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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될 것 같아요?” 정치부 기자라고 하면 사석에서 이렇게 묻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알 수 없다. 예상 시나리오에 없던 돌발 변수들이 한 달이 멀다 하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게 이번 대선이다. 투표일은 앞으로도 4개월 넘게 남아 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겠는가. “아직 모른다” 또는 “하늘이 알겠죠”라고 웃어넘기곤 한다. 그럼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가 정말 될까요?” 반복되는 이런 질문과 답변이 중요한 게 아니기에 답답할 때가 있다. 핵심은 ‘누가 더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다. 자격도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도 이번 대선에서 가장 소홀히 취급 받는 대목이 외교 역량인 듯하다. 여야 모두 네거티브와 편 가르기 선거 캠페인에 집중하다 보니 정책 공방은 사실상 멈춰 선 상태다. 특히 외교·안보 논쟁에선 여야 후보들 모두 서로 실수를 피하고 싶은지 “굳건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김정은과 대화하겠다”식의 초보적 주장에서 진도가 더 나가지 않고 있다. 후보들이 외교 분야에 대해서는 좀처럼 깊이 있는 토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국민의힘 1, 2차 경선 과정에서 치러진 10차례의 TV토론회에서 후보들이 주장한 내용을 음성-텍스트 변환 인공지능(AI) 서비스로 전수 분석했다. ‘국민’ ‘대통령’을 제외하면 ‘이재명’ ‘대장동’ ‘고발사주’ ‘화천대유’ 같은 단어들이 상위 톱10 키워드를 점령했다. ‘핵’이 상위권에 들긴 했지만 이 역시 “한국도 핵을 보유해야 한다” “미국과 핵을 공유하겠다” 등 일부 보수층의 ‘핵 보유’ 주장을 옮긴 정도에 불과하다. 국제사회가 추구하는 핵 확산 방지체제를 한국이 어떻게 극복하겠다는 것인지, 득실은 어떤지를 깊이 있게 논쟁하는 장면은 없다. 어떤 후보는 전술핵과 전략핵을 구분하지 못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음 정부 출범과 함께 새 대통령이 맞닥뜨릴 핵심 과제는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의 재설정이다. 쿼드(Quad) 등 동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중국 견제 흐름 속에서 국익을 어떻게 지켜낼지, 한국은 큰 숙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최근 토론회나 여야 후보 간 공방에서 한미, 한중관계가 주요 키워드로 거론된 적이 없다. 후보들이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죽창가를 부르다 한일관계가 망가졌다”(윤석열 전 검찰총장) 등 ‘반(反)문재인 외교’면 한일관계도 풀릴 것이라는 단순 논리나, 독도 표기 문제를 두고 “역사적 기록도 남길 겸 올림픽 보이콧을 검토해야 한다”(이재명 후보) 등 지지층을 겨냥한 강경 발언만 난무하고 있다. 국무총리를 지낸 한 원로인사는 “이재명 윤석열 홍준표를 보면 셋 중 누가 대통령이 돼도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정상회담 또는 다자회담을 하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국격과 국제정세를 꿰뚫는 역량을 갖춘 리더십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라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대통령 후보들이 매일 자신을 둘러싼 추문을 방어하기 급급하다. 국제정세에 대해서는 본인의 철학 또는 구상 없이 교과서에 나올 법한 원론적인 발언만 반복하고 있다. 이런 후보들을 두고 차기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선거를 정상이라고 말할 순 없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찍고 싶은 후보가 없다” “이런 대선은 처음이다”. 요즘 이런 푸념을 자주 듣는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 불안을 느끼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 있다. 국민의힘 지지자들 중에서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인사들이 있다. 확신을 갖기엔 어딘가 불안하다는 얘기다. 여기에 이 지사를 둘러싼 대장동 개발 의혹과 윤 전 총장의 고발 사주 의혹, 주술 논란은 지지자들의 불편한 마음에 기름을 부었다. 그렇지만 여론조사 추이를 살펴보면 두 후보 지지율은 흔들림이 없다. 이들은 각각 여야 대선후보 선호도에서 2위와 격차가 있는 1위를 몇 달째 유지하고 있다.(한국갤럽 기준) 왜 이럴까? ‘기본소득’(이 지사)이나 ‘공정과 상식’(윤 전 총장)이 시대정신과 부합해서? 그것보다는 반대편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 쉬울 듯하다. 한쪽 진영을 지지하는 이들에겐 ‘우리 후보’에게 느끼는 불안보다 ‘저쪽 후보’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수차례 대선을 치른 여의도의 한 선거전문가는 “‘좋은 후보 도와주자’보다 ‘나쁜 후보를 막아야 한다’고 해야 지지자들이 더 잘 뭉친다”고 했다. 각 후보 캠프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이 지사도 윤 전 총장도 각종 의혹을 돌파하는 핵심 전략은 강경 발언이다. 이 지사는 “국민의힘이 지금은 마귀의 힘으로 잠시 큰소리치지만, 곧 부패지옥을 맛볼 것”이라고 비난하고, 윤 전 총장은 “민주당 정권이 우리 당 경선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다”고 외친다. 갈등과 증오의 수위가 올라갈수록, 상대를 대번에 제압할 것 같은 강력한 결기를 보여줄수록 지지층 사이에서 입지가 강화된다. 특히 충성도가 높은 당원과 열성 지지자들에겐 ‘정권 재창출’ 또는 ‘정권 교체’의 염원을 이뤄낼 수 있는 대표선수가 절실할 뿐이다. 추문은 감수해야 할 작은 기회비용에 불과하다. 이런 몰가치적 투쟁에선 도덕이나 정의 같은 정치철학이나 공약 등 미래 비전은 의미를 갖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당내 경선까지만 통하는 전술이다. 경선은 당원과 열성 지지자를 누가 더 많이 확보하느냐의 싸움이지만 본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각각 30% 안팎을 차지하는 여야의 지지층 지형 속에서 20∼30%가량의 무당층·중도층이 승패의 무게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경선 때는 지지층을 겨냥해 이념적 성향을 강조하고, 중도층 표를 얻어야 하는 본선에선 점차 중앙으로 옮기고, 대선 이후에는 통합을 내거는 것이 대선의 ABC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여야 후보들을 둘러싼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등으로 본선도 A∼Z까지 네거티브로 넘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여야 캠프 관계자들은 “경선에선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당의 후보로 선출된 이후 본선에서는 바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말 본선에서는 ‘마귀’ ‘마수’ 같은 적대적 표현이 사라질까. 중요한 것은 말이든 행동이든 유권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지도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최순실 사태가 가르쳐 준 교훈 중 하나도 그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미셸 오바마 여사는 “그들이 저급하게 행동해도 우리는 품위 있게 행동한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라는 말로 미국 국민을 환호하게 했다. 우리 대선에서 이런 연설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과한 기대일까.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의 총선을 거울삼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총선 직후 가까운 참모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은 개혁을 해야 한다는 말은 맞는데, 현실성은 있는지 봐야 한다”고 했다.(강민석 전 청와대 대변인, ‘승부사 문재인’) 180석이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승리를 거둔 직후였다. 어떤 일이 있었길래 문 대통령은 ‘거울’을 언급했을까. 노무현 정부 2년 차인 2004년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으로 152석을 얻는 대승을 거뒀다. 이후 여당은 국가보안법, 과거사법, 사립학교법, 신문법(언론관계법) 등 이른바 ‘4대 입법’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우리는 옳다”며 선명성만 강조한 강경파들로 인해 노무현 정부는 순식간에 민심을 잃고 추락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대표)으로 있으면서 여야 협상을 이끌었던 이부영 전 의원의 페이스북 글이다. “한나라당에서도 국가보안법 개정을 논의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여당이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바람에 협상은 깨졌다. 열린우리당은 분열했고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부 과격파 의원들은 필자를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했다. 중진의원들은 폐지파 의원들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눌려 침묵했다.” 여의도 정치에서 강경파의 주장을 경계하는 건 이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같은 당 안에서도 자신들의 선악(善惡) 기준에 따라 네 편 내 편을 나누고, 결과적으로 자기편에게도 피해를 끼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존재감을 보이고, 세를 넓혀가기 위해 늘 새로운 ‘적’을 만들어낸다. 이는 당을 넘어 사회 전반을 갈등과 분열로 몰아간다. 적폐세력, 토착왜구 등은 그 한 예일 뿐이다. 검찰개혁 시즌2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와 안착을 문 대통령의 레거시(유산)로 삼고 검찰개혁을 마무리할 뜻이 있었다. 하지만 공수처법 처리 이후 새로운 ‘적’이 필요했던 강경파들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의 완전한 박탈)과 ‘윤석열 징계=검찰 개혁’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었다. 결과는 4·7 재·보선 참패였고, 야권 대선 후보 윤석열의 탄생이었다. 내부에서도 질타가 쏟아졌다. 이후 강경파들은 시선을 언론으로 돌렸다. 여기에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 맞물리면서 폭주를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한 중진 의원은 “경선 투표가 코앞이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 큰 강경파와 열성 지지층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대선을 앞둔 민주당 지도부는 일단 ‘오만 프레임’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7개 상임위원장을 야당에 다시 넘겨준 것도, 언론중재법 처리를 앞두고 8인 협의체를 만든 것도 전술의 일환이다. 그러나 법조계의 위헌성 지적, 국제적 언론기구와 인권단체 등의 우려에도 “우리는 옳다”는 강경파들의 태도는 꿈쩍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선을 넘으면 또 다른 혼란과 갈등이 벌어질 것이고, 국민이 실어준 힘을 엉뚱한 데 낭비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강 대변인은 썼다. 하지만 정치적 생존이 더 중요한 강경파들은 임기 말 대통령의 우려쯤은 개의치 않는다. “우리만 옳다”는 권력의 오만을 바로잡은 건 늘 국민의 심판뿐이었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청와대 조직을 많이 축소하고 직원들의 직급도 낮출 것이다. 국정은 내각 중심으로 하고 대통령비서실은 조정 기능으로 역할을 한정하려 한다.” 지금 뛰고 있는 야당 주자들 공약이 아니다. 13년 전인 2008년 1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신년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다짐한 말이다. 기자회견 한 달 뒤,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실세로 통했던 정두언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을 만나 청와대 축소 방안을 보고했다. “청와대에서 각 부처의 인사를 직접 챙기면 장관이 무력화됩니다. 장관이 바지사장이 되고 관료들이 청와대의 눈치만 보게 되면 전 관료사회의 역할이 부실해질 수 있습니다.” 정 전 의원은 이 같은 문제점을 설명하며 청와대 인사수석실 폐지를 건의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생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은 “인사수석을 없애면 이 사회 곳곳에 침투한 좌파세력들은 어떻게 척결하느냐”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전(前) 정부에서 정부 및 산하 기관 곳곳에 자리 잡은 친노(친노무현) 인사들을 내보내고, 새 정부 인사들을 그 자리에 다시 배치하려면 청와대가 인사수석실을 통해 각 부처와 산하 기관 인사를 직접 챙겨야 한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은 인사수석을 없애는 대신에 인사비서관을 두었다. 직급은 낮아졌지만 내용적으로 바뀐 것은 없었다. 대선 때면 늘 들리는 공약 중 하나가 청와대 비서실 축소다. 후보들은 앞다퉈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언급하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비서실의 기능과 역할을 확 줄이고 장관들에게 실질적인 의사결정 권한과 인사권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말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4년 전 취임사에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삼고초려해서 유능한 인재에게 일을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진영과 이념, 즉 ‘네 편’ ‘내 편’을 따지는 인사에 의존했다. ‘캠코더(대선 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라는 조어까지 만들어졌다. 대다수 국민은 물론이고 여러 정치권 인사들도 인사수석실이 원래부터 청와대에 있던 곳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사수석은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 때 처음 생겼다. 그전까지 민정수석이 독점한 인사에 대한 추천·검증 기능을 분리하겠다는 명분이었다. 처음에는 장관 등 고위직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지금은 정부 각 부처는 물론이고 공기업과 산하 기관 간부 인사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자리엔 거의 대부분 청와대의 뜻이 반영된다. 노무현 정부 이후 몇 번의 정권 교체와 인적 청산을 거치면서 대선 때가 되면 각 주자들 캠프로 수많은 ‘뜻있는’ 인사들이 몰려들고, 집권하면 전리품으로 자리를 나누는 풍경이 이제 대선의 기본 공식처럼 됐다. 그 첨병이 인사수석실이다. 대다수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우려한다. 인사 기능을 청와대가 직접 맡기 시작하며 생긴 과도한 인사권 행사가 부작용을 더욱 키우고 있다. 인사수석실을 통해 각 부처와 사회 곳곳에 뿌려진 낙하산 인사들은 옳고 그름이 아닌 청와대의 뜻과 지시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근원적으로는 개헌을 통해 권력 구조를 바꿔야겠지만 일단 청와대 비서실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다. 여야 후보들이 “측근 인사는 없다”는 원칙론적인 공약 말고, ‘인사수석실 폐지’ 같은 실질적인 방법론을 함께 약속하면 어떨까. 아니면 지킬 수 없는 탕평인사라는 약속을 아예 하지 말든가.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위태위태한 경선’이라고 한다. 누가 이겨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경선을 바라보는 여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후보들을 향해 ‘아름다운 경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지층의 걱정에도 이재명 후보와 이낙연 후보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예비경선 때 방어 모드를 취했던 이 지사가 공세로 전환하면서 두 후보는 연일 충돌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만의 이슈가 아니다. 국민의힘에도 조만간 닥칠 문제다. 이달 말 국민의힘 경선이 공식 출발하는 순간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후보 등 당내 기존 주자들은 선두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후보를 향해 검증을 앞세운 공격을 본격화할 태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양당 모두 당 차원의 후보 검증단 설치가 화두다. “당이 중립적으로 검증하자” 또는 “대선후보 검증 절차를 시스템화하자”는 제안이다. 상대를 겨냥한 의혹 제기가 네거티브인지, 정당한 검증인지를 당이 판단하자는 취지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네거티브와 검증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다. 비슷한 의혹 제기도 ‘내가 하면 검증, 남이 하면 네거티브’다. 불리한 검증 결과를 선뜻 인정할 후보도 없다. 과거 대선 경선 과정에서 당내 검증 기구가 논의됐다가 흐지부지된 이유다. 유권자 입장에서도 당이 내놓은 자당 후보에 대한 검증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 지지자들에겐 아군 사이에 벌어지는 아슬아슬한 공방이 위태로워 보일 것이다. 진영을 향한 로열티가 강할수록 ‘아름다운 경선’에 대한 절박함도 클 수밖에 없다. 그들은 후보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범위에서, 경선 흥행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딱 그 정도 수준의 공방을 원한다. 그래야 정권 재창출 또는 정권 교체에 성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꿈일 뿐이다. ‘아름다운 경선’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 후보 캠프에 참여한 한 인사는 “목숨을 걸었다”고 말했다. 권력의지가 어지간히 강하지 않은 사람은 대선판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그런 인사들이 모여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각자의 인생을 걸고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 경선이고 대선이다. “후보자로서 품위와 정직을 최고의 덕목으로”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등의 원팀협약식 선서는 지지층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는 DNA 검사까지 받았다. 이 후보가 이복 아들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절차였다. 박근혜 후보도 “나에게 애가 있다는 얘기까지 있다. DNA 검사도 해주겠다”고 했다. 경선은 본선과 나아가 대통령 당선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에 대한 리스크를 줄여가는 과정 중 하나다. 치열하고 혹독할수록 유권자들에게는 더 많은 판단의 근거가 쌓인다. 양당 모두 후보 간 검증 공방의 길을 아예 확 터주는 건 어떨까. 다소 과격한 발언이 오가더라도, 인신모독이나 마타도어 등 수준 이하의 언행은 지금까지 대한민국과 시민들이 쌓아온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한 축적된 역량으로 충분히 걸러낼 수 있다고 본다. 허위 또는 조작이 드러나면 후보 본인에게 더 무거운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당과 일부 지지자들이 원하는 인위적인 ‘아름다운 경선’ 만들기는 대한민국의 리스크를 더 키울 수 있다. ‘혹독한 경선’을 치르고 판단은 유권자에게 맡기면 된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2017년 5·9대선은 전형적인 심판 선거였다. ‘적폐청산’이라는 단어가 선거를 지배했다. 당시 문재인 캠프 핵심들에게 ‘과거 말고 미래비전을 담은 어젠다는 없느냐’고 물으면 의아하다는 표정과 마주하곤 했다. 답변은 간단했다. “있지 않느냐. 적폐청산을 통한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나라를 나라답게!” 어떻게 그렇게 뻔한 질문을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공약대로 적폐청산은 문재인 정부 5년을 관통하는 핵심 이정표가 됐다. ‘미래’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정권 출범 3년차에 접어든 지난해 7월 청와대는 비로소 ‘그린뉴딜’이라는 미래전략을 꺼내들었다. 5년 단임 대통령의 골든타임인 1, 2년을 흘려보낸 뒤였다. 대선 과정은 대한민국을 이끌 새 리더를 선택하는 숙고의 시간이자, 향후 5년간 우리가 선택해야 할 미래비전을 두고 각계각층의 담론과 국민적 총의를 모으는 공간이기도 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바람 속에서 치러진 4년 전 대선은 이 같은 공론의 장(場)으로서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대선까지 이제 8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여야 합쳐서 20명이 넘는 후보가 뛰어든 전례 없는 뜨거운 레이스가 시작됐다. 하지만 현 정부 5년에 이어 도합 10년을 국민의 뜻이 담긴 미래비전 없이 새 시대를 맞아야 할 위기다. 지지율 1, 2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나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둘러싼 주요 의제는 그들이 구상하는 미래가 아니다. ‘X파일’, 여배우 스캔들 등 추문성 의혹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예비경선(컷오프)을 마무리한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선 “4차례의 TV 토론회 끝에 남은 것은 바지밖에 없다”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온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얼마 전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UNCTAD가 1964년 설립된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바뀐 나라는 한국뿐이다. 최근 통화한 한 전직 관료는 “다음 정부 5년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안착할지, 그 문턱에서 다시 후퇴할지가 결정되는 중대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나라 밖은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변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은 더욱 가팔라지고 있고, 반도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백신을 비롯한 새로운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한국의 생존을 가름할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내부적으론 2030, MZ세대가 사회 시스템의 전폭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5년 전과 달라야 한다. 각 당이 미래비전과 전략을 담은 메시지를 내놓고 여야가 겨루는 공론의 장으로서의 기능이 회복돼야 한다. 현 정부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책들에 대한 평가도 선택의 중요한 요소다. 다만 대부분은 대한민국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해 온 민주주의와 법치라는 제도와 시스템을 정상화시킨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 믿는다. ‘총선은 과거에 대한 평가, 대선은 미래에 대한 선택’이라고 한다. 혹자는 ‘총선은 연애, 대선은 결혼’이라고도 표현한다. 방점은 ‘미래’다. 다음 세대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대선이 돼야 한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언제부터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을 확신했나.”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에게 물었다. 그는 “2016년 국정농단 사건 이전, 그보다 꽤 오래전에 당선을 확신했다”고 답했다. 예상 밖이었다. 2017년 5월 치러진 19대 대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풍(風) 속에서 다자구도로 치러졌다. 더불어민주당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긴 했지만 2016년 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전까진 판세가 크게 달랐다. 2016년 상반기까지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10%대 중후반으로 20∼30%를 유지하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물론이고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에게도 뒤지곤 했다. 문 대통령의 집권 가능성에 대해 정치 전문가들은 “글쎄”라는 회의적 반응을 내놓던 시기였다. 이에 대해 양 전 원장은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민심을 돌이키기 어렵겠구나 판단했다. 야권으로서는 대안이 문 대통령밖에 없기 때문에 준비만 잘하면 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등 돌린 민심, 준비된 당과 후보 두 가지를 정권교체의 메커니즘으로 본 것이다. ‘준비만 잘하면’에 대한 민주당의 핵심 전략은 변화였다. 2016년 1월 문 대통령은 당 대표직을 김종인 비대위원장에게 넘기고 당의 중도화에 박차를 가했다. 같은 해 가을엔 친문 색깔을 크게 지운 대선 초기 캠프 광흥창팀을 출범시켰다. 당시 광흥창팀에 참여했던 여권 인사는 “캠프의 핵심 키워드는 달라진 문재인, 달라진 민주당이었다”며 “변하지 못하면 모두 (정치적으로) 죽는다는 절박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설명은 더 직설적이다. “여당이 잘하면 야당은 영원히 기회가 없어요. 여당의 실패를 먹고사는 게 야당 아니에요? 그렇지만 야당이 여당의 실패를 받아먹을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있어야죠.” 김 전 위원장이 토론회나 인터뷰 등에서 여러 차례 한 얘기다. 민심 이반이 필요조건이지만 이를 받아먹을 수 있는 준비, 즉 변화를 통한 새 정권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줘야 집권의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첫 번째 키워드인 민심 이반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다. 민주당 A 의원은 “임기 말 대통령의 지지율이 40% 안팎에 이른다. 민심 이반이나 레임덕은 야당의 희망사항”이라고 일축했다. 다만 부동산 대책 등 정책 실패에 대한 불만, 여권 인사들의 내로남불과 오만에 대한 분노,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따른 경제난. 이 같은 여론이 쌓이면서 여권에 등 돌리는 민심이 위험수위라는 것은 민주당도 인정하고 있다. 야당은 여기에 36세 ‘0선’ 당 대표를 탄생시켰다. 불과 1년 전 총선 패배에도 ‘영남 패권’을 고수했던 국민의힘 당원들이 확 변한 것이다. 정권교체에 대한 절박감이 반영됐다고 본다. 야권에 남은 마지막 퍼즐 조각은 준비된 후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비롯해 최재형 감사원장 등 야권 후보군은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여당도 뒤늦게 변화에 대한 시동을 걸고 있다. 윤 전 총장이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여권과 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각각 35% 안팎의 지지를 받고 있다. 아직은 팽팽한 판세다. 반전이 또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준석 대표 탄생의 가장 큰 교훈은 “민심은 변화를 원한다” “변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는 것 아닐까. 절박하다면 여야 모두 더 변할 수 있다. 대선은 아직 258일 남았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1996년 10월 1일 밤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루스카야 거리 55번지 A아파트. 비명이 들렸다. 그 직후 아파트 3층 복도에서 둔기에 뒷머리를 맞고 숨진 남성이 발견됐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영사관에서 근무하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소속 최덕근 영사였다. 러시아인 목격자는 경찰에서 “아파트 안쪽에 2, 3명의 괴한이 서성거렸다. 그(최 영사)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간 후 얼마 안 있어 비명이 들렸다”고 진술했다. 최 영사는 당시 탈북자들을 상대로 북한의 위조지폐인 일명 ‘슈퍼노트’의 유통 경로를 추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신을 인도받은 한국 정부의 부검 결과 최 영사의 몸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독약 성분이 검출됐다. 북한 공작기관이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최 영사는 ‘이름 없는 별’로 남았다. 국정원 중앙 현관으로 들어서면 검은색 돌판 위에 별들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 조형물과 마주한다. 돌판 아래엔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의 길을 좇아 조국을 지키는 데 헌신하리라’란 글이 적혀 있다. 임무 수행 중 희생된 요원들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는 물론이고 이름도 공개되지 않는다. 숨진 시기나 과정이 알려지면 비밀리에 수행한 임무가 상대국이나 적에게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임시로 외교관 신분을 갖는 ‘화이트’ 정보 요원으로 활동했던 최 영사의 순직은 이후 러시아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하면서 ‘이름 없는 별’ 중 유일하게 그 내용이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국정원을 방문했다. 취임 후 두 번째다. 10일이면 창설 60주년을 맞는 국정원의 새 원훈석 제막식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도 ‘이름 없는 별’ 앞에서 묵념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 3년 전 18개가 새겨져 있던 검정 돌판 위 별이 19개로 늘었다. 국정원 관계자는 “지난해 내부 심사를 거쳐 별을 추가했다”며 “구체적인 임무나 사망 시기를 밝힐 수는 없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순직한 분”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 내부에선 “우리는 사이버에서 일하고 우주를 지향한다”는 구호가 회자되고 있다. 1961년 6월 10일 김종필(JP)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했을 때 만들었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원훈을 각색한 것이지만 과거와 달라진 국정원의 역할을 보여주는 비공식 원훈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 국정원은 산업기밀 유출 방지, 사이버 공격 대응, 국제범죄, 우주정보 등 과거와는 달라진 형태로 정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상당수 전장이 사이버 세계로 이동했지만 그렇다고 비밀 요원의 활동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국가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대북 첩보 수집뿐만 아니라 초국가적으로 움직이는 산업스파이, 테러 및 납치 대응 등 국내와 해외 곳곳에서 치러지는 소리 없는 전투는 더욱 격해지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름 없는 별’은 2000년대 이후에도 계속 새겨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 방문 때 6·25전쟁 참전용사 랠프 퍼킷 주니어 예비역 대령 곁에서 무릎을 굽혔고, 이는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한 장면이 됐다. 다만 우리 곁에도 국익을 위한 헌신이라는 명예만 갖고 이름 없이 사라진 영웅이 적지 않다는 것도 되새겼으면 한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임기 4년을 넘긴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 청와대는 을씨년스러웠다. 당시 출입하던 기자들은 청와대를 종종 ‘절간’으로 표현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기자단 송년 만찬에서 “칭송받는 대통령은 물 건너간 것이 됐다. 역사적 평가를 받는 대통령으로 넘겨졌다”고 탄식했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은 취임 4주년 직후인 2007년 2월 29일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그해 2월 무렵 16%까지 떨어졌다(한국갤럽 기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당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가기가 부담스러웠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탈당계를 제출한 노 전 대통령은 당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떠난다 생각하니 너무 섭섭하여 ‘탈당’이라는 말 대신 굳이 ‘당적정리’라는 말을 써봅니다. … 임기가 끝난 뒤에도 당적을 유지하는 전직 대통령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일으킨 당에서 나가야 하는 격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열린우리당은 이날 당사에 걸려 있던 10개에 가까운 노 전 대통령 사진들을 철거했다. 당시 탈당계를 들고 여의도 당사를 찾은 대통령정무팀장이 현재 친문 진영의 정태호 의원이다. 탈당계를 접수한 사무총장은 지금 당 대표를 맡고 있는 송영길 의원. 그리고 그해 3월부터 레임덕 속에서 마지막 1년을 보내는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참모가 문재인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레임덕에 빠진 무기력한 대통령의 참혹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셈이다. 10일 진행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4주년 특별연설’을 유심히 지켜봤다. 많은 현장 사진들 속에서 연단에 오르기 직전, 커튼 뒤에 대기하고 있던 문 대통령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그의 표정이 비장했다. 전 국민 앞에 서기 직전, 마지막 1년에 대한 각오를 스스로 다지는 순간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특별연설을 눈앞에 둔 4월 마지막 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치인 29%로 나타났다. 30% 아래로 내려간 것은 처음이었다. 이 여파로 대통령 지지율이 민주당 지지율보다 낮은 ‘당청 지지율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임기 말 당청 지지율 역전이 고착화되는 시점을 레임덕 징후 중 하나로 본다. 지지율 격차가 더 벌어지면 당은 대통령 탓을 하기 시작하고, 여권의 자중지란이 일어난다. 대통령 탈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노 전 대통령도 그랬다. 4·7 재·보선 패배에서 확인한 분노한 민심에, 당청 지지율 역전까지. 청와대 입장에선 죽비로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 개각 과정에서 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를 포기했다. 문 대통령이 인사청문보고서 재송부를 국회에 요청한 후보자에 대해 낙마를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임기 말 당청은 과거와 같은 상하 관계가 아니라 파트너십 관계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도 당의 목소리를 무겁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특별연설에서 “모든 평가는 국민과 역사에 맡기고, 마지막까지 헌신하겠다”고 했다. 역사의 심판만 기다려야 하는 무기력한 1년이 될지, 헌신할 수 있는 1년이 될지, 모든 것은 문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갑자기 몰아친 ‘LH 사태’ 속에 치러졌다.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는 부동산 선거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부동산 적폐 청산’을 꺼내 들었다. 1년 앞으로 다가온 대선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춰보는 심정으로 선거를 지켜봤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민주당의 참패였다. 국민의힘 오세훈 시장은 57.5%의 지지를 얻어 민주당 박영선 후보(39.2%)를 18.3%포인트라는 큰 차이로 제쳤다. 선거는 상대가 있는 제로섬 게임이다. 상대 진영 지지층 10%를 가져오면 격차는 20%포인트 벌어진다. 여당 성향으로 분류됐던 2030세대가 야당 쪽으로 돌아서며 무게추가 확 기울었다. 문재인 정부는 2040세대의 전폭적인 지지와 기대 속에 탄생했다. 2017년 5·9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동아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는 20, 30, 40대에서 각각 48.3%, 56.9%, 50.5%의 지지를 받았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홍준표 후보의 20대(7.5%) 30대(7.0%) 40대(7.7%),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20대(13.2%) 30대(11.2%) 40대(17.5%)의 2040 지지세를 압도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4년 차가 마무리돼 가는 지금 2030의 표심은 반대로 향했다. 지상파 방송3사의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 시장은 40대를 제외한 전 연령대에서 박 후보를 앞섰다. 특히 20대에서 오 시장(55.3%)은 박 후보(34.1%)를 21.2%포인트 차로 앞섰고, 30대에서도 56.5%의 지지를 받아 박 후보(38.7%)를 17.8%포인트 차로 눌렀다. 오 시장(48.3%)과 박 후보(49.3%)가 1.0%포인트의 격차를 보인 40대와 비교하면 2030의 표심은 4년 전과 비교할 때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 진보 진영은 청년을 향해 “아프냐, 괴로우냐, 그러면 분노하라. 그리고 투표하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보냈다. 이는 정권 교체의 원동력이 됐다. 권위에 적대적인 2030의 표심을 꿰뚫어 본 것이다. 하지만 열화와 같았던 문 대통령을 향한 2030의 지지와 기대는 이제 여권에 아득한 추억일 뿐이다. 오히려 재집권을 꿈꾸는 민주당에 2030은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떠올랐다. 2030의 분노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급격한 정치구도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 1월 반중 성향의 대만 차이잉원 총통이 대선에서 압승한 원동력도 2030이었다. 민진당 소속 차이 총통은 2019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여론조사 지지율이 30%대에 그쳐 국민당 소속 한궈위 후보에게 크게 뒤졌다. 하지만 힘을 앞세운 중국의 대만 압박에 반발한 2030이 투표장으로 대거 향하면서 6개월 만에 판세가 확 바뀌었다. 2019년 11월 처음으로 반중 성향의 범민주파가 과반을 차지한 홍콩 구의원 선거도 마찬가지다. 화들짝 놀란 정치권은 앞다퉈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해소책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적 원인이 깊게 배어 있는 2030의 문제를 1년 안에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년 대선까지 분노의 바람이 속절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선심성 정책이 아닌 그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여권에는 4년 동안 축적된 오만의 이미지와 기득권을 다 내려놓겠다는 각오와 역발상이 필요하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뜬금없이 “피해자님이여!”를 적는 민주당의 공감 능력으로는 2030에게 다가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더불어민주당 곳곳에서 걱정과 한탄의 목소리가 들린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론조사 격차가 좀처럼 줄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국민의힘은 “무능과 부패를 끝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우리더러 부패 세력이라니,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가 과거 정부에서는 없었겠나. 더 많았을 것이다.” 민주당의 중진 의원 A는 통화에서 “하필 선거 앞두고 이런 일이 터져서”라며 이같이 말했다.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고전하는 이유가 그의 말처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와 일부 인사들의 부패 때문일까. 절반만 맞는 말이다. LH 사태는 불씨에 불과했다. 분노 게이지는 이미 위험 수위로 올라 있었다. 집값을 역대 최고 수준의 상승률로 올려놓고도 “과도한 현금 유동성과 투기 세력이 부동산 가격 상승의 원인”이라며 자신들의 잘못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정부 여당. 기회의 사다리를 빼앗긴 청년들의 분노를 향해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문” “과거부터 쌓인 부동산 적폐가 원인”이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정권 핵심들. 여기에 “집 없는 임차인들의 어려운 삶을 생각해 임대료를 올리지 말라”던 김상조 전 대통령정책실장과 박주민 의원 등 일부 핵심들의 행태. 이런 모습들에 유권자들은 화가 날 대로 난 것이다. 종종 정치에선 실체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더 중요한 경우가 있다. 이명박(MB) 대통령 때 촛불시위도 꼭 광우병 쇠고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국민의 안전과 보건이 걸린 중대 이슈를 부처 간 충분한 협의, 야당과의 대화도 없이 당선인 신분이었던 이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것도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농장에서 웃는 모습으로 골프카트를 타면서. 여기에 “우리가 미국에서 살아봐서 아는데 미국산 쇠고기는 싼 데다 안전하다”는 식의 가르치려는 태도까지 겹치자 민심은 폭발했다. 집권 기간 4년 동안 민주당의 반복된 태도가 있다. 악재가 터지면 “터무니없는 정치 공세”로 치부했다가, 민심이 더 나빠지면 “적폐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민주당보다 더했다”고 공격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지금 민주당이 오세훈 후보를 겨냥해 내곡동 땅을 집중 거론하고 “MB 아바타”라고 부르는 것도 “국민의힘은 민주당보다 더 부패한 세력이다. 미워도 민주당을 찍어야 부패가 덜하다”는 전략이다. 근데 좀처럼 지지율 격차가 줄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부패에 화난 게 아니라 갖은 정책 실책에도 제때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는 집권세력에 화가 난 것이기 때문이다. 유세 현장에서 성난 민심을 몸으로 맞닥뜨린 민주당은 뒤늦게 사과 행보에 나섰다. “무한 책임을 느끼며 사죄드린다. 간절한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겠다”(이낙연 상임선대위원장) “그 원인이 무엇이든 민주당이 부족했다”(김태년 원내대표) 등 지도부는 연일 고개를 숙이고 있다. 민주당은 릴레이 사과와 반성이 막판 반전의 모멘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선거 이후에도 지금의 간절함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오만 프레임에 휩싸인 민주당이 신뢰까지 잃는다면 정권 말 국정 운영과 차기 대선은 더욱 험난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절박한 읍소가 선거를 앞둔 정치적 ‘읍쇼’가 되서는 안 된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올림픽 때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겠어요?” 최근 만난 외교안보 분야 고위 당국자의 말이다. 꽉 막힌 남북, 북-미 대화의 해법을 묻자 그는 대뜸 올림픽을 화두로 꺼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대화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전 세계가 참여하는 올림픽을 외교 이벤트로 활용하려는 정부의 구상은 알고 있었지만 ‘개최 여부도 불투명한 도쿄 올림픽이라니’. 그의 답변에 맥이 살짝 빠졌다. “북한이 참여할까요?” 그에게 물었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베이징 올림픽도 있잖아요.”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에 어떻게든 북-미 비핵화 대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정부의 강박에 가까운 의지는 알고 있지만 ‘내년 2월 베이징 올림픽이라니.’ 설마 했다. 얼마 후 또 다른 고위 당국자를 만났다. 설마가 아니었다. 평소 입이 무거운 그도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때 열차로 베이징을 가는 계획이 있었다. 북한 내 철로 복구가 우선 필요한데, 유엔의 대북 제재가 풀리지 않아 그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올림픽 릴레이 대화의 의미를 강조했다. 도쿄가 어렵다면 베이징 올림픽에서 북-미가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도록 중재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불씨를 되살리고…. 청와대와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시선은 이미 도쿄를 넘어 베이징을 향하고 있다. 2018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 한반도기를 앞세운 남북 선수단 공동 입장,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게다가 김여정과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 그리고 이어진 4월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산책, 5월 2차 판문점 정상회담, 9월 3차 평양 정상회담까지. 숨 가쁘게 진행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긴박한 순간과 이벤트들. 문 대통령은 ‘어게인(again) 2018’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코로나19 극복의 장으로 연출하고, 미국 못지않은 영향력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중국 역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설 것이다. 북한을 압박할 가능성도 있다. 놓칠 수 없는 기회다. 그렇지만 베이징 올림픽은 2022년 2월 4∼20일 열린다. 3월 9일 차기 대선을 한 달 앞둔 시점이다. 합리성, 평화에 대한 당위성보다는 감정에 편승한 진영 간 증오와 대립이 극에 달할 시기다. 정부의 의도와 관계없이 남북 대화 이벤트가 정치적 논란을 피해갈 여지는 없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벤트를 앞세운 대화를 기피한다는 점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후보 시절 미국외교협회(CFR)에서 싱가포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두고 “사진이나 찍을 기회였다”고 했다. 이벤트성 협상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칫 한미 공조에 엇박자를 노출할 위험성도 있다. 2018년 평창에서 시작해 2019년 하노이 ‘노딜’까지 이어진 정부의 평화 이벤트는 막을 내릴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새로운 대북정책을 공개하면 한반도는 다시 북-미 결전의 장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베이징 올림픽의 기회를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다. 다만 과거처럼 이벤트에 집중하기보다는 실질적인 성과에 집중할 수 있는 차분한 대화를 기획해야 한다. 과거의 대북정책을 냉정히 검증하고 다음 정부에 넘겨줄 교훈을 찾는 것에 무게를 둔 임기 말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이건 친구로서의 충고가 아니다. 우리 쪽에서 정리해서 전달하는 입장이다. 네 답변은 사과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영화 ‘친구’의 대사 같은 이 말은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친문 핵심인 황희 장관이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한 말이다. 두 사람은 67년생 동갑내기로 친구처럼 지냈다. 당시 금 전 의원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표결에서 기권한 일에 대해 공개 사과를 요구받았다. 금 전 의원은 이를 거부했다. “민주당을 떠나라” “사퇴하라” 등 극성 지지층의 문자폭탄이 쇄도했다. 지역구에선 “당에서 금 전 의원을 찍어내기로 결정했다”는 입소문이 돌았다. 금 전 의원은 이후 치러진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다. 금 전 의원이 지난달 말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한 이 사연이 새삼 떠오른 것은 최근 신현수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논란 때문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왜 우리 편에 서지 않느냐’는 취지로 신 수석을 몰아세웠다”고 한다. 금 전 의원과 신 수석 논란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우리 편’이다. 어느 정권이나 피아 구분을 안 할 순 없다. 하지만 지금 여권은 ‘내 편’ ‘네 편’을 지독하게 나눈다. 같은 편 안에서도 ‘우리’의 뜻과 다르다고 판단되면 찍어내기의 대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과거 소신파로 불렸던 한 재선 의원은 요즘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그는 “나도 좀 살자. 그리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는데, 나도 정치적으로 클 기회를 한번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쓴소리를 하려면 작게는 논공행상에서 제외되고, 크게는 집권세력의 비호에서 배제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 언뜻 대통령을 떠올리기 쉽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있고, 정치게임에 능숙하지 않다는 것이 여권 내부의 공통된 반응이다. 대통령을 둘러싼 몇몇 친문 핵심 의원들, 청와대 일부 인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정치전문가그룹이 코어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금 전 의원도 “황 의원이 얘기했던 ‘우리 쪽’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는 지금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뜻을 가늠할 방법은 있다. 이른바 ‘카톡 문파’로 불리는 극성 지지층의 목소리다. 이들이 카카오톡 대화방, 당 게시판 등 SNS상에서 내놓는 주장은 ‘우리’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좌표’를 찍고 문자폭탄, 항의전화를 퍼붓는 대상이 있다면 일단 ‘우리’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의심해 봐야 한다. ‘우리’와 공명하는 ‘카톡 문파’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낀 당 지도부와 의원들은 그들에게 끌려가고, 그들의 주장이 민주당 전체의 뜻으로, 다시 국민의 뜻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당 지도부가 머뭇거렸던 법관 탄핵소추안 처리나, 당내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중대범죄수사청(가칭) 설치안 등이 탄력을 받고 있는 것도 같은 흐름이다. 들여다보면 민주당이 강경 일색인 것은 아니다. 사석에선 이 같은 당의 행태에 분개하는 의원들이 많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다. ‘카톡 문파’의 표적이 되면 제2의 금태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토론과 비판정신을 강점으로 하던 민주당이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안타깝다”고 했다. 하지만 내심은 모두가 ‘우리’가 되고 싶을지 모른다. 적어도 말없이 웃고 따라주는 것이 권력이 주는 따뜻한 자리와 보호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민주당 의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기업들을 도우며 경제를 새로 도약시키겠습니다. 새해는 ‘회복’과 출발’의 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코로나를 넘어 더 큰 도약을 시작하겠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의 신년사는 미래를 주시했다. ‘공정’과 ‘개혁’을 강조했던 과거와 달랐다. ‘기업’과 ‘경제’를 앞세웠다. 여권은 지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과 ‘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 등 경제·사회 분야에서 나름의 입법 성과를 거뒀다. 이제는 ‘코로나 극복’을 위해 기업을 도와 경제 활성화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김태년 원내대표도 2월 국회를 앞두고 곳곳에서 “기업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규제 혁신을 해 나가겠다” “2월 임시국회에서 규제 혁신 입법을 대거 처리하겠다”며 친기업 행보를 예고했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새해 통화에서 “올해는 기업들의 애로 사항을 적극 반영해 규제를 풀어 나가겠다.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그랬던 민주당이 한 달여 만에 확 바뀐 모습이다. 2월 임시국회가 본격 활동을 시작한 3일, 민주당 최고위 회의는 지난해 12월 정기국회 한복판을 떠올리게 했다. 야당과 재계의 반발 속에 ‘경제 3법’과 노동조합법 등을 밀어붙였을 때의 그 모습이다. 이 대표는 이날 “개혁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후속 입법과 검찰 조직문화 혁신이 이어져야 한다”며 다시 검찰개혁을 강조했다. 노웅래 최고위원은 “재벌 대기업에 대한 부동산 과세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반(反)기업 프레임을 다시 꺼내 들었다. 다분히 4월 서울·부산시장 선거를 의식한 행보라고 생각한다. 최근 불거진 북한에 원전 제공 의혹, 판사 탄핵소추 후폭풍과 하락하는 민주당 지지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금은 지지층을 결집시켜야 할 때’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여권은 당초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보수의 분열, 어쩌면 남북 이벤트까지 더해져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남북 이벤트는 사실상 물 건너간 상태이고, 서울시장 선거는 여야의 일대일 대결 가능성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가뜩이나 어려운 판세 속에 여권엔 악재만 쌓이고 있다. 여권 인사들은 말한다. “촛불로 10년 만에 정권 교체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위태위태하다. 여유가 없다.” 위기감이 커질수록 민주당이 믿을 곳은 친문(친문재인) 지지층밖에 없다. 그래서 지지층이 좋아할 만한 정책과 발언들을 쏟아낸다. 일단 58일 앞으로 다가온 서울시장 선거에 ‘다걸기(올인)’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민주당을 향해 진영 감정이냐, 경제 도약이냐 또는 국민 통합이냐를 따지는 것은 이미 사치인 듯하다. 어느덧 4월 선거는 대선만큼 판이 커져 버렸다. 여권은 4월 서울시장 선거를 정권 연장의 길을 열어줄 마지막 승부처로 보고 총력전을 각오한 모습이다. 당내에서조차 상당한 반대 의견이 있었던 판사 탄핵 표결은 소추안을 공동 발의한 범여권 의원 161명을 훌쩍 뛰어넘는 179명의 찬성이라는 의외의 결과로 이어졌다. 범여권 전체가 똘똘 뭉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4월 선거가 끝일까. 올해는 정치의 해다. 2022년 3월 9일 예정된 차기 대선을 앞두고 1년 내내 여야의 사활을 건 공방이 이어진다. 순간순간 각 당의 희비가 엇갈릴 것이다. 경제 도약을 공언하고, 상황이 어렵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지지층 심기 경호에만 집중하는 집권여당이 신뢰받을 수 있을까. 오락가락하는 민주당의 희망고문에 자영업자와 기업, 민심은 이미 지쳐가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는 말 그대로 전초전일 뿐이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지난해 말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측은 ‘새해 인사’를 명분 삼아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서울 자택을 예고 없이 찾아가는 방안을 검토했다. ‘야권 후보 단일화’에 대한 절박감이 깔려 있었다. 문전박대를 각오했다. 고민 끝에 계획을 변경한 안 대표는 1월 6일 서울 모처에서 김 위원장과 독대했다. 김 위원장은 “국민의힘에 입당할 게 아니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동은 20분 만에 끝났다. 김 위원장과 안 대표 간 신경전은 이후 진행형이다. 안 대표가 국민의힘에 통합 경선을 공개 제안한 이후 더욱 격해졌다. 안 대표가 “공당의 대표에게 입당하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하면, 김 위원장은 “그럼 공당의 대표가 다른 당에서 실시하는 경선에 무소속으로 이름을 걸겠다는 것은 정치 도의에 맞는 얘기냐”고 맞선다. 김 위원장은 ‘선(先)입당’ 방침에서 물러설 뜻이 없어 보인다. 그는 “국민의힘은 내년 대선까지 준비해야 하는 정당”이라고 했다. 4월 선거를 넘어 내년 3월 대선까지 내다봐야 한다는 뜻이다. 당 대표로서 서울시장 선거에서 후보를 뺏길 경우 뒤따를 지지층 이탈과 보수 재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안 대표가 입당 없이 야권 대표 후보가 되면 선거를 이겨도 이어지는 대선 국면에서 국민의힘은 그 역할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각종 여론조사 데이터도 중요하다. 김 위원장은 안 대표 지지율에 반영된 여권 지지층을 ‘거품’으로 본다. 동아일보가 서울시민 800명을 상대로 조사한 신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더불어민주당 혹은 열린민주당 지지자라고 밝힌 응답자들은 안 대표를 나경원 전 의원에 비해 두 배 이상 높게 지지했다. 이들은 결국 여권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라는 얘기다. 201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줄곧 뒤졌던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가 선거 결과 당시 안 후보보다 약 19만 표를 더 받았던 점도 그 근거로 꼽힌다. 김 위원장이 꿈쩍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다. 국민의힘은 예비경선과 본경선을 거쳐 3월 4일 서울시장 후보를 최종 결정한다. 이후 단일화 논의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경선으로 선출된 후보가 협상을 통해 후보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치권의 속설이다. 조직된 지지층의 기대를 저버리는 건 정당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후보가 안 후보에게 끝까지 ‘양보해 달라’며 내세운 논리 중 하나도 “지지층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였다. 안 대표도 김 위원장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안 대표는 최근 “3월에 단일화 협상을 시작하면 단일 후보를 못 뽑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안 대표는 2월 내내 홀로 뛰어야 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경선이 주목받기 시작하면 거대 양당의 싸움 속에 소외될 가능성도 있다. 단일화 논의가 3월 시작됐을 때 안 대표 지지율이 다른 후보들을 압도하지 못할 경우 입지는 지금보다 더 좁아진다. 연패에 빠진 보수야권엔 벼랑 끝 결기가 필요한 상황이다. 단일화 실패 후 여당에 또 패배한다면 김 위원장도 안 대표도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선택지는 국민의힘이 안 대표의 제안을 전격 수용하거나 안 대표가 ‘합당’ 또는 ‘입당’을 결단하거나 둘 중 하나다. 데드라인은 국민의힘이 본경선 후보 4명을 확정하는 다음 달 5일까지다. 안 대표와 김 위원장이 극적인 정치적 결단을 통해 안 대표와 국민의힘 후보들이 참여하는 ‘원샷’ 경선을 합의해 낼 수 있을까. 남은 열흘이 4월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1차 변곡점이 될 것이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부동산 가격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2017년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장에 선 문재인 대통령은 집값 문제에 대해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고 했다. 이후 정부는 20차례가 넘는 대책을 쏟아냈다. 집값은 오히려 폭등했다. 지난해 10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문 대통령은며 목표를 수정했다. 그리고 이달 11일 신년사에서 문 대통령은 이라고 공식 사과했다. 대통령의 사과는 직무수행 지지율이 지난주 취임 이후 최저치로 떨어진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한국갤럽 기준으로 문 대통령 지지율이 30%대로 내려앉은 것은 취임 이후 5차례뿐이다. 2019년 10월 조국 사태 때 39%, 그리고 지난해 8월 39%, 12월 1주차 39%, 2주차 38%였다. 그리고 올 1월 1주차가 38%다. 마지막 네 차례 모두 부정 평가의 가장 큰 원인은 ‘부동산정책’이었다. 사실 우리 사회의 모든 논쟁적 이슈엔 진영논리가 개입돼 있다. 코로나19 유행에 따른 정부 대응에 대한 평가도 진영에 따라 엇갈린다. 동아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 정부의 백신 도입 시기 논란에 대해 54.1%는 ‘정부가 잘했다’, 44.2%는 ‘잘못했다’로 팽팽히 맞섰다. 자신의 정치 성향이 보수라고 밝힌 응답자의 67.6%는 부정 평가를 했고, 진보 성향 응답자에서는 긍정이 76.5%로 나타났다. 전염병은 과학의 영역이지만 여기에도 진영논리가 반영됐고, 결국 여론이 이분화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태극기부대는 문 대통령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놔도 반대나 비판을 하고, 강성 친문(친문재인) 지지자들은 여권의 비상식과 위선이 계속 드러나도 ‘문재인 대통령은 늘 옳다’는 식이다. 하지만 부동산 문제만큼은 예외다. 신년 여론조사에서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긍정 평가는 22.4%에 불과했다. 응답자 10명 중 7명가량인 69.5%는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대해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도층의 73.8%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현 정부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40대조차 부정 의견이 66.0%로 집계됐다. 정부 말을 믿고 아파트 매수를 미룬 30, 40대 직장인,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서민과 청년 등 문재인 정부의 핵심 지지층이 흔들렸다. 여권의 고민이 컸을 것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40% 아래로 떨어지면 다가오는 4월 재·보궐선거에서 대통령 마케팅이 힘들어진다. 당 지지율은 문 대통령의 지지율에 미치지 못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2022년 대통령 선거 전초전이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정치적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 여야 모두 놓칠 수 없는 선거다. 여권이 뒤늦게 수요 억제 일변도 정책의 수정을 예고하고 나섰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다주택자의 양도소득세 완화를 거론했고,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토교통부 장관은 신년 벽두부터 ‘공급 확대’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공공주택 16만 호 공급’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선거를 앞두고 여권이 던지는 정치적 레토릭이나 공약(空約)이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다만 집권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시 선거고, 자신들의 지지층인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마치 탄핵정국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2016년 말 여의도 정가는 여야의 극단적인 대결정치로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본회의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당시 서로를 겨눴던 증오와 반목의 언어들이 4년 만에 반복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몰아내는 맨 앞자리에서 탄핵을 외쳤고,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대통령에 올랐다. 이 정부가 가고 있는 터널의 끝이 보인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14일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평소 온화한 언행이 돋보이는 정치인이다. 그답지 않은 원색적인 연설이었다. 주 원내대표는 최근 공개석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아닌 ‘문재인’이라고 지칭했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모습이다. 앞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반문(반문재인) 연대를 언급하며 주 원내대표 등을 겨냥해 “분열, 증오의 정치를 선동하며 국격을 훼손하는 정치인은 시대의 부적응자”라고 했다. 협상 와중에 협상 파트너를 향해 “부적응자”라고 공개 비난한 것은 더 이상 협상할 생각이 없다는 뜻과 다름없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여야의 감정싸움에 이목이 쏠리고 있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득실은 천양지차다. 민주당은 갈등 이슈를 확대하며 권력기관 개편부터 사회, 경제, 노동 등 각 분야로 전선을 한 걸음씩 넓혀가고 있지만, 국민의힘은 정치적 실마리를 못 찾고 ‘강 대 강’으로 맞받아치는 데 그치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당이 연말 국회에서 힘으로 통과시킨 주요 법안들은 대부분이 사회적 갈등을 부채질하는 법안들이다. 정권 유지 목적과 민주당 지지층이 원하는 법안만 통과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은 물론이고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정보원법, ‘대북전단 금지법’으로 불리는 남북관계발전법 등이 대표적이다. 함께 통과시킨 노동조합법도 마찬가지다. 개정된 노조법에 따르면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 가입이 허용되고, 5급 이상 공무원과 소방관의 노조 가입도 허용된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이 소속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세력을 더 키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노동법이 개정될 때마다 관행적으로 총파업 계획을 발표했던 민노총이 잠잠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야당을 향해 “분열, 증오의 정치를 선동한다”고 몰아붙이고 있지만 민주당은 정치적 실리를 차곡차곡 쌓고 있는 셈이다. 증오의 언어를 쏟아내며 정치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지지층을 결집시켜 이른바 ‘개혁’의 동력을 얻는 것은 친문(친문재인) 진영의 오랜 전술이다. 민주당은 “야당의 침대축구를 참을 만큼 참았다”며 억울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결속하면 상실감에 빠진 국민의힘 지지자들도 더욱 똘똘 뭉치게 된다.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친 극단의 증오 정치는 극심한 사회 갈등을 불러오고, 이에 불안감을 느끼는 중도층은 집권세력에 등을 돌리게 된다. 민주당의 최종 목표인 2022년 차기 대선의 문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증오 정치는 자신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내고 있는 양날의 검일지 모른다.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집권세력의 ‘역사와의 대화’가 부쩍 잦아지고 있다. ‘소명’ ‘맹세’ ‘레거시’ ‘백년대계’ 등의 화두가 최근 여권 인사들 사이에서 더 자주 들린다. 검찰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은 ‘시대적 소명’이고, 가덕도 신공항은 ‘국가백년대계’, 종전선언 추진은 ‘역사’와 마주한 대통령의 결단이라는 식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9일 페이스북을 통해 “몸과 마음은 지치지만 검찰개혁은 내 소명”이라고 밝혔다. 또 “해방 이후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하고 좌절했던 검찰개혁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국민 염원을 외면할 수 없기에 제 소명으로 알고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썼다. 당장은 힘들고 어렵지만 먼 훗날 역사의 평가만 보고 가겠다는 취지다. 남들이 뭐라 하든 추 장관은 그렇게 생각한다. 16일 국회 법사위에서 “검찰개혁을 하기 전까지는 정치적 욕망, 야망을 갖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 바이든의 미 대선 승리로 빨간불이 켜졌지만, 종전선언 역시 ‘70년 남북 간 적대행위를 끝내는 역사적 결단’이 현 정권의 모범 수식어다. 적어도 종전선언은 ‘역사’와 떼어내기 어려운 이슈라는 점에서 공감 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여권은 이를 뛰어넘어 임기 말 주요 쟁점 사업에 대해 앞다퉈 ‘역사’를 끌어다 붙이고 있다. 여권 인사들이 주문 외우듯 반복하는 ‘시대적 소명이자 과업’인 공수처는 말할 것도 없고, 어느덧 ‘국가백년대계’로 격상된 가덕도 신공항 사업도 마찬가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총리실 산하 검증위원회가 김해신공항 사업의 사실상 백지화 발표를 한 직후 반대론자들을 향해 “국가백년대계인 가덕도 신공항 건설의 참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부디 신중하게 처신해 주시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여권은 또 “가덕도 신공항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업(遺業)”이라고 외친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처럼 대놓고 이를 노무현·문재인 정부의 레거시로 연결하고 있다. 친문 핵심들이 가덕도 신공항을 ‘국가백년대계’이자 ‘레거시’로 규정한 이상, 신공항의 경제적 타당성을 차분히 따져보자는 지적이나, 선거를 의식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은 반문(반문재인) 진영의 불순한 정략적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 여권 인사들은 “정부 5년 차에 접어드는 데다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확실한 레거시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정치적 계산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역사와의 대화’가 내포하고 있는 독선의 위험성이다. 집권세력이 임기 말 레거시 만들기에 몰두하면서 ‘역사와 직접 대화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대화, 설득, 타협 등 소통과 정치의 기능은 그 의미가 사라진다. 정권 내부에서도 직언은 없어지고, 핵심들은 정권 바깥의 목소리에도 귀를 닫는다. 오로지 멋 훗날의 역사와 나 홀로 대화하며 달성해야 할 목표만 되새기게 된다. ‘독선의 늪’에 빠져든 정권과 국민 사이의 벽은 더욱 높아진다. “정권이 가장 위험한 때는 임기 말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할 때”라는 여의도 속설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역사와 대화’하기 시작한 정권은 일방적이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원인으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2년 전 이맘때다. 오거돈 부산시장, 송철호 울산시장, 김경수 경남지사가 한데 모였다. 이들은 부산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취임 100일 합동 토크콘서트를 열고 “부산 울산 경남은 처음부터 하나였다”며 부산경남(PK)의 결속을 다짐했다. 그해 치러진 6·13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PK 지역 세 곳 광역단체장을 싹쓸이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구경북(TK) 다음으로 보수세가 강했던 PK에서 일어난 극적인 정치 지형 변화에 여권은 기대에 부풀었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가 ‘20년 집권론’을 설파하기 시작한 것도 6·13지방선거 직후부터였다. ‘PK 수복’은 부산 민주화 세력에 뿌리를 둔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 진영의 숙원이자 정권 재창출의 핵심 키워드다. 문 대통령은 2017년 5·9대선을 앞두고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PK 지지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저와 영남 동지들의 원대한 꿈! 오랜 염원! 감히 고백합니다. 우리가 정권교체하면, 영남은 1990년 3당 합당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다 이룬 꿈, 제가 다하겠습니다. 다시는 정권 뺏기지 않고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여기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1990년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소속 김영삼 대통령 탄생 전까지 PK는 진보세가 강한 야도(野都)로 분류됐다. 유권자 60%가량을 차지하는 수도권과 충청의 표가 대략 반으로 갈리고, 약 10%씩을 차지하는 TK와 호남이 보수와 진보로 각각 집중되는 한국의 선거 판세 속에서 15%가량을 차지하는 PK 표심의 보수화는 한동안 보수 정당에 유리한 정치 지형을 제공했다. 이 같은 PK 표심을 3당 합당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문 대통령 말처럼 여권의 오랜 염원이었다. 부산 출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정권 핵심으로 중용한 것도, 김경수 지사가 2018년 의원직을 버리고 지방선거에 뛰어든 것도 모두 ‘포스트 문재인’ 시대를 이어갈 여권 내 PK 대표 정치인을 키워야 한다는 절박감과 정권 재창출을 내다본 포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권의 구상은 지방선거 2년여 만에 그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오 전 부산시장은 직원 성폭력 사건으로 사퇴했고, 송 울산시장은 청와대 하명수사·선거개입 의혹에 휩싸여 재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드루킹 댓글 사건에 연루된 김 지사의 정치 생명이 걸린 항소심 선고는 6일 오후로 예정돼 있다. 재판 결과에 따라 여권의 ‘PK 수복’ 프로젝트는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PK 민심도 요동칠 것이다. 여권에선 이에 대비한 듯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4일 부산을 찾아 가덕도 신공항과 관련해 “부·울·경의 희망 고문을 빨리 끝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는 등 ‘PK 수복’ 프로젝트에 다시 시동을 걸고 나선 모양새다. 국민의힘이 여권의 이 같은 ‘PK 수복’ 의지를 모를 리 없다. 야권이 PK 표심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 정권 탈환은 더욱 멀어진다. 앞으로 1년여 동안 전국 곳곳에선 인물과 정책, 지역개발 공약 등을 둘러싸고 여야의 치열한 대선 전초전이 펼쳐진다. 그중 핵심 전장은 PK가 될 것이다.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1993년 말 치러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는 이례적으로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온건개혁 노선을 표방하고 나선 ‘21세기 진보학생연합’ 후보 강병원 군(23)이 민중민주(PD) 계열 후보를 837표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선거 결과를 알린 1993년 11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온건파 후보가 민족해방(NL)과 PD 진영 후보들을 누르고 당선됐기 때문이다. 승자였던 ‘강 군’은 지금 더불어민주당 재선 강병원 의원이다. 837표 차로 패배한 PD 후보는 김종철 정의당 대표다. 90학번(경제학과), 70년생이다. 11일 취임한 김 대표는 진보진영의 ‘포스트 심상정’ 체제는 물론 원내정당 가운데 ‘첫 70년대생 당 대표’ 시대를 열었다. 우리 정치에서 97세대(90년대에 대학을 다닌 70년대생)는 세대 담론에서 투명인간에 가까웠다. 21대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40대는 38명(12.7%)에 불과하다. 50대는 177명(59%)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86그룹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일 뿐만 아니라 리더로 자리 잡은 인물도 찾기 힘들다. 특히 여권에서는 20년 넘게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는 86그룹의 그늘에 가려 있고, 심지어 일부는 ‘똘마니’로 치부되고 있다. 그랬던 70년대생을 야권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3일 취임 인사차 찾아온 김 대표의 “가르침을 달라”는 인사말에 즉석에서 노동법과 낙태죄 등 의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며 15분가량 공개 토론을 벌였다. 40년생인 김 위원장과 30년 나이 차를 건너뛴, 진보와 보수를 이끄는 두 야당 대표의 대화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국민의힘 안에서 차기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김웅, 윤희숙 의원도 70년생이고, 김 위원장은 ‘70년대생 경제통’을 차기 대선 후보로 꼽기도 했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해 외면받은 야당으로서 선제적 세대교체를 통해 당의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는 절박감이 반영됐을 것이다. 다만 운동권으로 대표되는 86그룹과 달리 97세대 정치인들은 정치에 입문한 과정도, 계파도, 추구하는 가치도 제각각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97세대가 주축인 X세대를 두고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주의 세대’라고 했다. 정치인도 다르지 않다. 20대 국회 민주당 70년대생 의원 모임 ‘응칠(응답하라 1970)’에 참여했던 박용진 강병원 김병관 박주민 김해영 의원 등은 의정활동에서 뚜렷한 개성을 보였지만 세를 만들진 못했다. 참여했던 한 의원은 “세대교체를 선언할 용기도, 하나로 묶을 가치도 없었다”고 했다. ‘머릿수 싸움’이라는 여의도 정치에서 뭉치기 어렵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그렇지만 86세대의 민주화와 2030의 개인주의를 동시에 공감한다는 점에서 97세대는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86그룹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정치권 세대교체는 시간문제일 뿐 필연이다. 21대 국회는 여야 70년대생 정치인들에게 구시대의 막내가 될지, 변화를 이끄는 새 시대의 첫차가 될지를 결정짓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