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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에센시의 촐페라인(Zollverein) 광산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후 버려졌던 폐광촌에서 관광지로 변신했다. 독일은 한때 세계 최대 석탄 생산지였던 이곳을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곳으로 소개하는 것과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과 전쟁포로들이 끌려와 강제노역을 했던 현장으로 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박물관의 ‘전쟁과 폭력’ 전시실에는 나치로부터 학대당한 사람들의 사진과 함께 ‘강제노역자(Zwangsarbeiter)’라는 설명이 있다. ▷일본은 2015년 일본 군함도(端島·하시마) 탄광 등 메이지 시대의 산업유산 시설 23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독일과 같은 후속 조치를 약속했다. 당시 사토 구니 주유네스코 일본대사가 “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치에서 강제로 노역했다”며 제대로 역사를 알리겠다고 밝힌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6월 문을 연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민족차별도, 강제노동도 없었다”는 거짓 증언만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도쿄 올림픽 개막을 열하루 앞둔 12일 일본의 약속 불이행을 지적하며 ‘강한 유감(strongly regret)’을 밝혔다. 실사단이 지난달 일본을 찾아 강제노역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 전시가 부족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전시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이런 입장을 내놨다. 일본은 그동안 우리 정부의 항의에도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여 왔는데 이번에 국제기구가 군함도의 역사왜곡 사실을 공식화한 셈이다. ▷“갱도 안에서 일하고, 위에서 내려주는 밥 먹고, 다시 일하고 반복했어. 밥이라고 해도 콩깻묵 한 덩어리가 전부였고, 탄가루가 다 묻어 있었지. 그거 먹고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자고 다시 일어나서 일하고 말 그대로 지옥 같았지.” 군함도에서 생환한 최장섭 씨는 2018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 전에 이렇게 당시 고통을 회고했다. 군함도로 끌려간 한국인 약 800명 가운데 134명이 혹사와 배고픔 속에 숨졌다. 일본은 근대 산업화의 문을 연 곳으로 군함도를 띄우고 있지만, 강제노역자에게 갱도의 문은 지옥문일 뿐이었다.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13일 “지금까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와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부가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 왔다”고 억지 주장을 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밝힌 올림픽 정신의 3가지는 탁월함 우정 존중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반성도 하지 않으면서, 억지까지 부리는 일본이 올림픽 정신을 제대로 살리는 대회를 열 수 있을지 의문이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북한 경제가 장기간 침체하면서 남편은 실업자가 되고, 아내가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서 가계를 꾸려나가는 가정이 늘고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해 ‘낮 전등’ ‘풍경화’ ‘자물쇠’ 등 집에 있는 남편을 가리키는 은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낮에 아무 쓸모도 없는 전등, 하는 일 없이 벽에 걸려만 있는 그림, 집만 지키고 있는 자물쇠와 같다는 의미다. 집에서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남편을 뜻하는, 남한의 ‘삼식이’와 같은 표현이다. ▷연애에서도 북한은 남한을 닮아가고 있다. 북한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당의 허락을 받아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중매결혼이 대세가 됐고, 지금은 연애결혼이 보편화됐다. 북한 여성들은 지금까지는 애인을 동지나 동무, 남편을 여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애인이나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남한의 드라마와 영화에 익숙해지면서 나타난 변화다. 북한 당국은 이런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애인이나 남편에 대한 오빠 호칭을 금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단속에 걸리면 처벌까지 한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이후 속속 들어선 장마당 등을 통해 남한의 드라마, 영화, 가요가 북한 주민에게 퍼진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카세트, 비디오테이프에 담겼던 한류 콘텐츠는 이제 CD, DVD를 넘어 USB에 담겨 퍼져 나간다. 밤새 영상을 보는 바람에 퀭해진 눈을 일컫는 은어, ‘너구리 눈’이 생겨났을 정도다. 북한 당국은 그동안 “남조선이 공화국을 모략하려 경제발전상을 꾸며낸 조작 영상을 만든다”는 식으로 한류 콘텐츠 확산을 통제해 왔지만 MZ세대에게 통할 리가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한류에 개방적인 모습을 노출한 적이 있다. 2018년 걸그룹 레드벨벳의 ‘빨간 맛’의 평양 공연을 보고 박수까지 쳤다. 부인 리설주는 그해 평양에 간 한국 특사단 앞에서 김정은을 ‘원수님’이 아닌 ‘남편’이라고 불렀다. 부부 관계가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리설주가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공개 석상에 나선 이후 북한 거리에서는 팔짱을 낀 연인들의 모습이 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빠와 같은 친숙한 호칭의 사용이 늘어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말은 사람들이 평소 갖고 있는 생각을 반영한다. 북한에서 남한식 표현이 널리 퍼진 것은 남한의 언어와 문화를 의심하거나 신기해하는 것을 넘어 의식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 당국이 겉으로 드러나는 주민들의 남한식 말투는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까지 바꾸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이번에는 음지에서 양지로 나올 수 있을까. 21대 국회에서 타투(문신)업의 법제화 논의가 활발하다. 지금은 법적으로 의료인만 타투 시술을 할 수 있는데 비의료인에게도 길을 열어주자는 취지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국민의힘 엄태영,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비슷한 논의는 예전에도 있었다. 대법원이 1992년 비의료인의 타투 시술을 불법으로 규정한 이후 타투 업계는 시술 허용을 요구해왔다. 17대 국회부터 타투 합법화 법안도 발의돼 왔지만 의료계 반대로 번번이 통과되지 않았다. 하지만 불법 규정에 단속과 처벌이 이뤄지는 상황에서도 타투 시장 규모는 1조2000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K타투’에 대한 해외의 관심도 커지면서 이번에 합법화해야 한다는 타투 업계의 목소리가 크다. 반면 의료계는 “수차례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그동안 허용되지 않았던 것은 결국 국민 건강권 보호 차원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라며 반대하고 있다.》법원 “질병 전염 우려 있어” 타투를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법은 현재까지 없는 실정이다. 다만 대법원은 1992년 판례를 통해 “피부 진피(眞皮)에 색소가 주입될 가능성이 있고, 문신용 침으로 인해 질병 전염의 우려가 있다”며 타투를 의료행위로 판단했다. 이에 비의료인이 타투를 하다간 무면허 의료행위로 처벌받는다. 의료법 제87조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거나,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5조(부정의료업자의 처벌)에 의해 무기 또는 2년 이상의 징역에 100만 원 이상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 등을 받을 수 있다. 실제 단속을 당한 타투이스트는 징역형과 벌금형을 받아 전과자가 되고 있다. 의료계는 합법화를 통해 비의료인의 타투 시술이 늘어날 경우 국민 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시술 과정에서 각종 감염, 염색 잉크 등에 의한 이물반응, 그리고 과민반응 등이 빈번한데 비의료인은 이에 대한 대처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는 “법원은 타투보다 침습성이 적거나 유사하다고 보이는 벌침, 쑥뜸, 찜질에 대해서도 면허 없이 할 경우 무면허 의료행위로 처벌하고 있다”며 법적 형평성 논란도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타투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나 예술 장르로 관심을 끌고 있지만 다른 미용 시술보다 위험하다는 주장도 있다. 황지환 의협 의무자문위원은 “필러만 해도 6개월이나 1년이면 약품이 피부 내에서 사라지지만 타투 염료는 남는다”며 “일부 타투 염료에는 금속이 들어있어 자기공명영상(MRI)을 못 찍게 될 수도 있고, (염료가) 림프샘을 타고 들어가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비의료인이 대부분 시술 하지만 타투 업계는 의료계의 요구가 타투 시장의 현실을 외면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의료인이 타투 시술에 직접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고, 비의료인을 통한 시술이 대부분인 만큼 결국 이를 제도화해 관리에 나서야 사고 위험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9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문신 시술 실태조사 및 안전관리 방안 마련’ 보고서에 따르면 타투 고객 171명을 조사한 결과 1명(0.6%)만이 의사에게 시술 받았다. 나머지는 문신 전문숍(66.3%), 미용시설(24.3%), 오피스텔(6.6%) 등에서 비의료인에게 받은 것이었다. 타투 업체들은 시술 자체가 불법인 탓에 간판도 제대로 달지 않고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보건 당국의 위생관리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시술 후 부작용을 경험했다는 응답자는 20.6%에 달했다. 또 타투이스트 17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초음파 세척기, 건열멸균 소독기, 고압증기 멸균기의 보유 비율은 각각 32.6%, 21.7%, 12.5%에 그쳤다. 이렇게 보건 상태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타투 협회가 직접 회원들을 상대로 위생 및 감염 관리의 지침을 배포하고, 관련 교육에 나서는 상황이다. 김도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타투유니온지회장은 “정부가 정기적으로 위생관리 등을 교육하고 이수증을 주면 좋겠다”면서 “(합법화 이후) 시술자의 잘못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에 대해서는 처벌을 강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폭넓은 의견 수렴해야 대법원 판결 이후 정부와 국회가 타투업의 법제화를 미루는 사이 타투 시장은 급성장했다. 한국의 타투 인구는 1300만 명가량이다. 눈썹과 아이라인을 그리는 반영구 화장이 1000만 명, 신체에 문자나 그림을 새긴 타투 고객은 300만 명으로 늘었다. 타투 문화가 확산되면서 이제 제도권 편입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고용노동부는 2015년 타투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타투이스트를 시장 육성 및 확산이 필요한 신(新)직업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정부와 국회가 의료계와 타투 업계의 의견을 두루 수렴해 타투이스트의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하고, 타투 고객들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후속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하지만 타투는 한 번 새기면 완전히 지우기 어려운 만큼 양성화를 두고 보다 폭넓은 고려가 필요하단 의견도 있다. 벌써부터 교육계에서 미성년자에 대한 타투 시술은 법으로 금지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고, 경찰 등 공무원과 의료계 종사자에 대한 타투 허용 여부에 대한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타투 합법화 여부를 논의하면서 함께 살펴봐야 할 문제들이다. 美-英, 위생교육 이수하면 시술 허용 “한국은 타투(문신)를 불법으로 막는 세계 유일의 국가다.” 타투 업계는 비의료인의 타투 시술을 금지하는 현행 제도와 관련해 이런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실제로 주요 국가들은 면허제도 등을 운영하면서 타투 시술을 비의료인에게 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각 주에서 위생과 혈액매개 감염에 대한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타투 시술 면허를 발급하고 있다. 또 인체에 직접 주입하는 타투용 염료는 공업용이 아닌 화장품으로 취급해 안전성을 관리하고 있다. 영국 또한 정부가 위촉한 기관에서 위생과 안전 관련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시험에 통과하면 타투 시술 자격을 주고 있다. 타투 업소를 열기 위해서는 시설과 장비, 고용인의 경력 등에 대한 지방정부 환경보건국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며, 이후에도 해마다 심사 평가가 이어진다. 프랑스는 21시간의 위생교육을 받으면 시술이 가능하고, 미성년자의 경우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타투를 할 수 있도록 규제하고 있다. 호주도 위생교육을 이수하면 시술을 할 수 있고, 2년마다 면허를 갱신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1987년부터 타투, 그리고 1990년부터 영구 화장 시술을 면허제로 운영하고 있다. 과거 타투에 부정적인 인식이 컸던 아시아에서도 합법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2002년부터 타투를 합법화해 자격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도 한국처럼 비의료인의 타투 시술이 불법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최고재판소(대법원)가 “고객에게 문신을 새기는 행위는 의료행위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린 이후 비의료인에게 시술을 허용하는 법안 마련에 나서고 있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 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로마 신화에서 불(火)과 대장장이의 신인 ‘불카누스(Vulcanus)’로 불렸다. 대선 캠프에 있던 콘돌리자 라이스가 자신의 고향인 철강도시 버밍햄의 불카누스 동상을 떠올려 특별 참모그룹을 이렇게 부르자고 제안했다. ‘힘의 우위를 통해 악(惡)을 응징한다’는 이들의 정책은 이라크전쟁과 아프간전쟁 발발로 이어졌다. 이들 전쟁을 이끌었던 불카누스의 좌장격인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1932∼2021)이 지난달 30일 다발성 골수종으로 사망했다. ▷제럴드 포드 행정부 때 최연소(43세) 국방장관에 올랐고, 부시 행정부에서 다시 최고령(74세) 국방장관을 지낸 그는 스스로 설계한 전쟁에 결국 발목이 잡혔다. 2001년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아프간과 이라크를 공격해 사담 후세인을 처형시킨 전과도 있었다. 그러나 침공의 이유로 밝혔던 대량살상무기는 끝내 이라크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현지 수용소의 수감자 학대 사실까지 불거졌다. 명분도 과정도 부적절했다는 비난 속에 그는 옷을 벗었다. ▷럼즈펠드는 동맹에도 ‘강경’했다. 무임승차는 없다는 게 지론이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도 강하게 압박했다. 한국에서 이라크 파병 논란이 큰 것에 대해선 ‘역사적 기억상실증(historical amnesia)’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2003년 방한해 ‘왜 한국 젊은이들이 이라크에 가서 죽고 다쳐야 하느냐’는 기자 질문에 “50년 전 미국이 자국 젊은이들을 한국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답하며 기자회견장 밖 서울의 야경과 고층 빌딩 스카이라인을 가리켰던 그였다. ▷그는 대북 강경론자이기도 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으며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신념이었다. 쿠데타를 유도해 김정일 체제를 전복하는 것까지 구상했다. 그는 2006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북한이 장거리미사일 대포동 2호를 발사했을 때 발사궤도가 미국을 향하면 요격할 계획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기도 했다. 즉시 발사할 수 있는 요격미사일을 10기 이상 준비했지만 북한 미사일이 발사 42초 뒤 북한 영해에 떨어져 작전을 멈췄다고 한다. ▷럼즈펠드는 집무실 책상 유리 아래에 남한은 환하고, 북한은 어두운 한반도의 야경 위성사진을 넣고 업무를 봤다. 이라크와 아프간처럼 북한도 언젠가는 회복해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땅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는 생전 “북한을 설득하거나 억제하기 위해 한국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일방적으로 대화 구애를 할 것이 아니라 대북 억제력을 제대로 갖췄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는 조언인 것이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장점을 얘기한 적이 있다. 그는 3년 전 “김일성, 김정일과 다른 김정은의 한 가지 장점은 전범(戰犯)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 답방하는 문제도 그렇고,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평양공동선언 후에 김정은의 서울 답방 논란이 불거졌을 때 나왔다. ‘6·25전쟁의 전범이 아니기 때문에 답방도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은 보수 진영의 반발을 부를 법도 했지만 별다른 이슈는 되지 못했다. 소수 야당인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으로 발언의 무게감이 덜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랬던 그가 이제 보수의 중심에 서며 뉴스메이커가 됐다. 36세인 이준석은 김정은보다 한 살 어리다. 둘은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란 공통점도 있다. 10년 전 김정은이 김정일의 사망으로, 이준석이 박근혜의 발탁으로 중앙 정치무대에 나온 시점도 비슷하다. 이제 6·25전쟁이 멈춘 지 30년도 지나 태어난 이들이 북한 노동당과 남한 제1야당의 지도자가 됐다. 남북 관계에도 세대교체가 본격화되는 듯하다. 자신보다 어린 남측 보수 정당 대표를 보는 것은 김정은에게 낯설다. 김정일 사망 이후 10년 동안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으로 문패가 바뀌었고, 이준석 전까지 20명이 당 대표(비대위원장 포함)를 거쳐 갔다. 대부분 김정은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뻘이었다. 김정은으로서도 자기 또래의 보수당 대표가 궁금할지 모른다. 이준석은 당 대표가 되고 난 뒤 아직 직접적인 대북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이준석 신드롬’ 얘기가 나올 정도로 관심은 커지고 있지만 그의 대북 인식에 대한 평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 방송 패널로 나올 때와 지금 당 대표의 입장이 차이 날 수도 있다. 그가 2019년 펴낸 ‘공정한 경쟁’에서 밝힌 대북 입장은 이렇다. “통일의 방법이 체제 우위를 통한 흡수통일 외에 어떤 방법이 있겠나” “북한 정권이 남한에서 쌀이 왔다는 것을 밝히고 배분한다면 지원할 용의가 있지만, 밝히지 않는다면 지원할 수 없다” 등이다. 이런 발언이 부각되자 그를 강경한 대북관을 지닌 젊은 보수 정도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준석은 보다 유연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난 것에 대해 “(신용불량 상태인) 북한이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군가 보증을 서야 하는데 그 역할을 대통령이 자처한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며 대화에 긍정적이었던 그다. 지난해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개성공단을 뛰어넘어 파주 지역에 첨단산업단지를 세워 북한 노동자들이 휴전선을 넘어와서 일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한 적도 있다. 이준석 또래의 MZ세대는 진보와 보수란 이념에 매몰되기보다는 그때그때 실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특성을 보인다. 대화를 통해 평화를 구축하자는 진보나 군사력 증강을 통해 압박하고 견제하자는 보수의 정형화된 대북정책에 갇혀 있지도 않다. 평소 능력주의와 성과를 강조해 왔던 이준석이 진보보다 더 진보적인 경협안을 내비친 것도 이런 배경일 것이다. 젊은 지도자들이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하면 좋겠지만 낙관하기는 어렵다. 스위스 유학파인 김정은에 대해 좀 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것이란 기대가 있었지만 여태껏 북한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이준석 또한 개인 입장이 아닌 당 대표로서 보수당의 대북정책에 얼마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합병해 미국과 러시아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인 2014년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미-러 정상이 깜짝 조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다른 정상들이 모인 방으로 몇 분 늦게 들어서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먼저 손을 들어 인사를 한 것. 푸틴 대통령이 다가가면서 두 정상은 7, 8분간 짧은 대화를 나눴다. 양국 관계가 껄끄러운 만큼 비공적인 ‘풀어사이드 미팅(pull-aside meeting)’으로 격을 낮춘 대화가 이뤄진 것이다. ▷풀어사이드는 ‘(대화를 위해) 불러낸다’는 뜻으로 보통 다자회의 중간에 회담장 한편이나 회담장 밖에서 열리는 비공식 약식 회담을 말한다. 국기 설치 등 격식을 차리지 않고, 수행자도 1, 2명에 그치거나 통역만 배석하기도 한다. 시간도 통상 20분을 넘기지 않는다. 일본어로는 ‘다치바나시(立ち話·서서 이야기함)’라고 한다. 우리말에는 정확한 표현이 없어 풀어사이드 형식의 약식 회담 정도로 풀어서 설명한다. ▷영국 콘월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처음 대면했다. 12일 정상회의장에서 양 정상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어 같은 날 만찬장에서 문 대통령은 김정숙 여사를 손짓으로 불러 함께 스가 총리 부부에게 먼저 다가가 1분 동안 대화하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포착됐다. 문 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인 제스처를 보였지만 한일 정상 간 약식 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2019년 1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회담장에 도착하자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고 권해 돌발 회담을 이끌어냈다. 영어 통역관만 있어 아베 총리 발언이 영어로 옮겨지면 이를 다시 한국어로 바꿔 전할 정도로 급작스럽게 마련된 자리였다. 11분간 격식 없는 대화는 다음 달 두 정상의 정식 회담 성사로 이어졌다. 과거사 갈등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당시엔 한일 정상이 직접 만나서 문제를 풀어보자는 의지를 보여준 때였다. ▷약식 회담은 혈맹 간에 이뤄지면 홀대 논란이 나오기도 하지만 경색된 국가 사이에서는 관계 유지나 개선의 표시로 보통 해석된다. 이번에 한일 약식 회담도 열리지 않은 것은 답답한 양국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미일 정상은 이번에 10분의 약식 회담을 가졌다고 한다. 기대했던 한미일 약식 회담도 없었으며, 한미는 외교장관 회담에 그쳤다. 북핵 문제 해결이나 한일 관계 개선에 있어 한국과 미일 간에 온도차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국군과 유엔군의 이름이 새겨진 명비(名碑)가 있다. 6·25전쟁의 전사자는 국군 13만7899명, 유엔군 3만7902명. 명비에 이름을 새겨 수많은 희생을 후대에서도 기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비에는 1994년 국군의 이름이 먼저 새겨지고 6년 뒤인 2000년에야 유엔군의 이름이 더해졌다. 정부가 아니라 한 방산업체가 제작해서 기증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에는 여태껏 미군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긴 명비가 없다. 앞서 6·25전쟁 행사 때 생존한 전우들이 전사자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명비의 건설을 촉구한 적도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노력이 뒤늦게 결실을 본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3만6574명, 한국군 카투사 70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의 벽(Wall of Remembrance)’ 착공식이 21일 열린다. 방미 중인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한다. ▷내달 6·25전쟁은 71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번 추모의 벽 건설도 생존한 용사들이 앞장서서 시작했다. 취지에 공감한 한미의 민간단체들이 십시일반 기부금을 모았지만 약 250억 원인 건설비 마련에 힘이 부쳤다.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한국 정부는 뒤늦게 지원에 나섰다. ▷추모의 벽은 내년까지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 내 ‘추모의 연못’ 주변에 설치된다. 화강암 판에 전사자들의 이름이 알파벳 순서로 새겨진다. 가장 첫 줄에는 존 에런 주니어(John Aaron Jr.) 육군 이등병이 자리 잡는다. 그는 1950년 7월 27일 하동 전투에서 사망한 300여 명의 미군 중 한 명으로 당시 22세였다. 미 8군사령관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던 월턴 워커 장군의 이름도 새겨질 것이다. 그는 당시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이다(Stand or die)”라고 소리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6·25전쟁에 참여한 미군은 178만 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제 생존자는 50만 명 남짓이고, 하루 600명 정도가 세상을 뜨고 있다고 한다. 참전용사들에게 예우를 갖추고,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시간마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추모의 벽이 마련되는 것은 다행이다. 미국의 보훈단체들은 ‘더 이상 잊혀지지 않는 전쟁(No Longer the Forgotten War)’이라며 6·25전쟁 되새기기 운동에 나서고 있다. 우리도 국가의 부름에 목숨을 내놓고, 명비에 한 줄 이름을 남기고 떠난 수많은 청춘들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모병제 도입 논란이 벌써부터 뜨거워지고 있다. 4·7 재·보궐 선거에서 ‘이남자(20대 남성)’의 표심 얻기에 실패했던 여당의 잠룡들이 모병제 도입 가능성을 내비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거들고 나섰다.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는 7일 모병제에 대해 “대선 국면에서 논의될 텐데 정확한 실정을 여야 모두 알고 대안을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인구 감소로 인해 현재의 징병제로는 병력 수급에 한계가 있는 만큼 모병제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위협이 커진 상황에서 병력 감축 가능성이 큰 모병제의 도입은 시기상조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병력 수급 절벽, 모병제 필요 모병제 도입 검토는 2000년대 이후 선거철 때마다 거론됐지만 ‘반짝 관심’에 그칠 뿐이었다. 이런 사이 출생률 하락으로 인한 병력 감소 위기는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현재 우리 군의 57만여 병력 중 병사는 30여만 명 수준이다. 복무 기간을 18개월로 했을 때 매년 20만 명은 충원돼야 현원이 유지되는 구조다. 그런데 안석기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2020년 29만 명이었던 현역 입영 대상자 수가 2025∼2030년에는 20만∼22만 명 수준으로 떨어진다. 2038년 이후로는 15만 명 이하로 감소한다. 이런 까닭에 2020년 중반부터 병력 수급에 차질이 예상되고, 2030년대 후반이 되면 징병 대상자 모두를 군에 보내도 현재의 병력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는 상황이 된다. 모병제 도입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간부가 아닌 사병도 직업 군인으로 만들어 안정적으로 병력을 수급하고, 새로운 청년 일자리도 공급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자는 것이다. 문제는 예산이다. 지난해 국회 예산정책처가 분석한 ‘모병제 도입에 따른 추가 재정 소요’ 자료에 따르면 모병제로 병사 20만 명을 모집하는 경우 2021∼2025년 필요한 비용은 29조1000억 원으로 추산됐다. 같은 기간 징병제를 유지하면 15조8000억 원이 드는 것을 감안하면, 모병제 도입 시 매년 약 2조7000억 원의 예산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모병제로 인한 사회적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상목 국방대 국방관리대학원 교수는 2017년 징병제로 인해 학력 단절 등으로 놓치는 병사들의 기회비용이 1인당 4169만 원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모병제 도입은 선택이 아니라 시기의 문제”라며 “미래 안보 전략 차원에서 징병제를 유지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핵 여전한데 병력 감축 우려 모병제가 도입되면 병력 감축은 불가피하다. 전문가들은 예산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모병제가 되면 우리 병력은 30만 명 내외로 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이런 병력 규모로 정규군만 130만 명이 넘고, 핵까지 가진 북한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모병제가 되면 국방비 가운데 인력비의 비중이 증가해 첨단 무기 도입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모병제가 되면 병역 기피나 젠더 갈등은 줄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군 생활이나 급여를 비롯한 보상의 수준이 향상되지 않으면 저소득, 저학력의 청년들이 주로 군에 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흙수저 입대’ 논란이다. 게다가 모병제가 돼도 충분한 병력을 충원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사병 계급의 직업 군인에 대한 선호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병으로 입대한 이후 부사관이나 장교로 가는 길을 터주자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이럴 경우 군대가 역피라미드형으로 변해 기존의 지휘 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인구 절벽이 문제지만 그렇다고 안보 불안이 생겨서는 안 된다”며 “모병제가 되면 병력 감축은 불가피해서 결국 북핵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제2창군’ 각오로 해법 찾아야 무엇보다 모병제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졸속 추진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안보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미래 안보 상황을 고려해 향후 필요한 병력 규모가 먼저 산출돼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징병제를 유지할지, 모병제를 도입할지, 아니면 둘을 혼용할지가 면밀히 검토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병력 수급 방안은 향후 군 조직의 변화나 무기 체계 도입과 맞물려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하는 것이어서 군이 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성이 크다. 양욱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모병제로 가는 것은 제2의 창군에 비할 정도로 군에는 큰 변화”라면서 “군이 적정한 병력을 산출하기 전에 모병제를 도입하자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군은 정치권의 활발한 모병제 논의와 달리 “시기상조”라며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여군을 비롯한 간부 확대, 현역병 기준 완화 등으로 병력 규모 유지에 매달리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긴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이제라도 군이 나서서 병력 수급의 어려움을 밝히고, 합리적인 대안을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美-英-獨-日등 103개국이 모병제 시행전 세계적으로 징병제보다 모병제를 택한 나라가 많다. 첨단무기 중심으로 군이 현대화되면서 전문적인 직업 군인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 모병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103개국으로 유엔 회원국(192개국)의 57.4%에 이른다. 반면 징병제를 유지하는 국가는 스위스 터키 이스라엘 등 66개국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을 거치며 반전 여론과 함께 징병제 폐지 목소리가 커지자 1973년 모병제로 전환했다. 전환 초기 저학력자와 빈곤층이 대거 입대하며 병력의 질적 저하 우려가 컸으나 훈련병 엄선 작업과 지속적인 훈련으로 이를 보완했다. 유럽에서는 영국이 1963년 모병제 전환을 처음 실시했고, 2001년 프랑스, 2004년 이탈리아, 2011년 독일이 모병제로 바꿨다. 하지만 스웨덴은 2010년 모병제로 전환한 뒤 러시아의 위협이 고조되자 2018년 징병제로 다시 전환했고, 비슷한 이유로 노르웨이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등도 징병제로 환원했다. 중국의 안보 위협 아래 있는 대만은 모병제를 논의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곳이다. 대만은 1990년대까지 40만 명의 군대를 징병제로 유지했지만 2000년부터 모병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했고, 2018년 완전히 전환했다. 하지만 모병제 전환 이후 지원율이 떨어지고, 예산 부담으로 병력이 20만 명으로 줄며 국방력 약화의 문제점이 제기됐다. 이상목 국방대 국방관리대학원 교수는 “대만은 모병제가 사실상 실패했지만 영국은 모병제를 통해 만든 20만 군대로 강군이라 평가받는다. 모병제 도입 못지않게 어떻게 안착시킬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징병제::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가 병역의 의무를 강제하는 것. 저비용으로 다수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인력 자원의 비효율적 활용, 형평성 문제 등이 제기됨.::모병제::개인이 국가와 계약해 직업군인이 되는 제도. 병역 기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예산이 많이 들며 병력의 질적 저하가 우려됨.}
페이스북은 최근 호주 정부가 언론사에 뉴스 사용료를 내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추진하자, 뉴스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호주 국민 중 40%가 평소 페이스북을 통해 뉴스를 봤기 때문에 불편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컸다. 일개 기업이 정보통제권을 휘두른다는 비판 또한 커졌다. 마크 맥가원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총리는 “페이스북이 북한 독재자처럼 군다”고 일갈했다. ▷호주 의회가 25일 구글, 페이스북 등 거대 플랫폼 기업에 뉴스 사용료를 부과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그동안 구글 등은 개별적으로 일부 언론사와 뉴스 사용 계약을 맺어 왔는데 법으로 사용료 지급을 명시한 것은 세계 최초다. 구글은 검색, 페이스북은 뉴스 서비스 중단을 꺼내며 법안 추진에 반대해 왔지만, 법안 통과 직전에 최근 호주 정부와 협상을 통해 합의점을 찾았다. 정부가 뉴스 사용료를 강제적으로 조정하기 전에 플랫폼과 언론사 간 자율적인 협상을 장려하는 쪽으로 법안이 수정됐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사용료 협상에 합의하면 법 적용에서 예외가 되기 때문에 구글 등은 호주 언론사와의 뉴스 사용료 협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호주가 관련법을 마련한 것은 플랫폼 기업들이 뉴스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면서도 언론사에 적절한 사용료를 지급하지 않아, 시장 왜곡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시장규제기구인 호주경쟁소비자위원회(ACCC)의 2018년 조사에 따르면 디지털 광고에 100달러가 투입된다면 이 가운데 구글이 53달러를, 페이스북이 28달러를 가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뉴스 사용료는 제대로 내지 않아 호주 언론사들의 경영 상황이 악화되고 있으며, 개별 언론사가 거대 플랫폼 기업을 상대로 문제를 바로잡기에도 한계가 있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 영국, 캐나다 등도 호주와 비슷한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EU는 ‘디지털 서비스법’ 등에 플랫폼 기업의 뉴스 사용료 지불을 명문화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캐나다도 수개월 안에 뉴스 사용료 부과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플랫폼 기업이 정당한 뉴스 사용료를 내도록 하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글로벌 기준에 맞게 거대 플랫폼과 국내 언론사 간 제대로 된 뉴스 사용료 부과 모델을 마련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구글, 페이스북 등은 국내에서 뉴스 서비스를 하면서도 ‘아웃링크’(플랫폼에서 클릭하면 언론사 홈페이지로 연결되는 것) 방식이라며 사용료를 내지 않아 왔다. 한국 정치권과 정부도 구글 등이 해외에서는 뉴스 사용료를 내면서도 한국에서는 갖은 이유를 대가며 어물쩍 넘어가는 상황을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나의 사랑 팽조,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떠오릅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27세 연하 연인인 안 팽조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1962년 처음 만나 죽기 전까지 보낸 1218통의 러브레터 중 하나였다. 그는 부인 다니엘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상태였다. 팽조는 미테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함께 미테랑의 장례식에 참석하며 첫 공개 석상에 나왔다. 34년간의 밀회가 끝난 뒤였다. ▷프랑스 대통령의 스캔들은 낯설지 않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일본 여성과의 혼외 정사설이 나왔고,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전 대통령은 밀회 상대의 집에서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부인과 결혼을 유지하며 모델 카를라 브루니와 동거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은 한밤중 여배우인 연인 집에 가려고 스쿠터를 몰고 파리 거리를 달렸다. 성에 개방적인 프랑스여서 가능한 일이다. ▷17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73)가 2018년 8월 파리 자택에서 20대 여자 배우를 두 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재조사를 통해 지난해 12월 기소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프랑스 대배우가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가해자가 되자 비난 여론도 뜨겁다. ▷드파르디외는 2014년 영화 ‘웰컴 투 뉴욕’에서 성범죄 가해자 역할을 맡았다.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유력 경제인이 미국 뉴욕에서 수많은 여성들과 환락을 즐기고, 호텔방을 청소하러 온 흑인 객실 청소 직원에게 성폭행을 시도해 몰락하는 얘기다. 이 영화는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실화를 각색한 것이다. 스트로스칸 전 총재의 국제적 망신 이후 프랑스 내 각성의 목소리가 높았고 관련 영화까지 나온 것이다. 그런데 드파르디외의 인생이 그 영화를 닮아가는 상황이다. ▷프랑스에서는 관대했던 성 인식이 권력과 연결되면 왜곡되고, 심지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미투 열풍’과 맞물려 커지고 있다. 베스트셀러 장편소설인 ‘동의(Le consentement)’를 통해 프랑스 문단 내 남성 원로 작가의 성폭력을 고발한 바네사 스프링고라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학대를 증언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난해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가 성폭행 의혹을 받거나 ‘미투’를 폄훼한 장관 2명을 임명하자 거센 비난이 이는 등 프랑스의 성 인식은 엄격해지고 있다. 정치적 계산에 따라 성폭력 가해자까지 감싸고도는 우리 정치권의 행태도 뿌리 뽑을 때가 됐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이 발언으로 외교가를 뒤집어놓았다. 김정일은 이로부터 22개월 뒤 사망해 ‘캠벨의 예언’은 적중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2009년 8월 북한에 억류된 여기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방북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일행에 응급의학 전문의가 있었고 그의 김정일 근접 관찰이 판단에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캠벨이 그런 예측을 왜 공개했는지는 의문이다. 당시 김정일 사망에 따른 급변사태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을 감안하면 주변국에 경고음을 울리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 캠벨은 김정일 사망 후 한국 일본 중국과 연쇄 회동했고, 아버지를 잃은 김정은에겐 대화를 촉구하며 북한 상황의 관리에 나섰다. 이런 대북통 캠벨이 조 바이든 새 행정부의 ‘아시아 차르’로 합류한다. ▷차르(Tsar)는 원래 러시아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 관가에선 공식 직함은 아니고, 정책을 조율하는 백악관 특별고문이나 조정관을 이렇게 부른다. 바이든 당선인은 중요 사안에 차르를 임명했다. ‘기후 차르’ ‘코로나19 차르’에 이어 ‘아시아 차르’ 신설은 북한을 비롯한 아시아 정책에 집중하겠다는 메시지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이 주로 중동과 유럽 전문가로 채워졌고, 그나마 대북통인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 내정자도 멀리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대북정책조정관을 맡았기 때문에 현안엔 낯설다는 우려도 있었다. 김정일-김정은 정권교체기(2009∼2013년)에 북한을 상대한 캠벨의 귀환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북한도 당장 ‘캠벨 효과’ 분석에 들어갈 것이다.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은 당 제1부부장에서 부부장으로 내려갔지만 대남 독설 성명을 내며 건재를 알렸는데, 그가 신설이 예상되는 북한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이끌 가능성이 있다는 북한 전문가의 관측도 나온다. 그렇게 되면 향후 임명될 대북정책특별대표와 함께 캠벨이 김여정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을 상대할 수 있다. 김정은-바이든 대좌가 성사된다면 그 밑돌을 놓는 것도 이들 몫이다. ▷캠벨의 등장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기대감도 나온다. 과거 북핵 6자회담을 하면서도 남북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캠벨이다. 하지만 그는 오바마 행정부 때 중국 견제를 위한 아시아 집중 전략인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를 설계했으며 이번에도 대중 견제에 집중할 것 같다. 그는 취임 전 기고를 통해 중국 견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 동맹들의 ‘맞춤형 연합체’도 꺼냈다. 미중 간 선택의 압박에 놓인 한국에 구체적인 차르의 압박이 밀려오는 것은 시간문제일지 모른다. 그를 마냥 반길 수 없는 이유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코로나19 하루 신규 확진자가 1000명을 넘나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 두기 강화 조치로 집에서 조촐히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지만 의료진에게는 이마저도 언감생심이다. 겹겹이 방호복을 입고 야외 임시진료소에서 지난여름 폭염에 시달렸던 그들은 이번엔 갑작스레 찾아온 맹추위에 핫팩으로 몸을 녹여 가며 코로나 전장(戰場)을 지키고 있다. ▷중국이 우한시에서 원인 불명의 집단 폐렴이 발생했다고 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한 지 31일로 딱 1년이다. 그동안 세계 확진자는 8200만 명, 사망자는 179만 명을 넘겼다. 백신 개발 성공과 각국의 접종 소식이 이어지고 있지만 우리에겐 아직 먼 얘기다. 게다가 집단면역 형성까지는 적잖은 시간도 걸린다. 여기에 각종 변이 바이러스마저 확산되며 의료진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처’가 최근 올해 주목한 과학계 인사 10명을 선정했는데 대부분 코로나19와 싸웠던 의료진과 전문가였다. 미국의 코로나19 대응을 이끌고 있는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의 앤서니 파우치 소장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타임지의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오르며 ‘K방역’을 인정받기도 했다. 정 청장은 전문성에 근거한 일관되고 솔직한 브리핑으로 국민들의 코로나19 불안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무엇보다 의료진을 향한 국민의 진심 어린 응원이 가득했던 한 해였다. 코로나 전사들을 응원하는 ‘덕분에 챌린지’ 참여자는 5만 명을 넘겼다. ▷하지만 의료진의 남모를 고통이 컸던 한 해이기도 했다. 10월까지 코로나19에 감염된 국내 의료진은 159명에 달했다. 의료진은 안전장비를 착용한다고 해도 확진자와 밀접 접촉하는 만큼 항상 감염 위험에 노출돼 있다. 4월 코로나19 환자를 진료하다가 감염돼 숨진 허영구 원장에 대한 추모 열기도 뜨거웠다. 정치권은 고인의 의사자 지정에 나섰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며 의료계에서는 의료진에 대한 안전 보장과 적절한 보상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WHO가 9월 “의료진에게 안전한 근무 여건과 교육, 급여를 제공하라”며 각국에 촉구했지만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시작된 정부의 연말연시 특별방역기간은 내년 1월 3일에야 종료된다. 확산세 반전을 위한 총력전 기간이기도 하다. 많은 의료진이 가족과 함께 집에 있기보다는 동료, 환자들과 병원에서 새해를 맞을 것이다. 그들이 외롭거나 지치지 않게 연말연시 응원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도 당신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절망보다 희망을 믿고 있다고.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각국의 관심에 비해 그는 요즘 너무 말이 없다. 인터뷰도 하지 않고, 최근 한 달여 동안 트위터에 올라온 글도 10개 남짓.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토니 블링컨(58) 얘기다. 활발한 트윗 행보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트윗들을 읽다 보니 어느 정도 ‘일관성’이 보인다. 최근 벌어진 국제 인권 이슈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잊지 않고 입장을 밝힌 것. 대부분 인권 경시 국가에 대한 경고와 비판이다. 지난달 이집트 인권단체가 외국 대사들과 간담회를 갖고 자국의 인권 실태를 고발하자 이집트 당국은 단체 회원 3명을 테러 혐의 등으로 체포했다. 이러자 블링컨은 “외국 대사를 만나는 것이 범죄는 아니다”고 트윗했다. 같은 달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가 반군을 향한 군사작전에 나서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피난길에 오르며 지역 정세가 요동치자 “에티오피아의 인도주의적 위기에 깊이 우려하고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이달 이란 정부가 반정부 언론인 루홀라 잠을 전격 처형하자 그는 관련 보도를 트위터에 링크하면서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다만 북한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행보다. 국무장관 지명 이후 그의 대북 메시지는 전무하다. 북한도 바이든 당선이나 블링컨 지명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하지만 블링컨의 대북 인식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대선을 앞둔 9월 인터뷰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최악의 폭군(worst tyrants) 중 한 명’으로 불렀다. 바꿔 말하면 그에게 북한은 폭군이 폭정을 행사하는 최악의 인권 유린국 중 한 곳이다. 이런 인식은 과거 행보에서도 감지된다. 그는 2015년엔 북한의 인권 침해 사례를 수집하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서울사무소 설립을 지지했다. 이듬해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의 조건 중 하나로 인권 침해 행위 중단을 거론하기도 했다. 블링컨이 인권 이슈에 꾸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성장 배경과도 관계가 있다. 그의 선대는 인권 침해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국무장관 지명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이런 가족사를 상세히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할머니는 헝가리의 공산치하를 피해 미국으로 왔다고 했다. 자신이 초등학생일 때 이혼한 어머니가 다시 만난 의붓아버지는 폴란드 비알리스토크에서 학살된 어린이 900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라고 소개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달 트위터에 이런 가족사를 다시 언급한 동영상을 올리며 “내 가족사가 나를 공직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국무장관에 오른다면 인권 문제를 간과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도 읽혔다. 블링컨은 바이든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로 불린다. 바이든이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할 때 연을 맺어 20년을 동고동락했고, 주요 정책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블링컨이 김 위원장을 폭군으로 부른 것처럼 바이든 당선인은 지난 대선 토론회에서 ‘폭력배(thug)’라고 불렀다. 북한에 대한 인식도 비슷한 셈이다. 이에 북한이 대화에 나서지 않는다면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인권 등을 문제 삼아 추가 제재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폐기하고, 민주주의와 인권, 법치의 강조를 예고한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인권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으로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이 강행처리한 대북전단금지법이 국제적 인권 이슈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국제인권단체뿐 아니라 미국 정부와 의회, 영국 의회까지 가세하며 한국 정부의 인권 수호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인권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가 내달 출범하면 대북전단금지법이 한미 간 더욱 첨예한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대북인권단체가 전단 살포를 시도하고 정부가 대북전단금지법을 실제 적용하기 시작하면 국제사회의 인권 침해 우려가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여당이 국제사회의 우려를 내정간섭이라고 일축하고, 법 시행을 강행하는 것은 갈등과 혼란만 키우는 일이다. 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 지적은 수용해야 마땅하다. 황인찬 국제부 차장 hic@donga.com}
예정대로 열린다면 앞으로 딱 233일 남았다. 내년 7월 23일 개막 예정인 도쿄 올림픽 얘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일본 내에서도 규모 축소, 대회 취소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꿈쩍하지 않는 분위기다. 지난달 도쿄를 찾은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를 만난 뒤 “경기장에 관중이 들어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올림픽에 대비해 프로야구 관중을 80% 채우는 ‘코로나 실험’까지 나선 일본 정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컸지만 IOC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 바흐 위원장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를 만나서는 “당신이 슈퍼마리오 분장으로 올림픽 경기장 한가운데에 나타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서 어떤 의상을 입고 나올지 상상하고 있다”고 했다. 아베 전 총리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폐막식에서 직접 마리오 분장을 하고 나타나 차기 개최지 도쿄를 소개한 퍼포먼스를 언급하며 ‘내년에도 기대하겠다’고 한 것. 아베 전 총리는 “어떠한 좌절을 겪어도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높은 품격을 기리는 대회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사실 올림픽 취소 결정이 쉽지는 않다. 선수들의 오랜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또 앞서 투입된 건설·운영비 등 일본이 최대 51조 원의 손실을 볼 것이란 전망도 있다. 경제 도약을 위해 유치한 올림픽이 불황으로 가는 입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베 전 총리가 올림픽을 통해 얻으려 했던 또 다른 목표도 달성하기 어려워진다. 그것은 바로 내년 10년을 맞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더 정확하게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끔찍한 악몽을 털어내고 일본의 재건 성공을 대외에 알리는 것이다. 아베 전 총리는 도쿄 올림픽을 “동일본 대지진을 딛고 부흥을 이뤄 낸 일본의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삼겠다”고 공언해 왔다. 올림픽은 종종 스포츠나 경제적 이익 이상의 지향점을 갖곤 한다.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는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미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이런 효과를 톡톡히 봤다. 당시 목표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이미지를 지우는 것이었다. 보통 개회 선언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하지만 당시엔 히로히토 일본 국왕이 개회 선언에 나섰다. 전쟁을 이끌며 주변국에 큰 상처를 줬던 일본 국왕이 전쟁 항복 선언 19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서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당시 마지막 성화 봉송은 ‘원폭 소년’이라고 불린 히로시마 출신 선수가 맡기도 했다. 이번 도쿄 올림픽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악몽을 떨쳐내는 메시지 전달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 올림픽의 성화 봉송은 ‘후쿠시마 J 빌리지’에서 시작하는데 이곳은 당시 원전 사고 수습의 전진기지였다. 올림픽의 첫 경기인 일본과 호주의 소프트볼 경기도 후쿠시마에서 열린다. 일본 정부가 올림픽을 통해 일본인의 머릿속에 남은 전쟁이나 원전 사고의 트라우마를 씻어내려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이나 방사능 오염은 일본뿐 아니라 주변국에도 큰 피해를 줬거나 줄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은 아직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는 올림픽 개막 전에 원전 방사능 오염수의 해양 방류에 들어가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국제 기준에 맞춰 오염수를 처리하겠다”고 하지만 안전성 논란은 여전하다. 문제는 코로나19 확산 상황에서도 올림픽의 정상적 개최를 밀어붙이고 오염수 방류 등을 실행하면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올림픽이 코로나19 재확산의 진원이 될 수 있고, 충분한 안전성 검증 없는 오염수 방출은 해양 재앙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코로나19 상황이나 백신 효과 여부에 따라 올림픽 개최나 운영 방법도 유동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국제 평화와 화합 증진’이란 올림픽 정신에도 부합하는 길이다. 황인찬 국제부 차장 hic@donga.com}
중국은 임진왜란을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戰爭)’이라 부른다. 일본에 침략당한 조선을 중국이 도운 전쟁이란 뜻이다. 중국은 이런 인식을 350여 년 뒤 발발한 6·25전쟁에도 적용했다.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미국에 침략당한 조선을 중국이 도운 전쟁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을 구했다’는 비슷한 뜻으로 읽히지만 둘은 차이가 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6·25전쟁은 중국의 지원 약속 아래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 중국은 전쟁 ‘공범’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중국은 올해 70주년을 맞은 6·25전쟁에 대해 ‘정의’와 ‘평화’를 내세우고 있다. 전쟁 당위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아직 정전 상태인 6·25전쟁에서 승리했다고도 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19일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 평화의 승리, 인민의 승리”라고 했다. 23일엔 “아무리 강한 나라,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약자를 괴롭히고, 침략을 확대해 나간다면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고 했다. 이는 미국을 향한 경고로 주로 해석됐다. 하지만 우리도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이 항미원조전쟁 기념일로 정한 10월 25일은 중국군이 평북 운산에서 국군 1사단을 기습 공격한 날이다. 당시 중국이 참전 후 첫 승리에서 무조건 이기기 위해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국군을 우선 타깃으로 삼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시 주석은 10월 19일엔 ‘항미원조 작전 70주년 전시’를 참관했다. 70년 전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땅을 밟았던 날이다. 사실 시 주석은 10년 전에도 비슷했다. 2010년 10월 1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항미원조 작전 60주년 좌담회’. 그는 “항미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했다. 당시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에 선임된 시 주석이 국무원과 중앙군사위를 대표해 나선 연설에서였다. “60년 전 발생한 전쟁은 제국주의가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것”이며 “그런 전략적 (참전) 결정을 내린 정부에 경의를 보낸다”고도 했다. 이러자 당시 김성환 외교부 장관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이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내게는 옳은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한미가 즉각 반박하자 신화통신과 런민일보는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이라는 입장을 담은 중국 국방대학 교수의 글을 실었다. 중국이 상황 수습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왔다. 그러나 이번엔 요지부동이다. 한미 정부가 시 주석의 6·25전쟁 왜곡 발언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지만 별다른 해명이 없다. 한술 더 떠 중국 공산당 청년 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은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이 아니고 한반도에서 일어난 내전”이라고 강변했다. 지난 10년 동안 중국은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툴 정도로 급성장했다. 시 주석 본인도 10년 전에는 유력한 차기 지도자 정도였지만 이제는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을 넘어 장기 집권 체제를 굳히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보수와 진보정권 가리지 않고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집중했다. 5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항일전승절 70주년에 톈안먼 망루에 올랐던 것도, 최근 미중 갈등 격화 속에서도 현 정부가 미국의 반중전선 동참 요청에 적극 화답하지 않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그런데 중국은 한국군 13만8000명이 죽고 45만 명이 다치고, 민간인 100만 명이 희생된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띄우고 있다. 한국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찾아보기 어려운 행보다. 3일 미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든 대중 강경 기조는 누그러지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하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백악관에 입성하든 마찬가지다. 대선이 끝나고 대중 정책을 정비할 때 미국은 보다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미중 간 선택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6·25전쟁 70주년인 올해도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았다. 향후 어떤 동맹 전략을 가져가야 할지 냉철히 살펴볼 때다. 황인찬 국제부 기자 hic@donga.com}
“세계가 부러워할 최강 무기가 있다. (다른 나라가)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을 우리는 갖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미네소타 유세에서 대뜸 신형 무기 얘기를 꺼냈다.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 밥 우드워드가 저서 ‘격노’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신형 핵무기 시스템 얘기를 했다”고 밝힌 뒤였다. 이후 ‘대통령이 기밀을 노출했다’는 비판이 거셌지만 이번엔 아예 공개석상에서 재차 언급한 것이다. 다만 신형 무기가 뭔지에 대해서는 “말 안 하겠다”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러자 전문가 사이에선 새 무기가 러시아가 개발한 극초음속 미사일을 뛰어넘는 속도의 미사일이라거나 위력을 약화시켜 실제 사용 가능성을 높인 신형 저강도 핵탄두(W76-2)란 추정이 나왔다.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을 감안하면 수십 년간 미국이 비밀리에 연구 중인 신형 레이저 무기가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트럼프는 왜 신형 핵무기 얘기를 갑자기 꺼냈을까. 이는 최근 강해지고 있는 미국의 중국을 향한 핵무기 견제 움직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미 국방부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핵탄두 200기를 갖고 있고 10년 뒤 2배로 늘어날 것이라며 중국을 압박했다. 펜타곤이 중국의 핵탄두 수를 밝힌 것은 처음이다. 찰스 리처드 미 전략사령관은 “중국은 핵능력을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또 중국이 과거 약속했던 ‘핵무기 선제 사용 금지’ 입장을 신뢰할 수 없다는 기색도 내비쳤다. 중국은 1964년 첫 핵실험 이후 이런 원칙을 밝히며 미국과 러시아(옛 소련) 뒤에서 핵 능력을 강화해 왔는데 이제 중국의 핵능력이 더 커지는 것을 미국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한 셈이다. 이런 까닭에 미국은 러시아와의 핵군축 협상인 ‘뉴스타트’에 중국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이 협정은 미국과 러시아가 각각 핵탄두를 1550기로 제한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내년에 협정 만료가 돼 연장을 논의하는데 이참에 중국도 끼라는 것이다. 미국의 군축담당 특사는 “중국이 큰 지위를 얻으려면 강한 책임감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 핵 증강에선 만리장성 같은 비밀이 더 없어야 한다”고도 했다. 6000기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한 미국과 러시아에 비해 중국이 보유한 핵 규모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 이런 까닭에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국과 러시아만큼 핵을 늘리거나, 반대로 미국과 러시아의 핵이 중국만큼 줄어들 때까지 중국이 핵군축 협상에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장 중국 외교부는 “미국과 러시아가 핵군축에서 최우선 순위 책임을 갖고 있다”며 참여를 거부했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중국 내에서는 미국과 핵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 편집장은 “중국이 핵탄두를 1000개까지 늘리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둥펑-41’을 최소 100기 마련해야 한다”고 나섰다. 중국사회과학원은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 행동에 대해 중국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문제는 이런 미중 간 군사적 경쟁이 한국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한국을 찾은 미 국무부 군비통제 대통령 특사는 “중국은 핵무기로 무장한 깡패”라면서 “(중국의 위협 대응에) 한미가 적합하다고 보일 정도로 함께 일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에 당장 중국이 강하게 반대하는 중거리 미사일의 한반도 배치가 본격 거론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이렇게 미중 갈등은 경제 전쟁을 넘어 이제 실제적인 군사적 경쟁, 그중에서도 핵 경쟁으로 심화되는 상황이다. 북한의 핵 문제를 풀지도 못했는데 미중 간 군사적 경쟁이 심화되는 난국이 우리 앞에 그려지고 있다. 정부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기대고 있다”며 미중 모두에 손을 내미는 형국이다. 하지만 미중 갈등이 격화될수록 한국에 선택을 강요하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한에 대화나 협력 제안을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더 시급한 것은 치열해지는 미중의 패권 경쟁 속에 우리가 펴 나가야 할 안보 생존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황인찬 국제부 차장 hic@donga.com}
‘밀크티 동맹(Milk Tea Alliance)’이란 말이 있다. 올해 홍콩, 대만, 태국의 젊은 시위대들이 반(反)독재, 반중 시위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만든 연대다. 이들 국가에서 밀크티가 공통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점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각국 시위대가 밀크티를 들고 승리의 건배를 하는 이미지들이 올라온다. SNS 시위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8월 16일 태국 방콕에서 새 총선 등을 요구하는 반정부 집회 시위에 2만 명이 모였다. 2014년 군사 쿠데타로 쁘라윳 짠오차 정권이 들어선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비슷한 시각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의 중앙역 광장에서도 시위가 열렸다. 태국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연대 시위였다. “민주주의를 위한 범아시아 동맹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컸다. 그런데 이런 밀크티 동맹의 타깃이 점차 중국으로 확대되는 모습이다. 대만과 홍콩에서 벌어진 반중 시위에 태국 등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중국과 다툼이 있는 필리핀이나 역시 중국과 심각한 국경 분쟁을 겪고 있는 인도에서도 밀크티 동맹 동참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이러자 중국도 경계심을 드러냈다. 중국 외교부는 “홍콩과 대만의 독립을 원하는 이들은 종종 온라인으로 결탁하고 있다. 하지만 모의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올해 들어 국제사회에서의 반중 정서가 급히 확산되는 분위기다. 중국 우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원지로 지목되면서 중국에 대한 비난이 컸던 바 있다. 중국은 세계보건기구(WHO)의 우한 현지 조사를 수용했지만 여태껏 조사팀이 우한을 찾지 못해 논란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중국이 5월 말 홍콩 국가보안법을 강행 처리한 것에 대한 서방 세계의 반발은 경제 제재 등으로 확전 중이다. 무엇보다 홍콩 민주화 인사들의 생명권, 재산권이 당장 ‘도마 위에 오른 생선’ 처지가 됐다는 우려가 크다. 중국도 반중 정서가 높아지는 상황을 심각하고 보고 있다. 중국 국가안전부 산하 싱크탱크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은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전 세계의 반중 정서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못지않게 높아질 수 있다”는 보고서를 최근 중국 최고지도부에 전달했다. “반중 정서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대한 저항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국 외교 수뇌부가 바빠지는 모습이다. 양제츠 공산당 중앙외사위원회 판공실 주임이 지난달 싱가포르와 한국을 찾았고, 왕이 외교부장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5개국을 방문했다. 이어 양제츠 주임은 다시 이달 초 미얀마와 스페인, 그리스를 찾았다. 코로나 사태로 각국의 대면 외교가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중국 외교 랭킹 1, 2위가 광폭 행보를 벌인 셈이다. 그러나 잡음은 여전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교장관 등은 홍콩보안법을 면전에서 문제 삼으며 왕이 부장을 낯 뜨겁게 만들었다. 양제츠 주임이 부산에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만나 양국 관계 증진 등 원만한 대외 메시지를 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은 내년 100주년을 맞는다. 중국은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사회’ 완성을 자축할 예정이지만 반중 정서가 높은 상황에서는 그들만의 축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중국은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미국에 맞서는 강력한 신중국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런 중국의 야심에 주변국에선 기대 못지않게 우려도 큰 상황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최근 중국 항일 승전 75주년 좌담회에서 “그 누구든 그 어떤 세력이든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왜곡하고 비하하려 한다면 중국 인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 경고했다. 미중 경쟁이 격화되는 속에 워싱턴을 겨냥한 발언이겠지만 중국 패권주의에 대한 도전 세력은 누구라도 응징하겠다는 말로 읽힌다. 하지만 다른 주권국과의 관계를 힘으로만 찍어 누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수록 반중 연대는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중국은 알아야 한다. 황인찬 국제부 차장 hic@donga.com}
“나는 선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많은 생명을 구하기 싶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매달리는 이유를 이렇게 털어놨다. 재선을 위해 백신 개발에 다걸기를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자 새삼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고 나선 것. 그러면서도 그는 “대선 전 백신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미 대선의 막판 변수인 ‘10월 서프라이즈’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재회가 아니라 백신 개발이라는 말도 나온다. 미국 내 확진자가 500만 명을 넘긴 위기 상황에서 백신 개발 성공, 무료 접종 등을 선포하며 트럼프가 선거 막판 뒤집기에 나설 것이란 얘기다. 이런 기류를 반영하듯 미국 정부는 최근 치열하게 백신을 쓸어 담고 있다.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와 옥스퍼드대,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 프랑스 사노피와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등 글로벌 제약사와 대학을 접촉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백신의 입도선매에 나선 것. 미국은 이미 7억 회분의 백신을 확보했다. 약 3억3000만 명인 미국 전체 인구가 두 번 이상 맞을 수 있는 규모다. 이런 물량 확보전에 94억 달러(약 11조2000억 원)도 쏟아부었다. 일부 선진국도 백신 확보전에 가세했다. 영국은 프랑스 제약사인 발네바와 백신 생산시설 투자 계약을 맺고 1억 회분을 받기로 하는 등 1억6000만 회분을 확보했다. 일본은 화이자로부터 백신 1억2000만 회를 공급받기로 했고, 아스트라제네카와 추가로 1억 회분 공급 협상을 타진하고 있다. 코로나19 백신이 독감처럼 주기적인 접종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각국이 백신 창고 채우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제적 강국들의 백신 입도선매가 생산량 전망치마저 뛰어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개발이나 생산도 하기 전 ‘묻지 마 사재기’다. 영국 의약시장 조사업체 에어피니티 집계에 따르면 미국 영국 일본 등이 제약사로부터 선구매한 백신 규모는 13억 회 분량으로 2021년 1월 상반기까지 생산될 것으로 보이는 총 백신 생산량인 10억 회분을 뛰어넘는다. 세계 인구가 78억 명인 것을 감안하면 어떤 나라 국민은 여러 차례 백신을 맞을 수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구경도 못 하는 백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현실화할 조짐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백신 민족주의는 좋지 않고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모두 안전해지기 전까지 어떤 국가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백신의 공공재 성격을 인정해 모두에게 접근성이 제공될 때 진정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호소다. 하지만 이런 호소가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작동될지는 불투명하다. 백신 확보에 가장 적극적인 미국은 이미 지난달 WHO 탈퇴를 공식 통보하며 독자 노선을 명확히 했다. 유럽연합은 4월 ‘코로나19 대응’ 결의안을 선보이며 백신의 공공재 역할을 강조하는 듯했으나 이후 아스트라제네카와 백신 사전 구매 계약을 마쳤다. 중국의 바이오기업 시노백은 코로나19 백신의 3상 임상시험을 브라질에 이어 인도네시아에서 진행하며 독자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필리핀 등 일부 동남아 국가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은 잠시 제쳐두고 중국에 ‘백신 구애’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백신의 소유 자체가 국제 질서를 이끄는 하나의 패권으로 이미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글로벌 제약사와 백신 공급 계약을 맺은 것이 아직 없다. 국내 제약사들의 백신 개발은 초기 단계다. 정부는 WHO, 감염병 혁신 연합(CEPI)이 주도한 백신 공급 협의체인 ‘코백스(COVAX)’ 가입에 나섰지만 이를 통해 백신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국민 전체의 20%만 받을 수 있다. 5000만 국민 중 1000만 명만 백신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백신 확보는 국민 생명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침체된 경제를 하루빨리 회복시키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술력이 부족하다면 외교력을 총동원해서라도 백신 확보에 집중해야 할 때다. 황인찬 국제부 차장 hic@donga.com}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1월 퇴임을 앞두고 조 바이든 부통령에게 깜짝 선물을 줬다. 8년을 함께한 그에게 미국 대통령이 세계평화 등에 공헌한 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자유 메달’을 직접 수여한 것. “바이든은 나를 더 나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오바마 특유의 감성적 발언에 바이든은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오바마는 정작 바이든이 지난해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자 만류했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74)의 재선을 막기 위해 바이든(78)보다는 젊은 정치인이 나서 새바람을 일으키길 기대했다는 것. 오바마는 4월에야 바이든 공개 지지를 선언했다. 그런 바이든에게 요즘 대망론이 솔솔 불고 있다. 대선을 100일도 안 남겼는데 트럼프 대통령과의 지지율 격차를 두 자릿수까지 벌인 것. 물론 트럼프의 숨은 지지층인 ‘샤이 트럼퍼’ 등을 고려하면 결과를 속단하긴 이르다. 하지만 코로나발(發) 경제 악재에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 경고등이 켜진 것은 분명하다. 우리로서는 미 대선을 바라보는 셈법이 복잡해졌다. 무엇보다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북한의 비핵화 문제가 바이든이 집권한다면 어떻게 달라질지가 관심사다. 바이든은 1월 민주당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아무 조건 없이 만나지는 않을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조건 없이 만나줘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제재를 약화시켰다”고 했다. 지난해 11월엔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전략에 대해 “이 거칠고 험난한 외교에 대해 아무런 전략도, 인내심도 없다”고 비판했다. 이런 까닭에 바이든이 당선된다면 오바마가 북한에 대해 펼쳤던 ‘전략적 인내’가 재현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바이든이 당선되면 ‘오바마와 4년 더’인 셈”이라고 했다. 그러나 북한이 변화할 때까지 제재로 압박하는 ‘전략적 인내’ 카드를 바이든이 다시 꺼낸다고 해도 오바마 때와 똑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북한을 옥죄는 제재 카드가 한층 강력해졌다. 북한이 하노이 회담에서 영변 핵시설과 맞바꿔 해제를 요구했던 유엔 안보리의 핵심 제재 5개는 2016년 3월 이후 결의된 것으로, 실질적 제재 효과는 모두 트럼프 정부 들어 발휘된 것들이다. 이들 제재는 철광석과 수산물 등 북한의 주요 수출을 원천 봉쇄하고 북한 해외 노동자들을 모두 귀환시키는 등 평양의 달러 줄을 끊는 데 집중하고 있다. 또 바이든은 제재로 북한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중국과의 공조를 강조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그런 기류도 비치고 있다. 그의 선거캠프 홈페이지엔 “동맹국은 물론이고 중국과의 공조를 통해 조율된 대북 캠페인을 펼칠 것”이라고 돼 있다. 바이든은 1월엔 “중국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북핵 해결의 ‘열쇠’가 중국이란 바이든의 인식은 비교적 오래된 것이다. 그는 부통령 때인 2013년 12월 김 위원장의 고모부인 장성택의 실각설이 돌자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 대북 압박 및 공조를 강조한 바 있다. 그런 바이든은 2016년 한 방송 인터뷰에선 “시 주석에게 ‘북핵을 그대로 놔뒀다간 일본이 핵무장을 하게 된다’ ‘일본은 하룻밤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중국이 북핵 문제에 협조하지 않으면 동북아에서 일본을 필두로 한 핵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대놓고 중국을 압박한 것이다. 문제는 바이든의 이런 철저한 제재 공조 포석엔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는 점이다. 바이든은 지난해 12월 미 외교협회 인터뷰에서 “미국은 아시아 국가, 그중에서 특별히 한국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며 한국을 콕 짚어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동맹 무시’를 비판하면서 나온 말이지만 한국과의 연대 강화에서 1순위는 대북 정책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는 최근 북-미 협상과 별개로 독자적 남북 협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바이든의 대북 인식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벌써부터 외교가에서는 나온다. 바이든이 당선된다면 북핵 해법과 관련된 한미 간 이견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정부는 경청할 필요가 있다. 황인찬 국제부 차장 hic@donga.com}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25전쟁 70주년을 앞두고 예고했던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전격 보류했다. 한반도 인근에 미 항공모함 3척과 B-52 전략폭격기들이 전개되는 등 미국의 고강도 대북 압박에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전쟁 억제력 더욱 강화”를 강조하며 향후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고강도 도발 가능성을 예고했다. 8월 한미 연합 군사훈련 재개 여부 등을 놓고 당분간 살얼음판 한반도 정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 주재로 23일 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가 열려 인민군 총참모부가 제기한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했다고 노동신문이 24일 전했다. 앞서 총참모부는 △금강산·개성공업지구 군대 전개 △비무장지대(DMZ) 민경 초소 진출 △접경지역 군사훈련 △대남전단 살포 지원 등을 승인받겠다고 했는데 이것들이 보류된 것. 이날 DMZ에 설치됐던 북한군 확성기들의 철거 정황이 포착됐고, 북한 선전 매체는 대남 비판 기사들을 삭제하기도 했다. 북한의 이런 태세 전환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대북전단 비판 등으로 한국에 불만을 쏟아내며 대내 여론을 결집하는 데 일정 성과를 거둔 상태에서, 군사적 압박을 높일 경우 미국의 고강도 군사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는 23일(현지 시간) “북한이 계속 핵물질을 생산하고 있으며, 미확인 핵시설도 있다. 제재는 완전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북한의 대남 군사행동 보류 결정에 대해 “보류가 아니라 완전히 철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이날 오후 담화를 내고 “남조선 당국의 차후 태도와 행동 여하에 따라 북남 관계 전망에 대하여 점쳐볼 수 있는 시점”이라면서도 “(대남 군사행동에 대한) 우리의 ‘보류’가 ‘재고’로 될 때에는 재미없을 것”이라고 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워싱턴=이정은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