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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는 지금 뭐하고 계실까?’이번 설날 아침에도 저는 이 생각을 하며 시댁 차례상을 차렸어요. 벌써 9년째 자식도, 손주도 없이 친정 부모님 둘이서만 보내는 설날 아침을 생각하면 절로 죄송해지는 못난 딸이랍니다. 저희 집은 딸만 둘이에요. 언니는 외국에서 일하고, 제가 결혼한 뒤로 명절은 늘 부모님 두 분이서 지내시죠. 남편 집은 아들만 둘이고 아버님이 맏형이라 친척들이 많이 모여요. 맛있는 음식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댁 풍경을 볼 때마다 ‘한 해 정도는 우리 없이 차례를 지내셔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난해 추석 때 남편에게 물었죠. “내년 설엔 우리 집 먼저 갔다가 설 다음 날 시댁에 가면 안 될까? 나도 사촌들 집에 가보고 싶어. 우리 아이가 엄마 쪽 친척은 아무도 모르잖아.” 그랬더니 남편은 “엄마한테 그 얘기를 어떻게 꺼내느냐”며 손사래를 치더군요. 많이 섭섭했어요. 한국에서 명절에 처가를 먼저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지난해 초 결혼한 직장인 강모 씨(30)는 이번 설을 앞두고 아내와 부모님 사이에서 속앓이를 많이 했다. ‘설 당일을 누구 집에서 보낼 것이냐’가 문제였다. “아내가 외동딸이고 장인이 안 계셔서 아내는 이 문제에 굉장히 민감해요. 결혼 전 ‘명절은 번갈아 가자’고 약속했죠. 작년 설은 저희 집에 먼저 갔으니 이번엔 장모님 댁에 먼저 가려 했어요. 저도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할 줄은 몰랐어요.” 강 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갓 결혼했는데 며느리 없이 설을 보내란 말이냐”며 “명절 당일엔 시가에 있는 게 며느리의 도리”라고 잘라 말했다. 강 씨는 “결혼 전엔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보수적인지 몰랐다”며 “처가를 먼저 오긴 했는데 마음도 불편하고 뒷감당도 두렵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성평등 의식이 높아지고 저출산으로 자녀가 한둘에 그치는 집이 늘면서 명절 당일 시가에 먼저 가는 일이 집안 내 갈등의 소재가 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와 달리 이제는 아들과 딸이 시가와 처가의 유일한 자식이다 보니 ‘나도 명절에 우리 부모님을 챙기고 싶다’는 아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설을 앞두고 동아일보 기자 8명이 기혼 남성 100명을 상대로 ‘설날 당일 처가에 먼저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21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40, 50대에서는 ‘본가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동선상 편해서’가 처가에 먼저 간 주된 이유였다. 20, 30대에서는 ‘결혼 전 번갈아 가기로 약속해서’, ‘아내가 외동이라서’라는 답이 많았다. ‘올해 설날 아침도 처가에서 보낸다’는 남성은 11명이었다. 10명 중 1명꼴인 셈이다. 3개월 전 결혼한 주모 씨(29)는 결혼 전에 명절 때 ‘본가-처가 교차 방문’을 사전 승낙 받은 경우다. 설날 아침에 한 해는 본가를 먼저 가고, 다음 해는 처가를 먼저 가기로 한 것. 이번 설은 결혼 후 첫 명절이라 본가를 먼저 갔지만 내년 설에는 처가를 먼저 갈 예정이다. “결혼 전 아내가 ‘명절에 친정 부모님이 우리만 기다릴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자식으로서 공감이 돼 사전에 부모님께 ‘번갈아 가겠다’고 양해를 구했어요.”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부계 중심 유교문화’가 강하다. ‘명절날 처가 먼저’ 얘기를 꺼내는 게 아들로서는 쉽지 않다. 직장인 정모 씨(34)는 지난해 설에 결혼 후 처음으로 본가 대신 처가에 갔다가 1년 내내 엄마로부터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다’, ‘며느리한테 잡혀 산다’는 핀잔을 들었다. 그는 “분란을 줄이기 위해 지난해 추석부터는 다시 본가에 먼저 간다”고 했다. 아내의 불만을 누르고 매해 본가에 먼저 간다는 박모 씨는 “아내가 어떤 대목에서 예민해질지 알 수 없어 나도 본가에 있는 내내 아내 눈치를 살핀다”며 “명절 목표는 최대한 빨리 본가 방문을 끝내고 처가에 가는 거다. 나도 이런 명절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회사원 심모 씨(40)는 본가 부모님의 배려로 다툼을 줄일 수 있었다. 심 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모님이 ‘연휴 때 내려오려면 힘드니 우리가 올라가겠다’며 설 전 주말에 다녀가신다”며 “엄마가 서운한 기색 없이 ‘차례 음식을 안 하니 나도 편하다’고 말해줘 고마웠다”고 말했다. 김모 씨(36)는 ‘제3의 길’을 택했다. 그는 “설 전에 본가와 처가를 모두 다녀온 뒤 연휴에는 아예 아내와 둘이 여행을 간다”며 “의외로 본가가 이렇게 하는 편을 덜 서운해한다”고 전했다. 오윤자 경희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명절 갈등을 줄이려면 먼저 부부가 감정이 아닌 사실 위주로 소통해 방문에 대한 원칙을 정하고 부모님께 이를 잘 설명해야 한다”며 “시부모 역시 이런 변화를 ‘권력의 이동’이라고 받아들일 게 아니라 같은 가족인 며느리와 사돈에 대한 배려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또 “젊은 세대가 명절 변화를 원한다면 그 전에 더 자주 찾아뵈어 부모님의 ‘빈 감정 계좌’를 채워드려야 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며 “그래야 부모님이 명절 변화를 오해하거나 서운해하지 않는다”고 조언했다.임우선 imsun@donga.com·김자현 기자}
‘엄마 아빠는 지금 뭐하고 계실까?’ 이번 설날 아침에도 저는 이 생각을 하며 시댁 차례상을 차렸어요. 벌써 9년째 자식도, 손주도 없이 친정 부모님 둘이서만 보내는 설날 아침을 생각하면 절로 죄송해지는 못난 딸이랍니다. 저희 집은 딸만 둘이에요. 언니는 외국에서 일하고, 제가 결혼한 뒤로 명절은 늘 부모님 두 분이서 지내시죠. 남편 집은 아들만 둘이고 아버님이 맏형이라 친척들이 많이 모여요. 맛있는 음식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댁 풍경을 볼 때마다 ‘한 해 정도는 우리 없이 차례를 지내셔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난해 추석 때 남편에게 물었죠. “내년 설엔 우리 집 먼저 갔다가 설 다음 날 시댁에 가면 안 될까? 나도 사촌들 집에 가보고 싶어. 우리 아이가 엄마 쪽 친척은 아무도 모르잖아.” 그랬더니 남편은 “엄마한테 그 얘기를 어떻게 꺼내느냐”며 손사래를 치더군요. 많이 섭섭했어요. 한국에서 명절에 처가를 먼저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지난해 초 결혼한 직장인 강모 씨(30)는 이번 설을 앞두고 아내와 부모님 사이에서 속앓이를 많이 했다. ‘설 당일을 누구 집에서 보낼 것이냐’가 문제였다. “아내가 외동딸이고 장인이 안 계셔서 아내는 이 문제에 굉장히 민감해요. 결혼 전 ‘명절은 번갈아 가자’고 약속했죠. 작년 설은 저희 집에 먼저 갔으니 이번엔 장모님 댁에 먼저 가려 했어요. 저도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할 줄은 몰랐어요.” 강 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갓 결혼했는데 며느리 없이 설을 보내란 말이냐”며 “명절 당일엔 시댁에 있는 게 며느리의 도리”라고 잘라 말했다. 강 씨는 “결혼 전엔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보수적인지 몰랐다”며 “처가를 먼저 오긴 했는데 마음도 불편하고 뒷감당도 두렵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성평등 의식이 높아지고 저출산으로 자녀가 한둘에 그치는 집이 늘면서 명절 당일 시댁에 먼저 가는 일이 집안 내 갈등의 소재가 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와 달리 이제는 아들과 딸이 시가와 처가의 유일한 자식이다 보니 ‘나도 명절에 우리 부모님을 챙기고 싶다’는 아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설을 앞두고 동아일보 기자 8명이 기혼 남성 100명을 상대로 ‘설날 당일 처가에 먼저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21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40, 50대에서는 ‘본가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동선상 편해서’가 처가에 먼저 간 주된 이유였다. 20, 30대에서는 ‘결혼 전 번갈아 가기로 약속해서’, ‘아내가 외동이라서’라는 답이 많았다. ‘올해 설날 아침도 처가에서 보낸다’는 남성은 11명이었다. 10명 중 1명꼴인 셈이다. 3개월 전 결혼한 주모 씨(29)는 결혼 전에 명절 때 ‘본가-처가 교차 방문’을 사전 승낙 받은 경우다. 설날 아침에 한 해는 본가를 먼저 가고, 다음 해는 처가를 먼저 가기로 한 것. 이번 설은 결혼 후 첫 명절이라 본가를 먼저 갔지만 내년 설에는 처가를 먼저 갈 예정이다. “결혼 전 아내가 ‘명절에 친정 부모님이 우리만 기다릴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자식으로서 공감이 돼 사전에 부모님께 ‘번갈아 가겠다’고 양해를 구했어요.”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부계 중심 유교문화’가 강하다. ‘명절날 처가 먼저’ 얘기를 꺼내는 게 아들로서는 쉽지 않다. 직장인 정모 씨(34)는 지난해 설에 결혼 후 처음으로 본가 대신 처가에 갔다가 1년 내내 엄마로부터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다’, ‘며느리한테 잡혀 산다’는 핀잔을 들었다. 그는 “분란을 줄이기 위해 지난해 추석부터는 다시 본가에 먼저 간다”고 했다. 아내의 불만을 누르고 매해 본가에 먼저 간다는 박모 씨는 “아내가 어떤 대목에서 예민해질지 알 수 없어 나도 본가에 있는 내내 아내 눈치를 살핀다”며 “명절 목표는 최대한 빨리 본가 방문을 끝내고 처가에 가는 거다. 나도 이런 명절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회사원 심모 씨(40)는 본가 부모님의 배려로 다툼을 줄일 수 있었다. 심 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모님이 ‘연휴 때 내려오려면 힘드니 우리가 올라가겠다’며 설 전 주말에 다녀가신다”며 “엄마가 서운한 기색 없이 ‘차례 음식을 안 하니 나도 편하다’고 말해줘 고마웠다”고 말했다. 김모 씨(36)는 ‘제3의 길’을 택했다. 그는 “설 전에 본가와 처가를 모두 다녀온 뒤 연휴에는 아예 아내와 둘이 여행을 간다”며 “의외로 본가가 이렇게 하는 편을 덜 서운해한다”고 전했다. 오윤자 경희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명절 갈등을 줄이려면 먼저 부부가 감정이 아닌 사실 위주로 소통해 방문에 대한 원칙을 정하고 부모님께 이를 잘 설명해야 한다”며 “본가 부모 역시 이런 변화를 ‘권력의 이동’이라고 받아들일 게 아니라 같은 가족인 며느리와 사돈에 대한 배려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또 “젊은 세대가 명절 변화를 원한다면 그 전에 더 자주 찾아뵈어 부모님의 ‘빈 감정 계좌’를 채워드려야 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며 “그래야 부모님이 명절 변화를 오해하거나 서운해하지 않는다”고 조언했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교육부가 지난해 12월 공포된 ‘강사법(고등교육법)’의 후속 조치로 고등교육법 시행령 등 4개 법령을 개정해 1일부터 40일간 입법예고에 들어간다고 31일 밝혔다. 시행령은 강사법이 현장에 적용되는 구체적 지침이 담기는 만큼 대학과 강사 양측의 관심이 컸다. 먼저 교육부는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고쳐 대학들이 강사 대신 고용이 쉬운 겸임교원이나 초빙교원만 늘리는 부작용을 막기 위한 조항을 신설했다. 이미 직장을 가진 겸임·초빙 교원들은 재임용 요구, 인건비 인상 등의 요구가 적어 대학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겸임교원이 되기 위해서는 △조교수 이상의 자격조건을 갖추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내용이 원래 다니는 직장의 직무 내용과 유사해야 하며 △본래 직장에서 상시 근무하는 현직 근로자로서 △임용 기간을 1년 이상으로 계약해야 하는 등의 4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도록 했다. 산업체 소속 전문대 강사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강사 임용 시 반드시 공개 임용을 하도록 했다. 대학은 이를 위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사위원을 임명·위촉할 방법을 학교 정관 및 학칙에 명시해야 한다. 강사가 임용 기간 만료나 재임용 조건 등을 사전에 인지할 수 있도록 정관이나 학칙에 임용 기간, 임금(방학 중 임금 포함), 강의 시간 및 복무 등 근무조건, 면직 사유, 재임용 절차 등을 명시하도록 했다. 대학들은 “시행령이 겸임·초빙 교원 고용을 제한하는 데 방점을 뒀다”는 반응이다. 수도권 대학의 한 관계자는 “조교수 이상이면 박사 이상이란 얘긴데 그럼 실무 역량 위주의 강사들은 고용하기 어렵다”며 “추가 고용이 어려워진 건 물론이고 고용 중인 겸임·초빙 교원도 엉뚱한 유탄을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대학 관계자는 “대학들이 정말 궁금해했던 방학 중 임금 산정 기간이나 임금 기준이 나오지 않아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자 여러분, ‘삼탄아트마인’이라는 강원 정선군의 관광지가 있습니다. 과거 광산이었던 곳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세계 150개국에서 수집한 10만여 점의 예술품을 지하 갱도 안에 모아 둔 곳이죠.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콘텐츠를 가진 곳이 1년 중 4개월 정도만 손님이 몰리고 나머지 기간은 비수기라 고민이라고 합니다. 학생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양대 ERICA캠퍼스 경상대 강의실. 학생들은 강의실 화면에 뜬 삼탄아트마인의 사례를 보며 고심에 빠졌다. 이 학교 전상길 교수가 던진 질문은 학습용, 즉 가공의 사례가 아니었다. 폐광산을 문화광산으로 바꾸려 했지만 사업 위기에 부닥친 실제 기업의 사례였다.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모든 경영학 지식과 사업 아이디어를 총동원해 삼탄아트마인을 살릴 전략을 내놓아야 했다.○ 학생-대학-기업 윈윈 PBL 최근 대학가에서는 대학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고 창의력 발산의 기회를 주기 위한 ‘산업 연계 문제 기반 프로젝트 수업(IC-PBL·Industry-Coupled Problem Based Learning)’ 방식이 화제다. PBL은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앞다퉈 도입하고 있는 수업 형태다. 대학이 기업으로부터 고민을 의뢰받고 학생들에게 가공의 사례가 아닌 실제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미션을 준다. 학생들은 주도적으로 관련 지식을 학습하고 현장을 탐사하며 문제를 이해한다. 기업은 관련 실무자들을 대학에 보내 각 팀의 멘토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은 결과는 실제 기업 현장에 적용된다. 학생과 기업 모두가 성과를 공유하는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실제 한양대 ERICA캠퍼스에서 진행됐던 삼탄아트마인 프로젝트는 PBL의 정석을 보여줬다. 삼탄아트마인 대표는 학생들을 찾아 기업의 실제 고민을 전했고, 학생들은 비슷한 위기를 경험했던 기업들의 사업모델을 탐구해 삼탄아트마인에 적용할 만한 대안을 제시했다. 수업 과정에서 각종 아이디어가 나왔다. 수업에 참여한 한 학생은 “기업의 고민은 비수기의 흑자 전략을 얻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성수기의 수익을 더욱 극대화할 모델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이처럼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정선의 기업 현장을 수차례 찾아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책을 냈다. 갱도에 뒤섞여 있는 전시물 배치 공간 설계를 다시 하고 포트폴리오를 작성했다. 전시장에서 파는 음식 메뉴도 바꿨다. △가격 전략을 높이기 위한 패키지 상품 구성 △인근의 하이원 및 강원랜드와 결합한 지역사회 마케팅 △전시장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직행버스 노선 설계 등도 제시됐다. 모두 학생들 머리에서 나온 해결책이다. 전 교수는 “한 학기가 끝났을 때 학생들과 기업 대표가 끌어안고 함께 우는 감동의 드라마가 연출됐다”며 “학생들의 솔루션을 적용한 뒤 지난 한 해 추가로 얻은 수익의 3%를 기업 대표가 한양대 발전기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업무 능력 갖춘 학생들에 기업들 큰 관심 한양대 ERICA캠퍼스는 국내 대학 중 처음으로 IC-PBL 수업을 전 학과에 도입했다. 2017년 신입생부터는 졸업 요건에 ‘4개 이상의 PBL 교과목 이수’를 추가했다. 원활한 PBL 수업을 위해 모든 단과대에 ‘IC-PBL 강의실’을 구축하기도 했다. 전 교수는 “PBL 경험을 한 학생들은 기업들이 따로 채용 문의를 할 정도로 실무 역량이 뛰어나다”며 “PBL 과정에서 기업으로부터 받은 다양한 수상 경력은 타 기업에 지원할 때도 일종의 ‘마패’가 된다”고 말했다. 한양대는 세계 최대 규모의 물류회사인 DHL, 국내 굴지의 식품기업인 풀무원과도 산학협정을 맺고 PBL을 진행 중이다. 한양대는 “올해 개교 80주년을 맞아 중장기적으로 전체 수업의 20% 이상을 소통 중심의 스마트 교육으로 바꿀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설 차례상요? 우리 집안은 이미 신정에 차례를 지냈는데요.” 25일 조선시대 대표적 성리학자인 명재 윤증(1629∼1714) 종가의 차종손인 윤완식 씨에게 설 차례 계획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는 “설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신정 차례상에는 과일과 차만 올린다”고 했다.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명재 종가가 설을 지내지 않는 데다 신정 차례상에 다과만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재는 왕에게서 우의정 등 높은 벼슬자리 부름을 받고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 보니 살림은 늘 궁핍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제사를 지내야 할 후손들을 위해 명재의 유지(遺旨)는 분명했다. ‘제사를 간소하게 하라. 부녀자들의 수고가 크고 사치스러운 유밀과(약과)는 올리지 말라. 기름을 쓰는 전도 올리지 말라.’ 집안의 제사상 크기는 가로 99cm, 세로 68cm로 정해져 있어 음식을 많이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다고 한다. 윤 씨는 “우리 종가의 특징은 여성의 수고를 덜어주고 제물보다 마음을 중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명재 종가의 제사상에 올라가는 과실은 대추와 밤, 감 등 딱 세 가지다. 대(代)의 이어짐을 의미하는 뿌리와 줄기, 잎을 활용한 3색 나물을 올리는데, 이조차 따로따로 담지 않고 한 그릇에 담는다. 조기 역시 통으로 올리지 않고 한 토막만 올린다고 윤 씨는 전했다. 설 차례상은 기일제(조상이 돌아가신 기일에 지내는 제사)상보다 더 간소하다. “차례는 차(茶)를 올린다고 해서 차례예요. 차례상에는 떡국과 과실 세 가지, 식혜, 녹차 정도만 올려요.” 윤 씨는 “만약 조상이 커피를 좋아하셨다면 커피를 타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라며 “차례상 비용은 3만 원이 채 안 든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시덕 교육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통 차례상은 명재 종가처럼 간소했다. 김 과장은 “차례에 대해 조상들이 남긴 규칙은 ‘과일과 제철음식 하나’가 전부”라며 “설 차례 때 기일제를 함께 드린다면 모를까 기일제를 따로 지내면서 차례상을 제사상처럼 차리는 것은 과하다”고 말했다. 차례상은 명절 때 자손들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죄송해 설이면 떡국, 추석이면 송편, 단오면 쑥떡 등을 한 그릇 담아 차와 함께 조상에게 올린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명재 종가처럼 설 대신 신정을 쇠는 건 문제가 없을까. 명재 종가가 신정을 쇠게 된 것은 윤 씨의 증조부인 윤하중 선생의 결정 때문이었다. 천문학자인 윤하중 선생은 1938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역서에 관한 고서란 고서는 모두 읽은 역학계의 거성(巨星)’으로 소개된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윤 씨는 “천문학을 공부한 증조부는 양력이 음력보다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집안의 제사와 생일을 모두 양력에 맞춰 지내도록 했다”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고문서연구실장은 “차례든 제사든 전통은 시대와 집안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다”며 “모든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강조했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 지난 한 해 독자 여러분의 큰 사랑을 받은 ‘새로 쓰는 우리 예절 신예기(新禮記)’ 시리즈가 올해 ‘신예기 2019’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신예기는 빠른 시대 변화 속에서 세대와 남녀, 개인 간 갈등을 낳는 일상의 예법을 재조명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예법을 제안하는 공론의 장입니다. ‘신예기 2019’ 첫 회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종가의 특별한 설 차례와 제사 풍경을 소개합니다. 》 22일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인 이창수 씨(54)와 함께 경북 안동시 고성 이씨 사당이 있는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을 찾았다. 1519년 세워져 500년 전통을 간직한 임청각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기 전까지 부유한 유림 종가였다. 그래서 1년 내내 조상을 모시는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임청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은 현재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나 감실(龕室·신주를 모시는 곳) 등 일반적인 제례(祭禮) 도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 씨는 “고조할아버지(석주)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며 고향 땅에 신주를 묻었다”며 “지금은 신주 없이 사진만으로 조상을 모신다”고 말했다. 임청각에는 석주가 1911년 만주로 떠나기 직전 쓴 ‘거국음(去國吟)’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보배로운 우리 강산 삼천리, 조선 500년간 문화를 꽃피웠네. (중략) 고향 동산 근심하지 말거라. 태평한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다’라는 내용으로 구국을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조선 후기 임청각 종가의 분재기(分財記·가족이나 친척에게 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에는 노비만 무려 408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석주는 1911년 1월 “너희도 이제 독립군이다”라는 말과 함께 안동에서 처음으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이들을 해방시켰다. 처분한 모든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쓰면서 제사는 자연스럽게 간소해졌다. 이 씨는 “독립운동 이전에도 임청각 종가의 제사상은 매우 간소했다”며 1744년 작성된 ‘고성 이씨 가제정식(家祭定式)’을 보여줬다. 집안의 제사 매뉴얼인 이 문서에는 ‘제사상은 간소하게 차릴 것’, ‘윤회봉사(형제간에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것)를 할 것’, ‘적서(嫡庶)의 차별 없이 모두 참여시킬 것’ 등 지금 봐도 혁신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임청각은 아들이 없는 경우 외손이 제사를 지낸 전통도 있다. 이 씨의 20대조 6형제 중 다섯째인 ‘이고’라는 분은 자손이 딸 하나밖에 없었는데, 생을 마치고 사위인 서씨 집안에 재산을 물려줬고 이후 외손자가 제사를 지냈다. 이 씨는 “지금도 서씨 가문에서 외손봉사로 ‘이고’의 제사를 지낸다”며 “외가든 서자든 누가 제사를 지내든 각 집안의 예법인 ‘가가예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또 “제사 때문에 식구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야말로 임청각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며 “제삿날에는 제 여동생들도 모두 모여 며느리들과 똑같이 일한다”고 말했다. 광복절인 8월 15일 4대조의 제사를 모두 모아 지내는 임청각 종가는 낮 12시 제사를 마치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비빔밥을 먹는 것으로 제사를 마친다. 이런 원칙은 설 차례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씨는 “제가 사는 서울의 아파트는 좁아 음식을 올릴 상을 제대로 펼 수도 없다”며 “가로 60cm, 세로 40cm 크기의 상 4개를 붙여 한꺼번에 차례를 지낸다. 차례 음식은 과일 4개랑 포, 떡국까지 합해 10개가 채 안 된다”고 전했다. 이 씨는 “지난해 추석 신예기 기사에서 퇴계 이황의 종가가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는데 많은 안동 유림 종가들이 그렇다”며 “우리도 추석엔 차례 없이 처갓집에 가서 처가 식구들과 여행도 하며 가족애를 다진다”고 말했다.안동=유원모 onemore@donga.com / 임우선 기자}
#사례1.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는 학부모 김모 씨는 자녀가 만 4세가 되던 해부터 과학고·영재학교 입학을 준비했다. 의대와 명문 이공계대 진학을 위한 ‘직선 코스’라고 봤기 때문이다. 유치원부터 각종 놀이와 사고력 수학 프로그램을 접하게 했고, 7세부터는 연산학원 등 3, 4개의 수학학원을 보내 본격적으로 초등 수학을 선행 교육했다. 앞으로는 계속 선행학습을 하면서 영재원 입학과 한국수학올림피아드(KMO) 출전 준비를 할 계획이다. 김 씨는 “6학년까지 고1 수학을 떼야 올림피아드 출전을 바라볼 수 있다”며 “사교육 인프라가 갖춰진 강남이 아니면 준비 자체가 힘들다”고 말했다. #사례2. 서울 송파구에서 중2 자녀를 키우는 박모 씨도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박 씨는 당초 자사고 진학을 노려 왔지만 현 정부 들어 폐지 움직임이 가속화되자 유일한 ‘무풍지대’인 과학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학의 정석’을 세 번 정도 돌렸는데 이 정도는 다들 한다”며 “자유학기제라 내신 부담이 없는 중1 때 집중적으로 선행이 이뤄진다”고 전했다. 평소 수학·과학 학원비는 월 150만 원이지만 수업 시간이 길어지는 방학 땐 300만 원 이상이 든다. 최근 우수한 교육과 대입 실적을 원하는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과학고·영재학교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올해 외고 경쟁률은 대부분 2 대 1 미만이었던 반면 전국 20개 과학고·영재학교 입학경쟁률은 3.54 대 1로 전년도(3.09 대 1)보다 일제히 상승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종로학원하늘교육과 함께 서울지역 25개 자치구별 중학교 졸업생들의 과학고·영재학교 진학 실적을 전수 분석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 학교알리미에 공시된 학교별 진학 통계를 대상으로 했다. 분석 결과 이른바 강남, 목동 등 교육특구와 다른 지역 간의 격차가 최대 11.5배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교육계에서는 “중학교의 공교육이 대동소이한 상황에서 지역별 격차가 이 정도로 나타난 것은 과학고·영재학교 진학에 사교육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방증”이란 평가가 나왔다.○ 강남구-중구 진학 실적 격차 11.5배 지난 5년간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46만3319명의 고교 진학 상황을 분석한 결과 이 가운데 2574명(0.56%)이 과학고·영재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고·영재학교에 가장 많이 진학한 곳은 졸업생 3만246명 중 382명이 진학한 강남구였다. 1만 명당 126명이 진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2위는 서초구로 1만 명당 99명이 과학고·영재학교에 진학했다. 3위 양천구는 1만 명당 81명이 진학했다. 5년간 200명 넘는 학생이 과학고·영재학교에 진학한 서울지역 자치구는 강남구 외에 양천구(286명) 노원구(285명) 송파구(255명) 서초구(216명) 등 5곳뿐이었다. 5년간 가장 많은 과학고·영재학교 진학자가 나온 상위 20개교를 뽑아본 결과 절반이 강남·양천구에 속했다. 반면 과학고·영재학교 진학생이 가장 적은 곳은 중구로 졸업생 5268명 중 단 6명(1만 명당 으로 환산한 경우 11명 진학)만이 합격했다. 1위인 강남구와 1만 명당 합격자 비율로는 11.5배, 절대 수치로는 64배 차이가 났다. 중구 다음으로 진학생 비율이 낮은 곳은 동대문구(1만 명당 20명 진학), 중랑구(1만 명당 21명 진학), 금천구(1만 명당 22명 진학) 순이었다.○ 극복 안 되는 지역 간 사교육 격차 전문가들은 지역별로 과학고·영재학교 진학 격차가 생기는 가장 큰 원인으로 △천양지차인 사교육 인프라 △입시 정보 비대칭 △동료 효과의 부재 등을 꼽았다. 과학고 입시학원들이 경제력이 높은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데다 관련 교육과 정보까지 이곳으로 쏠리다 보니 다른 지역은 지원할 엄두조차 못 내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이환철 수학교육개발실장은 “과학고·영재학교 진학 실적이 낮은 지역에도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며 “다만 중학교 공교육이 수준별 교육을 못하게 돼 있다 보니 (사교육 뒷받침이 안 되는 지역은) 적절한 발굴과 교육, 입시정보 제공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입시컨설턴트 김은실 씨는 “수학올림피아드 준비 없이 서울지역 과학고에 붙는 학생은 0명이라고 봐야 한다”며 “전문 사교육 지원 없이는 도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과학고·영재학교 입시가 면접 위주의 ‘미니 학종(학생부종합전형)’화되면서 중학교 때부터 내신뿐 아니라 각종 스펙 관리를 해야 하는 것도 비교육특구 학교에 불리한 요인이란 분석도 나온다. 입시멘토업체 대표인 이미애 씨는 “자기소개서에 교내활동이나 자신의 진로를 위해 공부한 탐구보고서를 담아야 한다”며 “학교에 전통적 과학동아리가 있는지, 4∼5명 규모로 자율동아리를 만들 수 있는지, 학교 선생님이 어느 정도 지원해주는지 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에서 과학고·영재학교 진학 실적이 가장 낮은 중구에서는 수년 전만 해도 학교별로 최상위권 4, 5명 정도가 과학고 입시를 준비했는데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구의 A중학교 교감은 “학생 수가 적으니 사교육 시장도 작고, 우수한 학생끼리 상호 자극을 받기도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그간 지역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고 선발전형을 여러 번 바꿨음에도 격차는 더욱 커진 것으로 보인다”며 “초등학교 때부터 지역의 우수 학생들을 각 지역에 고르게 머물게 할 정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임우선 imsun@donga.com·김수연 기자}
“아니, 그래도 명색이 정부가 실시하는 설문조사 아닙니까. 그런데 ‘빽’도 안 되더라고요. ‘빽’도.” 지난해 여름쯤이다. 과학계 인사로부터 갑자기 “‘빽’도 안 됐다”고 외치는 전화가 걸려왔다. 들어보니 당시 교육부가 대입제도 개편과 관련해 교육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다던 온라인 설문조사를 두고 하는 얘기였다. 그는 “설문 과정에서 앞 문항 응답을 수정하려 해도 시스템 설계가 잘못돼 ‘빽(back·뒤로 가기)’이 안 되더라”며 “‘제출’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수정도 안 되게 만든 설문지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교육부의 정보기술(IT) 역량에 의구심을 갖게 된 첫 번째 에피소드였다. 머지않아 두 번째 사건이 생겼다. 이번에도 설문조사가 문제였다. 작년 6월 교육부는 ‘학교생활기록부 신뢰도 제고’를 국민참여 정책숙려제의 첫 과제로 정하고 1만 명 규모의 모니터링단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을 했다. 그런데 진행 과정에서 한 사람이 횟수와 상관없이 여러 번 중복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설문 결과 자체가 왜곡될 수 있는 중대한 시스템 결함이었다. 문제가 불거지자 교육부는 “(오류를 알았지만) 시간이 없어 진행했다”며 “모니터링단 명단이 있으니 응답자의 신상 내용을 하나하나 비교해 중복 참여는 걸러내겠다”고 해명했다. 시간이 없다면서 어느 세월에 로그기록 1만 개를 비교할지…. 애초에 시스템을 제대로 짰으면 안 해도 됐을 ‘삽질’이었다. 교육부의 세 번째 ‘IT 구멍’은 기자가 직접 체험했다. 지난해 11월 유치원 지원을 위해 열린 ‘처음학교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하루 종일 먹통인 사이트를 목격한 것이다. 사이트에 접속하면 친절하게도 ‘서비스 접속 대기 중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예상 대기시간 13분 25초, 고객님 앞에 6436명 대기 중’ 같은 ‘정확한’ 분석이 나왔다. 그런데 막상 두 눈을 부릅뜨고 십수 분을 기다리니 ‘이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새하얀 화면만 나왔다. 안 열릴 거면 기다리게 하지나 말든지…. 간장 종지만 한 교육부의 서버 용량에 결국 이날 전국 학부모의 인내심은 터져버렸다. 사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달 들어서는 교육당국 홈페이지에서 중등교사 임용시험 필기시험 점수와 등수 정보가 사전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이트에 접속해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면 비공개 정보인 과목별 점수와 등수를 누구나 볼 수 있었다. 사이트 관리를 맡은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은 언론 보도가 나온 뒤에 “실수”라며 “문제를 바로잡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해명 후에도 여전히 정보가 노출되는 사실이 알려져 재차 망신을 당했다. 교육부가 이 모양인데 교육청이라고 잘 돌아갈까. 지난주 세종시에서는 교육청 시스템 오류로 109명에 이르는 고교 신입생이 이중 배정되는 사고가 났다. 재배정 과정에서 학생 414명의 배정 결과가 달라졌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지금도 반발 중이다. 학생들의 학교 배정부터 학교 추첨, 성적 산정까지…. 사실상 모든 교육정보가 전산 처리되는 시대지만 교육당국의 IT 시스템은 용량, 기술, 관리 등 모든 면이 허술해 보인다. 반복되는 사고를 보는 국민의 불안과 불신은 커질 수밖에 없다. IT 사고는 불거지기 전엔 알기 어려워 더욱 그렇다. 옛 어른들이 그랬다. 방귀가 잦으면 똥 싸기 쉽다고. 잦은방귀 같은 사고를 눈여겨보고 교육계 IT 관리 전반을 되짚어야 한다. 그래야 더 험한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imsun@donga.com}
수도권 상업고 3학년 이모 양은 다음 달 졸업을 맞는 게 두렵다. 지난해 4월부터 20여 곳에 취업 원서를 냈지만 모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졸업한 선배들은 전교생 320명 중 200명 넘게 취업했는데 올해는 120명 정도밖에 취업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선배들을 뽑은 기업 중 상당수가 올해는 아예 채용 공고조차 내지 않았다. 이 양은 “무기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기업들이 신입을 뽑을 여력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발표된 각종 취업 통계는 학력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사회로 진입하려는 모든 취업계층이 사상 유례없는 ‘취업 한파’를 겪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해 교육통계에 따르면 특성화고 취업률은 65.1%로 전년도(74.9%)보다 9.8%포인트나 급락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64.7%)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낮은 수치다. 대학 졸업자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교육부의 ‘2017년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취업통계조사’에 따르면 전문대·일반대·대학원 졸업자의 취업률이 일제히 하락했다. 전문대(69.8%)와 대학원(77.7%) 취업률은 3년간 이어져온 상승세가 꺾였고, 일반대 취업률(62.6%)은 2011년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았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2년째 취업에 도전하고 있는 양모 씨도 40군데에 취업 원서를 냈지만 아직까지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다. 그는 “경제가 나빠져 올해는 사람을 더 안 뽑을까 봐 너무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서울 4년제 주요 대학을 졸업한 이모 씨는 “좋은 학점에 높은 토익 점수, 대기업 공모전 다수 수상, 인턴 경력까지 웬만한 건 다 갖췄는데도 면접마다 ‘올탈(전부 탈락)’”이라며 “미래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 2014년 국내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유학을 다녀온 신모 씨는 귀국 후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3개월 동안 9곳에 지원했는데 모두 떨어져 3개월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연구소 보조로 일하고 있다”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대학원 진학 대신 그나마 취업이 나았던 2014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2019년 대한민국의 끝 모를 취업난 속에서 청년들은 묻는다. ‘우리는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에 진학해 무엇을 공부하든 도통 열리지 않는 취업시장 앞에서 청춘들은 속수무책인 것이다. 13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장기간 실업 상태에 있거나 일거리를 찾지 않는 인구는 250만 명을 넘어섰다.임우선 imsun@donga.com·최예나·최혜령 기자}
10일자로 전국 초등학교의 2019학년도 1학년 예비소집이 종료된다. 이제 초등학교 입학까지 남은 날짜는 50여 일. 이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 아이들의 원만한 초등생활을 도울 수 있을까? 교사들은 학업 준비보다 생활 습관 잡기,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긍정적 기대 갖기 등 생활적인 요소를 챙겨 보길 권한다. 남은 시간 관심을 기울일 주요 사항을 알아보자.● 늦잠 자는 아이라면 “7시 반에 깨워요” 사립초 등 일부 학교를 제외하면 요즘 초등학교의 등교시간은 대부분 오전 9시까지다. 수업 시작 전 차분히 학습 준비를 하고 친구들과도 대화하려면 적어도 8시 30∼40분에는 학교에 도착하는 게 좋다. 준비 시간을 1시간 정도 잡으면 7시 반 전후로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만약 이 시간보다 기상 시간이 늦는 아이라면 입학 때까지 매일 조금씩 시간을 앞당겨야 한다. 일찍 잠들 수 있도록 취침 시간을 앞당겨 정해 두는 것도 좋다.● 책가방 챙겨 보고 정리정돈 연습을 학교에 입학하면 책과 준비물, 알림장 등 스스로 챙겨야 할 것이 늘어난다. 문제는 초1 아이들에게는 가방을 싸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다. 미리 책가방을 구입해 책과 필통을 넣을 자리를 정해주고 선생님의 유인물을 챙겨올 얇은 플라스틱 파일을 넣어주면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 추후 학교에서 알려주는 준비물을 구입한 뒤에는 색연필 한 자루까지 모든 물건에 이름을 적도록 한다. 자신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강조한다. 학교 교실에 있는 개인 사물함도 제대로 정리할 수 있도록 습관을 잡아줘야 수업시간에 혼란을 겪지 않는다.● 엄마·아빠와 미리 걸어 보는 안전한 등하굣길 입학 전 엄마·아빠 등 보호자가 아이와 함께 학교 가는 길과 집에 오는 길을 걸어 보면 좋다. 어느 길이 안전한지 알려주고, 위험요인은 없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한다. 오가는 길에 생길 수 있는 돌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눠 본다. 학교로 가는 길이 멀다면 길에 있는 큰 건물이나 표지판을 반복해서 인지시켜 아이가 길 찾기에 익숙해지도록 돕는다.● 마음 편히 화장실 가기 연습 초1의 경우 40분 수업을 한 뒤 10분간 쉬는 시간을 갖는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닐 때와는 달리 정해진 쉬는 시간에 용변을 해결해야 하다 보니 배변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가 많다. 긴 줄을 서 기다리는데 스트레스를 호소하거나 제때 용변을 해결하지 못해 수업 중 실수하는 상황도 생긴다. 아이들이 되도록 쉬는 시간 중 용변을 해결하되 급할 경우 부끄러워하지 말고 손을 들어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도록 일러주면 좋다.또 초등학교 화장실은 요즘 아이들이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재래식 변기가 있는 곳도 다수다. 양변기에 익숙하다 보니 쪼그려 앉는 데 불편을 느끼거나 발이 빠지기도 한다. 방향을 바꿔 앉거나 물 내리는 법을 모를 수 있으므로 미리 알려줄 필요가 있다. 휴지와 물티슈 등을 사용해 스스로 뒤처리를 할 수 있게 미리 연습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자아이들의 경우 치마나 딱 붙는 바지보다는 쉽게 내리고 올릴 수 있는 편안한 옷을 입히는 것이 좋다 ● 젓가락질부터 우유팩 따기까지 급식 적응하기 학교 급식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때보다 매운 음식이 나올 수 있다. 김치 등을 남기거나 편식하지 않도록 집에서 미리 지도한다. 학교에서는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곳이 대부분이므로 젓가락질 연습도 해보도록 한다. 급식으로 나오는 우유나 요구르트 등을 스스로 딸 수 있도록 우유팩 입구 벌려 보기, 요구르트 뚜껑 따기도 시켜 본다. 식사를 빨리 마친 아이들은 남는 점심시간에 놀이를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친구들과 비슷한 속도로 밥을 먹으면 좋다.● 친구와 선생님에 대한 예절 일러두기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면 먼저 소리 내 인사할 수 있도록 반복해 지도한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때보다 많은 친구들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므로 나와 다른 친구를 받아들이고 서로 배려하도록 가르친다. 최근에는 여러 학교에서 크고 작은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는 만큼 친구를 고의로 소외시키거나 놀리는 것, 괴롭히는 것은 폭력임을 분명하게 일러줘야 한다. 평소 짓궂은 표현이나 욕을 사용하는 아이라면 입학 전 반드시 엄격하게 가르쳐 습관을 고친다. 평소 화가 나면 몸부터 반응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소극적인 아이일 경우 친구를 때리거나 가만히 참지 말고 자신의 감정 표현을 ‘올바른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하게 일러준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교육부가 국정으로 발행해 온 초등 3∼6학년 사회, 수학, 과학 교과서를 민간 출판사들이 집필하는 검정 체제로 바꾸기로 하면서 교육현장은 물론이고 교과서 시장까지 출렁이고 있다. 교과서 가격 상승과 참고서 시장 팽창을 우려하는 목소리와 함께 출판사의 영업 경쟁에 학교와 교사들이 몸살을 앓을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7일 교육계에 따르면 최근 출판업계는 교육부의 초등 교과서 검정화 방침에 따라 관련 준비에 들어갔다. 교육부가 이미 지난해 가을 출판업계에 검정화 계획을 시사했고, 이에 일부 출판사들은 대표 집필진 선점을 위해 교수급 저자와 가계약을 맺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새로 열린 초등 검정교과서 시장을 잡으려는 출판사들의 경쟁이 치열할수록 유명 집필진 섭외부터 삽화 강화, 컬러 지면 확대에 이르기까지 외형상 ‘눈에 띄는’ 교과서를 만들기 위한 업체들의 비용 투자는 커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국정교과서에 비해 검정교과서 값은 오를 수밖에 없다. 인천 A초교 교장은 “학부모가 돈을 내든, 교육청이 교과서 값 인상분을 보전하든 결국 국민 돈을 써야 한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고 말했다. 초등 검정교과서 가격 및 공급 안정을 위한 정부 대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출판업계에선 벌써부터 2014년 있었던 ‘교과서 대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당시 교과서 품질 경쟁이 벌어지면서 출판사들은 투자 비용 증가를 이유로 1년 만에 중고교 검정교과서 값을 평균 74%나 올렸다. 그러자 정부가 강제로 ‘가격 인하’ 조치를 내렸고, 출판사들이 집단 반발해 교과서 공급이 끊기는 ‘품절 사태’가 빚어졌다. 새로 열릴 초등 교과서 시장과 함께 참고서, 문제집 시장도 커질 가능성이 높아 업체 간 과당경쟁으로 인한 학교 현장의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지역 B고 교장은 “청탁금지법 시행 이전에는 출판사들이 교사에게 대놓고 술을 사는 등 로비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교사 입장에선 영업사원들을 일일이 응대하고 교과서를 비교해 선정하는 것 자체가 업무 부담”이라고 전했다. 고교 참고서 시장은 이미 EBS 위주로 짜여 출판사들이 사업을 할 여지가 적은 데 반해 초등 시장은 ‘블루오션’인 것도 경쟁 심화 요인으로 꼽힌다. 서울 C초교 교장은 “만약 학교가 D사의 교과서를 쓰면 학생들은 참고서와 문제집도 D사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며 “출판사들도 교과서보다 3, 4배 큰 참고서 시장을 잡기 위해 일선 학교의 교과서 선정 영업에 공을 들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검정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념 편향성을 두고 교육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날 한국교총은 “역사 교과서 논쟁을 볼 때 사회 과목의 이념화 논란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라며 “이에 따른 혼란은 학교와 학생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좋은교사운동 등 진보 교육단체들은 “검정교과서를 넘어 자유 발행제의 단계적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정반대의 목소리를 냈다.임우선 imsun@donga.com·조유라 기자}
교육부가 올해부터 초중고교의 검정 교과서를 심사할 때 심사진이 집필진에게 수정을 ‘지시’할 수 없도록 관련 규정을 변경한 것으로 3일 확인됐다. 이에 따라 심사 과정에서 오류나 편향성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수정 ‘요청(권고)’만 할 수 있다. 지난해까지는 심사진이 수정을 요구하면 출판사가 반드시 이를 반영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집필진이 수정을 거부해도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 교육부는 또 지금까지 정부 중심의 국정 교과서 형태로 발행해 온 초등학교 3∼6학년 사회, 수학, 과학 교과서를 민간 출판사가 발행하는 검정 교과서로 전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초등 주요 교과서의 국정 체제를 깨는 것, 또 교육과정 개정과 무관하게 교과서를 새로 만드는 것 모두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교육부는 올해부터 전환 작업을 시작해 초등학교 3, 4학년은 2022년부터, 5, 6학년은 2023년부터 검정 교과서를 사용하게 할 방침이다. 교육부는 “미래 혁신교육을 위해서는 유연한 심사를 통해 다양한 교과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교육계에서는 너무 급작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특히 초등 사회 교과서마저 정치 편향성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검정 교과서 심사 완화’와 ‘초등 교과서 검정화.’ 진보교육계가 줄기차게 요구해 온 핵심 사안이다. 진보진영은 “국가 주도의 교과서 발행·심사는 더 이상 시대와 맞지 않는다”며 “빠른 사회 변화와 다양한 가치를 반영할 수 있도록 교과서 제작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펴 왔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검정 교과서의 좌 편향성을 문제 삼아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교과서 검정 영향력을 줄이라’, ‘초등 사회 교과서도 검정화하라’는 진보 측 요구가 커졌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반영해 국정과제로 점진적 교과서 자율발행제 도입을 내걸고 ‘교과서의 민주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심의기준 대폭 완화-‘모험’ 지적도 3일 교육계에 따르면 교육부는 최근 교과서 심사진에 올해부터 심사 방식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검정 교과서 심사 제도를 단순화해 1, 2차로 분리돼 있던 본심사를 하나로 통합하는 한편 심사진의 수정 ‘지시’를 ‘요청’으로 바꿔 집필진의 판단에 따라 수정을 거부해도 심의를 통과할 수 있게 된 게 골자다. 기존에는 각 출판사가 검정 심사에 통과하기 위해 심사진의 수정 지시·권고를 반드시 반영했다. 교과서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심사진이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2020년 학교에 배포될 새로운 중3 검정 교과서를 심의 중”이라며 “출판사나 집필진의 부담은 줄었는데 심사 쪽에서는 기존과 다른 시행계획이 내려와 당혹해 했다”고 말했다. 과거 심사 경험이 있는 한 교육계 관계자는 “정치적 가치가 충돌하는 사회과 과목은 물론이고 수학이나 과학처럼 오류 없는 지식 전달이 중요한 과목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집필진에게 자유를 보장한다며 정부가 교육적 모험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과학계 인사는 “진화론과 창조론이 있는데 창조론자들이 창조론 위주로 교과서를 집필하고 맞다고 생각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교과서가 그냥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검정 ‘다양성’ vs 국정 ‘안정성’ 초등 3∼6학년의 사회, 수학, 과학 교과서를 검정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교육계 의견이 엇갈린다. 검정 교과서 확대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단일한 국정 교과서에 비해 여러 출판사가 펴내는 검정 교과서가 질적으로 우수할 것이라고 본다. 교육부는 “검정 교과서는 국정 교과서에 비해 권당 개발 투자비용이 2∼3배 높고, 여러 출판사가 경쟁하는 구조라 학부모들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일본 등 다른 여러 나라 역시 검정 교과서 체제”라며 “교사들의 질이 전반적으로 높고, 여러 교수학습 자료를 쓰려는 의욕이 높으며, 교육과정 결정권이 교사에게 있는 3박자가 맞아떨어지면 검정 교과서의 효용성이 높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국정 교과서 집필 경험이 있는 A 교수는 “교사들의 역량이 제각각인 현실에서 국정 교과서마저 없으면 수업 내용이 천차만별일 가능성이 있다”며 “미국에서도 이로 인해 교육격차 등 부작용이 나타난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집필진은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은 핵심 개념 위주인데 검정 교과서가 여러 종 나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차라리 국정 교과서를 핵심 개념 위주로 가볍게 만들고 교사들이 활용할 수 있는 교수 자료를 풍부하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 초등교육 정치색 갈등 우려 무엇보다 교육계에서는 초등 교과서의 검정화 과정에서 초등교육마저 정치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한다. 출판사별 정치적 색채나 학습량 정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 과목에 대한 우려가 크다. 사회 과목에는 중고교의 역사 과목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 과정처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유) 민주주의’ ‘6·25 남침’ 등 미세한 단어 하나하나를 둘러싼 갈등이 재연될 수 있다. 초등학교 검정화 과목에 수학과 과학이 포함된 것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 과목은 진보교육계가 ‘학습량이 많고 어렵다’며 문제를 제기해왔던 대표적인 과목이다. 교육계의 한 관계자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가 아직 현장에 모두 적용되지도 않았는데 심의기준을 바꾸고 또 새 교과서를 만들라는 꼴”이라며 “정권 스케줄에 맞춰 급해도 너무 급하게 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임우선 imsun@donga.com·김호경 기자}
교육부가 현재 국정교과서 체제로 발행되고 있는 초등학교의 사회와 수학, 과학 과목 교과서를 검정체제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2일 확인됐다. 초등학교의 국정교과서 발행 체제를 깨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전환 작업은 당장 올해부터 시작해 초등학교 3, 4학년은 2022년부터, 5, 6학년은 2023년부터 검정 교과서로 공부하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교육계 일각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마저 정치 논쟁에 휘말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특히 사회 교과서를 검정화하는 과정에서 지난 정권에서 큰 논란이 됐던 역사교과서의 정치 편향성 문제가 다시 불거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2일 교육부에 따르면 교육부는 지금까지 정부 주도로 발행해 온 초등학교의 국정교과서를 검정체제로 일부 전환하기로 하고 최근 관련 작업에 착수했다. 1차 검정화 대상은 초등학교 3~6학년의 사회, 수학, 과학 과목이다. 교육부는 이달 중 초등학교 교과서의 검정화 계획을 발표하고 올 한해 검정화로의 체제 전환 작업을 추진해 2022년부터 3, 4학년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검정교과서를 확대해 나갈 방침으로 알려졌다. 교육부 관계자는 “그간 교육계에서 국가 주도의 교과서 발행이 시대와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왔다”며 “현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인 고교교과서 자유발행제 도입에 발맞춰 초등학교 교과서 발행도 국정보다 좀 더 자유를 주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자유발행제는 검인정 교과서보다도 정부의 승인과정을 대폭 줄여 교과서 출판사나 각 사별 집필진의 자체 판단 권한을 크게 늘려주는 제도다. 교육부는 “교과서의 다양성을 확대할 수 있는 제도”라며 “탈 국정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교육계에서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자칫 교과서의 자율화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지난 정부가 검정 교과서의 좌편향성을 문제 삼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정치적 논쟁이 발생했던 만큼,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의 검정화 과정에서 초등학교 교과서마저 혼란에 휘말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계의 한 관계자는 “역사 교과서 논쟁 당시 진보진영에서 ‘초등학교 교과서도 검정화하라’고 요구한 것을 교육부가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며 “사실상 ‘박근혜 지우기’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올해부터 서울지역에서 치러지는 고교 검정고시의 응시수수료가 없어진다. 서울시교육청은 2019년 시행하는 제1회 검정고시부터 1인당 2만 원인 고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응시 수수료를 면제하기로 했다고 1일 밝혔다. 이에 따라 매년 서울에서 고졸 검정고시에 지원하는 약 8500명이 혜택을 볼 것으로 전망된다. 시교육청은 1971년 제정된 서울시 초중고교 검정고시 수수료 징수 조례에 따라 그간 검정고시 수수료를 징수해 왔다. 그러나 교육복지 확대 차원에서 2010년 중학교 검정고시 수수료를 없앴다. 이어 2014년 저소득층에 한해 고졸 검정고시 수수료를 면제했다. 시교육청은 “현재 서울의 1인당 검정고시 응시 수수료가 전국 최고 수준이라 지난해부터 면제를 검토해왔다”며 “지난해 12월 시의회에서 폐지안이 가결돼 수수료를 없애게 됐다”고 설명했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한 해를 시작하며 신께 기도합니다. 올해는 우리가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다치거나 잃지 않게 해 주소서. 지난해 서울 상도유치원에 다니던 122명의 아이들을 구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붕괴가 반나절만 늦거나 빨랐어도 우리는 그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영영 못 볼 뻔했습니다. 어른들의 나태함과 시스템의 방만함이 결합된 우리 사회는 위험의 연속입니다. 졸업여행을 간 아이들이 숙소의 빠진 보일러 배기관에 목숨을 잃습니다. 매일 가는 학교의 천장에서는 석면가루가 부서져 내려 아이들의 폐포에 박힙니다. 길을 걷는데 끓는 물이 솟구쳐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불완전함의 연속인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 신의 가호를 바라나 천운만을 기대하지 않고 어른들 모두 각자가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도록 이끌어 주소서. 보일러공이든, 공사업자든, 자치구 직원이든, 정부의 정책 입안자든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어떤 식으로든 나와 내 가족, 이웃을 위한 일임을 깨닫길 원합니다. 올해는 아이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소서. 과거 취재한 한 중학교 보건교사의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전교생이 600명인데 많을 땐 하루에 100명의 아이들이 보건실에 와 두통약, 배탈약을 받아간다고, 알고 보면 진짜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아프다고 말하고, 어디가 아프냐는 위로를 듣고, 약이라도 하나 받아가고 싶어서 오는 아이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중 제일 무서웠던 내용은 ‘정작 부모들은 아이들이 이렇게 아픈 줄 모른다’는 말이었습니다. 올해는 우리가 ‘모르는 부모’가 되지 않게 하소서. 부모들에게 자녀와 깊이 교감할 시간적 여유와 정서적 각성, 대화의 지혜가 허락되길 원합니다. 가정에서 위로받기 어려운 아이들도 많습니다. 언젠가 만난 한 어려운 지역의 고교 교감은 ‘올해 우리 학교에 전학 처분을 받아 옮겨온 아이 14명 중 12명이 결손 가정’이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더 특별히 기억하소서. 부모가 아니더라도 올해는 친구, 선생님, 이웃, 하다못해 책 속의 어느 누구라도 만나 이들이 위로받고 기대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도움을 주는 이가 되게 하소서. 우리나라가 지난 10년간 가장 많은 아이들을 잃은 원인은 대형사고나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병들어 가는 아이들이 어마어마하다는 이 불편한 진실을 우리가 용기 내 직시하고 답을 찾길 기도합니다. 지난해 서울대어린이병원 복도에 걸려 있던 장기 환아들의 시화 작품 중 ‘피자’에 대한 작품을 기억합니다. 병원 간식으로 나온 피자 한 조각이 너무 먹고 싶은데, 먹을 수가 없어 바라만 봐야 했던 아이의 속상한 마음, 꼭 나아서 먹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시였습니다. 올해는 그 아이가 마음껏 피자를 먹을 수 있도록 건강해지길 기도합니다. 아프고 장애가 있는 아이도 어려움 없이 공부하고 꿈꿀 수 있는 제도가 갖춰지길 원합니다. 우리는 종종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실은 걱정 없이 둘러앉아 피자를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더한 행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부모가, 선생님이, 학교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마음과 재능을 존중해 줄 수 있길 원합니다. 새로운 학교생활을 맞는 모든 아이들에게 사랑이 많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길 기도합니다. 마음이 통하는 선한 친구들이 넘치길 바랍니다. 선생님을 믿고 지지하는 학부모가 늘고 애쓰는 선생님이 더 큰 힘을 얻는 신뢰의 학교를 응원합니다. 2019년 아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imsun@donga.com}
“한 학년이 다 끝나가는 11월에야 점자책이 왔더라고요. 이미 중간고사 때 시험 친 범위인데 그때서야 책이 온 거예요. 제발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1년 내내 사정했지만 소용없었어요.”(서울 A맹학교 학부모 명모 씨) 시각장애가 있는 중2 아들을 둔 명 씨는 지난달 택배기사에게서 대형 손수레를 빌렸다. 며칠 전 집으로 배달 온 라면박스 6개 분량의 책을 곧바로 내다버리기 위해서였다. 박스 안에 든 책은 그가 지난해 12월 국립특수교육원 측에 점자화를 부탁한 참고서 6권이다. 명 씨는 “시각장애 학생들이 요청하면 교육부가 EBS 문제집이나 참고서 등을 점자화해 주도록 돼 있지만 수업 진도에 맞춰 제때 점자책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내버려야 할 책을 뒤늦게 찍어 보내는 게 예산 낭비이자 탁생행정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토로했다. 지난달 시청각 중복장애 학생의 대학수학능력시험 도전기 보도(동아일보 11월 19일자 A2면 참조) 이후 장애학생의 학습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국내 장애학생들은 학교 교육의 기본이 되는 책마저 구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특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학교와 청각장애인을 위한 농학교 모두에서 소외된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의 학습권은 더욱 열악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헬렌 켈러’들을 위한 입법이 추진되는 것으로 30일 확인됐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이명수 위원장은 현재 별도의 장애 유형으로 규정돼 있지 않은 시청각 중복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일명 ‘헬렌켈러법’을 이르면 내년 1월 발의할 예정이다. 국내 시청각 중복장애인은 1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임우선 imsun@donga.com·김윤종 기자}
“시각·시청각장애 학생들이 겪는 상황은 매년 비슷해요. 교과서는 여름방학이 다 돼야 받아요. 참고서는 지문과 문제가 뚝뚝 잘린 채 분책이 돼서 와요. 수학 참고서는 오·탈자투성이라 아예 문제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고요.”(맹학교 학부모 A 씨) 한국의 특수교육 제도는 과거보다 나아졌다지만 국내 시각·시청각장애 학생들에게 ‘학습권’이란 여전히 먼 얘기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학업의 기본이 되는 점자로 된 책이 없어서다. 국내 시각·시청각장애 학생들은 교과서조차 비장애인 학생들과 같은 시기에 제공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규정상 정부가 교과서와 참고서를 점자화해 제공해야 하지만 실제 점자책을 받기까지는 최장 1년이 걸린다. 왜 그럴까. 30일 점역(點譯)업계에 따르면 일반 책을 점자로 만들려면 텍스트파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파일의 불법 유통 및 저작권 침해를 우려하는 국내 출판사들은 민간 점역업체는 물론이고 국가기관인 국립특수교육원에조차 텍스트파일을 제공하지 않는다. 특수교육원 관계자는 “공공기관인 EBS마저 EBS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집 텍스트 파일 전부를 받는 것은 어렵다”며 “이 때문에 모든 책 내용을 일일이 손으로 친 다음 점자책을 만들다 보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점자책 제작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용도라면 출판사는 반드시 책의 텍스트파일을 점역업체에 제공해야 한다. 미국처럼 지식재산권 침해 규정이 엄격한 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에선 전체 출판물의 10%가량이 바로 점자책으로 제작돼 시각·시청각장애인들에게 제공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국내 관련법에선 출판사들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디지털파일 제공을 강제하지 않아 점자화가 매우 어렵다. 점역업체 B사 대표는 “학부모들은 점자책이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항의하는데, 출판사들은 파일을 주지 않으니 점역업체만 미칠 노릇”이라며 “출판사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점역 환경이 이처럼 열악하다 보니 올해 초 특수교육원이 두 번이나 관련 입찰을 진행했으나 응찰한 업체가 없어 결국 B사와 수의계약을 맺어야 했다. 매년 전년도 10∼12월 중 이뤄지는 다른 공공기관의 점역사업 입찰과 달리 교육부 입찰이 매년 신학기에 이뤄지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한 점역업체 관계자는 “하다못해 자치구 소식지도 새해가 시작되기 전에 입찰을 하는데 교육부 입찰은 3월에야 진행된다”며 “이때부터 교과서와 참고서 점역을 시작하니 시각·시청각장애 학생들에게 늦게 제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사는 구두수선공 김성기 씨(72)는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자신의 소형 승용차에 시동을 건다. 그가 향하는 곳은 차로 10분 남짓 떨어진 은평구 불광동의 한 다세대 빌라. 빌라 앞에는 검은 배낭을 멘 한 중년 남성이 서 있다. 시청각 중복장애인인 박영수(가명·56) 씨다. 김 씨가 내려 박 씨의 손을 잡으면 아무런 표정이 없던 박 씨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앞을 보지도, 들을 수도 없는 박 씨를 데리러 온 김 씨 역시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농아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만지며 대화한다. 이를 ‘촉수화’라고 한다. 김 씨가 박 씨를 차에 태우고 매주 금요일마다 찾는 곳은 서울 동작구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열리는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의 자조 모임 ‘손잡다’다. 지난해 4월 시작된 ‘손잡다’는 국내에 두 개뿐인 시청각 중복장애 자조 모임 중 하나다. 김 씨는 “수년 전 농아인 모임에서 박 씨를 처음 만났는데 눈까지 보이지 않아 늘 집에만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며 “도움을 주고 싶어 매주 ‘손잡다’ 모임에 데려다주고 있다”고 말했다. 일주일의 대부분을 15평 남짓한 집 안에서 보내는 박 씨에게 김 씨는 자신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다.○ 어둠에 갇힌 시청각 중복장애인의 삶 박 씨는 어릴 적 귀를 다쳐 농아인이 됐다. 간단한 수화로 가족과 의사소통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뒤 점차 시력을 잃는 유전병이 발현해 10년 전부턴 앞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자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에 갇혔다. 아내는 떠났고 자녀들이 일을 나갈 때면 그는 늘 혼자였다. 가끔 바람이라도 쐬고픈 마음에 집 밖으로 나서 보지만 화를 당하기 일쑤였다. 박 씨의 딸은 “아빠가 오토바이에 치이거나 차바퀴에 발이 깔리는 등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당했다”며 “주변을 더듬다가 오해를 사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 장애인인 걸 알고는 뒤통수를 후려치고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백화점 판매직원으로 일하는 박 씨의 딸이 근무 도중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뛰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박 씨의 집엔 온갖 종류의 상해로 병원을 다녀온 영수증이 한 묶음 쌓여 있다. 박 씨는 하루 8시간 일상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사’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손잡다’ 모임에 나가면서 비로소 활동 지원 제도를 알게 됐다. 뒤늦게 활동지원사를 신청했으나 심사 기간만 수 주가 걸렸다. 심사 담당 직원이 여러 차례 그의 집을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지만 그는 ‘띵동’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극도의 고립감과 고독감 속에 살아가는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인 ‘손잡다’ 모임은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다. ‘손잡다’에서는 서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10여 명이 모여 촉수화로 소통한다. 이 모임은 서울맹학교를 졸업하고 숭실대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청년 시청각 중복장애인인 조원석 대표(26)가 이끌고 있다. 조 대표는 ‘손잡다’에 온 시청각장애인들에게 직접 점자와 수화를 가르쳐주고 각종 복지 혜택을 안내한다.○ 사각지대에 놓인 한국의 ‘헬렌 켈러들’ 흔히 시청각장애를 ‘시각+청각’ 장애로 생각하지만 시청각 중복장애는 시각이나 청각장애와는 전혀 다른 가장 심각한 중증 장애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국내 장애인 관련법에선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을 위한 별도의 규정이나 맞춤형 제도가 없다. 김종인 나사렛대 재활복지대학원장은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농학교 중 한 곳을 선택해 찾아가지만 어디서도 제대로 된 교육이나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통상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는 청각 위주의 교육과 서비스가 이뤄지고 청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시각 위주의 교육이나 서비스가 제공되는데, 시청각 중복장애인은 양쪽 어느 쪽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은 법률로 시청각 중복장애를 별도 유형의 장애로 규정해 지원하고 있다. 헬렌 켈러를 계기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시청각장애인 교육 및 지원 제도를 갖춘 미국에서는 시청각장애아가 태어나면 전문특수교사가 가정을 방문해 촉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소통하도록 교육한다. 국립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인이 스스로 쇼핑을 하고 요리를 하는 등 자립할 수 있도록 생활교육을 제공한다. 내년에 입법이 추진되는 한국판 ‘헬렌켈러법’(가칭)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담길 것으로 전망된다. 법안 초안은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맞춤 의사소통 체계 수립 △활동지원사와 시청각통역사 양성 △시청각장애인들이 참여하는 조직의 결성 및 지원 △시청각장애인의 발굴 △별도의 교육 정책 강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김 원장은 “한국판 헬렌켈러법은 이들을 밖으로 불러내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최근 3년간 전국 초등학교 462곳이 석면 해체 및 제거 공사를 진행 중인 건물 내에서 돌봄교실과 방과후학교, 병설유치원을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올해 2월 서울 인헌초등학교에서 제거 공사가 완료된 후에도 석면 잔존물이 검출돼 개학이 연기되는 소동을 빚었지만 교육부의 부실 관리로 제2, 제3의 인헌초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감사원은 27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초중고교 학교 환경 개선사업 추진 실태’ 감사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석면 해체·제거 공사 기간에 돌봄교실 등을 운영한 전국 학교 2222곳을 확인해 보니 돌봄교실 200곳, 방과후학교 130곳, 병설유치원 132곳이 석면 작업장과 같은 건물에서 아이들을 돌봤다. 1군 발암물질인 석면은 한번 들이마시면 체내에 있다가 10∼40년 잠복기를 거쳐 악성 폐질환을 일으켜 ‘조용한 살인자’로도 불린다. 공기 중에 날려 신체에 유입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을 석면 제거 공사 현장과 철저히 격리해야 하지만 서울 시내 일부 초등학교는 학부모들에게 공사 기간에 돌봄교실이 운영된다는 사실조차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 교육부 담당자들이 학교 건물에 석면이 사용된 위치를 표시하는 ‘석면지도’가 부실하게 작성된 사실을 알고도 재검증 등 조치를 마련하지 않고 덮은 것으로도 나타났다. 석면지도 표본조사 결과를 용역업체를 시켜 삭제하도록 한 것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표본조사 결과는 석면건축물 전체 학교와의 상관관계를 제시하기 어렵다’는 문안을 추가해 용역 결과를 임의로 수정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교육부 장관에게 석면 조사 검증 용역 최종보고서를 삭제, 수정하도록 한 담당자 2명에 대해 정직 처분의 중징계를 요구했다. 실제 감사원이 4월 2일부터 5월 21일까지 감사 기간에 석면지도 정확성을 재검증하기 위해 석면 해체·제거 공사가 완료된 1076개 초등학교 중 142개교를 대상으로 점검을 벌인 결과 29개 학교(20.4%)의 교실, 복도, 자료실 등에서 석면이 검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교육부는 감사원 발표에 대해 “석면지도 오류는 2016년 3월에 시도교육청에 조치를 주문했으나 현장에서 적극적인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면이 있다. 조속한 시일 내에 석면으로부터 안전한 교육환경이 조성될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해명했다.신나리 journari@donga.com·임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