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이승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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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승헌 부국장입니다.

ddr@donga.com

취재분야

2024-03-26~2024-04-25
칼럼100%
  • 나훈아가 새삼 일깨워준 제대로 된 말의 힘[오늘과 내일/이승헌]

    가수 나훈아의 추석 연휴 공연이 아직도 화제다. 그 가운데 나훈아의 말도 있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KBS가 정말 국민들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나훈아의 사이다 발언에 열광했다면 그건 메시지가 분명한 데다 무엇보다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했으면 하는 말을 오랜만에 TV에 나오는 가수가 하자 ‘의외성’이 겹치면서 폭발력이 더했다. 국내외 정치인들의 말과 메시지를 좇으며 커뮤니케이션이 정치의 ‘팔 할’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는데, 다른 분야 레전드도 마찬가지일 수 있음을 이번에 절감했다. 이번 ‘나훈아 사건’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필자는 정치 리더들의 명언을 가끔 되새기곤 한다. 직업적 습관 같은 건데, 당시 상황을 담고 있어 역사책을 보는 느낌이 든다. 김구 안창호 선생 등 우리 선각자들의 말도 좋고, 미국 대통령들의 말들도 새길 게 적지 않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인 1956년 한 연설 중 일부. 이 문장을 인용했다는 단테의 ‘신곡’에는 정작 ‘지옥의 가장 뜨거운’ 등의 표현이 없어서 과다 해석 논란도 있지만 메시지만큼은 불처럼 분명하다. 대통령 시절에도 종종 사용해서 그가 구현하려던 뉴 프런티어 정신의 상징적 표현 중 하나가 됐다. 깊은 울림의 유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넘사벽’이다. 1984년 재선 도전에 나선 레이건은 당시 73세로 역대 최고령 대선 후보. 선거 내내 민주당 월터 먼데일 후보는 고령을 문제 삼았다. TV 토론에서도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레이건은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이슈화하지 않겠다”고 했다. 황당해하는 사회자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레이건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내 경쟁자의 어림과 경험 부족을 활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먼데일은 패배를 직감한 듯 웃고 말았다. 이보다 더 고급스러운 네거티브 캠페인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정치와 언론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따라가기 어렵다. 2017년 1월 18일, 트럼프 취임을 하루 앞두고 한 그의 마지막 기자회견은 언론학 교과서에 실릴 만하다. “여러분은 나에게 거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우리가 책임감을 갖고 일하게 된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 정부에서도) 집요하게 진실을 끄집어내서 미국을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달라.”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후 많은 말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단연 취임사의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대목이다. 조국, 추미애 사태와 부동산 대란을 겪으며 조소(嘲笑)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엔 새 정부 출범의 에너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후 무릎을 치게 하는 말이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의 말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비핵화를 생략하고 종전선언을 촉구한 유엔총회 연설이나, 공무원 총살 사건에도 김정은의 사과를 ‘각별하다’며 평가한 발언 등이 대표적이다. 왜 그럴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대중과의 공감력이 떨어지는 게 가장 클 듯싶다. 이게 온전히 문 대통령 탓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청와대의 총체적인 공감력이 떨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는 말이 쌓여 레거시를 만드는 과정이다. 현실에 대응하는 청와대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정상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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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흑인 법무장관에 대한 기억[오늘과 내일/이승헌]

    미국에선 장관을 ‘비서(Secretary)’라고 부른다. 우리처럼 ‘Minister’가 아니다. 각 부문을 대표해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비서 대신 다른 이름을 쓰는 장관이 딱 한 명 있다. ‘Attorney General’로 불리는 법무장관이다. 머리글자를 따 AG라고도 한다. 미 법무부(Department of Justice)를 ‘정의를 다루는 부서’라고들 하는데, 장관 명칭만 놓고 보면 미 사회에 적용되는 법률을 집행하는 조직의 수장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검찰총장도 겸하고 있다. 법무장관의 역할에 대한 미 사회의 기대가 명칭 자체에 녹아 있다. 필자는 특파원 기간 지켜봤던 한 법무장관에 대해 강렬한 기억을 갖고 있다. 미 최초의 흑인 법무장관인 에릭 홀더.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시작해서 2014년까지 6년 넘게 재직했다. 법무장관으로서 홀더의 진가는 법리 해석보다는 인종 갈등의 한복판에서 드러났다. 지금은 ‘BLM’이란 줄임말로도 익숙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의 본격적인 발화점이 된 2014년 8월 미주리주 퍼거슨 소요 사태였다. 10대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자 ‘제2의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시간문제라고들 했다. 많은 사람이 미 최초의 흑인 대통령 임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결국 오바마는 이례적으로 법무장관을 소요 현장의 한복판으로 보냈다. 그는 퍼거슨에 도착해서 한 식당으로 갔다. 지역사회 각 분야 흑인 대표자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관이라기보다 10대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여기에 왔다.” 홀더는 반신반의하는 듯한 표정의 한 흑인 여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흑인들의 경찰에 대한 불신을 이해한다” “나도 흑인이라 차별을 겪어봐서 안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공권력에 불신 가득했던 퍼거슨 주민들이 가슴을 열기 시작했다. 브라운의 어머니 레슬리 맥스패든 씨는 당시 CNN과의 인터뷰에서 “홀더 방문을 계기로 달라진 게 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퍼거슨 분위기에선 나오기 어려운 말이었다. 사태가 진정되는 데는 몇 개월의 시간이 더 걸렸다. 홀더는 퍼거슨을 방문한 지 한 달 뒤 장관직을 사임했다. 오바마와 임기 8년을 함께할 듯했던 홀더의 사임을 두고 워싱턴에선 해석이 분분했다. 공권력 총책인 홀더가 퍼거슨 사태 초기 대처 실패의 책임을 졌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퍼거슨 사태가 더 악화되는 걸 홀더가 막아냈다는 평가에는 이론이 없었다. 오바마는 그의 퇴임을 직접 발표하며 아쉬워했다. 미 법무장관, 그중에서도 홀더의 6년 전 이맘때 일이 떠오른 건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 관련 의혹이 불거진 뒤 추 장관의 대응을 보면서다. 의혹이나 사실관계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국무위원, 그중에서도 법무장관의 정치·사회적 역할에 대해 여야, 보혁 가릴 것 없이 우리 사회가 한 번은 곱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다. 당 대표를 지낸 지역구 5선 의원 출신 법무장관에게 동시대 사람들과의 공감과 소통을 기대하는 게 그렇게 과한 것인가. 법무장관 스스로 사회적 파열음의 진앙(震央)을 자처하는 사회. 당분간 협치나 공존, 사회적 치유, 이런 말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사치 아닐까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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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팔순 노정객의 대망론까지 나오게 됐나[오늘과 내일/이승헌]

    국민의힘(옛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당초 우려와 달리 연착륙에 성공하자 정치권에서 김 위원장의 2022년 차기 대선 출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처음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젠 여야 가릴 것 없이 나온다. 당내에선 하태경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이 공개적으로 꺼냈다. 하 의원은 “내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까지 승리로 이끌면 김 위원장은 대선 후보군 중 하나가 된다”며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제시했다. 여권 유력 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도 얼마 전 그의 출마설에 대해 “그런 얘기를 바람결에 들은 적은 있다. 가능성이야 늘 있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자신의 출마설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친 바 있다. 하지만 이게 진심인지를 놓고 서로 다른 말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지난달 31일 취임 100일을 앞두고 가진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필자는 김 위원장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차기 대선의 시대정신은 뭔가. “내년 보궐선거까지만 약속하고 (비대위원장으로) 왔기 때문에 그 다음 얘기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다.” ―상황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 않나. “난 그 약속 지키려고 한다. 나는 상황 변화에 따라 스스로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당원들이 (대선에서 당신이)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깐….” ―건강이 좋아 보이시는데…. “여기 와서 비대위원장을 하니깐 이러저러한 얘기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건 날 잘 몰라서 그러는 거다. 나는 (뭐에) 집착해서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떠날 시점이 언제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차기 대선 출마 같은) 그런 얘기는 안 물어봐도 된다.” 몇 차례의 문답에도 그의 속내를 똑 부러지게 알기는 힘들었다. 노욕(老慾)이라는 일각의 인식을 부담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차기 대선과 완전히 선을 긋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몇 가지 힌트가 있었다. 우선 김 위원장은 이 문답을 하면서 유독 표정이 밝았다. 필자는 ‘대선 출마’라는 표현을 꺼내지 않았는데 김 위원장은 대선에 대해 말했다. 인터뷰 중 ‘상황 변화에 따라 스스로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눈에 띄었다. 사실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12년 새누리당, 2016년 더불어민주당에 이어 올해 미래통합당에 합류해 국민의힘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사에서 일찍이 없던 팔순 노정객의 대선 출마설이 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필자는 그 답을 김종인 대망론을 언급하는 보수 야권 인사들의 표정에서 찾는다. 그의 출마 가능성을 거론하는 야권 인사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씁쓸함이 배어 있는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기본소득제, 광주 5·18 무릎 사과 등 한 박자 빠른 김 위원장의 정치적 감각을 인정하면서도, 팔순의 원로에게 당의 재활에 이어 차기 대선 구도까지 맡길 수도 있는 보수야권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지금 야권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원희룡 제주지사, 유승민 전 의원, 오세훈 전 시장 등은 김종인의 한 세대 아래다. 이들은 과연 팔순의 김종인만큼 현실에 제대로 발을 딛고 고민하는지, 보수 유권자들에게 정권 창출을 위한 실질적인 희망을 주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스타일리스트’라는 지적을 들었던 한나라당 시절처럼 말로만 개혁과 혁신을 외쳤다간 유권자들은 좋든 싫든 당분간 ‘김종인 대망론’을 듣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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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든 낙관론, 아직은 성급하다[오늘과 내일/이승헌]

    “정말 바이든이 트럼프를 이길까?” 미국 대선이 70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요즘 외교가는 물론이고 여의도 정치권에서도 가장 자주 들리는 말 중 하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임기 4년이 워낙 시끄럽다 보니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를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 은근히 녹아 있다. 실제로 바이든이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민주당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4년 전 학습효과를 거론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를 이길 것이라는, 더 정확히는 이겨야 한다는 미국 진보 성향의 주류 언론을 믿다가 정반대의 결과를 받아봤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정확한 판세는 어떤 것일까. 미국 정치를 오래 관찰한 전문가들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민심의 이면을 살펴볼 것을 권한다. 각종 조사에서 바이든이 오차범위 안팎에서 트럼프를 앞서는 것으로 나오지만, 반(反)트럼프 성향이 강한 미 기성 언론이 잘 전하지 않는 대목도 함께 봐야 한다는 것. 필자가 최근 조사를 분석해본 결과 ‘바이든 낙관론’은 아직 성급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코노미스트가 유고브에 의뢰해 16일부터 18일까지 미국 성인 1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 ±3.4%포인트)를 보면 ‘지금 대선이 치러지면 누구에게 투표하겠느냐’는 질문에 바이든 50%, 트럼프 40%였다. 10%포인트 차이. 그런데 질문을 ‘누가 대선에서 승리할 것으로 보느냐’로 바꾸면 바이든 39%, 트럼프 40%로 오차범위 내지만 결론이 뒤집힌다. 지지율과 당선 가능성에 대한 여론이 다른 것이다. 당선 가능성에 대한 여론을 더 구체적으로 보면 바이든 캠프가 식은땀을 흘릴 만하다. 남성 응답자는 45%가 트럼프를, 37%가 바이든을 택했다. 트럼프에 대한 비호감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여성층에서도 트럼프가 36%, 바이든은 41%였다. 미국 정치 전문가들은 이번 대선의 최대 관건 중 하나로 적극 지지층들의 투표 참여를 꼽는 데 큰 이견은 없다. 코로나19 사태 한복판에서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투표장에 나오느냐는 것. 이와 관련해 최근 선거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특정 후보에 대한 열정 지수(enthusiasm score)’라는 독특한 지표를 볼 필요가 있다. 미 ABC방송과 워싱턴포스트가 12일부터 15일까지 미 성인 1000명을 상대로 진행한 조사(표본오차 ±3.5%포인트)의 지지율 추이는 바이든 54%, 트럼프 44%로 여타 조사와 비슷하다. 하지만 ‘열정 지수’를 놓고서는 두 후보의 희비가 엇갈린다. 바이든 지지자 중 ‘바이든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절반이 안 되는 48%가 ‘매우 열정적’이라고 답했다. 트럼프 지지자는 65%가 ‘트럼프를 매우 열정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최근 미 대선 투표율이 하락세인 점을 감안하면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의 결집력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미 대선 투표율은 2016년에 56.9%로 2008년(62.2%), 2012년(58.6%)에 이어 계속 하향 추세. 바이든이 당선되려면 흑인, 히스패닉들이 투표장에 나와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방역 능력이 취약한 이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참여할지 현재로선 장담하기 어렵다. 미국에서 흔히 주고받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말이 이번만큼 유효한 선거도 없을 것이다. 우리 정치권은 물론이고 재계도 끝까지 상황을 지켜보는 전략적 마인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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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실화되는 ‘K5’, 이게 과연 정상인가[오늘과 내일/이승헌]

    이 정도면 무풍지대라 할 만하다. 부동산 정책 후폭풍으로 청와대 수석들에 이어 일부 부처 장관들의 인사설이 나돌고 있지만 몇몇 장관은 굳건하다. 이 중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거의 요지부동이다. 후임 하마평조차 들리지 않는다. 같은 외교안보 라인인 통일부 장관은 이미 이인영 의원으로 바뀌었고,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후임이 검증에서 날아갔다는 말까지 들린다. 이러다 박근혜 정부의 ‘오병세’(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5년 가까이 재직했다는 의미)에 이어 문재인 정부에선 ‘K5’(강 장관이 5년 채운다는 의미)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말이 외교가에서 파다하다. ‘5년 강경화’라는 뜻에서 5G라는 표현도 나돈다. 강 장관이 2017년 6월부터 3년 2개월째 장악하고 있는 외교부는 어느덧 ‘강경화의 외교부’로 바뀌고 있다. 강 장관과 거리가 있는 사람이 외교부 주요 보직을 맡았다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외교부 장관이 오래 버텨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국무장관은 대개 대통령과 4년 임기를 함께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2018년 렉스 틸러슨을 1년 만에 바꿨지만 후임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년 4개월째 현직에 있다. 임기 초만 해도 “얼마나 버틸까”란 말을 들었던 강 장관이 어떻게 K5라는 말까지 듣게 된 것일까. 일각에선 강 장관의 국제적 감각을 평가한다. 한 여권 핵심 인사의 전언. “국제무대에 가보면 다들 먼 산 보고 있는데, 강 장관은 물 만난 고기처럼 세련되게 대통령을 보좌한다. 외국 공기가 더 편한 것 같다.” 또 다른 여권 핵심 관계자는 “폼페이오랑 통역 없이 영어로 말하는 걸 들어본 사람이라면 강경화 욕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게 K5라는 표현이 나오는 본질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교부 장관으로서 그 무게에 맞는 역할이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없는 상황이 장기화돼 이젠 다들 익숙해진 게 아닐까 싶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요구 수준에 맞게 일하는 정치적 무색무취함이 역설적으로 강 장관의 롱런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구상의 핵심인 북핵 이슈는 청와대 국가안보실, 국가정보원이 주도해 왔다. 외교부, 통일부는 지원 부서에 가까웠다. 미사일 지침 개정,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이슈도 안보실이 주도했다. 한일 강제징용 이슈는 이낙연 의원이 총리 시절 동분서주했고, 막판에는 문희상 전 국회의장까지 나섰다. 다 외교부 몫인 일들이다. 하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외교부가 지금처럼 일하다가는 큰코다치는 환경이 다가온다. 11월 미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북-미 관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같은 동맹 이슈를 진짜 마음대로 하려고 할지 모른다. 조 바이든이 당선되면 4년 만에 ‘국무부의 시대’가 부활할 것이라고들 한다. 트럼프가 일부 백악관 참모와 주물러 온 외교 이슈를 전문가 집단인 국무부가 다시 가져가 지난 4년을 재평가하게 될 텐데 그 상대는 외교부다. 여기에 강제징용 이슈는 일본제철이 한국 법원의 자산압류명령에 즉시 항고 의사를 밝히면서 다시 한일 양국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문제는 삐끗하면 미중 양국을 한꺼번에 건드릴 수 있는 사안이다. 환경이 이런데도 강 장관의 외교부는 별 변화가 없고 K5라는 말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건 정상이 아닌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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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영호가 재확인시켜 준 미래통합당의 한계[오늘과 내일/이승헌]

    미래통합당 태영호 의원이 다시 한번 이슈의 중심에 섰다. 등원 전에는 서울 강남갑 공천을 놓고, 당선된 뒤에는 김정은 사망설 발언으로 논란이 됐다. 이번에는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무대였다. 전대협 초대 의장인 이 후보자가 주사파에서 ‘사상 전향’했느냐는 질의를 주도하면서다. ‘사상 전향’ 질의를 놓고 여야 간 신경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선 탈북자인 태 의원을 겨냥해 ‘민주주의가 아직 낯선 것 아니냐’고 했고, 통합당에선 공직 후보자에 대한 정당한 질문을 왜 색깔론으로 몰아가느냐는 ‘역(逆)색깔론’을 폈다. 양당 모두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태 의원이 주도한 ‘사상 전향’ 질의 논란을 선거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마디로 4월 총선에서 폭망했던 통합당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전략 미스라고 필자는 본다. 슈퍼 여당으로 거듭난 민주당은 내년 재·보선, 후년 대선에서 집토끼 지키기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총선에서 180석을 얻었는데 굳이 보수 진영으로 표를 더 확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다. 지금처럼 진보, 범중도 진영만 차분히 지켜도 된다. 이인영 청문회 전후 보여준 민주당의 반응, 다시 말해 통합당을 ‘보수 꼴통’으로 몰아가는 프레임은 총선 때 표를 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 반면 통합당은 또 폭망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지지층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 새로 개척해야 할 유권자층은 중도와 민주당에서 실망한 일부 진보, 그리고 2030세대다. 이들의 이탈을 유도하려면 이들의 이슈와 어젠다를 꺼내야 한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저출산 문제, 기본소득제, 부동산 등에 집중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태영호가 주도한 ‘사상 전향’ 프레임은 총선에서 통합당을 지지했던 장년층 등 콘크리트 지지층이 주로 환호하는 이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새로 끌어와야 할 유권자에게 어필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들에게 다가가려면 같은 주제라도 이 후보자의 대북 구상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보면 얼마나 위험하고 몽상적인지 세련되게 지적했어야 했다. 통합당에선 “사상 검증만 한 게 아니라 다른 질문도 했다”는 말이 들린다. 하지만 정치의 세계에선 자신이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보다 밖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정치 IQ’가 좋은 사람들은 이런 정치의 속성을 잘 아는데, 학생 시절부터 정치 프로파간다를 연마한 진보 진영에 비해 통합당이 너무나 취약한 대목이다. 이인영 청문회도 딱 그러했다. 많은 사람들은 ‘통합당은 역시 보수 꼴통’이라는 명제를 연상케 하는 장면으로 태영호의 질의를 기억할 것이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오가는 요즘은 더더욱 결정적 상징과 이미지로 전체를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가 심판당했다는 21대 총선이 벌써 100일이 지났다. 그사이 통합당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돌려놓으려 어떤 노력을 했나. 소수당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힘겹게 투쟁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통합당이 이번 청문회를 계기로 정치의 팔 할은 결국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했으면 싶다. 실제로 변했다는 걸 유권자들이 알도록 해서 표를 얻어야 정치에선 ‘진짜 변화’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데 자기만 변했고 개과천선했다는 주장만큼 정치에서 허망한 것도 없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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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훈은 ‘밀실 안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오늘과 내일/이승헌]

    의외로 반전(反轉)이 있는 사람이다. 신임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얘기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대부분의 시간을 정보기관에서 보냈다. 1980년 국가안전기획부에 입사해 워싱턴 등 서방 외교가에선 ‘spy chief’로 통하는 정보기관 수장(국가정보원장)까지 지냈다. 그런데 그는 정통 정보맨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무엇보다 그는 말을 잘한다. 달변이다. 소통을 즐긴다고 주변에 말할 정도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와 실제도 좀 다르다. 무표정하고 심지어 금욕적일 것 같은 인상인데 그는 알아주는 애주가다. 대북통이라 북한 사람들만 잘 알 것 같지만 오랜 정보기관 근무 덕에 미 중앙정보국(CIA) 인맥이 적지 않다. 두 살 아래 지나 해스펠 CIA 국장을 편하게 ‘지나’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가 국정원장에서 안보실장으로 옮기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외교가에 적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전임 정의용 안보실장과는 다른 스타일이어서 그럴 것이다. 더 정확히는 ‘정의용 안보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달라는 목소리가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정의용 전 실장이 이끈 국가안보실은 장막에 가려 있었다. 북핵 이슈는 물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협상, 일본의 무역 보복에 따른 한일관계 설정 등 한국의 운명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교안보 이슈를 어떻게 다루고 논의하는지 밖에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청와대 다른 부서에서도 안보실이 정확히 뭘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 서로 물어봤다고 한다. ‘밀실 안보 컨트롤타워’라고 해도 무방할 이런 업무 스타일은 “안보실은 밖으로 드러나면 안 된다”는 정의용 전 실장의 지론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안보실 업무 특성상 보안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자기네들 마음대로 요리해놓고 결과만 떡하니 발표하는 게 최선인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지난 시절 안보실은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이런 식의 외교안보 컨트롤타워 운영은 안보 이슈에 대한 국민들의 합당한 알 권리를 제한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본다. 청와대보다 기밀이 적지 않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도 기회 될 때마다 언론 브리핑이나 콘퍼런스 등 다양한 형태로 대국민 접촉을 한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나 지금 도널드 트럼프 때나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할 일 많은 백악관 NSC에서 왜 국민들에게 꾸준히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리겠나. 소통을 통해 자신들의 안보 구상을 수정·보완하고 업데이트하기 위해서다. 오바마 임기 8년간 외교 구상을 실무 총괄했던 벤 로즈 전 NSC 부보좌관의 공식 직함은 ‘전략 커뮤니케이션 담당 부보좌관(Deputy National Security Advisor for Strategic Communications)’이었다. 수시로 백악관 인근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외교 정책 토론회를 갖고 대통령의 구상과 메시지를 보완하는 게 그의 업무 중 하나였다. 서훈 실장이 맨날 언론을 통해 대국민 접촉을 하라는 게 아니다. 국민들이 알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국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월 미 대선 전 3차 북-미 정상회담 중재 의사를 밝힌 뒤 워싱턴과 평양에서 발신하는 메시지가 어지러운 수준이다. 싱가포르, 하노이에 이어 다시 한 번 비핵화 쇼만 하다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다시 국가안보실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금, ‘서훈 안보실’은 과연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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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본 적이 없다[오늘과 내일/이승헌]

    김정은의 보류 선언으로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간 북한의 대남 공세 기간 동안 여권 인사들은 김여정만큼이나 말폭탄을 쏟아냈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시작으로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 김두관 의원 등이 있었지만 단연 ‘원톱’은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민주당 송영길 의원이다. 이런 식이었다. 북한이 16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키자 당시 외통위 회의를 주재하던 송 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나 “(대)포로 폭파 안 한 게 어디냐”고 했다. 그러더니 백인 경찰에게 목이 눌려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까지 거론했다. “조지 플로이드가 숨을 쉴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 북한의 상황, 제재가 그와 유사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백인 경찰이고, 북한이 억울한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북제재 완화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필자는 송 위원장의 발언을 듣고 처음엔 화가 났고 나중엔 겁이 났다. 대한민국 외교안보 이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통위원장이 어떤 자리인 줄 알면 이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포 발언의 저열함은 차치하더라도, 플로이드 발언은 우리의 유일한 동맹국을 사분오열시켰던 가장 뜨거운 사회적 이슈를 맥락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북-미 관계에 갖다 붙인 것이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완화 요청 발언은 북핵과 관련해 국제 질서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유엔에서 대북제재 결의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모른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별 탈 없이 선수(選數) 쌓이면 한다는 게 국회 상임위원장이라지만 그래도 외통위원장은 다른 상임위원장과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실제로 외통위는 18개 상임위 중에서 ‘상원’으로 불린다. 휘몰아치는 국제 지형에서 한국의 전략적 위치를 논의하는 곳이라서 그렇다. 여야를 막론하고 중진이나 차기 대선 주자들이 외통위를 지망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까지 굵직한 외교안보 현안은 예외 없이 외통위를 거쳐 갔다. 대표적인 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동의안이다. 여권이 추진하겠다는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동의안도 외통위를 거쳐야 한다. 자연히 외국에서도 보는 눈이 많다. 특히 미국에선 워낙 거물들이 상·하원 외교위원장을 거쳐 가서 외통위원장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이자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낸 존 케리 전 국무장관이 상원 외교위원장을 지낸 대표적 정치 거물 중 한 명. 그렇다 보니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 주한외교 사절들이 국회에 할 말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도 외통위원장이다. 송 위원장이 민감한 외교 이슈에 대해 외통위원장 무게에 걸맞지 않은 말을 하고 다니는 건 개인 자질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미국 때리기가 놀이처럼 일상화된 여권 내 분위기도 더해졌다고 필자는 본다. 86운동권 세대가 중진이 된 민주당에서 1980년대 운동권 사고방식과 문화는 이제 보편적이다.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고 김근태 의장 등 오리지널 민주화 세대가 한 축이어서 한미동맹에 대한 인식이 80년대 운동권처럼 천편일률적이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다른 말 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아무리 슈퍼 여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자기들 세상인 듯해도 국익을 생각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언행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송영길 국회 외통위원장은 지금이라도 자기가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지,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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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년 전에도 트럼프는 어렵다고들 했다[오늘과 내일/이승헌]

    “이제 트럼프는 끝났네….” 미국 대선을 한 달 앞둔 2016년 10월 7일,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른바 ‘음담패설’ 동영상이 폭로되자 워싱턴 주변에선 이런 말이 쉽게 들렸다. 뉴욕타임스 등 진보 언론은 일찌감치 축배를 들었다. 미 정가에 안테나를 대고 있는 주미 한국대사관에서도 “트럼프는 안 된다”는 말이 나왔다. 한국 정치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당시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필자의 생각은 좀 달랐다. 뭐 대단한 정치적 인사이트가 있어서가 아니라, 백인들을 만나 보면 주류 언론과는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음담패설 동영상의 핵심 논쟁거리는 여성 성기를 뜻하는 p가 들어간 트럼프의 막말이었다. f로 시작하는 다른 상스러운 표현도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은 공식석상에선 고급 영어를 쓰는 중산층 이상 백인들도 사석에선 내뱉는 표현이다. 옆집에 살던 백인 아저씨의 말. “동영상이 몰카였는데 그런 표현이 국정 수행과 무슨 상관이 있나. 나도 쓰는 말인데 그럼 나도 나쁜 놈인가?” 한 달 후 대선 결과에 대해 미 주류 사회는 트럼프의 충격적인 역전승이었다고 했다. 음담패설 동영상이라는 ‘악재’를 뚫었으니 역전승이라는 건데, 실제로는 원래 이기던 승부에 별 영향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2016년 왜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의 패배를 예상했을까. 필자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흔히 PC라 불리는 가림막 때문에 정확한 흐름을 읽는 게 어려웠다고 본다. PC는 미국의 가치를 지키는 언행을 하라는 것이다. 특정 종교를 비하하지 않고, 인종차별에 분노하라는 것들이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상의 미국인들에겐 은근히 ‘PC 피로감’ 같은 게 있다. 버락 오바마라는 첫 흑인 대통령 치하 8년은 PC가 어느 때보다 강력했던 시기. 워싱턴의 한 외교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바마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흑인 여성인 수전 라이스를 4년간 중용하자 워싱턴에 ‘흑인 대통령에 흑인 여성 외교 컨트롤타워?’ 하며 갸우뚱한 사람이 많았다.” 트럼프의 위험천만한 언행에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비판했지만, 이게 고스란히 반(反)트럼프 표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착한 미국인 코스프레’에 질린 사람들 중 일부가 “기성 정치권은 PC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트럼프에게 동조했던 것이다. 올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다시 무대에 선 트럼프에 대해 “이번에는 정말 어렵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 흑인 사망 시위까지 겹쳐 현직 프리미엄을 누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과연 4년 전보다 상황이 안 좋을까. 진보진영은 그때나 지금이나 트럼프를 혐오한다. 흑인들은 원래부터 트럼프 편이 아니다. 속으로 트럼프에게 동조하고 그 덕에 돈을 버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경쟁 후보는 과연 4년 전 힐러리 클린턴보다 매력적인가. 3수 끝에 대선 무대에 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당선돼 내년에 취임하면 79세로 트럼프보다도 네 살 더 많다. 정치권에서, 특히 여권에서 4년 전처럼 은근히 트럼프 낙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2017년 북-미 갈등이 첨예할 때 여권 핵심 인사들이 대놓고 트럼프 욕을 하는 걸 자주 접한 적이 있다. 막판에 온갖 네거티브가 난무하는 미국 대선의 정치적 역동성은 우리 대선을 능가하는 편이다. 11월 대선 전까지 철저하게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게 슬기로운 스탠스가 아닐까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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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인과 보드카[오늘과 내일/이승헌]

    “이게 누가 선물이라고 준 건데….” 9년 전인 2011년 가을 서울 시내의 한 음식점. 자연인 신분이었던 김종인 전 의원이 처음 보는 술 한 병을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젊은층에게 인기가 많은 덴마크의 D 브랜드 보드카였다. 겉을 보니 가격은 병당 3만 원 정도, 도수는 40도였다. 당시에도 70세를 넘긴 ‘고령’. 함께한 젊은 사람들 마시라고 가져왔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앞의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한두 잔 연거푸 마시더니 계속 마셨다. “난 독주가 깨끗해서 좋아.” 2012년 대선 후에도 비슷한 장면을 볼 기회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 국내에서 몇만 원에 파는, 처음 보는 위스키를 들고 왔다. 도수 45.8도. 그는 50도 가까운 위스키를 “크∼” 하면서 씹듯 음미했다. 미래통합당의 재건을 맡게 된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관련된 여러 장면 중에서 필자는 독주(毒酒)를 즐기던 장면들이 유독 자주 떠오른다. 백발의 노(老)정객이 젊은 사람들도 버거워할 불같은 술을 들이켜는 이미지와 그의 정치적 트레이드마크인 ‘의외성’이 묘하게 오버랩되기 때문인 것 같다. 박근혜 당을 빨간색으로 바꾸고 경제민주화를 입히고, 다시 문재인 당에 들어와 총선에서 1당을 만들어낸 그의 정치적 행보에는 분명 호불호가 엇갈린다. 누구는 정치 기술자라고도 한다. 하지만 관습화된 한국 정치에서 반 발짝 앞서가 “어!” 하며 무릎을 치게 하는 역발상 전략전술에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 흔치 않은 것 역시 사실이다. 사실 그의 이런 전략적 효용은 지금은 갈라선 친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4·15총선 직전 여권 최고위급 인사는 통합당 선대위원장으로 합류하는 김종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김종인 하면 이를 가는 사람이다. “왜 공천권도 안 받고 통합당에 갔는지 모르겠지만, 김종인이 공천까지 했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편하게 선거를 치르지는 못했을 거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판을 뒤엎으려는 사람이다.” 우여곡절 끝에 김종인 비대위가 1일 출범했다. 필자는 김 위원장이 보수 정치에 역발상과 역동성의 씨앗만 제대로 심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보수가 맥을 못 추는 건 정책이든 언행이든 너무 뻔하고, 창의성도 없고, 그래서 좀처럼 정치적 다이내믹스를 못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대선 주자 육성은 그 후의 일이다. 아직 통합당엔 김종인 체제를 반대하는 자강파가 있다. 물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조직이 건강하다. 한때 집권세력이 이젠 80대 노인에게 변화의 키를 쥐여준 게 자괴감이 들어서 그럴 수도 있다. 별명이 ‘여의도 차르’인 김 위원장의 독불장군 스타일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강파의 논리라는 게 구체적인 방법론도 없이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정신승리 수준이다. 이런 인식은 통합당 사람들이 좋아하는 골프로 치면 만년 백돌이(초보)가 코치에게 레슨 받아 교정할 생각은 안 하고, 잘못된 습관과 폼으로 끝까지 혼자 연습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노정객에게 제1야당의 혁신, 더 나아가 차기 대선 지형 조성까지 맡기는 게 최선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안이 없다면 이젠 김종인 비대위가 보수를 추슬러 슈퍼여당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옳다. 총선 후에도 지리멸렬한 지금의 보수로는 하반기부터 폭풍처럼 몰아칠 여권발 한국 개조 드라이브를 놓고 건전한 토론을 벌이거나 최소한의 견제 장치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 2022년 3월 차기 대선 전 보수 재활의 마지막 기회가 될 1년이 이제 막 시작됐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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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헌만큼은 꼼수로 처리 말라[오늘과 내일/이승헌]

    “개헌은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나 싶다.” 4·15총선을 코앞에 둔 4월 초 어느 날 저녁, 서울 시내. 어렵게 시간을 낸 친문 핵심 인사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반은 모르겠지만 1당은 할 것 같다”며 “우리가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 이어 4·15총선까지 이기는 그랜드 슬램을 한다는 건 참 무서운 이야기”라고도 했다. 부자 몸조심인지 뭔지 진짜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는 1당만 해도 좋겠다는 눈치였다. 당연히 그 당시로는 개헌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리고 4·15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비례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합쳐 180석을 얻고 “개헌만 빼고 다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을 때 “언젠간 개헌도 하겠구나”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다른 입법이야 저절로 되는 것이고 다른 진보 의석에 보수에서 몇 석 더 가져오면 개헌 선인 200석이다.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보낸다는 건 현 집권세력을 모르거나 나이브한 것이었다. 실제로 총선 직후 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개헌 운을 떼더니 이인영 전 원내대표의 국민발안제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공개된 인터뷰에서 “다시 개헌이 논의된다면 5·18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이 헌법에 담겨야 한다”며 개헌론에 불을 붙였다. 필자는 문 대통령과 여권은 슈퍼 여당을 보유한 것 외에도 이전 정권과는 개헌을 위한 정치적 환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개헌론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 가장 큰 차이는 이전 개헌론은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거나 시선을 돌리려는 정략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지만 지금은 대통령 지지율도 60∼70%대가 나오니 그럴 이유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3당 합당’과 ‘DJP 연합’을 이뤄 집권했으나 둘 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만료를 1년 앞둔 2007년 1월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야당에 대연정 제안을 고민했을 만큼 지지율이 바닥이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한마디로 걷어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개헌을 언급했고 이재오 특임장관을 통해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를 띄웠지만 원래부터 개헌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10월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개헌’을 제안했지만 최순실 게이트를 넘기 위한 카드여서 채 하루도 가지 못했다. 문 대통령과 여당이 권력구조 개편이든, 경제 조항 개정이든 개헌을 추진하려면 지금보단 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문 대통령이 2018년 국회에 개헌안을 냈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총선 후 지금까지 여권에서 개헌론이 나온 과정을 보면 과거의 음습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송영길 의원이 개헌을 언급하자 이해찬 대표 등이 불을 끄고, 다시 이인영 전 원내대표가 국민발안제를 띄워 화제가 되니 “개헌하자는 게 아니다”며 진화한다. 스위치를 켰다가 끄는, 전형적인 여론 조성 전술. 그러고는 문 대통령이 잇달아 개헌을 언급하고 나섰다. 문 대통령의 개헌론 추진 보도에 대해 청와대에서 별 반론이나 해명이 없는 건 그게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개헌 논의가 잘 안된 건 진정성이 없어서였다. 선거법을 4+1로 꼼수 처리하듯 하지 말고 “코로나 극복도 중요하지만 지금 아니면 개헌 못 한다”며 정면으로 국민들의 심판을 구하는 게 옳다. 초유의 슈퍼 여당이라면 개헌을 대하는 자세도 이전과는 달라야 하지 않나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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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합당, 망한 줄도 모르는 무감각이 더 무섭다[오늘과 내일/이승헌]

    “너무 우울해서, 별로 할 말도 없고….” 오늘(5일)은 한국 보수 정치가 4·15총선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한 지 20일째 되는 날이다. 알고 지내는 통합당 당직자들에게 얼마 전 전화를 했더니 이렇게 말하는데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긴 요즘은 통합당 출입기자단의 얼굴빛도 그리 밝지 않다고 한다. 아무리 정치와 언론이 불가근불가원이래도, 매일 보던 사람들의 처지가 이러한데 세상 편한 웃음을 지을 수는 없는 게 사람 사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합당 의원, 당선자들에게선 폭망의 위기감이나 앞으로 다가올 ‘퍼펙트 스톰’을 절절하게 느끼기 어렵다. 말로는 “큰일 났다”고 하고, 일부는 모여서 대책도 논의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행태는 이들에게 위기라는 개념이 있는지 의심케 한다. 누구는 이를 한국 사회의 주류로 오래 살아온 보수 정치의 자신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총선 패배 후 20일간 관찰해 보니 이는 낙관주의나 대범함, 이런 게 아니라 정치적 무감각증이라고 보는 게 맞다. 무슨 철학이나 신념에서 나온 게 아니라 어디가 고장 난 것이다. 몸이 아프면 통각(痛覺)이 작동해야 치료를 받는데, 계속 “나는 안 아파” 하며 딴소리를 하고 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그러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을 둘러싸고 찬반 세력이 뒤엉켜 아직까지 결론을 내지 못한 게 대표적이다. 역대 비대위는 그래도 출범은 빨리 했는데 지금은 4개월짜리냐, 1년짜리냐, 아니면 아예 안 된다를 놓고 이전투구다. 그렇다고 김종인 비대위를 놓고 무슨 끝장 토론을 한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대위 동력이 쭉 빠질 수밖에 없는데 “왜 김종인이 필요한가”라는 주장도 속 시원하게 들어 보지 못했다. 심재철 원내대표가 김종인 내정자 집에서 와인 3잔 마시고 나온 게 전부다. 정당은 미래 권력이라는 희망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것도 망각한 듯하다. 차기 대권을 꿈꾸거나 만들어낼 수 없다면 수권(受權) 가능성이 낮은 정치적 불임(不妊) 정당인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굴욕적 참패를 당한 정당이라면 가능성 있는 차기 대선 주자를 억지로라도 띄워 최소한의 정치적 구심점을 확보하려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총선 참패 후 통합당 안팎에서 나오는 차기 대선 담론은 절망적이다. 이미 평가가 끝난 전직 대선 후보들이 “이번엔 내 차례”라고 하고, 대선 후보를 만들어 보겠다는 김종인 내정자도 당 내 반응에 따라 오락가락이다. 어떤 이슈로 슈퍼 여당을 상대할지에 대한 인식이나 컨센서스도 없다. 대선의 시대정신은 차치하더라도, 보수의 시그니처 이슈인 대북 어젠다조차 벌써 휘청거리고 있다. 김정은 신변이상설 정국에서 온갖 주장이 나왔지만 지금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건 안보 인재라고 영입한 통합당 태영호, 미래한국당 지성호 당선자의 김정은 위독설과 사망설뿐이다. 한 보수 진영 인사는 “대북 이슈는 21대 국회에서 여권을 상대할 몇 안 되는 무기인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통합당은 총선 내내 정치적 감수성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이게 대치동 학원에서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진보 진영은 학창 시절부터 갈고닦은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자신들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는 자각해야 혁신을 하든 과거와 단절을 하든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들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에게 어떻게 비칠지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럴 수는 없다. 이건 정치를 떠나 상식과 양심의 문제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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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통합당이 망한 숨겨진 진짜 이유[오늘과 내일/이승헌]

    세대교체 실패, 중도 공략 실패, 외연 확장 실패, 막말 통제 실패, 탄핵의 강 넘기 실패…. 미래통합당이 4·15총선에서 폭망하자 온갖 곳에서 보수 몰락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대체로 위에 열거한 것들이다. 대부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위의 진단은 길게는 수년 전부터 나온 것들인데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의 원인이 되는, 보다 근본적인 보수 몰락의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정치권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필자는 총선을 지켜보며 최소한 숨겨진 진짜 몰락 이유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보수 진영의 ‘정치 인지적 IQ’에 문제가 있었다. 종종 정치의 세계에선 자신이 사실이라 믿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더 중요할 경우가 있다. 자신은 A라고 알고 있는데, 주변에서 B라고 여기면 사회적으로는 B가 될 수 있다. 보수는 이걸 몰랐다. 차명진 전 의원의 세월호 유가족 관련 막말에 대한 통합당의 대처가 딱 그랬다. 차 전 의원 막말이 8일 알려지자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 등 상당수는 선거를 망칠 수 있다며 제명을 요구했지만 황교안 당시 대표와 주변은 머뭇거렸다. 막말 내용 중 일부가 사실일 수도 있으니 좀 더 두고 보자는 얘기였다. 차명진 발언의 진위를 따지려면 수사를 해야 하는데 그 전에 당은 ‘세월호 막말당’으로 인식돼 총선이 끝날 상황인데도 말이다. 지난해 6월 여성 당원들의 ‘엉덩이 춤’ 논란의 문제도 맥락은 차명진 막말 사건과 유사하다. 통합당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여성 비하 의도가 없었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성 비하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황교안은 “좋은 메시지를 내놓으면 하나도 보도가 안 된다. 실수하면 크게 보도가 된다”고 했다. 이렇게 말해 봤자 “한국당이 여성 비하 해놓고 대표는 언론 탓한다”는 인식을 더 굳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가 팔 할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걸 잘 몰랐다. 동서양을 떠나 선거는 결국 메시지 싸움이다. 박근혜는 ‘경제 민주화’라도 있었고, 2016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압도적인 메시지로 백악관 주인이 됐다. 그런데 통합당이 모든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쏟아내 만든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문재인 심판’이라는, 여권의 종속 변수일 수밖에 없는 메시지 외에 보수만의 독창적인 무엇이 없었다. 선거 막판 합류한 김종인 선대위원장이 ‘조국 살리기냐, 경제 살리기냐’는 메시지를 냈지만, 그 전에 몇 달 동안 통합당의 메시지가 워낙 흐리멍덩해서인지 막판까지 당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은 위 두 가지에 월등히 강하다. 시민사회운동, 노동운동 등을 통해 바닥 민심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반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몸소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공무원 교수 법조인 등 갑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많은 통합당은 경쟁이 안 되는 부문이다. 보수 재건을 위해 3040대 기수론도 나오고 청년 정당 아이디어도 나온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사실이 어떻게 투영되고 어떻게 이에 반응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메시지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과 이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없으면 세대교체도, 외연 확장도 어렵다. 많은 통합당 사람들이 좋아하는 골프로 치면 보수는 클럽을 교체하거나 드라이버 거리를 늘리기 전에 그립과 스탠스 같은 기본부터 고쳐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틀을 부정하고 이를 처음부터 다지는 건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선 보수에 미래가 없음을 이번 총선은 보여주고 있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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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럴 바엔 비례대표 의원은 없애는 게 맞다[오늘과 내일/이승헌]

    “나는 돈을 두 배로 줘도 지역구 의원은 못 하겠다.” 얼마 전 비례대표 초선 K 의원이 총선에 불출마하겠다며 사석에서 한 말이다. 주변 평가가 좋고 정무적 감각이 뛰어나서 도전했다면 공천을 받았을 인물. 왜 못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천성이 게을러서 지역구 관리 못 하겠더라”고 했다. K 의원 말처럼 정치권에선 같은 국회의원이라도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은 다르게 본다.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치열한 공천 경쟁, 특히 지역구 관리를 해냈느냐의 차이를 감안한다는 얘기다. 봄철이면 꽃구경 가는 관광버스 뒤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들고, 주말엔 하룻밤에 서너 군데 상갓집을 들르는 게 일상이다. 그래서 “누구는 지역구에서 바닥을 기며 유권자들과 소통하고, 누구는 고상하게 의원만 하는데 어떻게 등가(等價)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매 총선마다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크게 두 가지다. 정당이 선거에서 얻은 표, 그러니까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를 의석수에 가급적 반영하겠다는 게 하나다. 또 다른 이유는 지역구 의원들로는 부족한 각 분야 전문가들을 국회에 보내겠다는 것. 다양한 입법 활동을 유도하고 다방면에서 정부 정책을 견제하라는 게 핵심 임무다. 지역구 의원은 정치 베테랑이지만 전문 지식이 부족하거나 특정 분야를 대표하지 못할 수 있으니 비례대표로 보충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도 47명의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대급 졸속 창당과 막장 공천에 이어 공약 베끼기 행태를 서슴지 않고 있는 지금의 상당수 비례대표 정당의 후보들은 선거에 나설 이유나 자격이 없다.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 반영이라는 첫 번째 취지는 위성정당 등장 이후 벌써 너덜너덜해졌으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과연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해 어떻게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낫게 바꾸겠다는 비전이나 구상을 제시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각 당 비례대표 후보들은 뭐라고 답할 수 있나. 미래한국당, 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 국민의당 등 비례대표 후보만 낸 정당의 정책이나 공약 중 선거 이슈가 된 것은 거의 없다. 총선 후 모(母)당인 민주당과 다시 합체하는 더불어시민당이 두 차례 공약을 만들었다 고쳤다를 반복한 게 유일하게 이슈가 됐다. 나머지는 공약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향후 입법 절차나 정교한 소요 예산 추산은 빠진 채 지지층만 겨냥한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비례대표 후보들은 대부분 정치 새내기다. 그래서 각 당에서 공약을 만드는 데 참여하기에 구조적으로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장관급 대우를 받는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뽑히려고 각자 얼굴을 내밀면서 이 난장(亂場)을 그냥 침묵하며 선거가 끝나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무치(無恥)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필자는 16대 총선부터 지금까지 여섯 번째 총선을 취재하거나 관찰하면서 “역대 최악의 국회” “국민은 1류인데 정치는 4류”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심경이 복잡했다. 그래도 엄연히 정치만의 역할이란 게 있는데, 온갖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저주를 뿜어댈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비례대표 막장을 지켜보며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변명도 어렵게 됐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1대 국회의원 1명이 4년 임기 동안 쓸 세금은 37억7100만 원이라고 한다. 새로 뽑을 47명의 비례대표가 쓸 1772억3700만 원이 벌써부터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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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철수, 마지막 승부 나서려면 안개부터 걷어라[오늘과 내일/이승헌]

    “나중에 말씀드리겠다며 일단은 거절하더라.” 며칠 전 인터뷰차 만났던 김형오 전 미래통합당 공천관리위원장이 공천 뒷이야기를 하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인이 만들어 보냈다는 생강 설탕 절임을 깨물고 있었다. ‘거절’의 기억이 쓴 듯했다. “안철수를 부산에 전략 공천하려고 했다. 문재인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생각이야 나나 안철수나 서로 다를 게 있겠나. 고향(부산) 후배이기도 해서 은밀하게 연락을 넣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취지로 답이 왔다. 서운하지만 뭐 어쩌겠나.” 왜 안철수였을까. 부산 선거 지휘? 김 전 위원장의 답은 그 이상이었다. “총선 끝나면 곧장 대선이다. 대선 후보군이 넓어져야 차기 대선에 대한 기대치도 넓어진다. 결국 안철수도 (당에) 들어와서 경쟁해야 안 되겠나.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당에 대한 기대도 커지는 것이다.” 여야를 떠나 정치권의 눈 밝은 인사들은 벌써부터 4월 15일 이후를 그리고 있다. 아수라장 같은 공천 파동을 겪었지만 어찌 됐든 총선 다음 날부터 2022년 3월을 겨냥한 차기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낙연 전 총리, 황교안 통합당 대표, 이재명 경기지사 등 많은 사람이 거론되지만 향후 행보에 대한 궁금증으로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만만치 않다.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보여준 행보가 그만큼 롤러코스터다. 1월 귀국 후에는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당명만 두 번 중앙선관위에서 퇴짜를 맞는 수모를 겪었다. 국민의당을 다시 만들며 휴대전화 기반의 모바일 정당을 꺼내 들었지만 기성 정당도 어느 정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작은 반전이 벌어졌다. 대구로 내려가 ‘의사 안철수’로 보름을 보냈다. “정치쇼라도 좋다”는 환호가 나왔다. 안철수는 코로나 사투를 벌였던 계명대 동산병원 최연숙 간호부원장을 1번으로 올린 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냈다. 비례만 13석 얻었던 4년 전 국민의당 돌풍은 아니겠지만 ‘폭망 예감’은 벗어날 것이란 말이 나온다. 여기에 안철수계로 분류되는 후보를 통합당을 통해 여럿 냈다. 김삼화(서울 중랑갑), 김수민(충북 청주 청원), 김근식(서울 송파병), 김영환(경기 고양병), 문병호 후보(서울 영등포갑) 등이 그렇다. 안철수 본인은 별말을 안 하지만 다시 대선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몇 가지 변수가 있다. 통합당으로 출마한 안철수계와 국민의당 비례대표가 몇 석을 내느냐도 그중 하나. 더 큰 변수는 7월 통합당 전당대회. 통합당은 보수통합 과정에서 7월 전대를 열기로 시민단체들과 합의했는데, 차기 대선 주자는 출마하지 못하도록 했다. 황 대표 체제가 7월이면 끝나고 보수도 어떻게든 새판이 짜이게 된다. 분명한 건 안철수가 중도실용의 길을 계속 붙잡기는 이전보다 어렵다는 점이다. 4년 전 국민의당으로 38석을 얻었을 때와 ‘조국 사태’를 거친 정치 지형은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그때는 호남 지역구를 싹쓸이했지만 이번엔 일부 측근들이 통합당에 사실상 ‘얹혀’ 지역구 후보로 나섰다. 안철수가 7월 통합당 전대 이후 움직일 것이라는 말이, 김형오 전 위원장이 진즉에 부산 공천을 주겠다고 한 구상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고 본다. 물론 안철수는 한동안 “통합당과는 안 합친다”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하지만 2012년 첫 대선 3개월 전까지 출마 여부를 밝히지 않아 유권자들을 헷갈리게 했던 안철수가 또다시 안개만 피운다면 자신에게 두 번이나 배지를 달아 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총선 후엔 지금보단 분명한 길을 알려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의 불확실성을 거두는 것도 그의 역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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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브리핑을 청와대 춘추관에서 해보라[오늘과 내일/이승헌]

    “좋은 오후네요. 오늘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에 대처하기 위한 백악관 태스크포스(TF)는 긴 회의를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부 역량을 총동원해 미국 내 바이러스 확산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랜드 프린세스 크루즈선 내 감염자에 대한 조사 결과가 방금 나왔습니다. 21명이 양성 반응입니다….” 6일(현지 시간) 오후 미 워싱턴 백악관 기자실. 트럼프 지시로 미 행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총괄하고 있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질병통제예방센터(CDC), 해안경비대 관계자와 함께 연단에 섰다. 트럼프는 물론이고 오바마, 부시 등 전임 대통령이 수시로 대국민 메시지를 내던 그 자리다. 펜스는 3, 4일에도 같은 자리에 섰다. 펜스가 트럼프를 대리해 백악관 기자실에 등장할 때마다 똑 부러지는 대책을 내놓는 건 아니다. 뉴욕 등 대도시 확산 조짐도 있어 트럼프 행정부의 코로나19 대책이 우리보다 더 낫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메시지는 꽤 선명하다. 사망한 확진자 가족에게 위로를 전할 때는 펜스 특유의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까지 더해진다. 4일 브리핑에선 우리보다 10초 짧은 20초 이상 물에 손 씻기 등 안전 수칙을 설명하더니 미국에서도 벌어지는 마스크 품귀 현상을 겨냥해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의료인을 제외하고)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살 필요가 없다(There’s no need for Americans to buy masks)”고 했다. 미 코로나 TF의 브리핑을 접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왜 우리는 코로나 대책이나 메시지를 청와대 춘추관에서 발표하지 않을까.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선 대국민 메시지 내용 못지않게 누가 어디서 어떻게 발신하느냐도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가장 자주 받는 비판은 메시지와 정책의 신뢰 문제일 것이다. 문 대통령이 코로나 사태 조기 종식을 언급한 후 확진자가 폭발한 건 차치하고, 마스크 수급 대책은 5부제를 시행하기도 전에 신뢰를 많이 잃었다. 대책 내용 자체에 문제가 많았던 만큼 청와대 기자실에서 발표했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공무원 조직이 지금처럼 느슨하게 움직이고 국민이 이렇게 정부에 분노했을까 싶다. 청와대 춘추관 2층에 있는 브리핑 연단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무게 있는 공적 메시지 발신 장소다. 연단 뒤엔 ‘대한민국 청와대’라고 적혀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좋거나 나쁜 뉴스를 여기서 발표했다. 문 대통령도 2018년 5월 27일, 전날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여기서 브리핑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선 아직 춘추관 연단에 서지 않았다. 국무회의 등 각종 회의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마스크 대란에 사과하고 대책을 지시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의 마스크 5부제는 정부청사 브리핑룸에서 발표됐다. 대통령이 꼭 춘추관에 나서라는 건 아니다. 펜스처럼 행정부의 2인자인 정세균 총리가 설 수 있고, 필요하면 관계 부처 장관이나 기관장이 나설 수도 있다. 메시지에 무게를 실어 이전보단 공무원 조직을 더 움직이고 국민이 조금 더 정부를 믿을 수 있게 먼지만 쌓인 ‘1호 브리핑룸’을 활용하란 것이다. 다들 코로나 사태가 미증유의 위기라고들 한다. 그래서 여권 일각에선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나서면 총선에서 불리할 수 있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지금은 문 대통령과 공직사회가 진정성 있게 위기에 대처하는 것이 납세자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부터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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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바마가 에볼라를 이겨냈던 3가지 비법[오늘과 내일/이승헌]

    어느 정권이나 재난이나 재앙이 한 번씩은 닥친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를 정권 2년차에 맞았다. 종류는 다르지만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정권의 운명은 천양지차였다. 외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트럼프 전임자인 오바마 대통령은 2014∼2015년에 에볼라바이러스 사태를 겪었다. ‘피어볼라(fear+bola)’라는 말까지 나왔다. 지지율도 곤두박질쳐서 그해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에 내줬다. 사태 초기 우왕좌왕하던 오바마는 하지만 특유의 위기관리 능력으로 에볼라를 극복했고 지지율 60%로 퇴임했다. 에볼라와 우리가 겪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발병 원인과 처방도 다르다. 하지만 국가적 비상사태에 국정 최고 책임자가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서는 오바마의 에볼라 대처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게 적지 않다. 크게 3가지다. 첫째, 정치 경험이 풍부한 프로 행정가에게 파격적으로 대처 권한을 위임했다. 오바마는 에볼라 사태가 터진 지 20여 일 만에 ‘에볼라 차르(총괄조정관)’로 앨 고어 전 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론 클레인을 지명해 대처권을 줬다 ‘레볼루션’이라는 벤처투자회사를 운영하던 그에 대해 워싱턴에선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에볼라에 대처하느냐”며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오바마는 정무적 감각을 갖춘 행정 전문가를 선택했다. 줄리 피셔 조지워싱턴대 공공보건학과 교수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백악관은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무부 등 관련 기관을 조율해 시너지를 낼 정치력이 필요하지 의학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 법무부, 외교부 등 많은 부서가 매달려 있지만 누구 한 명이 책임지고 코로나19 사태 전체를 지휘하지 못하는 우리 현실과 대비된다. 전세기 파견은 외교부, 중국인 입국 통제는 법무부, 방역은 복지부 등으로 찢어져 있어서 행정력의 시너지가 안 나는 상황. 한 여권 관계자는 “청와대가 결정해야 할 사안이 대부분인 만큼 우리도 ‘코로나 전권대사’ 같은 TF 운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둘째, 언론을 통한 유기적인 대국민 커뮤니케이션이 주효했다. 오바마는 에볼라 사태 당시 거의 매주 라디오와 유튜브, 기자회견을 통해 대국민 메시지를 냈다. CNN, 뉴욕타임스 등 오바마에 우호적인 매체도 정부의 거북이 대응을 질타하며 오바마를 닦달하다시피 했던 때다. 오바마는 2017년 1월 퇴임 기자회견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언론이 2014년 에볼라 사태 당시 ‘왜 아직까지 퇴치하지 못하느냐’고 질문할 때마다 나는 백악관 참모들에게 ‘다음 기자회견 전에 (저런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사태를 해결하라’고 독려할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부 언론을 통해 공포와 불안이 부풀려졌다”고 한 것과는 달리 사태 극복을 위한 동력으로 언론을 통한 대국민 소통을 활용했다. 셋째, 과감하게 피해자에게 다가섰다. 오바마의 에볼라 극복 과정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2014년 10월 24일 백악관에서 펼쳐졌다. 에볼라 환자를 돌보다 에볼라에 감염된 니나 팜이라는 베트남계 여성 간호사가 완치되자 그를 백악관 오벌오피스로 초대해 두 팔 벌려 포옹한 것. 백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에볼라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지금은 재난이지만 대통령과 정부의 비상사태 대응 능력을 점검하고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지금처럼 말고 제대로 고쳐서 대응한다면 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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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정권만 빼고 다들 익숙해진 ‘북핵 노딜’[오늘과 내일/이승헌]

    설마 했지만 실제로 그럴 줄은 몰랐다. 4일(현지 시간) 밤 미국 워싱턴 의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 어디에서도 북한이나 한반도는 나오지 않았다. 연두교서는 보통 국내 이슈에 집중하는 데다 특히 11월 대선이 있는 만큼 북핵은 살짝만 언급할 줄 예상했는데, 아예 원고에서 빠진 것이다. 김정은이 지난해 말 당 회의에서 ‘충격적 행동’에 나서겠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2018년, 2019년 연두교서에서 연달아 북핵을 자신의 핵심 외교 치적으로 삼으려 했던 트럼프다. 왜 그랬을까. 8일 미 행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미국의소리(VOA) 대담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고 그 속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북한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진행자) “잘되지도 않는 것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나? 트럼프 자신이 극적으로 부풀려 놓았지만 결과는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제임스 쇼프·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 ―북한도 이렇게 예상했을까.(진행자) “언급이 되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비핵화 대화는 미 대선이 끝나고 새 대통령이 취임한 뒤인 2021년 봄에나 재개되지 않을까 싶다.(스콧 스나이더·미 외교협회 선임연구원) 미 행정부가 돈을 대는 매체에서, 그것도 외교가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사람들의 말이 고스란히 방송됐으니 백악관의 속내는 이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난해 말만 해도 2020년 상반기 중 3차 북-미 정상회담 추진설이 한미 외교가에 나돌던 상황과는 분위기가 거의 180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은 북-미 비핵화 대화 재개 가능성을 더욱 줄이고 있다. 지난해 말 ‘정면돌파전’을 선언하며 핵 개발과 자력갱생을 강조한 김정은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전염병 사태로 당분간 집안 단속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대외 무역의 90%가량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신종 코로나로 교역은커녕 북-중 국경을 폐쇄하기 급급한 상황. 한국은 지난해부터 계속 무시해 온 데다 이번엔 개성 연락사무소까지 잠정 폐쇄했다. 이런 상황이 가장 답답하고 황당한 건 문재인 대통령일 것이다. 이런 기류를 몰랐는지 무시했는지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의 답방을 재요청하고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해 북한 비자를 통한 개별 관광을 추진하려 했다. 여기에 예상치 않았던 글로벌 보건 변수까지 터졌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의 연두교서 이후 올해 북핵 문제에 대한 스탠스를 바꿀지, 그대로 유지할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신종 코로나가 잠잠해지기 전까지는 당장 밝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진정되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북-미 정상의 시그널과 우리의 4월 총선, 이미 시작돼 11월까지 내달릴 미 대선이라는 정치 일정까지 고려한다면 북핵은 당분간 노딜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합리적 관측이다. 문 대통령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북핵 대화의 교착 상태가 뉴 노멀(New Normal)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게 현실이다. 여권 일각에선 총선을 앞두고 어떤 식으로든 비핵화 대화가 재개되기를 바랄 것이다. 10일 새해 들어 처음 열린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도 우리는 미국 측에 대북 개별 관광은 인도주의적 차원인 만큼 다시 한 번 협조를 당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사자들이나 주변 여건이 도저히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만 집착하듯 비핵화 대화를 외치는 건 공허하다. 국제사회에선 이런 청와대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도 있다. 물론 교착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 아는(知止)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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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수통합 논의, 절박함이 너무 없다[오늘과 내일/이승헌]

    “재래시장에서 나물 값 깎을 때도 이것보단 더 열심히 매달린다고 하더라….” 설 연휴 지역구에 다녀온 자유한국당의 한 중진 의원이 보수통합 논의에 대한 동네 민심이라며 전한 말이다. 총선에서 문재인 정권에 맞서려고 보수통합을 한다는데 워낙 뜨뜻미지근해서 어디까지 와 있는지, 합치기는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수통합 논의는 이전의 야권통합 논의에 비해 한두 달은 뒤처져 있다. 그만큼 달아오르지 못하고 있다. 지금 통합 논의와 환경이 가장 유사했던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친노 그룹은 2011년 12월 체육관에서 욕지거리에 가까운 논쟁 끝에 합당 대회를 마치고도 간신히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이후 통합진보당과의 야권 연대까지 무원칙하게 흘러가면서 총선에서 패했지만, 통합 논의 자체는 총선 일정에 맞춰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하지만 보수의 통합 작업은 총선을 79일 앞둔 27일 현재 아직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나온 “설 연휴 전 통합 윤곽 확정될 것”이라는 호언장담이 무색할 지경이다. 한국당과 새로운보수당 간 통합 협의체, 보수진영이 참여하는 혁신통합추진위원회(통추위) 모두 연휴 기간 공식 회의도 갖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벌써부터 김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통추위에선 합당보다는 통합 선대위 체제로 총선을 치르자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새보수당 유승민 의원은 “후보 단일화, 선거 연대도 옵션”이라고 했다. 필자는 보수통합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은 절박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말로는 보수통합을 강조하지만, 통합 아니면 보수가 총선에서 죽을 수 있다는 진정 어린 위기의식 같은 게 없다. 그렇다면 보수통합 논의에는 왜 절박함이 부족할까. 다들 따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통합에 실패하고 총선에서 망하더라도 누구처럼 폐족(廢族)이 되거나 길거리로 나앉는 게 아니라, 원래 자리로 돌아가 각자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 연구실로, 변호사 사무실로, 정 안 되면 갖고 있는 건물로…. 아무것도 안 해도 당분간 먹고살 만큼의 돈도 있다. 한국당, 새보수당은 물론 우리공화당을 포함한 범보수 세력 상당수가 해당된다. 배가 덜 고프다 보니 보수진영은 총선 국면에서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각 통합 주체들이 국민 눈높이에 맞춰 치열하게 토론하고 필요하면 싸우면서 관심을 끌어야 하는데, 정치철학이나 정치공학 이론만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통합 논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보수진영은 이러고도 설 연휴 전 일부 여론조사에서 한국당과 새보수당의 지지율을 합친 것보다 통합보수신당의 지지율이 더 낮게 나온 게 ‘여론 조작’이라고만 주장할 수 있나. 현 시점에서 보수 맏형 격인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리더십도 아쉽다. 통합이 실현되어 총선에서 효과를 본다면 가장 큰 수혜자는 보수진영 차기 대선 주자 1위인 황 대표다. 그렇다면 황 대표는 유승민 의원 집이나 사무실을 몇 번이고 찾아가는 퍼포먼스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 단식 투쟁 때 보여줬던 결기가 필요한 건 정작 지금이다. 보수 일각에선 총선 전에는 통합이 될 수 있으니 시간을 줘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곧 통합을 선언할 수도 있다. 물밑 논의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정치 일정에도 골든타임이란 게 있다. 합치기만 한다고 선거를 치를 수는 없다. 이미 꽤 늦었다. 보수의 ‘웰빙 병’은 고질적이다 못해 이번엔 치명적인 수준이다. 한 번 무너진 한국 보수가 건강한 정권 견제세력으로 재기하는 게 이리도 어렵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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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알아서 하게 놔둡시다, 예?”[오늘과 내일/이승헌]

    위 제목은 영화 ‘신세계’에서 조폭 역의 황정민이 경찰 역의 최민식에게 하는 대사 중 일부다. 경찰이 조폭의 차기 수장 선출 과정에 개입하자 황정민이 뇌물을 주면서 ‘우리 일에서 손떼라’라고 한 것. “그쪽에서 너무 깊이 개입하시는 거예요”라고도 한다. 그러자 최민식은 “우리는 니들한테 바라는 거 별거 없어. 그냥 주제 파악 잘하고 말만 고분고분하게 잘 들으면 돼”라며 거절한다. 검찰이 지난해 4월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에 관여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의원, 민주당 이종걸 의원 등 여야 의원 28명을 2일 무더기 기소한 뒤, 이 영화가 생각난다는 정치인들을 여럿 봤다. 요즘은 청와대, 법무부와 윤석열 검찰총장이 벌이는 싸움에 눈길이 쏠려 있지만 정치권의 진짜 관심은 서울 남부지검의 사상 첫 패스트트랙 기소다. 특히 황 대표와 한국당 의원 17명은 국회법 중 이른바 국회선진화법 조항 위반으로 기소돼 500만 원 이상의 벌금형만으로 5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되고 의원직을 잃게 된다. 재판 결과에 따라 총선 이후는 물론이고 2022년 3월 대선 지형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 보니 야당을 중심으로 “검찰이 정치 지형까지 짜겠다는 것이냐”는 하소연이 들린다. 검찰은 이런 반응이 억울할 것이다. 정치권이 ‘동물 국회 종식’을 외치며 만든 법에 근거한 것이고, 자기네들끼리 치고받다가 고발한 건을 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한국당의 대선 주자와 중진들의 정치적 미래가 검찰의 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필자는 언제부턴가 정치권 내부에서 소화하고 처리해야 할 일을 검찰에 떠넘기다가 결국 검찰의 합법적인 정치 개입을 자초했다고 본다. 검찰 탓할 게 아니다. 선수들끼리 해결해 관중(유권자)의 판단을 구할 일에 걸핏하면 외부 심판을 부르다가 스스로 발목을 잡아버린 것이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후보 간 경선이 대표적이다. 이 전 대통령의 도곡동 땅 실소유주 의혹, 박 전 대통령의 영남대 재단 관련 의혹 등을 놓고 난타전을 벌이더니 경선 도중 고소·고발로 이어졌다. 물론 언젠가는 사법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긴 했다. 도곡동 땅 의혹은 정권이 바뀌어 지금 다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문제는 유권자가 표로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검찰이 야당의 대선 경선에 들어와 휘젓도록 정치권이 판을 깔아줬다는 점이다. 이번 패스트트랙 기소 사건은 더 나아가 이제 여의도가 실질적 정치 실종 상태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토론과 협상의 토양이 아직 부족한 한국 정치 환경에서 여야가 회의 진행과 의사일정을 놓고 충돌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이다. 문제는 이전에는 싸우더라도 여야가 물밑 협상을 벌여 절충점을 찾았는데, 요새는 서로 삿대질만 한다. 그러고는 고소·고발을 해서 ‘정치적 행위’의 영역에 있던 것을 사법적 판단의 영역으로 밀어 넣으며 스스로 정치의 존재 이유를 지워 버리고 있다. 다들 이번 총선이 중요하다고 한다. 차기 대선을 포함해 향후 정치 지형의 가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 총선전에 뛰어들기 전에 여야가 국민 대의기관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을 회복하자고 진심 어린 다짐부터 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정치권을 욕하고 경멸하면서도 뭔 일 있으면 왜 죄다 국회로 몰려가겠는가. 헌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정치는 여전히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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