다”는 인식은 갈수록 사실로 굳어진다. 한국당 사람들은 이같이 일이 불거질 때마다 프레임을 거론한다. “집권세력이 자신들에게 ‘보수 꼴통’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는 것이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프레임 씌우기는 누구나 하는 정치 행위. 한국당도 여권을 상대로 소득주도성장 폐해를 거론하며 ‘경제 실정 프레임’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당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요즘 자신들이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에누리 없이 리뷰해 봐야 한다. 그러지 않고 여권의 프레임 공격만 원망하고 남 탓 해봤자 많은 사람들은 ‘변화를 거부하면서 피해자 코스프레 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총선 결과는 보나 마나이고, 우리 정치 지형은 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고 말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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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왜 우리는 정치언어의 사막에 살고 있나

    “흑색선전은 비아○○와 같다. 절망적 상황에서 한번 일어서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지만, 자칫 스스로 죽는 수가 있다.” 199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논평이 나오자 여야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서울시장 후보의 유종필 대변인(전 서울 관악구청장)이 상대 후보들의 흑색선전이 도를 넘었다며 낸 것이었다. 비수 속에 해학이 있는 논평에 당하는 쪽에서도 항의보다는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삭막해진 정치인들의 말을 접하면서 이전 정치인들의 말을 되새기는 경우를 주변에서 여럿 봤다. 이전의 말과 글이 꼭 품격 넘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막장 일변도는 아니었다.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이 문재인 대통령의 유럽 순방과 관련해 낸 ‘천렵질’ 논평을 필두로, 김현아 한국당 원내대변인의 ‘한센병’ 논평, 민 대변인의 ‘천렵질’ 논평에 ‘토가 나올 지경’이라는 더불어민주당의 논평까지 일일이 세기도 어렵다. 이전에는 정치인의 말이 시대의 정서를 관통하는 경우가 있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내로남불’ ‘정치 9단’ ‘총체적 난국’ 등 지금도 쓰는 말을 20년 전에 만들어냈다. 대변인만 다섯 번 지낸 이낙연 국무총리는 사안의 본질을 꿰뚫는 단문(短文) 논평으로 각종 선거를 돌파했다. 2002년 10월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에 반대하며 탈당파가 속출하자 그가 낸 대변인 논평은 한 줄이었다.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 총리가 된 뒤 국회에서 보여준 ‘사이다 답변’도 이런 시간의 축적 덕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한국 정치의 말과 글은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 기자는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인문학적 감수성이나 사람에 대한 관심 수준을 의심한다. 다양한 기회로 정치인들을 만나고 접하지만, 무릎을 치게 하는 인사이트나 주요 현안 해결을 위한 통시적 관점을 제시하는 경우를 요새는 거의 못 봤다. 대부분은 내년 총선, 특히 공천 향배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 발밑만 보다 보니 말과 글에 콘텐츠는 물론 페이소스와 유머가 배어들 틈이 없다. 한국의 사례는 아니지만 얼마 전 지인의 소개로 유튜브 동영상을 하나 봤다. 지난해 별세한 존 매케인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의 영결식장 연단에 민주당 유력 차기 대선 주자 중 한 명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섰다. “My name is Joe Biden(내 이름은 조 바이든입니다).” 얼굴을 모를 리 없는데 너스레를 떠니까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는 “I‘m a Democrat, and I love John McCain(나는 민주당원입니다. 그리고 존 매케인을 사랑합니다)”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여기 왜 있는지를 함축한 두 마디. 30분간의 조사(弔辭) 내내 눈물과 박수가 이어졌다. 국적, 시대와 무관하게 절차탁마한 말의 울림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정치 언어의 사막화는 결국 잇따른 인사 참사, 그러니까 부실 공천의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친박 감별의 광풍이 몰아쳤던 2016년 총선은 물론이고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 등을 제도권에 들인 2012년 총선도 마찬가지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서로 엇비슷한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다 보니 쓰레기 같은 말에도 자정 작용이 멈춰 섰다. 정치권이 벌써부터 내년 4월 총선 모드다. 유권자들이 정치 혐오에 지쳐 눈 똑바로 뜨지 않으면 내년엔 지금보다 더 심한 막말과 저질 글의 공해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쯤 되면 정치 복원은 더 요원할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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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까지 이 같은 不通 외교 컨트롤타워가 있었나 [오늘과 내일/이승헌]

    2016년 1월 13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인근 내셔널프레스클럽. 워싱턴 주재 외국 특파원들을 대상으로 한 브리핑이 열렸다. 마이크 앞에 선 사람은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 32세이던 2009년부터 8년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소년 외교책사’로 불리며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이란과의 핵 협상을 막후 조율했다. 거물이라 긴장했는데 로즈는 종종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전날 오바마의 연두교서 배경 등을 1시간가량 설명했다. 그런데 미국 외교를 움직이는 핵심 실세가 왜 굳이 이런 브리핑까지 하는 것일까. 옆에 있던 국무부 관계자가 서류에 적힌 직함을 보여주며 말했다. “전략 커뮤니케이션 담당 부보좌관(Deputy National Security Advisor for Strategic Communications)이거든요. 외교정책을 대통령 메시지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게 벤의 역할이죠. 우리끼리만 알면 뭐 해요, 여론의 지지를 받아야 외교정책을 추진할 수 있죠.” 로즈는 오바마의 ‘스핀 닥터(spin doctor)’로도 불렸다. 야구로 치면 류현진의 변화구처럼 미 외교를 현란하게 주무른다고 해서 언론이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본인은 개의치 않고 오바마 퇴임 직전까지 언론을 통해 외교 현안을 설명했다. 로즈의 직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NSC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이 장면이 떠오른 건 요즘 청와대와 여당 안팎에서 ‘정의용의 국가안보실’을 놓고 하도 말이 많아서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에선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정의용 실장을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권에서는 다른 문제를 거론한다. 너무 폐쇄적이라는 것이다. 정 실장은 하노이 이후 3월 잠시 간담회를 하더니 지난달 17일 리비아에서 납치된 주모 씨의 석방을 알리려 기자회견을 하고 다시 무대에서 사라졌다. 일각에선 안보실 업무 특성상 굳이 언론을 통해 소통해야 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브리핑 횟수를 따지는 게 아니다. 이미 다른 정부 부처는 물론 청와대 다른 조직에서도 안보실의 ‘닫힌 운영’이 임계점에 달했다고들 한다. 실제로 국민들은 외교 컨트롤타워인 안보실이 비핵화 협상이나 미중 갈등, 한일 문제 등 문재인 정부의 외교 현안과 관련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소통 부재는 정부 다른 조직과의 불통으로도 이어진다. 청와대 관계자는 “안보실이 입 닫으면 우리는 그냥 모르고 지낸 지 꽤 됐다”고 했다. 청와대 외교라인이 늘 이랬던 건 아니다. 사정이 허락하면 소통하면서 정책적 지지를 구했다.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인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이 그랬다. 2012년 가을, 당시 한미 외교현안 중 하나였던 미사일 사거리 연장 협상이 한창일 때다. 천 수석은 청와대 기자실 옆 소파에 반쯤 걸치고 앉아 “여러분, 미사일 좀 알아요?”라며 한참을 설명하곤 했다. 종종 언쟁도 벌였지만, 건설적 토론도 꽤 있었고 이는 자연스레 외교정책의 이해를 도왔다. 요즘 사방에서 한국 외교가 위기라고 한다. 국제정치에서 흔히 말하는 ‘해도(海圖)에 없는 바다(uncharted waters)’에 놓인 형국이다. 딱히 해법을 제안하는 목소리도 없다. 결국 우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부터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게 일의 순서다. 그러려면 ‘깜깜이 외교’를 주도한 국가안보실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외환위기도 현실을 외면한 채 눈 감고 귀 닫다가 벌어진 일이다. ‘외교 IMF 사태’는 피해야 한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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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방한 때 박인비, 박성현을 초대해보라 [오늘과 내일/이승헌]

    청와대가 비핵화 모멘텀을 유지하려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6월 방한은 성사시켰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정해진 게 없다. 일정, 기간은 물론이고 방문 형식이나 회담 의제 모두 제로 상태다. 벌써부터 외교가에선 “트럼프가 밥도 안 먹고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반면 25일부터 28일까지 트럼프의 일본 국빈 방문 스케줄은 빡빡하다. 특히 정상회담 외에 아베 신조 총리와 따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 골프 라운드를 시작으로 스모 관람, 호위함 시찰 등이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 이런 차이는 단지 한일 간 국력 차 때문일까. 기자는 그게 이유의 전부라고 보지는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좋든 싫든 트럼프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해 왔다. 문 대통령도 립서비스를 아끼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트럼프 대통령의 결심 덕에 비핵화 대화가 가능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함이 북한을 변화시킬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인간적 소통이나 정서적인 공감대를 넓히려는 문 대통령만의 ‘플러스알파’는 없었다. 아베 총리는 ‘한 국가의 정상이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트럼프에게 그야말로 들이댄다. 특히 골프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아베 총리는 2016년 11월 미국 대선 직후 트럼프에게 일본 혼마사의 금색 드라이버를 선물했다. 타이거 우즈가 사용하는 T사 드라이버의 시중가보다 비싼 3755달러(약 448만 원)짜리다. 2017년 11월 트럼프와 라운드할 때는 일본의 간판 골프스타 마쓰야마 히데키를 데려왔다. 아베 총리는 이번 트럼프와의 일전을 앞두고는 18일 6시간 연습했다고 한다. 골프는 미국인들에겐 야구만큼 보편적 여가활동(America pastime)이지만 트럼프에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선 잘 친다. 73세인데 80대 스코어는 거뜬하다. 부동산 제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두바이에 자기 이름을 딴 초호화 골프장 17개를 갖고 있다. 아베는 이걸 파고들었다. 외교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복잡한 외교안보 현안일수록 정상 간의 개인적인 소통이나 교감이 의외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2008년 4월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첫 만남 직전까지 선물을 고민했다. 한미동맹 복원이 중요한 과제였던 순방. 참모들은 부채, 공예품을 아이디어로 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MB는 부시 부인 로라 여사가 애완견 ‘바니’의 건강 문제로 마음을 쓰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워싱턴행 전용기에 애완견용 뼈다귀와 개목걸이를 실어갔다. 부시는 좋아하는 아내를 보고 MB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었고, 둘은 퇴임 후에도 종종 만나는 사이가 됐다.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이 지난달 워싱턴 회담처럼 또 다른 외교 참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적지 않다. 급한 대로 구색을 갖춰 무미건조한 회의만 하다가 면전에서 또다시 ‘굿 이너프 딜’을 거부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비위까지 맞출 필요는 없겠지만, ‘당신과 소통하고 함께하고 싶다’는 문 대통령만의 메시지를 줘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문 대통령이 골프를 못 치니 박인비 박성현 등 미국여자프로골프(LPGA)를 주름잡는 여걸들을 청와대에 초대해 트럼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2017년 11월 방한 때 국회 연설에서 박성현을 언급하며 “미 뉴저지주 베드민스터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열린 US 오픈대회를 우승했다”며 유독 반가워했던 트럼프다. ‘일 이야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경상도 사나이의 무뚝뚝함은 외교 무대에서 그리 내세울 만한 게 못 된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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