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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준이 어떻게, 얼마나 등장할까”로 국내 팬들의 기대를 모았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영화 ‘더 마블스’가 8일 베일을 벗었다. 박서준은 주인공 캡틴 마블(브리 라슨)의 남편인 알라드나 행성의 얀 왕자 역을 맡았다. 소문대로 단 세 장면에 짧게 등장하지만 마블 영화로 할리우드에 눈도장을 찍게 돼 향후 해외 진출이 주목된다. 마블 최초의 흑인 여성 감독이자 최연소 감독인 니아 다코스타(34·사진)는 7일 화상 간담회에서 “팬데믹 기간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2020년)를 보게 됐고 박서준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이어 “얀 왕자 캐릭터에는 박서준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어 캐스팅하게 됐다”며 “(얀 왕자는) 출연 분량은 적지만, 임팩트가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박서준은 굉장히 재밌는 사람이고 현장에 좋은 에너지를 가져오는 사람이다. 엄청난 재능이 있는 배우”라고 덧붙였다. 한국 배우가 마블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년)의 수현, ‘이터널스’(2021년)의 마동석에 이어 박서준이 세 번째다. 다코스타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신예 감독이다. 그는 10대 때 한국 문화에 푹 빠져 ‘내 이름은 김삼순’(2005년) ‘소울메이트’(2006년) ‘커피 프린스 1호점’(2007년) 등 한국 드라마뿐 아니라 한국 예능도 즐겨 봤다. 그는 “유재석을 제일 좋아한다”며 “한국 드라마, 영화, 음악 등 장르를 불문하고 푹 빠져들었다”고 했다. 그가 그린 ‘더 마블스’는 시원하게 질주하는 롤러코스터 같다. 짧지만 강렬하고, 속도감이 넘친다. 러닝타임이 105분으로 역대 MCU 영화 중 가장 짧다. 영화는 고독한 캡틴 마블이 오랜 친구의 딸인 모니카 램보(티오나 패리스), 자신의 열혈팬이자 ‘미즈 마블’인 여고생 카멀라 칸(이만 벨라니)과 엮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세 사람은 캡틴 마블에게 복수하려는 크리족 리더 다르-벤(자위 애슈턴) 때문에 초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서로의 위치가 뒤바뀐다. 다르-벤은 자신의 행성 할라를 재건하기 위해 얀 왕자(박서준)가 사는 행성 알라드나의 바닷물을 약탈하려 하고, 캡틴 마블은 법적 남편인 얀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알라드나 행성으로 향한다. 세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 위치가 바뀌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해프닝이 재미를 준다. 세 사람이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며 한 팀으로 변해가는 모습도 잔잔한 감동이 있다. 하지만 모니카 램보와 카멀라 칸의 서사가 영화에서는 처음 소개되는데, 전개 속도가 빨라 이해하기 버거운 지점들이 있다. MCU가 세계관을 확장하면서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부분이다. 영화는 각각의 서사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는 세 히어로의 팀워크와 오락성에 중점을 두는 방식을 택했다. 빌런인 애슈턴 역시 ‘타노스’만큼의 깊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박서준이 연기한 얀 왕자는 알라드나족이 노래로 대화한다는 설정 때문에 제대로 된 대사가 없다.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데 그 설정이 웃기지도, 멋지지도 않고 다소 어정쩡하다. 출연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주연 캐릭터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도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눈을 사로잡는 건 우습게도 고양이 구스와 그 새끼들이다. 위기에 빠진 우주 정거장 대원들을 고양이들이 구해낸다는 설정은 귀엽고 기발하다. MCU 다섯 번째 페이즈(큰 스토리라인을 단계별로 구분한 것)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마블이 새로운 창작자들과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법에는 구멍이 나 있다. 이제 내가 그 구멍을 메우겠다. 지금부터 널 풀어준 법을 원망해. 내가 지옥을 보여줄게.”(‘비질란테’ 김지용)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는 ‘나쁜 놈’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단죄하는 것,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상상이다. 낮에는 모범적인 경찰대 학생이지만 밤이면 범죄자들을 찾아가 직접 심판하는 다크히어로물 8부작 드라마 ‘비질란테’가 8일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된다. 경영 악화로 한국 철수설까지 돌았던 디즈니플러스가 드라마 ‘무빙’의 성공 이후 야심 차게 내놓은 기대작이다. 8일부터 매주 수요일 2회차씩 공개될 예정이다. 서울 강남구 한 호텔에서 6일 열린 ‘비질란테’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유지태(조헌 역)는 “제가 ‘배트맨’ 시리즈 광팬이다. 이제는 한국형 액션 (다크)히어로가 나올 때가 됐다. 그게 바로 ‘비질란테’”라며 “‘비질란테’가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 ‘박쥐’(배트맨)를 잡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원작은 3억7000만 뷰를 기록한 김규삼 작가의 동명 웹툰이다. 원작 만화 팬이 많아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연출을 맡은 최정열 감독은 “웹툰에서 임팩트 있었던 사건들 위주로 구성해 긴장감을 살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방대한 원작 분량을 8부작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건이 담기지 못한 데 대해 최 감독은 “전개가 더 빨라지면서 순식간에 시청자들을 빨아들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비질란테’가 풍자하는 건 ‘빽 없는 자들에겐 단호하고, 빽 있는 자들에겐 물러터진’ 이 시대다. 주인공 김지용(남주혁)은 모범 경찰대생이지만 마음속에는 분노가 가득하다. 어릴 적 지용의 엄마는 그의 눈앞에서 폭행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낮은 형량을 받고 사회로 돌아온다. 여전히 반성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다니는 범인을 만난 지용은 그를 직접 단죄하고, 범죄자들을 직접 심판하는 ‘비질란테’로 활동을 시작한다. 현재 군 복무 중인 배우 남주혁은 이번 작품으로 첫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 매일 복싱장에 가서 훈련했다고 한다. 긴 팔다리로 펼치는 액션 연기도 눈길을 끌지만 범죄자를 단죄하는 데 망설임 없는 그의 서늘한 눈빛이 더욱 인상적이다. 유지태는 ‘비질란테’를 쫓는 광역수사대 수사팀장 조헌 역을 맡았다. ‘무시무시한 괴력의 소유자’라는 원작 설정을 따르기 위해 몸무게를 20kg 늘렸다. ‘범죄도시3’에서 빌런 주성철로 깜짝 놀랄 연기 변신을 보여준 배우 이준혁은 ‘비질란테’를 추종하는 재벌 2세 조광옥 역을 맡았다. 배우 김소진은 ‘비질란테’를 보도하며 성공에 대한 욕심을 채우는 기자 최미려를 연기했다. 판사 출신 작가 문유석이 크리에이터로 참여해 각본에 의견을 보태고 감수를 도왔다. ‘비질란테’는 디즈니플러스가 ‘무빙’ 이후 내놓은 웹툰 원작 드라마다. ‘무빙’을 통해 유입된 무료 구독자들이 재구독 여부를 결정할 시점에 공개하는 작품이어서 디즈니플러스도 홍보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지난달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린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중앙에는 영화 대신 ‘비질란테’ 초대형 포스터가 걸려 눈길을 끌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반주 없이 낮은 음성으로 담담히 부른다. 성악적 기교도, 힘도 뺀 빈 공간에 꽃망울이 터져 나온다. 세계적 성악가 베이스 연광철(58·사진)이 생애 첫 한국 가곡집 ‘고향의 봄’을 냈다. 마지막 트랙에 실린 ‘고향의 봄’은 특별히 피아노 반주 없이 그의 목소리로만 녹음했다. 듣는 이들이 어릴 적 시골길을 걸으며 흥얼거렸던 추억을 떠올리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서울 강남구 풍월당에서 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연광철은 “유럽에서 지낸 30년 동안 그들의 작품, 음악 속에서 살면서 그것을 해석하려고 노력했지만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이번 한국 가곡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신이 한국 문화 속에서 자랐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길을 걸으며 느낀 정취, 자연의 아름다움이 저절로 떠올랐다. 외국에서 저는 이방인으로 그들의 음악을 했지만, 우리 가곡을 부를 땐 온전히 제 것을 부르는 것 같았다. 굉장히 편안하고 즐거웠다”고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광철은 충북 충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에 성악의 길을 택했다. 부친이 소를 판 돈으로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예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 전속 단원으로 10년간 활동했고 독일 바이로이트축제극장, 영국 코번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등 세계 주요 오페라 무대에 올랐다. 2018년 독일에서 최고의 성악가에게 수여하는 궁정가수 ‘카머젱거’ 칭호를 받았다. 그런 그에게도 한국 가곡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클래식 음반 매장이자 복합문화공간 풍월당이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아 그에게 한국 가곡집을 제안했다. 그는 “소리와 발성 같은 음악적 부분보다는 시를 낭송하는 자세로 불렀다”며 “우리말이 굉장히 노래하기 좋은 언어다. 작곡가들이 음성학적으로 더 많이 공부하면 충분히 예술적인 가곡들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이번 가곡집에는 ‘비목’ ‘청산에 살리라’ ‘진달래꽃’ 등 18곡이 담겼다. 책 형태의 가사집 안에 CD가 붙어있는 형태로 제작됐다. 가사를 영어와 일본어, 독일어로 번역 수록해 해외로도 수출할 예정이다. 표지는 지난달 작고한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 ‘묘법 No.980308’을 후원받아 만들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제가 처음 한국에 온 게 영화 ‘4월 이야기’(1998년) 때였어요. 그 뒤에 ‘러브레터’(1999년)를 정식 개봉하게 되면서 한국에 또 한 번 왔습니다. 제가 신인 감독이었는데도 굉장히 열광적인 팬들이 많이 계셨어요. (한국 팬들의 사랑은) 이후 제 인생에 굉장히 강력한 힘과 지지가 돼주었습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60·사진)은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3일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팬들에 대한 감사의 말부터 꺼냈다. 그는 1일 개봉한 신작 ‘키리에의 노래’로 한국을 찾았다. 주인공이 일본 홋카이도 설원에서 하염없이 외치는 대사 “오겐키데스카(잘 지내시나요)”가 유행어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은 ‘러브레터’를 비롯해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5년), ‘하나와 앨리스’(2015년) 등으로 그는 국내 팬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키리에의 노래’는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유증으로 평소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지만 노래는 잘 부를 수 있는 ‘키리에’(아이나 디 엔드)가 거리의 가수로 거듭나는 음악 영화다. 지난달 열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이와이 감독은 “노래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주인공이 말을 잘 못한다는 설정은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했다. 이와이 감독의 고향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큰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 센다이시다. 그는 대지진 이듬해 자신이 쓴 소설을 바탕으로 이번 영화를 연출했다. 영화엔 센다이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이 등장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도시가 큰 피해를 입어 충격을 받았다. 지진이 일어난 후 언젠가 그곳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번 영화에서 가장 집중한 건 음악이다. 거리에서 버스킹하는 장면을 실감 나게 화면에 담기 위해 현장 녹음본을 영화에 그대로 사용했다. 그는 “영화의 일부가 공연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주려 했다”고 말했다. 이와이 감독 특유의 몽환적인 색감과 영상미에 키리에의 노래가 더해지면서 서로를 치유해 나가는 청춘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다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긴 탓에 간간이 흐름이 끊어진다는 느낌을 지우긴 어렵다. 키리에를 연기한 아이나 디 엔드는 일본 아이돌그룹 ‘비슈(BiSH)’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다. 목을 긁는 비명 같은 특이한 창법이 키리에의 상처받은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가 작업에 참여한 6곡이 영화 OST에 수록됐다. 수록곡 ‘혼자가 좋아’는 아이나 디 엔드가 곡을 쓰고 이와이 감독이 가사를 썼다. 1991년 드라마 ‘본 적 없는 내 아이’를 선보이며 올해로 데뷔 32년이 된 이와이 감독은 한국 콘텐츠계가 부럽다고 했다. 그는 “한국 콘텐츠는 웹툰을 실사 영화로 만드는 작업이 활성화돼 있는등 영화와 만화가 잘 융합돼 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에 비해 실사 영화 팬들의 수가 매우 적고 예산 역시 적다. 실사 영화를 좀 더 잘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동아일보와 인제군문화재단, 여초서예관이 공동 주최한 제9회 여초서예대전 시상식이 4일 강원 인제군 여초서예관에서 열렸다. 여초서예대전은 서예가 여초 김응현 선생(1927∼2007)의 서법정신을 기리는 대회다. 이날 시상식엔 부문별 대상 수상자인 △문용기 씨(성인부·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상금 500만 원) △허은희 씨(기로부·동아일보 회장상·상금 200만 원) △김효경 양(중고등부·인천서창중 1학년·인제군수상·상금 100만 원) △최진우 군(초등부·서울하늘숲초 6학년·인제군의회 의장상·상금 50만 원)과 우수상 이상 수상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최상기 인제군수와 이춘만 인제군의회 의장, 김대현 여초서예관 명예관장, 이일구 여초서예대전 운영위원장 등이 참석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대한예수장로회 통합 교단이 여성 목회자 안수를 시작하는 데 앞장선 이연옥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명예회장이 3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고인은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28·29·31·32대)을 지냈다. 유족으로 동생 이연신 경민교회 장로, 조카 홍문종 전 국회의원 홍인종 장신대 교수 홍지연 경민대 총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발인 7일 오전 8시. 02-2227-7500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역사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울프슨상을 수상한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가 제2차 세계대전을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를 중심으로 풀어냈다. 당시 6대 해군 강국이었던 영국과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독일이 바다에서 벌인 전투와 군사 활동, 수송과 상륙작전을 월 단위로 상세하게 정리했다. 베스트셀러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저자가 2차대전에서 특히 바다에 천착한 이유는 미국 때문이다. 2차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건 해양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2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한 건 미국과 영국이 바다를 통해 끊임없이 전투원과 군수품을 실어 날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해군력과 생산성 혁명이라는 두 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군수품이 전선에 마를 틈 없이 흘러들었고, 연합군이 승기를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레이테만과 노르망디에서의 승리로 이어졌다. 저자는 미국이 빠른 속도로 생산력을 끌어올린 것은 경제 활황과 그에 따른 세금 인상, 이를 통한 강력한 재정 지원이 바탕이 됐다고 분석한다. 2차대전 이후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해군이 소멸되면서 해양에서의 균형이 무너졌고, 미국의 해군력을 쫓아올 나라는 없어졌다. 그러나 이후 원자폭탄이 개발되면서 해양 장악이 곧 세계 제패를 의미했던 기존의 질서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분량이 방대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함께 2차대전의 기승전결과 해양 패권의 흥망을 다각도로 통찰한다. 2차대전의 분수령마다 전쟁 당사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도 꼼꼼하게 짚었다. 해양화가 이언 마셜의 삽화 53점이 수록돼 있어 눈이 즐겁다. 마셜은 평생 군함과 바다, 전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책에 담긴 군함 그림들은 모두 정확한 고증을 거쳤다. 한 점 한 점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 같다. 생생한 그의 수채화는 당시 해군력의 압도적인 규모를 실감케 한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복제인간과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인간이 오히려 살생에 거리낌이 없고, 복제인간이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누가 더 인간답다고 할 수 있을까. 2일 개봉한 영화 ‘시뮬런트’가 던지는 질문이다. 영화는 거대한 기술 기업 넥스세라가 복제인간 ‘시뮬런트’를 대량 생산한 미래가 배경이다. 복제인간들은 겉보기에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 인간을 해칠 수 없고, 자신을 소유한 주인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원칙에 따른다. 인간이 ‘셧다운’을 외치면 즉시 전원이 차단된다. 하지만 때로 불량품이 발생해 주인에게서 탈출하는 시뮬런트들이 생겨나게 되고, 특수 요원 케슬러(샘 워딩턴)가 이들을 체포하러 다닌다. 어느 날 케슬러는 탈출한 시뮬런트의 흔적을 쫓다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자율성을 가진 시뮬런트를 만난다. 몇 년 동안 도망 다닌 이 시뮬런트 ‘에즈메’(알리시아 산스)는 직접 손으로 생각이 담긴 일기를 쓰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등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셧다운’을 외쳐도 전원이 꺼지지 않는다. 자신을 체포하려는 케슬러를 공격하기까지 한다. 케슬러는 에즈메가 해킹당했다고 확신하게 되고, 용의자인 해커 케이시(시무 리우)를 추격한다. 이 추격전에는 에반(로비 아멜)과 페이(조대나 브루스터) 부부도 연루돼 있다. 이들 부부는 사고를 당하거나 병들어 더 이상 육체가 기능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자신들을 본뜬 시뮬런트를 제작해뒀다. 그러다 에반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페이는 남편의 기억을 그대로 저장시킨 시뮬런트를 가동시키지만 진짜 남편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에반을 셧다운시키고 싶어 한다. 에반은 케슬러를 만나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듣게 되고, 그와 함께 도망 간다. 영화 내용 자체가 기시감이 들긴 하지만 인공지능(AI)이 화두인 시대에 시의적절한 주제다. 인간과 비인간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저한테도 아침이 올까요?” “어떻게 내내 밤만 있겠습니까. 곧 아침도 와요.” 정신병동에서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환자의 질문, 그리고 수간호사 효신(이정은)이 담담히 건넨 답이다. 정신병동에 배치받은 간호사 다은(박보영)이 마음이 아픈 환자들을 만나 함께 치유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12부작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3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다. 원작은 동명의 네이버 웹툰이다. 서울 종로구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 서울에서 1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이재규 감독은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 중 절반은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며 “내 병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이 감독은 드라마 ‘다모’(2003년) ‘베토벤 바이러스’(2008년), 영화 ‘완벽한 타인’(2018년) 등을 연출했다.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성공적인 연출 필모그래피를 쌓은 그이지만 이번 작품은 특별했다. 드라마에는 공황장애, 양극성장애(조울증), 사회불안장애 등 현대인들이 약하게나마 경험해봤을 만한 정신질환들이 등장한다. 이런 증상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사람과 환경에 의해 발현되고, 따뜻한 관심으로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감독은 “드라마를 보면서 많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할 거다. 저도 촬영하면서 너무 펑펑 울어서 보영 씨가 휴지를 갖다 준 적도 있다”고 했다. 정신병동 이야기이지만 너무 무겁지 않고 시청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에 분홍, 주황 등 동화 같은 색감으로 병동 세트장을 만들었다. 박보영이 연기한 다은은 마음이 따뜻한 간호사다. 그는 실제로 10년 동안 소아 중환자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며 간호사들과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박보영은 “힘들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가 그런 과정을 쉽고 편안하게 안내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정신병동의 문턱도 낮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이정은이 맡은 수간호사 효신은 병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이정은은 “저 역시 한때 카메라 울렁증을 앓았다. 멘털 케어에 대한 드라마가 나오게 돼 기쁘다”고 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미국 투어로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공연 ‘테일러 스위프트: 디 에라스 투어’ 실황을 한국에서 볼 수 있게 됐다. CJ CGV는 3일 영화 ‘테일러 스위프트: 디 에라스 투어’를 단독 개봉한다고 밝혔다. 영화는 스위프트가 올 3월 미국 애리조나에서부터 시작해 전국을 돌며 총 52회 진행한 투어 공연의 실황을 담았다. 투어 공연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약 1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투어 지역마다 경기가 살아나자 ‘스위프트노믹스’(스위프트와 경제의 합성어), ‘테일러노믹스’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스위프트는 이번 투어를 마치고 개인 누적 자산 11억 달러(약 1조5000억 원)로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스위프트는 2006년 데뷔해 그래미 어워드를 세 번 수상한 싱어송라이터다. 영화는 그의 대표곡 ‘You Belong With Me’ ‘Love Story’ ‘Shake It Off’ 등 총 40여 곡의 무대로 구성됐다.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 지난달 13일 먼저 개봉한 영화는 지난달 29일까지 2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 등 41개 극장에서 상영하고 아이맥스관에서도 볼 수 있다. 1일 기준 CGV용산아이파크몰 아이맥스관의 주말(3∼5일) 첫 시간대 상영표는 매진됐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타깃을 향한 연민도, 분노도 없이 건조한 표정으로 남자는 맞은편 건물을 응시한다. 남자의 직업은 킬러. ‘킬링’을 향한 모든 단계는 수천 번을 연습한 춤사위처럼 자연스럽다. 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세팅돼 있고, 타깃을 기다리며 남자는 수련하듯 요가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타깃을 놓치고, 보복 요청을 받은 다른 킬러들이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무참히 폭행한다. 남자는 보복 지시를 내린 사람을 찾기 위해 한 명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나를 찾아줘’(2014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년), ‘하우스 오브 카드’ 시리즈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신작 ‘더 킬러’다. 10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고, 일부 극장에서는 지난달 25일부터 상영 중이다. 영화 ‘300’(2007년), ‘엑스맨’ 시리즈, ‘노예 12년’(2014년)으로 국내에서도 팬층이 두꺼운 마이클 패스벤더가 킬러 역을 맡았다. 패스벤더는 첫 사살에 실패한 후 동요하는 킬러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영화 내내 그의 표정에서는 초조함과 태연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배우 틸다 스윈턴이 패스벤더에게 보복당하는 킬러로 등장한다. 10분이 안 되는 짧은 장면이지만 패스벤더와 팽팽하게 맞서는 그의 연기력이 돋보인다. 핀처 감독은 주특기인 긴장감 넘치는 편집과 세련된 미장센을 이번에도 마음껏 뽐낸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삽입곡도 몰입감을 높인다. 다만 서사는 다소 식상하다. ‘소중한 것을 빼앗긴 킬러가 복수에 나선다’는 익숙한 이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패스벤더를 주인공으로 한 한 편의 스타일리시한 뮤직비디오 같다는 느낌도 준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연예계 마약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이선균, 유아인 등 배우와 가수, 작곡가까지 마약류 투약 정황이 드러나며 연예계를 파고든 마약 실태가 충격을 안겼다. 영화 ‘기생충’(2019년),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년)을 비롯해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연이은 성공으로 전 세계에서 큰 사랑을 받는 ‘K컬처’에 악재로 작용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선균-유아인이 날린 제작비만 940억 원 이선균이 마약류 투약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팬데믹으로 인한 타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한국 영화계는 더욱 침체되는 분위기다. 올해 개봉할 예정이던 이선균 주연의 제작비 200억 원 영화 ‘탈출: PROJECT SILENCE’는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다. ‘탈출…’은 5월 칸영화제에 초청받은 뒤 해외 판매에도 주력하고 있었지만 이 역시 모두 중단된 상태다. 제작비 약 90억 원을 투입한 영화 ‘행복의 나라’도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을 하고 있었으나 올스톱됐다. 드라마 ‘노 웨이 아웃’은 첫 촬영을 앞두고 있었지만 이선균이 하차하면서 대체할 배우를 찾고 있고, 그가 주인공인 ‘Dr.브레인 시즌2’는 제작이 불투명해졌다. 앞서 올해 3월 마약류 투약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유아인 역시 영화 ‘승부’, ‘하이파이브’와 넷플릭스 시리즈 ‘종말의 바보’ 공개를 앞두고 있었지만 모두 무기한 연기됐다. 세 작품의 제작비는 총 650억 원이다. 이선균, 유아인 두 배우가 출연했다가 개봉이 연기된 작품 제작비는 약 940억 원에 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연이은 악재에 영화계 패닉 영화계는 팬데믹 이후 좀처럼 매출이 회복되지 않는 상황에서 마약 사태까지 터져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영화산업 전체 매출액은 팬데믹 이전(2017∼2019년 각 상반기 평균)의 72.5%였고, 관객 수는 57.8%에 그쳤다. 특히 영화계 대목으로 꼽히는 추석이 있던 9월에도 영화산업 전체 매출액은 팬데믹 이전 같은 기간의 52.9%로 절반 수준이었다. 올해 추석에 맞춰 개봉한 대작 한국 영화 3편(‘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거미집’ ‘1947 보스톤’)도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에 대한 투자가 이전만큼 회복되지 않고 있는데 마약 사태까지 벌어져 걱정이 크다”며 “연말에도 관객 수가 회복세로 돌아서지 못할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투자·제작사 관계자는 “마약 관련 루머만 돌아도 긴장하고 있다”며 “우리 작품에서는 부디 (마약 이슈가) 터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폭탄 돌리기 하는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외신도 이번 사태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 버라이어티지는 “오스카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의 스타 이선균이 마약류 투약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며 “이선균은 ‘기생충’으로 미국 배우조합상도 받은 유명 배우”라고 보도했다. 미국 할리우드리포터도 이선균 소식을 전하며 “한국 연예계에서 최근 마약 관련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배우들의 일탈이 한국 영화·콘텐츠업계의 해외 투자에도 리스크가 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배우 개인의 책임을 실효성 있게 묻기는 쉽지 않은 실정이다. 작품마다 계약서가 제각각이고, 위약금 조항 유무와 배상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의 출연료에 비례해 위약금 조항을 넣지만 수백억 원의 콘텐츠 투자금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한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사업이어서 문제를 일으킨 배우의 소속사와 법적 공방을 벌이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돌 그룹, 한 명만 추락해도 도미노 붕괴 이선균과 함께 작곡가 등도 수사 대상에 오르자 가요계 역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아이돌 그룹은 멤버 한 명의 마약류 투약이 팀 활동에 큰 제약으로 작용한다. 2019년 YG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 아이콘의 리더 비아이가 마약 사건으로 입건된 후 탈퇴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리더이자 프로듀싱 멤버였던 비아이의 탈퇴 후 아이콘의 팬덤 규모나 활동 범위는 현격히 축소됐다. 그룹 위너 출신 남태현은 필로폰 투약 혐의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작곡가이자 가수 돈스파이크는 필로폰을 투약하고 엑스터시를 건네 지난달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K콘텐츠의 위상과 영향력이 단시간에 높아지면서 연예인들도 그에 맞는 책임감을 가져야 했지만 실제로는 부족했다”며 “몇몇 사람에 의해 K콘텐츠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지 않으려면 연예인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제대로 인식하고 자기 관리를 엄격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82)이 은퇴를 번복하고 10년 만에 내놓은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25일 개봉했다. 홍보 활동을 일절 하지 않았지만 개봉 하루 만에 25만5000명이 관람했고, 예매율은 60%에 달할 만큼 관심이 뜨겁다. 영화는 미야자키 감독이 자기 방식대로 쓴 한 편의 아름다운 자서전이자, 이 세계에서 찰나를 공유하고 있는 ‘그대들’에게 건네는 질문이다. 영화는 데일 듯 생생한 시뻘건 불길로 시작한다. 일본 도쿄에서 공습 경보가 울리고 화마는 11세 소년 마히토(목소리 연기 산토키 소마)의 엄마를 집어삼킨다. 화재 이후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기무라 다쿠야)는 마히토와 함께 시골로 거처를 옮기고, 처제인 나쓰코(기무라 요시노)와 재혼한다. 엄마를 잃은 상실감과 아버지를 향한 서운함, 이모가 새엄마가 된 데 대한 복잡한 감정으로 마히토는 남몰래 마음속 악의를 쌓아간다. 어느 날 커다란 왜가리 한 마리(구니무라 준)가 날아와 “죽은 엄마가 살아있으니 나를 따라 오라”고 말한다. 마히토는 엄마를 찾아 시공이 다른 세계로 빠져든다. 영화는 전개가 친절하지 않고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은유로 가득하다. 미야자키 감독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됐다. 제목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동명의 소설에서 따왔는데, 미야자키 감독이 어릴 적 어머니가 선물한 책이라고 한다. 미야자키 감독 역시 마히토처럼 1941년에 태어났고, 전쟁 공습을 피해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영화에 등장하는 큰할아버지는 5년 전 별세한 선배 애니메이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에게서 모티브를 얻었다. 왜가리 남자는 미야자키 감독의 동료이자 친구인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를 묘사했다. 컴퓨터그래픽(CG)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손으로 그려 제작에만 7년에 걸렸다. 일렁이는 불꽃과 나풀거리는 종이의 질감, 꿀렁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생선 내장 등 생동감이 감탄을 자아낸다.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위험하고, 더러운 곳이더라도 친구들이 있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마히토에게 큰할아버지는 “너만의 탑을 쌓으라”고 조언한다. 평생을 바쳐 지브리라는 탑을 쌓은 노(老)감독이 여든두 해를 살고 얻은 답같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배우 수지(29)에게선 드라마 ‘드림 하이’(2011년) 속 통통 튀는 고혜미의 모습도, 영화 ‘건축학 개론’(2012년)에서 보여준 해사한 서연의 모습도 겹치지 않았다. 차분히 말을 고르는 그에게선 드라마 ‘안나’(2022년)에서 뿜어낸 서늘함이 느껴졌다. 밝고 해맑은 아이돌에서 어느덧 자신의 연예계 생활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는 배우가 된 수지를 26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수지는 20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이두나!’에서 아이돌 두나 역을 맡았다. 동명 웹툰이 원작인 이 드라마에 수지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찰떡같은 배역”이라는 반응과 “제멋대로에 퇴폐미가 있는 두나 역에 밝고 청순한 느낌의 수지가 잘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갈렸다. 수지 스스로는 두나와 큰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는 “대본을 볼 때부터 감정 기복이 크고 제멋대로인 두나가 이해됐다. 이 역할을 연기해보고 싶었다. 두나가 안쓰럽고, 아무래도 (실제 저와) 같은 상황을 겪었던 캐릭터라 더 마음이 쓰였다”고 했다. 두나는 인기 아이돌 ‘드림스윗’의 메인 보컬이지만 스트레스로 노래가 나오지 않아 도망치듯 은퇴한다. 수지 역시 걸그룹 ‘미쓰에이’로 활동하다가 7년 만에 해체한 경험이 있다. 수지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두나가 가진 경계심이었다. 수지는 “두나는 자기를 알아보는 것 같은 사람에게 더 경계심을 갖고 날카로워진다. 극 중 어떤 남자가 자기 일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하는데 두나가 자기를 찍는 줄 알고 흠칫 놀라는 장면이 있다. (제) 현실과 정말 비슷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담배를 피우는 두나에게서는 외롭고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겨울 장면에서는 추위마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무뎌진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수지는 ‘안나’에서 거짓말을 거듭하며 망가져 가는 캐릭터로 연기력을 재평가받았다. 그는 연기 발전에 대해 “(2020년) 영화 ‘원더랜드’를 찍으며 연기가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수지는 자신의 모습 같은 두나를 향해 말했다. “네가 지금 그렇게 아파하는 순간들, 지나고 보면 그런 순간들 때문에 더 빛나고 있을 거야.”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정지영 감독(77)이 4년 만에 신작 ‘소년들’로 돌아왔다. ‘부러진 화살’(2012년), ‘블랙머니’(2019년) 등 실화에 천착해 온 그답게 ‘소년들’ 역시 1999년 벌어진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다음 달 1일 개봉하는 영화는 공권력이 가장 부정하게 작동할 때 약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을 묵직하게 전달한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서 동네 친구 세 명이 슈퍼 강도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복역한 사건이다. 이들은 복역 후 수사 당시 경찰의 폭행에 못 이겨 거짓 진술을 했다고 밝혔고, 재심을 청구해 17년 만인 2016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2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 감독은 이 사건을 영화 소재로 택한 이유에 대해 “그냥 지나가선 안 될 사건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세 소년이 감옥에 가는 데 묵시적으로 동조한 건 아닌지,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한번 다시 잘 들여다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사건 1년 후인 2000년과 17년 후인 2016년이 교차되며 흘러간다. 2000년 완주군에 새로 부임한 베테랑 형사 황준철 반장(설경구)에게 “삼례 나라슈퍼 사건의 진범을 알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다. 사건을 파 보던 그는 조작 수사 중심에 경찰대 출신 엘리트 형사 최우성(유준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황 반장은 사건을 제대로 되돌려 놓기 위해 애쓰지만 ‘조직을 음해한다’고 비난받으며 이후 궂은 부임지를 전전하게 된다. 그러다 17년이 지나 삼례 3인방이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도울지 고민한다. 영화 속 황 반장은 가상의 인물이고, 수사를 조작한 형사 최우성과 검사 오재형(조진웅)은 실존 인물이다. 사건 주임검사는 지난해 삼례 3인방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가해자들이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정 감독은 “사건이 다 해결될 때까지 사과가 안 이뤄졌다. 세월이 지나서 한 사과가 진정성이 있느냐”고 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고맙다는 말/축하한다는 말/미안하다는 말을/시처럼 적으면서/살아온 날들/…/나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또 내일도/그냥 그냥 기뻤다고 고백하리라//한 장의 러브레터로 살다 갔다고/누군가 그렇게 기억해주길 바란다고!”(‘꿈 일기-카드를 사며’에서) 이해인 수녀의 신작 시집이다. 저자는 여는 말에서 “많은 분들이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며 위로받고 싶어해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적도 있었다”고 진솔하게 고백한다. 2008년 대장암 선고를 받은 저자는 수십 차례 항암치료를 받았고, 류머티즘도 앓고 있다. ‘위로의 시인’이라 불리는 그이지만 육체의 고통과 늙어감 앞에서 가라앉는 마음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하늘은 푸른데/나는 아프다//꽃은 피는데/나는 시든다/…/내가 아픈 것을/사람들이/보지 말았으면 좋겠다”(‘통증 단상1’에서) 그러나 일상에서 감사와 행복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꽃에게 나비에게 나무에게/그리고 함께 사는 이들에게/이름을 불러주며/새삼 행복하다”(‘이름 부르기’ 중) “좀 어떠세요?/내가 다른 이에게/인사할 때는/사랑을 많이 담아/이 말을 건네리라/다짐하고 연습하며/빙그레 웃어보는 오늘”(‘좀 어떠세요?’에서) 저자는 “제 아픔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쉽진 않았으나 그런 노력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을 때에만 조금 더 좋은 위로자가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고 했다. 따스한 햇볕 같은 그의 시가 아픈 이들의 그늘진 마음을 덥힐 것 같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가수 겸 배우 수지(본명 배수지)가 드라마 ‘안나’(2022년)에 이어 극 중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넷플릭스 드라마 ‘이두나!’로 돌아왔다. 수지는 최고의 아이돌 그룹 출신으로 돌연 은퇴하고 숨어 버린 두나 역을 맡았다. 그룹 미쓰에이로 활동했던 경험을 십분 발휘한 맞춤옷 같은 역할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19년), ‘굿 와이프’(2016년)를 만든 이정효 감독이 연출했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18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수지는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두나에게 마음이 쓰이는 부분이 많았다”며 “저에게도 두나같이 차가운 면이 있는데 대중은 잘 모를 것 같다. 그런 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두나!’는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 ‘드림스윗’의 메인 보컬이었던 두나가 평범한 대학생 원준(양세종)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청춘 로맨스물이다. 두나는 활동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은퇴를 결심하고 셰어하우스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원준을 만난다. 9부작으로, 20일 넷플릭스에서 전체 공개된다. 네이버 웹툰 ‘이두나!-두근두근 누나리스트’가 원작이다. 까칠하고 경계심이 많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통을 극복하는 두나를 연기한 수지는 “제가 아이돌 시절이었을 때를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힘들었던 순간에 (그게 힘든 상황인지) 정말 모르기도 했다. 부정한 것 같기도 하다. 애써 밝게 넘어갔던 순간도 많았던 것 같다”며 “두나가 힘든 걸 마음껏 표출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 부럽기도 했다. 그런 부분이 공감이 됐다”고 했다. 드라마는 ‘아이돌 출신 수지’를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화려한 무대 위의 수지와 셰어하우스에 사는 수지를 보여주며 판타지를 자극한다. 드라마에서 아이돌 드림스윗이 무대에 서는 장면은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열린 ‘K콘’ 실제 공연 무대에서 촬영했다. 양세종에겐 제대 후 복귀작이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2016년)의 금수저 도인범 역으로 데뷔해 ‘사랑의 온도’(2017년),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2018년)로 사랑받은 그는 4년 만의 복귀를 앞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20세 초반 역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작품을 선택했다. 열 살 이상 어린 역할이라 수염 레이저 제모를 받고 반신욕과 마스크팩도 열심히 했다”며 웃었다. ‘로맨스의 장인’으로 불리는 이정효 감독은 “다른 세계에 살던 두 사람이 서로의 세계에 스며들면서 서로 알아가고 이해하다 하나가 되는 과정까지 그린 드라마”라며 “서툰 20대의 청춘, 추억,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성경에 쓰인 크기로 만든 현대판 방주가 이르면 내년 상반기(1∼6월) 한국에 설치될 것으로 전망된다. 실내 연면적이 1만6529㎡(약 5000평)에 이르는 이 방주는 네덜란드 건축가 요한 하위버르스(사진)가 2012년 공개해 주목받았다. 그는 분단 국가인 한국에 이 방주를 기증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겠다고 밝혔다. 17일 기독교·문화계 인사들로 구성된 ‘한국노아의방주유치위원회’(가칭)는 최근 하위버르스가 한국에 이 작품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지방자치단체 등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무로 만든 이 방주는 총 7층 구조에 길이 125m, 너비 29m, 높이 약 26m에 이른다. 무게는 3000t이다. 노아가 대홍수를 대비해 동물 암수 한 쌍을 실었다는 성경 기록을 따라 내부엔 얼룩말, 기린, 코끼리 등 동물 모형이 전시돼 있다. 성서박물관 등의 공간도 있다. 제작하는 데 6년이 걸렸고, 약 420만 달러(약 56억7000만 원)가 투입됐다. 방주가 한국에 오게 된 데는 하위버르스 의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위버르스는 지난해 1월 한국을 찾았을 때 경기 김포시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을 방문하는 등 남북 분단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것.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정박해 있는 방주를 바지선에 실어 한국까지 운송하는 데에 약 2개월 반가량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위원회는 “인천과 경기도의 몇몇 기초자치단체가 이 방주를 기증받아 설치할 수 있을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하위버르스를 한국에 초청해 19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노아의 방주를 만들게 된 과정과 한국에 기증하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머리를 길게 땋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이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서 내린다. 운전사는 모두 백인. 윤기 나는 양복과 값비싼 모자로 멋을 낸 이들을 백인들이 안내한다. 부유한 원주민들은 두세 배 비싼 돈을 치러야 물건을 구할 수 있고, 백인들은 이들을 등쳐 먹으며 생계를 유지한다. 백인들의 탐욕은 시간이 갈수록 도를 넘는다. 원주민 여성들을 유혹해 결혼한 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아내와 그 가족들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광기에 가까운 ‘인디언 사냥’이 시작된다. 192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주 페어팩스에서 원주민 ‘오세이지족(族)’에게 벌어진 실화를 그린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81)의 신작 ‘플라워 킬링 문’(원제 ‘Killers of the Flower Moon’)이 19일 개봉한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했다. 세 사람이 한 작품에서 뭉친 것은 처음이다. 영화는 제76회 칸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영화는 부유한 오세이지족 여성 몰리(릴리 글래드스톤)가 참전용사 어니스트(디캐프리오)를 만나며 시작된다. 전쟁에서 돌아온 어니스트는 페어팩스에서 부를 쌓고 있는 삼촌 헤일(드니로)의 집으로 향한다. 글도 잘 못 읽고 아둔하지만 잘생긴 그에게 헤일은 “택시 운전을 하면서 몰리에게 접근해 보라”고 조언한다. 어니스트는 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결혼에 성공하지만, 헤일은 몰리가 자매들과 유산을 나누는 것에 불만을 갖고 몰리의 주변 사람들을 차례차례 살해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을 각색했다. 봄은 보름달 아래서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지만, 키 큰 꽃들에 양분을 빼앗겨 먼저 핀 작은 꽃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는 터전을 침범한 백인들에게 살해당했던 오세이지족을 은유한다. ‘포레스트 검프’(1994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년)의 각본가 에릭 로스가 스코세이지 감독과 함께 각색했다. 몰리는 실존 인물이다. 오세이지족은 1870년대 원래 살던 캔자스주에서 쫓겨나 페어팩스에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내몰렸다. 이후 이곳에서 막대한 석유가 발견되고, 오세이지족들은 석유회사로부터 받는 로열티로 돈벼락을 맞았다. 그러나 이들의 재산을 노린 백인들에 의해 3년간 최소 24명이 살해되는 참사를 겪었다. 이 사건 조사를 시작으로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태동했다. 디캐프리오는 잔혹한 학살 현장에서 때로는 방관자가, 때로는 공범이 된 한 남자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드니로는 오세이지족의 친구를 자처하지만 돈에 눈이 먼 백인 기득권 남성을 실감 나게 연기한다. 두 사람의 배역에 다른 배우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몰리의 무력한 모습과 표정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오세이지족의 비극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러닝타임은 3시간 26분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관객들이 이 비극의 무게를 느낄 수 있도록 정말 제대로 다루고 싶었다”고 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신중함이 묻어났다. 입에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 ‘사랑’ ‘두려움’ 같은 단어들이 자주 흘러나왔다. 배우 조현철(36)이 연출한 첫 장편영화 ‘너와 나’가 25일 개봉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D.P.’(2021년)에서 탈영병 조석봉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가 7년 동안 작업한 결과물이다. 영화는 지난해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 초청돼 눈길을 끈 바 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12일 만난 그는 절규하던 조석봉이 상상되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대중의 평가보다는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고 위로를 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 ‘너와 나’는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여고생들의 이야기다. 세미(박혜수)는 하은(김시은) 앞에만 서면 웃음이 흘러나온다. 하은에게 모르는 전화가 오면 괜히 심술이 나고, 하은과 함께 하굣길 석양을 보며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 하루 중 제일 행복하다. 손꼽아 기다리던 수학여행을 앞두고 하은은 다리를 다치고, 어떻게든 하은이를 데려가고 싶은 세미는 하은에게 떼를 쓰기 시작한다.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여고생의 어지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꿈과 현실, 삶과 죽음 사이를 모호하게 오가는 연출 방식을 사용했다. 조현철은 “경계를 지우고 싶었다. 너와 나, 꿈과 현실, 과거와 지금, 남자와 여자의 사랑, 여자와 여자의 사랑 등 모든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는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세미는 꿈속에서 하은이 죽었다며 하은과 떨어져 수학여행을 가는 것에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영화 배경도 경기 안산이다. 조현철은 “2016년에 겪은 개인적인 사고를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세월호 참사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됐다”고 밝혔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