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석

임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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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임현석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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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6~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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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삶이 호러가 되는 순간

    영화 ‘잠’은 극 초반 설정상 악의를 지닌 인물이 없다. 오가는 길 먼저 말 붙이는 선한 아랫집 이웃, 강아지를 키우며 출산을 준비하는 윗집 밝은 부부가 있을 뿐이다. 이웃끼리 작은 선물을 건넬 땐 호의가 교차한다. (*이 칼럼엔 영화 ‘잠’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과의 관계는 주로 한시적이며, 미세한 균열만으로도 지옥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네 삶 도처에 그러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방아쇠가 있고 이는 우리 자신조차도 언제 어떻게 당겨질지 모른다. 부부나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타인을 온전히 다 알 순 없으며, 화합하려 애쓰는 마음이 진심이라고 해도 잘못해서 상대의 방아쇠를 건드리고 대화가 삐끗하고 수틀릴 수 있다. 악의가 없이도 문제는 벌어진다. 도처에 밟지 말아야 할 지뢰가 많은데, 무엇이 지뢰인지 모르겠을 때 삶은 호러가 된다. 영화 잠은 나를 언제든 광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방아쇠와 지뢰의 존재를 보여준다. 영화 속 방아쇠는 가족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선한 동기다.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광기에 휩싸일 수 있는 나 자신도 공포의 대상이 된다. 만삭 임신부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 부부에게 공포의 대상은 일차적으론 현수의 밤중 무의식이다. 어느 날 수진은 옆에 잠든 남편 현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들어왔어.” 수진은 이날부터 현수가 심상찮다고 느낀다. 급기야 현수가 수면 중 갑자기 일어나서 이상 행동을 벌이는 것을 본다. 현수는 잠에 취한 채로 걸어다니며 냉장고에서 생고기와 날계란을 거칠게 씹어 먹는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하자 수진은 기겁한다. 그제야 지속적인 야간 층간소음에 점잖게 하소연하던 아랫집 이웃 민정(김국희)의 말도 이해가 간다. 현수는 밤중 부부가 기르던 강아지를 냉동고에 집어넣어 죽이기까지 한다. 아이가 태어나자 수진의 불안은 노이로제 수준이 된다. 혹시 남편이 아이를 무심결에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여기서 현수의 무의식에 수진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운명을 보여준다면, 일반적인 공포 영화의 문법을 따르는 셈이다. 그러나 현수는 진심으로 수진을 걱정하고, 치료법을 찾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수진은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과 불안감 속에서도 현수와 생활을 분리하는 대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해법을 찾고자 한다. 부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집 벽에 걸린 가훈대로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일이 없다.’ 수진은 남편 현수가 공포의 대상이지만 피하는 대신 어떻게든 고치려고 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뒤틀리거나 광기로 치달아가기 쉬운 감정이다. 벽에 걸린 가훈을 비출 때마다 수진의 표정 또한 점점 의미심장해진다. 평범한 가훈에 담긴 함의가 문득 섬뜩하게 느껴질 때, 극이 기대 온 공포 감정과 문법이 크게 비틀린다. 영화는 제한된 공간의 디테일을 통해서 인물의 감정선을 보여줄 만큼 촘촘하다. 반면 대조적으로, 서사에선 과감한 생략이 돋보인다. 그리고 생략을 통해 해석의 여지를 크게 열어젖힌다. 철저하게 계산된 열린 결말엔 고개를 끄덕인다. 관객 저마다의 관점과 처지를 다시 환기하게끔 하는 구석도 있다. 다양한 해석으로 열려 있는 결말은 저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과 삶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느껴진다. 각자 믿음만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합리적으로 처신하려면 ‘혼이 실린 구라(거짓말)’라도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우린 아무리 애써도 결국 아무런 진실도 모르는 채로 떠내려가고 마는 것일까. 남편 현수가 미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할 때 타인을 대상화하는 일반적인 용례와 달리, 자기 성찰적인 자조처럼 느껴져서 여운이 길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섬세한 태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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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모순 없는 삶은 없다

    세속을 살아가는 한 누구나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개별자로서의 욕망과 이를 초월한 도덕감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다. 세상을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순응하거나, 삶에 순응하면서도 부정할 수 있다. 좋은 예술은 이를 ‘아이러니’라고 부르며 삶과 동의어로 친다. 인간이 착오를 저지르고 혼란한 마음을 떠안는 건 얼마간 불가피하다. 다만 여기서 갈림길이 발생한다. 모순의 굽어진 줄기를 애써 곧게 펴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른 분별없는 행동을 대의와 선의로 포장하며 기만할 수도 있고, 과거를 그대로 응시하고 후회하고 반성할 지점에서 정확히 그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애잔하고 마음이 쓰이는 건 후자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어느 쪽인가. 현실에서 그는 원폭 개발과 일본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 투하에 일조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은 없다. 추상적으로 반성을 암시했을 뿐 첨예하고도 직접적인 윤리적 질문에 대해선 외면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반면 오펜하이머를 알던 이들은 그가 원폭 개발 과정에서의 자신의 책임을 강하게 의식했다고 회고한다. 그의 생애를 다룬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작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따라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면에 보다 방점을 찍는다. 이러한 영화 연출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1954년 비공식 청문회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이 미국을 뒤흔들 당시 정부는 한때 공산주의자와 어울린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행적을 문제 삼는다.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것도 문제가 된다. 오펜하이머는 소련 스파이 혐의를 받고 안보 인가 등 공직 권한이 박탈될 위기에 처한다. 아내를 비롯해 동료들이 오펜하이머가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청문회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해명할 것을 종용하지만 청문회 내내 그는 무기력할 뿐이다. 함정을 놓으며 옥죄어 오는 질문에도 그는 보호벽을 치지 않는다. 덫으로 걸어가는 일이 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논리에 의지한다. 이 과정에서 청문위원들은 그의 행보를 들여다본다. 이때 그는 공산당원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친동생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 있었고 심지어 당원이기도 했으며 한때 자신도 그 사상에 가까웠다는 점을 회고한다. 교수로서 학내에선 타협적이지 않은 모습도 보이지만, 정부로부터 핵 개발 프로젝트 주도 권한을 부여받자 과학 행정가로서 자유분방한 물리학자들을 능숙하게 리딩했던 점에서 의심의 눈총을 사게 된다. 그가 불륜을 저지르고 윤리에 무감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원자폭탄 개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윤리를 강하게 자각했다는 점이나, 비범한 천재성과 공존한 열등감이라는 감정도 언뜻 모순돼 보인다. 그는 미세한 마음의 작용을 청문위원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하고, 숱하게 허점을 노출하고 만다. 이론물리학자로서 수식과 증명의 세계에서 분투하던 그가 논리의 바깥에서, 설득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모순의 극점으로 치닫는다. 그는 벼랑 끝에서 더할 나위 없이 진실되고 자아는 통합돼 있으며, 바로 그 점이 필연적으로 그에게 반성과 죄의식의 자리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오펜하이머 비공식 청문회와 함께 그와 악연으로 얽힌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미 상무장관 공식 청문회를 교대로 보여준다. 스트로스는 자신의 삶이 무결하다고 믿는 쪽이다. 청문회에서 그동안 자신이 믿은 진실이 순식간에 깨지는 과정을 마주한다. 스트로스 제독 역시 청문회를 거쳐 몰락한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지뢰가 삶에 잠재돼 있고, 그걸 밟고 만다. 모순 없는 삶은 없다. 삶에서의 결함을 종종 후회하고 성찰하는 이와 그러지 않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념화된 정치 언어는 왜 무도한가. 그것은 아이러니로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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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신뢰가 무너진 세상에서의 생존 수칙

    올해 여름 한국 영화 블록버스터 이른바 빅4(밀수, 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같은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자기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재난과 난리통 속에 휩쓸려갈 때 개인은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국가와 공권력, 더 나아가 공동체를 믿을 수 있나? 이 질문이 중요한 건 한국 사회가 공존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지 못하는 가운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회적 리더십은 정치 공학에만 매몰돼 있고, 각자도생 외에 뚜렷한 답이 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뇌리에 남은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구출 내지는 탈출 서사가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달리, 한국식 서사엔 같은 대상에 대해 우리 현실을 반영한 일정한 냉소가 깔려 있다. 이 빅4 영화는 신뢰가 사라진 세상을 다룬다. ‘밀수’가 다루는 공간은 국가 주도 산업 정책과 환경 오염으로 말미암아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공권력이 비루한 악으로 전락한 곳이다. ‘비공식작전’도 국가가 위험에 처한 개인을 정치적 계산에 따라 외면하는 시대상을 배경으로 삼는다. 여기에선 나와 가깝게 부둥킨 이들과의 신뢰가 중요하다. ‘더 문’은 달 탐사 중 우주에서 조난당한 대원을 구하기 위해 시스템이 아니라 전 우주센터장의 소명감에 의지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파트 한 동을 지키려는 중산층 주민들의 악다구니와 회의감으로 어수선하다. 상대적으로 미래 SF적 상상력이 더해진 영화 두 편(더 문, 콘크리트 유토피아)이 공동체의 역할과 의무를 보다 첨예하게 묻는 쪽이다. 영화 속 미래 재난과 절망 속에서 싸우는 인간을 그리며 공동체를 회복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반면 과거를 다룬 영화 두 편(밀수, 비공식작전)은 신뢰가 무너지고 공존을 모색하지 않는 세상에서 개인 단위에서의 구원이 더 부각된다. 동료애를 통해 보람과 위안을 구한다. 밀수와 비공식작전 두 편이 SF에 비해선 소박하고도 유머러스하지만, 들여다보면 냉소는 더 짙다. 빅4 영화 속 SF적 세계관 속에선 적어도 진실이 드러나면 세상이 회복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진실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극을 끌고 간다. 반면 과거를 다룬 두 영화는 공권력이 진실도 손쉽게 은폐할 수 있는 시대를 그린다. 여기에선 개인이 짊어져야 할 부담의 크기가 더 크다. 대체로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을 때 개인 단위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을 때, 우리가 짓는 표정이 냉소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냉소적인 작품은 비공식작전이다. 김성훈 감독의 전작인 ‘터널’이 그랬듯 이 역시 위험에 처한 국민이 등장하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이 그려진다. 레바논에서 우리 외교관이 납치되는 일이 벌어지지만 정부는 부처 간 기 싸움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구출 작전을 벌이지 못한다. 구출 작전에 투신하는 개인들도 처음엔 거창한 대의와는 일견 멀어 보인다. 외무부 중동과에서 5년간 근무한 외교관 민준(하정우)이 납치 외교관을 구하는 일에 자원한 것도 미국 발령이라는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민준을 돕는 현지 택시기사 판수(주지훈)도 철저하게 돈벌이라는 자기 동기에 충실하다. 그들이 배신과 불신을 거쳐 마음을 바꿔 맞손을 잡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지지만, 개개인 단위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쌓일수록 역설적으로 국가 시스템에 대한 냉소는 더욱 깊어진다. 영화는 망가진 시스템 속에서도 자기 윤리에 충실한 개인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고, 자기 일에 몰두하면서 그때그때 만나는 인연에 대해 호의를 품는 것은 값진 일이라고 말한다. 그건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린다. 이상적이진 않은 현실적인 조언. 현실적이지 않지만 이상적인 조언. 지금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 무엇이 더 유효한 것일까. 요즘 한국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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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충성과 의리는 어떻게 다른가

    “먹고살려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거냐?” 영화 ‘밀수’에서 극 초반 엄 선장(최종원)의 푸념은 윤리와 생활 사이에서의 딜레마를 간결히 함축한다. 그 장면이 의미심장한 건 영화가 이 딜레마를 깊게 파고들겠다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여기 생활을 옹호하는 인물이 춘자(김혜수)라면, 공동체성을 더 중시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건 진숙(염정아)이다. 영화는 이 둘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딜레마의 간극을 좁히거나 벌리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칼럼엔 영화 ‘밀수’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가 다루는 배경은 1970년대 가상의 바닷가 촌읍 군천이다. 진숙과 춘자는 해녀로 밥벌이를 하지만, 근처에 화학공장이 들어서고 바다가 오염되자 달리 살길을 모색하다 ‘바닷속 물건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된다’는 브로커 말을 듣고 밀수에 가담한다. 진숙과 춘자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 사이지만 배경은 다르다. 진숙이 촌읍에서 선주 아버지를 둔 먹고살 만한 인물인 반면, 춘자는 열네 살 때부터 식모살이를 했던 억척스러운 인물로 그려진다. 신중한 엄씨 일가와 달리 춘자는 밀수판을 키우자는 쪽이다. 급기야 엄 선장 몰래 금괴까지 밀수하기로 하는데, 밀수품을 바다에서 들어올리다 세관에 적발된다. 결국 밀수판에서 손을 떼려던 엄 선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죽고, 그의 딸 진숙도 징역을 살게 된다. 춘자만 검거를 피해 혼자 빠져나오고, 진숙은 세관에 밀고했다는 소문이 도는 춘자에게 적개심을 키운다. 서울로 올라와 밀수품 판매업을 하던 춘자는 또 다른 거물 밀수꾼 권 상사(조인성)를 도와야 하는 처지가 되고, 결국 큰 밀수판을 벌이기 위해 군천에 내려오게 되면서 다시 진숙을 만난다. 진숙과 춘자가 재회하는 장면, 서로 뺨을 두 대씩 내갈길 때 서사는 팽팽해진다. 진숙은 아버지의 배도 잃고 곤궁한 처지로 내몰린 가운데서도 남겨진 해녀들의 리더로서 꿋꿋하게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반면 춘자는 그런 그에게 큰돈을 만지게끔 해주겠다며 접근한다. 제안에 응하지 않으려던 진숙은 자신을 따르는 동료 해녀가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다시 춘자의 손을 불가피하게 잡는다. 모두가 밀수에 가담하고 범법자인 상황에서도 영화는 선악을 명확하고도 뚜렷하게 분별한다. 이때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르는 핵심축은 의리다. 영화에선 한 식구처럼 보이던 인물이 돌연 배신하며 악인이 된다. 또는 악인인 줄 알았던 인물이 여전히 서로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선의의 옹호자가 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전환을 잘 보여주는 건 권 상사라는 캐릭터다. 그는 월남에서 사람 죽인 걸 훈장처럼 여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귀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부하인 애꾸(정도원)를 살린 인연을 떠올릴 때 돌연 의리감을 가진 캐릭터성이 부각되면서 몰입을 이끌어낸다. 로맨스가 없는 영화에서 권 상사는 인상적인 액션 신을 통해 춘자와 미묘한 뉘앙스를 남기며, 악인임에도 동정할 여지를 만든다. 춘자를 비롯해 우직한 세관 계장(김종수)이나 해녀들을 돕는 장도리(박정민)도 의리를 축으로 선과 악을 오가는 복잡한 캐릭터들이다. 영화는 세상이 모두를 얼마씩은 악인으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애초에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한 것도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명백한 악행에 대해 사법적, 도덕적 판단과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영화는 누구나 나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적 실천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실천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한 감정적, 정서적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납득 가능해진다. 영화는 다방에서 일하는 옥분(고민시)을 비롯한 어촌 사람들의 우정과 의리를 이해에 기반한 연대처럼 다룬다. 그리고 이때의 결속은 일시적인 반목을 뛰어넘는다. 이들의 우정과 의리는 영화 속 조폭들의 충성과는 대조적이다. 상하 관계에서 비롯하는 충성은 윤리적 감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뿐더러 책임감도 결여돼 있다. 그들은 공감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큰 빈 틈을 남긴다. 언제나 큰 힘은 우정에서 나온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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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을 바꾸는 선량한 마음 [무비줌인/임현석]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물, 불, 흙, 공기 등 4원소가 서로 모여 살아가는 도시(엘리멘트 시티)가 배경이다. 사회에서 배척받는 불 원소 소속 여성 ‘엠버’와 도시 주류인 물 원소 소속 남성 ‘웨이드’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이 칼럼에는 영화 ‘엘리멘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는 서로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물과 불 원소가 서로 화합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다룬다. 엠버의 부모는 불 원소만 모여 살던 파이어랜드를 떠나온 이민자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속성으로 말미암아 엘리멘트 시티에서 배척받아 온 것으로 묘사된다. 엠버 가족은 불 원소가 모여 사는 도시 내 커뮤니티에서 작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오랜 세월 신산한 삶을 버텨낸다. 엠버 가족에겐 가게는 삶의 근간이자 자부심이다. 그러나 다른 주류 원소들 눈엔 무턱대고 세운 비인가 건물에 불과하다. 영화는 물 중심 사회에서 불 원소가 받는 은근한 차별을 비춘다. 엠버 가족은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의 삶과 사랑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한국계 이민자의 삶을 다룬 영화 ‘미나리’와 배경과 성향이 다른 두 집안과 자녀들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다룬 ‘로미오와 줄리엣’ 내지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섞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엘리멘탈은 익숙한 구조를 차용하지만,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독창적이다. 연출과 작화 면에선 원소별로 특징을 잡아채는 방식도 그렇거니와 이야기 면에선 차별받는 소수자의 내면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배경과 성향이 다른 집안을 그리는 영화들은 선한 자녀와 대별되는 가문 간의 극한 대립을 통해 극을 끌고 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영화는 이러한 전형성에선 벗어난다. 엘리멘탈에서 웨이드의 가족은 엠버를 극진히 환대한다. 엠버의 가족은 웨이드에 대한 적개감을 보이지만 이는 극 안에서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돼 있다. 웨이드에 대한 반대 감정은 증오나 혐오 감정에 기반한다기보다는, 오랜 차별 속에서 익힌 엠버 부모의 생존 감각 내지는 주류 사회에서 상처받을 자녀를 우려하는 마음처럼 보인다. 적개감은 견고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로 가족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인 셈이다. 영화의 핵심적인 갈등은 가문 간이 아니라, 엠버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엠버는 타국에서 억척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일궈낸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강하게 내비치며, 가게를 물려받는 것으로 가족이 바라는 삶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만의 창의성을 인식하며, 불 원소 커뮤니티를 벗어나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에 따라 자아를 실현하려는 마음도 있다. 두 감정은 엠버의 마음속에서 충돌한다. 그리고 내면에서의 혼란은 극의 막바지까지 이어진다. 영화 속 세계관 설정은 한국계 이민자 2세대인 영화감독 피터 손 개인의 경험이 반영돼 있다. 손 감독도 196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현지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림에 대한 재능을 실현하고 싶던 손 감독 또한 가게를 물려받길 원하는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다고. 그는 이 과정에서 이민 2세대로서 한 사회 안에서 각자의 배경과 성향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서로 이해하고 융화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민자 자녀들이 마주하는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동시에 이야기가 보편성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한 신중함과 섬세함이 영화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엘리멘탈에선 등장 캐릭터 누구 하나도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데, 대립하는 양쪽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사회에 적대할 만한 존재를 정하고,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만으로 좋은 삶이 저절로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차별도 직시하면서 동시에 개인 차원에서의 작은 실천 또한 중요하다고 소박하게 다룬다. 이는 구조의 문제를 너무 손쉽게 개인화하고, 미시적으로 처리했다는 비판을 들을 지점도 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선량한 태도가 세상을 바꾼다는 메시지에 무방비로 턱없이 공감하고 싶어진다. 우리 안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키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와닿아서가 아닐지.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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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히어로를 떠나보내는 방법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여러모로 1980년대적이다. 당시는 미국 영화계가 블록버스터 ‘죠스’와 스타워즈 오리지널 시리즈의 대성공으로 야심만만했고, 모험과 액션의 스케일을 전례없이 키우던 시기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네 편 연출을 연달아 맡은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열광했던 첩보영화 ‘007’ 시리즈를 참고하면서도,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를 007보다 더 가혹한 환경으로 밀어넣는다. 여기엔 큰 스케일의 독특한 퍼즐을 펼쳐 놓고 수습할 수 있다는 연출·제작 자신감이 녹아들어 있다. 1∼3편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제임스 본드와 같은 첨단 무기도 없고, 적을 만나면 대체로 도망가야 하는 처지로 그려진다. 게다가 유적 속엔 바위가 굴러오는 부비트랩까지 깔려 있고, 맨주먹 액션도 꼭 달리는 차 위나 기차 위에서 한다. 장애물을 통한 제약이 복잡하고 정교할수록 주인공 존스의 창의적인 액션과 기지, 유머가 빛난다. 1980년대적이라는 건, 한편으론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초기 시리즈(1∼3편)는 비(非)서구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여과 없이 노출한다. 유물의 가치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인디아나 존스 자신이라는 식의 표현이나, 유물을 해당국의 허락 없이 가져오겠다는 발상부터가 거칠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이는 다섯 번째 작품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은 전작의 영광과 흠을 모두 의식하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연출을 맡은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인디아나 존스의 강렬한 인상을 이 시점에 복원하면서도, 기존 존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인디아나 존스의 매력과 흠결은 분리가 가능한가? 더욱이나 이 과제의 난도를 높이는 배경도 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할리우드에서 최근에 그러하듯 기존 시리즈에서 주연 배우를 바꾸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이른바 ‘리부트’를 통해 재해석하는 길도 막혀 있다는 점이다. 시리즈 첫 편 레이더스(1981년)부터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해리슨 포드를 떠나서 존스를 말할 수 없어서다. 영화 제작사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후속작을 마치 007처럼 리버 피닉스, 샤이아 러버프 같은 배우에게 맡길 것처럼 보였으나,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도 노인이 된 포드가 존스 역을 맡는다. 이번 영화가 어떻게든 기존 인디아나 존스의 유산을 쥔 채로,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캐릭터가 친구의 딸이자 대녀인 헬레나 쇼(피비 월러브리지)다. 쇼는 아버지가 평생을 연구한 유물 ‘안티키테라’를 찾는 인물로 그려진다. 시간 여행을 갈 수 있는 이 유물을 찾아 나치 출신 인사들도 뒤쫓고 있다는 설정이다. 쇼는 영화 초반 유물의 가치보다는 돈을 더 중요시하고, 이성 관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또 다른 버전의 인디아나 존스처럼 느껴진다. 둘 다 아버지가 고고학자라는 점이 같고, 인디아나 존스 역시 시리즈 내내 독특한 이성관을 암시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존스는 비록 유물을 팔 생각은 안 했지만, 존스 역시 유물을 찾는 모험의 시작은 모험심이라는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했다. 쇼의 말에도 이러한 관점이 들어가 있다. 쇼는 인디아나 존스에게 모험심에 사로잡힌 도굴꾼이라고 일갈한다. 시리즈에 내려진 비판을 쇼를 통해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존스에 대한 한계를 억지로 지워내지 않고 그대로 영화 안에 남긴다. 그것이 흠임을 알려주면서. 노인이 된 존스는 쇼의 물음에 간결하게 대답한다. 그건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고. 42년에 이르는 여정 속에서 존스가 말하는 의미란 쇼의 비판을 상쇄한다기보다는 각각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진다. 이번 영화 속 존스는 한평생 과학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지만, 시간의 틈이라는 오컬트 현상에 대해선 “그동안 봐온 건 있다”라며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역시 자신의 신념과는 상충되지만, 그대로 인정한다. 모순에 대해서 둘 다 맞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노년이란 그런 것일까. 영화는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 늙어간 이들에 대한 예우가 담긴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곧 삶에 대한 경의이기도 하다. 긴 여정을 마친 이들이여, 부디 아늑하고 평온하길.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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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그래도 축제는 계속돼야 한다

    예술이 쉬울 리 없다. 영감이 오길 기다려야지, 작업물에 몰두해야지, 필요한 경우 정부나 지자체 예술가 지원 사업에 서류를 넣을지 고민도 해야 한다. 사업기획·지원서 및 증빙 서류 처리로 머리를 싸매는 것도 적잖은 예술가들의 중요 일과다. 사실 예술 그 자체만큼이나 지원 사업을 비롯한 예술가의 삶을 둘러싼 조건과 환경 속에서 예술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이 자주 돌출된다. 영화 ‘익스트림 페스티벌’은 지자체 문화재단 사업과 축제 수의계약을 둘러싼 딜레마를 다룬다. 예술과 제도의 민낯을 경쾌한 코미디 톤으로 풀어낸다. 행사·축제 기획사 ‘질투는 나의 힘’ 대표 혜수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를 기리기 위해 망진군청이 주최하는 지역 축제 ‘정조문화제’를 준비하던 중, 축제 하루 전 행사 타이틀과 콘셉트가 ‘연산군문화제’로 갑작스레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망진군수가 다른 역대 조선 왕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정조 대신 폭군 연산이 지자체 홍보엔 더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군수는 수도권과 가깝다는 걸 부각하려고 연산군이 한양에서 이 가상의 지자체를 자주 들렀다는 가짜 스토리텔링까지 덧입힌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행사는 점점 당초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꼬인다. 축제 클라이막스였던 정조 연극은 돌연 ‘갑자사화의 형식을 빌린 팬데믹 종식 선언’으로 바뀐다. 연극을 맡기로 한 지역 극단은 갑작스럽고도 무리한 콘셉트 변경에 학을 떼더니, 마침 망진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에서 탈락했다는 문자를 받자 아예 축제 보이콧을 선언한다. 게다가 혜수의 남자친구이자 대행사 이사 상민이 섭외한 초청 가수는 오지 않는다. 예전에 불미스러운 일로 퇴사한 극작가 직원 래오가 스태프 업무로 불려오는데, 툴툴대다가 일을 망친다. 여기에 망진군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없는 지역 알바생 은채는 인턴을 거쳐 정직원이 되려고 의욕과다 상태다. 군청에서 다음 축제 기획 사업까지 따내야 하는 혜수는 군수 눈치를 보면서 중간에서 난장판을 조율해야 한다. 어떻게든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만 한다. 영화에선 대행사 대표는 대표대로, 스태프와 연극 배우들은 또 그들대로 개인 해법을 찾는 사람들로 설정돼 있다. 축제 자체의 본질은 차라리 부차적이고, 자기 살길을 모색하는 과정만이 담긴다. 지역 축제와 지역 극단 예술 모두 공동체 감각을 기초로 둬야 한다는 명제에서 아득히 멀어진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당장은 자기 삶을 도모하는 것 외엔 다른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추구하는 지향점과 비루한 삶의 격차를 좁힐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가 느끼는 건 애환이다. 자기 목표를 향해 의심 없이 꿋꿋하게 진군하는 군수와 상민에겐 애환이 없다. 예술과 삶의 격차를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건 대행사 전 직원이자 극작가로서 예술을 지향하는 래오다. 지역 극단을 향해 결국 돈 때문에 이러는 거냐고 냉소하지만, 그 역시 혜수의 표현대로라면 직장인으로선 무능하고, 예술가로선 불성실하다는 혐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얽히고설킨 예술가의 딜레마다. 이쯤에선 영화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면서,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만의 문제의식과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점차 초라해지고, 또 해법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영화는 무대를 만들고 어떤 배역이든 조금이라도 의미를 찾아내는 지역 극단 대표의 모습을 비춘다. 저마다의 개인 해법과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은 막막하고 안쓰럽지만, 그래도 삶이 계속돼야 한다는 것일까. 축제가 계속돼야 하듯 말이다. 영화 초반은 블랙코미디에 가깝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여기 나오는 저마다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뾰족하던 톤은 점차 둥글어진다. 이는 예술이 삶을 이해해 가는 과정처럼 느껴지지만, 유머가 무뎌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해는 된다. 영화가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암시하는 만큼,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조롱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겼을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농담을 던진다. 삶은 계속되고, 그게 아무리 엉망진창이어도 유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 점일 것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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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이제는 둘리가 밉다는 사람들에게

    1980년대 초 군사독재 시절만 하더라도 만화에서 아이가 어른에게 반말하거나 말대꾸하는 장면을 넣을 수 없었다. 만화 출판 전에 검열을 거쳐야 하는 시기, ‘아기공룡 둘리’ 원작자 김수정 화백은 검열을 피하고자 아이 대신 동물을 의인화하기로 마음먹고, 내친김에 당시엔 잘 쓰이지 않던 공룡 캐릭터를 내세웠다.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척하지만, 항상 머리에 혹을 달고 혓바닥을 내밀면서 저항의 기운을 뿜어내는 공룡 캐릭터가 1983년 4월 만화 월간지 ‘보물섬’에 등장한다. 검열을 피한다고 피했는데도, 아이들 버릇을 망친다는 이유로 아기공룡 둘리는 연재 당시 학부모·시민단체로부터 불량 만화로 꼽히곤 했다. 요즘 들어선 둘리를 그저 대가리와 몸뚱이가 둥글둥글 친근하기만 한 봉제인형 공룡 캐릭터로 아는 경우도 많지만, TV 및 극장판 애니메이션 속 둘리의 진짜 매력은 바로 이 불온성에 있다. 둘리 탄생 40주년을 맞아 개선된 화질로 재개봉한 둘리 시리즈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에서 둘리의 까칠한 매력이 되살아난다. 남극 빙하를 타고 서울 도봉구 우이천으로 떠내려 온 공룡 둘리는 쌍문동 중산층 고길동 집에서 더부살이한다. 이 과정에서 둘리는 온갖 엉뚱한 행동으로 말썽을 일으키고, 고길동과는 앙숙처럼 지낸다. 오늘날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고길동을 말썽꾸러기 객식구를 받아준 성인군자로, 둘리와 친구들을 민폐를 끼치는 인성 파탄자처럼 해석하는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퍼져 있다. ‘어디 초능력 맛 좀 볼 테야’라는 둘리의 태도는 지금 보면 선 넘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누리꾼들은 영화 ‘부당거래’ 속 명대사(“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를 패러디해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알아요’는 말로 둘리 쪽을 야유한다. 그러나 이건 둘리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재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면 당시의 시대상과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여기서 고길동은 어린이를 자주 손찌검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린이에 대한 물리적 폭력이 폭넓게 또 긍정적으로 용인되던 시절, 때리는 어른을 향해 만화는 둘리의 입을 빌려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만화는 어린이를 지지하는 내용으로, 그 시기로선 매우 드물게 폭력과 훈육의 경계를 따지고 든 것이다. 이는 둘리가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 사랑받고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극장판 애니메이션 속 둘리는 낚싯대를 회초리처럼 휘두르는 고길동을 향해 “어린이를 때렸으니 큰 병에 걸려 죽을 거예요”라고 저주한다. 그리고 “아저씨 죽으면 이 집은 내 것”이라고 밉살맞게 굴었다가 더 맞고 집 밖으로 쫓겨난다. 둘리는 담벼락에 서서 아저씨는 농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애니메이션은 이 상황을 일종의 유머극처럼 그리지만, 여기에도 뼈가 있어서 뾰로통하고 다정하지 않은 그 시절 어른들을 야유하는 뉘앙스가 있다. 어린이를 지지하는 콘텐츠가 많지 않던 시기엔 앞선 대사들이 다소 과격해 보일지라도, 분명 어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을 다친 이들을 위로하고 이해해주는 기능이 있었을 것이다. 둘리 만화가 연재되던 시기 어린이 독자들은 어떻게 하면 둘리가 고길동을 괴롭힐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담은 우편을 김 화백에게 보내왔다고 한다. 어디 자기 마음 토로할 곳 없는 어린이들이 그 시절 특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어른들을 골려주는 상상을 하면서 둘리를 봤다는 의미다. 그런 시대상을 곱씹으면, 둘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부러 더 과격하게 나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둘리는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공감대가 더 컸다. 둘리와 친구들은 결핍을 품고 있는 어린이들을 상징한다. 고아이거나, 자신이 몸담은 조직에서 쫓겨났거나, 어딘지 모르는 곳에 불시착해 버린 아이들이다. 이들은 주관이 뚜렷하고 고길동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기준을 의심하고 폭력에 민감하다. 동시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일엔 또 진심이다. 집안일을 돕고, 서커스에서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모두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반항과 순종하려는 마음 사이를 오가다가, 나쁘고 착하길 반복하다가 문득 어른이 될 것이다. 지금 보니 고길동도 그렇거니와, 그 시절 모두가 애잔하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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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농담과 냉소 사이

    기자 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사수는 엉망진창 내 기사를 뜯어고치며 글쓰기 원칙을 상기시켜 주곤 했다. 그중엔 되도록 동어 반복을 피하라는 것도 있었다. 경제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지적으로 느슨해서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표현을 쓰다 보면 관점이 강조되고, 한쪽 입장으로 비탈지게 빨려 들어가니 조심하라는 경고도 함께였다. 불가피한 되풀이도 있지 않나? 그때 나는 항변하고 싶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세상 모든 원칙이 그러하듯 절대성을 지닌 명령이라서가 아니라, 함의가 더 와닿는다. 동어 반복은 무신경하고 섬세하지 못한 자들의 방식이라는 점 말이다. 제목에서부터 같은 말이 두 번 쓰인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말바말)는 바로 이 나태한 동어 반복의 논리를 파고든다. ‘말바말’이라는 표현 앞뒤로는 대체로 부주의하고 게으른 문장들이 따라붙기 십상이다. 영화는 상투적 관점과 표현 속에서 뒤틀린 신념 구조가 어떻게 공고화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10분 내외의 짧은 여섯 편 단편으로 짜인 옴니버스 구성이다. 각각 다른 감독들이 연출을 맡았는데 각 작품마다 노사, 젠더, 지역, 세대 갈등이라는 우리 사회의 주요 어젠다를 끌고 들어온다. 대기업 관리자와 하청업체 대표가 직원을 어떻게 길들여 왔는지 대화하다가 서로 냉소(프롤로그)하고, 헤어지는 커플이 함께 키우던 고양이를 어떻게 할지 무신경하게 대화하며 동물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하리보)을 다룬다. 애견용품업체가 남성 혐오 단어로 지목된 ‘허버허버’와 비슷한 ‘허버버법’이라는 문구를 마케팅에 활용해 사과문을 작성(진정성 실전편)하고, 환경을 마구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프러포즈(손에 손잡고)하는 에피소드가 담겼다.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대화(새로운 마음)를 통해 은근한 성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조명한다. 각 에피소드마다 다소 얼마씩 무신경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동어 반복의 주체가 되며,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폭력적이다. 영화가 주장이 담긴 사회 이슈임에도 ‘비분강개’가 아니라, 농담이라는 형식을 끌고 온다는 점 역시 인상적이다. 첨예한 갈등 이슈를 블랙코미디 형태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담론의 영역이나 진영 논리로만 다루지 않고 유머 속에서 폭넓게 문제의식을 펼쳐놓는다. 그동안 기득권과 이에 핍박받는 이들의 대결 서사를 자주 봐왔으나, 이는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의 본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득권 적의 소멸이라는 해법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다 보면, 어떤 사회가 더 바람직한지 묻는 진짜 어려움을 외면하기 십상이다. 진영적 거대 담론에 기여하는 서사만을 의미 있게 여기는 과정에서 기득권과 이에 대한 저항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는 일상의 폭력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외면하는 모습도 우린 자주 봐왔다. 영화는 ‘을’들 안에서도 저마다의 위계가 발생하며, 소속이나 집단 정체성과 무관하게 모든 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자세가 없으면 을들도 같은 을이나 병을 향한 무비판적인 폭력에 가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섯 편 중 한 편인 ‘당신이 사는 곳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가 이 문제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작품이다. 을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갑 정체성으로 뒤바뀔 때, 손쉽게 차별에 동참하는 모습을 비추면서 자신의 처지로부터 공감 능력을 확장하지 못하는 우리 시민 사회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을에 대한 구원은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만으론 충분치 않으며, 실은 공감 능력의 결여가 핵심 문제임을 드러낸다. 바람직한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없는 담론은 타인을 품지 못하는 개개인의 권익 보호에 그치며 공허해진다. 소비자 주의를 정면에서 풍자한 ‘진정성 실전편’ 역시 시민 없는 진정성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영화가 농담과 냉소를 위태롭게 오가는 가운데 희망도 비관도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처지가 남겨진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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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마리오는 복도 많지

    동명의 게임을 영화화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평이 꽤나 극단으로 갈리는 작품이다. 대표적인 해외 비평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에서 전문가 지수가 59%에 불과하다. 다수 국내외 비평가들은 단순한 전개와 빈약한 스토리를 흠으로 봤다. 원작 게임 시리즈를 오마주하려는 의도가 영화에 꼭 필요한 스토리 구성보다 앞서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인공 마리오가 거대 고릴라 동키콩과 철근 구조물 위에서 결투하는 건 별다른 이유가 없다. 1981년 게임 ‘동키콩’에서 훗날 마리오로 이름 붙여질 주인공 점프맨과 악당 콩의 대결을 오마주한 것이다. 주인공 마리오가 악당 쿠파를 물리치기 위해 동료를 모으는 과정도 그저 다행스러운 우연의 연속이다. 안 그래도 마침 쿠파와 싸우려던 참이었던 피치 공주와 버섯 왕국이 마리오 편에 선다. 영화 부제를 짓는다면 ‘마리오는 복도 많지’라고 지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관객들이 이러한 설정 허점과 서사의 빈틈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다. 로튼 토마토 관람객 지수는 96%에 달한다. 혹평에도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최고 수익을 올리며 흥행 중이다. 게임 원작 팬은 다양한 오마주 요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원작 게임 팬이 아니더라도 이미 여러 다른 게임의 형식과 문법을 경험한 어린 관객들은 장애물과 제약을 딛고 목표에 도달하려는 게임 관점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동안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게임이라는 마이너한 장르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 관객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어려운 설정을 덜어내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세계관만을 취하곤 했다. 스크린 관객들도 게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영화적 해석을 덧입혀 전압을 변환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변환 과정에서 해석이 과하거나 미흡할 경우 졸작이 만들어지곤 했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1993년작 실사판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그런 작품이었다. 악당 쿠파가 거북이 괴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설정으로 바꿨는데 원작 팬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주인공이 막바지에서야 갑자기 빨간 옷을 입는 설정엔 무리수라는 평가가 따랐다. 돌연한 전개가 설득력만 떨어뜨렸다. 2023년작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게임 속 스토리와 세계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한다. 원작 세계관을 크게 비틀거나 가공하지 않는다. 영화 문법을 따르기보다는 원작 마리오 게임의 특징인 직관성을 부각한다. 원작 슈퍼 마리오는 벽돌을 밟고 뛰고 깃발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는 것을 목표로 한 직관적인 게임이다. 구조물 배치를 파악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스테이지를 격파한다. 스토리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이다. 악당을 물리치기 위한 모험이라는 원작 게임의 단순한 스토리와 단선적 진행이 고스란히 영화의 특징으로 반영된다. 이젠 과감히 영화적 틀에 맞지 않는 게임 원작 요소를 관객에게 ‘그냥 받아들여라’고 할 정도로 게임의 장르적 문법이 오늘날 보편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임이란 사전 합의된 규칙 안에서 장애물을 돌파하는 과정에서의 창의성과 효율성만을 따진다. 왜 그런 세계인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이해한다. 게임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유튜브 세대는 게임적 직관성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애초에 제작자도 직관성을 영화의 특징으로 여긴다. 영화 제작에 참여한 ‘슈퍼 마리오의 아버지’ 게임 개발자 미야모토 시게루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대사를 많이 줄였다”고 했다. 주인공의 배경 설정보다 주인공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능력을 중시하고 도달해야 할 목표까지 장애물을 어떻게 배치하는지를 좀 더 고심하는 게임 개발자적 접근법에 더 가까워 보인다. 친숙한 우리 편 마리오 형제를 기반으로 한 지식재산권(IP) 팬덤 비즈니스 구조 위에서 별다른 설명 없이 직진할 수 있는 시대, 영화가 게임을 해석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 게임의 논리가 영화 문법을 압도한다. 내가 속한 팬덤이 장애물을 어떻게 돌파해서 목표에 도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개연성은 덜 중시된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아졌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팬덤과 게임 논리 아래서 스토리의 세부를 따지는 건 머쓱하게 여겨진다. 온 세상이 점점 게임 닮아가고, 마리오는 사랑받는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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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개연성 없는 전개, 설득력 있는 액션

    앞서 세 편의 ‘존 윅’ 시리즈 영화에서 주인공 킬러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299명을 죽였다. 최신작인 ‘존 윅 4’에선? 140명이다. 이번 작 상영 시간 169분 동안 1분 20초에 한 명씩 죽여야지 나올 수 있는 숫자다. 존 윅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나? 시작은 복수 감정이었다. 77명을 죽인 1편에서 존 윅은 자신이 키우던 개를 죽인 자들을 쫓는다. 영화 속 복수 동기치곤 일반적이지 않은 편이다. 글로 쓰인 시놉시스상 복수 동기만 보면 존 윅 시리즈는 ‘람보’ 같은 먼치킨(Munchkin·극단적으로 강한 인물) 액션 장르물이 아니라 ‘못 말리는 람보’ 같은 코믹 패러디식 유머로 일관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악당조차도 개 때문에 이러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애시당초 그럴싸한 명분과 동기로 차근차근 스토리를 쌓아서 승부하는 영화는 아니었고, 한없이 멋을 낸 중년 킬러의 액션 활극만이 볼거리였다. 후속작인 2, 3편에서 매력적인 킬러 세계관을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존 윅 시리즈는 1편과 마찬가지로 개연성 없이 펼쳐지는 무법자의 대학살 복수극 범주를 벗어나진 않는다. 보기에 따라선 빈약한 스토리와 개연성 없는 전개가 흠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동안의 킬러 세계관이 집대성되고 마무리되는 4편에 이르러선 급작스러운 전개를 흠으로 보는 시각이 무색해진다. 시리즈가 지향하는 바가 보다 명확해져서다. 모든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무엇이 아름답고 좋은 것인지 웅변하는데, 존 윅 시리즈가 옹호하려는 것은 극단적인 수준의 액션 형식미다. 이번 작품은 더욱이나 액션 미학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과 장르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무술 액션의 전통을 정확히 이해하고 관객에게 장르의 미학을 설파하고자 한다. 이번 영화에선 오사카와 베를린, 파리를 오가는 동안 총은 물론이고 칼과 활, 쿵후가 등장한다. 존 윅 시리즈는 영화사 속 액션 미학에 대한 존중감을 내비쳐 왔는데, 4편에 이르러선 동서양의 주요 액션 장르를 녹여내려는 시도까지 성큼 나아간다. 대표적으로 일본 사무라이 갑주가 놓인 호텔 내 전시장에서 존 윅이 쌍절곤을 들고 총 든 상대들을 쓰러뜨리는 액션 장면이 그렇다. 클래식 액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액션 미학에 대한 높은 이해 수준은 시각장애인 킬러 캐릭터 케인(전쯔단)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시각장애인 무술 고수는 아시아권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다. 케인의 무술은 일본 사무라이 영화 ‘자토이치’나 홍콩 무협 영화 ‘동사서독’ 속 맹무살수를 떠올리게끔 한다. 아시아권 영화 속 무술과 감정, 캐릭터성을 이해하고 영화 속에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존 윅 4는 케인을 할리우드 영화 속 전형적인 유색인종 악인 캐릭터로 소모하지 않는다. 케인은 온갖 무술에 능통한 달인으로서 존 윅에게 밀리지 않는 실력과 인격적 합리성을 갖춘 인물로 묘사된다.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이지만 다층적으로 그려낸다. 이 지점에서 전쯔단이라는 액션 스타에 대한 묵직한 존중까지도 느껴진다. 존 윅 시리즈는 세상 온갖 액션 영화에 대한 헌사를 통해 미학적 완성을 지향하는 장인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액션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려고 영상을 현란하게 분절하는 할리우드식 눈속임은 없다시피 하다. 롱테이크로 긴 호흡으로 액션을 담아낸다. 주인공과 악당이 합을 겨루는 장면들은 마치 무기와 무술을 활용한 무용을 보는 것만 같다. 그걸 보다 보면 무술이 서사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별개의 예술처럼 다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존 윅 4는 액션 장르에 대한 존중감을 관객에게도 발신한다. 그 장르적 자신감을 마주하다 보면 영화를 보는 동안 개연성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장인이 한 땀 한 땀 다듬은 액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 우물을 판 장인의 눈빛은 구구한 설명 없이도 설득력을 지니는 법이다. 복수에 매진하던 존 윅이 이번 작에선 자유를 갈망하며 국제적 연합조직 최고회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고, 시리즈는 막바지를 향해 간다. 복수에서 자유로 테마를 절묘하게 틀어간 덕분에 스토리도 보다 깊이를 얻었다. 한 가지를 대하는 태도가 곧 만 가지를 대하는 태도라더니. 하나를 깊이 파다가 여러 장점에 도달한 걸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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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운지]이갑수 작가 두 번째 소설집, SF 세계관 속 블랙 유머 담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출신 이갑수 작가(40)가 쓴 ‘외계 문학 걸작선’은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작가는 첫 소설집 ‘편협의 완성’(2018), 장편소설 ‘킬러스타그램’(2021)을 통해 위트와 냉소와 독특하게 결합된 인간애를 표현해낸 바 있다. 아홉 편의 소설이 수록된 소설집에서 작가는 물리적으로 한층 더 확장된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번 신간도 첫 소설집 ‘편협의 완성’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사실과 물리학 이론, 각종 수학 공식이 다수 담겨 있다. 이와 같은 과학적 세계관 설정에선 현상의 기원과 유래를 탐구하는 시선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시선엔 그 특유의 블랙 유머가 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아홉 편 소설 모두 주제는 인간애로 수렴된다.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이전 작품 속 캐릭터와 세계관을 연결시킨다. 이는 소설 전반에 흐르는 특유의 유머 톤과도 맞물려 재미 요소를 끌어 올린다. 한편 작가는 서울 광진구 ‘서점로티’를 운영하는 서점 주인이기도 하다. 해당 서점은 소설가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소설 작법 강의를 진행한다.임현석 기자 lhs@donga.com}

    • 20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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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어 조던’ 게임의 법칙을 바꾼 그 순간[무비줌인]

    영화 ‘에어’는 1984년 스포츠용품 회사 나이키가 당시 신인 프로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과 농구화 전속 계약을 맺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까지 들으면 농구 스포츠 드라마일 것 같은데, 아니다. 배 나온 중년 아저씨들이 회사의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초과근무를 하는 비즈니스 드라마다. 스펙터클은 없다. 영화는 나이키 직원들이 총 대신 농구화를 들고, 좀비 대신 아디다스를 상대하는 과정을 다룬다. 결과도 누구나 다 아는 대로다. 나이키는 1980년대 초반 농구화 시장에서 경쟁사인 아디다스와 컨버스에 밀린 3위 업체였지만 마이클 조던과 계약을 맺은 뒤 농구화 라인 ‘에어 조던’을 선보이며 단숨에 시장 선두로 도약한다. 스토리는 뻔하고 장면도 단조로운데, 푹 빠져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캐릭터가 잘 구축됐기 때문이다. 관례와 싸우는 혁신가 캐릭터들이 나오고 그들 편에 서서 응원하게끔 된다. 이 중에서도 핵심 인물은 마이클 조던과의 계약 체결 과정에서 나이키의 광고 모델 스카우트 역할을 한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다. 비즈니스의 운명을 뒤흔들 결정적인 통찰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영화는 마이클 조던의 대학 무대 버저비터 장면을 비디오로 반복해서 돌려 보는 소니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소니는 최고 선수를 모델로 섭외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회사 분위기에 냉소하면서, 누가 최고인지 알기 위해 농구 광팬에게 말을 걸고 농구 잡지를 빼먹지 않고 읽는 인물이다. 소니는 아직 프로 무대를 밟지 않은 마이클 조던의 가치와 잠재력을 알아보고 회사 측에 보다 과감하게 베팅할 것을 요구한다. 소니는 마케팅 예산을 나눠 선수 여러 명을 모델로 두는 스포츠용품 회사들의 관행을 깨고 예산을 집중해서라도 걸출한 한 명을 발탁해야 한다고 나이키 최고경영자(CEO) 필 나이트(벤 애플렉)를 설득해 나간다. 강한 확신에 찬 소니는 선수와 계약을 위해선 에이전시를 통해야 한다는 관행도 깨고, 마이클 조던의 부모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한다. 업계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쓴 베팅이다. 이런 모습은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나이키의 10대 원칙과도 포개진다. ‘우리는 항상 공격한다’, ‘규칙에 얽매이지 말아라’, ‘비즈니스는 전쟁이다’ 같은 문구들. 그는 승리하기 위해 경쟁사들을 서슴없이 공격하기도 한다. 에이전트에게 아디다스 독일인 창업자의 나치 부역 전력을 들먹이고, 조던의 어머니 델로리스 조던(비올라 데이비스)에게 나이키 경쟁사들의 약점을 일러주는 장면도 나온다. 벌금을 물더라도 미국프로농구(NBA) 규정과 어긋난 농구화 디자인으로 주목을 끌겠다는 전략을 취한다. 승리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셈이지만, 이는 소니가 마이클 조던의 진짜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기에 가능한 행동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선 경쟁이 아름답지만은 않으며 비즈니스는 공정하지 않다는 격언도, 옳은 일을 하면 수익은 저절로 벌게 된다는 격언도 나온다. 일견 비즈니스 격언들이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영화는 소니의 모습을 통해 담담히 보여준다. 마이클 조던의 진가를 알아본 인물은 소니 말고 덜로리스도 있다. 덜로리스는 나이키 신제품의 마이클 조던 이름을 허락하는 대신 제품 판매 수익의 5%를 줄 것을 요구한다. 소니처럼 새로운 시장에 대한 확신과 통찰을 토대로 관례를 깨는 만큼 역시 공감을 산다. 필 나이트도 관례를 깬 또 다른 혁신가다. 그에 관해선 영화 내내 별생각 없이 사는 괴짜 성향이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그는 네 글자가 좋다기에 나이키(NIKE)라는 사명을 지었고, 나이키 로고 ‘스우시’도 대학생에게 35달러 주고 맡겼는데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마이클 조던 농구화에 붙은 ‘에어 조던’이라는 명칭을 두고도 별로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결과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는 그렇게 하게끔 했다. 잘 모르겠다면서도 “차차 정들겠지”라고 한다. 자신의 견해와 무관하게, 직원에게 위임한다. 또한 필 나이트는 덜로리스의 제안을 담대하게 수용한다. 영화에선 나오지 않지만, 선수와의 판매 수익 배분 계약은 나이키 이사회에서 해고될 위기를 감수하고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관례를 깬 혁신가들이 상대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구조가 쌓인다. 그리고 모두 믿음에 부합한다. 비즈니스가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서로를 인정하고, 알아봐 주는 지지의 문화가 중요하다. 그러고 보면 비즈니스도 팀 스포츠 농구를 닮아 있다. 상대의 실수를 노리면서, 승부처로 게임을 끌고 가야 한다. 좋은 기업 문화가 있다면, 역전 기회는 남아 있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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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총 없는 나라의 복수극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9∼16편)가 공개된 후, 이 완벽한 복수극에서도 구태여 흠을 잡는 사람들은 동은(송혜교)과 여정(이도현)의 로맨스 분위기를 문제 삼기도 한다. 온전히 복수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도 충분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이 칼럼에는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김은숙 작가와 주연 송혜교 배우는 세상 온갖 상황에서도 사랑은 꽃핀다는 메시지를 던져온 로맨스의 아이콘들이다. 천생 로맨스 재질이라고 감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연애할 때가 아니니까 긴장 풀지 말라는 주문을 하게 되다니. 그만큼 이 복수극의 매력이 압도적이라는 의미다. 이 드라마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현실에선 이뤄지지 않는 권선징악에 사람들이 대리만족했다는 해석이 적지 않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미진하다. 애초에 모든 복수극은 대리만족을 통한 판타지적 쾌감을 노리는 장르다. 이 드라마가 돋보인 건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 이상으로 지난한 복수 과정 속에서 의미를 담아내고. 과정에서 몰입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복수 장르에선 오래된 격언이 있다. 복수는 차갑게 식혀 먹을 때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복수란 이뤄지는 시점보다 이를 실행하려는 의지와 이를 향해가는 일관된 과정이 더 중요하다. 공들여 쌓아온 복수는 차갑게 식혀 먹어도 군침이 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대로 짜인 복수극에 갈증이 있다. 밑바닥부터 극한까지 감정을 끌어올린 다음 폭죽처럼 터지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어 한다. 이 갈증은 한국식 기존 막장 드라마의 복수로는 해소가 안 된다는 사실을 더 글로리를 보면서 깨달았다. 복수를 소재로 해도 냉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는 처음부터 시비만 안 걸면 싸울 일도 없다는 무해한 주인공이 드라마 방영 기간 동안 악인에게 ‘갈굼’을 당하다가 방영 후반쯤 우연한 계기로 별안간 지위 역전이 이뤄지면, 그게 복수라고 주장한다. 드라마 방영 내 복수가 차지하는 비중보다 갈굼 비중이 더 높다. 응징할 대상을 그야말로 쓸어버리는 영화 ‘테이큰’이나 ‘존 윅’ 스타일은 오락의 쾌감은 있을지언정, 감정이입을 통해 카타르시스까지 큰 낙차를 만들어내진 못한다. 총이라는 형태로 복수의 능력이 그들의 손에 쉽게 쥐여져 있어서다. 반면 더 글로리는 주인공 동은이 복수의 능력을 하나씩 채워가는 과정에 매우 진심이다. 복수의 동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드라마 중 초반에 몰려 있고, 2화부터는 상대적으로 덜 할애된다. 그 대신 복수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창작 관점에서 이 지지부진한 복수의 준비 과정을 견딘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작가라면 당장 주인공 손에 총을 쥐여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는 총 대신 쓰레기를 뒤지면서 시간을 견디는 인간을 비춘다. 여기엔 파괴된 존엄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개인에게 중요한 일인지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드라마 속 지난한 복수 과정을 따라가는 동안, 고군분투하는 동은에게 운이 따른다는 설정이 납득이 간다. 동은이 조력자를 만들어가는 방식도 그렇다. 자신이 구태여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깊이 공감하고, 악인들을 응징 대상으로 삼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고 안도한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깊이 감정이입하고 공감하게 된다. 바로 즉각적이고 뜨거운 응징에선 느낄 수 없는, 차가운 복수극의 묘미다. 잘못한 자 벌 받는다는 종교적 운명론이나 명분론에 기대는 대신 주인공 동은이 감정의 수호자로서 복수를 말하는 점이 특히 섬세하다. 동은은 명분과 운명에 관심이 없다. 그건 종교에 심취한 가해자의 몫으로 둔다. 열여덟 살 어린 동은의 꿈과 감정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복수의 명분은 충분하다. 동은의 복수 조력자인 현남(염혜란)의 “나 빨간 립스틱 바를 거야. 가죽 잠바도 입을 거야”라는 대사도 그렇다. 그들에겐 그저 소박한 감정의 영역이 훼손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동은이 복수를 다짐하게 됐던 순간도 가해자 연진(임지연)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현모양처’라는 꿈을 들은 뒤다. 우리에게서 사소하고 소박한 감정들이 소실되지 않도록, 나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서로가 지켜줘야 한다는 메시지가 복수 끝에 남는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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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스마트폰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를 시청해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1990년대 초중반 애니메이션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있던 건전 영상 캠페인 내레이션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어찌나 오싹하던지. 비행 청소년은 우리 건전한 공동체를 수시로 위협하는 탓에 결국엔 눈 흘김을 받는 존재. 그렇게 된다는 건 가족과 친구들이 외면하고, 교사가 어느 날 나를 포기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렇듯 공포감은 관계가 무너지고 내가 더 이상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되는 상황에서도 찾아 온다. 그건 호환, 마마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라는 것. 넷플릭스로 공개된 범죄 스릴러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도 이와 같은 공포를 다룬다.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 이나미(천우희)가 휴대전화를 분실했다가 일상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모습을 비춘다. 이나미는 잃어버린 휴대전화를 돌려받았지만, 어느 날부터 자신이 스마트폰으로 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면서 아연해한다. 자신을 아껴주던 회사 사장님을 험담하는 글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라가고, 동료들은 그에게 등을 돌린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확인하는 과정에선 자신과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틀어진다. 이로써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공포의 3종 세트가 다 갖춰진다. 여기서 다시 캠페인 속 내레이션으로 되돌아가 보자. 옛날엔 공포의 대상은 주로 외부에 있는 ‘미지의 존재’였다. 즉, 집 안에 들어와서 아이를 물고 가는 호랑이이자 천연두를 옮긴다고 여겨지던 귀신 같은 것들. 그리고 전쟁처럼 한 개인이 컨트롤할 수 없는 사태도 그렇다. 내가 속한 울타리에 들어올 수 없는 존재들이 여기 울타리 안을 넘볼 때 두려움을 느낀다. 즉, 공포의 대상 중 첫 번째는 바로 울타리 밖의 낯선 존재다. 영화 속에선 주인공 이나미를 노리는 악의가 그렇다. 더 나아가면 울타리 안의 단단한 결속이 무너지는 것도 겁난다. 악령에 붙들린 가족에게 위협을 받거나, 좀비가 된 친구를 내가 죽여야 할지 말지 딜레마에 빠지는 공포 영화들이 그리는 세상처럼. 이 경우 나를 아득하게 품어주던 옛날의 울타리도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며, 기존의 도덕도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 공포의 대상 두 번째. 한때 익숙했다가 낯설어지는 존재다. 영화 속 주인공과 틀어지는 관계들이 그렇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자기 자신조차도 미지의 존재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더 이상 나 자신임을 증명할 수 없고 통제되지 않는 나. 자기 파멸적인 나. 공포의 대상 세 번째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저지르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사태가 그렇다. 영화는 공포의 대상을 한 상에 차려낸다. 영화가 초반부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한 인간에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속으로 빠뜨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고, 바라지 않던 방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고, 누군가가 나를 감시한다. 이로써 나를 지탱해오던 조건들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된다. 다만 흥미로운 설정에 비해 서사의 밀도는 떨어진다. 선과 악의 구도를 선명하게 그리고 스릴러의 스토리성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공포의 대상이 외부의 낯선 존재로 빠르게 정리된다. 결국 선의로 똘똘 뭉친 우리와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로 가득 찬 저쪽의 구도가 짜이는데, 이는 결국 호환을 맞닥뜨린 상황처럼 돼 버린다. 공포의 선물세트를 한 아름 받아들 줄 알았는데, 여러 선택지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고, 포장을 까봤더니 나를 흉내 내는 ‘손톱 먹은 쥐새끼’가 나오는 모양새가 된다. 영화는 현대적 설정의 매력을 충분히 풀어내진 못하지만, 공감을 통해 생활 밀착 공포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매력만큼은 남는다. 그것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은 든다. 하긴 알람이 울리지 않아서 지각하는 게 공포가 아니면 뭐겠나. 일상이 지뢰밭이고 부디 악의를 만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산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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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라라랜드’엔 없고, ‘바빌론’에는 있는

    어떤 한 시절이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뭘까. 그때 실제로 아름다웠던 풍경과 대상 자체의 속성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 사람의 내면이 대상을 예민하게 포착한 감수성의 흔적일까. 만약 둘 다라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의 배합은 어떻게 될까. 숱한 세월 속에서 유독 몇몇 순간만이 훗날 추억의 질료로 절취되는 까닭은 뭘까. 비범한 예술가는 여기에 구구이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한 풍경과 장면에 사로잡혀서 지난 일들을 오래 매만지는 운명만을 보여줄 뿐이다. 해석하지 않고 감정 속으로 전진한다. ‘바빌론’이 그런 영화다. 영화는 1920∼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산업 태동기를 배경으로, 무성영화 스타가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격변기에 잊혀져 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보통 이런 회고조 작품은 통속적인 공식을 따르는 법. 이전 시대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새 시대에 빛을 잃었다고 한탄하든지, 변화 속에서 소실된 훌륭한 덕성과 가치를 아쉬워한다든지. 극명한 대조 속에서 과거를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부각하기 십상이다. 그럴수록 삼류 회고록에 가까워진다. 반면 바빌론은 그런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대조가 허위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한다. 바빌론이 조명하는 할리우드의 초창기를 옹호하기란 어렵다. 밤에는 환락 파티를 벌이고 다음 날 촬영 현장에서 술에 취한 채로 영화를 찍고, 캐스팅은 주먹구구다. 영화 산업 종사자의 권리 같은 것도 없다. 그곳에서 사람 목숨은 소품보다 사소하고, 촬영장은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시대가 지긋지긋함으로 온통 가득 차 있다. 본작을 연출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자신의 대표작 ‘라라랜드’처럼 낭만적인 구석을 비출 듯하다가 결국 구역질 나는 이면으로 전환하며 어둠 속까지 깊숙하게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길 반복한다. 영화는 189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어둠과 낭만이 수시로 균형추를 맞춘다. 라라랜드엔 없던, 꿈 공장의 뒷단을 비추는 방식을 통해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쇼 비즈니스에 대한 환멸이 부각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광기에 마음이 사로잡힌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 우리는 어떤 순간과 대상에 매혹되는가? 모른다. 그러나 붙들린 마음은 결코 착시나 거짓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사랑이 그렇듯 어딘가에 매혹되고 사로잡히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다. 왜 사랑하는지 모르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것이 잘못된 질문임을 보여 준다. 대신 왜 사랑하는지 알 수 없음에도 빨려드는 감정이 본질적으로 사랑이라고 답한다. 영화는 하염없이 대상에 빠져드는 마음의 작용을 시작부터 줄곧 비춘다. 영화 도입부에서 환락과 욕망으로 가득 찬 파티에서 심부름꾼 매니(디에고 칼바)는 제멋대로인 배우 지망생 넬리(마고 로비)를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감정을 따르는 넬리의 생기와 광기는 유난하다. 넬리는 그저 되는 대로 살아갈 뿐이지만 이는 무성영화 속에선 타고난 천재성으로 발현된다. 매니는 넬리에게 속절없이 마음이 붙들린다. 영화 초반부 작품 속에서 스타로 가는 첫 단계에 접어든 넬리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빛날 때, 매니는 무성 영화배우 잭(브래드 피트)의 조수로 일하면서 그가 일하는 영화 촬영 현장에 카메라를 배달하기 위해 속도를 낸다. 넬리가 춤을 추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할 때, 매니는 꿈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간다. 이 장면은 비범함과 범속함을 대조적으로 드러낸다. 매니가 결코 이해하지 못한 채로, 탁월함에 끌려가게 될 운명을 암시하면서. 바빌론을 통해 예술이 한 시대를 망각에서 건져 올리는 방식을 본다. 누군가는 K팝이 궁극의 예술로 진화하더라도, 여전히 싸이월드 시대의 소몰이 창법 음악 속 감정만 못하다고도 할 수 있다. 저마다의 진실은 다 다르니까. 그러나 한 시대의 매혹된 이가 이를 미화하지도 조롱하지 않고 누군가를 그 시대 감정으로 데려갈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영화를 보면 개인의 내면에 남긴 저릿한 자국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마음만큼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 유혹에 빠져서 숱하게 실패하곤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런 마음이 영화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누군가는 환락과 환멸의 도시 바빌론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이야기는 쌓인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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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패스에 눈뜰 때

    어떤 세대에게 만화 ‘슬램덩크’는 인생의 한 시기를 떠올릴 때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1990년대 중후반 농구 만화 연재가 끝난 뒤로도 한참 동안 중고교 각 반에 만화 속 명대사 “나는 천재니까”를 시도 때도 없이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이 하나씩 있었고, 그들은 농구공을 잡으면 자신을 만화 속 주조연인 강백호나 정대만으로 불러달라며 눈을 반짝였다. 어떤 아이들은 만화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장래 희망란에 ‘전국 제패’라고 적어 내기도 했다. 기자도 한때 전국 제패를 꿈꿨다. 농구 좀 하는 내 친구 ‘월곡동 윤대협’과 의기투합해서 동네 근린공원을 평정한 뒤 풋내기들 한 수 가르쳐 주러 서울 동북권 길거리 농구의 메카 고려대 야외 농구장으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전국 제패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었는데 생각보다 수준 높은 형들 농구를 보고 주눅 들어 코트 옆에서 드리블만 연습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주눅 들 땐 슬램덩크가 또 보약이라서 집에서 몇 번씩 읽으면서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되뇌었다. 대학생 땐 슬램덩크 만화에 나온 나이키 농구화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름 반바지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농구화를 기어이 신고 다녔다. 이렇듯 어떤 이들에겐 원작 만화가 추억과 단단히 맞물린다. 만화를 삶의 일부처럼 여기는 광팬이 꽤 많다. 그들에게 원작은 단순한 만화 이상이다. 그러니 만화 슬램덩크의 클라이맥스인 일본 전국 고교생 종합체육대회(인터하이) 토너먼트 2차전을 다룬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 원작 팬들의 추억 공유회가 열리리라는 건 이미 예상했다. 워낙 큰 팬덤을 가진 작품이라서 기존 마니아들의 지지 속에 추억에 기대 기존 서사를 안전하게 옮겨오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서사나 해석을 넣을 여지까진 없으리라고 봤다. 경기 결과가 중요한 스포츠물 특성상 캐릭터와 세계관이 구축돼 있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 한 보여줄 수 있는 서사엔 한계도 있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원작 팬들은 누구나 결과를 다 안다. 극장판에선 스포트라이트의 비중이 원작 주인공 강백호에서 조연 송태섭에게로 넘어갔다고 들었지만, 이 역시도 슬램덩크의 외전 격 작품들을 이미 섭렵한 광팬들에겐 익숙한 설정이기도 했다. 이번 작에서 구태여 새로움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본 뒤엔 완전히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길 가지고 이런 재창조를 해내다니. 극장판은 주인공 팀 북산이 인터하이에서 고교 농구 최강자 산왕공고와 만나 치르는 대결을 다루는데 서사 줄기는 원작과 동일하다. 다만 원작이 저마다 마주하고 있는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성장이 이뤄지는 모습을 그린다면, 극장판은 조금 더 그들의 관계에 포인트를 둔다.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다. 극장판 주인공이 패스를 뿌리는 포인트가드라는 점이 극장판의 지향점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극장판은 송태섭의 개인사를 비추면서 어떻게 독단적인 성격이 됐는지를 조명한다. 송태섭의 어둡게 닫혀 있는 모습이 주변 이들에겐 비호감으로 비친다. 송태섭 눈에 다른 이들도 비호감이긴 마찬가지다. 송태섭은 세련된 패스를 받아내지 못하는 주장 채치수를 내심 못마땅해한다. 슈터 정대만과는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고, 주전 선수인 서태웅과는 말 한마디 섞지 않은 걸로 묘사된다. 회상을 통해 불화가 드러난다. 회상이 끝나면 장면은 경기장으로 돌아온다.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들은 경기장에선 각자 저마다 자신의 농구를 처절하게 해내고 있다. 그 점을 이해할 때, 서로를 의지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차츰 스며든다. 단신 가드 송태섭을 약점으로 여긴 상대팀이 ‘존 프레스’ 전술로 압박할 때 동료들은 송태섭을 의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송태섭은 다른 팀원들을 믿고 의지하며 패스를 뿌린다. 송태섭의 패스가 다른 팀원들의 손으로 가서 감길 때 승부가 요동친다. 원작 만화에선 강백호가 마지막 집념을 발휘해 넘어지며 공을 잡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장면에서 감동을 자아내지만, 극장판은 같은 장면에서 강백호가 그렇게 잡은 공을 자신의 라이벌인 서태웅에게 던져주는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온다. 관계로 무게추가 옮겨져서 이야기성이 극대화된다. 극장판은 결국 송태섭을 시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패스하는 법을 깨닫는 과정이다. 하긴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전국 제패’일 리 없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관계가 중요하다. 지향점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이 넓어지고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만화 완결 이후 27년이 지난 지금도 슬램덩크로 인생을 배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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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성공한 빌드업의 역설

    영화 ‘영웅’은 동명 창작 뮤지컬이 원작이다. 원작은 2009년 초연해 9번째 시즌 공연에 들어간 뮤지컬로 작품성과 수익성은 이미 검증됐다. 영화 크랭크인 때부터 뮤지컬 플롯과 음악 등 흥행 요인을 스크린으로 옮겨 올 수 있느냐가 관심사였다. 그 점만 놓고 보면 영화는 성공이다. 영화는 공연을 스크린으로 가져오기 위해 각별한 공을 들였다. 14년간 뮤지컬에서 안중근 역을 맡은 배우 정성화가 영화 주연을 맡았고, 음악 역시 대부분 현장 라이브 녹음이다. 공연적 요소를 스크린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기어이 관객을 울린다. 의도가 모두 맞아떨어진 ‘빌드업(build up)’ 축구 같다. 그럼에도 영화가 미진하다는 평도 적잖다. 원작의 플롯과 음악을 충실히 담아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공연의 감동을 그대로 옮기기 위한 원작 중심의 플롯 전개가 영화로 와선 다소 느슨하게 느껴진다. 영화 ‘영웅’은 서사적 개연성과 캐릭터성을 쌓아가는 대신 배우 연기를 부각하는 연출을 택한다. 공연에서 성공한 이 전략은 영화에선 원작 플롯의 서사적 빈틈을 더 크게 드러낸다. 원작 공연에선 서사 대신 배우들의 연기를 부각하는 방식에 고개가 쉽게 끄덕여진다. 공연은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영화에 비해 연기에 더 의존하기 마련이다. 직접성과 일회성이라는 특성이 현장의 긴장감과 연기에 대한 집중도를 더 높여준다. 그리고 연기를 통해 극대화된 감정이 극 개연성의 일부를 이룬다. 이는 공연 예술의 큰 강점이다. 연기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 무대를 압도하며, 서사가 채워지지 않더라도 관객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의도까지 넘겨보게끔 한다. 이를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열어젖힌다. 원작 공연이 각광을 받은 것도 개인이면서 민족주의자이자 천주교인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면모에 대해, 충분치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민족주의라는 단일 프레임을 넘어서 조명하는 자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공연의 서사적 빈틈이 보기에 따라선 장점이 되기도 한다. 반면 영화는 상대적으로 공연보다 시간적·공간적 제약에서 자유롭고 더 많은 장면을 보여주기에, 서사 전개에 대한 집중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다. 보다 충분하게 서사적 갈등과 개연성이 쌓여야 관객의 마음이 움직인다. 영화 ‘영웅’은 원작 공연과 다른 해석으로 나아가진 않고, 공연을 재현하는 쪽을 택한다. 캐릭터의 내면과 감정, 서사를 표현하기 위해 공연처럼 노래와 연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노래에서 극에 필요한 서사를 추출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남겨둔다. 이를 통해 공연을 스크린 속에서 재현하지만 아쉬움도 동시에 남긴다. 스토리라인은 캐릭터나 플롯을 쌓아 나가기보다는 원작 뮤지컬 속 유명 원작 넘버를 부르기 위해 구성한 듯한 인상도 준다. 플롯은 그야말로 꽉 짜인 빌드업 축구처럼, 다음 노래로 넘어가기 위한 전진 패스를 한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나 유머 코드는 적재적소에 배치되지만 플롯을 강하게 의식하는 탓에 마치 배우들이 숙제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작의 구성을 옮겨 온다는 전략이 통하고 있지만, 서사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 스크린에선 캐릭터의 내면이 다소 흐릿하다. 뮤지컬이자 역사물이어서 이와 같은 한계가 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다루면서 영화 전반부는 민족 감정의 관점에서, 후반부에선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조명한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내면은 배우의 표정과 노래를 통해서만 비추고, 장면은 행적만을 숨 가쁘게 뒤따르다 보니 엄혹한 시대에 보편적 평화 사상에 도달하기까지의 사상적 여정은 적어도 작품 속에선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천주교와 유교 윤리를 바탕으로 시대의 대안적 가능성을 찾아보려던 사상가로서 안중근 의사의 면모를 비출 듯 말 듯하다가 끝난다. 원작도 이러한 부분에서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영화의 아쉬움이 더 짙어진다. 물론 이를 상업영화의 문제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긴 하다.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담론보다는 기존 담론의 소비와 팬덤만이 반복되는 시대에 말이다. 아름다운 패스와 슛만을 생각하자.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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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유튜브 시대의 ‘밀실 추리’

    영화계에선 한동안 정통 추리극이 드물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최근엔 과학수사가 워낙 발달해서 멀쩡한 기술을 내버려 두고 왜 사람이 구태여 추리를 해야 하는지 납득하기가 전보다 어려워졌다. 이젠 일반 대중도 범죄가 벌어지면 일대 폐쇄회로(CC)TV와 차량 블랙박스부터 까봐야 한다는 걸 안다. 요즘 관객들은 추리극에 차량이 나오면 ‘차량사고 전문 변호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문철TV에 블랙박스 영상을 제보할 순 없는 걸까?’라고 생각한다. 현대 추리극은 관련 영상을 왜 구할 수 없는 상황인지 섬세하게 설정을 깔아야 한다. 즉 추리극은 이런 제약을 어떻게 돌파하는지 보는 게 재미다. 영화 ‘자백’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스페인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의 리메이크작으로 밀실 살인을 다룬다. 도입부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이후 줄곧 사건의 진실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추리극 문법과 구성을 따른다. 영화에선 범행과 관련된 차량을 용의자가 반드시 폐기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설정을 넣었고, 밀실 살인이 벌어지는 호텔 객실 주변 CCTV 정보가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 영화 막바지쯤에 드러난다. 이제 추리극은 다음 난관을 넘어야 한다. 물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선 쫓는 자가 진술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 추리극으로 올수록 캐릭터 설정이 중요하다. 사건을 좇는 자에겐 의심하며 모순을 파고들 수 있는 권위와 재능이 부여돼야 하고, 대답하는 자에겐 여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설득력 있게 제시돼야 한다.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 간 욕망의 균형과 대립이 무너지고, 구태여 대답할 의무가 없거나 없다고 생각한다면? 긴장감은 뚝 떨어진다. 그런 걸 도어스테핑이라고 부른다. 자백은 밀실 살인 사건의 용의자 유민호(소지섭 분)와 승률 100% 변호사 양신애(김윤진 분)가 회상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다룬다. 반전을 통해 묻는 자와 용의자의 욕망과 처지가 점차 명확해진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고 협조하는 관계 구성이 절묘하다. 영화가 두 번째 난관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 하나의 난관. 추리극에서의 문답 과정은 겉으로 보기엔 심심하고 지루해서 영상화가 쉽지 않다. ‘범죄도시’나 ‘다크 나이트’ 취조 장면에서 결국 피의자를 쥐어박는데, 이는 “식사는 하셨나요?”로 시작하는 문답식 취조로는 영상이 너무 단조로워지는 탓도 있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취조실은 현실과 달리 사람들이 화내고 격해지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대체로 연출자들은 문답 구성만으론 영화를 채울 만한 긴장이 충분히 조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퍼즐 기반의 추리극 연출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도 된다. 자백에선 무패의 변호사가 살인 용의자 의뢰인을 만나 범행 과정을 함께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버전의 회상을 끌어온다. 이를 통해 단조로울 수 있는 문답 구조의 한계도 넘어선다. 여기까진 모두 원작에 있는 내용이다. 자백은 여기에 극을 끌고 가는 메인 배우들의 탁월한 드라마 연기를 통해 단순한 문답 속에서도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주요 배역들은 선악이 공존하는 캐릭터인데, 이들의 욕망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원작보다 자백 쪽이다. 원작과는 달리 반전이 드러나는 시점이 훨씬 앞당겨진 점은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원작의 반전 구성만으론 충분치 않다고 여겼는지, 영화는 막바지에 원작엔 없는 추가적인 스릴러 장치를 배치한다. 왜 그랬는지 이해는 간다. 한문철TV에 익숙한 국내 관객들에게 누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무슨 혐의가 적용될지 증거가 나왔는지 다 알려줘야 하니까. 그래서 끝까지 보고 나면 한문철TV 레전드 사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운을 남기는 것보다 명확한 결론을 내는 걸 중시하는 유튜브 시대 논리에 영화도 맞춰간달까. 극 막바지 서스펜스를 통해 갈등과 선악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추리극 특유의 우아한 여운이 너무 짧게 소비되고 증발한다. 영화는 이대로도 볼만하지만 원작처럼 두뇌 싸움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면 안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럴 수 없는 한국만의 시장적 특성이 있는 걸까.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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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K벽지’ 전성시대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가 밋밋한 흰 벽지 앞에서 연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때깔’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대부’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마피아 영화가 옛날 한국 조폭 영화에 비해 분위기가 더 중후하게 느껴지는 건 보스 방에 붙은 벽지 품질 차이가 한몫한다. 벽지는 미감 때문에도 그렇지만, 감독의 미장센(화면 속 등장인물이나 사물의 주도면밀한 배치를 통한 연출) 속에서 스토리텔링과도 결합하기에 중요하다. 즉, 어떤 영화는 벽지로도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 영화를 볼 때 벽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2003년 ‘올드보이’부터인데, 이 영화 주인공이 15년간 갇혀 사는 방, 붉은 톤에 기하학적 무늬가 천장까지 이어지는 벽지는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촘촘하게 반복되는 벽지 패턴은 주인공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군가가 설계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게 될 불가피한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래로 20년간 적어도 대작으로 불리는 영화·드라마는 벽지를 포함한 세트 요소에 감정과 스토리를 담는 심오한 디테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에서 벽지가 중요해진 시점과 오늘날의 한국 영화 전성기가 맞물리는 만큼, 한국 영화·드라마가 인기 정점에 이른 건 상당 부분 K벽지 공이라고 봐도 된다. 최근 영화를 보고 난 뒤 주변에 “벽지 봤어?”라고 말하면 십중팔구 그 영화 좋다는 뜻이어서, 미술 요소가 부각된 요즘 시기를 K벽지 시대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K벽지 시대의 핵심 기수는 ‘올드보이’부터 박찬욱 감독과 합을 맞춘 류성희 미술감독이다. 영화계의 대표적인 벽지 장인으로, 한국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미학적 관점을 제시했다. 류 감독은 2016년 ‘아가씨’로 칸영화제 벌컨상(최고기술상)을 받았을 때 K벽지 미학이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영화에서 응접실과 침실의 영국풍 벽지 속 패턴 간격은 넉넉해 보이지만 조밀하게 배치된 소품들과 맞물리면서 잘 정돈돼 있는 와중에도 묘하게 신경질적인 기운을 풍긴다. 그렇게 주인공 이즈미 히데코(김민희 분)의 내면 풍경이 공간에서부터 엄습한다. 영화 팬들은 이제 류 감독의 최고 벽지 미학으로 아가씨보다 최근작인 ‘헤어질 결심’을 꼽는 분위기다. 주인공 송서래(탕웨이 분) 집의 푸른 색감 벽지는 산과 바다의 질감을 표현한 회화에 가까워 보인다. 벽지의 이미지는 산과 바다의 경계를 지워 나가는 영화의 내용과도 겹친다. 벽지가 감정을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를 요약하고 압축한다. 류 감독 이래로 미술감독이 어떻게 영화를 해석하느냐, 영화와 대중적인 취향 사이에서 어떤 접점을 만들어 내느냐가 영화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됐다. 또 다른 벽지 장인으로 미국 아카데미 미술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된 ‘기생충’ 세트를 만든 이하준 미술감독도 있다. 연출 중에선 최동훈 감독도 알아주는 미려한 벽지 미장센의 달인인데,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올해 중반 개봉한 ‘외계+인’ 1부는 최 감독 연출에 미술감독으로 류 감독과 이 감독이 합류했다는 이유로 관심을 가졌던 이가 많다.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서도 벽지 자부심은 너끈히 지켜냈다. 그러고 보면 올해 영화계는 K벽지 대전이었던 셈. ‘버닝’으로 2018년 칸영화제 벌컨상을 받은 신점희 미술감독도 영화계에서 벽지 장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대작 드라마도 벽의 색감이 오래 뇌리에 남을수록 좋은 작품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벽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최근 에미상 6관왕 수상 영예를 안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 거대한 게임장도 꼽을 수 있다. 세상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단절돼 있는 거대한 벽체는 출구 없는 삶과 잔혹한 게임의 룰을 상기시킨다. 여기에 게임장 속 벽과 계단을 채운 분홍과 노랑, 민트 등의 밝은 색 조합을 통해 게임의 괴기성과 아이러니를 드러냈다. 이 작품의 세트장을 디자인한 채경선 미술감독도 미국 에미상 프로덕션 디자인상을 수상하면서 K벽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최근 인기몰이 중인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은 배우들의 연기와 세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병한 미술감독이 전북 전주에 세트로 구축한 유럽풍 호화 저택과 차이나타운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K벽지 장인들의 세트에선 기존 한국 영화·드라마에 없던 풍경을 만들어 내야 하는 고민이 엿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다른 고전적인 이미지들을 끌고 와서 뒤섞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비주얼을 만들어 낸다. 기댈 수 있는 전통이 없는 가운데 탁월한 레퍼런스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독창성까지 나아간다는 점은 결과적으로 다른 K컬처의 성공 공식과도 닮아 있다. 가사로는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나”라면서도 웃으며 칼군무를 추는 혼종 K팝을 흥얼거리다가 때론 어깨춤까지 추게 되는 것처럼, 무국적성의 비주얼은 K콘텐츠의 핵심 이미지로 세계인의 뇌리에 남아 맴돌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K콘텐츠가 또 늘었다는 의미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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