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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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길진균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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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03-27~2024-04-26
칼럼97%
대통령3%
  • [횡설수설/길진균]노회찬의 비극

    “삼겹살도 50년 동안 같은 불판에 구워 먹으면 고기가 새까맣게 타 버린다. 이제는 판을 갈아야 한다.” 정치판의 기득권을 깨야 한다는 메시지를 불판 교체에 빗댔다. 2004년 17대 총선 정국,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의 이 말은 최고 히트작이었다. 민노당은 비례대표 득표율 13%라는 돌풍을 일으켰다. 지역구 2석과 비례 8석을 확보했다. 당선 예상권 밖인 비례대표 8번 후보였던 노 사무총장도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그는 여의도에서 진보정치의 대중화를 이끄는 기수가 됐다. ▷학창 시절 그는 첼리스트를 꿈꿨다. 경기고 시절,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 앞에서 종종 첼로를 연주했다. 유신 시절 ‘박정희 타도’ 유인물을 제작하고 시위를 벌이던 그는 경찰의 감시를 받는 고등학생이 됐다. 고려대 진학 후엔 용접 자격증을 따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 의원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살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는 민노당 내에서 줄곧 당내 친북주의 청산을 주장해 주사파 계열과 결별했다. ▷노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루킹 진영으로부터 받은 금품이 원인이 됐다. 그는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며 “죄송하다”고 유서에 적었다. 지지자들에게 줄 충격과 당이 입을 피해 등에 대한 압박과 절망감을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 등 여의도의 특권·기득권 폐지를 주창해온 그의 죽음은 깨끗한 정치를 열망해온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노 의원의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에 대한 특검 수사는 어제 그의 사망으로 ‘공소권 없음’으로 종료됐다. 노 의원 사건은 특검 수사의 본류도 아니었다. 훨씬 크고 무거운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으면서도 태연하게 버티는 여의도 정치인이 수두룩한데,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는지 안타깝다. 노 의원 사건은 비극적이지만 그렇다고 드루킹 수사가 흔들려서도 안 될 것이다. 그의 죽음이 비리와 부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정치권 풍토에 경종을 울린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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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한국당의 名醫 찾기

    중국에서 신의(神醫)로 전해지는 화타(華陀)는 팔에 독화살을 맞은 관우를 살펴보고 “독이 뼈까지 침투했으니 오염된 살을 도려내고 독이 침투해 있는 뼈를 긁어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화타가 상처를 째고 뼈를 긁어내는 동안 관우는 바둑을 두며 고통을 견뎌냈다. 수술이 성공리에 끝나 큰 상을 내리려 하자 화타는 “명환자가 있기에 명의가 있는 것”이라며 길을 떠났다. ▷자유한국당이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에게 비대위원장직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애국심과 투철한 직업·윤리의식의 상징인 이 교수가 국민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국당 병’을 과감히 수술해 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이 교수 외에도 한국당 안팎에서 비대위원장감으로 거론된 인사는 40명가량이나 되지만 “예의가 없다”(이회창)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이정미) “소나 키우겠다”(전원책) “그 사람들 말하는 건 자유”(최장집) 등 대부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8일 마감한 비대위원장 ‘인터넷 공모’에는 101명이 자천타천 추천됐다. 한국당은 이들을 포함해 130명을 심사해 금주 후보를 확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당 모습이라면 누가 비대위원장이 된다 해도 국민을 감동시킬 수술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많다. 뼈를 깎는 자기반성 없이 명망가 영입에만 힘을 쏟는 행태가 분칠만으로 위기를 모면하겠다는 안이한 태도로 비치기 때문이다. ▷한국당 의원들도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병’의 뿌리는 여전히 편을 가른 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자신들이라는 것을. 총선 불출마 등 통렬한 반성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도. 내려놓고 반성하고 희생하는 것이 민심을 되찾기 위한 첫 번째 활로다. 나이 들어 두통을 심하게 앓던 위나라의 왕 조조에게 화타는 “머리를 가르고 머릿속의 문제되는 부분을 제거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렸다. 그러나 화타는 미움을 샀고 결국 옥에 갇혀 숨을 거뒀다. 환자에게 뼈와 살을 가르는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그 어떤 명의도 병을 치유할 수 없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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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부엉이로 바뀐 담쟁이

    ‘저것은 벽…’으로 시작하는 시 ‘담쟁이’.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맡고 있는 도종환 시인의 작품이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를 돕기 위해 발족한 경선캠프 이름인 ‘담쟁이 포럼’은 이 시에서 따왔다. 문 대통령은 주요 모임에서 담쟁이의 소박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한 이 시를 곧잘 낭송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주류인 친문(친문재인) 의원들의 ‘부엉이 모임’이 화제다. 2012년 대선 패배 이후에도 ‘담쟁이’란 이름 아래 모이곤 했던 친문 인사들이 2016년 총선 이후 ‘부엉이’로 이름을 바꾸고 이제는 달(moon·문 대통령)을 지키겠다며 은밀히 만나고 있다. ‘부엉이’를 작명한 사람 역시 도 장관이라고 한다. ‘대통령의 친위조직’을 연상케 하는 자기들끼리 모임을 만든 모습은 불과 2년 전 친박(親朴) 원박(原朴) 신박(新朴) 하며 열을 올리다 ‘진박(眞朴) 감별사’까지 등장한 옛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정치는 ‘우상과 팬덤’의 시대가 됐다. 노빠, 문빠, 박빠…. 정치적 팬덤은 자신들의 리더에 대한 과잉 숭배와 경쟁자에 대한 무한 적개심으로 표출되곤 한다. 숭배와 증오는 동전의 양면이다. 가뜩이나 친문 진영의 폐쇄성과 독단에 대한 우려가 정치권에 팽배하다. 부엉이 모임 멤버들은 ‘친목 모임’이라고 항변하지만 특정 계파의 인사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폐쇄적인 모임으로 비칠 뿐이다. ▷6·13지방선거에서 PK(부산경남)를 휩쓴 친문 진영의 기세가 드높다. 다음 총선의 공천권 확보를 위해 당권을 노리고 있다. 성사된다면 말 그대로 ‘친문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담쟁이 캠프는 “아무리 높은 벽이라도 함께 오르자”는 시심(詩心)을 담았다. 소박한 담쟁이가 어느덧 큰 눈을 부릅뜨고 밤에 먹이를 찾는 부엉이로 바뀌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여권 일각에서도 부엉이 명칭을 부정적으로 본다. 친문 전성시대가 도를 넘으면 완장 찬 실세들의 전횡으로 갈 수도 있어 우려스럽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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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탁현민의 ‘사라질 자유’

    2016년 여름.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다.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둔 일종의 출정식이었을 터다. 그때 동행한 사람이 양정철 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과 탁현민 현 대통령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 도중에 합류한 김정숙 여사는 탁 행정관과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했다. 그래선지 두 사람은 대통령 내외와 허물없이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로 꼽힌다. ▷최고경영자 등 리더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을 PI(President Identity)라고 한다. 한국에서 PI가 정부로 확산된 것은 노무현 정부 후반기인 2005년이다. 노 전 대통령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자산으로 삼은 문 대통령과 참모진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문 대통령을 이야기가 있는 대선 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책 ‘운명’의 2012년 북 콘서트 중심에 탁 행정관이 있었다. 2년 차 대통령이 7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이어가는 배경에는 PI도 한몫하고 있다는 평이다. ▷탁 행정관은 대통령 PI팀의 핵심이다. 전문가들은 리더에게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장점을 부각시키는 작업이 PI의 요체라고 말한다. 리더의 성품은 물론 발성과 언어 습관까지 파악해야 가능하다. 대통령과의 거리가 그래서 중요하다. 이명박 박근혜 청와대 역시 PI팀을 가동했지만 성공적이진 못했다. 그러나 탁 행정관은 “처음 성관계한 여중생을 친구들과 공유했다” 등 왜곡된 성 인식을 드러낸 저서 내용이 알려지면서 사퇴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탁 행정관의 청와대 입성과 관련해 “제주에 피신(?)까지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그에게, ‘당선만 시켰다고 끝이 아니다’라며 잡았다”고 했다. 그렇게 매달린 탁 행정관이 지난달 29일 공개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잊혀질 영광’ ‘사라질 자유’를 거론하면서. 하지만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첫눈이 오면 놓아주겠다”며 간곡히 만류했다고 한다. 여성 비하 발언 등으로 일찌감치 문재인 정부의 약점으로 거론된 탁 행정관, 청와대는 아직까지 그를 놓을 준비가 돼 있지 않나 보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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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원자력학과 0명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수력발전 시설에서 남한으로 보내던 전기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거리를 달리던 전차가 멈춰 섰고 얼마 되지 않던 산업시설마저 순식간에 마비됐다. 1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67달러였을 때다. 정부는 이듬해 준공된 목포 중유발전소와 미국이 지원해준 일렉트라호를 비롯한 2대의 발전선으로 전력난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자원이 없는 한국은 원자력발전에 승부를 걸었다. 원자력이 ‘두뇌에서 캐는 에너지’로 불리는 이유다. 1956년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만들고 연구생들을 미국 아르곤연구소에 파견했다. 1958년 한양대, 1959년엔 서울대에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하고 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8년 4월 첫 원전 고리 1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1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인도, 파키스탄에 이어 4번째로 ‘제3의 불’을 점화한 나라가 됐다. 선진국들이 핵실험을 할 때 원자력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한국이 세계 4대 원전 수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데에는 ‘두뇌’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KAIST에서 올해 2학기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전공 희망 학생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1991년 학부 과정 개설 이후 27년 만에 처음이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역시 2017년 후기 대학원생 모집 때 정원 5명의 박사과정에 1명, 37명의 석·박사 통합과정 모집에 11명이 지원해 미달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돌입한 세계는 원자력을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인정하는 추세인데도 유독 한국에선 미래가 없는 학문으로 전락하고 있다. 과학기술계는 50년 동안 쌓아온 기술과 연구력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에 떨고 있다. ▷원유가 많은 것도, 중국처럼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닌 한국에선 인적·지적 자원이 가장 큰 경쟁력이 될 수밖에 없다. 원자력은 종합과학이다. 원전 종사자 중 관련 전공은 10% 정도지만 기계 화학 재료 물리 제어 컴퓨터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공학도들이 필요하다. 정부의 탈원전 드라이브가 어렵게 쌓아 올린 귀중한 자원을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져선 안 된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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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세계 최고 ‘연결사회’

    ‘초연결사회(Hyper Connected Society)’가 화두다. 사람 사물 공간 등 세상 만물이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고, 모든 것들로부터 생성되고 수집된 각종 정보가 공유 및 활용되는 사회시스템을 뜻한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디지털기술의 발전은 사람-사물-데이터를 연결하는 ‘연결의 영역 초월’을 조금씩 현실화시키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연결된 사회’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의 퓨리서치센터가 37개국 4만448명을 조사한 결과 스마트폰을 보유한 성인 비율에서 한국은 94%로 2위 이스라엘(83%)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주기적으로 인터넷을 쓰거나 스마트폰을 소유한 성인 비율을 의미하는 인터넷 침투율에서도 96%, 단연 세계 최고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률은 미국, 호주와 공동 3위였다. 이를 두고 퓨리서치센터는 “한국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most heavily connected society)”라고 분석했다. ▷기계화에 따른 1차 산업혁명, 전기 에너지에 의한 2차 산업혁명, 컴퓨터·인터넷에 기반한 3차 산업혁명에 이어 세계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연결’이다. 한국에선 지하철 카페 공공장소 등 어디서든지 무료 와이파이 등을 통해 인터넷에 손쉽게 연결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지하철,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몸이 쏠리는 가운데서도 묘기하듯 손에 쥔 스마트폰을 응시한다. 한국이 4차 산업혁명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 간다고 할 순 없지만 스마트폰을 통한 ‘연결’로만 보자면 최첨단이다. ▷연결사회로의 진입은 새로운 문화와 가치를 만든다. 공유되는 지식과 정보의 양이나 속도가 엄청나게 증가한다. 누구와도 거리와 시간에 관계없이 24시간 연결돼 있을 수 있다. 수천 km 밖에 있는 친구나 동료와 근황과 고민을 나누고 협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동서양의 옛말은 말 그대로 옛말이 됐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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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위원 동영상 칼럼] 6·13 PK목장의 결투…정초선거를 아시나요?

    6·13 지방선거가 8일 앞으로 다가왔다.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후보의 낙승이 예상됐던 경남지사 선거에서 자유한국당 김태호 후보가 무섭게 추격의 고삐를 죄고 있다. 각 당이 내부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김경수 후보와 김태호 후보 간 격차가 크게 좁혀진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초반 10%p, 많게는 20%p 이상 격차가 벌어졌던 각 언론사 여론조사와 사뭇 다른 결과다. 김태호 후보가 도지사 경력 등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바닥민심을 흔들고 있어서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경남지사 선거에 말 그대로 사활을 걸고 있다. 양당에게 경남지사 선거는 17개 광역단체장 가운데 한 자리가 아니다. 훨씬 큰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민주당과 한국당이 경남지사를 두고 치열한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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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화제의 저커버그 청문회

    “페이스북을 무료로 서비스하면서 어떻게 돈을 벌죠?” 10일 미 의회 증인석에 앉은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예 의원님, 광고로 돈을 법니다”고 답했다. 이용자 8700만 명의 개인정보 유출 파문으로 인해 미 의회에서 이틀 동안 열린 청문회에서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이나 비즈니스모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 상원의원의 돌출 질문이었다. ▷44명의 상원의원이 참석한 첫날 청문회를 두고 CNN은 ‘디지털 문맹’에 가까운 의원들이 저커버그를 살렸다고 지적했다. 청문회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11일 하원 청문회는 사뭇 달랐다. 100명에 가까운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고, 저커버그의 답변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저커버그는 자주 물을 마시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는 “전적으로 내 책임” “큰 실수”라고 거듭 사과하며 진땀을 흘렸다. 미 언론은 “그에게 두 번째 라운드는 좀 더 어려웠다”고 평가했다. ▷정보기술(IT) 업계의 고정관념과 관습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는 티셔츠와 청바지를 늘 입던 저커버그는 이틀 동안 양복과 넥타이를 갖춰 입었다. 뉴욕타임스는 저커버그의 정장을 ‘아임 소리 슈트(I‘m Sorry Suit·반성 정장)’라고 표현했다. 사회의 규범을 존중하는 기업인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선택이다. 저커버그가 10cm가 넘는 높이의 검은색 쿠션을 깔고 앉은 모습도 화제였다. 의회에서 기죽지 않으려는 저커버그의 힘겨운 노력을 보여준 장면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미 상원(100명) 의원들의 평균 연령은 61세, 하원(435명)은 57세다. 34세의 저커버그는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호통과 질책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대다수 의원들은 차분히 그의 말을 들었다. 증인을 향한 고함과 윽박지르기, 망신 주기 등으로 파행하기 일쑤인 우리 국회 청문회와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 청문회의 영어 표현은 ‘hearing(듣기)’이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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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10년이 지난 뒤

    우리나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이 2년 연속 세계 2위를 기록했다. 미국육류수출협회가 9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은 총 12억2000만 달러(약 1조3047억 원)로 일본의 18억9000만 달러 다음이었다. 인구 기준으로 한국은 1인당 3.5kg으로 일본(2.4kg)보다 많았다. ▷시장점유율에서도 미국산은 지난해 호주산을 제치고 14년 만에 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2001년 쇠고기 수입 자유화 이후 1위를 달렸으나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된 이후 수입이 전면 금지됐다가 2008년에 조건부로 수입이 재개됐다. 당시 시장점유율이 6.4%에 불과했다. ▷2008년 온 사회가 광우병 괴담에 휩싸였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MBC PD수첩을 계기로 그해 5월부터 100일 넘는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한국인은 광우병에 잘 걸리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청산가리 먹는 것이 낫겠다’ ‘미국인들도 미국산 쇠고기는 먹지 않는다’ 등 괴담이 쏟아졌다. 대법원은 PD수첩의 핵심 내용들을 과장·왜곡보도로 판결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인간광우병에 걸린 사례는 그 후 전 세계에서 보고된 게 없다. ▷광우병 괴담을 주도한 단체, 정치인들 가운데 지금까지 진심 어린 사죄를 한 이는 없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광우병국민대책회의 핵심 간부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량 1위를 차지한 데 대해 “2008년 촛불집회를 통해 검역 체계가 강화돼 걱정을 덜면서 미국산 쇠고기를 찾는 분들이 늘어나게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간부는 “인간광우병은 사후에 뇌를 열어야 확인된다. 위험이 과장됐다고 볼 수만은 없다”고 했다.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 참 황당하고 기가 막힌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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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실리콘밸리의 수난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그리고 마크 저커버그. 2016년 미국 벤처캐피털회사 퍼스트라운드캐피털이 미국의 창업가 700명을 조사해 선정한 ‘가장 존경하는 정보기술(IT)업계 리더’ 1∼3위다. 이들이 이끄는 테슬라와 아마존, 페이스북의 주가는 최근 10년 가까이 끝이 없는 듯 상승세를 탔다. 승승장구했던 이들 실리콘밸리 대표 기업들이 최근 미증유의 고난을 겪고 있다.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 등 소위 ‘FAANG(팡)’으로 불리는 미국 IT 대표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최근 3주 동안 3970억 달러(약 420조 원) 증발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2일 보도했다. 페이스북은 ‘정보 유출 파문’의 직격타를 맞았고, 테슬라는 ‘자율주행차 사고’ 악재에 휩싸였다. 아마존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세금 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주가가 하락세다. ▷미 대선이 치러졌던 2016년 실리콘밸리의 가장 큰 이슈는 기술 진보가 아닌 트럼프 당선이었다. 당시 리버럴 엘리트는 ‘클린턴 올인’이었다. 구글 페이스북 등 미국 IT 대표기업들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60배나 많은 선거후원금을 몰아줬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IT 및 미디어산업을, 공화당이 집권하면 에너지 및 유통 산업을 수혜주로 선정하는 것이 월가의 전통이다. ▷포퓰리즘이 반(反)엘리트의 물결과 트럼프의 당선을 몰고 왔듯, 민주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쟁을 위협해온 FAANG이 유럽연합(EU)에 이어 미국에서도 칼날을 맞을 조짐이다. EU는 IT 기업의 정보사용 권한을 제한한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을 5월부터 시행한다. 1933년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셔먼 독점금지법’으로 독점기업을 해체시킨 것처럼 2018년은 실리콘밸리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10년 이상 세계 경제를 이끈 미국의 첨단 IT 기업들이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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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우주 쓰레기

    2013년 개봉한 영화 ‘그래비티(Gravity·중력)’는 인공위성 잔해와 우주왕복선이 부딪치면서 우주공간으로 내던져진 승무원들이 겪는 재난을 그렸다. 우주 쓰레기는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 주변을 돌고 있다. 수명이 다한 인공위성, 버려진 로켓 등과 그 잔해물이다. 지름 10cm가 넘는 것만 2만9000여 개, 1cm 미만은 1억6600만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우주 쓰레기가 지구로 떨어질 때 추락지점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주에서 떨어지는 물체의 움직임은 중력뿐 아니라 대기의 저항력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대기밀도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이를 실시간으로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높은 건물 옥상에서 종이뭉치를 던졌을 때 떨어지는 장소가 제각각인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 국적의 우주 쓰레기, 톈궁 1호가 2일 오전 9시 16분(한국 시간) 남태평양 칠레 앞바다에 추락했다. 당초 남대서양에 추락할 것으로 추정됐었다. 길이 10.5m, 무게 8500kg의 톈궁 1호는 대기권에서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1957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 이후 최근까지 7900여 개의 인공위성이 발사됐고, 지구로 떨어진 파편은 약 5400t에 달한다. 대기권으로 재진입할 때 생기는 마찰열을 이겨낸 스테인리스나 티타늄 등이 지표면에 닿았지만 다행스럽게 인명피해는 없었다. ▷지구처럼 우주도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주파편은 빠른 속도로 인해 지름이 10cm만 돼도 인공위성을 파괴할 수 있다. 낡은 인공위성 등이 충돌해 더 많은 파편이 생기고, 파편들 사이에 연쇄 충돌이 이어지는 것을 ‘케슬러 증후군(Kessler Syndrome)’이라고 한다. 그 경우 지구 밖으로 아무것도 쏘아 올릴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영화 그래비티와 같은 참사가 아직까지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주 쓰레기를 이대로 방치하면 곧 다가올 현실이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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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대학생 월세난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로 시작하는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는 시인이 25세 때 일본 릿쿄대 유학 중 썼다. 일제강점기 무기력한 삶에 대한 식민지 대학생의 고뇌와 극복 의지가 드러난 시다. 육첩방(六疊房)은 다다미가 여섯 장 깔린,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9.9m²(3평)도 안 되는 작은 방이다. 지금도 많은 대학생들이 육첩 크기의 월세방에서 고달픈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새 학기마다 대학가는 방 구하기 대란이다. 서울 주요 대학 주변 원룸은 보증금 1000만 원에 50만 원 안팎의 월세로도 구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지난해 서울시 통계를 보면 서울 소재 대학 재학생 가운데 지방 출신이 10명 중 3명꼴이다. 그러나 대학이나 지방자치단체 등이 세운 기숙사에서 합리적 가격에 마음 편히 지내는 지방 출신 대학생은 10.9%에 불과했다. ▷기숙사를 더 짓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교육부의 지난해 자료에 따르면 전국 186개 대학의 기숙사 수용률은 21%에 그쳤다. 특히 수도권 70개교(재학생 66만9280명)의 수용률은 16%(10만8023명)에 불과했다. 대학이 기숙사를 새로 지으려 해도 주민의 반발을 의식한 주무 관청의 ‘승인 보류’와 맞닥뜨리기 일쑤다. 한양대는 2015년 2000명 규모의 기숙사 신축 계획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주민들의 반대에 가로막혀 있다. 임대 수입 감소와 그로 인한 부동산 가격 하락 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고려대와 총신대, 홍익대 등 서울 시내에서만 6곳에서 기숙사 신축이 난항을 겪고 있다. ▷저소득층 사이에서 회자되던 ‘월세난민’이라는 신조어가 어느새 대학가까지 퍼졌다. 부모가 여유가 있거나 서울에 집이 있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의 삶의 질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당장 주거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리다 보면 학업에 충실할 수 없고, 졸업과 사회 진출에도 영향을 끼친다. 멀어져 가는 듯한 현실 극복의 희망 속에서 “살수록 적자”라고 체념하는 청춘들의 한숨 소리를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나.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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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전미총기협회(NRA)

    미국이 또다시 총기의 공포에 휩싸였다. 14일 미국 플로리다주 파클랜드의 한 고교에서 한 퇴학생이 반자동 소총을 난사해 17명이 숨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플로리다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선정됐던 파클랜드에서 벌어진 참사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총기규제법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전미총기협회(NRA)의 강력한 반대 로비와 미 헌법상의 총기소유권 등에 가로막혀 총기 규제는 늘 흐지부지돼 왔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 장교들을 주축으로 1871년 결성된 NRA는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를 포함한 약 500만 명의 회원과 막강한 자금력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개인 총기 소유의 정당성을 대변해 ‘포천’지가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익단체 1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미국 대통령 28명 중 9명이 회원이다. NRA는 2016년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후보 지지에 1140만 달러, 힐러러 클린턴 민주당 후보 반대에 1970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미국이 총기 규제에 강하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헌법과 건국 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91년 발효된 수정헌법 2조엔 국민의 ‘무장할 권리’가 명문화돼 있다. 지금도 많은 미국인은 총기 소유가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며 ‘나와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내가 소유한 총’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 이는 의회나 정부 차원에서 개인의 총기 소유를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2008년 연방대법원 판례에서도 재확인됐다. ▷영국 등 약 35개국이 개인의 총기 소유를 허용한다. 그러나 미국만큼 총기 사고가 잦은 나라는 드물다. 2015년 이후 미국에선 한 해 4만 명 이상이 총에 맞아 숨지거나 다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총격범의 ‘정신이상’을 부각할 뿐, 허술한 총기 규제 시스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총기 소유가 허용된 것은 자기방어의 권리를 폭넓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유도 없이 날아드는 총탄에 맞아 죽어야 하는 아이들과 시민의 권리는 어떻게 보호하나.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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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제주 게스트하우스

    ‘놀멍 쉬멍 꼬닥꼬닥’(놀면서 쉬면서 천천히) 걷는 제주가 손짓한다. 속도에 지친 도시인들은 바다의 속삭임 속에 일상의 지친 마음을 달랜다. 오름과 바다, 원시자연, 이름도 생경한 소박한 마을들, 물질하는 해녀들은 섬나라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제주에선 나 홀로 터벅터벅 걷는 혼행족(혼자 여행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혼행족 열풍은 호텔과 펜션이 전부였던 제주에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를 탄생시켰고, 새로운 여행문화를 창출했다. ▷1인 가구 500만 시대. ‘욜로 라이프’(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자) 인식이 퍼지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등산 스킨스쿠버 등 다양한 레포츠, 힐링 체험이 가능한 제주는 혼행족의 성지로 떠올랐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밤마다 열리는 맥주 파티는 제주를 찾은 젊은이들에게 예상치 못한 추억을 선사한다. 제주특별자치도 등에 따르면 지난해 제주도를 찾은 국내 여행객 1130만여 명 가운데 76.6%는 혼자 또는 소수로 제주를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에 홀로 여행을 갔던 20대 여성이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이번 사건은 2012년 7월 제주 올레1코스에서 40대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전국적인 관심 사건이 됐다. 살해 용의자로 지목됐다가 충남 천안의 모텔에서 자살한 한정민 씨(32)는 지난해 다른 여성 투숙객을 성폭행한 혐의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중이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제주의 게스트하우스 등 민박업소는 3497개에 달한다. 2013년 1449개보다 2.4배나 늘었다. ‘제주살이’ 꿈을 안고 바다를 건넌 이주민 증가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게스트하우스는 현행 법령에서 별도의 업종으로 지정되지 않아 정확한 현황 파악이나 관리가 어렵다. 유형에 따라 농어촌민박, 휴양펜션, 관광숙박업 등 제각각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관리인이나 직원들에 대한 정보를 주무 관청도 알 수 없다고 한다. 혼행족을 노린 끔찍한 범행은 제주의 이미지에도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제주 여행의 꿈을 깨뜨리지 않을 대비책이 필요하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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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드론 오륜기

    반딧불이 같았던 드론은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돼 밤하늘을 날았다. 스키장 상공에선 스노보드를 탄 사람의 형상이 됐다. 다시 뿔뿔이 흩어진 드론은 오륜기로 변했다. 드론 불빛쇼는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의 명장면으로 꼽혔다. 해외에서도 “컴퓨터그래픽(CG) 아니냐”는 등 놀라움과 찬사가 쏟아졌다. 1218대로 구성된 드론쇼는 기네스북에 신기록으로 등재된다. ▷수많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편대비행의 조종사는 한 명이었다. ‘조종사’로 불리는 요원은 사전에 설계된 비행을 시작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세 명의 모니터 요원은 각 드론의 상태를 관찰했다. 드론쇼에는 미국의 정보기술(IT) 기업 인텔이 만든 ‘슈팅스타’ 기종이 사용됐다. 인텔 제논 프로세서가 장착된 컴퓨터 한 대가 실시간으로 각 드론과 통신하며 1218대의 움직임을 제어했다. ▷라이브 공연은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평창에서 녹화한 영상을 생중계 영상에 덧씌웠다. 날씨가 큰 이유였다. 드론은 정해진 경로를 날면서 장착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카메라 등으로 주변 드론의 위치를 확인한다. 바람에 밀려 드론이 흔들리면 주변 드론도 함께 움직이면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 한겨울 평창의 강풍과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인텔은 지난해 슈팅스타의 회전 날개를 교체하고, 핀란드에서 비행 테스트까지 거쳤다. 하지만 낮은 온도에서 성능이 떨어지는 드론의 리튬이온 배터리의 약점과 혹시 모를 돌발변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1위 드론 생산 기업은 중국의 DJI테크놀로지다. 다만 정밀 비행 기술은 또 다른 영역이다. 각종 센서는 물론 실시간 통신 및 전파 간섭 방지, 자율 제어 시스템 등 더욱 진보된 기술이 필요하다. 이는 자율주행 차량의 핵심기술로 이어진다. 지금 평창은 드론뿐 아니라 5세대 이동통신, 가상현실(VR) 등 첨단 기술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면, 기업들은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또 다른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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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현직 여검사의 #MeToo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자신이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는 ‘#MeToo(미투·나도 당했다)’ 운동의 한국판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도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변호사였을 때도 못했던 일, 국회의원이면서도 망설이는 일”이라며 #MeToo를 올렸다. 이 의원은 “서 검사 옆에 서려고 몇 번을 썼다가 지우고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며 자신도 비슷한 피해를 봤다는 뉘앙스가 담긴 글을 올렸다. ‘미투 운동’이 한국에서도 확산될 조짐이다. ▷서 검사는 29일 검찰 내부 통신망에 올린 ‘나는 소망합니다’라는 글에서 2010년 10월 벌어진 성추행 사건을 밝혔다. 동료 검사 부친 장례식장에서 안 전 국장이 술에 취해 허리를 휘감는 등 성추행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소속청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기로 하는 선에서 정리됐지만 그 후 어떤 사과나 연락도 받지 못했다”며 사건 이후 되레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서 검사는 이 8년 동안 겪었던 고통을 기술했다. 성추행 트라우마로 유산을 했다는 사실도 털어놨다. 그는 살기 위해 잊으려 노력했지만 그날 그곳에서의 행동, 숨결, 그 술 냄새가 더욱 또렷이 새겨졌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내 탓이다. 모든 것은 다 내 잘못이다”고 절규했다. ▷이번 사건으로 최고 권력기관으로 불리는 검찰의 이중성과 폐쇄성, 성차별적 구조가 여실히 드러났다. 최고 엘리트라는 검사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범죄의 대상이 됐고, “수시로 가슴이 조여 오고, 누웠다가 발딱발딱 일어날”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 그 사이 성범죄를 단죄해야 할 검사들은 상명하복 문화에 길들어 쉬쉬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가해자 처벌 등 합당한 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 만큼 먼저 진실규명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서 검사의 용기가 권력기관 곳곳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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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커리어를 위한 난자 냉동보관

    2014년 4월 미국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지는 “난자를 냉동보관하세요, 당신의 커리어를 구하세요(Freeze your eggs, Free your career)”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게재했다. 유명 기업의 기술 마케팅을 맡고 있던 브리짓 애덤스 씨 인터뷰가 실렸다. 그녀의 얘기는 직장 경력을 위해 임신을 미룬 여성들에게 난자의 냉동보관이 새로운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후 미국에선 난자 냉동보관 열풍이 불었다. 전문가들은 여성의 사회적 성공과 육아가 충돌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해 연말 애플,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들은 최대 2만 달러(약 2131만 원)까지 난자 냉동보관 비용을 여성 사원들에게 지원키로 했다. 블룸버그는 “생물학적 시계에 좌우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꿈도 아기도 지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했다. ▷워싱턴포스트지 최근호에 따르면 30대 후반에 난자를 보관한 애덤스 씨는 45세가 되던 지난해, 임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2개의 난자는 융해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3개는 수정에 실패했다. 5개는 비정상으로 추정됐다. 마지막 한 개가 그녀의 자궁에 이식됐지만 출산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녀는 “충분한 난자를 보관해야 한다는 언급을 하지 않는 병원들이 많다. 나쁜 결과에 대한 충고의 부족은 비양심적”이라고 분노했다. 애덤스 씨는 결국 기증받은 난자와 정자로 지난해 임신에 성공했다. 5월 출산을 앞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커리어 여성들의 난자 냉동보관이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일부 여성 연예인들이 TV에서 “난자를 냉동보관하고 있다”고 고백해 화제가 됐다. 2016년 보건복지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병원 26곳에서 약 4500개의 냉동난자가 보관 중이다. 하지만 만 35세 이후 보관된 난자는 수정 확률이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임신과 출산은 개인과 사회의 축복이다. 커리어를 위해 생체 시계까지 인위적으로 거슬러야 하는 고통을 언제까지 여성들이 떠안아야 할까.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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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신조 “北, 선전 위해 평창행… 올림픽 유치때부터 계획했을 것”

    《1·21사태가 일어난 지 50년이 지났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살해를 목적으로 청와대 근방까지 침투했던 1968년 그해는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 한반도 전쟁 기운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김신조 목사를 만나 그가 겪은 남과 북에 대해 들어봤다.》  1968년 1월 22일 오전 1시경. 영하 10도에 칼바람까지 몰아쳤다. 세검정계곡(서울 종로구)은 조명탄과 플래시 불빛, 확성기 소리로 가득 찼다. “나와라. 살려준다. 투항하라.” 계곡의 바위 뒤 곳곳에 자리 잡은 육군 30사단 92연대 소속 장병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무기는 수류탄 하나뿐이었다. 북한에서 가져온 총과 350발의 실탄, 13개의 수류탄은 도주 과정에서 인왕산 바위 밑에 숨겼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됐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수류탄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수년 동안 훈련받은 대로 자폭해야 할 시간이었다. 확성기 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반드시 살려준다. 믿고 나와라.” 두 손을 들고 플래시 불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김신조 목사는 탈북자 또는 귀순용사가 아니다. 1968년 1·21사태 당시 투항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6기지 2조 조장(소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지시를 받고 남파된 특수부대 장교였다. 당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엘리트 군인이었다. 투항 직후 기자회견에서 “왜 내려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한국과 북한 모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한 대통령을 직접 살해하려는 원시적인 도발이 핵개발이라는 치명적 도발로 바뀌었을 뿐 남북 간의 대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1·21사태 50년을 사흘 앞둔 18일 서울 구로구 성락교회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그는 “26세 젊은 총각 군인으로 한국에 왔는데 벌써 50년이 지났다. 이제 76세가 됐고 손주들을 포함해 11명의 대가족을 이뤘다. 나도 내 인생을 한번 정리할 시점이 된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한국, 북한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1·21사태 당시 북한군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 목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걱정부터 했다. ―50년 전과 지금의 남북 관계를 비교한다면…. “북한의 속성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북한은 변하지 않았는데 북한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생각만 너무 많이 바뀌었다.” ―우리 국민의 안보 의식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180도 바뀌었다.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에는 6·25를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늘 북한의 위협과 도발 속에 살았다. 그런 고난 속에서 나라를 지켰고 한국이 여기까지 왔다. 요즘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북한 정권에 대해 적개심이 없다. 오히려 북한에 동조하는 사람들만 늘고 있다.” ―50년이 흘렀다. 북한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북한은 바뀐 게 하나도 없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예전처럼 적화통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이다. 요즘은 ‘한민족’이라고 강조한다. ‘한민족’에 대해 대한민국에 반대할 사람 얼마나 있겠느냐. 하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다.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으로 바뀌었지만 북한은 한 정권이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북한은 망할 때까지 절대 대남전략을 바꾸지 않는다.” 그가 남파됐던 1968년은 1년 내내 한반도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남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이 김신조 등 특수부대원 31명을 보낸 1·21사태를 시작으로 이틀 뒤인 1월 23일엔 미국 해군 소속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나포됐다. 승무원 83명을 태운 채였다. 미국은 동해에 항모와 함정 30여 척을 배치했다. 11월에는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에 북한 특수부대원 120명이 침투했다.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도사리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해당한 9세 소년 이승복도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서울 광화문에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도 1968년이었다. 왜구를 물리친 충무공이 북한을 막는 국가의 수호신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남북 관계가 긴박하다. 한반도 비핵화 가능할까. “비핵화? 안 된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뭐라고 했나. 북한은 인민들이 풀을 먹어도 핵 포기 안 한다고 했다.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는 체제가 무너지면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죽는 것이다. 김정은에게 핵은 생존이다. 북한 지도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 (북핵시설 폭격 계획대로) 했으면 북한이 저렇게까지 가지 못했다. 이젠 붕괴가 안 된다. 북한은 이제 가질 것을 다 가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보나. “2003년도 6자 회담 때부터 잘못됐다. 나는 분명히 반대했다. 난 탈북자가 아니다. 북한의 군사 전략과 전술을 훈련하고 분석한 사람이다. 6자 회담 자체가 핵 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봤다. 필요할 때마다 빠졌다 들어갔다 하는 것이 공산주의 전략이다. 지금도 똑 같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이 선수단과 예술단 등 대규모 대표단을 보낸다. “북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 북 체제는 선전·선동으로 유지된다. 국가적으로 선전·선동에 엄청 투자한다. 평창에 오는 것은 오래전부터 세워진 계획이라고 본다. 한국이 이명박 정부 때 겨울올림픽을 유치했을 때부터 계산한 거라고 본다. 먼저 핵 개발하고 겨울올림픽을 통해 북한의 체제와 북한이 살아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선전하려는 계획이 서 있었을 것이다.” ―평화 올림픽이다. 북한도 손님인데 어떻게 대해야 하나. “손님으로만 대해주면 된다. 박수 치고 환호하게 되면 북한은 대한민국을 자신들이 장악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김정은 체제 유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의 전술을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 ―현 정부 대북 정책은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 문제는 많이 연구하고 분석한 전문가들 얘기를 듣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어느 정부든 내 정권에서 이걸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빼야 한다. 다음 대로 넘긴다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 서두르면 실수를 하게 된다. 북한은 절대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원리 원칙대로 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체포된 공비가 아니다. 국방부 바로잡아 주길” 개인적인 얘기로 넘어갔다. 동료와 가족들 얘기를 하는 대목에선 눈가가 붉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나. “철길을 깔아야 기차가 달릴 수 있다. 관광지도 자원도 없는 한국이 북한의 도발 등 그 어려움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그 철길을 만든 것이다. 잘한 건 잘한 것이다. ―한국에 왔을 때 한국군은 어떤 상태였나. “1968년만 해도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이 한국보다 많았고, 군 훈련 운영 시스템 등도 앞서 있을 때다. 휴전선 방어도 북쪽과 달리 남쪽은 허술했다. 나는 1·21사태 이전에 두 번이나 휴전선을 통해 한국에 내려와 정찰작전을 수행하고 돌아갔다. 당시 한국군에는 ‘유격’이라는 단어도 없었다. 방첩대에서 조사받으면서 내가 북한에서 받았던 훈련과 전술을 알려줬다. 예비군도 그 때문에 창설된 것이다.” 1·21사태는 지금과 같은 한국의 방위 체제가 새로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해 2월 육군 병사의 복무 기간이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늘어났다. 같은 해 4월 1일엔 예비군이 창설됐다. 모든 성인에게 12자리(지금은 13자리)의 숫자가 부여되는 주민등록증이 처음 발급된 것은 11월이었다. 2년 넘게 효자동 방첩대에서 조사받으며 지내오던 김 목사는 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 10일 풀려났다. 자유인이 된 것이다. ―방첩대에서 풀려난 이후 사회 생활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정부에서 한국화약에 일자리를 만들어줬다. 2, 3개월 다니다 인천에 있는 화약공장 견학을 다녀와서 바로 그만뒀다. 만약 공장이 무슨 사고로 폭파되기라도 하면 바로 내가 뒤집어쓸 것 같았다. 폭파범 누명을 씌워 희생양을 만들까 봐 걱정됐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3년 후 이리역 폭파사고가 있었다. 도시가 잿더미가 됐다. 그게 그 회사 관련 사고였다. 계속 다녔으면 난 이미 (폭파범으로 몰려) 죽었을 것이다.” ―사회에 나왔을 때 사람들 시선은 어땠나. “난 지금도 지하철을 잘 안 탄다. 얼굴 알아보고 대뜸 ‘너 김신조지? ×××’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 때문에 군대 6개월 더 복무했다. 엄청 고생했다’며 화를 낸다. 처음 회사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그런 욕 정말 많이 먹었다. 당시에 언론에 너무 많이 보도가 돼서 어른들 중에는 지금도 얼굴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나. “이후 건설회사에 다시 취직이 됐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아내 덕분에 신앙을 갖게 됐다. 199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보강연과 신앙생활하면서 살고 있다. 이제는 아들딸과 손주 등 10명이 넘는 가족을 이뤘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여는 데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한국에서 행복을 얻었는데… 경기 파주 문산 쪽에 가면 적군묘지라고 있다. 1·21사태 때 숨진 동료, 친구들이 묻혀있다. 북한이 이제 그들의 유골을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가족 생각이 난다.” ―북한의 가족은 어떻게 됐나. “처음에 내가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고 했을 때는 북한에서 나를 영웅 대접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내가 안보강연 다니고 하니까 1980년쯤에 부모님을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 시내 운동장에 세워놓고 1만 명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 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인민재판을 한 거지. 그 얘기도 몇 년 후에 청진에서 온 탈북자에게서 들었다. 7남매였는데 6명의 형제는 아예 행방을 알 수 없다. 여러 루트를 통해 수소문해 봤는데 북한에서 아예 주민등록이 말소됐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기록 자체가 없어진 거지….” ―언젠가 고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보고 싶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건 미래고. 빨리 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노력할 뿐이다. 아들딸과 손주들에게 고향집 약도를 그려줬다. 혹시 내가 쓰러지고 나서 통일이 되더라도 꼭 고향에 가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없나. “50년 전 나는 분명히 투항했다. 그런데 국방부 기록은 아직도 ‘체포’로 돼있다. 당시 군인들이 자신들의 공을 내세우기 위해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내 아이들은 어릴 때 내가 ‘체포된 무장공비’라는 교과서를 읽고 자랐다. 난 체포된 게 아니다. 국방부가 이제라도 바로잡아 줬으면 한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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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길진균]트럼프의 정신건강

    연초부터 난데없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신건강이 논란이다. “핵 단추가 항상 책상 위에 있다”는 김정은 신년사에 “내 핵 단추는 더 크고 강력하며 실제로 작동 가능하다”고 쓴 트위터 글이 발단이었다. 여기에 언론인 마이클 울프의 저서 ‘화염과 분노: 트럼프 백악관의 내부’는 기름을 부었다. 울프는 트럼프 정부의 설계자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등 측근들조차 그를 모자란 사람으로 여긴다고 폭로했다. ▷“배넌이 정신을 잃었다”고 분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6일 트위터에 “나는 성공한 사업가, TV 스타, 그리고 미국 대통령에 올랐다. 이것은 똑똑한 것이 아니라 천재라는 걸 입증한다. 그것도 매우 안정된 천재다”라고 직접 반박했다. 미국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인정’에 대한 집착이 다시 도졌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허약한 자존감 때문에 늘 과잉 보상을 기대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야당뿐 아니라 과거 공화당 정권 인사들마저 그의 정신건강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미국에서 대통령의 정신건강은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된다. 1964년 ‘팩트 매거진’은 정신과 의사들을 상대로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에 대해 설문했다. 응답한 의사의 49.2%는 골드워터가 대통령직에 부적합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골드워터는 대선에서 패배했다. 이후 ‘골드워터 룰’이 만들어졌다. 정신과 의사들이 직접 진료하지 않은 공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는 “대통령의 정신건강이 가져올 리스크에 대해 경고할 의무가 있다”는 목소리가 많다. ▷대통령의 정신건강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부모를 모두 총격으로 잃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폐쇄성은 지난 정부를 파국으로 몰고 간 한 원인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모든 분쟁 지역에서 대화와 전쟁을 선택할 수 있는,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익명의 백악관 내부 인사는 최근 “역사상 모든 전쟁은 우발적 사고였다”고 말했다. 북한 김정은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의 정신건강까지 걱정해야 하나.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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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논단/길진균]친노의 꿈, 이번엔 이뤄질까

    문재인 대통령이 3일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를 찾았다. 6·13 지방선거가 예정된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새해 첫 현장방문이 거제라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이념적 지역적 한계 안고 태어난 친노부산 민주화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친노(친노무현)는 한국 정치에서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였다. 한 동안 한국 정치의 주류는 보수, 진보는 비주류였다. 보수 중에서도 주류는 TK(대구·경북)고 비주류는 PK(부산·경남)였다. 반면 진보의 주류는 호남이고 비주류는 영남이었다.영남 진보인 친노는 한국정치 지형에서 지역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주류와 섞이기 쉽지 않은’ 외톨이였다. 호남 출신의 동교동계와 이들이 발탁한 수도권 86그룹이 양대 축으로 이끌던 진보진영에 어느 날 등장한 인물이 부산 출신의 인권변호사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완화되는 듯 했던 지역주의는 금방 복원됐고 지금까지 철옹성처럼 이어지고 있다. ‘지역주의’라는 한국 정치 지형을 규정하는 틀이 만들어진 것은 1987년이다. 흔히 ‘87년 체제’라고 한다. 국민 직접 선거에 의한 5년 단임 대통령제, 국회의원 소선구제가 특징이다. 지역주의가 선거 결과로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처음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부터다. 당시까지만 해도 부산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야당세가 강한 곳이었다.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겠다”며 3당 합당을 결행했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YS의 선택은 동시에 PK의 야성(野性)을 누그러뜨리는 결과도 가져왔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된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발발한 PK 지역은 오랫동안 야도(野都)였지만 YS가 보수여당의 당수가 되고 대통령이 되면서 보수여권에 편입됐다. 이후 20년 넘게 PK 지역은 보수당의 아성처럼 여겨졌다. 현재 한국 정치 지형의 뿌리가 된 ‘87년 체제’의 정초선거(定礎選擧·단순히 일회적 의미를 갖는 선거가 아닌 정치 지형과 사회의 틀을 잡는 선거)는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이었다.친노, 2020년 총선을 정초선거로 2년 전 까지만 해도 PK는 보수의 텃밭이 분명했다. 하지만 2016년 치러진 20대 총선은 보수의 텃밭이었던 PK 지역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으로 친노 진영은 드디어 PK 지역에서 ‘87년 체제’를 해체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왔다고 보고 있다. 문 대통령과 친노 진영은 PK 지방권력 교체야말로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이어진 필생의 과업인 지역주의 극복과 ‘87년 체제 이전으로의 복귀’를 보여주는 상징적 결과물로 여기고 있다. “저와 영남 동지들의 원대한 꿈! 오랜 염원! 감히 고백합니다. 영남의 민주주의 역사, 새로 쓰고 싶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정권교체하면, 영남은 1990년 3당 합당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 자랑스럽고 가슴 벅찼던 민주주의의 성지로 거듭날 것입니다.” 문 대통령은 5·9 대선 때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영남지역 순회경선 정견발표에서 이 같이 외쳤다. 그리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못 다 이룬 꿈, 제가 다 하겠습니다. 다시는 정권 뺏기지 않고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여기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지방선거는 2020년 21대 총선의 전초전 성격이 강하다. 특히 친노 진영은 2020년 총선을 ‘87년 체제’의 해체와 새로운 정치 지형의 틀을 짜는 정초선거로 만들기 위한 교두보로 이번 지방선거를 바라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은 “민주 진영이 PK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위적으로 바뀐 지역 정치를 그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뜻”이라며 “전문가들은 복원까지 한 세대가 걸릴 것이라고 했는데 다음 총선이 있는 2020년은 3당 합당 이후 딱 한 세대(30년)가 지나는 해”라고 말했다.친노 vs 홍준표 정치생명 건 한 판 승부 청와대와 민주당은 이번 PK 지방선거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낼 것이다. 특히 부산시장과 경남지사 등 광역단체장 후보가 누가 될지는 여권 내 위상이나 친소에 관계없이 이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친노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 물론 자유한국당이 친노의 이 같은 구상을 모를 리 없다. PK를 빼앗기는 순간 정권탈환은 더욱 힘들어진다. 경남은 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텃밭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의 뿌리인 친노와 한국당, 그리고 홍준표 대표의 정치생명이 걸린 한 판 승부다. 6·13 지방선거의 최대 관전포인트는 서울이 아니다. PK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 201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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