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배

안영배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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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ong@donga.com

취재분야

2024-03-21~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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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 정부종합청사’가 자리한 서울 은평구[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1407년 9월 25일,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명나라 황제에게 정월 초하루 하례(賀禮)를 위해 한양을 떠나는 세자(양녕대군)를 배웅했다. 어가를 타고 경복궁을 나선 태종은 세자와 함께 장의문 앞에 도착한다. 장의문은 경복궁의 뒷산인 북악산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에 세워진 성문으로,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는 서북쪽 관문이다. 한양도성의 4소문 중 하나로 북소문, 창의문, 자하문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장의문은 하늘 별자리의 기운과 연결되는 천문(天文) 지점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의 지관 문맹검은 장의문을 하늘의 천주성(天柱星·하늘기둥이라는 뜻을 가진 별자리) 기운이 있는 곳이라면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평소에 (장의문을) 닫고 보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천주성은 △낮과 밤의 운행 및 오행(五行)의 순환 법칙을 주관하고 △정치와 교육을 바로 세우고 △임금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일을 담당한다. 그러니 천주성의 기운이 있는 장의문(창의문)을 다른 한양도성 문처럼 ‘대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의 어가를 따라서 찾아가본 장의문은 ‘하늘의 기둥’에 걸맞게 공중에서 내려오는 천기(天氣) 에너지가 현재도 흘러넘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장의문 천정에 새겨진 2마리의 봉황 그림 역시 천주성을 상징하는 듯했다. 예로부터 봉황은 하늘의 신령한 새로서 하늘임금의 명령을 우주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태종과 세종이 태미원을 찾다 태종 일행은 장의문을 통과한 뒤 세검정 쪽으로 북상했다. 이 길로 계속 올라가면 평양-의주를 거쳐 중국 땅으로 갈 수 있다. 태종이 도착한 곳은 경복궁에서 도보로 1시간40분 남짓한 거리의 영서역. 나중에 연서역으로 불린 이곳은 지금의 서울 은평구 역촌동, 대조동 일대다. 태종은 이곳에서 세자와 이별했다. 태종이 “길이 험하고 머니, 마땅히 자애(自愛)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하자, 세자는 울면서 하직인사를 했다. 오로지 중국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아끼는 아들을 보내야만 하는 태종 또한 눈물을 흘렸다. 태종이 천주성(장의문)을 통과해 새로운 장소를 찾은 것은 별자리 세계로 보면 다른 천문 공간 영역으로 들어서는 일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면 천주성은 임금이 사는 자미원(紫薇垣) 영역에 속한 별자리 중 하나로, 15개의 별이 울타리처럼 펼쳐진 자미원 담장 바로 안쪽에 바짝 붙어 있다. 따라서 천주성을 벗어나는 것은 자미원 담장 너머로 나가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연서역은 하늘에서는 태미원으로 불리는 영역이다. 즉 하늘의 태미원 기운이 지상으로 하강한 곳이 연서역 일대라는 것이다. 천문도에서 자미원은 하늘 임금이 생활하는 주거지이고, 태미원은 임금이 제후와 대신 등 정부 관료들과 정사를 논의하는 정부종합청사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자미원에 오제좌(五帝坐)가 있고, 태미원에도 같은 이름의 ‘오제’가 있다. 두 영역에 임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임금이 필요에 따라 자리를 옮겨 다니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는 지상에서도 같다. 조선 지관 문맹검은 태미원인 연서역은 이궁(離宮·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무는 별궁)이 세워지는 곳이자, 임금이 수시로 백성들이 농사짓는 것을 살펴보는 민정 시찰 장소라고 했다. 즉 연서역을 태미원의 오제 별자리로 본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연서역은 중앙 정부와 지방간 공문서 전달 장소이자 관리들을 위한 말과 숙박시설을 제공하는 장소였다.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해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그만큼 임금이 잠시 머물기에도 적합했다. 역사 기록에서도 태종과 세종이 민정 시찰차 수시로 연서역을 방문한 사실이 확인된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임금이 민정 시찰차 나와 연서역 인근의 들에서 밀과 보리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 불광천의 ‘불광’이 살아나다 현재 태미원의 오제 별자리인 연서역은 온데간데없다. 은평구 역촌역 교차로에서 북서쪽 서오릉으로 가는 길(서오릉로)가에 세워진 ‘연서역 터’(은평구 서오릉로 118-1)라는 표지석만이 남아 있다. 옹기종기 들어선 주택들과 중소규모 빌딩 등이 즐비한 이곳이 서울 서북쪽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아보긴 힘들다. 다만 동네 이름인 ‘역촌(驛村)’에서 역사(驛舍)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인근의 ‘인조별서유기비’의 글에서 인조가 쿠데타로 집권하기 이전에 살았던 별서(별장)가 연서역촌 뒤쪽에 자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서역 일대가 임진왜란을 거친 조선 중기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거점지역이었음을 시사한다. 은평구 지형도를 보면 흥미로운 점도 발견된다. 연서역 터 표지석 일대가 은평구의 가장 중심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남쪽을 제외한 동·서·북쪽 삼면이 모두 산으로 에워싸고 있는 형태다. 이는 태미원 영역임을 알리는 태미원 담장 별자리와 아주 유사한 모습이다. 북한산 족두리봉에서 백련산으로 이어지는 산세는 태미원의 오른쪽 담장 별자리로, 서오릉의 봉산 줄기가 마포구 상암동의 매봉산까지 이어지는 산세는 태미원의 왼쪽 담장 별자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북쪽이 막혀 있는 모습도 비슷하다. 천문도에서 태미원은 자미원에 비해 영토가 다소 좁고 위치가 치우쳐 보이지만, 하늘나라를 시작하는 건국의 단계라고 해서 ‘상원’이라고 부른다. 나라를 일으킬 때는 무력과 공권력을 통해 기틀을 잡아나가는 게 중요하므로, 태미원에는 무(武)와 법(法)을 상징하는 이름의 별들이 많다. 이는 ‘중원’인 자미원이나 ‘하원’인 천시원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태미원 자리인 은평구는 군과 사법 질서를 담당하는 공공기관들과 궁합이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은평구의 터 기운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도시 발전사로 보면 태미원 핵심자리인 은평구 구도심은 개발이 정체돼 아직도 옛 도시 같은 느낌이 강하다. 교통, 교육, 생활편의시설 등 환경이 강남지역이나 ‘마용성’(마포 ·용산·성동구) 지역에 비해 다소 뒤처진다. 다만 은평구의 미래는 밝다. 북한산에서 발원해 불광동, 역촌동, 응암동 등을 거쳐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불광천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길이 9.21km의 불광천은 비가 와야만 물이 흐르는 건천으로, 예전에는 주변에서 버린 쓰레기와 오물 등으로 악취가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민물가마우지가 날아들 정도로 깨끗한 자연하천으로 변신했다. 2002년 서울시가 상암 경기장에서 열리는 한일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오수방지시설을 설치하고,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생태하천으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평 지역은 불광천 복원사업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다르다. 터의 기운이 확연히 되살아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시가 불광천의 이름인 ‘불광(佛光)’처럼 빛이 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도시개발 전문가들은 은평구 구도심은 GTX-A 노선인 연신내역이 들어서고, 명품 신도시인 은평뉴타운과 수색증산뉴타운과 연계되면 크게 발전할 것으로 내다본다. 청계천이 서울시내 도심을 보다 화려하게 만들어주었듯 불광천이 은평구의 미래를 밝혀줄 것이라는 얘기다. 상류의 복개 구간마저 자연하천으로 복원된다면 이런 미래 전망을 더욱 밝게 해주는 금상첨화이자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 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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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하늘 별자리를 지상에 옮긴 천문(天文)도시(上)[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서울은 하늘의 별자리 기운이 지상으로 내려온 천문(天文)의 도시다. 경복궁과 한양도성은 하늘의 으뜸 별자리인 자미원(紫微垣)이고, 광진구는 천시원(天市垣), 은평구는 태미원(太微垣) 별자리에 해당한다. 한양도성 남쪽에서 서해로 흐르는 한강은 은하수다.’ 이는 조선 세조 때 풍수로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지위까지 오른 지관 문맹검의 한양 천문풍수론을 현재 상황에 맞게 풀어본 것이다. 1452년 그가 조선의 국도(國都) 한양의 지세를 살펴본 후 임금에게 보고한 원문은 이렇다. “지금 우리 국도는 위로는 천성(天星·하늘의 별자리)에 응하여 삼원(三垣·동양의 중요 별자리인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의 형상이 환하게 갖추어졌습니다. ▲가운데로는 백악(경복궁 뒷산)이 있어 만갈래 물과(萬水)와 천가지 산(千山)이 모두 일신(一神)에게 조회(朝會)하니… 참으로 천상북극(天上北極)의 자미원이라 이를 만합니다. ▲동쪽으로는 낙천정(樂天亭·광진구 자양동 일대)이 있어 백가지 근원(百源)이 와서 모이게 되니, 이 또한 천상(天上)의 천시원입니다. ▲서쪽으로는 영서역(迎曙驛·은평구 역촌동 일대)이 있어 성(城·산)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길이 멀리 있으니 이 또한 천상의 태미원입니다.”(조선왕조실록 문종2년 3월3일 기사)한마디로 서울은 하늘에서 가장 중심 되는 별자리인 삼원의 기운이 내려온 신성한 땅이라는 얘기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양 별자리와는 다른 동양의 별자리 체계를 알아야 한다. ● 한양은 우주의 중심동양권에서는 북쪽 하늘에서 1년 내내 보이는 주극성(週極星)들을 크게 자미원, 천시원, 태미원의 3원(垣·담장)으로 구분해 불렀다. 또 3원의 별자리들은 그 형태와 움직임 등을 통해 지구 환경과 인간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3원의 별들이 지상의 인간사회를 연상시키는 명칭을 갖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3원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있는 자미원(총 39개 별자리)은 ‘하늘 궁전’으로서 ▲하늘나라 임금(북극성)과 그 대행자인 북두칠성 ▲왕비와 태자 등 임금의 가족을 가리키는 북극오성 ▲대장군, 삼정승, 비서실장 등 여러 신하 별들로 구성돼 있다. 자미원 왼편에 있는 태미원(총 20개 별자리)은 하늘 임금이 실제 정사를 펼치는 곳으로 제후와 대신 등 정부 관료들이 모인 하늘나라의 정부종합청사라고 할 수 있다. 자미원 오른편에 위치한 천시원(총 19개 별자리)은 하늘나라 백성들이 거주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도시 또는 장터에 해당한다. 서울의 한양도성이 우주의 중심인 자미원이라는 문맹검의 주장은 중국 명나라를 황제국으로 삼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다. 지상의 자미원은 하늘임금(혹은 옥황상제)의 천명(天命)을 부여받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한중일 삼국의 불문율이었다. 문맹검의 발언은 중국 베이징(北京)에다 자미원을 상징하는 자금성(紫金城)을 만든 명나라 황제에 대한 도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문맹검의 이런 발언이 결코 돌출 행동은 아니었다. 명나라를 떠받들며 사대하던 유학자들을 빼고는 조선 초기의 식자층은 고려까지 이어져 내려온 황제국의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문맹검이 활동하던 조선 세종에서 세조 때까지만 해도 고려 출신 조선의 신하들은 나라의 국격과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다. 태종 때 문신 변계량(1369~1430)은 황제만 천제(天祭)를 지낼 수 있다고 정한 중국의 원칙을 무시하고 조선의 왕이 천제를 지낼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우리 동방 땅은 단군이 시조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후손으로서 1000년 이상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문맹검의 정확한 출생과 사망 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고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의 궁궐에다 고려 전통의 불교 내불당 자리를 마련했고, 고려 특유의 천문관과 비보(裨補)풍수 등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게 그 근거다. ● 천시원으로 흘러드는 은하수 한강 자미원과 천시원, 태미원이 그려진 천상열차분야지도(조선시대 천문도)를 바탕으로 문맹검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별자리 현장들을 직접 둘러봤다. 먼저 천시원으로 지목된 낙천정을 찾았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동남쪽에 해당하는 서울 광진구 자양2동에 있는 조그마한 정자다. 천문도에서는 천시원이 자미원의 왼편(서북 방향)에 있지만, 지상에서는 자미원(경복궁)의 오른편에 있다. 거울에 사물이 비춰질 때 좌우가 바뀌는 것처럼 하늘의 모양이 땅에서는 위치를 달리한 것이다. 낙천정은 정확히 잠실대교 북단에 위치한 현대강변아파트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한때 서울시 기념물(제12호)로 지정됐다가 지금은 해제된 상태다.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데다가 아파트 건설공사와 함께 복원한 정자가 조선시대 건축 양식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의 낙천정은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을 위해 건립한 정자로 대산(臺山·당시의 산 이름)의 정상에 있었다. 태종은 말년에 임금 자리를 아들 세종에게 넘겨준 뒤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경치가 빼어난 대산 일대에 별궁과 정자를 지어 부인과 함께 지냈다. 낙천정이라는 이름은 당시 좌의정 박은이 ‘역경(易經)’의 구절인 ‘천명을 알아 즐기노니 걱정이 없네(樂天知命故不憂)’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대산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형도를 살펴보면 말년의 태종 별궁 터는 현재 아파트 자리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에서는 아직도 경복궁의 땅 기운에 버금가는 지기가 느껴진다. 지형적으로도 길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산은 멀리 경기 구리시의 검암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망우산, 아차산을 거쳐 한강을 마주하면서 대장정의 발걸음을 멈춘 곳이다. 천리만리를 달려온 용(산줄기)이 마지막 용트림을 한 곳이다. 이런 곳에 명당 혈이 맺히는 경우가 많다. 문맹검은 대산까지 이어져 내려온 산줄기를 천시원의 영역을 표시하는 천시원의 오른쪽 담장(右天市)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인정한다면 천시원의 왼쪽 담장(左天市)은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에서 한양대 언덕을 거쳐 성동구 응봉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된다. 이 두 산줄기 사이에 들어선 자양동, 성수동 등 광진구 일대가 천시원의 주요 활동공간인 셈이다. 천문도의 천시원과 광진구 권역을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점도 발견된다. 천문도에서는 견우(염소자리 별)와 직녀(거문고자리 별)가 칠월칠석에 만나는 장소인 은하수가 천시원으로 흘러들어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밀키 웨이(milk way)’로 불리는 은하수는 동양에서는 ‘용이 살고 있는 시내’라는 뜻의 미리내, 하늘의 강이라는 뜻의 천하(天河) 천한(天漢) 은한(銀漢)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긴 줄 모양의 은하수는 한 줄기로 있다가 천시원 권역에서 섬처럼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두 줄기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져 한 줄기가 된다.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지상의 한강 물줄기다. 강원도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남한강이 경기 양평군 양수리에서 합수된 한강은 낙천정이 있는 광진구 권역으로 도도하게 흘러들어온다. 문맹검이 “낙천정으로 백원(百源)이 모여든다”고 한 것도 이런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낙천정이 있는 한강이 바로 은하수인 것이다. 일부 중국인들은 서울이 중국 한나라를 본 딴 이름인 한성(漢城)이고, 강 이름도 한강(漢江)이라며 한국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오해는 한성과 한강의 ‘한’이 은하수 이름인 ‘천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 태종이 머문 낙천정은 임금자리 별조선왕조는 천시원의 낙천정과 태미원의 영서역에 각각 이궁(離宮·임금이 나들이 때 머무는 별궁)을 세우기로 계획했다. 경치 좋은 한강변 낙천정의 이궁은 임금이 정무에 지친 몸을 잠시 추스르기 위한 휴양의 장소로, 영서역쪽 이궁은 임금이 수시로 행차해 농민들의 농사일을 독려하고 관찰하는 장소로 설계됐다. 이 역시 별자리 기운에 대응해서 마련된 것이다. 천시원 중심부에는 ‘제좌(帝座·임금 자리)’라는 별자리가 있다. 자미원 궁궐에 기거하는 하늘임금이 천시원으로 나들이해 직접 국정과 백성을 챙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실재 역사로 이어졌다. 태종이 머물던 낙천정의 이궁, 즉 제좌 별자리가 있는 곳으로 세종이 국정을 자문할 겸 자주 찾았던 것이다. 세종은 태종과 함께 이곳에서 당시 조선을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계획했고, 대마도 정벌 후에는 이종무 장군을 격려하기 위한 연회를 열기도 했다. 아쉽게도 현재 이곳의 이궁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궁 터에 지어진 아파트 주민 대부분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옛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서울은 하늘 천문의 세계를 스토리로 삼아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도시다. 다음호에는 서울의 태미원 별자리를 찾아가보기로 한다.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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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 ‘가격’[횡설수설/안영배]

    2008년 2월 서울 한복판에서 국보 제1호 숭례문(남대문)이 방화로 소실됐을 때 받은 보험금은 9508만 원. 한국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이자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성문이라는 문화재적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 액수였다. 당시 서울시가 화재보험에 가입하면서 목재 건축물로서만 가치를 계산했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속을 까맣게 태웠던 숭례문을 복구하는 데는 5년 3개월간 국비 245억 원이 투여됐다. 현재 숭례문의 보험가는 약 255억 원이다. ▷그제 문화재청이 국회에 제출한 ‘궁·능 주요 목조문화재 보험가입’에 따르면 경복궁의 근정전(국보 제223호) 보험가액은 약 33억 원,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99억5000여만 원으로 평가됐다. 보물로 지정된 경복궁의 자경전, 사정전 등은 10억 원대 안팎이다. 보물이 국보보다 더 비싼 것도 있다. 보물급 문화재인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은 61억4000만 원, 36억4000만 원으로 근정전보다 높이 평가됐다. ▷궁궐 같은 국가 소유 문화재는 취득 원가가 따로 없어서 재산가액, 즉 보험가를 계산하기가 어렵기는 하다. 보험가액이 너무 낮게 책정되면 화재 등 불의의 사고가 생겼을 때 복구비용을 제대로 충당할 수 없다. 숭례문처럼 또다시 막대한 혈세 지출과 국민들의 ‘감성 기부’로 메워야 할 판이다. 반대로 무형적 가치까지 반영할 경우 보험가가 높아져 보험료가 올라간다. 대체로 우리나라 문화재는 보험가가 낮게 책정돼 있다. 평균 0.02% 수준으로 적용받는 보험료율이 비싸다는 게 주된 이유다. ▷목조 건축물을 포함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가로 평가되는 문화재는 조선의 두 번째 궁궐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창덕궁(2312억 원)이다. 뒤를 이어 1926년에 지은 르네상스 양식의 서울시청(경성부청)이 1312억 원,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가 1250억 원,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1028억 원이다.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속리산의 정이품송은 856억4000만 원으로 평가됐다. 반면 경복궁 향원정(5500여만 원)처럼 낮게 평가된 보물급 문화재들도 적지 않다. ▷한 나라의 문화재는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자산이다. 이런 문화재를 돈으로 환산하는 건 한계가 있지만 보존이나 활용에 투입할 예산 책정을 위해서라도 보다 정확한 가치 평가가 필요하다. 문화재나 예술품 가격은 그 나라의 국력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경복궁에서 제일 웅장한 건물이자 조선 왕실의 상징인 근정전이 강남의 고급 아파트 한 채 값보다 못하게 책정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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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기(旺氣) 꿈틀거리는 파주 운정신도시, 세종보다 입지 뛰어나 [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수도권 2기 신도시 10곳 중 새로 지정된 3기 신도시와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을 곳이 있다. 약 1650만㎡(500만 평) 부지에 7만8000여 채, 20만여 명의 인구를 수용하는 파주 운정신도시다. 현재 1·2지구 개발이 완료된 데 이어 마지막 3지구 공사가 한창인 운정신도시는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A 노선과 서울~문산 고속도로가 건설될 예정이다. 그만큼 서울과의 접근성이 좋아지는데다 남북 교류가 본격화되면 수도권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큰 곳이다. 운정신도시는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에 한양을 대신할 천도 대상지로 검토됐던 교하(交河)가 바로 이 지역이다. 1612년 지관 이의신은 임금(광해군)에게 “국도(한양)의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는 길지”라며 수도 이전을 적극 주창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한양의 왕기(旺氣)가 쇠하였다는 지기쇠왕설(地氣衰旺設)을 근거로 내세운 교하천도론은 당시 기득권층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무산됐다. 하지만 그때 거론됐던 왕기는 아직도 남아 있어 남북교류시대가 열리면 기운을 발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지역의 기운만 놓고 보면 제2 행정수도로 부상한 세종특별자치시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남북이 통일되면 통일수도로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정도다. ● 명당을 증명하는 다양한 표식들 파주 교하가 명당 길지임을 알려주는 표식은 여럿 존재한다. 운정신도시 바로 북쪽에 있는 장명산(102m) 자락의 야트막한 능선에는 100여 기에 달하는 고인돌 무덤군과 청동기시기의 집터, 토기 등이 남아있다. 이 구릉지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고인돌 대부분은 파괴됐고 현재 20여 기만 남아 있지만 청동기 때부터 이곳이 주목받던 지역임을 보여준다. 현재 교하동 ‘고인돌 삼림욕장’으로 조성된 이 구릉지대(교화동·다율동·당하동)는 상태가 양호한 고인돌 6기가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그런데 그 장소가 특별한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다. 특히 다율리·당하리 지석묘 2·4·5호 등 고인돌들은 정확히 천기(天氣) 에너지가 하강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청동기 시절 지배계층의 돌무덤인 고인돌을 조성한 이들이 중국 한나라(BC 206~AD 9년) 이후 발전한 풍수학을 알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이들은 땅의 기운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교하지역 이외에도 한반도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대부분은 명당이라 할 만한 곳에 있다. 기 체험 힐링과 풍수 공부 차원에서 천기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는 곳으로 고인돌을 추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파주시 적성면 주월리에는 삼국시대 토성인 육계토성이 있다. 그 형태가 백제의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한강의 풍납토성과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이곳을 하북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온조왕이 도읍을 남쪽으로 옮기면서 하북의 위례성인 육계토성을 모범으로 삼아 하남의 위례성 풍납토성을 지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곳이 어느 시대의 토성이건, 파주 일대가 왕조 혹은 소국가의 도읍지로 주목받을 만큼 길지였음은 분명하다. 지형적으로 봐도 입증된다. 운정신도시는 널따란 구릉성 평지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남쪽은 높고 북쪽이 낮은 남고북저형(南高北低形)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고양시 황룡산(129.7m)에서 파주출판도시가 들어선 심학산(193.5m)까지 이어지는 지맥이 형성돼 있다. 북쪽으로는 공릉천이 띠를 두르듯 흘러 서쪽의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마치 서울 강남이 남쪽의 우면산과 구룡산 등을 뒷배 삼아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또 운정 신도시의 상징인 ‘운정호수공원’과 연결돼 있는 소리천은 마치 한양의 청계천처럼 내당수(內堂水;명당 터 안에서 흐르는 물)를 이뤄 공릉천으로 빠져나간다. 수도권 신도시에서 이만한 지세를 갖추고 있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다. 말 그대로 명당 조건을 고루 갖춘 셈이다.● 교육 콘텐츠가 풍부한 역사 도시 운정신도시가 있는 파주는 예로부터 문향(文鄕) 또는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렸다. 파주가 조선 유학자들의 우상인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고을’로 불린 데에는 방촌 황희, 율곡 이이 등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조선의 2대 학문 유파 중 하나인 기호학파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한강변 자유로를 끼고 북쪽으로 한참 가다보면 임진강이 흐르는 문산읍 강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갈매기가 날아드는 정자’란 뜻의 반구정은 청백리 표상이자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무려 6명의 왕을 보필한 방촌 황희가 은거하던 곳이다. 방촌은 관직에서 물러나서 이곳에서 임진강 모래사장에 날아드는 갈매기들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반구정에는 황희 동상, 제사를 지내는 영당,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 등이 있다. 반구정에 오르면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강 건너로는 민통선 안쪽인 파주시 장단면이다. 필자가 방문한 때는 날씨가 화창해 운 좋게도 멀리 떨어진 개성의 송악산 정상까지 볼 수 있었다. 고려 출신인 방촌은 이곳에서 송악산을 바라보면서 고려의 수도 개성시절을 추억했을지 모를 일이다. 반구정 일대는 뛰어난 명혈(名穴) 터이기도 하다. 주말을 이용해 황희의 자취가 밴 이곳에서 자녀와 함께 학문의 기운을 쐬기를 권한다. 현재 출판도시가 들어선 ‘문발리(文發里)’도 방촌과 얽혀 있다. 1452년 방촌이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한 문종은 이곳까지 찾아와 장례를 지켜봤고 궁으로 돌아갈 때 ‘황희의 높은 학덕과 지혜를 널리 알리라’는 뜻에서 문발리와 문지리(文智里)라는 두 마을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현재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출판단지가 이곳에 들어선 것도 방촌의 문덕(文德)이 지금까지 이어진 셈이라 할 수 있다. 조선 기호학파의 거두인 율곡 이이도 파주와 인연이 매우 깊다. 율곡의 본향(本鄕)인 파주에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율곡리 마을과 그가 8세 때 시를 지은 곳으로 유명한 화석정이 있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 유학자 길재의 서원이 있던 곳이다. 율곡의 5대조가 이곳에 정자를 세웠고 율곡은 관직에서 물러날 때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와 학문을 논했다고 전해진다. 이곳 역시 학문의 명당 터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화석정 인근에는 율곡을 배향하는 자운서원과 율곡의 가족 묘역이 함께 있는 율곡기념관이 있다. 특히 율곡의 가족묘역은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을 모신 묘 위쪽으로 그의 맏형 (이선) 부부 묘가 있고, 최상층에 율곡 부부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안내판에는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풍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풍수적으로 보면 명당 혈지를 고르다 보니 그렇게 조성됐다고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 제일 먼저 조성된 율곡 부모 묘와 그 후에 조성된 율곡 부부 묘는 정확히 명당 혈에 들어서 있다. 필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 마침 율곡 묘에서 한 부자가 참배하고 있었다. 율곡의 뛰어난 점을 본받으려는 아버지와 아들의 기도 모습에서 파주가 학문의 도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주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한 문향이고, 이런 역사성은 땅의 기운에서도 읽혀진다. 파주를 대표하는 운정신도시에서도 뛰어난 인재가 배출되기를 기대해본다. 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 20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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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스트레스 풀어줄 수도권 힐링 명당 가평[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해 추석 귀향을 포기한 ‘추캉족(추석+바캉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추석 연휴 기간 전국 유명 리조트와 호텔을 찾으려는 추캉족들로 예약이 만원 상태라고 한다. 이런 준비를 하지 못한 채 긴 추석 연휴를 맞아야 하는 ‘집콕족’에게 쌓이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필요하다. 집에서 영화보기나 독서, 취미생활 하기 등도 좋겠지만 간단하게 교외로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도 방법이다. 집콕족이 수도권에서 ‘코로나 블루(코로나19로 인한 우울증)’를 이겨내기 위해 찾아볼 만한 힐링명소를 추천한다. 바로 휴양과 힐링 장소로 유명한 경기도 가평이다.● 청평호에 둥지 튼 종교단체 가평에서 수상스키와 아름다운 경치로 이름난 청평호 일대는 종교단체의 주요 건물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대표적으로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의 성전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수상레저 시설들이 들어선 가평군 청평면 고재길을 따라 굽이굽이 고갯길을 돌다보면 청평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독특한 외관의 3층 건물(가평군 청평면 고성리)이 눈에 띈다. 5716㎡의 터에 요트 선착장까지 갖춘 이 크림색 건물은 북한강변에 산재한 부자들의 호화별장처럼 보이지만, 신천지 교인들에겐 ‘평화의 궁전’이라 불리는 성지(聖地)이다. 현재 코로나 방역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구속된 이만희 신천지 총회장은 이곳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퇴한 신천지 교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화의 궁전에는 교육시설과 이 총회장의 치적을 소개하는 전시관이 있다. 또 각종 기념행사도 이곳에서 열린다. 신천지측은 평화의 궁전 외에도 2018년 청평면 청평4리 일대의 땅을 매입해 ‘신천지 박물관’을 지으려다 마을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최근 평화의 궁전을 찾아가보니 이 총회장이 애지중지할 만한 터였다. 평화의 궁전은 공중에서 내려오는 천기(天氣)와 땅의 지기(地氣) 에너지가 교합(交合)하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평화의 궁전 대문에는 ‘사자 조심’이라는 경고 팻말과 함께 앞마당에 사자(獅子) 조형물이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사회적 물의를 빚으면서 언론의 주목을 의식했던지 지금은 대문의 팻말은 사라지고 없다. 사자는 신천지 교인들에게 각별한 종교적 의미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백수의 제왕으로 신성시 여겨온 사자는 성경에서 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使者)’의 가차(假借·뜻이 다르지만 음이 같은 문자)이자, 이만희 총회장을 상징하는 영물이다. 신천지 교인들은 이 총회장을 ‘대언(代言)의 사자’로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평화의 궁전 터를 풍수적으로 해석하자면 사람의 의지가 개입한 인작(人作) ‘사자 명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 평화의 궁전에서 청평호를 가로질러 맞은편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의 성전인 ‘천정궁’(가평군 설악면 송산리)이 자리 잡고 있다. 평화의 궁전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4km 가량 떨어진 위치인데, 천정궁에서는 청평호가 바라보인다. 통일교 창시자이자 풍수에도 밝았던 고(故) 문선명 총재는 “청평은 호숫가와 산야가 조화를 이룬 곳으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곳”이라고 극찬했다. 가평군과 강원도 홍천군의 경계선인 장락산(627m) 자락에 자리 잡은 천정궁은 돔형 지붕의 미국 국회의사당을 연상하게 하는 건물이다. 지형상 이 터는 봉황의 품속에 안긴 듯한 모양새다. 천정궁의 주산(主山)인 장락산은 봉황의 꽁지라는 뜻의 봉미산(鳳尾山·856m)에서 시작돼 봉황의 머리에 해당하는 왕터산(414m)까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산줄기의 중간 지점에 있다. 장락산은 봉황의 몸통에 해당하니, 그 터를 ‘봉황 명당’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아쉽게도 천정궁은 통일교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엄격히 금지돼 있어 일반인이 이곳을 방문하기는 쉽지 않다. 대신 천정궁 아래쪽의 송산리 일대를 추천한다. 선학UP대학원대학교와 청심국제중·고교, 청심평화월드센터, 친화공원 등 통일교 관련 시설들이 밀집된 곳으로, 이 일대를 둘러보면 하늘과 교감하는 명상 기운을 느껴볼 수 있다. 가평군에는 이외에도 여러 종교 단체들이 숨은 듯이 둥지를 틀고 있다. 봉미산자락 깊숙한 곳에는 은퇴한 기독교 선교사들의 집단 거주지인 ‘생명의 빛 예수마을’(설악면 설곡리)이 조성돼 있다. 이곳 관리자는 “홍송(紅松)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예배당이 바깥으로 소문나 기독교인의 순례 코스가 됐다”고 소개했다. 각종 교단들이 가평에 둥지를 튼 것은 서울·수도권 사람들이 쉽게 다녀갈 수 있는 교통 편리성과 함께 기도 명상과 힐링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추석 연휴에 청평호 주변의 복합문화공간 쉼터에서 당일치기 휴양을 즐기거나, 리조트 펜션 등에서 1박2일 코스로 가평의 명당 터를 체험해보는 것도 힐링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조선의 힐링타운, 가평 판미동 가평은 조선시대에도 이상향을 구현하는 터로 주목받았다. 조선 숙종 임금 때인 1674년 신숙주의 후손인 신석(申奭, 1650~1724)이 친인척을 이끌고 가평 판미동(板尾洞)에 정착한 후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했다. 판미동은 한때 다른 성씨까지 가세해 100여 호에 이르는 촌락을 형성했고, 3대에 걸쳐 100년간 유지됐다고 한다. 판미동 사람들은 찾아온 손님 누구에게나 정중하게 접대하고, 흉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성실하게 공부하고, 생업인 농사에 부지런했으며,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규제하는 ‘덕업상권 과실상규(德業相勸 過失相規)’를 실천했다. 깊은 산골에서 일종의 향약(鄕約)인 ‘동헌(洞憲)’을 기본으로 삼아 향촌 자치의 이상 세계를 구현한 판미동은 한양까지 소문날 정도였다. 판미동의 ‘판미’는 ‘넓은 들판의 꼬리 부분으로 땅 기운이 뭉치는 명당’이라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오늘날 가평군 상판리와 하판리 일대를 가리킨다. 연인산(월출산)과 운악산 사이의 협곡 지대로 조종천이 흐르는 지역이다. 산색이 아름다고 물이 맑아(山紫水明) 유원지와 펜션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판미동은 한양에서 반경 100리(39.2km) 안에 드는 한양생활권으로, 도교나 불교의 초월적 세계가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둔 이상향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조선판 힐링타운’이라고 할 수 있다(경기연구원 조사 자료). 즉 벼슬이 없는 양반층이 언제든지 한양으로 쉽게 복귀할 수 있는 곳에서 머물며 몸과 마음을 양생하는 곳이었다. 현대로 치면 직장인들이 휴식을 취하며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판미동의 양생 기운을 느끼고 싶다면 인근에 위치한 운악산의 현등사 산책을 추천한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된 현등사에는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명세, 최익현, 민영환 선생을 기리는 삼충사가 있고,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절을 중창하면서 땅의 기운을 진정시키기 위해 세웠다는 ‘하판리 지진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이 있다. ● 미국 세도나에 버금가는 기운을 품은 땅 역사적으로 가평은 밭농사나 겨우 지을 수 있는 궁핍한 땅이라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곳이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평을 인접한 지역인 포천 등과 함께 묶어 한양 동쪽 교외에 있는 동교(東郊)라 칭하고,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이중환은 농업과 상업 등 경제 활동이 원활하지 못한 점을 가평의 최대 약점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자인 이중환이 놓친 가평의 숨겨진 장점이 있었다. 바로 가평의 엄청난 땅기운이다. 세계적인 명상지이자 휴양지로 각광받는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Sedona)에 못지않은 힐링 기운을 품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가 4차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삶에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크고, 그에 따라 명상 기도 등 정신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게 중요해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는 가평이 지닌 가치가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크고, 그만큼 미래가 밝다는 의미다. 수상 레저와 전원주택 명소인 가평에서 현대인의 지친 마음과 몸을 달래줄 ‘건전한 시설물’은 땅 기운과도 궁합이 아주 좋다. 그게 가평의 미래를 밝게 해줄 등불이 될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2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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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미래 밥줄이 달린 용산[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일반인에게는 낯설겠지만 서울에는 두 개의 용산(龍山)이 있다. 원래 용산으로 불리던 터(구(舊) 용산)와 근대에 새로 이름이 붙여진 신(新) 용산이 그것이다. 구 용산은 현재 용산구 산천동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주교용산교회(용산성당)와 주변 일대다. 신용산은 용산역을 중심으로 용산차량사업소(철도차량기지)와 주한미군기지, 용산가족공원 등이 들어선 현재 우리가 흔히 아는 행정구역으로서의 용산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추진했던 한강르네상스 사업의 핵심지역으로 각광을 받았고, 현 정부는 철도차량기지 터에 8000채 규모의 아파트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내놔 세간의 주목을 받는 곳이다.● 조선 부자 만들어낸 마포의 용산 지형적으로 어디를 ‘진정한’ 용산으로 봐야 할까. 구용산은 지역 이름인 동시에 지역을 대표하는 산을 의미했다. 한양도성의 오른쪽을 감싸주는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은 안산(연세대 뒷산), 만리재(만리동 고개), 효창공원 등을 거쳐 한강 앞에서 굵직한 산등성이를 이루면서 멈춘 자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때 보이는 등성이를 예전에 용산이라고 불렀다. 현재 용산성당이 들어선 곳이다. 지금은 아파트 학교 빌딩 등이 빼곡히 들어서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마치 북쪽에서 용이 꿈틀거리며 한강까지 내려온 뒤 머리를 들이밀고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을 갖추고 있어 용산이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 용산은 아름다운 숲과 휘어 돌면서 호수처럼 잔잔한 물길을 형성하고 있는 한강(당시 마포강), 용의 여의주처럼 한강 가운데 밤섬 등이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고려와 조선의 시인 묵객들은 용산팔경(龍山八景:용산의 8가지 경치)을 감상하며 시를 짓기도 했다.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은 ‘용산이 반쯤 한강물을 베개 삼았는데, 소나무 사이 저 집에 묵지 못함이 아쉽구나’라고 노래했다. 풍수학적 관점에서 보면 용의 머리를 용산으로 볼 때 용이 바라보는 여의주(밤섬) 방향은 마포 일대다. 즉 원래의 용산은 마포구 도화동, 공덕동, 염리동, 용강동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역사적으로도 용산 서쪽에 위치한 마포는 조선의 밥줄 역할을 했다. 당시 마포나루는 선박을 통해 삼남(三南;충청 전라 경상) 지역의 곡물이 모이는 물류 중심지였다. 조기 새우젓 등 해산물과 강원도 내륙에서 뗏목 등을 통해 옮겨온 목재나 특산물 등도 이곳에서 거래됐다. 각종 물자와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마포나루터는 엄청난 부자들을 만들어냈다. 조선말까지 이곳에서 객주(客主) 색주(色酒) 당주(堂主) 등으로 불리는 상인들이 떼돈을 벌었고 그 위세도 대단했다. 당연히 조선 왕조에서도 이곳은 중요한 물류기지였다. 용산 산줄기를 중심으로 서편과 동편에는 각종 창고가 들어섰다. 군사용 물자를 관장하는 군자감 창고인 강창(江倉; 원효로3가 KT원효 부근), 훈련도감 군인들의 급료를 보관하는 별영창(別營倉; 원효로4가 성심여자고등학교 뒤편), 휼미와 대동미를 보관하던 신창(新倉; 효창공원 서북쪽), 관료들의 녹봉을 보관하는 광흥창(廣興倉; 마포구 창전동) 등이 운영됐다. 풍수에서 말하는 ‘수관재물(水管財物:물은 재물을 관장함)’의 전형적인 터였던 셈이다. ● 신용산의 신흥 부촌 원효로구용산은 일제 강점기에 운명이 바뀐다.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부인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는 용산 동편에 주둔용 군용지와 철도 부지를 영구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강제 수용했다. 이에 따라 둔지산(현재 국립박물관 뒤편)이 있는 둔지방(조선시대 행정구역; 후암동, 이태원동, 서빙고동 일대)의 390만㎡(118만 평)이 헐값에 일본군의 손에 넘어간다. 한말의 애국지사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왜인들이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구역에 멋대로 점(點)을 쳐서 군용지라는 푯말을 세우고 경계를 정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번번이 군용지라는 명목으로 땅을 빼앗아 갔다.”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은 물론 둔지산 자락의 수많은 묘들이 이때 파헤쳐졌다. 당시 한성부(현재의 서울시)는 이 지역에 가옥 1176호, 분묘는 111만7308기가 있다고 보고했다. 군용지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조상의 묘가 훼손되자 분노한 주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국권을 빼앗긴 나라의 백성이 일제를 이길 수는 없었다. 묘 자리를 헤집고 들어선 일제 군기지는 광복 이후 미군기지로 바뀐다. 일제는 또 이 일대에 기차 정거장(용산역)과 서울철도공작창(용산차량사업소), 다리(한강대교) 등을 설치해 교통물류의 거점지역으로 활용했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에 보낼 군수물자를 원활히 보급하기 위한 용도였다. 이 때부터 이 일대는 구용산과 구별해 신용산이라 불렸다. 나중에 용산 서쪽지역의 구용산은 마포구라는 새 행정구역으로 편입됐다. 한편 일제는 병영과 철도시설을 짓고 남은 땅을 일본인들에게 나눠줬다. 현재의 원효로 일대가 그곳인데, 이곳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으뜸가는 동네’라는 의미로 ‘모토마치(元町·원정)라고 불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용산의 신흥 부촌이 탄생했다. 땅의 지운이 마포의 구용산에서 신용산 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 세계 물류 끌어들이는 땅 기운 이런 역사를 지닌 용산은 예전부터 외국 군대와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13세기에는 고려를 침입한 원군(元軍)이, 16세기 임진왜란 때는 왜군과 명군이, 19세기 임오군란(1882년) 때는 청군(淸軍)이. 20세기 이후에는 일본군과 미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이용했다. 외국군이 용산에 주둔한 것은 이 땅이 지닌 군사적, 전략적 가치가 컸기 때문이지만 풍수학적으로 볼 때 땅 자체가 이국(異國)을 끌어들이는 기운도 한몫했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드는 용산의 이태원(李泰院)은 ’다른 이(異人)‘들의 태(胎)가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이태원(異胎院)‘으로도 불릴 정도다. 용산 앞으로 흐르는 한강 또한 외부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원래 수로 교통의 중심인 한강은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곳이다. 한강 상류에서는 세곡(稅穀·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는 곡식) 등을 실은 강상선(江上船)이 물길을 따라 용산까지 내려왔고, 한강 하류에서는 바다와 강을 오가는 강하선(江下船)이 강화도 앞바다에서 만조 때를 기다렸다가 바닷물을 타고 용산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지금은 한강 수중보 등으로 만조가 되더라도 바닷물이 김포까지만 올라온다. 바다 즉 해양은 외부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본다. 쉽게 말하면 용산은 한양의 내륙 깊숙한 곳에서 외부 세계와 통하는 해양 기운을 끌어들이는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땅 기운을 잘 활용하면 용산은 세계적 물류와 유통, 금융의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다. 현재의 용산에서 이런 기운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51만㎡ 규모의 용산차량사업소 부지다. 10여 년 전 추진됐던 ’한강 르네상스‘ 사업에 따르면 이곳은 업무지구로 지정돼 세계적인 랜드마크 건물들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곳을 서민용 아파트 등 주거시설 밀집지역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땅은 활용 여부에 따라 서울은 세계적인 경제도시로서 발돋움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가 이곳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단순히 강남 집값을 때려잡겠다며 서민용 아파트가 잔뜩 들어선 주거용지로만 사용하기엔 아쉬움이 크다고 할 수 있다.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 202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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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기의 조선족 한글[횡설수설/안영배]

    지난해 방문한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룽징(龍井)은 남의 땅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룽징 주민 대다수가 조선족인 데다 거리 간판마저 한글로 표기돼 있었다. 그 한글이 이제 중국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중국 당국이 ‘민족 통합 교육’을 내세우면서 중국 표준어(만다린어)를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국어로 사용하는 정책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9월 ‘전국 민족단결진보 표창대회’에서 “민족 교육과 국가 통용 언어문자 교육을 전면 강화해야 한다”고 연설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중국 내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한 중국어 국어화 정책은 201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중국당국은 2017년 신장위구르자치구, 2018년 티베트자치구에서 위구르어와 티베트어 교육을 축소시키고 중국어 강화정책을 강행했다. 2018년 5월에는 티베트족 사업가가 쇠멸돼가는 티베트어 보존 캠페인을 벌이다가 ‘분열선동죄’라는 죄목으로 5년 실형 선고까지 받았다. 영국 BBC방송은 지난해 7월 “중국당국이 위구르에서 조직적으로 소수민족 어린이들을 부모와 격리한 뒤, 고유의 신앙과 언어를 말살시키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어린이들이 위구르어 사용을 금지당한 채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배우고 있다는 것. ▷신장위구르나 티베트 자치구와 달리 북방의 조선족자치구와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는 별다른 분리주의 움직임이 없는 지역이다. 그런데도 중국당국은 올해부터 이 지역에서도 중국어 강화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몽골족 학부모와 학생 수천 명이 “우리의 모국어는 몽골어”라며 시위를 벌이고 등교 거부 운동까지 했다. ▷랴오닝(遼寧)성, 지린성 등에 산재한 조선족 초·중학교 일부도 올 9월 신학기부터 한글이 빠진 중국어 국정교과서 ‘어문(語文)’을 국어 교재로 사용할 예정이다. 조선족 사회에서는 몽골의 경우처럼 역사, 도덕 등 다른 과목에까지 중국어를 확대시킴으로써 전통 문화와 한글이 위축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게다가 중국 대입제도(高考)에서 소수민족에게 가산점을 주는 특혜마저 폐지되면 한국어가 점차 소멸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 언어 정책은 미국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지난해 9월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Hangul Day)’로 지정해 기념일로 선포했다. 한국어는 미국 대입시험 외국어 과목에도 포함돼 있다. 한글 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던 일제강점기에 만주 지역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후세들에게 한글을 교육하며 한국어를 굳건히 지켰듯이 이번에도 한글을 잘 지켜가기를 응원한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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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력과 금력 품은 ‘풍수 명당’ 태릉골프장에 아파트 지어야하나…[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한강 이북에서 조선의 수도 한양도성과 풍수적인 환경에서 가장 유사한 지역은 어디일까. 서울 동쪽 끝 육군사관학교가 있는 노원구 공릉동과 경기 남양주시 별내동 일대를 꼽을 수 있다. 조선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1501~1565)의 묘인 태릉으로 유명해 통칭 ‘태릉’으로 불리는 곳이다. 최근에는 1만 가구 규모의 아파트가 예정된 태릉 골프장으로 인해 주목을 받는 지역이다. 전통 풍수이론인 ‘형세파 풍수’는 주변 산들을 통해 땅의 특징이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기초해 한양도성과 태릉 지역을 비교해봤다. 먼저 한양도성은 경북궁의 뒷산인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삼는다. 산의 계보를 밝혀놓은 ‘산경표’에 따르면 북악산은 그 뿌리가 북한산(삼각산)→도봉산→불곡산(양주)→죽엽산(포천)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경표’의 저자 신경준이 ‘한북정맥’으로 이름붙인 산줄기다. 경기도 포천의 죽엽산 아래 축성령 부근에서는 한북정맥의 또다른 분맥(分脈)이 펼쳐진다. 용암산, 수락산을 거쳐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맥이다. 이 맥의 중심을 이루는 불암산을 뒷배 삼은 곳이 공릉동과 별내동이다(이하 태릉지역으로 통칭). 결국 한양도성과 태릉은 주산의 뿌리가 같아 형제나 마찬가지다. 또 북악산과 불암산은 모두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암산(巖山)이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바위로 된 주산을 갖고 있다는 건 그 아래 땅 기운이 강건하다는 뜻이다. ● 청룡이 약한 한양도성, 백호가 낮은 태릉 지역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 흔히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라 일컫는 사신사(四神砂)를 갖춘 명당이라는 점이다. 북악산 아래 한양도성은 동쪽의 낙산(낙타산, 해발 높이·125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의 남산(265m)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전체 둘레 18.627km에 달하는 한양도성의 성곽도 이들 4개 산을 따라 형성돼 있다. 불암산 자락의 태릉도 마찬가지다. 동쪽의 동구릉이 있는 구릉산과 서쪽의 봉화산이 각각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구릉산에서 이어져 내려온 망우산이 남주작으로 태릉 지역을 보호하고 있다. 한양도성에 비해 땅의 규모가 작긴 하지만 명당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한양도성과 태릉은 모두 산의 지세(地勢)에서 두드러진 약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한양도성은 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보다 기세가 약해 항상 문제로 지적됐다. 조선 중기 유학자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한양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아서 장자(長子·장남)가 눌리고 지자(支子·맏아들 외의 아들)가 잘된다. 왕위 계승자와 높은 벼슬아치들 중에는 대개 지자 출신이 많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경복궁에서 볼 때 동남쪽에 위치한 낙산은 높이가 낮아 주변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반면 서북쪽의 인왕산은 기세당당한 호랑이가 웅크려 있는 듯한 모양새다. 풍수학에서는 청룡산은 장자·남성·권력·무력 등을, 백호산은 지자·여성·재물·복록 등을 각각 주관한다고 본다. 이에 따라 한양에서는 장남보다는 차남이나 막내가 출세한다는 ‘지자득세설(支子得勢說)’이 유행했고, 역사적으로 이는 증명됐다. 조선왕조에서 배출한 총 27명의 왕 가운데 장남이 왕위에 오른 경우는 단 7명에 불과했다. 또 그 일곱 명의 왕들 대부분이 단명하거나 왕위를 제대를 지키지 못했다. 태릉지역은 한양도성과 정반대 상황이다. 청룡인 구릉산은 주변 산과 연결돼 기세가 등등하지만, 백호인 봉화산은 평지에 나 홀로 서 있는 모양새여서 힘이 약하다. 게다가 태릉 지역의 주산인 불암산은 정상에 위치한 바위가 장군이 쓰는 투구와 비슷하다고 해서 투구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결국 태릉지역은 남성 위주의 무세(武勢)가 강한 곳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지세를 갖춘 셈이다. 풍수학자 최낙기 박사는 “토질이 밝고 단단하여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 지역에 태릉선수촌,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몇 개의 대학교가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역사적으로도 이는 확인된다. 조선시대 태릉과 강릉(명종과 인순왕후 묘)이 들어서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됐던 태릉지역은 근대 이후 무력과 육체적 힘을 행사하는 기관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 태릉지역은 일본 육군 훈련소로 사용됐고, 광복 후 1946년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인 남조선국방경비대 및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가 자리했다. 1966년 이후 스포츠 국가대표를 훈련시키기 위한 태릉선수촌이 이곳을 차지한 것도 땅의 성격과 맞아떨어진다. 현재 태릉과 강릉 사이에 자리했던 태릉선수촌은 2017년 충북 진천으로 이전하고 건물 등 일부 시설만 남아 있다. 조선왕릉 42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됨에 따라 왕릉의 보존을 위해 내려진 조치이다. ● 권력과 금력 기운의 태릉 골프장태릉지역에서도 가장 핵심 구역은 태릉골프장과 육군사관학교 일대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지역은 태릉과 강릉의 영역이었다. 지금도 태릉골프장 내에는 왕릉을 참배할 때 잠시 쉬는 공간으로 활용됐던 연지(蓮池,연못)가 남아 있다. 왕릉의 앞마당 격인 태릉 골프장은 원래부터 명당지로 소문난 곳이었다. 좌우로 낮은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갈매천이 흐르는 등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잘 조화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골프장으로 개발된 시점은 박정희 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릉과 강릉 사이에 태릉선수촌이 조성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뒷마당에 해당하는 이곳에 골프장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사관학교 생도들의 교육장으로 사용되던 83만㎡(약 25만평) 부지가 졸지에 18홀 규모의 골프장으로 바뀌게 됐다. 참고로 얘기하자면 수도권 지역에 위치한 일부 골프장은 왕릉 주변의 숲을 파괴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왕릉이 들어선 지역은 서울로 오가기에 편리한 교통요지에 자리한데다가 숲이 우거지고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여서 골프장 부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는 대표적인 골프장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효창원골프장과 청량리골프장, 군자리골프장 등이다. 광복 후에도 이런 일은 이어졌는데,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들어진 한양골프장과 뉴코리아골프장, 태릉골프장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태릉 골프장을 주말을 이용해 살펴봤다. 무의 기상과 함께 묘하게도 수덕(水德; 물의 길한 작용)의 기운이 강하게 형성돼 있었다. 태릉골프장 앞뒤로는 서로 방향이 엇갈려 흐르는 두 물줄기가 원인이었다. 태릉로를 사이에 두고 태릉 묘와 마주한 태릉골프장(후면) 쪽에 옛 경춘선 철로를 따라 흐르는 조그만 실개천이 그 하나인데,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흘러가는 동출서류수(東出西流水)다. 나머지 하나는 태릉골프장 입구(전면) 쪽의 갈매천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다. 풍수에서는 골프장 앞뒤로 엇갈려 흐르는(이른바 ‘순역’(順逆)) 두 물줄기를 매우 길하게 본다. 양 방향의 물줄기가 그 안에 위치한 땅의 기운을 보호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갈매천은 태릉지역의 풍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갈매천은 갈매IC 부근에서 북쪽에서 내려온 불암천 및 덕송천과 합류해 왕숙천으로 빠져 나가고, 왕숙천은 다시 한강에 합쳐진다. 이렇게 물길이 순역을 이루면서 지역을 겹겹이 에워싸면 ‘수관재물’(水管財物;물은 재물을 관장함)형태의 명당을 이루는 것으로 본다. 복과 재물이 넉넉하다는 뜻이다. 이런 조건들을 종합할 때 태릉골프장은 주변 산의 권력 기운과 물의 금력(金力) 기운을 함께 갖춘 곳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정계층을 위한 스포츠 시설로 사용되기에는 땅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현재 정부가 이곳에 1만 가구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서는 미니 신도시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가운데 반발이 적잖다. 주변 일대에 이미 남양주 별내지구와 다산 신도시, 구리시 갈매지구 등이 조성된 상태에서 또다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교통 체증과 주거환경 악화가 불 보듯 뻔하다는 주장이다. 도시지역의 부족한 녹지 공간 확보를 위해서도 태릉골프장은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도 나온다. 풍수적으로도 아파트단지로 바꾸려는 계획은 아쉬움이 남는다. 땅이 갖고 있는 격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땅의 운세를 결정하는 지운(地運)의 측면에서 볼 때 태릉골프장 일대는 20~30년 후에 그 기운이 충만하게 발휘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미래세대가 활용할 땅으로 남겨두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결정으로 판단된다. 통일을 준비하고, 보다 세계적인 도시로 서울이 발전할 경우 수도권 동북지역의 핵심거점지역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안영배 논설위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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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창동순두부[횡설수설/안영배]

    1960, 70년대만 해도 서울 남대문 안쪽 북창동의 넓은 공터는 경기 북부에서 재배한 야채와 곡물 등이 무악재 고개를 넘어와 모여드는 집하장이었다. 새벽이면 채소를 떼다 팔려는 도매상, 인력시장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점심과 저녁때가 되면 서울시청, 한국은행, 인근 대기업 직원들이 몰려들어 먹자거리를 형성했다. 그때 인기 있는 메뉴가 순두부찌개와 북어해장국이었다. 값이 싸면서도 육고기 대신 손쉽게 단백질을 보충시켜 주는 영양식이었다. 순두부 하면 북창동이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북창동의 순두부는 미국에 건너가 더 주목을 끌었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윌셔가에 본점을 둔 북창동순두부(BCD Tofu House)는 2010년대에 분 웰빙푸드 바람을 타고 돌풍을 일으켰다. 1996년에 문을 연 이후 현재 미국 12개 도시, 17개 매장에서 수천만 달러 매출을 올리는 프랜차이즈로 성장했고 일본 중국 등지로 지점을 확장시켰다. 미국 유명 스포츠 스타, 영화배우들도 순서를 기다리면서까지 찾는 명물이 됐다. 한국으로도 역수출됐다. 현재 국내에서 운영되는 같은 이름의 업체 ‘북창동순두부’와는 주인이 다르다. ▷미국 북창동순두부 창업자 이희숙 대표가 지난달 18일 6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에서 “이 대표의 요리는 그 자체가 미국의 문화 현상”이라고 표현했다. 음식평론가들은 순두부찌개가 미국 문화의 주류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외국인이 매콤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깬 데 더해, 한국 콩에 비해 풋비린내가 심한 미국 콩의 단점을 제거함으로써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웰빙음식으로 인정받았다는 평이다. 음식비평가 조너선 골드는 경쟁력 있는 K푸드로 불고기, 비빔밥 대신 순두부찌개를 꼽았다. 이 대표는 생전에 제조 비결을 밝히면서 말랑말랑한 연두부, 매콤한 소뼈 육수, 신선한 재료 등 표준화한 맛을 내기까지의 노하우를 공개하면서도 끝내 ‘양념’만은 숨겼다. ▷순두부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유목생활을 하던 북방민족이 염소 양 등 동물 젖을 응고시킨 치즈로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한 반면, 만주와 한반도 일대 정착 농경민족은 콩을 찌고 삶아 만든 두부로 단백질을 보충했다고 한다. 황광해 음식평론가는 “조선시대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이미 연두부에 미꾸라지를 더한 초두부탕 요리법이 등장했다”고 말했다. 그 순두부 요리에 남들보다 더 많은 정성을 담아 세계적 음식으로 키워낸 이 대표에 이어 제2, 제3의 북창동순두부들이 나와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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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길(大吉) 방위에 위치한 하남, 강남 대신하는 도시되려면…[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지난해 전국에서 땅값이 가장 많이 오른 곳은 어디일까. 국토교통부의 전국 지가변동률 조사에 의하면 경기 하남시의 땅값이 6.904%로 전국 최고였다. 2위는 재개발 재건축이 한창인 대구 수성구(6.530%), 3위는 하남과 함께 3기 신도시로 지정된 경기 과천시(6.315%)가 각각 차지했다. 모두 대형 개발 호재를 안고 있는 지역이다. 땅값이 오르거나 내리는 것은 땅의 가치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풍수적으로 보면 땅의 가치와 상관관계가 높은 지운(地運)이 바뀐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지운의 변화를 예측할 수만 있다면 미래의 투자가치가 높은 땅을 선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개발 정보 같은 외부적 변수를 배제한 상태에서 오로지 땅의 지세나 지형만 보고 지운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전통 풍수 관련 서적에서도 지운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만과 홍콩의 일부 풍수가들은 근대에 출현한 현공풍수(玄空風水) 이론을 사용해 이 같은 요구에 대응하기도 한다. 이 이론은 산과 물이 위치한 방위를 크게 8개(동·서·남·북·동북·동남·서북·서남)로 나눈 뒤, 특정한 시기에는 특정한 방위에 있는 산과 물이 기운을 발동해 해당 지역의 지운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방위에 기(氣) 에너지가 담겨 있다고 보는 ‘방위파 풍수’의 한 종류다. ● 대길(大吉) 방위에 위치한 하남 경기 하남의 지형과 지세를 현공풍수 이론으로 해석해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현공풍수는 20년 단위로 방위 에너지가 변화한다고 계산하는데, 2020년대부터 2040년대까지는 방위상 남쪽으로 큰 산이 받쳐 주고 북쪽으로 큰 물이 감싸주는 지역을 대길한 것으로 여긴다. 하남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남은 시청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이 있는 남한산 줄기가 든든하게 배경을 이뤄주고 북쪽으로는 한강이 크게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하남은 이미 개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개발이 완성단계에 달한 미사강변도시와 한창 택지개발이 진행 중인 감일택지지구, 3기 신도시로 지정된 교산지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부동산 개발 호재가 차고 넘치는 지역이다. 특히 하남시 교산·춘궁·덕풍동 일대 648만㎡ 크기의 부지에 3만 2000가구 규모로 조성되는 교산지구는 3기 신도시 예정지 다섯 곳 가운데 가장 선호도가 높은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교산지구가 강남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준다. 서울 송파구의 중심인 2호선 잠실역까지 직선거리로 불과 8㎞ 남짓한 거리에 있다. 그간 교산지구는 금암산과 이성산이 강남권과의 교류를 가로막아 육지 속 섬처럼 갇혀 있었다. 하지만 3기 신도시 건설이 본격화되면 강남과 곧바로 연결되는 도시철도 구축, 산을 관통하는 터널 건설 등이 생기면서 막혔던 숨통이 뚫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교산지구는 주변의 택지지구와 연결돼 대규모 주거벨트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교산지구 북쪽으로 3만 8000가구의 미사강변도시, 금암산 건너편 서울시계 쪽으로는 1만 4000가구 규모의 감일지구와 각각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8만 가구가 넘는 미니 신도시가 탄생하는 셈이다. 세 곳 모두 이성산과 금암산을 뒷배로 두고 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이는 강동구 고덕천 일대로 중심으로 형성되는 강동 신도시권과 일정 부분 지역이 겹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덕천 일대와 미사강변도시, 감일지구가 인접해 있어 하나의 주거권으로 묶일 수 있기 때문이다.(도시와 풍수 ‘강남 대해부 下’편 참고). 이는 또 서울 강남의 유력한 대체지로 부상하고 있는 강동권역 주도권을 놓고 고덕천권과 교산지구권이 경쟁하는 양상을 보이거나, 두 세력마저 합친 더 큰 규모의 광역신도시가 탄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경우 하남 중심의 강동권역은 지운상 이미 개발이 완성단계에 이른 강남 3구를 뛰어넘어 서울을 대표하는 ‘신 강남’이 될 수도 있다는 게 현공풍수적 분석이다. ●역사 스토리텔링이 도시 경쟁력다만 하남이 강남을 대신하는 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강남 사람들은 강남 3구에 산다는 것만으로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남은 도시의 정체성(identity)을 정립해야 한다는 과제를 갖고 있다. 시민들이 자신이 사는 도시에 대한 정체성을 갖지 못할 경우 도시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오랜 세월 살아가는 정주(定住)할 공간이라는 의식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이사하기 위한 정거장 정도로 인식될 때, 도시의 균형 발전과 화합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지역의 역사·문화 등 콘텐츠를 개발해 시민들의 정서적 일체감과 공동체 의식을 불어넣는 일이 시급하다. 역사 콘텐츠 스토리텔링을 통해 지역이 되살아난 곳으로 서울 강북의 북촌을 들 수 있다. 청계천과 종로 윗동네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북촌은 조선시대 이래 왕족과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 명성이 높은 곳이었다. 서울 강북의 중심으로 우뚝 섰던 북촌은 그러나 1970년대부터 불어 닥친 강남개발로 소외되기 시작하고 1980~1990년대에는 전통 한옥이 철거되고 다세대 주택 등이 들어서면서 본격 쇠락했다. 그렇게 정체성을 잃어버렸던 북촌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옥 등록제 등 새로운 지역보존정책과 역사 문화 유적과 전통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옛 명성을 회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건축가, 미술가들이 북촌의 역사성에 매료돼 찾아들 정도로 각광받는 동네가 됐다. 하남도 북촌 이상의 오랜 역사 콘텐츠를 갖고 있다. 강남권에서는 보기 드물게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재, 유적 등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한때 하남은 한성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의 유력 후보지로 지목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은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백제 시조) 온조왕의 옛 궁성은 본디 옛 광주읍(현재 하남)에 있어 궁촌(宮村, 현재 하남시 춘궁동)이라 불렀고, 여기에 사는 백성들은 참외를 심어 생업으로 삼았다. 여기가 하남의 위례성이다”고 주장했다. ‘택리지’를 쓴 이중한도 하남을 온조왕의 고도(古都)라고 기술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하남지역에서 왕성으로 여길 만한 유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궁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백제시대의 토성, 집터, 고분 등 백제인들의 숨결은 곳곳에 남아 있다. 4, 5세기 한성백제 귀족들의 무덤 50여 기가 발견된 감일지구 고분군은 이 일대가 백제인들의 주요 생활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외에 하남시 광암동 고분군에서는 백제 석실묘와 함께 신라 석곽묘도 다수 나와 이 지역이 삼국시대 사람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여왔던 이곳이 역설적으로 삼국의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만남의 무대였던 것이다. 하남에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낼 만한 소재가 많다. 교산동 선법사 경내에는 보물급 문화재인 마애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바로 옆으로 ‘온조왕 어용샘’으로 불리는 샘물이 있다. 온조왕이 마셨던 샘물이라는 전설이 붙어있는 이 우물터는 역사성과 영험함으로 인해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도미부인 설화도 하남이 무대로 알려져 있다. 도미부인은 한성백제 시기 개로왕의 유혹을 물리치고 남편과의 사랑을 끝끝내 지켜낸 인물로 유명한데, 도미부인이 배를 타고 건너갔다는 도미나루가 현재의 하남시 배알미동이라는 것이다. 하남시 검단산과 남양주시 예봉산 줄기가 만나 좁은 협곡을 이뤄 한강이 흘러가는 곳을 하남 사람들은 예부터 ‘도미협’으로 불렀다고 한다. 백제의 두 왕자가 거주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성산(二聖山, 209.8m) 능선에는 사적 제422호 지정된 이성산성이 있다. 총 둘레 1925m, 면적 약 15만5000㎡로 구성돼 있는 이 산성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뒤 화강암으로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에 오르면 하남 시가지를 비롯해 미사강변도시, 교산지구 등 하남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 하남의 핵심, 이성산과 덕풍천 하남의 3개 신도시의 주산 역할을 하는 이성산은 풍수적으로도 눈여겨 볼만한 곳이 적지 않다. 산성 동문 쪽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직사각형 건물터를 중심으로 8각, 9각 모양의 건물 터가 좌우로 배치돼 있다. 조사 보고에 따르면 직사각형 건물은 병영이나 창고 등 산성의 주요 시설물로 추정되고,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 8각 건물은 사직단일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매우 특이한 풍수 현상을 보인다. 불과 100m 남짓한 사이를 두고 9각형 건물터에서는 공중에서 에너지가 하강해 내려오는 천기형 기운이, 8각형 건물터에서는 지상으로 솟구쳐 오르는 지기형 기운이 각각 배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땅의 기운을 읽고서 그에 맞는 건물터를 지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하남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스토리텔링을 통해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낼 자원들이 많다. 이를 잘 활용할 경우 21세기 신도시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하남시내를 관통하는 덕풍천과 산곡천이 굽이돌지 못하고 한강으로 바로 빠져나가는 직류수라는 점이다. 풍수에서는 직류수가 땅 기운을 보강하지 않고 에너지를 뺏어버린다는 점에서 흉하다고 본다. 앞으로 건설되는 교산지구는 덕풍천을 중심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교산지구 개발을 하면서 덕풍천의 물길이 하남시를 감싸도록 하면서 미사지역과 연결시키는 작업도 검토해볼 만하다. 강동권역 대표 도시로 성장하는 키는 물길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 2020-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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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누리꾼의 이효리 공격[횡설수설/안영배]

    ‘홍콩 송환법’으로 세계가 떠들썩하던 작년 10월, 미국프로농구(NBA) 휴스턴 로키츠의 대릴 모리 단장은 ‘자유를 위한 싸움, 홍콩을 지지한다’는 글을 트위터 계정에 올렸다. 그러자 ‘중국 돈만 사랑하는 NBA를 보이콧하자’는 중국 누리꾼 댓글이 빗발쳤다. 중국 스포츠 시장에 진출했던 NBA 측은 결국 퇴출 운동과 스폰서 중단 압박 앞에 무릎을 꿇었다. ▷2016년 미국 팝가수 레이디 가가는 티베트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를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했다. 정치와 관련 없는 명상과 수행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중국 누리꾼들은 비난 댓글 수만 개를 올렸고, 중국 정부도 가세해 향후 그의 중국 공연을 금지하는 지침을 내렸다. ▷최근 가수 이효리가 중국 누리꾼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작년 홍콩 사태 때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 멤버 시원이 홍콩인들을 응원하는 게시글을 올렸다가 중국 누리꾼들의 항의를 받은 데 이어 한국 연예인이 또다시 표적이 된 것. 이효리는 지상파 방송 예능 프로에서 캐릭터 활동 예명으로 “글로벌하게 중국 이름으로 짓자”며 “마오 어때요?”라고 했다가 악플 세례를 받았다. 중국 누리꾼들은 ‘중국 지도자 마오를 조롱하지 말라’고 공격했다. 결국 방송국 제작진이 논란이 된 부분은 유료 서비스에서 편집하고, 마오 이름을 쓰지 않는 것으로 ‘굴복’했다. 이에 한국 누리꾼들이 일부 중국인들의 반응이 지나치다고 반박해 한중 감정싸움으로 번져갈 조짐도 보이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즉 마오는 중국에서 거의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어진다.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 성루에 내걸린 마오의 대형 초상화는 ‘신중국’의 상징처럼 간주되고, 삼국지의 관운장처럼 재물신(財物神)으로 추앙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설령 마오가 중국인들에겐 그런 존재라 하더라도, 한국 연예인이 정치적 의미를 담지 않고 단순히 한국인에게 익숙한 중국 성(姓)씨를 예명으로 거론했다 해서 ‘좌표’ 찍어 협박하는 행태는 결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일부 중국인들의 댓글이 온라인상 표출되는 다양한 의견이라고 하기에는 수상쩍은 구석도 있다. 중국에는 1건 게시당 5마오(五毛·0.5위안·약 85원)의 정부 수당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우마오당(五毛黨)이란 관변 댓글부대 조직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대 2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우마오당은 최근 국제무대로 본격 진출했으며 이들 중 일부가 한국 온라인에서도 여론 조작용 댓글을 달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이효리에 대한 일부 중국 누리꾼들의 공격이 특히 우려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20-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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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남3구 키운 탄천…신흥 부촌 예고하는 고덕천[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풍수를 몰라도 좋은 터를 찾아내는 방법이 있다. 하나는 역사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태어나거나 살았던 곳, 문화재로 등록된 명소나 유적지 주변 일대는 대체로 풍수적으로 좋은 곳으로 봐도 무방하다. 풍수 문화는 인류의 정착 생활과 함께 시작됐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거친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생활하기에 좋은 터를 찾아다녔다. 그 결과 생성된 신석기시대의 움집 터,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고인돌이 세워진 곳 등이 대체로 풍수적으로 명당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활용하는 ‘응용 풍수’ 건축물이 늘어났다. 그래서 조선보다는 고려, 고려보다는 삼국시대 등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는 풍수문화의 향취가 짙어진다. 이는 역사가 오래된 터가 현재도 살기 좋은 땅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현재 ‘잘 나가는 지역’의 지형과 유사한 장소를 고르는 것이다. 한국에서 명당이라 불리는 곳은 대체로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우람한 산이 받쳐주고 앞으로는 물이 유유히 굽이쳐 돌아나가는 지형이다. 고구려 백제 등 삼국 사회를 목격한 중국 역사가들은 한국인들이 특히 의산(依山; 산에 의지함), 대수(大水: 큰 물이 있음)형 지형에 삶의 터를 마련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과 지형적 조건, 둘 다를 갖춘 곳이라면 명당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 산은 인물을 관장, 물은 재물을 주관 현재 서울 강남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동네 가운데 하나가 강남구 삼성동과 대치동이다. 역사적으로 한성백제 시기의 삼성동토성이 수비했던 곳이자, 한강 유역에 둥지를 튼 백제 고도의 중심축을 이뤘던 지역이다. 지금의 지형도 명당 조건을 갖추고 있다. 뒤로는 대모산(293m)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고, 앞으로는 한강이 굽이쳐 흐른다. 또 풍수적인 관점에서 물길이 가져다주는 장점이 돋보이는 지역이라는 특징도 갖고 있다. 경기도 용인에서 발원한 탄천과 과천 관악산에서 발원한 양재천이 합수(合水)해 이 지역을 감싸준 뒤 한강 본류에 합류하고 있다. 물길은 길이가 길수록, 또 여러 줄기가 한 군데로 모여들수록 부를 모으기에 좋다고 본다. 풍수에서 ‘산은 인물을 주관하고(山管人丁·산관인정),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水管財物·수관재물)’고 본다. 삼성동, 대치동과 유사한 지형을 갖춘 곳으로 강동구 고덕동과 상일동 일대를 꼽을 수 있다. 지하철 5호선 고덕역과 상일동역에서 4km 가량 떨어진 경기 하남의 금암산과 이성산이 ‘배산’을 이루고 바로 앞으로는 한강이 ‘임수’하고 있다. 또 강남구와 송파구를 구분해주는 탄천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고덕천이 흐르고 있다. 고덕천은 남쪽의 상일IC 부근에서 이성산천, 초이촌, 대사골천 등 세 줄기 지류와 합수해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모양을 띠고 있다. 물길로 보자면 탄천보다 수로가 좁다는 게 단점이지만, 여러 지류가 합류함으로써 이런 단점을 충분히 보완해주고 있다. 이곳의 역사 역시 풍성하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동편에 위치한 이곳은 한성백제 시기 백제인들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었고, 고려 및 조선 시대 유명 학자들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친분이 두터웠던 조선 태종이 제안한 한성부윤(현 서울시장) 자리를 거부한 고려의 수절대신(守節大臣) 이양중,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어효첨, 어세겸 등 정승과 판서들이 이곳에서 성장하거나 활동했다. 함종 어씨들의 집성촌이기도 했던 이곳은 근대에 들어서서도 어윤석, 어경선 부자가 항일의병의 선봉에 서는 등 기개 높은 학자들을 배출한 고장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고덕동 북쪽 한강변에 자리한 야산 고덕산(88m)도 조선시대부터 명당지로 주목받았다. 일자산의 줄기가 뻗쳐와 큰 지기(地氣)를 맺은 이곳은 광주 이씨 광릉부원군 이극배와 그 후손들의 묘가 들어서 있고, 여말선초의 문신인 함부림과 박은 등의 묘도 원래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산 정상은 한강과 남양주시의 전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광경으로 서울시가 선정한 ‘우수조망명소’이기도 하다. 강남구의 압구정처럼 이곳에는 관어정이 있었고, 유학자들의 공부방인 구암서원도 있었다. 시와 문장에 뛰어난 학자들이 즐겨 찾은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 지역 향토사학자 정영기씨(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는 “고덕리(고덕동)에 가서 글 잘 하는 척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강남8학군보다 빼어난 학자 터 풍수적으로도 강동구 고덕동 일대는 학문과 자녀 교육에 좋은 기운을 품고 있는 곳이다. 강동구는 원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등과 함께 ‘강남 8학군’으로 묶인 지역이었다. 1970년대 말 강남개발 활성화를 위해 강북에 위치했던 명문 고등학교들을 강남 8학군 지역으로 이전시킬 때 배재고(고덕동), 동북고(둔촌동), 한영고(상일동) 등이 강동구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87년 강동구는 송파구와 함께 강남교육구청 소속에서 떨어져 나왔고 강남 6학군으로 분류됐다. 여기에다 개발이 강남 3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어지면서 강동구는 한동안 경제적, 교육적으로 뒤쳐진 지역으로 여겨졌다. 강남권 주민들은 강동구를 강남에서 사업하다가 실패했을 때 이사하는 곳, 교육에서도 강남 8학군보다 뒤떨어지는 곳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든 이후 각종 부동산개발사업이 이어지면서 강동구는 ‘강남 4구’로 당당히 대접받고 있다. 교육 여건도 좋아질 가능성이 크다. 고덕동 명일동 등 총 6만 세대에 달하는 아파트단지가 2024년까지 완공될 예정으로 전입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어서다. 인구가 늘어나면 교육 수요는 자연스럽게 커진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조만간 이 일대가 대치동과 목동에 이은 서울의 3대 학원가를 형성할 수 있다며 적극적인 투자를 권유할 정도다. 땅의 성격으로 보아도 이곳에서는 교육을 통해 젊은 인재들이 많이 양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체적으로 고덕동 일대는 얕은 구릉 지대가 많은 점이 도시 발전의 약점으로 꼽히지만 살기에 좋은 명당이라 할 만하다. ● 재물을 부르는 고덕천 강동구에서 풍수적 관점으로 가장 눈여겨볼 점은 물길이다. 바로 고덕천으로, 강남구의 탄천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세 갈래의 물길이 하나로 모여들어 한강으로 흘러가는 형상인 고덕천은 부를 쌓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뒷받침하듯 최근 강동구에서 추진되고 있는 세 곳의 산업단지가 모두 고덕천을 따라 세워지고 있다. 고덕천 남쪽 상일동 지역에는 첨단업무단지와 엔지니어링복합단지가 조성되고 있고, 북쪽 한강변에는 고덕 비즈밸리가 들어설 예정이다. 특히 고덕산과 강일IC 사이에 23만㎡ 규모로 조성되는 고덕 비즈밸리는 각종 업무용 시설과 호텔, 복합쇼핑몰 등을 갖춘 비즈니스 시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강동구청 자료에 따르면 세 산업단지가 모두 완성될 경우 11만 명의 고용 창출 효과와 20조 원의 경제 유발 효과가 기대된다. 계획대로 개발되면 고덕천 서편의 강동구는 강남구로, 동편의 하남시 미사지역은 송파구로 비교될 정도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고덕동 일대가 본격 개발되면 인접한 미사강변도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사지역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해 한강을 이뤄 서울권으로 진입하면서 처음 만나는 곳이다. 물길이 미사지역을 활처럼 감싸 안고 돌아나가는 모양새여서 오래 전부터 풍수가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아왔다. 그 기운이 21세기에 접어들어서 서서히 발동하고 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던 이곳은 2009년 이명박 정권 때 보금자리주택 시범지구로 지정되면서 개발이 시작됐다. 아파트 입주 초기인 2015년까지만 해도 황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고 생활편의시설들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지역이 활기를 띠고 있다. 미사지역의 발전은 시기적으로 강동구 고덕천 주변이 본격 개발에 들어가는 때와 맞물린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고덕천을 중심으로 고덕동 일대와 미사지역은 행정구역상 나뉘어 있지만 지형적으로는 한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위성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강동구는 남쪽에 위치한 일자산이 북동 방향으로 머리를 틀어 승상산을 거쳐 고덕산에서 끝을 맺는 모양이다. 일자산 자락이 강동구의 동쪽과 서쪽을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일자산 서쪽의 명일동 천호동 성내동 지역은 일자산이 뒷산 즉 배산 역할을 해주고 있지만, 일자산 동쪽인 고덕동 일부, 상일동, 강일동은 그렇지 못하다. 대신 이 지역은 하남시의 이성산과 금암산이 든든하게 주산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남시 미사지역도 이 두 산에 의지한 채 한강에 에워싸여 있는 모양이다. 풍수학에선 뒤를 받쳐주는 산이 다르면 땅의 ‘족보’가 다르다고 본다. 따라서 땅의 발전 양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성산과 금암산이 주산 역할을 해주는 지역은 함께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고덕천을 흐르는 여러 물줄기도 이들 산을 발원지로 두고 있다. 결국 고덕천 일대를 중심으로 동쪽의 미사지역, 그리고 남쪽의 하남시 감일택지지구 등은 한 데 묶여 광역 신도시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포화 상태에 달한 강남3구의 대체지로서 가장 유력한 곳으로 이곳을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안영배 논설위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 202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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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널들은 강남 지운(地運)을 어떻게 바꿀까[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산을 깎아내고 하천을 복개하는 등 원래 지형이 심하게 변한 현대 도시에서는 풍수지리학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풍수학은 바람길과 물길의 흐름을 살펴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터를 찾아내는 환경지리학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바람을 통제하는 ‘산’과 물길을 가리키는 ‘하천’은 풍수가들의 중요한 판단 수단이 된다. 도시 건설 과정에서 산과 물이라는 도구가 사라져버린 난감한 상황에서는 어떨까. 현대의 풍수가들은 곧장 그 대체 수단을 찾아냈다. 바로 크고 높은 빌딩을 인공의 산으로 설정하거나 큰 도로를 인공의 물길로 삼아 풍수적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 풍수학’에서 더 큰 문제는 산의 앞뒤를 관통하는 터널이 생겼을 때다. 바람을 막아주거나(防風) 갈무리하는(藏風) 역할을 해야 하는 산이 오히려 터널을 통해 바람을 통과시키는 것은 전통 풍수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풍수가들은 터널을 통해 전해지는 기운을 충살(衝殺)로 여겨 흉한 대상으로 삼았다. 2001년 남산 2호터널이 재개통될 때 터널 입구에 자리 잡고 있던 신라호텔의 매출이 크게 줄어든 원인을 충살로 해석하고 호텔 입구에 액막이 탑을 설치한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남산 3호터널의 충살을 피하기 위해 상업은행(현 한국은행 별관)의 출입문을 바꾼 것도 유명한 일화다. 실제로 산으로 막혀 있던 두 지역이 터널을 통해 연결되는 것은 상당한 기운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치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이나 삼투압 현상처럼, 바람을 포함한 공간의 기(氣)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고려의 풍수가들은 이런 변화에 민감했다. 특정 지역의 공간 기운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변화하는 현상을 지운(地運, 땅의 운세)의 성쇠(盛衰)로 풀이했다. 고려 숙종 때는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을 따라 수도가 세 곳에 존재했을 정도다. 고려 창업주 왕건이 도읍한 개성을 중경(中京)이라 하여 으뜸 수도로 설정한 뒤, 현재의 서울인 남경(南京)과 평양인 서경(西京)을 부수도로 삼았다. 왕은 매년 음력 11월~2월 중경에서 지내다 3월~6월은 남경, 7월~10월은 서경에서 살도록 했다. 이렇게 삼경제(三京制)를 운영하면 왕은 개성의 땅 기운을 유지하면서 나라를 오래 경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대사회에서도 공간의 변화, 즉 지운의 변화는 사람들의 물질적, 환경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운의 변화를 유도하는 대표적 매개체인 도시의 터널을 유심히 살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강남3구 곳곳에서 터널이 완공됐거나 건설 예정 중이다. 이는 강남의 지운이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 서리풀 터널과 강남 중심축 이동 지난해 4월 강남구와 서초구를 확실하게 이어주는 서리풀터널이 개통됐다. 터널이 생기기 전 서초구는 크게 두 개의 생활권역으로 분리돼 있었다. 서초구 중심을 남북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산 때문이었다. 위성사진에서 보면 서초구의 남쪽 배후산인 우면산(293m)의 한 자락이 야트막한 매봉재산(125m, 방배공원)을 이룬 뒤 계속 한강 방면으로 북진해 서리풀공원, 몽마르뜨 공원을 거쳐 반포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이어지는 모양새다. 이 같은 ‘남북 장벽’으로 인해 우면산자락 앞면에 해당하는 동쪽의 서초동과 뒷면에 해당하는 서쪽의 방배동은 같은 서초구이면서도 생활권역이 많이 달랐다. 행정구역상으로도 두 동네는 원래 분리돼 있었다. 1988년 서초구란 행정구역이 탄생하기 이전, 서초동 일대는 강남구에 편입돼 있던 반면 방배동은 관악구 소속이었다. 풍수 시각에서도 산을 경계로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의 사람들은 삶의 양태나 정서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산과 하천은 풍토를 나누는 경계선이 되기 때문이다. 두 지역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강남개발사업에서도 차이가 났다. 동쪽의 서초동은 바로 이웃한 강남구와 함께 개발사업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그리고 부의 상징인 강남권으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대법원, 대검찰청, 서울지방법원 등 국가 사법 기관들도 이곳에 줄줄이 들어섰다. 반면 동작구와 접해 있는 방배동 일대는 아파트, 단독주택, 연립주택이 혼재한 주거지, 높은 빌딩이 별로 없는 일반 상업지구 위주로 발전됐다. 서울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평범한’ 동네였다. 또 방배동 일대는 동작구 관악구, 경기 과천시 등 서울 서남부 및 경기도로 곧장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면서도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되는 고속버스터미널역이 서초동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두 지역의 차별은 강남 도시개발사업 당시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1978년 결정된 서울시 도시개발사업에 따르면 강남역 사거리부터 이수역 사거리까지 동서 직선거리로 총 3.8km를 연결하는 ‘서초대로’ 건설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산을 통과하는 터널이 들어설 지점인 서리풀 공원에 국군정보사령부가 자리 잡고 버티는 바람에 도로가 단절돼 버렸다. 강남구에서 서초구 방배동 지역으로 진입하려면 남부순환로, 사평로 등 주변 도로로 우회해야 했다. 2015년 군부대 이전을 계기로 서리풀 터널(총연장 1280m) 개통과 함께 무려 40년만에야 왕복 6~8차선인 서초대로가 완성될 수 있었다. 서리풀 터널 개통식에서 조은희 서초구청장은 “서리풀 터널 개통은 동서(서초동과 방배동)의 길을 여는 의미를 넘어 서초의 미래를 열고, 서초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감회를 밝혔다. 서리풀 터널이 그간의 동서 격차를 해소하는 결정적 실마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였다. 일단 서리풀 터널을 통해 동쪽(강남구 및 서초구 서초동 일대)과 서쪽(방배동 일대)은 연결됐다. 동서의 차이를 없애는 지운의 변화는 벌써부터 일어나고 있다. 서리풀 터널 개통 즈음부터 내방역과 이수역 일대를 중심으로 부동산 개발 열풍이 불었다. 아파트 재건축, 주택 재개발 사업과 함께 부동산 가격이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아 올랐다. 정점에 달한 강남구의 지운이 덜 개발된 서쪽으로 본격적으로 이동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서초구에서는 한강변의 반포동과 함께 방배동이 가장 주목받는 동네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6.65㎢ 행정면적에 4만2000여 세대(2019년 기준)가 사는 방배동은 강남의 기운을 오롯이 담기에는 너무 좁다는 것이다. ○ 이수~과천 터널, 재운(財運)의 이동 서리풀 터널과 함께 서초구에는 또 하나의 터널이 생길 예정이다. 남태령 고개 땅 속을 뚫고 나가는 ‘이수~과천 간 복합터널’이다. 국토교통부 발표에 따르면 이 터널은 2026년 완공 목표로 진행된다. 강남권에서 과천시로 넘어가는 주요 도로인 남태령 고갯길이 평소에도 교통 정체가 심해 지하로 별도의 터널을 뚫어 교통난을 해소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에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C노선도 과천에 역을 세울 예정이어서 또 다른 호잿거리다. 이로 인해 과천은 제2의 부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과천은 과거 시흥시에 딸린 일개 면에 불과했지만 정부종합청사 건설로 1986년 단번에 시로 승격됐다. 권력 기운의 후광을 톡톡히 본 셈이다. 정부종합청사라는 권력기관이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들었던 과천은 이제 복합터널 건설과 함께 유력한 강남 대체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남태령 고갯길의 터널이 서초구권 사당역 사거리 일대에 집중된 재물과 상업의 지운을 과천에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땅의 운세를 의미하는 지운과 땅의 기운를 뜻하는 지기(地氣)는 다른 것이다. 지기가 해당 터에서 감도는 고정적인 것이라면, 지운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공간의 변화를 일으키는 유동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 때문에 지운의 이동을 자극하는 터널은 현대사회에서 더욱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도 터널은 막혀 있던 곳으로 교통과 물류의 이동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해당 지역에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과천에서 미래의 지운을 누릴 만한 곳으로 7000여 가구가 들어설 예정인 과천 3기 신도시 일대가 꼽힌다. 과천시 자체가 품고 있는 땅 기운도 그렇다. 과천은 지형 상 관악산과 청계산이라는 두 거대한 산이 에워싸고 있다. 과천정부종합청사 터인 현재의 과천시내는 관악산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관악산은 권력의 기운이 강한 산이다. 반면 4호선 지하철역인 선바위역 일대에 들어설 과천신도시는 청계산이 뒷배가 된다. 청계산은 풍요와 재물의 기운이 왕성한 산이다. 전통 풍수학 논리로도 이번에는 청계산이 용을 쓸 순서인 것이다. 과천은 앞으로 제2의 강남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를 계기로 강남권이 외곽으로 확산하는 범(凡)강남 광역도시가 탄생할 수도 있다. 한국판 메갈로폴리스(매우 특별한 지역)의 출현을 기대해본다.안영배 논설위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 202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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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성백제의 부활 강남, 부동산 불패 신화 이어갈까?[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두 왕조 국가가 별개로 도읍지로 정했던 터다. 한강을 경계로 강북의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였다. 강남에 자리잡은 하남위례성은 조선보다 1400여 년 앞서 백제 도읍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하남위례성은 북방의 강국 고구려를 의식한 백제 시조 온조왕이 기원 전후쯤에 한강을 방어선 삼아 건설했던 도성이다. 강북과 강남은 땅의 족보도 서로 다르다. 산줄기의 시작점과 진행 방향, 종점 등을 족보 형식으로 도표화한 조선시대 책 ‘산경표’에 따르면 강북은 한북정맥에 속하고, 강남은 한남정맥에 속한다. 쉽게 말해 강남의 청계산이나 관악산은 강북의 북한산과는 그 계보가 완전히 다른 지맥(地脈)이라는 것이다. 백제의 하남위례성은 속리산을 뿌리로 둔 한남정맥의 산들이 남쪽을 받쳐주고 북쪽으로는 한강을 머리에 두고 건설됐다. 기원후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500년 가까이 수도로 번성했던 하남위례성 시기를 ‘한성백제’라고 부른다. 따라서 ‘서울의 원조’를 따지자면 경복궁과 사대문이 들어선 하북(河北,강북)이 아니라 하남위례성이 있었던 하남(河南,강남)이 될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하남위례성이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강남구의 삼성동토성, 하남시의 교산동토성 등도 백제 왕성과 관련이 깊은 곳이라는 해석도 있다. 흙으로 쌓아올린 이들 토성은 20세기 강남 발전의 축과도 맞닿아 있다. 역사지리학적으로 백제 토성은 강남의 흥쇠를 추론해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 1500년 만에 부활한 ‘강남 백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강북과 강남은 땅의 뿌리가 다를 뿐만 아니라 발전사도 차이가 있다. 강북은 조선이 1394년 한양도성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620여년 넘게 대한민국 수도로서의 위상을 누려오고 있다. 반면 ‘원조 서울’인 강남은 백제의 천도 후 잊힌 땅이 됐다. 웅진 백제와 사비(부여) 백제에 가려진 ‘전설의 왕국’ 한성백제 땅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박정희 정권의 강남개발 사업과 함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0년대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는 강남개발 비화가 담겨 있다. 1970년 1월 박정희 정권의 실세 박종규 경호실장은 윤진우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불러 강남에서 가장 장래성 있고 투자 가치가 있는 곳을 물었다. “탄천을 경계로 그 서쪽 일대”라는 답이 나왔다. 탄천의 서쪽인 강남구 일대는 이후 부동산 투기 광풍이 불어닥쳤다.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400만 평의 땅이 개발됐다. 주택과 학교, 도로 등이 건설되면서 강남 부동산 불패 신화가 시작됐다. 강남이 급격히 발전할수록 강북은 상대적으로 처지는 역전 현상도 나타났다. 2012년 가수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로 세계적 유명세까지 탄 강남은 이제 21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역이 됐다. 이를 순환론적 역사주의 시각에서 보면 한성백제가 1500년만에 ‘강남 백제’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강남’이라고 할 때는 한강 남쪽에 위치한 지역 전체라기보다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를 아우른다. 이 가운데서 강남구가 중심축이며, 그 핵은 북쪽의 한강과 동쪽의 탄천을 경계선 삼아 건축됐던 삼성동토성 일대라고 할 수 있다. 봉은사 뒤쪽 구릉지대인 경기고교, 청담배수지공원 일대에 자리했던 삼성동토성은 하남위례성을 보호하던 중요 성곽이었다. 풍수적으로도 봉은사, 코엑스 전시관, 무역센터 등은 토성 안쪽에 해당하며 왕궁이 들어섰을 만한 명당 터로 꼽힌다. 안타깝게도 삼성동토성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아파트와 빌딩 건설로 토성이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고, 지금은 토성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옛 영광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경기고교 동쪽 영동대로 언덕길에 세워진 삼성동토성 표지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건국 초 한산에 도읍을 정하였던 백제는 고구려 및 신라에 대항하여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곳 옛 삼성리 일대에서 뚝섬 맞은편까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을 따라 토성을 쌓았다. 토성의 유적이 최근까지 남아 있었으나, 강남 개발로 인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강남구는 지기(地氣), 송파구는 천기(天氣)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강남 개발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전두환 정권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탄천의 동쪽에 위치한 잠실지역을 개발했다. 2차 강남개발이 시작되면서 부동산 투자 열풍이 다시 불었다. 이 일대에 지어진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올림픽선수촌아파트, 잠실종합운동장 등은 잠실 송파 일대가 강남구, 서초구와 함께 강남으로 묶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남구와 함께 송파구는 토성 등 한성백제 유적이 넘쳐나는 곳이다. 한성백제의 대표적 토성으로 꼽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고, 백제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고분과 방이동 고분도 있다. 이들이 있는 위치도 규칙성을 띠고 있다. 천호대교 한강변의 풍납토성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올림픽공원으로 불리는 몽촌토성이 있고, 몽촌토성에서 다시 1.5km 떨어진 곳에 방이동 고분, 그곳에서 다시 1.3km 떨어진 곳에 석촌동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다. 이 네 지점은 시계방향으로 둥그런 원을 그리면서 송파구의 핵심지역인 잠실역 일대를 호위하는 모양새다. 또 이들 유적은 하늘, 신, 제사 문화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민가가 들어서 있는 풍납토성에서는 송파구가 본격 개발될 때 한성백제 시기의 유물이 다량 쏟아져 나왔는데, 특히 지배층이 제사를 지내던 신전인 여(呂)자형 집터와 신성한 우물 터가 발굴됐다. 이 때문에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며, 인근의 몽촌토성은 비상시 풍납토성을 대체하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다. 석촌동 고분(석촌고분공원)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의 고구려 피라미드 무덤과 흡사한 적석총 4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중 가로 50.8m, 세로 48.4m의 거대 규모를 자랑하는 3호분은 백제 전성기를 이끌어낸 정복군주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실제 3호분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무덤인 호태왕릉 피라미드 못지 않은 강력한 기운(氣運)이 감도는 명당지다. 방이동 일대 구릉지대에 있는 고분군 역시 백제 지배계급의 무덤이다. 이 같은 배치는 송파 지역에 대한 백제인들의 지리적 감각이 반영된 결과로 보여진다. 풍수학적으로도 탄천을 경계로 송파구와 강남구는 다른 특징이 보여진다. 삼성동 토성이 자리했던 강남구의 삼성동과 청담동 일대는 땅의 지기(地氣)가 강성한 명당이라면, 송파구는 하늘과 소통하며 그 기운을 잘 받아 내리는 천기(天氣) 터가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 강남의 운세, 지금이 절정 21세기에 재현된 한성백제의 부활과 영광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미래를 전망하기는 어렵지만 풍수학적으로는 강남구와 송파구에 들어서는 특징적인 건물들을 통해서 한가지 유추해볼 수 있다. 초고층 빌딩이 들어선 지역이나 국가가 최악의 경기 불황을 맞게 된다는 ‘마천루의 저주’라는 것이 있다. 초고층이나 최고급 건물은 해당 터의 기운을 극대화해 소비한 셈이어서 이후 그 터의 기운은 쇠락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 풍수가들은 이를 ‘지기쇠왕(地氣衰旺)’이라는 말로 풀이했다. 지기는 왕성함과 쇠락함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이로 적용하면 현재 강남구와 송파구는 기운이 이미 절정기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강남구에선 강남역 부근에 화려하게 들어선 삼성 사옥과 삼성동 옛 한국전력 부지에 지어질 현대자동차그룹의 마천루(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가 정점을 보여주는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특히 2026년까지 지상 105층 규모로 건설될 GBC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파구에선 2017년에 개장한 신천동의 롯데월드타워가 정점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지상 123층, 높이 555m에 달하는 롯데월드타워는 2020년 현재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이자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건물로 링크돼 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한성백제의 기운이 강남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곳은 신도시 개발이 한창인 하남시다. 이와 관련한 상징적인 일도 있었다. 잠실 롯데월드타워 완공과 맞물린 시기인 2016년, 하남시 감일택지지구에서 백제 지배층의 무덤인 횡혈식석실묘 50여기가 무더기로 발굴됐다. 풍납토성에서 직선거리로 5km 가량 떨어진 이 지역은 동쪽으로 3km 거리에 하남시 교산동토성을 곁에 두고 있다. 1500년의 세월을 거쳐 삼성동토성과 풍납토성(몽촌토성)에서 부활했던 한성백제의 영광이 교산동토성에서 재현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안영배 논설위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 20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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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방역 후유증 대구 코로나 전사들, 이대론 2차유행 감당 못해[논설위원 파워 인터뷰]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한반도는 전염병이 휩쓸었다. 연초부터 천연두와 발진티푸스가 나돌기 시작하더니 뒤따라 콜레라마저 창궐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부산항으로 귀국한 동포들에 의해 전파된 콜레라는 특히 대구경북 지방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해 5월 경북 청도에서 첫 콜레라 환자가 나온 이후 이웃한 대구는 전국적으로 발병률 1위, 사망률 1위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74년 후인 올해 2월, 중국발 코로나19가 청도와 대구의 신천지교회 교인들을 집단 감염시켰다. 대구는 또다시 전염병과의 전쟁 최전선이 됐다. 대구는 2, 3월에 집중적으로 환자가 발생해 수도권보다 많은 6900여 명의 누적 확진자(7월 5일 기준)를 기록했다. 그러나 두 사태의 결과는 매우 다르다. 70여 년 전 대구는 콜레라 창궐로 민심이 흉흉해졌고 좌익의 선동에 의한 10·1사태를 겪었지만, 지금은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K방역의 모범 기지가 됐다.》콜레라 창궐 당시 퇴치 선봉에 섰던 대구 동산병원(동산기독병원)의 후신 계명대 동산의료원도 이번에 큰 주목을 받았다. 동산의료원은 헌신적이고 발 빠른 대처로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 언론으로부터 배움의 대상이 됐다. 감염병 전쟁의 최전선 사령관인 김권배 동산의료원장(69)을 만났다. 그는 계명대동산병원(대구 달서구 신당동 소재)과 그 분신 격인 대구동산병원(대구 중구 동산동 소재)을 통합 지휘하고 있는 의료 책임자다. 환자 찾지 않는 ‘코로나 병원’―병원 방문자들이 손 소독과 열 체크를 하고 이름과 연락처를 기입하는 것 빼고는 대구동산병원이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코로나19가 들불처럼 번져 나갈 때 우리 의료원은 대구동산병원을 통째로 비워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토록 했다. 대구 지역 감염이 안정세에 접어듦에 따라 115일 만인 6월 15일부터 예전 상태로 복귀했다. 현재 외래환자들이 오가는 병원 본관은 한 달간의 고강도 멸균과 소독 작업을 거친 끝에 정상 가동되고 있다.”동산의료원은 7월 5일 기준으로 확진자 1058명 중 964명(91%)이 완치돼 퇴원했고, 22명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현재 대구동산병원에 입원 중인 11명의 확진자는 본관과 분리된 병동에서 별도로 치료받고 있다. 본관 1층 로비에 전시된 ‘코로나19와 벌인 115일간의 사투’라는 제목의 현장 사진들이 당시 치열했던 ‘전쟁’을 엿보게 한다.―병원을 찾으면서 ‘코로나 병원인데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솔직히 없지 않았다.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후유증이 아직도 있다. ‘오염병원’이라는 오해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어선지 코로나19 이전 하루 700명 수준이던 외래환자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 병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코로나 병원이라는 치명적인 이미지를 감수하면서까지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나선 이유는.“우리 의료원의 설립 이념과 역사적 소명 의식 때문이다. 120년 전 기독교 선교사들이 복음과 함께 의술을 펼치기 위해 병원을 세운 이후, 우리 의료원은 지역민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원칙과 사명감으로 일해 왔다. 역사적으로도 우리 의료원은 지역 감염병을 단 한 번도 외면하지 않고 극복해 왔다.”동산의료원의 역사는 대한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의료선교사 우드브리지 존슨(1869¤1951)이 대구 중심지인 약전골목에 ‘미국약방’을 세워 약을 나눠 준 게 시작이다. 이후 정식으로 제중원(濟衆院)이라는 병원 이름을 내건 존슨 선교사는 대구에서 처음으로 천연두 예방 백신과 학질(말라리아) 치료제를 보급하고, 한센병 환자 구제 사업과 풍토병 치료에 앞장서는 등 감염병 치료에 집중했다. 제중원은 1903년 현재의 대구동산병원 자리로 옮긴 후 ‘동산병원’으로 불렸고, 1980년 계명대와 통합해 계명대 동산의료원으로 탈바꿈한 뒤에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겨울에 2차 팬데믹 예상돼―소규모 집단 감염이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대구 사람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은 경험 때문에 ‘생활 속 거리 두기’를 잘 실천해 왔고 꾸준히 안정세를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다중이용시설에서 집단 감염이 확산되고 있어 대구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일상생활에서 거리 두기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않는 한 추가 전파를 멈추게 할 방법이 없다.”―곧 휴가철이다. 특히 주의할 점이 있다면….“올여름은 평년보다 폭염이 잦을 것으로 전망되고, 휴가 시즌은 해수욕장 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할 수 있는 시기여서 우려된다. 밀집·밀폐된 공간은 코로나19의 온상지라고 여겨야 한다. 가족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덥고 불편하더라도 최소한 비말차단용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일부에서는 2차 팬데믹도 거론하는데….“우리 의료원은 25명의 감염병 관련 전문의가 포진해 있다. 이분들에 따르면 대체로 2차 유행이 올가을에 시작돼 11월¤내년 2월경 절정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코로나19 확산세에 따라 고강도 거리 두기, 생활 속 거리 두기, 생활방역 등의 방법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면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2차 팬데믹이 오면 잘 대처할 수 있을까.“대구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대구가 빠른 속도로 안정세를 찾게 된 것은 빠른 검체 검사 덕분이다. 신속한 검사 및 결과,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감염자 추적 등을 통해 방역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2차 팬데믹이 닥칠 경우를 대비해서도 대량 검사를 신속히 진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 놓아야 한다. 또 막상 재유행이 닥치면 공공 의료기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의료 자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민간 의료기관에 대한 공공적 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수도권에서 이미 병상 부족 등의 문제가 나오지 않는가. 따라서 민간 의료기관이 감염병 관리 시설 및 장비를 확보하고, 지역 단위별 사전 훈련을 통해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정책으로 지원해야 한다.”K방역의 숨은 영웅들―코로나19 대응에서 보인 대구 사람들의 시민의식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을 당시 우리 의료진은 24시간 대기 상태로 기진맥진했다. 그런 의료진에게 ‘우리 대구시민은 대구동산병원을 잊지 않고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선생님들 힘내세요’ 등의 격려와 응원 메시지는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됐다. 의료진은 각계의 정성이 담긴 마스크, 체온계, 무전기, 과일, 컵라면 등 기부 물품을 보면서 사명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또 대구시의사회를 중심으로 의사·간호사 등 400여 명이 우리 병원으로 달려와 자원 봉사를 했다. 한 의사는 한 달 이상 의료 봉사를 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이런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코로나19 위기를 잘 넘겼다고 생각한다.” 김 원장은 이름도 남기지 않은 일반 자원봉사자들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밀려드는 환자에 비해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5분만 움직여도 땀을 비 오듯 흘리게 되는 방호복을 입고서 환자 이동 및 간호 보조, 식사 배식 등 힘든 일을 기꺼이 맡아 하고서는 유유히 사라진 이들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하던 그들이야말로 코로나19의 진짜 영웅”이라는 것이다.―의료진이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지금까지 10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면서 특히 간호사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계명대동산병원에서 대구동산병원으로 파견나간 수간호사는 장갑을 오래 착용한 나머지 손바닥에 피부병이 생겼다. 20대 간호사는 극도의 피로감과 감염 공포 등으로 공황장애에 걸리기도 했다. 오랜 기간 코로나19와의 사투에서 고군분투해 온 의료진은 번아웃(burnout)돼 무력감이 클 수 있다. 자신들이 소모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이분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휴식, 그리고 적절한 보상 등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서 감내한 손실과 보상은 어떻게 됐나.“대구동산병원은 약 120억 원의 손실을 보았고, 손실 일부를 우선 지급하는 개산급으로 약 38억 원을 받았다. 6월25일에는 대구시로부터 약 50억원의 지원금도 받았다. 민간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전담병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의료기관에 대해 적극적인 보상이 필요하다. 이런 보상 정책이 향후 민간의료의 공공적 역할을 잘 이끌어낼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대구동산병원은 대구 3·1운동을 상징하는 3·1운동로에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던 곳이다. 어려움이 닥치면 힘을 합치는 한국인의 DNA가 응축된 이곳에서 코로나19 위기를 이겨낸 대구의 저력, 그리고 한국인의 저력을 되새겨 보았다.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김권배 의료원장은::―경북고, 경북대 의대―계명대 의대 내과학교실 교수―계명대동산병원 심혈관연구소 소장―대구경북병원회 회장―계명대동산병원장―현 계명대 의무부총장 겸 동산의료원장―현 (사)동산의학연구재단 이사장}

    • 20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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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오동 전투 100주년[횡설수설/안영배]

    ‘두만강 맞은편에 있는 두목 홍범도, 구춘선, 서일, 최명록(최진동), 양하청 등은 얼음 얼을 때가 오기만 하면 조선 내지를 음습할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성명(聲明)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1일자 기사의 일부다. 기사에 거명된 이들이 바로 독립군 대장들이고, 한 달여 후 봉오동 전투와 그해 10월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들이다. ▷선만(鮮滿·조선과 중국 만주) 국경선, 즉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맞붙은 독립군들의 국내진공작전 백미는 단연 봉오동 전투다. 1920년 6월 4일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함북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 초소를 습격한 데서 전투는 시작된다. 일본군이 1개 중대를 급파했으나 중국령 간도 삼둔자(三屯子)로 피해 매복하던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 또 패했다. ▷일본군은 19사단 사령부가 직접 대규모의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해 독립군 토벌 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6월 7일 간도의 허룽(和龍)현 봉오동 골짜기에서 독립군 연합부대의 유인작전에 걸려 전사자 157명, 부상자 300여 명을 내고 후퇴했다. 독립군 피해는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 봉오동 전투 대승은 간도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사기는 물론이고 중국인들에게도 큰 감명을 줬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최근 “당시 독립군은 체코군과 러시아 혁명군 등으로부터 구입한 소총과 폭탄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동포들의 적극적인 군자금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복기대 인하대 교수에 따르면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로 시작하는 노래 ‘번지 없는 주막’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의 독립군들을 챙겨주던 주모 이야기가 배경이라고 한다. ▷봉오동 참패 후 일제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대대적인 보복전을 준비한다. 일제는 독립군 소식을 보도해온 동아일보를 1920년 9월 무기정간시켰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제는 토벌작전 한 달 전 동아일보를 무기정간 조치했는데, 이는 토벌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이 3·1운동처럼 봉기할 것을 우려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일제는 10월 토벌작전에 나서지만 백두산 자락의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더 큰 참패를 당한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는 관련 행사가 풍성하지만 정작 봉오동 전투 현장은 저수지로 변해 황량한 상태다. 다만 중국 투먼(圖們)시 인민정부가 전투 현장 부근에 세운 ‘봉오동반일전적지’ 기념비와 최진동이 살았던 조선족 집단촌만이 그날을 기억하게 해준다. 카자흐스탄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올해 중 국내로 봉환된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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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바호 인디언[횡설수설/안영배]

    ‘캠프 붉은 구름(Camp Red Cloud).’ 지금은 평택으로 이전한 주한 미2사단 사령부가 있었던 경기 의정부시의 기지다. 6·25전쟁에 참전한 인디언 용사 미첼 레드클라우드 상병의 살신성인을 기려 기지명을 지었다. 레드클라우드 상병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역사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붉은 구름’을 성(姓)으로 삼은 인디언 핏줄이다. 그는 1950년 11월 5일 중공군의 야간 기습으로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서 있기조차 힘든 몸을 나무에 밧줄로 묶고 자동소총으로 방어를 했다. 이튿날 온몸이 벌집처럼 변한 그의 시신이 발견됐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종족 중 가장 많은 인구(9만 명 추산)를 차지하는 나바호족은 6·25전쟁 당시 약 800명이 참전했고, 이 가운데 130여 명이 90대 고령으로 생존해 있다. 나바호족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 때는 부족 언어인 나바호어로 일본군이 해독 불가능한 암호를 개발하는 등 암호통신병으로도 맹활약했다. 이들의 영웅담은 우위썬(吳宇森) 감독, 니컬러스 케이지 주연의 ‘윈드토커’(2002년)로 영화화됐다. ▷나바호족은 미국 남서부 애리조나, 뉴멕시코, 유타주에 걸쳐 있는 나바호 네이션(보호구역 내 자치정부)에 주로 살고 있다. 짐승들도 생존을 버거워하는 황무지다. 그런데 이런 황량한 사막도 코로나19는 비켜 가지 않았다. ‘미국인디언건강서비스’에 따르면 16일 현재 나바호 인디언 4172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열악한 위생 환경으로 인해 확진자율이 애리조나주의 9배가 넘는다고 한다. ▷국가보훈처와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는 나바호족에게 마스크(KF94) 1만 장과 손소독제 등 방역 물품을 긴급 지원키로 했다. 정부는 나바호족 외에도 16개 참전국에 우선적으로 방역 물품을 지원할 방침이다. 필리핀은 17일 현재 확진자가 1만2000여 명에 달하고, 콜롬비아 역시 코로나 환자가 사망하면 관으로 사용할 ‘종이 침대’까지 제작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나바호족은 보호구역을 찾는 한국인들에게 유달리 깊은 친근감을 표시한다고 한다. 인디언 선교 활동을 해온 이남종 선교사는 “나바호족은 한국인을 신발 두 짝 가운데 서로 한 짝(one pair of shoes)이라는 뜻의 ‘시끼스’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70년 전 참전국 젊은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이 방역 모범국 평가를 받는 위치까지 성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낯선 나라에 와서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피를 흘린 이들에 대한 작은 보은이 그들이 코로나19를 극복하는 데 작은 힘이나마 되기를 기원해 본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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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흑사병’ 코로나, 4차산업 ‘뉴 르네상스’ 개막 방아쇠 될 것[논설위원 파워 인터뷰]

    원격 온라인 수업, 재택근무, 화상회의…. 낯선 문화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비대면 방식의 언택트(Untact) 시대가 열린 것이다. 코로나19가 반강제로 몰고 온 변화의 물결이다. 미래학자들은 세상은 이제 코로나 전(BC·Before Corona)과 후(AC·After Corona)로 규정될 것이며, 인류에게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고 강조한다. 최근 최고경영자(CEO) 대상 원격 화상 특강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펼쳐질 세상을 ‘뉴(New) 르네상스’로 규정한 미래학자 안종배 한세대 교수(58)를 만났다. 국제미래학회 제3대 회장이자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혁신위원을 맡고 있는 안 교수는 지구촌은 당분간의 혼란기를 거친 후 휴머니즘과 4차 산업혁명 기술이 결합한 신세계, 즉 문명적 대변혁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염병과 문명의 변혁  ―서유럽에서 수백 년 전에 유행했던 르네상스 운동을 담론처럼 들고나왔다.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은 흑사병으로 불리는 페스트가 창궐한 게 결정적 원인이 됐다. 흑사병으로 인해 14세기 중반 당시 유럽 총인구의 30%가 목숨을 잃었고 유럽의 전통 사회 구조가 붕괴됐다. 페스트 대응에 무력했던 교회는 그동안 누려온 절대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고, 봉건영주 체제의 경제가 도시자본제로 바뀌고, 창의와 인간성이 중시되는 문화가 이때 형성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역시 기존의 사회 시스템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21세기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미미한 바이러스 하나가 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세계 경제마저 일제히 멈추게 하는 현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는 그간 절대 권력처럼 믿어왔던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대한 회의(懷疑)를 가져왔다. 또한 우리는 반강제적으로 사회적 격리를 겪으면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됐다. ‘멈출 줄 모르는 발전’을 목표로 삼은 속도 우선주의와 물질주의적 가치관에서 한 발짝 물러나 조금 느리더라도 인간의 삶의 목적과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19가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여왕의 덫’(경쟁을 통한 끝없는 변화와 낙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 셈이다.” ―코로나19라는 돌발성 악재에 대해 과도하게 사회적 변화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나. “변화의 씨앗은 진작 뿌려져 있었다. 코로나19의 주요 현상인 언택트 문화는 40년 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에서 재택근무와 전자정보화 가정의 등장으로 이미 예고됐다.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온라인 화상 회의 및 온라인 쇼핑, 비접촉 배달앱 등이 빠르게 성장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 사태로 언택트 문화가 전면적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 위력은 수천 년간 이어져온 대면 접촉 방식의 종교집회마저 화상 설교로 바꾸어 버릴 만큼 강력했다.” 국제미래학회가 2015년 발간한 ‘대한민국 미래보고서’는 창의와 인성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의 등장을 이미 예측한 바 있다. 인류의 문명사는 과학기술 위주의 발전을 넘어 영성(靈性)적 휴머니즘이 부각되는 방향으로 어느 순간 급속한 변혁이 찾아온다는 내용이다. 다만 그 급격한 변화를 이끌 방아쇠가 코로나바이러스일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휴먼기술문명 시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과거의 성곽시대(walled city)가 다시 도래할 수 있다”며 생산공장 등 글로벌 공급망이 본국으로 귀향하는 등 자유의 시대가 저물 것이라고 경고했다. 애덤 포즌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장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취약해진 세계 경제에 ‘경제 민족주의’라는 또 다른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코로나19가 안정화될 때까지 우리는 당분간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국내 경기 침체와 글로벌 경제 불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세계무역기구(WTO)로 상징되는 글로벌 3.0, 즉 무역의 세계화는 약화되는 반면 4차 산업혁명과 휴머니즘의 강화로 새로운 산업과 비즈니스 마당이 펼쳐질 것이다. 한국은 이런 위기와 기회의 상황을 동시에 맞이하고 있다. 최근 방탄소년단(BTS)이 유료 비대면 화상 공연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것에서 보듯 새로운 글로벌 4.0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의 미래는 어떨까. “미래 사회는 초지능, 초연결, 초실감이 구현되는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정신 및 감성 영역의 휴머니즘이 강화되는 뉴 르네상스 시대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는 비대면 참여로 현존감을 강화하는 언택트 프레즌스(Untact Presence), 모든 비즈니스의 블랙홀인 스마트 플랫폼(Smart Platform), 첨단 기술과 감성으로 개인 맞춤하는 인공지능 퍼스널(AI Personal)이 모든 영역에 적용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거나 머뭇거리면 구한말 대한제국처럼 우리는 또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안 교수는 코로나19에 등이 떠밀려 갑자기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선 우리 사회는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동서고금에 걸쳐 시대적 변화를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이들은 기존 사회 질서에서 이익을 누리는 세력이기 마련이다. 특히 학연 지연 혈연 등 대면 및 접촉 문화로 정치 경제적 이익을 향유하던 계층은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거부감을 보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역행했다가는 도태된다는 게 미래학자들의 경고다. 빅브러더 정부 경계해야 ―한국이 휴머니즘과 4차 산업혁명이 결합한 신문명 질서에 경쟁력이 있나. “뉴 르네상스 미래 사회는 인공지능과 정보통신기술(ICT)을 중심으로 한 4차 산업혁명 기술과 인간의 창의성 및 인성의 결합이 핵심 국가 경쟁력이 될 것이다. 한국은 코로나19 대응에서 인공지능과 ICT로 확진자들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온라인 교육과 재택근무를 무리 없이 실천하는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IT) 인프라 활용 역량을 보여주었다. 또한 드라이브스루 같은 창의성을 발휘해 효과적인 방역을 펼쳤고, 사재기 없는 사회적 거리 두기 등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신뢰성도 보여주었다. 한국은 전통 유교주의에 기반한 휴머니즘에서 놀라운 강점을 갖고 있다. 서양의 테크놀로지와 동양의 휴머니즘이 결합한 ‘휴먼 테크놀로지’의 세상에서 한국은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안 교수의 미래 예측은 그동안 동서양의 ‘예언자’들이 예측한 미래와도 일맥상통한다. 미국 다큐멘터리 ‘월스트리트의 예언자’로 유명한 경제 전문가 마틴 암스트롱은 빅데이터와 슈퍼컴퓨터를 이용한 세계 경제 예측 주기를 발표하면서 동양의 부흥을 예언했다. 세계는 2030년대부터 본격적인 4차 산업혁명이 펼쳐지게 되며, 2040년대 들어서는 미국과 유럽을 제치고 한국과 중국 등 차이나권에서 이를 주도하게 된다는 것.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닥칠 변화는…. “코로나19 방역에서 보듯 정부는 민간 통제력을 강화시키려 하고 의회의 영향력은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국민들은 ‘빅브러더’가 되려고 하는 정부의 월권을 감시하고 자유와 인권을 함께 지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스마트 플랫폼에 기반한 스마트 거버넌스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경제에서는 스마트 뉴딜 경제 시스템으로 체제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 즉, 스마트 플랫폼과 인공지능에 기반한 스마트 교육, 스마트 워크, 스마트 헬스케어, 스마트 팩토리, 스마트 시티, 스마트 팜 산업 등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안 교수는 인구 감소 문제가 한국의 미래 성장을 괴롭힐 것이라고 우려했다. 코로나19 이후 결혼 연기와 출산 기피 등으로 인해 인구 감소가 더욱 가속화돼 결국 국가 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코로나19 이후 결혼 및 출산 장려금 대폭 확대 등 과감한 저출산 대응 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안종배 교수::1985년 서울대를 졸업한 뒤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및 경기대 대학원을 거쳐 미국 미시간주립대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했다. 현재 국제미래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미래창의캠퍼스 이사장, 클린콘텐츠국민운동본부 회장,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혁신위원, 국회미래정책연구회 운영위원장 등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미래학 원론’ ‘제4차 산업혁명 마스터플랜’ ‘퓨처 어젠다’ 등이 있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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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들 숭고한 희생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민족 전체가 한목소리로 외친 3·1만세운동. 이 역사적 함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일까. “100년 전의 3·1운동은 한민족의 강한 정체성, 나아가 민주주의 의식을 국내외에 과시한 ‘한국적 굴기(굴起)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은 종교 신분 성별 지역 등을 초월해 모든 한국인이 한마음으로 뭉쳐 일으킨 민족운동으로, 세계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장) “3·1운동은 우리 역사의 화수분이다. 기억하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어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3·1운동은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났다. 그들에게 독립만세시위는 구체적인 생활의 연장이었다.”(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동아일보는 2018년 3월 1일부터 이달 22일까지 93화에 걸쳐 보도한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시리즈를 게재했다. 국내외 현장을 일일이 방문해 문서 등 자료들을 찾아보고, 지역 사학자와 현지 주민들의 증언 등을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3·1운동이 한국인의 생활과 가치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독자들도 “100년 전 상황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놀라웠다”(충남 천안의 한 시민) “내가 생활하는 동네에 역사의 현장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수도권의 한 시민)는 뜨거운 반응을 보내왔다. ○ 지금도 살아 숨쉬는 3·1운동의 역사 93화에 걸친 3·1운동 보도 가운데엔 그동안 학계와 국내 언론에서 미처 주목하지 못한 사실이 적잖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 상하이의 비밀 독립운동 결사체인 ‘동제사’(1∼3화)였다.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동제사는 신한청년당과 함께 큰 역할을 했고, 동제사 수장 신규식과 파리강화회의 특사 김규식이 프랑스어로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사실은 국내 언론에서는 최초 보도였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 ‘2·8독립선언’(1화)이 거행된 장소를 찾아내고, 한국 무력독립투쟁의 원천지로 일컬어지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27화)가 현지 거주 한인들로부터 모은 자금으로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해 낸 사실도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일부 보도는 지역 전문가와 지역 주민들의 제보를 통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기 용인 만세운동(22화)이다. 이는 용인시의 지역 소모임 주민들이 향토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용인 지역 독립운동가 16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정부의 공식 독립유공자 기록에는 누락돼 있던 것이었다. 3·1운동에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 측이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곡성·담양 만세운동(83화)도 제보를 통해 발굴할 수 있었다. 그동안 국내 언론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졌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도 비중 있게 담았다. 경기 수원 기생 만세운동(16화)을 시작으로 개성(당시) 출신의 여성 4인방이 주도한 개성 만세운동(17화), 대구 신명여학교 만세운동(29화) 등 모두 15차례에 걸쳐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이는 전체 93화 가운데 16%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 100년 전 역사를 되짚은 3년의 대장정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국가 의식을 한 차원 높인 역사적 사건”이라며 “3·1운동 이전 개인과 가정에 머무르던 생활 단위가 3·1운동 이후 민족과 국가로 확대됐으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국가 의식은 한국의 근대사를 이루는 주축이 됐다”고 말했다. 100년 전 역사적 사건을 찾아 떠나는 본보 시리즈의 대장정은 3·1운동 100주년을 1년 앞둔 2018년 3월부터 시작됐다. 1부(1∼14화)는 3·1운동의 배경과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주 1회 또는 격주로 보도됐다. 2부(15∼93화)에서는 교과서 등에서 담지 못한 3·1운동의 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특히 그동안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지역 독립운동에 초점이 맞춰졌다. 매년 3월 1일이 되면 지역마다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지만 1919년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아는 이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서다. 100년 전 일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현장 취재에 앞서 국립중앙도서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독립운동 관련 데이터베이스와 옛 서적들에 대한 방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북한을 제외하곤 취재지역은 무조건 현장 답사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일주일 이상의 사전 취재와 1박 2일의 현장 취재가 병행돼야 하는 곳도 적잖았다. 해외의 경우에는 2, 3개월에 걸친 자료 조사와 사전섭외 작업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방자치단체와 3·1운동 관련 단체들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서울 경기 인천 19곳 △전라 광주 제주 11곳 △충청 9곳 △강원 4곳 △경상 부산 대구 울산 20곳 등이 소개됐다. 2019년 2월에는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은 일본 도쿄와 오사카 상황을, 올해 1월부터는 미국 러시아 중국 유럽 등 해외 독립운동 상황 등이 증언과 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재구성돼 소개됐다.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만큼 북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역 6곳도 다뤄졌다.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3·1운동 현장은 지역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경우가 많았다.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산상 봉화 시위가, 바다 혹은 강이 인접한 지역에서는 선상 시위가 함께 전개됐다. 이 외에 도심과 야산을 오가는 게릴라식 시위, 군대식 체제를 갖춰 이웃 지역과 연대한 시위 등 다양한 시위가 이어졌다. 한시준 단국대 명예교수는 “동아일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년여 동안 3·1운동의 현장을 답사하고, 연구 성과 검토와 후손들을 인터뷰하는 대장정을 벌였다”며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 뜨거운 반응에 웃고, 서글픈 현실에 눈물짓고 경기 파주시에 사는 한 60대 독자는 ‘파주 3·1운동(37화)’의 기사를 본 후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와 “고향에서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우리 지역에 이런 3·1운동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경기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28화)편은 인터넷 조회수가 100만 회를 넘었다. 취재진은 대부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처한 현실을 보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경남 창녕의 만세운동(61화)을 주도했던 김추은 지사의 손자 상현 씨는 “평생 독립운동을 한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빚뿐이었다”고 말했다. 수원 만세운동(15화)을 주도한 김노적 지사의 아들 지형 씨가 “아버지가 만세운동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난 후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건너간 사이 가족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이웃집에 동냥을 다니며 어린 4남매를 키우셨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 막내 여동생을 보육원에 맡겨야 했다”고 회고했다. 수감 기록이나 사진과 같은 증빙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례도 적잖았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성동기·김지영 기자}

    • 2020-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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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발로 뛰고, 찾아낸 3·1 운동의 흔적들

    “(우리 동네에) 이런 역사의 현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저희가 생활하는 곳과 멀지도 않은 곳이었습니다. 3·1독립운동의 현장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수도권 거주 블로거) 동아일보가 2018년 3월 1일부터 이달 22일까지 93회에 걸쳐 보도한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터넷 조회수가 100만 회를 넘어선 기사도 있었다. 그중 가장 빈도수가 높았던 반응은 “내가 사는 작은 마을이 독립을 위한 뜨거운 열망과 숭고한 희생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고맙다(아이디 2003****)”라는 것이었다. 취재기자들이 국내외 현장을 일일이 방문해 문서 등 자료들을 찾아보고, 지역 사학자와 현지 주민의 증언 등을 취재함으로써 “100년 전 상황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놀라웠다(충남 천안시 거주 독자 A 씨)”거나 “국사 시간 때 이런 거 못 배웠다. 이제라도 알게 돼 고맙다(meta****)”는 반응도 적잖았다. 일부 지역에선 자신들이 파악한 지역 만세운동 자료를 제공하며 취재를 요청해와 보도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에 대한 특종 보도도 이어졌고, 그동안 국내 언론에 주목받지 못했던 해외지역 만세운동에 대한 입체적인 조명이 이뤄지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시준 단국대 명예교수는 “3년에 걸쳐 이뤄진 이번 보도는 3·1운동 이후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성과도 훌륭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 자료에 파묻혀 지낸 3년의 대장정 취재팀은 3·1운동 100주년을 1년 앞둔 2018년 3월부터 기획 시리즈를 시작했다. 1부(14회)는 3·1운동의 배경과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주 1회 또는 격주로 보도했다. 2부(15~93회)는 교과서 등에서 담지 못한 3·1운동의 보다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기로 했다. 특히 그동안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지역 독립운동을 주목하기로 했다. 매년 3월 1일이 되면 지역마다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지만 1919년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취재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00년 전 일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현장 취재에 앞서 국립중앙도서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독립운동 관련 데이터베이스와 옛 서적들을 조사했다. 북한을 제외하곤 취재지역은 무조건 현장 답사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경우에 따라 일주일 이상의 사전 취재와 1박 2일의 현장 취재가 병행돼야 하는 곳도 있었다. 해외의 경우에는 2, 3개월에 걸친 자료 조사와 사전섭외 작업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방자치단체와 3·1운동 관련 단체들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서울 경기 인천 19곳 △전라 광주 제주 11곳 △충청 9곳 △강원 4곳 △경상 부산 대구 울산 20곳 등을 소개했다. 2019년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현장 취재해 보도했고 올해 1월부터는 미국 러시아 중국 유럽 등 해외 독립운동 이야기를 7회에 걸쳐 생생하게 소개했다.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만큼 북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역 6곳도 다뤘다. 취재팀은 현장을 돌아다니며 3·1운동이 한국인의 생활과 가치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전문가들도 이에 동의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장은 “3·1운동은 한민족의 강한 정체성, 나아가 민주주의 의식을 세계에 과시한 ‘한국적 굴기(¤起)’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100)는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국가 의식을 한 차원 높인 역사적 사건”이라며 “3·1운동 이전 개인과 가정에 머무르던 생활 단위가 3·1운동 이후 민족과 국가로 확대됐으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국가 의식은 한국의 근대사를 이루는 주축이 됐다”고 강조했다.● 발로 뛰고, 제보로 찾아낸 특종들 취재팀은 그동안 학계와 국내 언론에서 미처 주목하지 못한 사실 발굴에 공을 들였다. 그 결과 다양한 특종을 쏟아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 상하이의 비밀 독립운동 결사체인 ‘동제사’(1~3화)였다. 취재를 통해 3·1운동 준비 과정에 동제사와 그 하위 조직인 신한청년당이 큰 역할을 했고, 동제사 수장 신규식과 파리강화회의 특사 김규식이 프랑스어로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 보도했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 ‘2·8독립선언’(1화)이 거행된 장소를 찾아내고, 한국 무력독립투쟁의 원천지로 일컬어지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27화)가 현지 거주 한인들로부터 모은 자금으로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해낸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일부 특종 보도는 지역 전문가와 지역 주민들의 제보를 통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기 용인 만세운동(22화)이다. 이는 용인시의 지역 소모임 주민들이 향토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용인지역 독립운동가 16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정부의 공식 독립유공자 기록에는 누락돼 있던 얘기였다. 3·1운동에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 측이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곡성·담양 만세운동(83화)도 제보를 통해 특종으로 보도할 수 있었다. 취재팀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졌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 발굴에도 공을 들였다. 유관순 열사만 기억하기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경기 수원 기생 만세운동(16회)을 시작으로 개성(당시) 출신의 여성 4인방이 주도한 개성 만세운동(17화), 대구 신명여학교 만세운동(29화) 등 모두 15차례에 걸쳐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는 전체 93회 가운데 16%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보도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앞으로도 여성들이 참여한 독립운동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chlw****)”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너무 많다. 학생 때부터 그분들의 삶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unoo****)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뜨거운 반응에 웃고, 서글픈 현실에 눈물짓다 취재팀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3·1운동 현장을 찾아다니며 지역적 특성을 찾아내고 이를 보도 내용에 반영했다.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산상 봉화 시위가, 바다 혹은 강이 인접한 지역에서는 선상 시위가 함께 전개됐다. 이 외에 도심과 야산을 오가는 게릴라식 시위, 군대식 체제를 갖춰 이웃 지역과 연대한 시위 등 다양한 시위가 이어졌다. 이 같은 지역 만세운동 보도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현장을 쫓아다니며 쌓인 취재진의 피로를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경기 파주시에 사는 한 60대 독자는 ‘파주 3·1운동(37화)’의 기사를 본 후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와 “고향에서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우리 지역에 이런 3·1운동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독자(yeon****)는 “3·1운동 하면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대표적인 일화 몇 가지만 기억하곤 하는데,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여러 지역의 만세운동을 알게 돼 기쁘다”며 고마워했다. 보도에 대한 젊은 독자층의 반응도 뜨거웠다. 특히 경기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28화)편은 인터넷 조회수가 100만 회를 넘어서며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우리 아이한테 이런 훌륭한 분들을 가르쳐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ouve****)”거나 “한국사 공부하면서 암기했던 인물들을 기사로 만나서 뭉클하다. 암울했던 역사의 처절하고 치열한 삶의 모습이 그려진다(waIt****)”는 반응들이 이어져 취재진이 묵직한 사명감을 갖게 했다. 연재가 거듭될수록 YMCA 대한간호사협회 등 3·1운동 관련 단체에서 취재팀에 강연을 요청하는 사례도 적잖았다. 취재팀이 현장을 누비면서 접한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취재 과정에서 취재진은 뜨거운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대부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처한 현실을 보고 들을 때였다. 경남 창녕의 만세운동(61화)을 주도했던 김추은 지사의 손자 상현 씨는 “평생 독립운동을 한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빚뿐이었다”고 증언해 취재기자를 숙연하게 했다. 수원 만세운동(15화)을 주도한 김노적 지사의 아들 지형 씨가 “아버지가 만세운동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난 후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건너간 사이 가족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이웃집에 동냥을 다니며 어린 4남매를 키우셨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 막내 여동생을 보육원에 맡겨야 했다”고 당시를 회고할 때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감추기 어려웠다. 수감 기록이나 사진과 같은 증빙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례도 적잖았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com.com·성동기·김지영 기자}

    • 2020-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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